흥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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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군
興寅君
朝鮮의 王族
이름
이최응(李最應)
身上情報
出生日 1815年 2月 17日 ( 1815-02-17 ) (陰曆)
死亡日 1882年 6月 10日 ( 1882-06-10 ) (67歲) (陰曆)
死亡地 朝鮮 漢城府
父親 남연군
母親 郡夫人 餘興 閔氏
配偶者 貞敬夫人 安東 權氏(初吹)
貞敬夫人 連日 鄭氏(再娶)
貞敬夫人 安東 金氏(三聚)
子女 이재긍, 이희하

이최응 (李最應, 1815年 2月 17日 ~ 1882年 6月 10日 )은 朝鮮 後期의 王族, 政治人으로, 君號는 흥인군(興寅君)이다. 남연군 이區와 餘興郡夫人 餘興 閔氏의 셋째 아들이자 흥선大院君 의 바로 윗 兄이었다. 字는 洋白(良伯)이고 號는 山鄕(山響), 諡號는 孝헌(孝憲) 또는 衝益(忠翼), 문충(文忠)이었다. 本貫은 全州 이다.

興宣大院君의 親兄이었으나 그의 無視를 當했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흥선大院君 失脚 後 左議政, 世子府, 領議政 等을 지냈으며 統理機務衙門 總理大臣으로 開化政策을 推進했다가 유림과 갈등하였다. 그는 흥선大院君 의 鎖國政策에 反對하여 1880年 以後 美國 , 日本 과의 開港 政策에 積極 同調하였다. 1882年 (高宗 19) 6月 壬午軍亂 흥선大院君 의 使嗾를 받은 亂兵에게 민겸호 (閔謙鎬) 等과 함께 殺害되었다. 神道碑 門에는 高宗 이 語義를 보내 診療했으나 差度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나, 難病을 避해 逃走하다가 墜落死했다는 說도 있다. 한便 동생인 興宣大院君과의 感情對立으로 閔氏 政權의 側近으로 지냈는데, 민승호와 興宣大院君은 그를 利用해서 相對方의 情勢를 廉探하는데 利用하려 하였다. 別稱은 유유정勝 (唯唯政丞)이다.

生涯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1815年 2月 17日 漢城府 에서 肅宗 때의 政丞 남연군 이區와 민정중 의 4代孫 繕工監 監役 민경혁의 딸 郡夫人 여흥閔氏의 4男 1女 中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性品은 信徒悲鳴에 依하면 말數 적고, 좋고 싫음을 내色하지 않는 性品이라 한다. 홍순목 이 쓴 信徒碑文에 依하면 그의 性格은 '사람의 허물을 보면 반드시 덮어주고 또한 사랑하고 미워함을 말하지 않는' 性格이라 한다. 그는 興녕群 興완군 의 동생이자 흥선大院君 李昰應의 親兄이었으나, 그는 일찍부터 바로 아랫 동생 李昰應에게 번번히 無視當했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 여흥閔氏와 아버지 남연군, 두 兄이 일찍 死亡했지만 동생 흥선大院君 과의 關係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梅泉 黃玹 에 依하면 그가 無識하면서 欲心이 많아서 그랬다 한다.

동생 흥선大院君 李昰應은 自身보다 無能力하면서 欲心이 많던 셋째 兄 흥인군 이최응을 意圖的으로 無視했다. 흥선大院君 은 自身의 兄을 稀微한 사람이라면서 無視했고 흥인군은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이는 繼續되어 感情對立으로 發展했다. 뒤에 명성황후 는 그가 興宣大院君과 사이가 좋지 않은 點을 利用하여 그를 끌어들인다.

1829年 (純祖 29年) 1月 1日 흥인否定(興寅副正)李 되고 1830年 5月 6日 明善大夫 로 昇進한 뒤 흥인道政(興寅都正)으로 進封되고, 다시 軍으로 進封된 뒤 돈녕부 道政에 任命되었다. 이어 顯祿大夫 로 昇進하자 兄인 興녕群 보다 爵位가 높다는 理由로 스스로 辭讓하고 받지 않다가, 兄 興녕軍이 顯祿大夫로 昇進하자 그해 10月 20日 昭義大夫로 昇進하고, 軍의 品階를 받았다. 1834年 (純祖 34年) 11月 順調 가 죽자 그의 陵寢 造成 때 守陵官 (守陵官)으로 參與하였다. 憲宗 卽位 後 1835年 連奏 도감(練主都監) 守陵官에 任命되었으며, 남연군의 3年 喪을 마친 後 憲宗 年間에 同志情事로 淸나라 에 다녀왔다. 高宗 卽位 後, 1863年 12月 宗正卿 府使에 任命되고, 哲宗 의 殯殿에 宗戚執事(宗戚執事)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였다.

