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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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朴泳孝
朝鮮의 漢城府判尹
任期 1882年 陰曆 12月 29日 ~ 1883年 陰曆 3月 16日
前任 이돈응
後任 조경호
君主 高宗 李兄

朝鮮의 京畿道 光州留守 兼 守禦使
任期 1883年 陰曆 3月 17日 ~ 1883年 12月 10日
君主 高宗 李兄

이름
別名 兒名(兒名)은 박무량 (朴無量)
爵位(爵位)는 金陵위 (錦陵尉)
者(字)는 자순(子純)
號(號)는 춘고(春皐), 玄玄居士(玄玄居士)
身上情報
出生日 1861年 6月 12日 ( 1861-06-12 )
出生地 朝鮮 京畿道 水原
死亡日 1939年 9月 21日 ( 1939-09-21 ) (78歲)
死亡地 日帝强占期 朝鮮 京城府 鍾路房 에서 兵士
經歷 漢城府 判尹
正當 急進開化派 後裔
父母 박원양 (簿)
全의 李氏 (某)
兄弟姊妹 박영교 (兄)
박영호(兄)
配偶者 本部인 영혜翁主
그 外 側室 3名
子女 박묘옥(庶女)
박진서(庶子)
박일서(庶子) [1]
親姻戚 熟議 范氏 (丈母)
宗敎 儒敎 ( 性理學 )

박영효 (朴泳孝(Park Young-hyo), 1861年 6月 12日 ~ 1939年 [2] 9月 21日 )는 朝鮮 京畿道 光州留守 兼 守禦使 職責을 지낸 朝鮮 末期의 文身 , 政治人 , 思想家 , 作家 急進開化派 이다.

그는 哲宗 駙馬 (사위)로 高宗 의 親戚 妹弟가 되며 金陵위 上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甲申政變 을 일으켰고 甲午改革 을 主導했으며 모두 失敗해 都合 20餘 年이 넘는 日本 亡命 生活을 해야 했다. 1882年 도일(渡日) 中 배에서 高宗 의 名으로 製作된 ' 이응준 太極旗 ' 中 4卦(卦)의 座·右를 바꿔 재도안했고 이것이 太極旗 의 原形이 됐다. [3]

1884年 김옥균 , 홍영식 , 윤치호 , 서재필 , 서광범 等 同門受學들과 甲申政變 을 일으켰으나 失敗하고 日本 에 亡命했다가, 淸日 戰爭 에 勝利한 日本을 등에 업고 歸國해 다시 甲午改革 을 主導했다. 章程 13萬 8千 字에 達하는 改革 上疏文을 올려 世上을 놀랬지만 呼應을 얻지 못하고 開化派들과 함께 日本 으로 다시 쫓겨갔다. 日本 亡命 期間 高宗 의 廢位를 祈禱했다고 謀陷을 받았지만 외려 1907年 高宗 皇帝 兩位를 막으려다 親日派들의 손으로 投獄, 流配되기도 했다.

庚戌 國恥 事件 後 日本 政府에게 받은 銀釵 工事金 28萬원으로 日帝强占期 初盤에는 企業과 銀行 活動에 專念했으며, 以後 中樞院 顧問과 貴族院 議員, 朝鮮總督府 傘下 朝鮮史 編修會 顧問도 지냈다. 이 때문에 2002年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모임이 發表한 親日派 708人 名單과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名單에 收錄됐다.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에도 包含됐다.

어릴적 이름은 無量(無量), 者(字)는 자순(子純), 號는 춘고(春皐), 玄玄居士(玄玄居士), 本貫은 潘南 이며, 日本 式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 ( 言語 誤謬(aj): 山崎永春 [4] )로, 甲申政變 失敗 後 亡命할 때 치토세마루 號 船員 츠地 度쥬로(?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4] .

老論 으로 北學派 박규수 (朴珪壽), 劉大致 , 오경석 의 文人이다. 京畿道 水原 出身.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1861年 生員 박원양 과 이윤행(李潤行)의 딸 全의 李氏의 아들 [5] 京畿道 水原 에서 태어났다. 그의 家計는 광해군 義禁府 判事 를 지냈던 梧倉 박동량 의 後孫으로, 仁祖 反正 以後 200餘 年의 老論 執權 期間 동안 名門 巨族 반남 朴氏 의 一翼을 擔當했다. 北學派 朴智元 , 박규수 [6] , 開化黨 同志 박정양 [7] , 後日 甲午改革 失敗 後 亡命客이 된 朴泳孝를 赦免復權시키는 박제순 [8] 亦是 모두 같은 一族이었다. 親父 박원양은 세 番 結婚했는데 그는 마지막 後妻인 全의 李氏의 所生이었다. 慰勞는 누나 두 名, 兄 박영교 와 박영호(朴泳好)가 있었다.

曾祖父인 박해수(朴海壽)는 淫書로 通訓大夫 品階에 鎭安 縣監 을 지냈고, 祖父 剝製當(朴齊堂)은 벼슬이 없었으나 아버지 박원양은 生員試에 合格 後 朴泳孝가 8歲가 되던 해에 淫書로 縣監을 지냈다. 大科에 及第하진 못했으나 縣監 在職時 善政을 베푼 것이 暗行御史의 눈에 띄어 蔭敍職으로는 드물게 昇進까지 했다.

少年期 [ 編輯 ]

朴泳孝는 刑 박영교 를 따라 當時 弘文館 提學이던 박규수 의 門下生이 됐다. 朴珪壽와 劉大致 에게서 새 文物에 對한 情報와 開化思想을 배우고 朱子學 에 對한 批判的 視角과 함께 開化에 對한 時代的 要求를 깨닫게 됐다. 어윤중 , 김옥균 , 김윤식 , 홍영식 , 유길준 , 서광범 , 서재필 , 윤치호 等 同門受學했던 이들과 後日 開化黨 을 지었다. 當時 首席 譯官 資格으로 朴珪壽의 淸나라 行 使臣團에 있었던 오경석 에게서도 배웠다.

修道僧 資格으로 日本에 자주 드나들던 이동인 이 들여온 望遠鏡과 地球본을 보고 衝擊을 받는 한便, 吳慶錫이 베이징 에서 가지고 온 〈海國圖志〉(海國圖志)·〈瀛環志略〉(瀛環志略) 等 淸나라 및 外國의 開化書籍을 同門受學들과 돌려보면서 開化, 改革의 必要性을 切感했다. [9]

結婚과 死別 [ 編輯 ]

1872年 (高宗 9年) 陰曆 4月 , 11歲 때 哲宗 의 一點 남은 血肉이자 高宗 의 四寸 [10] 영혜翁主 의 駙馬를 落點하게 되자 右議政 으로 昇進한 스승 박규수 水原府 留守 신석희 (申錫禧)의 推薦으로 揀擇됐다. 翁主와의 婚姻으로 그는 金陵위(錦陵尉)의 封爵과 上輔國崇祿大夫 品階를 받고 三政丞과 같은 班列에 올랐다. 高宗의 親兄 이재면 의 品階보다 높았다. 아버지 박원양은 곧 工曹判書에 올랐으며, 죽은 祖父 剝製黨은 崇政大夫 兼 議政府 左贊成 追贈 되고, 曾祖父 박해수도 資憲大夫 吏曹判書 成均館 祭酒에 追贈됐다.

그러나 3個月 만에 翁主와 死別하고 3年喪을 지켜야 했다. 當時로서는 부마의 再婚과 蓄妾이 不法이라 그에겐 後嗣가 없었다. 後日 그를 불쌍하게 여긴 高宗 의 特別 配慮로 宮女 몇 사람이 下士돼 이들에게서 서자, 鉏女들을 얻게 된다.

政治 活動 [ 編輯 ]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日本 滯留中 撮影한 寫眞
(맨 왼쪽이 박영효, 그 뒤는 서광범 , 右側 두 番째가 서재필 , 右側 앞이 김옥균

1878年 4月 五衛都摠府 都摠管 , 1879年 惠民署 製造를 거쳐 1880年 判義禁府事에 任命된다. 1881年 8月 다시 惠民署 製造가 되었다가, 다시 判義禁府事에 再任命되었다.

