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福宮

景福宮
景福宮
Gyeongbokgung Palace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景福宮 前景 (2016年)
種目 私的 第117號
( 1963年 1月 21日 指定)
面積 432,703m 2
時代 朝鮮 太祖 4年(1395)
所有 大韓民國 政府 ( 文化財廳 )
管理 文化財廳 景福宮管理所
參考 遺跡建造物 / 政治國防 / 宮闕·官衙 / 宮闕
位置
住所 대한민국 서울特別市 鍾路區 辭職로 161 (세종로, 景福宮)
座標 北緯 37° 34′ 43″ 東經 126° 58′ 38″  /  北緯 37.57861° 東京 126.97722°  / 37.57861; 126.97722
連結 https://www.royalpalace.go.kr/
情報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情報

景福宮 (景福宮, 英語 : Gyeongbokgung Palace )은 서울特別市 鍾路區 辭職로 에 位置한 朝鮮 王朝의 法宮(法宮, 正宮)이다. 1395年 創建되어 1592年 壬辰倭亂 으로 全燒되었고, 1868年 흥선大院君 의 主導로 重建되었다.

主禮 》 〈考工記〉에 立脚하여 建築되었다. 3門 3組로 構成되었는데 各各 外助, 內助, 年條이다. 內助는 勤政殿 을 中心으로 하는데, 宮 밖에서 勤政殿까지 바깥부터 光化門 , 흥례문 , 근정문 이다.

'경복(景福)'은 市警 에 나오는 말로 王과 그 子孫, 온 百姓 들이 太平聖代 의 큰 福을 누리기를 祝願한다는 意味다. 風水地理 的으로도 白岳山 을 뒤로 하고 左右에는 駱山 仁王山 으로 둘러싸여 있어 吉地의 要件을 갖추고 있다. 1592年 , 壬辰倭亂 으로 인해 불탄 以後 法宮의 役割을 昌德宮 에 넘겨주었다가 1865年 (高宗 2年)에 흥선大院君 의 名으로 重建되었다.

1910年 韓日 倂合 日帝强占期 에는 1915年 朝鮮物産공진회 開催와 1926年 朝鮮總督府 建設로 많은 殿閣들이 撤去 或은 毁損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博物館과 잔디밭을 비롯한 定員이 들어섰다. 이러한 모습은 1945年 解放 後에도 이어졌으며 6·25 戰爭 을 거치면서 一部 殿閣이 追加로 消失되었다.

1968年 光化門 復元을 始作으로 景福宮의 本모습을 되찾기 위한 各界의 關心과 努力이 增大되어, 1980年代 末부터 本格的인 復元事業 計劃이 始作되었다. 1995年 朝鮮總督府 廳舍 撤去, 2001年 흥례문 圈域 復元, 2010年 光化門 木造 復元, 2023年 光化門 月臺 復元을 비롯하여 各 圈域別 主要 殿閣들을 오는 2045年 까지 復元시킬 計劃이다.

歷史 [ 編輯 ]

過去의 모습을 反映한 景福宮도 ( 서울歷史博物館 )

太祖의 創建 [ 編輯 ]

1392年 朝鮮 王朝를 開創한 太祖 는 卽位 3年째인 1394年 에 信徒宮闕造成都監(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年 (太祖 3年) 漢陽 에 遷都하자 먼저 宗廟 辭職 의 建設에 着手한 다음, 淸聲백 심덕부 에게 命하여 宮闕을 짓게 했다. [1] [2] 처음 새 宮闕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高麗 때의 南京 离宮(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狹小하여, 거기서 南쪽으로 조금 옮겨 只今의 景福宮 자리에 建物을 配置하고 殿閣을 세웠다. [3] [4] 새 宮闕 景福宮은 太祖 4年(1395年) 8月 京畿左道 의 人夫 4,500名, 京畿右道 人夫 5,000名, 忠淸道 人夫 5,500名을 徵用하면서 始作되어, 같은 해 9月 29日에 1次로 完成되었다. [5] 그러나 이 때는 宮闕 內部 中心部만 이루어졌고, 宮闕을 감싸는 宮城이나 宮闕 앞에 세워지는 議政府나 六曹 等의 官廳은 몇 해 뒤에 完成된 것으로 보인다. [6]

그 해인 1395年 陰曆 10月 太祖는 入闕하면서 정도전 에게 새 宮闕과 主要 殿閣의 名稱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景福宮의 名稱을 비롯하여 康寧殿, 연생전, 경성전, 思政殿, 勤政殿, 근정문, 正門(現在 光化門 ) 等 主要 建物의 名稱이 지어졌다. 정도전 은 《 市警 》(詩經) 〈主芽〉(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箕帚移住 氣泡이덕 君子萬年 개이경복)”에서 2字를 따서 “景福宮”(景福宮)이라고 지었다. [2] [7] 높이 20字 1치, 둘레 1813報(步: 6尺)의 담을 쌓고 南쪽에는 正門인 光化門, 北에는 神武門, 洞에는 建春門, 署에는 迎秋門을 두었다. 弔賀를 받는 正殿인 勤政殿의 周圍에는 근정문 을 비롯한 4門이 있었고, 그 北쪽 思政殿 은 便殿이며, 康寧殿 · 交泰殿 等의 寢殿, 그 밖에 여러 殿閣이 있었다. 이때 建立된 殿閣은 總 390餘칸에 이르렀는데, 太祖實錄에 새 宮闕의 規模, 配置 및 各 建物의 機能이 詳細히 記述되어 있다. [5] [8] 實錄 內容을 통해 創建 當時 景福宮의 基本 配置를 斟酌하자면, 景福宮은 南北軸 線上에서 南쪽에서 北쪽으로 오문, 停戰, 보평청, 軟寢의 順序로 南北 直線軸을 따라 中心 殿閣이 나란히 놓이고, 中心 殿閣 周邊에는 行脚이 左右 對稱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推定된다. [9] 그리고 王이 臣下들과 政務를 보는 外電은 宮闕 앞쪽에, 內戰은 뒤쪽에 配置하는데, 內戰의 各 殿閣과 停電은 천랑으로 서로 連結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

宮闕의 外郭 울타리인 宮城을 建設한 것은 宮闕을 完成한 지 3年 뒤인 太祖 7年(1398年)의 일이었는데, 이 해 1月에 民情을 徵發하여 宮城 工事에 들어갔다. [6] 公社는 겨울 동안에 大體的인 宮城 城壁을 築造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月이 京畿 左道와 忠淸道 軍事 3,700名을 動員하여 宮城을 修築하였다. [6] 宮城에는 正門인 南門 外에 同門과 序文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北쪽은 宮城과 門을 갖추지 못하고 木柵으로 둘러쳐 있다가 世宗代에 와서야 完成된 것으로 보인다. [6] [10] 한便 宮闕이 創建되었을 때 實錄 記錄 末尾에 "(뒤에) 門 南쪽 左右에는 議政府, 三軍府, 六曹, 司憲府 等의 各社 公廳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宮城 門 南쪽에 議政府나 六曹 等 여러 官廳이 左右로 造成된 것은 宮城과 宮門이 造成된 太祖 7年때로 推定된다. [11]

殿閣 擴大와 1553年 火災 [ 編輯 ]

景福宮은 太宗, 世宗 을 거치면서 繼續해서 殿閣이 더 지어지고 補完되었는데, 太宗 11年(1411年)에는 明堂水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金川으로 끌어들여 宮闕의 象徵性과 風水的인 形局을 補完하였고, 慶會樓를 지어 外國 使臣과 調整 官員들의 宴會 場所로 利用케 하였다. [5] 景福宮이 朝鮮 王朝의 法宮다운 面貌를 갖춘 것은 世宗 때였는데, 1426年(世宗 8年) 王命을 받은 集賢殿에서 景福宮의 各 門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2] 光化門, 홍례문(現在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建春門, 迎秋門, 영제교 等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年 思政殿과 慶會樓의 重水를 始作으로 主要 殿閣을 새로 짓거나 重修하였다. 그밖에 簡儀臺 等의 觀測施設이 世宗 때 完備되었다. 慶會樓는 1474年 補修되고 勤政殿과 光化門에는 靑瓦 (靑瓦)가 올라간다. [12]

明宗 8年( 1553年 ) 9月에는 康寧殿에 큰 불이 나서 思政殿, 勤政殿, 慶會樓, 含元殿, 請連累만을 남긴 채 便殿과 沈澱 區域의 建物이 모두 消失되었으며, 歷代로 내려오던 珍貴한 보배와 書籍, 王과 王妃의 고명, 衣服, 車馬 等이 불타버렸다. [13] 불이 난 지 1年도 되지 않은 1554年 봄에 重建 工事를 始作하여 그해 9月에 落成하였다. [13] 이때 動員한 人力은 賦役 2,200名, 품팔이꾼 1,500名이었다고 한다. 明宗 15年 때 建立한 景福宮을 그린 ‘漢陽 宮闕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壬辰倭亂 當時 消失되었다. [14]

壬辰倭亂 [ 編輯 ]

謙齋 旌善 의 〈景福宮도〉 (1754年頃). 光化門 은 基壇石築, 慶會樓 는 밑기둥만 남은 채 鬱蒼한 숲으로 變한 모습이다.

1592年 宣祖 때에 壬辰倭亂으로 難民이 發生하였고, 奴婢 文書와 擄掠의 痕跡을 없애고자 景福宮· 昌德宮 · 昌慶宮 의 宮闕을 難民들이 불태웠다는 것이 實錄의 記錄인데, [2] [15] 이에 關해 論難이 있다. [16] 理氣의 《송와雜說》과 류성룡 의 《西厓集》 等에서도 '王室과 官僚들이 일찌감치 避難을 떠나고 남은 빈 宮闕을, 倭敵이 首都 漢城을 入城하기도 前에, 百姓들이 宮中으로 侵入하여 奴婢文書를 불태우고, 寶物도 掠奪했다'는 內容의 記錄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朝鮮 百姓들이 放火의 主體라는 것이 定說이었다.