梅泉 黃玹 은 그가 물고기 (魚)와 魯나라 (魯)字를 제대로 區別하지도 못한다며 그의 資質을 疑心했지만, 그는 憲宗 때의 同志情事 淸나라 에 다녀오기도 했고, 高宗 때는 種種 過去 試驗 의 注視館으로 過去를 主管하기도 하여 論難의 餘地가 있다.

政治 活動 [ 編輯 ]

1864年 (高宗 1) 1月 永禧殿 製造가 되고 3日 뒤 司䆃寺 製造를 兼任하였으며, 2月 宗廟署 製造, 3月 尙衣院 製造에 任命되었다. 1865年 (高宗 2) 4月 景福宮 重建 때 營建都監 製造(營建都監提調)를 맡아보았으나, 흥선大院君 의 通商修交拒否政策에 反對하여 反目했다. 그해 9月 義禁府 判事 (義禁府判事), 扈衛大將 等을 歷任했다. 1866年 에는 益總意 玉冊文 玉寶 專門 製述官(玉寶篆文書寫官)李 되고, 같은 해 高宗과 明成皇后의 嘉禮 때 嘉禮都監 堂上이 되었다. 그해 義禁府 判事가 되었다.

1866年 3月 景福宮 重建 過程에서 火災가 發生, 전각과 材木이 消失되자 흥선大院君 은 大怒하여 흥인군과 이경하 를 投獄, 處刑하려고 했으나 重臣들의 挽留로 그만두었다. 當時 마감龍 木材에 기름漆을 하는 倉庫에서 불이 나 800餘 칸에 쌓아 둔 木材가 모두 타버려 工事가 中斷될 處地에 놓였다. 工事를 始作한지 1年 만의 일이었다. [1] 흥선大院君 은 工事 責任者인 이경하 와 흥인군을 불러 面前에서 크게 叱責하며 極刑에 處하도록 했으나 여러 朝廷 大臣들의 諫言으로 原狀 復舊의 責任만 지게 되었다. [1]

只今까지 伐木한 나무는 國有林에서 가져온 것이니 只今부터는 山 主人과 墓 主人의 許諾 與否는 相關하지 말고 私有林에서 伐木하도록 하라! [1]

그러나 이경하와 흥인군은 木材 가 더 以上 나올 곳이 없다며 오히려 罪를 請했다. 이에 興宣大院君은 크게 火를 냈다. [1]

그는 흥선大院君 當百錢 을 發行하자 "一文錢(一文錢)李 어찌 百聞展(百文錢)으로 쓰이겠는가? 다만, 一門의 價値로만 쓰일 뿐이다"라고 批判하였다. 한便 物件값을 치를 때 當百錢을 日戰으로 計算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換錢하는 過程에서 利益을 얻은 商人이 많았다 한다. 1872年 景福宮 重建 工事가 끝나자 敦寧府 判事로 轉職되었다. 그는 自身의 동생이 攝政이 되자, 동생의 權力을 憑藉하여 賂物을 받기도 했다. 興宣大院君은 그를 輕蔑했고, 議政府와 六曹에 흥인군에게는 어떠한 優待나 惠澤도 해주지 말라고 祕密裏에 指示하였다.

1873年 (高宗 10年) 흥선大院君 失脚 直前 閔氏 一派에 依해 護衛 大將(扈衛大將)에 任命되었다. 이어 判宗正卿 과 行販府使를 지냈다. 그해 11月 30日 부터 12月 4日 까지 中宮殿의 臨時 承候官(承候官)으로 特別 採用되었다.