1883年 1月 日本 에 滯留中일 때 그려진 朴泳孝의 肖像畫

1882年 壬午軍亂 의 收拾策으로 濟物浦 條約 이 締結되자, 條約 履行을 위한 特命全權代身 兼 第3次 修信使로 選拔된다. 1882年 (高宗 19年)의 濟物浦 條約 에 따른 謝過 使節로 日本에 다녀왔다. [11] [12] 府使 김만식, 從事官 서광범 等 隨行員 14名과 非公式使節人 민영익 , 김옥균 等을 帶同하고 배便으로 釜山港에서 日本으로 度日했다. 道일 當時 그는 日本 으로 가는 배 안에서 ' 이응준 太極旗 ' 中 4卦(卦)의 座·右를 바꿔 도안, 製作했고, 이는 後에 朝鮮 國紀 太極旗 가 됐다. [3]

그의 任務는 軍亂에 對한 謝過 國書를 傳達하고 濟物浦 條約 의 批准 緩和와 交換을 無事히 遂行하는 것과 損害賠償金 50萬 원 支拂方法과 支拂 額數의 緩和를 交涉하는 것이었다. 日本에 到着, 도쿄에 滯留하며 朴泳孝 一行은 日本 政府의 高官을 만나 協商 및 謝過 國書를 傳達한 뒤 朝日修好條規 (江華島 條約)의 一部 內容을 訂正하는 協商을 妥結지었다. 日本 滯留 中 그는 日本 朝野(朝野)의 有力한 人士는 勿論 英國·美國·獨逸 等 龜尾에서 日本에 派遣된 外交使節과도 接觸해 國際情勢와 國際關係에 對한 知識을 넓히는 한便, 兵士(兵事)·財務(財務)·興産(興産) 等의 開化狀況을 見學, 視察하고 많은 感銘을 받았다.

日本에 滯留하는 동안 그는 김옥균 , 윤치호 , 서광범 等과 議論하여 日本에 留學生을 派遣, 新學問을 배우고 歸國하게 하여 國內에 人材를 養成하고, 朝鮮의 近代化에 必要한 資金을 마련하기 위한 次官交涉을 日本 政府와 推進하며, 후쿠자와 유키치 의 支援을 받아 新聞을 發行할 것을 計劃했다. 그해 11月 日本에 더 남아 工夫를 하겠다고 하는 尹致昊 等 다른 同志들을 남겨두고 單獨으로 歸國했다.

開化派 活動 [ 編輯 ]

日本 視察과 歸國 [ 編輯 ]

日本 朝野(朝野)를 視察하고 돌아와 그는 改革을 企圖했으나, 민태호 · 김병시 (金炳始)· 김병국 (金炳國) 中心의 守舊派 들의 政權 掌握으로 失敗했다. 그가 없는 동안 政府는 親淸事大(親淸事大)의 閔氏一族이 掌握하고 있었고, 朴泳孝는 12月 代身職에서 除外되어 漢城判尹으로 薦擧됐다. 1883年 1月 27日 ( 1882年 陰曆 12月 19日 )에 그는 漢城府判尹 (漢城府判尹)으로 任命되었다. 日本에서 接한 人力車 를 들여와 漢城府判尹 在任 期間 中 朝鮮에 普及했다. [13]

漢城府에 治道局(治道局)·警殉國(警巡局)·博文局(博文局)의 3國을 新設하여 行政業務, 警察·治安業務, 印刷 弘報業務를 扮裝하게 하고 道路의 擴張과 整備, 西洋 洋服과 色깔있는 옷의 奬勵 等의 改革을 推進하였으나 민태호 , 김병시 等의 反對에 부딪혀 新設 3國은 廢止되고 그의 改革案도 모두 霧散되었다.

이어 그는 漢城府 에 신문국을 設置해 新式 新聞의 創刊을 計劃하였으나 資金 調達 問題로 失敗하고 만다. 그는 司憲府와 司諫院, 그리고 儒學者들로부터 줄기차게 彈劾을 받다가 1883年 3月 光州留守 兼 守禦使로 左遷되었다. 1883年 4月 19日 ( 陰曆 3月 17日 ) 廣州府 (廣州府) 留守로 發令을 받았다. [14] 新聞社 創刊 計劃은 繼續 推進하였지만 그해 陰曆 3月 광주부 留守로 가게 되면서 新聞 發刊에는 參與하지 못하고 만다.

漢城旬報 發行과 得男 [ 編輯 ]

1883年 3月 光州留守 兼 守禦使로 左遷되었다. 光州留守로 發令된 그는 守禦使 를 겸하며 正祖 의 維持를 繼承한다는 名分으로 수御影에 연병대를 新設하고 日本式 訓鍊을 始作했으나 다시 非難 輿論이 들끓자 그해 12月 다시 光州留守職마저 辭退하고 在野로 물러앉았다. 短期間 國內 遊覽을 다녀온 뒤, 朴泳孝는 후쿠자와 유키치 와 꾸준히 連絡, 그의 支援과 諮問으로 新聞을 發行할 것을 計劃한 新聞은 1883年 10月 31日 ( 陰曆 10月 1日 ) 漢城旬報 로 創刊되었다.

漢城旬報를 創刊한 그는 김옥균 , 윤치호 , 서재필 等을 筆陣으로 委囑했다. 그를 覲親으로 보고 寵愛하던 高宗은 영혜翁主 事後 後嗣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妾을 祝捷할 수 있도록 許容하고 [15] , 宮闕의 尙宮 范氏를 비롯한 몇仁義 宮女들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朴泳孝는 尙宮 汎氏에게서 아들 박진서와 박일서를 보았고, 둘째 아들 박일서의 딸이 바로 뒤에 의친왕 의 王子와 結婚하는 朴燦柱 이다.

漢城府判尹 으로 있을 때부터 김옥균 , 서광범 , 서재필 , 윤치호 , 홍영식 等 開化黨 要因들과 꾸준히 만나서 協議, 1884年 陰曆 10月 郵政局 落成式을 契機로 來賓으로 參與한 척新派 大臣들의 除去를 決意한다. 이 過程에서 戚臣 系列이었던 민영익 等과 갈등하여 돌아서는 等의 問題가 發生했으나 그는 豫定대로 敢行하기로 한다. 그는 日本 側에도 連絡하였는데 日本 亦是 1882年 以後 아시아에 影響力을 行使하는 淸나라 에 對한 劣勢를 挽回하고 朝鮮에 對한 支配와 아시아圈에서의 霸權을 確保하려 하였으므로 그의 主張에 同意, 다케조에 신이치로 朝鮮 日本公使를 통해 支援을 約束하였다.

甲申政變 前後 [ 編輯 ]

甲申政變 [ 編輯 ]
同志 서재필

1884年 (高宗 21年) 初 朝鮮 駐屯 淸나라 部隊가 靑·프 戰爭에 增員돼 베트남으로 相當數 派兵됐다. 청이 戰爭으로 朝鮮에 神經쓸 수 없는 이 때가 好機라는 日本 公使 다케조에의 부추김과 擧兵하면 日本軍이 돕겠다는 確約만 믿고 開化黨은 12月 4日 ( 陰曆 10月 17日 ) 郵政局 廳舍의 落成宴에서 甲申政變 을 일으켰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守舊派 人士 몇을 除去하고 高宗 夫婦를 拉致해 景祐宮 에 幽閉 後 政局을 掌握했다. 開化派는 急히 內閣을 꾸리는 한便 朴泳孝도 親軍前後領事 兼 左捕將(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을 맡아 軍과 治安 掌握을 꾀했으나 外戚 閔氏들의 救援 要請을 받고 달려온 淸나라 軍의 介入으로 3日 만에 失敗한다.

開化派들의 家族들이 곳곳에서 誅殺을 當할 때 그의 兄 박영교 홍영식 等과 幽閉시킨 高宗 內外를 지키다가 淸軍에 살해당하였다. 政變 失敗 消息을 들은 박원양은 박영교의 長男인 長孫株를 죽이고 自身도 自決하려 했지만 바로 들이닥친 義禁府 邏卒들에 依해 逮捕되고 그의 어머니 全의 李氏는 살해당하였다. 11月 李朝(吏曹)의 彈劾으로 아버지인 大護軍(大護軍) 박원양 , 日本公使館으로 避身한 兄 四史(司事) 박영호(朴泳好)는 卽時 삭탈관직됐다.

投獄된 박원양은 穀氣를 입에 대지 못하고 餓死했다. 白凡逸志 조병옥 回顧錄에 따르면 박원양이 거적떼기를 뜯어 먹을 程度로 굶다 죽었다는 記錄이 있다. 일찍 이일영에게 시집간 큰 누나와 김철현에게 시집간 둘째 누나는 出嫁外人이라 危機를 謀免했고, 둘째 兄 박영호 는 日本 公使館으로 避身해 몇 年을 公使館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景祐宮 에서 殺害된 맏兄 박영교 의 아들 中 박태서(朴泰緖) 만이 乳母가 품고 避身해 劇的으로 목숨을 救했다.

그들이 逆賊으로 몰리면서 반남 朴氏 들도 急히 行列字를 '英'(泳)에서 勝(勝)으로 바꿨다. (徐載弼의 大邱 徐氏 들을 비롯, 逆黨으로 몰린 집안들은 모두 같은 措置를 取했다.) 勿論 自己 이름을 固守하는 者도 있긴 했다.