그러나 이는 目擊談이 아니라 傳해 들은 것으로, 이들이 實際로 불탄 宮闕을 直接 目擊한 것은 朝鮮과 明나라의 聯合軍이 漢城을 奪還한 뒤인 繫辭年(1593年) 4月 20日이었는데, 이때 宗廟는 불타고 세 宮闕은 모두 무너진 後였다. 그러나 倭軍이 漢城에 入城했을 때인 1592年 5月에 記錄된 從軍勝(從軍僧) 第다쿠의 《朝鮮日記》에는 倭軍이 漢城에 入城한 直後 景福宮을 直接 踏査한 內容이 詳細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景福宮의 殿閣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記錄된 內容은 아래와 같다. "北山 아래 南向하여 子宮(景福宮)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四方 壁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角이 있으며, 行廊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殿閣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西쪽에서 東쪽으로 흐른다. 正面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蓮꽃무늬를 새긴 돌欄干으로 꾸며져 있다. 橋脚 左右에는 돌獅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記錄들로 인해 朝鮮 百姓들이 景福宮을 全燒시킨 것은 아니었다는 說이 提起된다. [17]

還都 後에는 월산대군 의 옛 집(光海君 3年 以後로 慶運宮 , 只今 德壽宮 一部)을 臨時로 使用하다가 以後의 王들은 大部分 昌德宮 에서 政務를 본다.

興宣大院君의 重建 [ 編輯 ]

1886年 오가와 카즈마사 가 撮影한 景福宮 前景

그 後로 273年間 再建하지 못하다가 1865年 4月 26日(高宗 2年 陰曆 4月 2日 ) 高宗 의 垂簾聽政을 하던 신정왕후 의 指示로 重建이 始作되어 [18] 같은 해 5月 7日(陰曆 4月 13日) 空域이 始作되어 1868年 6月 末에 工事를 마쳤으며, 7月 2日 國王과 王室의 景福宮 이어(移御) [註解 1] 가 이루어져 政務를 開始하였다. [13] 景福宮의 再建을 主導한 흥선大院君 은 權力을 掌握하였다. 工事를 마치기까지 當百錢 을 發行하는 等 7年이 넘게 걸렸는데, 景福宮에는 다른 宮闕과 마찬가지로 承政院 , 弘文館 等 其他 여러 官衙가 整備되어 있었다. [2]

重建된 景福宮의 많은 建物은 그 뒤 몇 次例 消失되고 復舊되기를 反復하였다. [13] 高宗 32年(1895年) 景福宮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가 日本軍에 시해당하고(1895년 乙未事變), 이듬해 陽曆 2月에는 高宗이 러시아 公館으로 播遷 하면서 景福宮은 王宮으로서 運命을 다하게 된다. [13]

이 時期 景福宮은 비록 王이 머무르는 居處로 使用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없는 空間으로 管理되었다. [19] 1903年에는 建物 修理를 爲한 金額을 請求하기도 했다.

日帝强占期 [ 編輯 ]

1910年에 韓日 强制 倂合 以後 景福宮은 毁損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年 以後 景福宮 內의 여러 建物을 헐고 民間에 팔던 日帝는 [20] , 1915年 9月 11日부터 10月 31日까지 이른바 ' 市政誤年記念 朝鮮物産공진회 '를 景福宮 안에서 開催하면서 建物 4,000餘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餘 坪에 達하는 18個所의 商品 陳列館을 設置하였다. [21] 展示會가 끝나자 日帝는 景福宮 안에 宮闕 施設과 無關한 各種 石塔, 不渡, 石燈, 노승준 佛像 等을 全國 各地에서 옮겨 配置하고 音樂堂을 設置하였으며, 1916年부터 朝鮮總督府 廳舍를 짓기 始作하였다. [21]

1917年 11月 10日, 昌德宮에 큰 火災가 나서 沈澱이 모두 불타버리자, [21] 이를 復舊한다는 名目으로 景福宮의 寢殿인 康寧殿, 交泰殿, 연길당, 含元殿, 경성전 等을 1918年부터 1920年 사이에 헐어내어 昌德宮의 寢殿 復舊工事 材木으로 썼으며, 1918年부터는 王權의 象徵인 勤政殿, 思政殿, 만춘전, 천추전을 遺物 展示室로 利用하였다. [22] 1916年부터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等을 헐고 그 자리에 朝鮮總督府 建物을 짓기 始作하여 1926年에 完工하였다. [20] 總督府 廳舍 新築을 두고 朝鮮內에서는 勿論이고 日本人들까지 猛烈히 非難하여 輿論을 喚起시켰다. [22] 이 過程에서 日帝는 1927年 9月 景福宮의 正門인 光化門을 헐어 建春門 北쪽으로 옮겼다. [22]

1929年 朝鮮博覽會 會長도

이 밖에도 日本人들은 1929年 5月에는 융무당(隆武堂), 융문당(隆文堂) 等을 헐어 한강로에 용광사를 지었으며, 1932年에는 璿源殿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 의 冥福을 비는 祠堂인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 [20] 1940年에는 건청궁터에다 美術館(옛 傳統工藝展示館)을 지으며 수많은 內戰 建物들을 헐어버렸다. [20]

日帝 時代를 거치며 景福宮에 남게 된 建物은 1865年(高宗 2年)에 建設한 建物로 建春門, 천추전, 神武門, 東十字閣이 있고, 1867年 建設한 建物로는 勤政殿, 思政殿과 周邊 回廊 및 行脚, 제수합, 함화당, 慶會樓, 수정전, 경안黨 等이 있으며, 1873年에 지은 建物로는 향원정, 集玉齋, 協길當 等이 있다. [23]

光復 以後 [ 編輯 ]

1965年 8月의 景福宮 前景. 國立博物館이 建設되지 않은 모습이다.

1950年代에 大統領 李承晩 의 낚시터로 慶會樓 北西쪽에 朝鮮時代 技法의 木造建物 하향정(荷香亭)을 設置했으며, 1961年 5·16 軍士 政變 當時 出動한 30師團 1個 大隊兵力이 首都警備司令部 30警備大隊로 名稱을 바꾼 뒤 胎原電 圈域에 머물렀다. 30警備大隊는 駐屯 後 天幕幕舍를 使用하였으나, 1965年 景福宮 西北쪽 一帶에 簡易建物 20洞과 콘크리트 블록 5洞 等 半永久幕舍를 建設했으며 30警備大隊 構造物은 1996年 撤收까지 利用되었다. 1963年 1月 21日 景福宮 一帶를 史跡 第117號로 指定 保護하였으나, [24] 그 해 10月 文化財管理局이 한 해 3百萬원의 入場料 收入으로는 現狀維持도 힘들다며 慶會樓 東쪽 約 7千坪의 잔디밭을 헐어 골프場과 休憩施設·食堂·酒店·雜貨店 等의 新築 計劃을 發表했고 이는 輿論의 反撥로 霧散되었다. [25]

1966年 1月 8日 政府는 璿源殿 領域에 文化財의 外形을 模倣한 建物 外形을 條件으로 하는 國立綜合博物館 懸賞設計를 公告했다. 같은 해 着工하여 1972年 完工했으나 高宗 2年(1865年) 建立돼 解放 以後에도 남아있던 建物인 경안黨, 對向當, 정훈당(東堂) 等 9棟 106칸의 殿閣을 撤去했다. 1970年 5層 鐵筋콘크리트組로 제2별관을 建設하였으며 後에 文化財硏究所로 活用되다 2004年 撤去되었다. 1979年 3層 鐵筋콘크리트 建物인 厚生館을 完工하였고, 文化財管理局廳舍 및 國立中央博物館 으로 利用되었다. 2005年 국립중앙박물관을 龍山區 로 移轉하면서 德壽宮 石造殿에 있던 宮中遺物展示館을 옮겨 國立故宮博物館 으로 使用되고 있다. [26] 1982年 에는 '歷史上 受難의 現場에 對한 敎育施設計劃' 方針에 따라 건청궁 領域에 韓食木造建物로 乙未事變記錄畵前視角(2007年 건청궁 復元 市 撤去)을 設置했다. [27] [28]

光化門은 1950年 韓國 戰爭 으로 門樓가 타버리고 石築만 남아있던 것을 1963年에 元來 位置쪽에다 콘크리트 構造로 復元하였다.

復元事業 [ 編輯 ]

1990年 에 들어서 2030年 完了를 目標로 景福宮 復元事業을 始作하였다. [22] 1915年 朝鮮總督府 美術館으로 建立되어 공진회 以後 博物館으로 使用된 鐵筋콘크리트 建物을 1995年 撤去하였으며, 1926年 建立된 朝鮮總督府 廳舍를 1997年 撤去, 1935年 建立된 朝鮮總督府 美術館을 1999年 撤去, 日帝强占期 때 建立된 것으로 推定된 수정전 南側의 韓食 建物인 無名角을 1998年 撤去했다. 다만 朝鮮總督府 博物館 倉庫로 建立(1915年)된 附屬 建物은 現在 景福宮 管理所로 使用 中이다. 2010年 基準으로, 景福宮 1次 復元整備事業이 完了되어 89棟 8987m 2 (2720坪)의 建物이 復元됐다. 日帝의 撤去를 避해 남아 있던 建物 36棟을 包含해 現在 總 125洞의 建物이 들어서 高宗 當時 景福宮 建物 500餘 同意 約 25% 水準에 到達하였다. [29] 2010年 9月 以後 光化門 圈域이 完全히 開放되었다. 2011年 부터 約 20年에 걸쳐 景福宮 殿閣을 76%까지 復元하는 2次 復元整備事業이 推進 中으로 1次 復元이 中心 建物들로 景福宮의 뼈대를 갖추는 것이었다면, 2次 復元은 임금의 水剌間과 闕內各司 等 많은 附屬建物을 지어 살을 붙이는 過程이다. [30]

1次 復元整備事業 [ 編輯 ]

지난 1990年 始作하여 當初 2009年 完了될 豫定이었던 1段階 綜合整備 事業은 總 1789億원의 豫算을 投入하여 康寧殿 等 93棟 10,743.85 m 2 (3250坪)를 復元할 計劃이었다. 事業期間을 1年 延長한 2010年 基準으로 1572億원의 豫算이 投入되어 89棟 8987 m 2 (2720坪)의 建物이 復元되었다. 日帝의 撤去를 避하여 남아 있던 建物 36棟을 包含하여 現在 總 125洞의 建物이 들어서 高宗 當時 500餘 同意 25% 程度 水準까지 到達하였다. 事業期間 重慢性 옛 朝鮮總督府 廳舍와 옛 朝鮮總督府博物館(國立民俗博物館), 옛 朝鮮總督府美術館(傳統工藝展示館) 等을 撤去하고 光化門을 移轉 復元한 데서 나타나듯 日帝의 遺産인 네거티브 文化財를 撤去하고 朝鮮 正宮의 基本 宮制(宮制)를 完備하는 것이 1段階 綜合整備 事業의 目標였다.