1874年에는 矯正 類似 堂上(校正有司堂上)으로 璿源譜略 受精에 參與하였다. 그 뒤 判義禁府事, 扈衛大將을 거쳐 1874年 11月 흥선大院君 失脚 直後인 1874年 12月 議政府 左議政 에 올랐다.

以後 判宗正卿 을 거쳐 1875年 領宗正卿이 되고, 같은 해 世子府 (世子傅)에 任命되었다가 1878年 世子師가 되었다가 그해 겨울 議政府 領議政 이 되었다.

同時에 그는 文官이 아닌데도 特別히 문무과의 注視觀이 되어, 過去 試驗 을 主管하기도 했다.

1880年 12月 統理機務衙門 (統理機務衙門)李 新設되자 領議政이 總理大臣으로 官職이 바뀌자 初代 總理大臣에 올랐다. 이때 그는 個項 政策을 推進했으나 嶺南 儒林(儒林)의 彈劾을 當했다.

또한 그는 美國 과의 條約締結 때에도 積極 參與하였다. 한便 1875年 (高宗 12) 11月 그의 집에 疑問의 放火事件이 發生하였다. 사람들은 흥선大院君 을 疑心하였다.

그는 對美 個國 方針을 決定한 1880年 10月 의 中신會議에서 領議政으로서 會議를 主宰했다. [2] 그는 鎖國 政策에 批判的이었다. [2] 日本 에 갔던 修信使 김홍집 一行이 歸國하면서 황준헌 朝鮮策略 을 가져와 美國과 外交關係를 樹立해야 한다는 燕尾론(聯美論)를 主張하자 그는 " 美國 은 本來 怨讐의 나라가 아니니 書契(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年 9月 8日 燕尾論을 積極 受容하였다. 그의 主張에 高宗도 丙寅洋擾 , 辛未洋擾 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反省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美國 과의 條約締結을 決心하게 되었다. 1881年 1月 흥인군의 建議로 高宗은 지난해 6月 自身이 美國使臣을 拒否한 것을 後悔하는 文書를 톈진(天津)으로 가는 領選使, 留學生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淸나라 로 보냈다.

그의 開港政策에 危機意識을 느낀 嶺南 儒生들은 正祖 以後 國家의 重大事때마다 올린 嶺南萬人疏(嶺南萬人疏)를 올려 흥인군을 彈劾했다. 1881年 嶺南萬人疏 에서 그는 儒林의 聲討를 받았으며, 以後 홍재학(洪在鶴)은 이최응의 死刑을 主張하는 上疏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萬人疏를 逆謀로 보고 萬人疏에 對한 取調官(委官)이 되어 홍재학 絞首刑 에 處했다. 以後에도 그는 開港政策을 反對하는 儒林들을 處罰하였지만 以後에도 儒林들의 彈劾은 繼續되었고, 그는 辭退하고 敦寧府領事(敦寧府領事)로 轉任되었다.

興宣大院君과의 葛藤 [ 編輯 ]

興宣大院君은 自身의 兄을 못마땅히 여겨 政權을 掌握하고 있던 10年 동안에도 한 발짝 내딛을 땅조차 빌려준 적이 없어 흥인군은 以後에도 오랫동안 不快한 感情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3] 민승호 는 흥인군을 利用하여 興宣大院君의 動靜을 엿볼 審査로 親密感을 표했다. 그리고 명성황후 에게도 그 속 뜻을 說明했다.

흥인군은 無謀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고 못난 사람입니다. 大院君 10年 執政 期間 동안 부뚜막 아래 굶주린 개 같은 푸待接을 받았으니 그 속은 不滿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3] 그런 爲人인 만큼 조금 寬大하게 對해주면 分明히 感服하여 시키는 대로 雲峴宮 의 動態를 낱낱이 살펴 아뢸 것입니다. [4]

興宣大院君과 흥인군은 좀처럼 和解가 되지 않았다. 흥인군과 興宣大院君의 感情對立을 利用, 閔升鎬가 그를 利用하여 興宣大院君을 利用하려 하였다. 그러자 興宣大院君은 다시 흥인군을 利用해 閔氏 一派의 同情을 廉探하려 하였다.