避身 過程 [ 編輯 ]

다케조에 日本公使가 이들을 急히 避身시켰다. 김옥균 , 박영효, 이규완 , 정란교 , 서광범 , 變數 (邊樹) 等 一行 9名은 昌德宮 北門으로 빠져나가 變服 後, 仁川 第一銀行支店長 기노시타의 집에 隱身했다. 仁川主宰 主潮日本領事館 職員 고바야시의 周旋이었다. 12月 12日 묄렌도르프 의 追擊代가 쫓아오자 日本人으로 꾸미고는 濟物浦港 의 日本 國籍船 지토세마루 號(千歲丸)로 숨었다.

이튿날 大韓帝國 外務督辦 조병호(趙秉鎬), 仁川監理 홍순학(洪淳學) 等을 帶同한 묄렌도르프의 追擊代가 다케조에 公使에게 逆賊 一行을 내놓으라 要求했다. 배안에서 이 光景을 지켜보던 一行은 품고온 毒藥甁으로 自殺을 覺悟했다. 우물쭈물하던 다케조에 公使가 倍로 되돌아와서는 一行에게 亦是 내릴 수밖에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船內 日本人 乘客들이 혀를 차며 꾸짖는 한便, 船長 쓰지 가쓰사부로 (?勝三郞) 亦是 工事만 믿고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 와서 下船시키자 하면 이들을 죽이자는 것밖에 더 되느냐며 叱咤했다.

내가 이 배에 朝鮮 開化黨 人士들을 乘船시킨 것은 公使의 體面을 尊重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다케조에 신이치로 公使의 말을 믿고 某種의 일을 圖謀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模樣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들더러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都大體 무슨 道理인가? 이 배에 탄 以上 모든 것은 船長인 내 責任이니 人間의 道理로는 到底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

다케조에가 우물쭈물하자 쓰지 船長이 直接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들은 탄 적이 없고 國際法 上 船舶은 該當 國家의 領土로 治外法權이며, 搜索을 强行하면 外交 問題로 삼겠다'며 追擊臺를 물리쳤다. 開化黨은 奇跡的으로 살아남았다. [16]

日本式 作名 [ 編輯 ]

開化黨에게 思想的으로 많은 影響을 주고 交流가 깊었던 前 日本 總理 이노우에 가오루 는 後日 回顧錄에서 지토세마루 號의 船員 쓰지 逃走路(?藤十郞)가 朴泳孝 一行과 나가사키 項에서 헤어질 때 日本式 이름을 各各 지어줬다 回顧했다. [4] 곧 그들에게 들이닥칠 刺客을 念慮해 이같이 했다고 한다.

當身들이 日本에서 亡命 生活을 하게 되면 朝鮮 이름을 가지고는 살기가 不便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記念으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소. [4]

박영효에겐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 김옥균 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 이규완 은 아사다 料(淺田良), 유혁로 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 정난교 는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라고 지어줬다. [4]

日本 亡命 生活 [ 編輯 ]
日本 亡命生活 中 日本人 後援者 스나가 하지메(須永元)와 함께 (오른쪽에 앉은 이가 박영효)

그는 서광범 , 서재필 , 윤치호 , 김옥균 等과 함께 逃避, 윤치호와 金玉均은 中國으로 건너가고 朴泳孝는 徐光範, 徐載弼과 함께 日本으로 건너갔다. 1885年 暫時 美國으로 건너갔다가 日本으로 되돌아왔다. 後日 許政 에 依하면 兩班家 出身이라는 自尊心과 막勞動을 하는 것을 힘들고 不快하게 여긴 것이 朴泳孝와 徐光範이 歸國한 原因이라 했다.

日本에 到着한 以後 그는 며칠동안 改革의 失敗와 同志들의 犧牲에 슬퍼하며 痛哭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便으로 朝鮮에서 보낸 刺客을 避하기 위해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等의 周旋 下에 隱身해 있었다.

亡命生活 中 그는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改名(改名)하고, 메이지 學院 (明治學園) 英語 科에 入學한다. 1888年 메이지 學院 英語科를 卒業하고 요코하마 로 건너가 美國敎會에 出席하며 洞·西洋의 書籍들을 두루 읽었다. [17] 1888年(高宗 25年) 初 日本에 滯留하던 그는 國政 全般에 걸친 長文의 改革上疏를 올렸는데, 이는 이른바 '建白書'(建白書) 또는 '開化上疏'라 불리는 것으로 封建的 身分制度의 撤廢, 近代的 法治國家의 確立에 依한 朝鮮의 自主獨立과 富國强兵을 主張하였다.

그러나 3年間의 追跡 끝에 부쳐진 便紙의 住所地를 알아낸 守舊派 大臣들은 1892年 朴泳孝를 暗殺하기 위해 本國으로부터 이일직(李逸稙), 권동수(勸東壽), 권재수(勸在壽) 等 數十餘 名이 그를 暗殺하기 위한 刺客으로 보내졌으나, 事前에 情報를 探知한 日本 政府 側의 暗殺團 到着 消息을 接한 뒤 바로 避身하여 暗殺企圖는 未遂에 그쳤다. 一部 刺客은 日本 警察에 逮捕되고 一部는 다시 朝鮮으로 逃避했다. 1893年 후쿠자와 유키치 等 日本 有力 人士들의 後援金과 協助를 얻어 僑胞學生 敎育支援을 目的으로, 留學生들의 寄宿舍 兼 學校인 친린義塾 (親隣義塾)을 設立하여 經營하였다. 刺客들의 出沒로 아르바이트 조차 求할 수 없었던 그는 朝鮮에 있던 知人들에게 便紙를 쓰는데, 후쿠자와와 이노우에 가오루 의 資金 支援 外에도 直接 勞動과 故國의 支社들에게 連絡하여 後援金을 調達하여 運營하였다.

金玉均과의 葛藤 [ 編輯 ]

亡命 直後 김옥균 은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初의 야마구치 신타로 의 집에 暫時 生活하였다. 이때 신타로의 어머니 糯米와 關係,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다. 以後 그는 自重하였지만 도야마 미쓰루 의 勸告로 다시 女子를 찾았다. 朝鮮에서 刺客이 派遣되자 도야마는 金玉均에게 일부러 술과 女色에 耽溺하라고 勸告했다. 朴泳孝는 金玉均에게 處身을 바로하라고 忠告했지만 金玉均은 이를 拒絶했다.

金玉均의 女子關係는 亂雜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亡命 直後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初 1465番地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暫時 寄食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糯米와 깊은 關係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18]

朝鮮에서 김을 죽이려 刺客을 보내자 그의 身邊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忠告했다. 日本 枯死(古事) 中 오이시憂恥가 교토에서 기라의 諜者를 放心시킨 內容을 引用하면서, 憂國的 行爲를 버리고 酒色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勸했다. 그랬더니 그가 每日같이 도쿄 柳라쿠初의 旅館에서 시바우라의 溫泉場까지 들락거리며 紅燈街를 彷徨했다. [18]
 
도야마 미쓰루 의 證言

半쯤은 刺客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半쯤은 亡命流浪에 지치고 지쳐 自暴自棄의 心情으로 도쿄의 淪落街를 徘徊하였다. [18] 朴泳孝는 이런 金玉均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18]

玉菌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無能한 자야. 제멋대로 行動하는 放蕩兒地. 도쿄에서 朝鮮 사람, 日本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結局 甲申革命이 失敗한 것도 그런 엉터리 指導者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靑年들이 性急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玉菌이 眞짜 리더였나? 나와 洪英植이 다 했지. [18]

그는 金玉均의 女子 關係를 두고 亡命 同志들의 名譽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도 批判했다. 美國으로 亡命한 윤치호 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朴泳孝는 金玉均을 激하게 非難했다. [18]

朴泳孝는 溫順하고 沈着한 데다가 世上事를 멀리하였으나 金玉均은 銳敏하고 多才多能한 데다가 世上의 交際도 넓었다. [19] 朝鮮에 있을 代에는 朴泳孝의 門閥이나 身分이 높아 金玉均을 凌駕하였으나 日本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金玉均의 地位가 높아져 自然히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金玉均을 남겨둔 채 朴泳孝가 美國으로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 이광린은 朴泳孝가 金玉均을 두고 서광범 , 서재필 萬 데리고 美國으로 갔던 理由도 金玉均과 朴泳孝의 氣質 差異로 理解하였다.

暗殺 威脅과 避身 [ 編輯 ]

1893年 말, 朝鮮 政府 내 守舊派 大臣들의 密命을 맡고 이일직 (李逸稙) 等이 朴泳孝를 暗殺하고자 친린義塾에 潛入하였으나 未遂에 그쳤다. 以後 그는 日本人 사무라이 를 警護員으로 雇用하여 帶同하고 다녔다. 1894年 2月初 김옥균 李鴻章 과 談判을 지으려고 淸나라 상하이 로 건너갔다. 2月 도쿄 에서 朝鮮 朝廷에서 보낸 刺客人 이일직 권동수 (權東壽) 等의 襲擊을 當했으나 避하여 危機를 謀免하였다.

