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 10·1 事件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 10月 人民抗爭 에서 넘어옴)

大邱 10·1 事件 (大邱 10·1 事件)은 1946年 10月 1日 美軍政 下衣 大邱 에서 발발, 以後 南韓 全域으로 擴散된 一連의 事件을 指稱한다. 歷史的 觀點에 따라 10月 人民抗爭,10·1事件, 嶺南 所要, 10月 暴動 等으로 불린다. 擁護하는 立場에서는 10月 人民抗爭, 批判하는 立場에서는 嶺南 所要, 10月 暴動으로 부르며, 中立的인 立場에서는 10·1事態로 부른다. 朝鮮共産黨 의 煽動 및 主導를 主張하는 視角에서는 10月 暴動으로 부르기도 한다. 過去에는 10月 暴動, 嶺南 所要, 10月 抗爭의 用語가 混用되었으며, 公式的으로는 보다 中立的인 10·1事件이라는 指稱을 使用한다. [1]

2010年 3月 大韓民國 眞實和解委員會 는 《大邱 10月事件 關聯 眞實糾明決定書》에서 該當 事件을 "食糧難이 深刻한 狀態에서 美 軍政이 親日管理를 雇用하고 土地改革을 遲延하며 食糧 供出 政策을 强壓的으로 施行하자 不滿을 가진 民間人과 一部 左翼 勢力이 警察과 行政 當局에 맞서 發生한 事件"이라고 規定하고, 國家의 責任을 認定해 遺族들에 對한 謝過와 慰靈事業을 支援하도록 勸告하는 決定을 내렸다.

背景 [ 編輯 ]

1946年 9月 30日 民主중보 에 실린 10月 事件이 일어날 兆朕을 다룬 記事. 이 記事가 실린지 이틀後 釜山 地域新聞인 民主中보는 1달半 동안 休刊狀態 들어갔다. [2]

光復 以後 在朝선미陸軍司令部軍政廳 (USAMGIK) 基의 南韓內 韓人들의 삶은 굶주리는 處地였다. 美軍政의 쌀 配給 政策이 失敗했기 때문이었다. 이 時期 콜레라 가 猖獗한 大邱 의 굶주림은 特히 더 甚했었다. 大邱, 慶北 一帶에 2千餘 名의 콜레라 患者가 發生하자 治療를 위한 措置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傳染을 막는다며 大邱를 封鎖해버린 탓이었다. 車輛은 勿論 사람조차 詩境界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結果 農作物과 生必品 供給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不足했다. 當時 돈이 있다해도 쌀을 求할 수 없어 콜레라 를 治療하는 醫師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粥을 끓여 먹을 地境이었다고 한다. 또한 國立警察 [3] 로 採用된 過去 親日派 出身 警察들이 日帝時代 方式 그대로 農民들의 쌀을 强奪하다 시피 供出해갔다. [4] [5] 親日出身 警察들에 對한 市民들의 憤怒는 매우 커져갔고, 警察은 이에 對해 報復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었다. 이러한 가운데 大邱 , 慶北 一帶의 民心은 매우 洶洶했다. [4]

蘇聯軍政 의 스티코프의 日記에 따르면 總罷業에 關한 命令과 資金 이 介入 되었다고 作成되었다. 1946年 南韓을 뒤흔들었던 9月 總罷業 當時 北韓의 蘇聯軍政은 朝鮮共産黨 側에 200萬엔을, 이어 發生한 10月 大邱暴動 期間 中에도 세 次例 追加資金(300萬엔 以上)을 支援했으며, 罷業鬪爭에 對한 行動指針까지 指示했다. 이는 當時 蘇聯軍政의 最高 責任者인 沿海州軍管區 政治擔當 副司令官 兼 軍事評議會委員이었던 테렌티 스티코프 (1907∼1964年)가 作成한 日氣에 나타나있다. [6]

한便 1946年 5月 整版社 僞造紙幣 事件 으로 美軍政 에서 '共産黨 活動 不法化'를 公表함과 同時에 共産黨 幹部들에 對한 大大的인 逮捕令을 내린다. 다만 이때 當時 朝鮮共産黨 蘇聯軍政 에게서 直接的인 支援金을 調達받고 있던 터라 굳이 無理해서 僞造紙幣를 만들 理由는 없었으며, 首都警察廳 廳長이었던 장택상 側에서 證據로 提示한 僞造紙幣 또한 朝鮮共産黨 人士들이 만들었다는 證據라고 하기에는 不足하다.