이에 따라 日帝强占期에 毁損된 停戰(正殿)과 片箭(便殿), 沈澱(寢殿), 東宮(東宮), 頻傳(殯殿) 等 景福宮 中心軸의 復元이 推進되었다. 具體的으로 沈澱 圈域(1990∼1995) 事業을 통하여 康寧殿 等 12洞의 建物이 復元됐으며 東宮 圈域(1994∼1999) 事業 當時 資善堂 等 18洞의 建物이 세워졌다. 또한 勤政殿이 日帝强占期 때 軸이 틀어진 것을 고치려고 '勤政殿 整備工事'(200年~2003年)까지 復元을 하였고, 흥례문 圈域(1996∼2001) 事業 當時 흥례문 等 6洞의 建物이, 胎原電 圈域(1997∼2005) 事業으로 胎原電 等 25洞의 建物이 各各 復舊되었다. 끝으로 光化門 및 其他 圈域(2001∼2010) 事業으로 光化門과 건청궁 장안당 等 28洞의 建物이 復元되었다.

光化門 제 모습 찾기 事業 ( 2006年 ~ 2010年 ) : 光化門 圈域 復元 [31] [32]

2次 復元整備事業 [ 編輯 ]

文化財廳 은 2010年 1次 復元 整備 事業이 完了된 後 2011年부터 2030年까지 20年 計劃의 第2次 景福宮 綜合整備 事業을 推進하고 있다. [33] 計劃期間을 6段階로 區分하여 段階別 細部施行計劃을 樹立 및 推進하며, 總 254棟을 復元하고 總 事業費는 約 5,400億원이 所要될 것으로 推定된다. 中心 殿閣을 全面 復元하며 相對的으로 復元 意味가 떨어지는 地域으로 判斷한 102곳은 基壇 및 礎石으로 復元할 計劃이다. [34]

事業이 完了되는 2030年까지 全體 379洞으로 元來 規模의 75.8% 水準으로 復元하며, 5段階 璿源殿 一帶 復元에서는 復元誌의 大部分인 73棟을 基壇·礎石으로 復元해 未復元韓 狀態로 둔다. [34] 2013年 5月 中 文化財廳은 豫算의 效率的 活用이 必要하며, 觀覽客 動線에 影響을 준다는 理由를 들어 2010年에 樹立된 旣存의 計劃을 大幅 削減하는 "景福宮 2次 復元整備計劃 調整案" 硏究 用役에 着手했다. 圈域別 代表 建物만 復元하고 附屬 建物은 復舊하지 않으며, 國立故宮博物館 撤去 計劃도 빠지는 것이 主 內容이다. [35] 2015年 燒廚房 領域(내?외소주방등 18棟)李 復元되었다.

段階別 事業 計劃은 다음과 같다. [34]

  • 1段階 宮中生活圈域 (燒廚房 및 興復戰 圈域 等, 2011年 ~ 2021年 ) : 燒廚房 領域(내·외소주방, 大戰生物房), 興復戰 領域(興復戰, 영훈黨)等 總 28棟 原形 復元, (貧窮燒廚房, 多競合, 遠域處所)等 基壇·礎石으로 復元.
  • 2段階 帝王敎育圈域 (동궁 및 五衛都摠府 圈域 等, 2019年 ~ 2023年 ) : 동궁領域(界調黨), 建春門領域(守門將廳 等), 五衛都摠府 領域(尙衣院, 五衛都摠府 等) 總 14棟 原形 復元, (春坊, 季方, 別軍職廳)等 基壇·礎石으로 復元.
  • 3段階 宮中統治圈域 (闕內各司 圈域 等, 2026年 ~ 2034年 ): 迎秋門 領域(迎秋門 및 守門將廳 復元), 闕內各司 領域(賓廳, 庭園, 議藥廳), 等 總 14棟 原形 復元 (局別將直訴, 宣傳官廳, 內班院) 等 基壇·礎石으로 復元.
  • 4段階 宮中儀禮圈域 (婚前 및 璿源殿 圈域, 2031年 ~ 2042年 ): 문경전 및 膾安全 領域(문경전), 神武門 領域(守門將廳 等 3棟, 廁間 1棟), 만경전 圈域, 璿源殿 圈域(璿源殿, 경안黨), 等 總 23棟 原形 復元, (膾安全 領域, 제수합 行脚, 만화당 領域, 건복합) 等 基壇·礎石으로 復元.
  • 5段階 宮中防禦圈域 (東·서십자각 및 內司僕 圈域, 2040年 ~ 2045年 ): 서십자각 領域(서십자각 1棟, 弓匠復元), 東十字閣 弓匠 復元.

現地 案內文 [ 編輯 ]

朝鮮時代 宮闕 中 가장 中心이 되는 王朝 第一의 法宮(法宮, 임금이 사는 宮闕)으로 太祖 4年(1395)에 漢陽으로 首都를 옮긴 後 처음으로 세운 宮闕이다. [36]

宮闕의 이름은 鄭道傳이 『詩經』에 나오는 “이미 술에 醉하고 이미 德에 배부르니 君子萬年 그대의 큰 福을 도우리라”에서 큰 福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字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年 太宗은 景福宮의 蓮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慶會樓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臣下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外國에서 오는 使臣들에게 宴會를 베풀었다. [36]

太宗의 뒤를 이은 世宗은 主로 景福宮에서 지냈는데, 慶會樓 南側의 闕內各司 圈域에 集賢殿을 짓고 學者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慶會樓의 南쪽에는 時刻을 알려주는 報漏閣을 세웠으며, 宮闕의 西北쪽 모퉁이에는 天文 觀測施設人 簡儀臺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視角과 4季節을 나타내는 玉淚機輪을 設置하기도 하였다. [36]

景福宮은 壬辰倭亂(1592)으로 因해 昌德宮·昌慶宮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年에 興宣大院君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年 宮闕 안에서 明成皇后 弑害 事件이 벌어지고, 高宗은 러시아 公館으로 居處를 옮기면서 景福宮은 主人을 잃은 빈 宮闕이 되었다. 1910年 韓日强制倂合으로 國權을 잃게 되자 日本人들은 建物을 헐고, 勤政殿 앞에 朝鮮總督府 廳舍를 짓는 等 宮闕의 大部分을 毁損함에 따라 漸次 宮闕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36]

日帝强占期 以後 宮闕 안에 남아있던 主要建物은 근정문·勤政殿·思政殿·천추전·수정전·慈慶殿·慶會樓·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集玉齋·協길當 等이 있다. [36]

中國에서 古代부터 傳해 오던 都城(都城) 建物排置의 基本形式을 지킨 宮闕로서, 宮闕의 왼쪽(東쪽)에는 歷代 王들과 王妃의 神位를 모신 宗廟가 있으며, 오른쪽(西쪽)에는 土地와 穀食의 神에게 祭祀를 지내는 社稷壇이 자리잡고 있다. 建物들의 配置는 國家의 큰 行事를 치르거나 王이 臣下들의 朝禮를 받는 勤政殿과 王이 一般 執務를 보는 思政殿을 비롯한 停電과 片箭 等이 앞部分에 있으며, 뒷部分에는 王과 王妃의 居處인 沈澱과 休息空間인 後援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前兆後침(前朝後寢)의 制度인데, 이러한 形式은 景福宮이 朝鮮의 法宮으로서 特히 嚴格한 規範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36]

비록 宮闕 안 大部分의 建物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停電·樓閣 等의 主要 建物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朝鮮의 法宮의 모습을 確認할 수 있는 重要한 遺跡地이다. [36]

建築物 [ 編輯 ]

景福宮은 東西南北으로 4個의 大門들을 두고 中央에 勤政殿 , 그리고 東쪽으로 東宮과 自轉, 西쪽으로 闕內各司와 慶會樓 를 各各 配置하는 形態로 數十 채의 殿閣들이 建築되었다.

宮城 [ 編輯 ]

寫眞 說明
光化門(光化門)
光化門은 景福宮의 南쪽에 있는 正門이다. 元來의 이름은 南門(南門)이었으나 , 世宗 때에 와서 光化門으로 名稱이 바뀐다. '王의 큰 德(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意味로 光化門(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年 에 만들어졌으며, 2層 樓閣인 光化門 앞의 兩쪽에는 한 雙의 해태 彫刻像이 자리잡고 있으나, 光化門 復元 工事를 하면서 暫時 移動하였다.
光化門에는 總 3個의 門들이 있는데, 가운데 門은 王이 다니는 門이고, 나머지 左右의 門은 臣下들이 다니던 門이었다.
光化門의 天障에는 朱雀과 龍과 거북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年 , 復元 工事가 完了되어 2010年 8月 15日 光復節 에 公開되었다.
2021年부터 月臺 復元을 發掘 工事가 進行中이다
建春門(建春門)
建春門은 景福宮의 東쪽에 있는 門으로, ‘東쪽은 에 該當한다’는 意味로 建春門이라 이름하였다.
主로 王族, 戚臣, 尙宮이 드나들었던 門이었다.
建春門의 앞에는 커다란 銀杏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建春門의 天障에는 靑龍 이 그려져 있다.
門 안에는 王世子가 居處하던 春宮(春宮)이 있었으며, 門 밖에는 王室의 宗親들을 敎育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壬辰倭亂 때 放火로 消失되었던 것을 흥선大院君 이 再建하였다.
迎秋門(迎秋門)
迎秋門은 景福宮의 西쪽에 있는 門으로, ‘西쪽은 가을 에 該當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意味로 迎秋門이라 이름하였다.
門 밖에는 明堂水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主로 一般 官僚들이 드나들었다.
迎秋門의 天障에는 白虎 가 그려져 있다.
門 안에는 闕內 各社가, 門 밖에는 宮闕에 物資를 調達하는 官廳이 자리잡고 있었다.
1865年에 竣工되었던 元來 迎秋門은 1926年에 戰車 振動으로 因해 石築이 무너지고 얼마 뒤 撤去된다. 1975年에 元 位置가 아닌 北쪽으로 50m 移轉한 자리에 木造가 아닌 鐵筋 콘크리트를 使用해 지었다.
신무문 神武門(神武門)
神武門은 景福宮의 北쪽에 있는 門으로, ‘北쪽을 管掌하는 玄武 ’에서 따와 神武門이라 이름하였다. 神武門의 天障에는 玄武 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陰氣가 剛하다 하여 平素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壬辰倭亂 때 放火로 消失되었다가 흥선大院君 이 再建하였다. 그 後 1961年 5·16 軍士政變 以後 靑瓦臺 를 保護한다는 名目으로 軍部隊가 景福宮 境內에 駐屯하게 되면서 45年 동안 閉鎖되어 있었다.
現在 靑瓦臺 本館 正門하고 마주하고 있다.

