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 (景福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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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
乾淸宮
장안당
基本 情報
位置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世宗路
座標 北緯 37° 34′ 59″ 東經 126° 58′ 38″  /  北緯 37.583138° 東京 126.977239°  / 37.583138; 126.977239
狀態 使用 中
完工 1873年
開場 2007年 (復元)
撤去 1909年
用度 御眞 保管 및 居處地
建築 情報
所有主 大韓民國 政府

건청궁 (乾淸宮)은 景福宮 後援에 있는 宮闕 이다. 1873年 朝鮮王朝 歷代 임금의 肖像畫인 御眞(御眞) 等을 保管할 目的으로 지어졌다가 1895年 明成皇后 弑害 事件인 乙未事變이 있기까지 高宗과 明成皇后의 居處로 使用되었다. [1] 乙未事變 이듬해인 1896年 高宗 러시아 公館으로 居處를 옮긴 後 日帝는 1909年 건청궁을 撤去하고 그 자리에 朝鮮總督府 美術館을 지었는데, [2] 이 美術館은 解放 後 한동안 國立現代美術館 으로 使用되다가 1998年 에 撤去됐다. 2007年 10月 18日 日帝가 撤去한 건청궁이 復元돼 一般人에게 公開됐다. 건청궁 復元工事는 景福宮 復元·整備事業의 5段階 事業인 光化門 및 其他 圈域 復元·整備計劃의 一環으로 2004年 6月에 始作돼 3年 4個月 만에 完工됐다.

高宗은 건청궁을 王의 私費人 內帑金으로 建立했다. 高宗이 興宣大院君을 벗어나 親庭을 宣言한 1873年에 지어졌다는 點 等으로 인해, 건청궁 創建은 政治的 自立 宣言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3] 건청궁은 昌德宮 延慶堂 및 樂善齋와 더불어 一般 士大夫의 邸宅과 類似하게 안채와 舍廊채로 區分된 建築 形式을 지니고 있으며, 王의 居處인 장안당과 王妃의 居處인 鯤녕합, 그리고 附屬 建物인 復讐當 等이 配置돼 있다. 뜰에는 高宗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 高宗柹 ' 감나무가 慶尙南道 山淸郡 의 寄贈으로 植栽되어 있다. [4]

2007年 復元 以後 木材가 썩는 等의 現象이 보였고, 調査 結果 지붕이 잘못지어져 漏水되는 것으로 알려져 不實 復元 論難이 일었다. [5]

장안당 [ 編輯 ]

장안당 (長安堂)은 高宗皇帝의 沈澱이다. 舍廊채의 槪念으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平安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칸, 側面 3칸, 7輛의 建物이다. 장안당에는 北行脚과 東行脚이 딸려 있는데 北行脚은 1887年 美國의 에디슨電氣會社 가 發電機를 設置해 韓國 最初로 電氣불을 밝힌 곳으로 有名하다. [6] [7] 乙未事變 當時, 高宗은 이 곳에 監禁된 狀態였다고 傳해진다. [8]

鯤녕합 [ 編輯 ]

鯤녕합 옥호루 (1900年)

鯤녕합 (坤寧閤)은 명성황후 의 沈澱으로 民家의 안채에 該當된다. 鯤녕합 內部에는 文化財廳 이 依賴해 無形文化財 匠人들이 宮中遺物基準에 따라 復元한 者개寢臺 等 宮中生活用品 300餘點이 展示되어 있다. [9] 장안당과는 複道角을 통해 連結되어 있다. 鯤녕(坤寧)은 '땅이 便安하다'는 뜻으로 王妃의 德性을 表現하는 것으로 [10] 紫禁城 의 鯤녕宮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推定된다. [11] 鯤녕合意 南쪽 樓閣인 옥호루(玉壺樓)는 明成皇后가 弑害되었던 場所로 알려져 있다, 옥호루의 名稱은 옥호루(玉壺樓)가 아닌 옥곤루(玉?樓)라는 主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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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 號 大闕안길 곤

復讐當 [ 編輯 ]

復讐當 (福綏堂)은 別채에 該當되는 建物이다. 宮人들의 居所로 推定된다.