以後 박헌영 系列 朝鮮共産黨 勢力들에서는 " 美軍政 에 對抗하겠다."면서 '神殿술'이라는 方式을 採擇하여 더욱 極端的 性向을 보이게 된다. 이어 共産黨과 錢評 은 勞動者들을 煽動하여 1946年 9月에 鐵道勞動者, 運送業勞動者들이 主導해 大大的인 罷業을 벌였는데, 이것이 9月 總罷業 이다. 9月 總罷業 釜山 地域의 鐵道勞動者들의 罷業을 始作으로 全國的으로 번져나갔다. 이렇게 되어 共産黨과 전평은 9月 總罷業 을 主導해 나아가 本格的으로 美軍政에 正面衝突을 벌였다. [7] 9月 總罷業 으로 瞬息間에 全國으로 번져나가 勞動者들이 罷業을 벌였다. 美軍政은 國立警察과 反共靑年團體를 投入하여 罷業에 鎭壓하였으나, 여기서 意外의 事態를 맞게 되는데 大邱 地域 勞動者들의 罷業 示威에 警察이 發砲하자 이에 對해 맞서 發展하게 되었다. [8]

朝鮮共産黨 의 神殿술에 따라 1946年 7月부터 전평과 전농을 中心으로 美軍政을 相對로 한 强勁한 鬪爭이 始作된다. 그 始作은 ‘쌀 獲得 鬪爭’이었다. 전평은 旣存의 穩健路線을 버리고 所屬된 勞動組合들이 쌀 配給과 賃金引上을 要求하는 鬪爭을 벌였다. 鬪爭은 9月 總罷業으로 번져갔다. 그 中心에 鐵道勞動者들이 있었다. [9]

嶺南地域의 狀況 [ 編輯 ]

大邱 [ 編輯 ]

朝鮮共産黨 에서 主導하여 9月 總罷業 을 展開했을 때, 大邱에서는 錢評 指導部에서 9月 23日 부터 總罷業에 突入, 10月 1日 까지 罷業과 示威가 繼續되었다. [10] 10月 1日 大邱 地域에서 勞動團體들이 모여 메이데이 行事를 開催했다. 海州 로 避身했다가 蘇聯 을 訪問하고 돌아온 박헌영 京城府 로 내려와 京城 의 메이데이 行事에 參席, 祝辭를 朗讀했고 他地域의 메이데이 行事에서도 그의 祝典이 朗讀되었다. 그러나 메이데이 行事는 美軍政에 對한 事件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10月 1日 저녁, 大邱부청 앞에서 飢餓 對策 마련을 要求하는 示威 途中 警察 의 發砲로 民間人 황말용, 金鍾泰 라는 勞動者가 銃에 맞아 死亡하는 事件이 일어났다. 이 事件의 發源地인 大邱부청 자리는 오늘날 慶尙監營公園 이다. [10] 事態가 深刻해지자 박헌영은 武力 示威를 中斷할 것을 促求했고, 不必要하게 美軍政을 刺戟해서는 안된다며 中斷을 促求했지만 事態는 걷잡을 수 없이 擴散되었고, 警察官과 行事 參加者 間의 物理的인 暴力事態로 進行되었다. 박헌영 은 卽時 서울市 를 떠나 避身하였다.