外助 [ 編輯 ]

停戰 圈域 [ 編輯 ]

寫眞 說明
흥례문.jpg 흥례문(興禮門)
흥례문은 正門인 光化門과 勤政殿의 正門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中間文으로, 正面 3칸, 側面 2칸의 重層 木造 建物이다.
1867年에 重建되었다가 日帝强占期인 1910年代 初 撤去되고 그 자리에 朝鮮總督府 廳舍가 들어섰다가, 景福宮 復元 事業을 통해 옛 總督府 建物을 撤去하고 復元 工事를 始作하여 2001年에 完工했다.
영제교(永濟橋)
영제교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金川에 設置된 다리로 風水地理思想 에 立脚하여 正殿 安易 至嚴하고 神聖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停電의 外堂 앞에 明堂水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設置한 것이다. 北岳山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西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金川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金川에 設置한 다리이며, 德壽宮 의 禁川橋, 昌德宮 의 옥천교와 禁川橋度 같은 理致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 假量으로 比較的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中央이 3.4m, 그리고 兩쪽이 各各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魚道(御道, 王의 길)로서 王의 魚價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發은 虹霓의 形態를 取했고 欄干은 荷葉童子로 돌欄臺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欄干 前後 法度에는 4마리의 鉏酬價 江바닥을 뚫어져라 監視하고 있다. 光化門 밖의 鉏酬價 뿔이 보이지 않는 데 反해 永川校의 이 瑞獸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停電의 앞이기에 더욱 森嚴한 警備를 서고 있는 듯하다.
기별청(奇別廳)
奇別廳은 근정문에 이르기 前 西쪽에 있는 작은 建物로 承政院 에서 發行하는 官報의 性格을 띠는 奇別紙 를 發行하는 곳이었다. [37] 每日 아침에 各 官廳의 奇別書吏들은 기별청에서 承政院에서 적어온 奇別紙를 베껴서 가지고 돌아갔다. 地方의 境遇에는 奇別軍士라는 傳令이 며칠 分量을 한꺼번에 가져갔다. 奇別紙에는 다양한 消息이 실렸는데 主로 賃金이 받은 上疏文과 그에 對한 答, 朝廷의 人事 內容, 過去 試驗의 날짜 等이 적혀있었다.
근정문.jpg 근정문(勤政門)
근정문은 正殿인 勤政殿의 正門으로 正面 3칸, 左右로 各各 1칸씩의 옆門을 配置한 重層 構造로 되어 있다. 寶物 第812號로 指定되어 있다. 근정문과 行脚은 高宗 4年(1867年)에 勤政殿과 함께 重建되었다. [38] 日帝强占期 때 左右의 行脚이 回廊으로 變形된 채로 現在에 이르고 있다.
王이 宮闕 밖으로 行次할 일이 없는 平素에는 門을 닫아두었고 代身 管理들이 宮에 出入할 때는 左右에 있는 逸話文(日華門)과 월화門(月華門)을 利用하였는데, 陰陽으로 볼 때 太陽을 뜻하는 文班 官僚들은 東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武班 官僚들은 西쪽의 월화門을 통하여 出入하였다. 停戰(正殿)인 勤政殿 (勤政殿)과 正門(正門)인 光化門 (光化門),中間門(中間文)인 흥례문 (興禮門)을 잇는 門이다.
근정전.jpg 勤政殿(勤政殿)
勤政殿은 景福宮에서 文武百官의 弔賀(朝賀)를 비롯한 國家 意識을 擧行하고, 外國 使臣을 接見하던 正殿이자 法傳(法殿)이었다. [39] 現在 勤政殿은 國寶 第 223號로 指定되어 있는 現存하는 韓國 最大의 木造 建築物이다. 正宗, 世宗, 端宗, 世祖, 成宗, 中宗, 明宗 等 朝鮮 前期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卽位하였다. [39] 壬辰倭亂 前에는 周邊 回廊이 單랑(單廊)이었으나, 現在의 勤政殿은 복랑(復廊) 形式의 行脚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若干 北쪽에 上ㆍ下月臺 위에 正面 5칸, 側面 5칸 規模로 지어진 多包系 八作지붕의 重層 建物이다. [39] 正殿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薄石(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魚道(御道) 左右로 文ㆍ武官이 身分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 雙의 品階石이 놓여 있다. 朝鮮 物産공진회때 龍床이 毁損되었으나 2000年부터 2003年까지 있었던 勤政殿 解體工事 때 復元되었다. [38]
勤政殿 建物 外觀은 重層이지만, 內部는 層의 區分없이 全體가 트인 通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面 內陣柱 中央에는 御座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日月오봉度 屛風이 있다. [38] 天障 中央에는 寶蓋(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個인 七調龍(七爪龍) 한 雙을 만들어 달았으며, 建物 內部 바닥에는 前돌을 깔았다. [38] 本來 建物 안에는 議長 器物이 가득 裝置되어 있었으나 只今은 남아 있지 않다. [38]

片箭 圈域 [ 編輯 ]

寫眞 說明
思政殿(思政殿)
思政殿은 王이 나랏일을 보던 便殿의 中心 建物로 左右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便殿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思政殿에 對한 鄭道傳의 說明이다.<br
그 思政殿(思政殿)에 對해서 말하면, 天下의 理致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法입니다. 大槪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百姓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不肖(不肖)함이 섞여 있고, 萬事(萬事)의 煩多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百姓의 임금이 된 이가 萬一에 깊이 생각하고 細密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不當함을 區處(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登用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榮光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惡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計策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貨貝(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眞實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時頃(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孔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成人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至極한 것입니다. 李 전(殿)에서는 每日 아침 여기에서 政事를 보시고 滿期(萬機)를 거듭 모아서 電荷에게 모두 稟達하면, 詔勅(詔勅)을 내려 指揮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思政殿(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請합니다.
 
— 《三峯集》기09 景福宮, 또는 《太祖實錄》太祖 3年 10月 7日
천추전(千秋殿)
천추전은 王의 小便殿(小便殿)으로 王과 臣下가 學問을 討論하던 場所이다. 思政殿의 補助 役割을 하며 主로 가을과 겨울에 使用하였다. 때문에, 溫突이 없는 事情前과는 달리 천추전에는 溫突이 設置되어있다. [40] 만춘천과는 左右 對稱을 이룬다. 文宗 이 이 곳에서 昇遐하였다. 예전에는 思政殿과 連結되어 있었다고 傳해지나, 重建되면서 隔離된 形態로 變했다.
만춘전(萬春殿)
만춘전은 思政殿을 補佐하는 附屬 建物로서 임금이 臣下들과 나랏일을 議論하거나 宴會를 베풀던 片箭(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천추전과 左右對稱을 이루며, 主로 봄에 使用된 建物이였다. 천추전과 마찬가지로 溫突이 設置되어있다. 다만, 천추전과 달리 韓國戰爭 때 爆擊으로 破壞되어 터만 남아있다가 1988年에 復元하였다. [41] 世宗 때 만춘전에 日星定時儀 를 設置했다는 記錄이 있다. [42]

闕內各司 圈域 [ 編輯 ]

寫眞 說明
수정전.jpg 수정전(修政殿)
수정전은 돌로 높고 넓게 基壇을 쌓고 그 위에 建物을 세운 것으로, 元來 이 자리엔 世宗大王 때 訓民正音 創製의 産室이었던 集賢殿 이 있었다. 1456年 世祖 가 王位에 오른 後 集賢殿을 廢止하였고, 建物은 1592年 壬辰倭亂 때 불탄 後 버려져 있었다. 1867年 (高宗 4年)에 建物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王이 나랏일을 보던 便殿으로 推定되는 이 奠物은 1894年 第1次 甲午改革 軍國機務處 로 使用되었고 以後 內閣의 廳舍로 使用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只今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役割을 하는 긴 집채人 行脚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周邊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官廳이 있었다. 西쪽에는 宮中의 經書, 文書 等을 管理하고 王의 諮問에 應하였던 玉堂과 歷代 王들이 쓴 글과 玉璽를 保管하고 書籍의 蒐集과 出版을 擔當한 검서청 等이 있었고 南쪽으로는 備邊司 의 堂上官 等 臣下들이 나랏일을 議論하던 賓廳과 王名 出納을 擔當하던 承政院 等의 建物이 迎秋門에 이르기까지 櫛比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左側 앞에는 蔣英實 自擊漏 를 세웠던 곳이라는 表式이 세워져 있다.

內戰 [ 編輯 ]

內戰은 王과 王妃가 居處하던 곳으로 王의 寢所人 康寧殿과 王妃의 寢所人 交泰殿이 連結되어 있다. 慈慶殿度 內殿에 있는데 大王大妃, 卽 王의 할머니의 居處이다.