3月 初 그가 오사카驛 에 到着하자 朝鮮에서 온 刺客人 이일직 홍종우 가 마중을 나왔다. 이일직은 自身을 淸나라와 日本을 往來하면서 藥材商을 하는 사람이고, 洪鍾宇는 프랑스 留學生이며 自身의 親戚이라고 거짓으로 紹介했다. 그들은 平素부터 金玉均의 行跡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을 尊敬해 왔기 때문에 自身들이 淸國行 經費를 提供하겠노라고 말했다. 金玉均은 한눈에 그들이 自身을 죽이려고 하는 刺客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逆利用하려는 생각으로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金玉均이 눈치챈 것을 알자 이일직은 洪鍾宇가 同行하며 金玉均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그의 疑心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事實은 金玉均이 상하이 로 떠난 것을 確認한 後에 박영효까지 暗殺하려는 計劃이 세워져 있었다. 94年 2月末 이일직은 朴泳孝를 暗殺하러 갔다가 그가 敏捷하게 日本人의 집에 숨는 바람에 그를 찾던 中 日本警察에 逮捕되었다. 日本警察의 搜査 結果 이들을 指揮한 민영소 의 四柱가 밝혀지기도 했다. 이일직 等의 繼續된 追跡을 避해 후쿠자와와 이노우에 等이 보내준 假面과 假髮 等으로 變裝한 뒤 日本人 警護員들을 帶同하고 다녔다.

歸國과 政治 活動 [ 編輯 ]

甲午更張 當時 軍國機務處
이준용

1894年 (高宗 31年) 7月 甲午改革 으로 사면되자 그해 8月에 歸國한 뒤 12月에 內部大臣에 任命되어 7個月假量 在任했다. [20] 日本의 後援과 壓力으로 歸國한 그는 김홍집 의 親日 內閣(第2次 金弘集 內閣)에 內部大臣으로 立脚하여 改革을 試圖했으나, 漸進的인 改革을 펼치려던 金弘集과 甚한 葛藤을 繼續하다가 金弘集을 失脚시킨 뒤 自身이 總理大臣署理가 되었다. 곧이어 改閣에서 實權을 掌握한 뒤 約 200餘 日 동안 2次 甲午改革 을 斷行했다. 그는 行政·軍事·敎育 麵의 改革을 推進하기 위하여 朝鮮의 自主性을 强調하고, 日本式보다도 오히려 구미식 行政의 採擇을 主張했다. 이 무렵 三國干涉 으로 日本勢力이 退潮하자 朝鮮政府는 親러시아 政策을 폈다. 不安을 느낀 朴泳孝는 王室과 外部와의 連絡을 遮斷하기 위해 訓鍊대로 하여금 王室을 護衛하게 했으나 高宗에 依해 거절당하였다. 그해 11月 다시 金陵위의 爵位를 돌려받았다.

1895年 3國干涉으로 日本 勢力이 退潮하자 不安을 느껴 이노우에 가오루 의 勸告를 無視하고 聯立政派였던 김홍집파를 內閣에서 退陣시킨 뒤 獨自的으로 改革 을 推進하였다. 1895年 3月에는 김학우 暗殺 事件 의 有力 容疑者로 逮捕된 흥선大院君 의 孫子 이준용 을 逮捕했다. 朴泳孝는 서광범 과 함께 이준용을 義禁府 地下 監獄에 監禁한 뒤 拷問을 加하였다. [21] 그러나 興宣大院君은 거리 示威와 日本領事館, 淸나라領事館 等을 찾아다니며 孫子 이준용의 釋放, 救命運動을 벌였고, 朴泳孝와 徐光範의 이준용 審問 過程에서 惡刑한 事實이 外部로 알려지면서 輿論의 惡化를 招來했다.

管制 改正 以後 그해 4月 다시 內務部 大臣 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가 명성황후 暗殺 陰謀 暴露로 1895年 (高宗 32年) 7月 初 反逆 陰謀事件(高宗 讓位 事件) 關聯者로 指目되고, 連이어 같은 時期에 王妃弑害陰謀罪로 窮地에 몰리자 신응희(申應熙)·이규완(李圭完)· 우범선 (禹範善) 等 一行 20餘 名과 함께 日本 公使館의 周旋으로 日本으로 다시 亡命하였다.

高宗, 明成皇后 暗殺 未遂 [ 編輯 ]

明成皇后 暗殺 企圖 [ 編輯 ]

1895年 (高宗 32年) 7月 初 朴泳孝는 명성황후 를 暗殺할 計劃을 세운다. 開化 以後로 高宗 은 밖으로는 日本의 牽制를 받고 안으로는 軍國機務處 가 마음대로 하여 高宗은 한 가지 일도 單獨으로 決定할 수 없었다. 明成皇后는 이를 분하게 여겨 漸次로 軍權(軍權)을 回復하기를 計劃하여 러시아와 結託하니, 朴泳孝는 이를 憂慮하였다. [22] 明成皇后는 軍國機務處의 一部 急進開化派가 獨斷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政策을 뒤엎을 機會를 찾았다. 이때 朴泳孝는 單獨으로 計略을 세워 王妃 暗殺을 計劃하였다.

한便 明成皇后는 1894年 여름부터 急進開化派를 射殺할 計劃을 세운다. 유길준 은 明成皇后를 "世界에서 가장 나쁜 女性"이라고 酷評하였으며 [23] 美國人 隱士 모스에게 보내는 便紙에 明成皇后의 開化黨 殺害 計劃을 暴露하였다. 便紙 本文에서 兪吉濬은 閔妃가 도움을 請하기 위해 러시아 公使와 祕密 接觸하고, 1894年 가을 開化黨 모두를 殺害하려는 計劃을 꾸미다가 大院君에게 發覺되었다고 밝혔다. [23] 王妃의 急進開化派 殺害 氣道를 接한 開化派는 改革政策 外에도 自身의 身邊을 걱정하게 되었다.

朴泳孝는 王后의 權謀와 計略을 두려워 하여 暗殺을 敢行하지 않으면 禍根을 根絶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1895年 7月 마침내 날짜를 잡아 計策을 定하고 日本에 兵力을 要請하였다. 그는 유길준 이 自己와 親近하다고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22] 그런데 兪吉濬은 바로 朴泳孝의 王妃暗殺 計劃을 임금에게 密告했다. 朴泳孝는 일이 유길준에 依해 漏泄된 것을 알고 洋服으로 바꿔 입고 日本人의 護衛를 받아 都城을 빠져 나와 龍山에서 蒸氣船을 타고 逃走한 것이다. 그의 一黨 신응희 (申應熙), 이규완 等도 따라 逃走하였다. [22] 朴泳孝의 明成皇后 暗殺 陰謀를 暴露한 兪吉濬은 그 무렵 따로 大院君과 이준용의 王妃 暗殺 謀議에 加擔한 狀態였다.

한便 自身의 擧事를 暴露한 人物이 政治的, 思想的 同志로 믿던 유길준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朴泳孝는 같은 開化派 人士들조차 不信하게 되었다.

乙未事變과 高宗 廢位 祈禱 [ 編輯 ]

1895年 (高宗 34年) 7月 末 도쿄 에 到着한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等의 周旋으로 日本 도쿄 구석의 板子村에 隱居하였다. 이노우에와 후쿠자와는 特別히 警護員을 보내 朴泳孝를 지켜주었다. 한便 朝鮮에서는 繼續 刺客을 派遣하였고 그는 外部 出入을 삼가하였다.

1895年 10月 乙未事變 消息을 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乙未事變에 加擔한 朝鮮人 協力者의 하나로 指目되었다. 乙未事變에 그가 直接 加擔한 嫌疑가 보이지 않자 1898年 1月 26日 中樞院 會議에서 朴泳孝를 불러들여 政府要職에 登用하자는 建議가 나왔다. 그러나 高宗은 이를 拒絶했다. 도리어 朴泳孝의 政界復歸를 꾀했다는 理由로 高宗과 戚族 大臣들은 獨立協會 를 强制 解散시켰다. 獨立協會의 解散 以後 그는 武力으로 政府를 顚覆해야 된다고 決心하여 武力 政變를 計劃한다. 윤치호 , 서재필 等과 隨時로 書信을 주고받던 그는 이들과의 連絡과 사람을 國內에 들여보내 國內外의 情勢에 對한 情報와 資料들을 入手한다.

亡命 隱遁 生活 [ 編輯 ]

그가 日本 滯留中이던 1897年 에도 김운락(金雲洛), 채광묵, 김석구 等이 繼續해서 박영효, 유길준 , 이진호 , 이두황 等을 死刑에 處하라는 上疏를 繼續 올렸다. 그는 警備와 警護를 强化하고 警戒하는 한便, 日本 도쿄 內에서도 朝鮮人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生活하였다.