다음 날 아침, 警察의 發砲로 民間人 2名이 銃에 맞아 死亡했다는 消息을 들은 勞動者들이 市內에 集結하기 始作했고 굶주린 一般 市民들과 學生들도 示威에 合勢했다. 萬餘名의 群衆에 包圍된 大邱警察署腸은 스스로 武裝解除를 宣言하고 留置場 열쇠를 건네 收監되어 있던 政治犯들을 釋放하게 했다. 朝鮮共産黨 指導部의 統制를 받는 勞動者들은 秩序 있게 警察權을 引受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거리 한쪽에서 興奮한 群衆들이 警察에 投石을 始作했고, 窮地에 몰린 警察官들은 群衆들에게 銃을 亂射하여 17名의 示威隊가 죽는 事態가 벌어졌다. [11] 美國 國立文書記錄保管所에서는 當時 모습을 撮影한 寫眞을 볼 수 있다. 寫眞에는 거리 한쪽에 長銃으로 武裝한 警察들이 掩蔽物 뒤에 쪼그려 앉아 있고 反對便으로 避身한 示威 群衆 쪽에는 여러 名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 屍身을 撮影한 寫眞에는 番號가 24番까지 매겨져 있어 當時 적어도 24名이 死亡했음을 알 수 있다. [12]

憤怒한 群衆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動向을 살피던 正私服 警察官들을 毆打하거나 警察 武器庫를 털어 銃器로 武裝했다. 처음에 平和示威로 始作하다가 暴力的 性向으로 突變하자 一部 젊은 共産黨員들은 示威의 先鋒에 섰으나 古參 黨員들은 어떻게 收拾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群衆들은 富者집과 過去 親日派들의 家屋을 털어 生必品이나 食糧을 가져갔지만, 달아나지는 않고 그것들을 길바닥에 쌓아놓고 必要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一般 가게 銀行 같은 곳은 거의 被害를 입지 않았다. 警察官 을 集團 暴行하거나 죽인것은 그들의 大部分이 日帝 때부터 朝鮮人들을 괴롭혀온 親日警察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박헌영 評傳에서 主張한다. [13]

甚至於 大邱地域의 醫師모임인 대구부醫師會는 警察에 對한 警告文을 發表해 "첫째, 景觀은 市民에게 發砲를 中止하라. 둘째, 同胞에게 發砲한 景觀 負傷者의 治療를 拒否한다"며 事件에 同參했다. [14]

朝鮮共産黨의 使嗾를 받은 示威隊는 많은 警察官과 右翼人士들을 群衆이 보는 앞에서 毆打, 竹槍찌르기, 칼로 亂刀질하기 等으로 殘忍하게 殺害하였다.

美軍政 은 이튿날인 10月 2日 午後 7時 大邱 地域에 戒嚴令 을 宣布하고 美軍을 動員함으로써 表面的으로는 秩序가 回復되었다. (그러나 美軍 介入으로 示威가 大邱 隣近인 慶山郡 , 星州郡 , 永川郡 等으로 擴大되면서 慶尙北道 一帶에서 民間人들과 美軍政 間의 衝突은 멈추지 않고, 繼續 發生하게 되었다. 以後 慶北 地域 民間人 示威 鎭壓 過程에서 또다시 慶北 地域을 벗어나 全國的으로 擴大되면서 1946年 末까지 繼續되었다.)

慶尙北道 [ 編輯 ]

獨立運動家 박상희 . 朴正熙 大統領의 셋째 兄이다.

騷擾事態는 10月 2日 즈음 되어 潛潛해지는 듯 했으나 周邊人들이 다른 地域으로 移動해 示威를 벌이고 所要를 일으키면서 事件은 慶北 全域으로 퍼져나갔다. 永川 에서는 1萬餘名의 示威隊가 警察署를 襲擊하고 郡守, 警察, 官吏들을 殺害하고는 警察署와 郵遞局을 防火했다. (10月 3日) 警察應援代가 到着해 秩序는 回復되었으나 警察官들과 右翼 靑年團員들은 事件 關聯者들의 집을 掠奪하고 蹂躪했다. [15] 永川에서만 해도 1200餘戶의 家屋이 全燒,破壞되었고 死亡 40名, 重傷者 43名, 被害額 10億餘원의 被害를 입었다. [16]