沈澱 圈域 [ 編輯 ]

寫眞 說明
강녕전 康寧殿(康寧殿)
康寧殿은 王이 居處하던 곳인만큼 火災가 나지 않도록 神經을 썼는데, 굴뚝을 建物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康寧殿 뒤便의 交泰殿으로 가는 양의문 左右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연산군 , 人種 , 英祖 等이 居處한 곳이다. 主로 勤政殿에서 業務를 보고 이곳에서 自己도했다.

本來 康寧殿 建物은 1918年 昌德宮 으로 옮겨 지어 熙政堂 이 되었고, 現在의 康寧殿은 1995年 景福宮 復元 事業을 통해 復元했다.

康寧殿(康寧殿)에 對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 洪範九疇(洪範九疇)의 五福(五福) 中에 셋째가 江寧(康寧)입니다. 大體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德을 닦아서 皇極(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五福을 享有할 수 있으니, 康寧이란 것은 五服 中의 하나이며 그 中間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德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亦是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閑暇하고 便安하게 혼자 居處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警戒하는 마음이 番番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德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位(魏)나라 무공(武公)李 스스로 警戒한 時(詩)에,
너의 벗한 君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房에 함께 있으니, 房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무공의 警戒하고 近信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長壽했으니, 그 皇極을 세우고 五福을 누린 것의 밝은 徵驗이옵니다. 代替로 工夫를 쌓는 것은 元來가 閑暇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始作되는 것입니다. 願컨대 殿下께서는 무공의 詩를 본받아 安逸한 것을 警戒하며 恭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皇極의 福을 누리시면, 聖子神孫(聖子神孫)李 繼承되어 千萬臺를 前하리이다. 그래서 軟寢(燕寢)을 康寧殿이라 했습니다.
 
정도전 , 《 三峯集 》기09 景福宮,
또는 《 太祖實錄 》太祖 3年 10月 7日
연생전(延生殿)
연생전은 康寧殿의 小針 中 하나로 正面 7칸, 側面 4칸이다. 興宣大院君이 景福宮을 重建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回廊 및 複道角을 통해 康寧殿과 連結되어 있었으나 只今은 分離되어 있다. 1917年 11月 10日 發生한 火災로 消失된 昌德宮 復舊를 위한 資材로 活用하기 위해 撤去되었다가 1995年 景福宮 復元 事業을 통해 復元했다.
경성전(慶成殿)
경성전은 康寧殿의 小針 中 하나로 正面 7칸, 側面 4칸이다. 興宣大院君이 景福宮을 重建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回廊 및 複道角을 통해 康寧殿과 連結되어 있었으나 只今은 分離되어 있다. 1917年 11月 10日 發生한 火災로 消失된 昌德宮 復舊를 위한 資材로 活用하기 위해 撤去되었다가 1995年 景福宮 復元 事業을 통해 復元했다.
연길당(延吉堂)
연길당은 興宣大院君이 새로 營建한 康寧殿의 小針 中 하나로, 康寧殿 오른쪽에 있는 正面 4칸, 側面 3칸의 殿閣이다. 過去에는 康寧殿과 回廊 및 複道角으로 連結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只今은 分離되어 있다. 1917年 11月 10日 發生한 火災로 消失된 昌德宮 復舊를 위한 資材로 活用하기 위해 撤去되었다가 1995年 景福宮 復元 事業을 통해 復元했다.
응지當(膺祉堂)
응지黨은 興宣大院君이 새로 營建한 康寧殿의 小針 中 하나로, 康寧殿 왼쪽에 있는 正面 4칸, 側面 3칸의 殿閣이다. 過去에는 康寧殿과 回廊 및 複道角으로 連結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只今은 分離되어 있다. 1917年 11月 10日 發生한 火災로 消失된 昌德宮 復舊를 위한 資材로 活用하기 위해 撤去되었다가 1995年 景福宮 復元 事業을 통해 復元했다.
교태전 交泰殿(交泰殿)
交泰殿은 王妃의 寢殿인 中宮殿으로, 康寧殿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正面 9칸 規模의 建物이다. 嬌態란 陽과 陰이 交流한다는 뜻으로 主役 에 있는 卦 이름이다. 建物 뒤便에는 定員인 峨嵋山이 있는데 峨嵋山 을 볼 수 있도록 後面 東쪽에 마루와 房으로 連結된 乾脣角을 配置하였다. 康寧殿과 마찬가지로 龍마루 가 없는 것이 特徵이다. 廢妃 尹氏 가 居處하였고 연산군 이 태어난 곳이며, 廢妃 신氏 , 단경왕후 , 인성왕후 , 정순왕후 , 철인왕후 等이 居處하였다. 王妃는 通商 左側房을 利用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右側房에 함께 合邦하였다. 그 理由는 오른쪽은 量, 卽 賃金을 象徵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本來 交泰殿 建物은 1918年 昌德宮 으로 옮겨 지어 大造殿 이 되었고, 現在의 交泰殿은 1995年 景福宮 復元 事業을 통해 復元한 것이나 굴뚝은 高宗 當時 景福宮 重建 때의 것이다. [43]

아미산 굴뚝 峨嵋山(峨嵋山)
峨嵋山은 慶會樓의 蓮못을 판 흙을 쌓아 돋운 작은 加算(假山)이지만,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脈이 北韓産, 北岳을 지나 景福宮에서 멈춘 場所이다. [43] 峨嵋山에는 怪石의 石粉(石盆)과 石地(石池) 等 石造物이 配置되었는데, 이 가운데 寶物 811號인 峨嵋山 굴뚝이 있다. [43] 峨嵋山 굴뚝은 王妃의 寢殿인 交泰殿 溫突 房과 連結된 굴뚝으로, 1865年 (高宗 2年) 景福宮을 重建할 때 만든 것이다. 現在는 4個가 남아있는데 花崗石 址臺石 위에 甓돌로 30段 或은 31段으로 쌓고, [43] 六角形의 굴뚝 壁에는 덩굴 , , 박쥐 , 鳳凰 , 소나무 , 梅花 , 國花 , 不老草 , 바위 , , 사슴 等의 무늬를 甓돌로 구워 配列하였고 甓돌 사이에는 膾를 발라 面을 構成하였다. 十長生 , 四君子 와 長壽 富貴 等 길상의 무늬 및 火魔 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表現되어 있다.

굴뚝의 윗部分은 造形的으로 木造 建物의 形態를 模倣하였고 그 위로 煙氣가 빠지도록 粘土를 빚어서 만든 집 模樣의 裝飾을 設置하였다. 굴뚝으로서의 機能을 忠實히 하면서 各種 文樣의 形態와 構成이 매우 아름다워 宮闕 後援의 裝飾的 造形物로서 훌륭한 作品이다.

欽敬閣(欽敬閣)
欽敬閣은 交泰殿 西쪽에 자리한 正面 6칸, 側面 4칸의 殿閣으로 1438年(世宗 20年) 세종대왕이 蔣英實에게 明解 지은 一種의 天文 觀測所이다. 이곳에는 各種 天文 觀測 器具가 있었으나 1553年(明宗 8年) 火災로 消失되었다가 重建했고, 1592年(宣祖 25年) 壬辰倭亂으로 불탄 뒤 高宗 때 重建했지만 日帝强占期인 1917年 11月 10日 昌德宮의 內戰 一郭이 火災로 全燒되자 여기에 들어갈 資材로 活用하기 위해 撤去되었다가 1995年 景福宮 復元 事業을 통해 復元했다.
含元殿(咸元殿)
含元殿은 交泰殿 西쪽에 자리한 正面 6칸, 側面 4칸의 殿閣. 세종대왕이 內佛堂(內佛堂)을 設置해 佛事를 擧行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92年(宣祖 25年) 壬辰倭亂으로 消失된 後 1888年(高宗 25年) 重建했지만 日帝强占期인 1917年 11月 10日 昌德宮의 內戰 一郭이 火災로 全燒되자 여기에 들어갈 資材로 活用하기 위해 撤去되었다가 1995年 景福宮 復元 事業을 통해 復元했다.
燒廚房(燒廚房)
東宮의 北側과 慈慶殿의 南側 사이에 있으며, 宮闕 內 飮食物을 保管·調理·提供하는 食生活 空間으로, 水剌床을 비롯해 王室 잔칫床 等을 만드는 宮中 料理願이다. 大戰(大殿)의 飮食을 만들던 곳이다.
壬辰倭亂 때 消失되었다가 高宗 2年(1865年) 景福宮 再建 時 다시 지어졌다. 日帝 强占期인 1915年 朝鮮 物産 공진회가 開催되면서 여러 殿閣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가 2015年 2月 16日 復元했다.