以後 國內의 情報를 入手하는 한便 1900年 (光武 7年) 7月에 고베 에서 이승린(李承麟)·이조현(李祖鉉)·김창한(金彰漢) 等을 불러모으고 亡命中인 同志를 糾合해 政府를 顚覆하고 高宗皇帝 를 讓位시킨 뒤 의화군 李堈 國王 으로 推戴하기 위한 쿠데타를 計劃했다. 그리고 國內에 있던 한규설 윤치호 , 윤석준 等에게 資金調達을 付託할 目的으로 그해 11月 極祕裡에 이승린과 이조현을 祕密裏에 朝鮮에 派遣했지만 義禁府의 密偵에 依해 發覺되어 逮捕된다. 그의 政界復歸工作과 高宗 廢位 祈禱는 水泡로 돌아가고, 闕席裁判에서 絞首刑이 宣告되었다. 그는 日本人 警護員을 雇用한 뒤 隱居한다.

1904年 3月 高宗 은 日本의 特使 이토 히로부미 가 來韓하자 亡命者 中 要人을 海外로 追放하거나 邊方에 誘致시킬 것을 提議하여 同意를 얻어냈다. [24] 高宗이 指名한 要因은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曺喜昖, 醬粕, 이범래,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等 14名이었다. 그러나 日本은 高宗에게 約束한 亡命者 處分을 履行하지 않았다. [24]

1904年 4月 中旬 高宗 은 駐韓日本國公使館에 朝鮮人 出身 政治的 難民 申請者 中 박영효, 유길준 , 醬粕 , 조히年 , 이두황 , 이진호 , 권동진 , 구연수 , 정란교 , 이규완 , 이범래, 신응희 等 14名을 日本에서 追放하고, 나머지 다른 亡命客은 送還할 것을 要請하였다. 駐韓日本公使는 4月 14日 日本 外務大臣에게 報告했는데 日本 政府에서는 이들의 送還을 拒絶하였다.

乙巳勒約藥果 歸國 [ 編輯 ]

1905年 11月 日本 滯留 中 乙巳勒約 消息을 接한다. 1907年 오랜 亡命 끝에 6月 初旬 非公式으로 歸國해 釜山 에 碇泊, 祕密裏에 滯留하고 있던 中 6月 7日 漢城 으로 올라가 宮內府 日本人 拷問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와 接觸하고 한便으로는 먼 一族인 박제순 等과도 交流, 박제순 內閣의 斡旋으로 6月 13日 高宗의 特使詔勅(特赦詔勅)으로 赦免을 받고 正式으로 歸國하였다. 이어 金陵위에 복작되었다.

그해 7月에 宮內府大臣으로 任命되었고, 바로 宮內府 特進官으로 轉任되었다. 이때 그는 헤이그 密使事件 後에 벌어진 痛感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內閣의 高宗 讓位壓力을 撫摩시키려다 失敗했다. 남정철 (南廷哲), 이도재 (李道宰) 等과 함께 高宗 의 兩位를 反對, 讓位波와 갈등하였으며, 그해 8月 皇太子의 代理 鎭下行禮에 不參했다는 理由로 이완용 一派의 彈劾을 받고 남정철, 李道宰 等과 함께 棍杖 80代의 刑을 받았다. 그러나 下人이나 奴婢 代身 그가 直接 兄을 當하여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以後 李完用 內閣의 宮內府大臣을 하다가 純宗 卽位 後 軍部 內의 反兩위파(反讓位派)와 公募해 高宗의 讓位에 贊成한 政府代身들을 暗殺하려 했다는 管理 暗殺 陰謀事件 으로 裁判에 回附, 그러나 그는 끝까지 無罪를 主張하였다. 7月 朝鮮의 開化人士들과 日本의 開化派 人士들 間에 親睦 圖謀의 目的으로 設置된 韓日同志會 (韓日同志會)의 會長으로 推戴되었다.

强力한 治安론 主張 [ 編輯 ]

舊韓末(求恨鞨)의 박영효, 유길준 , 윤치호 , 서재필 의 政治的 立場과 世界觀이 各自 달랐지만 日本式의 强力한 警察 制度를 導入해야 한다는 點과 모든 ‘逆賊’(東學·義兵)들을 모두 掃蕩해야 한다는 點에서 意見의 一致를 봤다. [25] 甲申政變 當時 改革을 통해 새로운 社會를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意志는 모두 挫折됐고, 그는 民度가 낮아서 改革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朴泳孝는 낮은 民度를 解決할 方法이란 警察 治安과 軍隊에 依한 統制만이 答이라고 確信한다.

이러한 이들의 强力한 警察權 主張은 當時 社會에서 唯一하게 反撥없이 제대로 採擇되었다. 當時 大韓帝國 警務部 代身(警察廳 總長) 서리 이근택 (1865~1919)李 서너名 以上이 모여서 속닥距離면 嚴罰하겠다는 戒嚴令을 내린 것은 植民化 훨씬 以前인 1901年 6月 22日의 일이었다. [25]

李完用의 彈劾과 流配 [ 編輯 ]

停職이자 競爭者인 이완용

純宗 卽位 直後 다시 朝廷에 出仕한 朴泳孝는 1907年 7月 29日 宮內府大臣에서 免職되고, 宮內府 特進官(宮內府特進官) 勅任官(勅任官) 1等에 任命된다.

高宗 양위식 直後 日本軍의 出動으로 示威가 어느 程度 가라앉자 李完用과 法部大臣 조중응은 '宮內府 大臣의 職務를 遂行하지 않은 朴泳孝를 處罰하라'는 上疏를 새 皇帝 純宗에게 올렸다. [26]

이완용 은 上疏文에서 '이番에 皇帝의 위를 물려준 것은 太皇帝의 純粹한 心情에서 나온 것이며 宗廟社稷이 億萬年토록 鞏固하게 될 基礎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臣下와 百姓이 없다 그런데 朴泳孝가 그 職責을 回避했으니 그 罪를 물어야 한다'고 事態를 完全히 歪曲하는 主張을 했다. [26]

純宗 은 勿論 그대로 許諾했다. 順從이 韓日倂合 때까지 3年餘 皇帝로 在位한 동안 內閣에서 올린 上疏文에 對해 異議를 提起하거나 修正 또는 補完을 指示한 境遇는 거의 없다. 그저 '올린 대로 處理하라'는 것이 한결 같은 答辯이었다. 純宗은 그것을 拒否하거나 補完을 知事할만한 知的 能力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皇帝의 자리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에 不過했던 것이다. 이토가 氣를 쓰고 그를 皇帝로 올린 理由가 거기에 있었다. [27]

李完用의 上疏에 따라 朴泳孝는 亦是 皇帝 代理 意識 執行을 拒否한 시종원경 이도재 , 前 弘文館 學士 남정철 과 함께 法部에 拘束되었다. [27] 이때 監獄에 갇힌 朴泳孝가 배頉이 나 苦生한다는 消息을 들은 이토가 그에게 藥을 보냈으나 朴泳孝는 韓國에도 藥이 있다면서 되돌려 보냈다. 朴泳孝는 警務廳 에서 審問을 하자 "總理大臣 이완용 氏를 逆賊이라고 말했을 뿐 죄지은 것이 없다"고 호통을 쳤지만 結局 流配刑을 받고 濟州道 로 귀양을 가게 된다. [27]

8月 23日 保安法 違反의 罪目으로 다시 警務廳 에 拘禁當했다가 流配刑을 宣告받고 濟州道 에 1年間 流配된 그는 1908年 말 流配에서 풀려난다. 流配살이 中 그는 1908年 7月 漢城材木薪炭株式會社에 投資, 大株主가 되었다. 1908年 流配에서 풀렸으나 서울 上京이 禁止되었고, 1909年 6月 이준용 이 세운 神宮封境回 의 總裁로 推戴된다. 그러나 그는 京城府 로 돌아올 수 없었고 사람을 보내 京城 周邊의 情勢를 把握한다. 1910年 祕密裏에 陸地 上陸을 企劃했으나 發覺되어 失敗한다. 1910年 8月 慶尙南道 馬山 에 머물러 있다가 韓日 倂合을 맞았다.

韓日 倂合 以後 [ 編輯 ]

日帝强占期 初盤 [ 編輯 ]

馬山 滯留 中에 韓日 合邦 消息을 接했다. 諦念한 그는 1910年 韓日 倂合 條約 侯爵 爵位를 받고 日本이 自身들의 貴族인 回族(華族)과 區別해 만든 朝鮮 貴族에 編入됐다. 1911年 11月 恩師公採金 23萬원을 받고 2月 侯爵 爵位를 받았다. 1925年版 潘南朴氏 族譜에 該當 事實이 記載돼 있다.