흥인군은 財物을 탐하는 나쁜 버릇이 甚했다. 그는 이 한 때의 僥倖으로 작은 勢道를 얻어 大富豪가 되는 것을 目的으로 닥치는 대로 돈과 財物을 긁어모았다. [4] 이러한 흥인군의 行動擧止를 눈치 채지 못할 興宣大院君이 아니었다. 大院君은 銳敏한 觸手로 이미 흥인군의 一擧手一投足을 빠짐없이 監視하고 團束하면서, 거꾸로 흥인군을 통해 閔氏 一派의 同情을 探問했다. 그러자 애初 閔氏 一派가 計劃했던 대로 雲峴宮 의 動態는 알 길이 없어지고, 議政 大臣이라는 地位는 흥인군의 財物 欲心을 채워 주는 道具가 되고 말았다. [4]

壬午軍亂과 最後 [ 編輯 ]

1881年 1月 23日 아들 이재긍 이 子女 없이 死亡하자 高宗의 特別 配慮로 이희하(李熙夏)의 아들 用具(龍駒)를 이재긍 의 養子로 入養하였다.

1881年 興宣大院君의 庶子 완銀群 李在善 이 興宣大院君의 推戴로 叛亂을 일으켰다가 賜死되자, 그의 伯父가 되는 흥인군 李最應은 이재선을 彈劾하는 上疏를 올렸으나 高宗 이 받아들이기를 拒否했다.

1882年 廣州府 留守 (廣州府留守)로 赴任했다가 같은 해 다시 敦寧府領事가 되었다. 그해에 안국동 別宮에서 열린 世子 順從과 순명효황후의 嘉禮 때 宗室의 元老로서 參席하였다.

1882年 壬午軍亂 이 發生하자, 그는 大院君의 兄으로써 閔氏 一派를 도와주었다고 하여 大院君이 일으킨 亂兵에게 無慘하게 斬殺당하였다. [5]

黃玹 매천야록 에서 그가 難病을 避해 도망쳐 담을 넘다가 睾丸이 터져 죽었다 하였고, 이는 유주현 大院君 等의 作品에 引用되었다.

數百 名의 亂軍이 달려들어 담牆 아래 내동댕이쳐진 흥인군의 屍身을 亂탈하여 누구의 屍身인지 알아볼 수 없을 地境으로 짓이겨 놓았다.

그러고는 집안 구석구석을 쌓아 놓았던 쌀과 돈, 金銀寶貨, 布木, 고기며 과일, 生鮮 等을 내어다 안마당과 大門 앞에 쌓아 놓았다. [6] 亂兵들은 이것을 모두 隣近 들판으로 실어가 불에 訴却下였다.

한便 그의 神道碑 에 依하면 王이 御醫 를 보내 藥을 쓰고 看護를 해보았으나, 마침내 死亡했다 한다.

처음 諡號는 孝헌이었다가 뒤에 1884年 衝익을 거쳐 1905年 문충으로 改正되었다.

事後 [ 編輯 ]

死亡 1個月 뒤 一旦 漢城府 龍山房 에 假埋葬 後 亂이 鎭壓되길 기다렸다가 忠淸南道 大興郡 (現 禮山郡 대흥면) 우정리 申坐院에 安置됐다. 그 後 禮山郡 덕산면 상가리의 아버지 남연군 墓所 아래로 里長됐는데 信徒碑文은 領議政 홍순목 이 짓고 글씨는 흥인군의 조카인 判宗正卿府使 이재원 이 썼다. 現在는 後孫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한 狀態다.

里長 過程에서 흥인군 墓의 床石, 石物 및 神道碑 京畿道 龍仁郡 양지면 양지리(現, 龍仁市 處仁區 양지면 양지리) 산6-1번지의 세중 돌博物館에 寄贈됐다.