軟寢 圈域 [ 編輯 ]

寫眞 說明
자경전 慈慶殿(慈慶殿) 慈慶殿 十長生 굴뚝
寶物 809號인 자경전은 王妃의 正寢(正寢)인 景福宮 交泰殿 東쪽에 자리잡고 있다. [43] 王이 世上을 떠나면 交泰殿에 있던 王妃는 對比로 높여져 正寢인 交泰殿을 새로 中前이 된 王妃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對備가 交泰殿에서 옮겨와 主로 머물던 곳이 慈慶殿이다. [43]

現存하는 沈澱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唯一한 建物로, 現在의 자경전은 조大妃를 위해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高宗 2年(1865年)에 지은 뒤 불에 탄 것을 高宗 25年(1888年)에 再建한 것이다. [43] 全面 마당 桐ㆍ南ㆍ西쪽에는 各各 東行脚, 南行脚, 西行脚이 一郭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44] 慈慶殿 뜰 앞 왼쪽에는 돌짐승 彫刻像이 있고,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다. [44]
자경전의 담牆은 甓돌로 模樣을 내어 꾸몄는데 大王大妃 조氏를 위해 지었던 建物인 만큼 萬(卍), 수(壽), 福(福), 江(康), 녕(寧) 等의 글字들과 소나무 , 國花 , 거북 等, 蓮꽃 , 대나무 , 모란 等의 大王大妃의 壽福康寧을 祈願하는 意味가 있는 文樣들로 이루어져 있다. 例를 들어 萬(卍)의 境遇 글字의 模樣을 繼續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永遠하다는 意味를 지니고, 거북 等 그림의 境遇 長壽하는 動物 中 하나가 거북이므로 亦是 大王大妃의 長壽를 祈願하는 것이다. 慈慶殿 厚情 담의 中央部에는 慈慶殿 十長生(十長生) 굴뚝이 있다. [44] 이 굴뚝은 담보다 한단 앞으로 나와 長臺石 基壇을 놓고 그위에 前돌로 쌓아 담에 덧붙어있다. [44] 壁面 上部에는 小路 및 창방 小까래 模樣을 前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建物 模樣으로 만들고 十長生 무늬로 裝飾하였다. [44]

興復戰(興福殿)
興復戰은 景福宮의 大妃殿中 하나로 彰義宮의 函日材를 옮겨왔다고 傳해진다. 重建 後 王의 公式的인 業務 및 行事를 보는 곳으로 쓰인다. 以後 신정王后가 1890年(高宗 27年) 이 곳에서 昇遐하였다. 以後 高宗의 命에 따라 北行脚이 慶運宮 擴張 資材로 쓰이고, 日帝强占期 時節인 1917年 昌德宮에서 發生한 火災로 인한 內戰 再建에 資材로 쓰이기 위해 본채 自體가 헐려 사라졌다가 2010年代에 復元하지만 興復前의 (北, 西)行脚은 復元되지 않았다. 宮闕 復元 中 처음으로 內部를 現代式으로 配置하였다.
집경당(緝敬堂) 함화당(咸和堂)
집경당과 함화당은 1860年代에 景福宮을 重建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다. 그러다 1890年代에 元來 그 자리에 있던 椿姬黨과 보광당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이 집경당과 함화당이다. 日帝强占期 때 東宮터에 지은 朝鮮總督府 博物館을 運營하면서 事務室로 쓰기 위해 헐지 않고 남아 있었으나 殿閣 周邊의 行脚과 門을 헐렸다.
以後 2000年代 後半에 行脚 復元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複道로 連結되어 있으며, 高宗이 건청궁에 머물 當時 여기서 外國 使臣을 接見했다는 記錄이 남아 있다.

慶會樓 一帶 [ 編輯 ]

寫眞 說明
경회루와 연못 慶會樓(慶會樓)
慶會樓는 景福宮에 있는 樓閣으로, 國寶 第224戶이다. 이곳은 朝鮮 時代에 나라의 慶事가 있을 때 大宴會를 베풀던 곳으로, 只今의 靑瓦臺 迎賓館 에 該當된다. [45] 只今의 慶會樓는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1867年에 새로 지은 建物로, 南北으로 113m, 東西로 128m가 되는 크고 사각진 人工 蓮못 안에서 東쪽으로 치우친 네모난 섬 위에 지은 正面 7칸, 側面 5칸 規模의 2層 樓閣 建物이다. [45] 元來 慶會樓는 景福宮을 創建할 當時 西쪽 濕地에 蓮못을 파고 세운 작은 樓閣이었는데, 太宗 12年(1412年)에 蓮못을 넓히고 建物도 다시 크게 完成하였다. [45] 太宗은 昌德宮에서 政務를 보며 景福宮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中國 使臣이 왔을 때 宴會 場所를 마련하고자 이 樓閣을 지었다. [45]
慶會樓는 單一 平面으로는 韓國에서 가장 規模가 큰 樓閣이다. [46] 이와 같이 巨大한 規模의 建物을 물 속에 人工으로 造成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基礎를 견고히 하여 잘 견딜 수 있도록 한 點, 巨大한 建物을 簡潔한 救助法으로 處理하면서도 王室의 宴會 場所를 合當하게 잘 治粧한 點, 2層 壘에서 仁王山, 北岳山, 南山 等 周邊 景觀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도록 한 點, 1層 建物 周邊을 돌 臺 防止(方池)의 물과 堂主를 바라보며 鑑賞토록 한 點 等이 높이 評價할 만하다. [46]

未復元 殿閣 [ 編輯 ]

  • 認知當
  • 자미당
  • 通話當
만경전 [ 編輯 ]

만경전(萬慶殿)은 大王大妃의 寢殿인 景福宮 慈慶殿 北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景福宮 創建 當時에는 存在하지 않았고, 高宗 때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지어졌다. 大妃殿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1870年代에 두 次例에 걸쳐 發生한 內戰 圈域 火災에도 無事했기 때문에 한동안 高宗이 康寧殿을 代身하는 正寢으로 使用하였다. 以後 이 곳에서 大王大妃 신정王后의 八旬 進饌禮를 열기도 했다. 北闕圖型이 作成되던 1907年 當時엔 만경전 周圍 行脚들이 標示되어 있으나 1916年 朝鮮物産공진회 當時 地圖엔 본채만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複道各科 行脚들이 全部 撤去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日帝强占期인 1917年 火災로 사라진 昌德宮 內戰 領域을 復舊하기 위해 毁撤되었고, 본 建物은 現在 昌德宮 經訓角이 되어 있다. 文化財廳은 2031年 ~ 2042年에 걸쳐 進行할 "宮中儀禮圈域 復元 整備 事業"의 一環으로 만경전 領域의 行脚과 複道角을 짓기로 하였다.

만화당 [ 編輯 ]

만화당(萬和堂)은 對備前인 景福宮 만경전 北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景福宮 創建 當時에는 存在하지 않았고, 高宗 때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897年에 高宗의 指示로 慶運宮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北闕圖型에선 只今은 없는 殿閣으로 標示되어 있다. 慶運宮으로 옮겨진 만화당은 正寢인 함녕전으로 불리게 된다. 원 만화당 殿閣은 1904年 慶運宮 大火災 當時 消失되었고 以後 再建된 함녕전은 以前과는 若干 다른 모습으로 再建된다.

건청궁 圈域 [ 編輯 ]

건청궁 1873年 朝鮮王朝 歷代 임금의 肖像畫인 御眞(御眞) 等을 保管할 目的으로 지어졌다가 1895年 明成皇后 弑害 事件인 乙未事變이 있기까지 高宗과 明成皇后의 居處로 使用되었다. [47] 乙未倭變 이듬해인 1896年 高宗 러시아 公館으로 居處를 옮긴 後 日帝는 1909年 건청궁을 撤去하고 그 자리에 朝鮮總督府 美術館을 지었는데, [48] 이 美術館은 解放 後 한동안 國立現代美術館 으로 使用되다가 1998年 에 撤去됐다. 2007年 10月 18日 日帝가 撤去한 건청궁이 復元돼 一般人에게 公開됐다. 건청궁 復元工事는 景福宮 復元·整備事業의 5段階 事業인 光化門 및 其他 圈域 復元·整備計劃의 一環으로 2004年 6月에 始作돼 3年 4個月 만에 完工됐다.
高宗은 건청궁을 王의 私費人 內帑金으로 建立했다. 高宗이 興宣大院君을 벗어나 親庭을 宣言한 1873年에 지어졌다는 點 等으로 인해, 건청궁 創建은 政治的 自立 宣言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49] 건청궁은 昌德宮 延慶堂 및 樂善齋와 더불어 一般 士大夫의 邸宅과 類似하게 안채와 舍廊채로 區分된 建築 形式을 지니고 있으며, 王의 居處인 장안당과 王妃의 居處인 鯤녕합, 그리고 附屬 建物인 復讐當 等이 配置돼 있다. 뜰에는 高宗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 高宗柹 ' 감나무가 慶尙南道 山淸郡 의 寄贈으로 植栽되어 있다. [50]
2007年 復元 以後 木材가 썩는 等의 現象이 보였고, 調査 結果 지붕이 잘못지어져 漏水되는 것으로 알려져 不實 復元 論難이 일었다. [51]

寫眞 說明
장안당 장안당(長安堂)
장안당은 高宗皇帝의 沈澱이다. 舍廊채의 槪念으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平安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칸, 側面 3칸, 7輛의 建物이다. 장안당에는 北行脚과 東行脚이 딸려 있는데 北行脚은 1887年 美國의 에디슨電氣會社 가 發電機를 設置해 韓國 最初로 電氣불을 밝힌 곳으로 有名하다. [52] [53] 乙未事變 當時, 高宗은 이 곳에 監禁된 狀態였다고 傳해진다. [54]
鯤녕합(坤寧閤)
鯤녕合은 명성황후 의 沈澱으로 民家의 안채에 該當된다. 鯤녕합 內部에는 文化財廳 이 依賴해 無形文化財 匠人들이 宮中遺物基準에 따라 復元한 者개寢臺 等 宮中生活用品 300餘點이 展示되어 있다. [55] 장안당과는 複道角을 통해 連結되어 있다. 鯤녕(坤寧)은 '땅이 便安하다'는 뜻으로 王妃의 德性을 表現하는 것으로 [56] 紫禁城 의 鯤녕宮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推定된다. [57] 鯤녕合意 南쪽 樓閣인 옥호루(玉壺樓)는 明成皇后가 弑害되었던 場所로 알려져 있다.
復讐當(福綏堂)
復讐當은 別채에 該當되는 建物이다. 宮人들의 居所로 推定된다.
關門角(觀文閣)
關門覺은 高宗 의 書齋로, 元來 傳統的인 木造建物 關門黨이었다. 그러다 1891年에 러시아 建築家 阿罷拿視 세레딘사바틴 의 設計로 改築되었다. 景福宮 안의 唯一한 西洋式 建物로, 2層 規模인 것으로 알려졌다. 關門覺은 洋館이라 불리며 主로 外國人을 接見하기 위한 場所로 쓰였다. [49] [58] 다만 工事 過程에서 管理들의 非理와 不實 工事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59] 結局 不實工事로 1901年 헐리게 되면서 [60] 그 存在 自體에 對해 알려지지 않아 景福宮 復元 計劃에서 除外되었고, 以後 건청궁 復元 事業이 進行될 때도 復元되지 못하고 現在 터만 復元되었다. [61] 1992年 1月 關門角의 存在가 寫眞帖 等을 통해 確認되었다. [62]
향원정 향원정(香遠亭)
향원정은 景福宮 後援에 있는 樓閣이다.
2層 規模의 翼工式(翼工式) 기와지붕. 樓閣의 平面은 正六角形이며, 長臺石(長臺石)으로 段을 모으고, 짧은 六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層과 2層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分合(四分閤)을 놓았다. 特히 蓮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年에 세운 것으로 推定된다. 高宗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後援人 서현정 一帶를 새롭게 造成하였는데 蓮못 한가운데 人工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六角形 亭子를 지어서 ‘香氣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香原紙를 건너는 다리는 “香氣에 取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朝鮮時代 蓮못에 놓인 木橋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元來는 취향교가 北쪽에 있어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었으나 日帝强占期 當時 이를 허물고 日本風으로 나무 적심 위에 簡易다리를 새로 놓는다. 이 다리는 以後 6.25 戰爭때 破壞되었다가 1953年에 觀覽 便宜를 위하여 本來의 자리가 아닌 향원정 南쪽에 다시 세워졌었다. 그 뒤 2017年부터 約 4年에 걸친 향원정 補修工事 때 元來의 位置인 北쪽에 아치형 木橋로 다시 지었다.
香原紙의 根源은 地下水와 裂傷震源샘이며, 이 물은 慶會樓의 臙脂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集玉齋(集玉齋)
集玉齋는 高宗이 個人 書齋 兼 專用 圖書室로 使用하던 建物이다. 神武門의 東쪽에 있으며 正面 5칸, 側面 4칸 規模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建物의 側面 左右 끝에 牔栱을 달아 壁面 上部가 三角形으로 된 맞배집으로 道理가 7個로 된 지붕틀을 쓴 七樑 構造다. 景福宮의 다른 殿閣들과 달리 中國 式 樣式으로 지어졌다.