1911年 朝鮮貴族들의 親睦團體인 朝陽俱樂部維持會 創立 發起人이었다. 7月 漢文, 敎養, 文字, 古典 等의 普及과 刊行을 目的으로 文藝俱樂部 會長으로 選出됐으며, 9月 朝鮮貴族會 會長에 올랐다.

1912年 1月 이문회 의 發起人이었다.(28년 會長就任) 同年 2月 권업株式會社의 發起人으로 會社 成立 後 大株主가 됐다. 8月 韓國倂合記念章을 받았으며 9月 메이지[明治] 天皇의 葬禮式에 貴族代表로 參席했다.

韓日合邦 後 政治 活動은 別로 하지 않았고 大部分 企業과 銀行, 土地 買入 等의 活動을 했으며 朝鮮銀行 의 主要株主였다. 가끔 獨立運動에의 參與나 資金을 要請하는 支社들이 찾아와도 그는 資金力이나 經濟的 實力 養成이 優先이라며, 朝鮮이 아무 準備도 안된 狀態에서 뭘로 日本 에 抵抗하느냐며 이들을 되돌려 보냈다 한다. 侯爵 을 받았지만 朝鮮總督府 의 各種 政治 行事에는 消極的이거나 不參, 回避했고, 그 例로 1913年부터 中樞院 副贊儀와 贊意 等을 提案받으나 모두 拒絶한다.

企業, 銀行 活動 [ 編輯 ]

1913年 4月 朝鮮貿易株式會社를 設立하는데 參與하고 8月 綠地조림과 農場 經營을 目的으로 結成된 朝鮮林業組合 補植원의 發起人으로 參與하고 바로 補植원의 組合長에 選出되었다. 1914年 朝鮮總督府에서 東萊-大邱 간 鐵道를 놓을 때 民資 誘致를 計劃瑕疵, 7月 支社들과 함께 朝鮮輕便鐵道會社에 設立 發起人으로 參與하였다. 1915年 1月 朝鮮物産공진회 京城協贊支會의 發起人으로 參與하여 物産공진회 京城支部에서 活動했다. 1915年 5月 에는 自身의 私邸 750원을 物産공진회에 寄附하였다. 그해 9月 博覽會 名譽顧問에 委囑되었다.

1918年 에는 朝鮮銀行 移徙에 被選되었다. 1918年 5月 朝鮮貴族會 會長職을 辭退, 1918年 10月 朝鮮殖産銀行 의 理事가 되었다. 1919年 1月 高宗 이 갑작스럽게 죽자 國葬 拷問 兼 石碑全面서사원에 任命되어 高宗의 碑文을 作成하였다.

1919年 3月 3·1 萬歲 運動 當時 民族 指導者로 署名을 要請받았으나 失敗할 것이라며 拒絶했다. 朝鮮總督府 에서도 그에게 3.1 運動의 鎭壓이나 解體를 促求하는 談話나 書信 作成을 依賴하였으나 亦是 拒絶하였다. 그 뒤 3·1運動 뒤 日帝의 文化統治에 따라 流民會(維民會)·동광回(同光會)·朝鮮球歷部·民友會(民友會) 等 親日團體와 關係를 맺었다. 1919年 5月 京城紡織株式會社 의 發起人으로 參與, 設立과 함께 경방의 初代 社長이 되었다. 6月에는 朝鮮農事改良株式會社 發起人으로 創立에 參與하였다. 1919年 12月 朝鮮經濟回 會長, 1920年 2月 京城商工會議所 特別評議員에 選出되었다.

1920年 부터 그는 民立大學 期成會, 朝鮮人 民營 病院 設立運動에 同參하였다. 1920年 4月 金性洙 等의 主導로 結成된 東亞日報 의 創立 發起人의 한사람으로 招聘되었으며, 그 해 東亞日報 의 初代 社長으로 就任한다. 20年 5月에는 勞動大會 總裁에 選出되었는데 이 일로 朝鮮總督府 의 要視察人物이 된다. 바로 6月에 東亞日報 社長職을 辭退한다. 이어 朝鮮産業銀行 發起人으로 創立委員長을 맡았다. 1920年 10月 京城府 私立避病院 創立期成會 에 發起人으로 參與, 病院設立 期成會 組織 後 會長으로 選出되었다. 1921年 2月 臣民工事株式會社 取締役에 選出되고, 3月에는 社會團體인 社民回 總裁와 流民會 總裁에 委囑되었다. 流民會는 3.1 運動 以後의 民心을 收拾하기 위해 組織된 官邊團體였다.

中樞院 顧問職 辭退와 社會團體 活動 [ 編輯 ]

그러나 朝鮮總督府 는 그에게 繼續 協力, 協助를 要請했고 그는 1920年代 들어 朝鮮總督府 職責에 就任하라는 要請을 받아들인다. 1921年 4月 中樞院顧問에 選任되고, 6月 公職을 맡게 되면서 山林會員으로 活動이 不可能했지만 朝鮮山林回 顧問에 委囑되고 名譽會員이 되었다. 1921年 7月 朝鮮人 臨時 産業大會의 委員長으로 行事를 主管했고, 9月 汎太平洋 協會의 會長이 되었다., 10月에는 京城都市調査計劃祖師會 顧問에 委囑되고 11月에 京城府 에서 開催된 朝鮮佛敎大會의 顧問으로도 委囑되었다.

1922年 1月 김윤식 社會長 葬禮委員이 되고,바로 葬禮委員長이 되어 葬禮式을 主管했다. 4月에는 第1回 朝鮮美術審査委員會 委員에 委囑된 뒤, 1923年 4月 第2回, 24年 4月 第3回, 25年 第4回 美術審査委員會에 審査委員으로 參席하였다. 1922年 4月 朝鮮建築回 名譽會員이 된 뒤, 6月 社會團體인 民友會 發起人으로 參與하여 會長이 되었다. 그해 9月 中樞院顧問職을 辭退하고 野人이 되어 民族改造論을 主張하는 社會團體인 朝鮮協會 顧問이 되었으며, 朝鮮問題 艱辛回 幹事가 되었다. 1922年 10月 朝鮮興業銀行 創立發起人으로 11月에는 朝鮮俱樂部 發起人으로 參與하였다. 1923年 1月 苦學生救濟方法硏究會의 創立에 發起人으로 參與하고 3月 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의 發起人으로 參與한 뒤 以後 朝鮮書籍印刷社의 株主가 된다. 1923年 5月 汎太平洋朝鮮協會의 會長으로 推戴되고, 9月 關東 大地震 이 發生하여 日本 朝鮮人 들에 對한 人心이 惡化되자 朝鮮人들은 그럴 理가 없다며 說得과 談話 呼訴 等 事態 收拾에 나섰다.

1923年 9月 關東塵滓義捐金募集조성회를 組織, 關東 大地震 으로 犧牲된 日本人들의 慰問과 救護 資金을 募金하는 等의 活動을 했으나 日本 內 惡化된 朝鮮人에 對한 輿論惡化를 收拾하는데는 失敗하고 만다. 10月 에는 간토에서 發生한 大地震으로 因해 朝鮮總督府 에 交付되는 日本 政府 의 豫算이 大幅 削減되자, 朝鮮例山불減縮運動을 主管하였다. 이어 朝鮮豫算不減縮 市民代表委員會 日本派遣 實行委員에 選出되어 日本에 다녀왔다.

日帝에 對한 協力으로 旋回 [ 編輯 ]

1900年代 初만 해도 一線 同祖論에 對해 虛僞事實이며 事實無根이라며 否定的인 反應을 보였다. 이는 神宮封境會에 參與할 때도 나타났다. 그러나 1920年代 以後 日선同調론에 同調하게 된다. 1924年 4月 反日運動 排斥과 日선同調론에 呼應, 동민회의 發起人으로 參與했고 곧 동민회 拷問에 推戴되었다. 5月에는 朝鮮救濟院 顧問에 委囑되었으며, 11月에는 造船社文學會(儒敎學會) 會長에 選出되었다. 1925年 佛敎 聯合團體인 朝鮮佛敎段이 設立되자 顧問에 委囑되었다. 25年 6月에는 京城興産株式會社 社長에 就任하였다. 그해 12月 鄭3位에 承緖되어 다시 官職에 나갔다.

1926年 다시 中樞院 盞義에 選出되었으며, 3月 敎育協成會 拷問에 推戴되었다. 4月에는 純宗 이 崩御하자 純宗 國葬式 掌醫委員이 되고, 5月에는 葬儀委員會 副委員長이 되었다. 7月에는 朝鮮土地改良株式會社 發起人으로 參與한 뒤 取締役에 選出되었다. 10月 朝鮮文獻協會에 後援金을 내고 特別贊助員이 되었으며, 11月에는 京城放送局 JODK 取締役에 選出되었다. 그해 이완용 이 死亡하자 追悼辭를 朗讀하였다. 이어 李完用의 死亡으로 空席이 된 中樞院 의 副議長職 提議를 받아들였다. 그해 말 다시 空席인 朝鮮貴族回 會長에 就任하였다.

