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계훈
(洪啓薰,
1842年
~
1895年
)은
朝鮮
後期의 武裝 兼 政治家이다. 조선국 忠淸道 監査 等을 지냈다.
初名은
홍재희
(洪在羲), 本貫은
南陽
(南陽) . 字는 城南(聖南), 號는 규산(圭珊)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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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은 確實치 않으나, 武士 집안 出身이었다. 武藝廳 別監으로 官職을 始作한 그는
1882年
8月에 일어난
壬午軍亂
當時 守門將
[1]
으로
명성황후
를 누이로 속여서 明成皇后 閔氏를 업고 避身시킨 뒤
京畿道
驪州
로 護送했다. 그 功으로 出世하였다.
1887年
忠淸監査
1894年
壯衛營 領官(領官)을 지냈다. 그해
東學農民運動
이 일어나자 양호초土沙(兩湖招討使)로 出戰하여 全州를 奪還하고 그 功으로 訓鍊大將이 되었다.
1895年
陰曆 8月 20日(陽曆 10月 8日 새벽5時 50分,6時)
乙未事變
때 少數의 都城守備臺 兵力을 이끌고 光化門 앞에서 日本軍과 日本이 훈련시킨 訓鍊隊의
우범선
,
이두황
等 親日派 軍人 內通者들을 막다가 죽었다.
[2]
[3]
[4]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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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乙未事變
때 朝鮮의 王妃
明成皇后 閔氏
를 지키다가 죽은 宮內府 代身
이경직
과 더불어 1900年
奬忠壇
에 祭享되었다.
[4]
- 軍部大臣에 追贈되고, 충의공(忠毅公)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評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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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玹
은 《매천야록》에서 洪啓薰을 “卒兵에서 일어나 높은 地位에까지 올랐는데, 人品이 恬潔(廉潔)하고 謹愼(勤愼)했다.”라고 好評했다. 黃玹이 明成皇后와 聯關된 人物中 거의 唯一하게 好評한 人物이다.
洪啓薰을 演技한 俳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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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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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西班 種4品
- ↑
《고종실록》에서는 光化門 밖에서, 《
한국통사
》에서는 勤政殿 쪽에서, 박은식, 《
한국통사
》(김승일 驛, 범우사. 1997) 194쪽.“새벽녘에 西大門에 이르자 訓鍊隊와 日本軍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行軍 했고, 날이 샐 무렵 光化門에 到着하여...약간의 死傷者가 發生했다. 聯隊長 홍계훈(洪啓薰)李 消息을 듣고 달려와 큰소리로 이들을 꾸짖다가 日本病에게 殺害되었고, ... ”,《大韓季年史》에서는 宮闕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다. 또 《
매천야록
》에서는 銃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뒤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 ↑
이사벨라 비숍
은 《韓國과 그 이웃들》에서 日本 將校의 칼에 被襲된 뒤 여덟 발의 銃彈을 맞아 致命傷을 입었다고 썼다.
- ↑
가
나
한영우 (2001年 10月 20日).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初 1刷판. 서울: 효형출판. 53~54쪽쪽.
ISBN
89-86361-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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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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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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