腐敗와 吝嗇 [ 編輯 ]

興宣大院君과 흥인군의 軋轢과 葛藤을 눈여겨본 민승호 명성황후 에게 흥인군을 重用할 것을 상주했고, 명성황후 는 이를 受容하였다. 명성황후 는 흥인군을 議政府의 大臣으로 任命하고 각별한 關心을 보였다. 그러자 흥인군은 感激하여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할 것을 다짐하고 거듭 王妃의 恩惠에 報答하리라 決心했다. [4] 그러나 그는 이 한 때의 僥倖으로 작은 勢道를 얻어 大富豪가 되는 것을 目的으로 닥치는 대로 돈과 財物을 긁어모았다. [4] 朝鮮 末의 政治家 尹孝貞 에 依하면 "흥인군 집 大門을 들어서는 賓客과 出席하다시피 하는 守令들은 말 한마디, 웃음 하나에 이르기까지 온통 賂物에 關한 것 뿐이어서, 흥인군 집에서 이루어지는 內外 官僚의 拔擢, 任命 典型은 恰似 貿易이 성한 都市 場터의 모습과 같았다. [4] " 한다.

흥인군은 自身이 願했던 대로 賂物이 날마다 倉庫에 들어와 쌓이는 것을 보며 마치 나라를 위해 땅을 開拓한 業績을 이룬 것처럼 興에 겨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每日 아침 일찍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뜰에 있는 第1倉庫 門 앞에 가서는 廳지기에게 자물쇠를 열게 하고, 잔심부름하는 床奴 아이에게 庫間 門을 열라고 한 다음, 그곳에 가득 쌓인 物件들을 步女壻 턱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넋 나간 사람처럼 허허 웃어 댔다. [7]

그런 다음에는 第2, 第3, 第9庫間에 이르기까지 第1庫間에서 하던 것처럼 一一이 文案 點檢을 다 하고 나서야 비로소 들어와 洗手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廳지기가 그에게 말했다.

第7庫間에 쌓아 놓은 날 고기와 動態 가 요즘 날씨가 따뜻해서 折半 以上이 썩어 庫間 밖까지 惡臭를 풍기고 있습니다. 마침 年末年始度 다가오고 하니 썩지 않은 것을 골라 親戚이나 親舊 분들 宅에 보내시고, 썩은 놈은 버리며, 半쯤 썩은 놈은 下人輩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7]

흥인군은 財物을 쌓아두기는 했지만 나누어주는 데에는 인색하였다. 흥인군은 남는 飮食物은 他人에게 나눠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어느 下人의 建議에 "너는 먹을 것을 좋아하느냐? 나는 모여 쌓이는 것을 좋아한다. [7] "며 拒絶했다. 그는 썩은 生鮮 單 한 토막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흥인군 집의 生鮮 고기 썩는 냄새로 隣近 이웃들이 코를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7]

黃玹 , 尹孝貞 等은 그가 相當히 腐敗한 人物이라고 指目했다.

諷刺 [ 編輯 ]

高宗, 純宗 年間의 湖南의 판소리 歌客 政家소 는 흥인군의 집과 別莊에 아홉 個의 庫間이 있는 것을 諷刺하여, '흥인군 庫間 占考'라는 諷刺 판소리를 불렀다 한다. 政家소 는 每日 이른 새벽에 門을 열고, 各處에서 바쳐온 貢物의 數를 세는 흥인군의 모습을 흉내내어 話題가 되기도 했다.

家族 關係 [ 編輯 ]

夫人 두 名은 1868年 10月 以前에 死亡했다.

기타 [ 編輯 ]

그는 每事에 自身의 主張을 하지 않았고, 주화, 斥和, 個國 等에 關해 어떠한 意見 없이 모두 옳다고만 答하여 當時 사람들로부터 '유유정勝'(唯唯政丞)이라 불렸다.

神道碑 門에 依하면 그는 體軀가 작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한다. 홍순목 이 지은 信徒悲鳴에 依하면 그의 外貌를 '共의 模樣이 야위고 陰性이 朗朗하다'라고 記述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百姓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亡國史》 (다산초당, 2010) 165페이지
  2. 강재언, 《선비의 나라 韓國留學 2千年》 (한길사, 20003) 459페이지
  3.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百姓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亡國史》 (다산초당, 2010) 39페이지
  4.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百姓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亡國史》 (다산초당, 2010) 40페이지
  5. 이현희, 《韓國의 歷史 16卷. 改革·開放과 外勢의 浸透》(청아출판사, 2014)
  6.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百姓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亡國史》 (다산초당, 2010) 212페이지
  7.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百姓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亡國史》 (다산초당, 2010) 41페이지
前任
이유원
朝鮮 攝政
1881年 ~ 1882年
後任
홍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