1927年 1月 日本 天皇 다이쇼 (大正)의 葬禮式에 朝鮮 貴族 代表로 任命되어 日本 도쿄 에 다녀왔다. 그해 3月 에 歸國하여 朝鮮農業回 副會長에 選出되었다. 1929年 11月 造船産業株式會社의 社長에 就任했고, 12月에는 造船社編纂委員會 顧問이 되었다.

그러나 1928年 中樞院 副議長職을 辭退하려 하자 日本 朝廷에서는 그에게 1928年 2月 朝鮮貴族世襲財産審議委員會 委員, 朝鮮貴族 編入 審査委員에 임명한다. 같은 달 朝鮮博覽會 京城協贊支會의 發起人으로 參與하여 朝鮮博覽會 評議員에 選出되고, 9月에는 朝鮮博覽會 總裁에 選出되었다. 1928年 6月 朝鮮總督府 學務局 臨時敎育審議委員會 委員에 委囑되었다. 6月 朝鮮飛行學校 創立 委員會 委員이 되고, 7月 飛行學校 創立委員會 委員長에 選出되었다. 7月 王公族審議委員會 審議官에 任命되고, 8月 朝鮮金融制度祖師會 委員으로 委囑되었다. 같은 달 京城日報 社가 主催한 第1回 乳幼兒 甚社會 顧問에 委囑되고, 11月에는 쇼와 天皇 卽位式에 妾인 朴氏를 帶同하고 日本 도쿄 에 건너가 卽位式에 參席하고 歸國, 大禮記念章을 特別히 받았다.

生涯 後半 [ 編輯 ]

産業, 社會 活動 [ 編輯 ]

박영효

1929年 1月 光榮産業株式會社 發起人으로 參與했고, 4月 朝鮮物産奬勵會 京城支會 顧問에 委囑되었다. 그해 5月 朝鮮貯蓄銀行 發起人으로 參與했으며, 8月 義州鑛山會社 代表取締役 社長이 되었다. 1929年 9月, 賭博과 阿片 等으로 沒落해가는 사람들을 救濟하기 위한 團體인 窓福會 에 加入, 洞會의 理事로 被選되었다. 1929年 10月 이토 히로부미 20周忌 追悼會 發起人으로 參席하였다.

1930年 5月 社團法人 朝鮮工業會 顧問이 되고, 6月 和順無煙炭株式會社의 代表取締役 社長이 되어 運營하였으며, 9月 朝鮮林産工業株式會社 代表取締役이 되었다. 10月 朝鮮殖産銀行 理事職을 辭退하면서 同時에 朝鮮殖産銀行 顧問에 委囑되었다. 12月 修養團 朝鮮聯合會 本部 拷問에 推戴되었다. 1931年 11月 滿蒙재주 同胞後援會 顧問, 檀君神전봉찬會 拷問에 推戴되고, 12月 朝鮮公民敎育回 會長에 選任되었다. 1932年 3月 朝鮮簡易生命保險 事業 諮問委員會 委員, 4月 財團法人 金剛山協會 副會長이 되었다.

1932年 5月 社團法人 朝鮮放送協會 副總裁가 되고, 6月에는 孔子 의 道를 되살리고 神學(基督敎)을 排斥한다는 趣旨로 組織된 儒林團體 大聖院에 加入하고, 拷問으로 推戴되었다. 7月 新興滿蒙博覽會 名譽副總裁가 되었다.

末年 [ 編輯 ]

박영효

朝鮮總督府 中樞院 拷問, 日本貴族院 議員( 1932年 ), 朝鮮殖産銀行 理事, 造船社編纂委員會 拷問, 宣傳 審査委員, 朝鮮農會 副會長 및 朝鮮農會 會長 等을 지내며 親日行爲로 一貫했다. [28] 1932年 12月 朝鮮人 으로는 最初로 日本 帝國議會 貴族院 勅宣議員에 任命됐다. 같은 달 조선나豫防協會 發起人, 이듬해인 1933年 7月 엔 中央振興協會 發起人이 됐고 8月 朝鮮金融組合聯合會의 拷問 委囑, 10月 조선신궁奉讚回 發起人으로 發足 後 拷問에 任命됐다. 10月에는 京城府 에서 當時 佛敎 契가 연 이토 히로부미 25周忌 追悼材에 參席했다.

1934年 3月 朝鮮大亞細亞協會 相談役, 4月 朝鮮國防議會聯合會 副會長, 財團法人 朝鮮女子醫學專門學校( 高麗大 醫大 前身) [29] 勃起準備委員會 委員長이 되고, 7月 朝鮮金融組合聯合會 諮問委員會 顧問, 11月 日만綿花協會 朝鮮支會 拷問이 됐다. 1935年 10月엔 初代 朝鮮總督 데라우치 마사打케 동상건설회 發起人이 됐다.

1935年 總督府가 編纂한 《朝鮮功勞者명감》에 朝鮮人 功勞者 353名 中 한 名으로 收錄됐다. [30] [31] 1937年 4月 朝鮮貴族會 會長으로 移徙 兼任이었다. 그해 10月 朝鮮總督府 學務局 臨時敎育審議委員會 委員에 被選됐고, 1938年 4月 株式會社 每日申報 社 發起人이 됐다. 10月에는 朝鮮殖産銀行에서 隱退하며 20年 勤續 表彰을 받았다.

美男 王族으로 네티즌들 사이에 알려진 의친왕 의 次男 이우 가 日本 王室, 貴族과 結婚을 拒否하고 의친왕 도 日本 며느리 不可論을 主張해 問題가 되자 그가 妥協案으로 自己 孫女를 推薦했다. 또는 이우 공이 이미 그의 孫女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主張도 있다. 어쨌든 1935年 5月 3日 朴泳孝의 孫女 朴燦柱 는 이우와 結婚했다.

1939年 金剛山 協會 理事가, 2月엔 京城府 陸軍志願兵志願者後援會 拷問에 推戴됐고, 4月 國民精神總動員聯盟 顧問에 選任됐으며, 그해 7月 朝鮮貴族回 通常總會의 理事로 選出됐다.

1939年 死亡 當時 侯爵·中樞院副議長으로서 日本 貴族 序列 情 2位 勳 1等이었다. [12] 事後 作爲는 長孫 贊犯 에게 繼承됐다. 享年 78歲.

事後 [ 編輯 ]

1939年 11月 日本 의 社會團體인 흑룡회 가 選定한 일韓合邦 朝鮮側 有功者 追悼會를 할 때 이완용 , 이용구 , 송병준 等과 함께 合倂 功勞者로 推薦되었다. 1945年 光復이 되면서 指彈과 批判의 對象이 되고, 그의 墓所는 受難을 겪기도 했다. 朴泳孝의 墓는 釜山廣域市 沙下區 다대동에 있었으나 그의 孫子 박찬범이 墓터를 팔고, 遺骨을 영혜翁主와 함께 火葬하였다. [32] 그 뒤 京畿道 南楊州郡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에 安置되었다. 옆에는 서자 박일서, 庶孫 박찬범의 墓所가 옆에 있다.

1962年 啓蒙, 獨立運動에 對한 公的이 勘案되어 獨立有功者 敍勳 對象으로 選定되었으나 日帝强占期 에 侯爵 等을 除授받고, 日帝强占期 中盤에는 朝鮮總督府 에서 除授한 中樞院과 官職을 歷任한 點이 勘案되어 敍勳對象에서 除外되었다. 2002年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모임 이 發表한 親日派 708人 名單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公開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選定, 收錄되었다.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著書 [ 編輯 ]

  • 《士禍機略》(使和記略)

家族 關係 [ 編輯 ]

朴泳孝는 家族關係가 複雜하여 族譜上으로 박묘옥, 박진서, 박일서의 2男 1女를 子女로 두었다. 正室인 영혜翁主가 婚姻 後 3個月 만에 死亡하자 高宗은 宮女를 보내 朴泳孝의 後室로 삼게 하였다. 范氏의 所生으로 子女 가운데 죽은 줄만 알았던 박흥원(朴興元)은 서울 奉元寺 住持로 있었으며, 그의 아들 朴혜륜(朴彗輪) 亦是 僧侶가 되었다고 한다. 박묘옥은 仁川의 富豪 한갑현과 結婚하여 5男 2女를 두었다. [33] 長孫女 朴燦柱 의친왕 의 次男이자 映宣群 의 養子인 이우 와 婚姻하였고, 長孫子 박찬범 은 의친왕의 三女 이해춘과 婚姻하였다. 朴泳孝를 硏究한 在日史學者 김경해는 范氏를 朴泳孝의 세番 째 夫人으로, 朴燦柱를 네番 째 夫人의 孫女로 紹介하였다. [33]