頻傳?混戰 圈域 [ 編輯 ]

胎原電 [ 編輯 ]

寫眞 說明
胎原電(泰元殿)
胎原電은 王의 妃嬪들이 살던 곳으로, 太祖 李成桂 御眞 (御眞: 임금의 畫像)李 奉安됐던 곳이자, 명성황후 의 頻傳(殯殿)으로도 活用되었다. [63] 殯殿은 殯所의 높임말로, 王이 죽으면 陵으로 옮기기 前까지, 그곳에서 屍身을 모시고 儀禮를 치렀다. 그러나 胎原電은 20世紀 秒에 撤去되어, 그 자리에 日本軍과 美軍 뿐만 아니라, 靑瓦臺 가 바로 뒤인 關係로 97年까지 韓國軍도 駐屯해 있었다. [64] 現在 옛 모습대로 建物이 復元되었다. 高宗 때 胎原電의 建築 理由는 王의 嫡統이 아니라 入養된 高宗이 自身의 正統性을 내세우기 위해 建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景福宮의 西北쪽 一帶는 頻傳(殯殿)이나 混戰(魂殿), 榮轉(靈殿) 같은 祭祀와 關聯된 殿閣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殯殿은 王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棺을 모셔두는 곳이고 混戰은 宗廟에 모실 때까지 萬 2年 동안 位牌를 모시는 곳이며, 榮典은 돌아가신 분의 肖像畫를 모시고 祭祀를 지내는 곳이다. 胎原電은 朝鮮을 建國한 太祖 李成桂의 肖像畫를 모시던 建物이다. 나중에는 殯殿이나 混戰으로도 쓰였다.
이곳은 宮 안 외진 곳이어서 閑寂한 雰圍氣를 자아내고 있다. 高宗은 胎原電 齋室인 孔墨材에 머물면서 臣下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 胎原電 建物은 20世紀 初에 撤去되었다가 只今 옛 모습대로 建物이 復元되었다. 建物은 祭祀 지내는 집답게 端正하고 嚴肅한 外觀을 갖추고 있다.

未復元 殿閣 [ 編輯 ]

  • 문경전
  • 膾安全

東宮 圈域 [ 編輯 ]

東宮은 王世子와 王世子빈의 生活空間이며, 王世子의 敎育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東宮은 世子宮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資善堂(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李 週 殿閣이고, 世子의 敎育을 擔當하는 世子侍講院(春坊)과 警護 任務를 遂行하던 世子翊衛司(季方) 等으로 이루어져 있다. 景福宮 創建 時에는 宮內에 東宮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世宗大(1427年)에 와서 創建된다. 資善堂에서는 文宗 의 長子 斷種 연산군 의 長子 李滉 이 태어났으며, 德宗 , 世子 時節의 연산군 , 연산군 의 世子 李滉 , 人種 , 순회세자 , 驍將世子 等이 居處하였다. 또한 高宗 代 景福宮 重建 後에는 順從이 居處를 하였다. 現在의 東宮은 1999年 資善堂과 비현각 領域이 復元되었고, 2023年에 界調黨 領域이 復元되었다.

寫眞 說明
자선당 資善堂(資善堂)
자선당은 世子와 世子嬪의 居處다. 入口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 房에 世子가 살았으며, 맞은 便인 왼쪽 房에 世子嬪이 살았다. 日帝時代 當時, 建物 全體가 日本에 건너가 李王家博物館으로 쓰이다가 1923年 關東大地震으로 터만 남아 버려져 있던 것을 1995年에 返還받아 現在 건청궁 옆으로 옮겨두었다. 現存 建物은 1999年에 새로 지은 것이다.
界調黨(繼照堂)
界調黨은 여러 行事 때 王世子가 祝賀를 받는 곳으로 使用하였다. 以後 日帝强占期를 거치며 사라졌고 한 때 빈 터로 남아있었으나 "景福宮 2次 復元 整備 事業"의 一環으로 2023年에 復元되었다.
비현각(丕顯閣)
비현각은 크고 밝은 殿閣이란 뜻으로 世子가 스승을 모시고 學問을 硏磨하던 곳이다. 1915年 資善堂과 함께 撤去되었다. 現存 建物은 1999年에 새로 지은 것이다

璿源殿 圈域 / 未復元 [ 編輯 ]

璿源殿 [ 編輯 ]

璿源殿(璿源殿)은 歷代 王들의 御眞을 모시고 祭祀 지내던 進展(眞殿)이었다. 璿源殿은 高宗 代 景福宮 重建 當時 세워졌으며 只今의 國立民俗博物館 자리에 있었다. 日帝强占期 直後 景福宮의 所有가 朝鮮總督府로 넘어가면서, 日帝는 璿源殿 周邊의 附屬 建物과 行脚들을 大部分 撤去했다. 1931年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인 박문사를 奬忠壇에 지으면서 璿源殿 本채를 옮겨다 使用했다. 建物은 光復 直後에 火災로 불타 없어졌다. 1960年代 大韓民國 政府는 當時 국립중앙박물관을 璿源殿 領域에 지으면서 이 一帶에 그나마 남아있던 경안黨 等의 殿閣들을 撤去하고 博物館을 지었다. 이 工事로 인해 當時까지 남아있던 璿源殿 遺構가 甚하게 毁損되었다. 文化財廳은 2031年 ~ 2042年에 걸쳐 進行할 "宮中儀禮圈域 復元 整備 事業"의 一環으로 國立民俗博物館 建物을 撤去하고 璿源殿 및 混戰 領域의 建物 23棟을 짓기로 하였다.

경안黨 [ 編輯 ]

景福宮管理所 [ 編輯 ]

北元 [ 編輯 ]

2022年 8月 末 文化財廳은 ‘景福宮 後援 基礎調査 硏究’를 始作해 (寺)韓國建築歷史學會 等에 用役하여 2022年 8月 25日부터 12月 23日까지 調査하였다. [65]

景武臺 圈域 [ 編輯 ]

융문당 [ 編輯 ]
융무당 [ 編輯 ]

玉輦情 圈域 [ 編輯 ]

吳雲閣 [ 編輯 ]
玉輦情 [ 編輯 ]

慶農齋 圈域 [ 編輯 ]

文化財廳의 後援 基礎調査를 통해 慶農齋 圈域의 位置는 靑瓦臺 警護室 A洞 北쪽 建物 上部와 迎賓館 建物 가장자리 쪽에 지희실, 관풍루, 慶農齋, 代喩헌 等 建築物이 位置하였던 것으로 確認되었다. [66]

大衆文化 [ 編輯 ]

기타 [ 編輯 ]

解說 [ 編輯 ]

스쿨랩-

韓國語, 中國語, 英語, 모두 可能한 靑少年들이 하는 無料 奉仕 解說

많은 敎育과 試驗을 거쳐 正式 解說師가 된것이니 믿을 수 있다.

永訣式 [ 編輯 ]

1974年에는 육영수 의 永訣式이, 1979年에는 朴正熙 前 大統領의 永訣式이, 2006年에는 최규하 前 大統領의 永訣式이, 2009年에는 盧武鉉 前 大統領의 永訣式이 흥례문과 光化門 사이의 空間에서 열렸다. [67]

全面開放 [ 編輯 ]

2018年 12月 以前까지 景福宮으로 出入할 수 있는 門은 南쪽의 光化門, 北쪽의 神武門, 東쪽의 國立民俗博物館 出入門 等 總 세 곳이었다. 2018年 12月, 景福宮과 西村 地域 訪問 觀覽客의 便宜를 높이고 經濟 活性化를 위해 追加로 序文 迎秋門을 43年 만에 開放하면서 景福宮의 桐·西·男·北 모든 곳에서 出入이 可能해졌다. [68]

夜間開場 [ 編輯 ]

2010年 서울 G20 頂上會議 의 成功的인 開催를 祈願하기 위해 始作된 것으로, 2010年 11月 9日에 처음으로 夜間 開場이 實施되었다. [69] [70] 以後 定例化되어 年 2回 實施되었으나, 入場客의 制限없이 開放하자 하룻밤에 4萬餘名이 訪問하기도 했다. 特히, 술판을 벌이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一部 觀覽客들의 態度때문에 論難이 크게 일며, 文化財廳 이 對策없이 性急하게 推進했다고 批判의 목소리가 있었다. [71] [72] 2014年부터는 하루 最大 觀覽 人員을 1500名으로 制限하고, 月 2回 總 48日間 實施된다. [73] 2021年 4月부터 進行된 2021年 上半期 景福宮 夜間 觀覽은 하루 最大 觀覽 人員을 2000名(事前 豫賣 1700名, 現場 發券 300名)으로 制限하였다. [74]

定期休館 [ 編輯 ]

景福宮은 다른 弓과 달리 火曜日에 정기휴管을 實施한다.