한便 善山郡(現在의 龜尾 )에서는 다른 地域들에 比해 相對的으로 被害가 微微했던 것으로 傳해진다. 20世紀까지 알려져왔던 內容은 朴正熙 의 兄 박상희 를 主動으로 한 2000餘名의 群衆들이 龜尾警察署를 攻擊해 警察署 機能을 痲痹시키고는 先山人民委員會保安署 看板을 매달아 地域管理에 나섰고 警察, 右翼人士들을 監禁하고 符號들의 家産을 破壞했다고 報道되어 왔었다. 허나 21世紀에 들어 새롭게 밝혀진 事件 調査內容에 依하면 10月 3日 龜尾 警察署 襲擊 當時 慶北地域 남로당願들은 暴動이 最惡의 事態로 치닫는 것을 오히려 막으려 했다고 밝혀진다. [17]

이것은 박상희 (朴相熙)의 죽음에서도 確認할 수 있다. 當時 民主主義民族戰線 先山支部 事務局長이던 박상희는 龜尾에 머물면서 大邱의 事態를 銳意注視하고 있었다. 그해 10月3日 示威를 하던 人民들이 선산警察署를 襲擊하자, 박상희는 示威隊를 說得해 갇혀 있던 警察들을 無事히 避身시켰다가 뒤늦게 到着했던 他地域 警察에게 射殺되고 말았다. [18]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氏는 2010年 7月15日 龜尾 박상희 墓域에서 열린 追慕碑 除幕式에서 다음과 같이 發言했다. [18]

63年 前 돌아가신 아버님은 東奔西走하시면서 獨立運動을 하시다가 수많은 獄苦를 치르셨고, 돌아가시던 1946年 10月5日에도 示威隊에 둘러싸인 警察官이 위태롭다는 傳言을 듣고 警察官을 救하러 가셨다가 變을 當하셨다. 이런데도 不拘하고 아버님은 左翼이니, 右翼이니, 共産活動을 했느니 하는 不當한 評價에 시달리며 只今까지 지내 왔다. 別世하신 지 60年이 지나도록 墓碑 하나 없이 싸늘한 땅에 누워 계셨다.

醴泉郡에서는 示威를 막기 위해 미리 警察들이 派遣되었으나 民間人과의 衝突로 인하여 失敗했고 1000餘名의 群衆이 警察署를 襲擊해 交戰까지 벌였으며, 美軍이 到着할 때까지도 秩序가 回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後에도 警察署 攻擊이 이어져 警察이 다치고 武器庫가 奪取되는 일이 이어져 外郭地域에 警察이 보이지 않을 程度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迎日郡에서는 民間人의 攻擊으로 傳道師가 殺害當하기도 했다. [19]

漆谷 에서도 激烈한 事件이 發生하였다. 500餘 名의 群衆은 若木支署를 襲擊해 3名의 警察을 기둥에 묶어 殺害했다. 倭館에서는 2,000餘 名의 住民들이 示威와 함께 倭館警察署를 攻擊해 警察 4名이 追加로 被殺되었다. 事件 全義 倭館 地域은 米穀收集令에 對한 抵抗이 매우 甚했는데 倭館 住民들의 憤怒가 어찌나 큰지 當時 警察署長 장석한은 얼굴이 亂刀질당한 채로 머리부터 밑으로 갈라져 살해당했다고 한다. [20]

이 外에도 達成, 高齡, 星州, 軍威, 義城, 金泉, 慶山, 淸道, 慶州, 盈德, 安東, 尙州, 聞慶, 榮州, 奉化 地域에서 事件이 發生했고 約 77萬 3200餘 名이 事件에 參與했다. 慶北 地域의 事件은 다양한 强度(美發生/低强度/中强度/高强度/最高强盜로 分類)와 方式(先制攻擊, 警察署 襲擊, 場날 利用, 政治 理念 勢力 間의 힘의 均衡 利用, 波及이 큰 논農事 地域 利用)을 利用해서 展開되었고, 이에 對한 警察의 苛酷한 報復도 뒤따랐다.