關門角 [ 編輯 ]

關門角 (觀文閣)은 高宗 의 書齋로, 元來 傳統的인 木造建物 關門黨이었다. 그러다 1891年에 러시아 建築家 阿罷拿視 세레딘사바틴 의 設計로 改築되었다. 景福宮 안의 唯一한 西洋式 建物로, 2層 規模인 것으로 알려졌다. 關門覺은 洋館이라 불리며 主로 外國人을 接見하기 위한 場所로 쓰였다. [3] [12] 다만 工事 過程에서 管理들의 非理와 不實 工事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13] 結局 不實工事로 1901年 헐리게 되면서 [14] 그 存在 自體에 對해 알려지지 않아 景福宮 復元 計劃에서 除外되었고, 以後 건청궁 復元 事業이 進行될 때도 復元되지 못하고 現在 터만 復元되었다. [15] 1992年 1月 關門角의 存在가 寫眞帖 等을 통해 確認되었다. [16]

향원정 [ 編輯 ]

향원정

향원정 (香遠亭)은 景福宮 後援에 있는 樓閣이다. 2層 規模의 翼工式(翼工式) 기와지붕. 樓閣의 平面은 正六角形이며, 長臺石(長臺石)으로 段을 모으고, 짧은 六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層과 2層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分合(四分閤)을 놓았다. 特히 蓮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年에 세운 것으로 推定된다. 高宗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後援人 서현정 一帶를 새롭게 造成하였는데 蓮못 한가운데 人工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六角形 亭子를 지어서 ‘香氣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香原紙를 건너는 다리는 “香氣에 取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朝鮮時代 蓮못에 놓인 木橋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只今은 南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元來는 취향교가 北쪽에 있어 件궁처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南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年이다. 香原紙의 根源은 地下水와 裂傷震源샘이며, 이 물은 慶會樓의 臙脂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集玉齋 [ 編輯 ]

集玉齋 (集玉齋)는 高宗이 個人 書齋 兼 專用 圖書室로 使用하던 建物이다. 神武門의 東쪽에 있으며 正面 5칸, 側面 4칸 規模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建物의 側面 左右 끝에 牔栱을 달아 壁面 上部가 三角形으로 된 맞배집으로 道理가 7個로 된 지붕틀을 쓴 七樑 構造다. 景福宮의 다른 殿閣들과 달리 中國 式 樣式으로 지어졌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明成皇后 弑害당한 건청궁 復元돼〉, 한겨레新聞, 2007.10.18
  2. 건청궁, 悲劇의 歷史도 復元되야 한다. 한겨레新聞, 2007.10.19
  3. 김승욱, 건청궁은 朝鮮 近代化의 産室 , 聯合뉴스, 2007年 10月 19日
  4. 오대일, 復元 건청궁에 入闕한 감나무 '高宗柹' , 노컷뉴스, 2007年 10月 18日
  5. 송수진, 景福宮 건청궁, 100億 들인 不實 復元 , KBS, 2011年 11月 16日
  6. 文化財廳 50年史, 文化財廳, 575쪽
  7. 김민호, 明成皇后 弑害된 悲劇의 現場 건청궁 98年만에 復元 , 國民日報, 2007年 10月 18日
  8. 황정옥, 119年 前, 건청궁에선 想像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 中央日報, 2014年 4月 29日
  9. 이혁진, 건청궁의 슬픈 過去 아시나요? , 政策브리핑, 2010年 8月 20日
  10. 김태식·김승욱, 명성황후 悲劇 現場 건청궁 復元(綜合) , 聯合뉴스, 2007年 10月 18日
  11. 임종업, 沒落한 王朝 슬픔 안고 한世紀만에 돌아오다 , 한겨레, 2007年 10月 18日
  12. 허성준, 100餘年 前 求한 말 建築의 中心, 세레眞 사바찐① , 조선비즈, 2013年 12月 14日
  13. 허성준, 乙未事變 目擊한 異國(異國) 땅의 建築家 사바찐② , 조선비즈, 2013年 12月 21日
  14. 朴善英, 乙未事變 悲劇 100餘年 만에 열려 , 韓國日報, 2007年 10月 18日
  15. 송민섭, 明成皇后 弑害 場所 건청궁, 歷史空間으로 再誕生 , 世界日報, 2007年 10月 18日
  16. 國內最初의 宮苑內 洋館 觀文閣모습 첫公開 , 聯合뉴스, 1992年 1月 11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