情實과 後室 [ 編輯 ]

  • 情實 : 영혜翁主 (永惠翁主, 1858年 - 1872年, 哲宗 의 庶女)
  • 後室 : 尙宮 순길當(順吉堂) [34]
  • 後室 : 轎前婢 房나인 范氏(轎前婢 房內人 范氏) [34]
  • 後室 : 박경희(朴景熙, 1870年生, 박인규의 딸) [35]

子孫 [ 編輯 ]

  • 박진서(朴振緖, 1893年 [36] - ?)
  • 박일서(朴日緖, 初名 吉瑞(吉緖), 1897年 - 1931年) - 박원희(1889年 - 1969年, 박현경의 딸)와 婚姻
    • 朴燦柱 (朴贊珠, 1914年 - 1995年) - 이우 (1912年 - 1945年, 의친왕 李堈 의 次男)와 婚姻
    • 박찬범 (朴贊汎, 1917年 - 1986年) - 이해춘(1920年 - 2009年, 의친왕 이講義 3女)과 婚姻
      • 박형우(朴亨雨, 1937年 - 2012年)
    • 박찬익(朴贊益, 1920年 - 2003年)
      • 박미우(朴美雨)
      • 박일우(朴一雨)
      • 박준우(朴俊雨)
    • 박찬우(朴贊友, 腰絶)
    • 박찬웅(朴贊雄, 1926年 - 1950年) - 陸軍士官學校 在學 中 韓國 戰爭 當時 死亡
    • 박찬용(朴贊用, 1927年 - 1945年)
    • 박찬옥(朴贊玉)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朴泳孝는 反朝鮮의 近代化에 이바지한 功을 評價하는 見解도 있으며, 뉴라이트 等은 朴泳孝와 김옥균 開化派 淸나라 에 바치던 朝貢과 門閥制度의 廢止 等, 政治 改革을 試圖했다는 點을 들어 近代化의 先覺者로 評價하기도 한다. [37] [38] [39]

否定的 評價 [ 編輯 ]

急進的이라는 批判도 있다. 그 밖에 2002年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모임 이 發表한 親日派 708人 名單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公開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選定되어 指彈받았다.

기타 [ 編輯 ]

大韓民國 大統領 權限代行 國務總理 를 지낸 許政 (許政)에 依하면 그가 日本 美國 으로 亡命했으나 歸國하게 된 理由가 兩班家의 子孫이란 自尊心 때문에 勞動을 하기 싫어해서 라고 回顧하였다. 許政 에 依하면 박영효나 서광범 甲申政變 以後 日本 으로 亡命했다가 다시 歸國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兩班의 子弟라는 自尊心 [40] 과 함께 勞動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 은 같은 兩班집 도련님인데도 鐵道 勞動者로 일하면서 學業을 마쳐 醫師가 되었다. [40] 는 것이다.

그는 1882年 日本 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 이응준 太極旗 ' 中 4卦(卦)의 座·右를 바꿔 도안, 製作했고, 이는 後에 朝鮮 國紀 太極旗 가 됐다. [3]

어윤중 은 아버지 박원양 의 門下生이기도 하다. [41]

朴泳孝를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우 의 丈人이자 의친왕 의 査頓
  2. 에듀넷-브리태니커 學習百科, 박영효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3. "太極旗 創案者는 박영효 아닌 이응준"
  4.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328페이지
  5. 全의 李氏가 後妻이나 遠處 事後에 들인 正室夫人으로 朴泳孝는 庶子가 아니다.
  6. 朴泳孝는 朴東亮의 아들 박언의 9代孫이며, 朴趾源, 박규수 等은 朴東亮의 다른 아들인 錦洋位(錦陽尉) 박미의 後孫들이었다.
  7. 族譜上으로는 아저씨 뻘
  8. 族譜上 族大父 뻘
  9. 反民族問題硏究所,《親日派99人》(돌베게, 1993年) 119쪽( 윤해동 執筆 部分)
  10. 高宗은 追尊王人 文鳥(驍名世子)의 兩者(入承大統)이다. 文鳥는 純祖의 嫡長子이나 夭折해 子息이 없었고, 江華도령 哲宗이 純祖의 養子가 돼 王系를 이었다. 따라서 哲宗의 딸 영혜翁主와 高宗은 四寸之間이 된다.
  11. 김삼웅 (1995年 7月 1日). 《親日政治 100年史》. 서울: 東風. 39쪽. ISBN   978-89-86072-03-7 .  
  12. 임종국 (1991年 2月 1日). 《實錄 親日派》.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서울: 돌베개. 64쪽쪽. ISBN   89-7199-036-8 .  
  13. 日本에서 接한~: 이이화, 《韓國史이야기22. 빼앗긴 들에 부는 近代化바람》(한길사, 2004) 46쪽.
  14. 1883年~:《 고종실록 》20年 3月 17日: 朴泳孝爲廣州府留守
  15. 朝鮮時代 公主나 翁主, 君主, 현주와 結婚한 이는 再婚도 不可能했고, 蓄妾을 할 수 없었다.
  16. 亡命 事件은 1942年 7月 조용만 의 短篇 小說 배 안에서 의 素材가 됐다.
  17. 信仰보다는 讀書 目的의 敎會 出席이었다.
  18. [列島의 韓國魂 ⑪] 風雲兒 김옥균 日本 亡命 10年의 軌跡:絶海孤島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字, ‘精管(靜觀)’! (5)
  19. 이광린, 《開化期의 人物》 (연세대학교 出版部, 1993) 137페이지
  20.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521062449&Section=04
  21. 이 일로 이준용의 否認 광산金氏는 兩者 이우가 朴泳孝의 孫女와 結婚하는 것을 끝까지 反對했다 한다.
  22. 黃玹, 《譯註 매천야록 (上)》 (임형택 外 驛, 文學과 知性史, 2005) 448 페이지
  23. 정용화, <文明의 政治思想: 兪吉濬과 近代韓國> (정용화 지음, 文學과知性社, 2004) 93페이지
  24. 서해문집,《來日을 여는 歷史 26號》 (서해문집, 2006) 56페이지
  25. ‘파시즘’의 뿌리는 너무나 깊다 한겨레 21 第475號
  26. 윤덕한, 《李完用 評傳》 (中心, 2005) 261페이지
  27. 윤덕한, 《李完用 評傳》 (中心, 2005) 262페이지
  28. 김삼웅 (1995年 7月 1日). 《親日政治 100年史》. 서울: 東風. 43~44쪽. ISBN   978-89-86072-03-7 .  
  29. 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 創立의 主體였던 김탁원ㆍ길정희 夫婦는 왜 實際 設立 過程에서 除外되었는가? Archived 2016年 3月 4日 - 웨이백 머신 -古代 醫大敎授 백운기 김상덕 著(延世醫學士 第 13卷 第 1號:41-49, 2010年 6月 揭載)
  30. 성강현 (2004年 3月 18日). “‘朝鮮功勞者명감’親日 朝鮮人 3百53名 記錄 - 現役 國會議員 2002年 發表한 親日名單 日치 相當數” . 日曜示唆. 2008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3月 6日에 確認함 .  
  31. 성강현 (2004年 3月 18日). “3百53名 中 2百56名 名單” . 日曜示唆. 2008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3月 6日에 確認함 .  
  32. “朴泳孝가 묻힌 釜山에 생긴 太極旗 公園” . 2007年 9月 2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6年 2月 28日에 確認함 .  
  33. 李正姬 (2004年 12月 16日). “박영효 親筆 붓글씨, 베일을 벗다!” . 주간조선.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月 4日에 確認함 .  
  34. 신동준 (2007年 7月 1日). 《甲申政變의 周易에서 日本의 貴族된 朴泳孝》 28 . 월간조선. 492쪽.  
  35. 朝鮮新聞社 (1922). 《朝鮮人事興信錄》 (日本語). 朝鮮新聞社.  
  36. 潘南朴氏大宗中. 《潘南朴氏世譜 5卷》 (PDF) . 123쪽. 2014年 1月 16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月 16日에 確認함 .  
  37.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新聞
  38. 討論이 있는 인터넷新聞 - 데일리안
  39. donga.com[뉴스]-[社說]歷史認識의 地平 넓힐 뉴라이트 代案 敎科書
  40. 許政, 《來日을 위한 證言》 (샘터사, 1979) 80페이지
  41. 高宗 實錄 23卷, 高宗 23年(1886 丙戌 / 靑 光緖(光緖) 12年) 7月 24日(乙卯) 2番째記事

參考資料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哲宗實錄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순종실록 附錄
  • 日省錄
  • 承政院日記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이돈응
第1738代 漢城府判尹
1882年 陰曆 12月 29日 ~ 1883年 陰曆 3月 16日
後任
조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