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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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要 [ 編輯 ]

명성황후 》는 1995年 에 初演된 大韓民國 뮤지컬 명성황후 의 生涯를 素材로 한다. 1990年代 初盤에 發表된 小說家 李文烈 의 《여우사냥》이라는 小說을 原作으로 하여 劇作家 김광림 이 脚色을 한 作品으로 劇作家 兼 作詞家 양인자 , 作曲家 김희갑 夫婦가 作詞, 作曲을 맡아서 그 夫婦가 처음으로 쓴 뮤지컬 作品 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作品으로, 뮤지컬 俳優, 演出家, 音樂監督 박칼린 이 大韓民國 最初로 뮤지컬 音樂監督 1號로 불리어 지기도 하다. 이 作品 以前에도 뮤지컬은 있었지만, 뮤지컬 音樂監督 이라는 職責 또는 呼稱이 없이, 그냥 指揮者나 編曲者 程度로만 存在 했을 뿐 이었다. 근데 이 作品으로 大韓民國 最初의 뮤지컬 音樂監督 이라는 職責과 分野, 呼稱이 생겨나기 始作했다. 이 作品은 1895年 에 일어난 乙未事變 100周年이 되는 해인 1995年 大韓民國의 藝術의殿堂 오페라 劇場에서 上演되기 始作하여 큰 成功을 거두었으며 1996年 에는 第2回 韓國뮤지컬對象에서 對象, 演出賞, 美術賞, 衣裳賞, 演技賞을 受賞했다. 1997年 8月 15日 에는 美國 뉴욕 링컨 센터 에 있는 뉴욕 州立 劇場(New York State Theatre)에서 上演되었다.

<명성황후> 總製作費는 2百萬달러(18億원). 公演 收益을 60萬달러(5億4千萬원), 링컨센터 貸館料 20萬달러(1億8千萬원), 美國人 스태프 賃金 35萬달러(3億1千5百萬원), 出演陣 호텔費 7萬5千달러(6千7百50萬원), 오케스트라 出演料 13萬달러(1億1千7百萬원) 等이다.

美國現地 反應은 썩 좋지 못했다. 뉴스데이 시티서치 等에서 印象的인 듀엣이나 記憶에 남는 테마曲이 없다는 評을 들었다. 인터넷 뉴욕 文化가이드 앨버트 리 시티서치 에 “죽은 皇后가 復活해 鬼神들과 함께 合唱하는 場面은 뜻밖의 結末이었다. 全體的으로 記憶에 남는 旋律이 없어 곧 잊힐 作品인데도 마지막에 브라보를 외치는 觀客들의 모습이 놀라웠다”라고 評했다.

1997年 뉴욕, 1998年 로스앤젤레스 公演에 이어 런던公演(2002年 2月 1~16日)도 强行했으나 `國民 뮤지컬'로 待接받고 있는 명성황후 의 名聲과는 다른 結果를 냈다. 英國의 夕刊新聞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 王妃와 나(Queen and I) 쯤 되는 東洋의 뮤지컬”이라며 陳腐하다고 評했다. 3500席에 가까운 해머스미스 劇場을 折半도 채우지 못했다.

이 作品은 序幕, 2幕 13張, 終幕으로 構成되었으며, 編曲者가 여러番 바뀌면서, 作品의 느낌도 새 시즌마다 바뀌는 우리나라 創作 뮤지컬 1世代 作品中에 代表 作品으로 손 꼽힌다. 이 뮤지컬의 作曲家 김희갑 의 첫 뮤지컬 作曲作이며, 그는 이 뮤지컬이 좋은 反應을 얻자, 몇 篇의 뮤지컬을 더 作曲하기에 이르는 熱情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創作眞 [ 編輯 ]

製作陣 [ 編輯 ]

  • 舞臺: 박동우
  • 音樂監督: 박칼린 (初演 ~ 美國 公演) → 김문정 (런던公演 ~ 現在 )
  • 協力 音樂監督(音樂 슈퍼바이저): 김문정 (존 릭非 音樂監督 當時) , 존 릭非 (김문정 音樂監督 當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