警察側의 被害 規模는 當時 地域에서의 警察에 對한 信賴度나 管轄 警察署長의 臨機應變에 따라 크게 줄어드는(동시에 警察의 報復도 가벼운) 境遇가 많았는데, 高靈郡의 境遇 10月 3日 午後 8時頃 郡民靑 本部에 모인 軍內 民靑員 數百 名이 郡廳을 襲擊, 接受할 計劃을 꾸미고 있다는 情報를 接한 當時 高齡警察署長 최이준(崔二俊)이 直接 民靑 幹部와 만나 兩者間 折衝을 試圖하고, 協商 結果에 不滿을 품고 4日 午前 1時頃 괭이와 낫을 들고 警察署 攻擊에 나선(당시 高齡警察署에는 10月 1日의 大邱에서의 騷擾 鎭壓에 15名의 警官이 投入되고 그밖에 避身한 景觀 몇몇을 除外하면 남은 警察은 8名뿐이었다) 民靑員과 群衆들을 相對로도 최이준 署長이 다시 몸소 나서서 談判을 짓는 모습을 보였는데, 群衆들 사이에서 穩健派와 强勁派 사이의 軋轢이 벌어져 時間을 끄는 過程에서 大邱로부터 支援警察이 온다는 消息에 群衆은 解散, 별다른 被害는 일어나지 않았다.

王朝 時代 以來로 儒敎的 傳統이 剛한 만큼 右翼 및 警察 勢力도 左翼 못지 않게 剛했던 安東 에서는 10月 3日에 農林學校 敎師 8名을 비롯, 共産主義 指導者로 指目된 30名(《大邱市步》에는 82名)李 安東 및 榮州 警察에 事前 逮捕되면서 不祥事는 豫防되었다고 評價되었다. [21] 문경에서는 황시곤, 이규선 等 聞慶의 地方 有志들이 光復靑年會 店村支部 店村消防隊와 함께 警察에 協助했고, 聞慶警察署長이었던 조준영 輕減은 聞慶 군민들에게 比較的 "청렴하고 斬新한 人物"로 評價받아온 사람이었고 軍內 左翼들의 動態를 把握해 豫防措置를 講究한 德分에 被害가 多少 적었는데, 10月 月 4日 50餘 名의 群衆이 軍內 山陽地書를 襲擊, 破壞하였고 警察에 容疑者 30名이 檢擧, 별다른 人命被害는 없었다.

慶尙南道 [ 編輯 ]

慶南地域은 大邱 10.1 事件의 導火線이 되는 9月 總罷業 이 始作된 곳이다. 하지만 다른 地域과는 달리 9月 總罷業의 展開는 매우 消極的이고 穩健的이었으며 10月 事件 때에도 分散的이고 孤立的인 事件들이 펼쳐졌다.(그럼에도 많은 地域에서 事件이 發生했다.)

慶南地域에서는 統營 에서 最初의 事態가 發生했다. 4000~5000餘名의 群衆들이 邑內를 掌握하고는 警察을 毆打하고 武器를 奪取했다. 昌寧 에서도 여러 支署가 襲擊당하고 群衆의 警察署, 郡廳 占領試圖가 있었다. 馬山 에서는 6日과 7日에 거쳐서 群衆과 軍警 사이의 熾烈한 衝突로 13名 程度의 死亡者를 내었다. [22] 蔚山 地域에서는 面事務所가 破壞되고 警察署가 포위당했으나 應援警察과 美軍의 도움으로 곧 奪還되었고 群衆 一部는 배를 타고 逃亡하였다. 消極的인 事件이 있었던 釜山 에서도 9日에 流血衝突이 일어나 24名이 목숨을 잃었다.

嶺南 以外 地域에서의 狀況 [ 編輯 ]

忠淸道 [ 編輯 ]

慶尙道에서 불붙은 事件은 忠淸道로 옮겨붙었다. 忠淸道에서 事件은 主로 西北部 地域을 中心으로 發生했다. 忠南에서는 17~19日을 起點으로, 忠北은 10月 4日과 7日에 民間人의 騷擾가 일어났다.