撮影地 [ 編輯 ]

2018年부터 2019年까지 放映된 드라마 皇后의 品格 의 撮影地 背景이다.

寫眞 [ 編輯 ]

交通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註解 [ 編輯 ]

  1. 임금이 居處하는 곳을 옮긴다는 뜻이다.

各州 [ 編輯 ]

  1. 글로벌稅契對百科 》〈 서울의 社會·文化#景福宮
  2. 글로벌稅契對百科 》, 〈王權의 再確立과 鎖國策〉, 景福宮.
  3. 太祖實錄 6卷, 太祖 3年 9月 9日 丙午 2番째 記事
  4. 異常해, 2004, p.37.
  5. 異常해, 2004, p.39.
  6. 金東旭, 1998, p.15.
  7. 精巧 (鄭喬) 저, 趙匡(趙珖) 篇, 《 大韓季年史 1》(소명출판, 2004年) 47~48쪽.
  8. 太祖 4年 9月 29日 記事
  9. 金東旭, 1998, p.17.
  10. 世宗 61卷 15年 7月 21日
  11. 金東旭, 1998, p.16.
  12. “‘景福宮’ 初期 모습 알려주마?” . 週刊東亞. 2002年 12月 27日.  
  13. 異常해, 2004, p.43.
  14. 이강근. “우리歷史넷” . 2020年 7月 21日에 確認함 .  
  15. 《先祖修正實錄》 25年 4月 14日.....都城의 宮城(宮省) 009) 에 불이 났다. 巨加가 떠나려 할 즈음 都城 안의 侃諤한 百姓이 먼저 內帑庫(內帑庫)에 들어가 寶物(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巨加가 떠나자 難民(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掌禮院(掌隷院)과 刑曹(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官署에 工事 奴婢(公私奴婢)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宮城의 倉庫를 크게 擄掠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痕跡을 없앴다. 景福宮(景福宮)·昌德宮(昌德宮)·昌慶宮(昌慶宮)의 세 宮闕이 一時에 모두 타버렸는데, 昌慶宮은 바로 巡廻 世子嬪(順懷世子嬪)의 欑宮(?宮) 010) 이 있는 곳이었다.
  16. 韓國史 常識 바로잡기 39張 372~381쪽
  17. `用意 世界인가, 仙界인가` , 《聯合뉴스》, 2008.4.7.
  18. 《고종실록》(卷2 高宗2年 4月2日)
  19.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舊韓國外交文書》.  
  20. 異常해, 2004, p.46.
  21. 異常해, 2004, p.44.
  22. 異常해, 2004, p.45.
  23. 異常해, 2004, p.47.
  24. 문교부長官 (1963年 1月 21日). “官報 號外(氣2)” . 문교부考試第174號. 12- 74(外240-外302) 가운데 12쪽 , 68쪽 쪽. 第117號 景福宮, 서울特別市 鍾路區 세종로 1, 垈, 185,841坪, 國有, 國寶와 美術館等의 現代建築物을 除外한 地域內 地上物 一切를 包含. [第117號 景福宮, 서울特別市 鍾路區 세종로1, 臺(대지), 185,841坪, 國有, 國寶와 美術館等의 現代建築物을 除外한 地域內 地上물 一切를 包含.]  
  25. 文化財廳 宮陵管理과 (2007年 8月). 景福宮 變遷史 (上) 景福宮 變遷過程 및 地形分析 學術調査 硏究用役 (報告書). 文化財廳. 100쪽.  
  26. 國立故宮博物館 언제 門 여나 , 《오마이뉴스》, 2005.3.31.
  27. 文化財廳 宮陵管理과 (2007年 8月). 景福宮 變遷史 (上) 景福宮 變遷過程 및 地形分析 學術調査 硏究用役 (報告書). 文化財廳. 95쪽.  
  28. 文化財廳 宮陵管理과 (2007年 8月). 景福宮 變遷史 (上) 景福宮 變遷過程 및 地形分析 學術調査 硏究用役 (報告書). 文化財廳. 101쪽.  
  29. ‘景福宮 1車整備’ 康寧殿 等 89棟 本모습 되찾아. 文化日報, 2010.08.12
  30. 景福宮 復元 20年 計劃 9月 終了, 聯合뉴스 2010.07.01
  31. 光化門 本來 모습 찾기 "大長程이 始作된다" , 노컷뉴스, 2006年 11月 23日
  32. 光化門 어떻게 달라졌나… 제자리 찾고 原形 살리고 民族氣像 세운 大役事 , 國民日報, 2010年 8月 13日
  33. 박찬정 (2010年 6月 23日). “第2次 景福宮 綜合整備 事業 槪要” . 《文化財廳》.  
  34. 文化財廳 (2010年 6月 23日). 景福宮 2次 復元整備 計劃報告 (報告書). 文化財廳. 12쪽.  
  35. 배한철 (2013.04.23 17:03:22). “`朝鮮 正宮` 景福宮 折半만 復元한다” . 《每日經濟》 (A32面).  
  36. 現地 案內文 認容
  37. 宮闕의 懸板과 柱聯-景福宮_德陽門, 기별청, 수정전 , 文化財廳
  38. 異常해, 2004, p.49.
  39. 異常해, 2004, p.48.
  40. 최연, 景福宮...뿌리깊은 이야기 , 프레시안, 2013年 12月 25日
  41. 景福宮(景福宮) 萬春殿(만춘전) 復元된다 , 東亞日報, 1988年 3月 17日
  42. 문중양, 科學遺物 復元 더 늦출수 없다 , 東亞日報, 2005年 1月 9日
  43. 異常해, 2004, p.56.
  44. 異常해, 2004, p.57.
  45. 異常해, 2004, p.54.
  46. 異常해, 2004, p.55.
  47. 〈明成皇后 弑害당한 건청궁 復元돼〉, 한겨레新聞, 2007.10.18
  48. 건청궁, 悲劇의 歷史도 復元되야 한다. 한겨레新聞, 2007.10.19
  49. 김승욱, 건청궁은 朝鮮 近代化의 産室 , 聯合뉴스, 2007年 10月 19日
  50. 오대일, 復元 건청궁에 入闕한 감나무 '高宗柹' , 노컷뉴스, 2007年 10月 18日
  51. 송수진, 景福宮 건청궁, 100億 들인 不實 復元 , KBS, 2011年 11月 16日
  52. 文化財廳 50年史, 文化財廳, 575쪽
  53. 김민호, 明成皇后 弑害된 悲劇의 現場 건청궁 98年만에 復元 , 國民日報, 2007年 10月 18日
  54. 황정옥, 119年 前, 건청궁에선 想像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 中央日報, 2014年 4月 29日
  55. 이혁진, 건청궁의 슬픈 過去 아시나요? , 政策브리핑, 2010年 8月 20日
  56. 김태식·김승욱, 명성황후 悲劇 現場 건청궁 復元(綜合) , 聯合뉴스, 2007年 10月 18日
  57. 임종업, 沒落한 王朝 슬픔 안고 한世紀만에 돌아오다 , 한겨레, 2007年 10月 18日
  58. 허성준, 100餘年 前 求한 말 建築의 中心, 세레眞 사바찐① , 조선비즈, 2013年 12月 14日
  59. 허성준, 乙未事變 目擊한 異國(異國) 땅의 建築家 사바찐② , 조선비즈, 2013年 12月 21日
  60. 朴善英, 乙未事變 悲劇 100餘年 만에 열려 , 韓國日報, 2007年 10月 18日
  61. 송민섭, 明成皇后 弑害 場所 건청궁, 歷史空間으로 再誕生 , 世界日報, 2007年 10月 18日
  62. 國內最初의 宮苑內 洋館 觀文閣모습 첫公開 , 聯合뉴스, 1992年 1月 11日
  63. <朝鮮의 宮闕과 宗廟>, 2010, 文化財廳
  64. 변선구 記者 (2003年 12月 4日). “體驗 테마가 있는 旅行 : 古宮엔 이야기가 있다” . 中央日報 . 2020年 8月 30日에 確認함 .  
  65. 宮능遺跡本部, 復元整備과 (2023年 1月 3日). 靑瓦臺 圈域(景福宮 後援地域)은 建築, 景觀的 價値와 함께 歷史의 報告 (報告書). 文化財廳.  
  66. 한라온 (2022年 8月 12日). “靑瓦臺 境內 景福宮 北元 推定配置도(융문당, 융무당 包含)” . 《네이버 블로그》.  
  67. 정윤섭 記者, 강병철 記者 (2009年 5月 29日). “政治權, 景福宮 永訣式 `悲痛의 눈물 ' . 聯合뉴스 . 2009年 5月 31日에 確認함 .  
  68. “景福宮” . 2022年 5月 23日에 確認함 .  
  69. 이승현, 가을밤, 景福宮 나들이 어때요? , YTN, 2010年 11月 10日
  70. 이채민, 景福宮 夜間開場 "밤에도 아름다운 宮 鑑賞하세요" , 머니투데이, 2012年 5月 17日
  71. 오상도, 亂場판 된 景福宮의 밤… “夜間開場 常設化·觀覽客 制限” 목소리 , 서울新聞, 2013年 6月 7日
  72. 권효준, 景福宮 夜間 開場 가봤더니 … 네티즌 觀覽客 態度 批判 洑물 , 韓國經濟, 2013年 5月 27日
  73. 현지윤, 昌慶宮·景福宮 夜間開場, 하루 觀覽人員 制限된다 , 머니투데이, 2013年 9月 26日
  74. 이, 鑄型 記者 (2021.03.22). “景福宮 夜間 觀覽 4月 1日 開場‥밤하늘 별빛 아래 宮闕 거닐기” . 《아시아엔》 . 2021年 4月 22日에 確認함 .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