10月 17日 唐津 에서 警察署가 攻擊당하고 公共施設 占據,通信線 切斷, 橋梁 爆破가 일어남을 始作으로 忠南 西北部는 事件에 휘말리게 되었다. 洪城 에서는 쌀과 土地를 달라고 示威를 벌이는 群衆을 向해 警察이 無差別 發砲하여 4名이 죽었다. 豫算, 先山, 天安에서도 騷擾事態가 發生해 警察과 右翼勢力을 威脅했다.

忠北에서는 比較的 事件이 일어나지 않았다. 淸州 에서 警察 1名이 죽고, 永同郡 에 300~400餘名의 群衆이 警察署를 襲擊하려 했으나 失敗한 程度였다. 忠北地域에서 事件이 이렇게 微微했던 까닭은 忠北의 中心地인 淸酒가 穩健 性向의 左翼이 꽤 優勢했었기 때문이었다. (一部 穩健勢力은 "極端的인 共産主義者는 容納되지 못함"이라는 傳單을 뿌리기도 했으며 實際로 極端主義者를 脫退시키기도 했다.) [23]

서울, 京畿道, 黃海道, 江原道 [ 編輯 ]

忠淸道에서 事件이 가라앉으면서 京畿道와 黃海道 地方에서도 騷擾事態가 터졌다. 京畿道 光州 에서는 警察을 殺害하고 警察署를 불태우는 鬪爭을 벌였다. 凱風에서는 警察署長이 被殺되고 大部分의 支署가 이틀에 걸쳐서 襲擊당했다. [24] 坡州 에서는 暴動이 計劃되다가 事前發覺되어 主動者들이 全員 逮捕되었다.

마침내 서울에서도 示威가 發生했다. 3日 1200餘名의 群衆이 學生들과 合勢해 노래를 合唱하며 市廳 앞에서 示威를 벌였고 21日 正午에는 2000餘名이 鍾路네거리에 모여 東大門으로 前進했다. 그러나 基督敎 靑年會館 앞에서 武裝警察隊의 集團發砲로 해산당했고 그 附近을 지나가던 拳鬪選手 한 名이 被殺당했다. 그 날 鍾路 5街에도 示威가 發生하고 서울驛에는 爆彈이 터졌다. [25] 달을 넘긴 11月 2日에도 南大門 앞에서 示威가 展開되었다.

그 外에도 仁川,鉛白,장단 地域에서도 示威와 襲擊이 잇따랐고 10月 20日에서 22日 間 事件이 發生했다.(인천 除外)

講院에서는 橫城 에서 數千名의 群衆들이 警察署를 襲擊했고 墨湖에서는 示威를 調査하던 途中 死亡者가 나자 住民들이 警察支署 等을 攻擊해 多數의 死亡者가 또 發生했다. 江陵 에서도 警察이 毆打당하고 通信이 杜絶당했으며, 平昌 에서는 武器를 든 左翼勢力들과 警察과의 衝突이 發生했다. 三陟 에서는 光山乙 理由로 左右翼 間의 騷擾가 일어났다. 江原道의 事件은 東海岸 附近에서 事件이 主로 일어났다는 것이 特徵이다.

全羅道 [ 編輯 ]

南韓 全域을 휩쓸 것 같았던 一連의 事態들은 10月 23日부터 28日까지 約 一週日 가까이 멈추었다. 美軍政과 右翼勢力들은 左翼極端主義者들이 秋收期와 軍警의 쌀蒐集을 기다리고 있고 美軍政은 쌀蒐集을 할 權利가 없다는 煽動에 集中할 것으로 判斷했다. [26] 그러나 이것은 左翼이 全羅道에서 일을 準備해나가는 期間이었다. 그런 理由 탓인지 特히 全南地域은 事件 初期의 慶北처럼 크고 暴力的이었다.

全羅道에서 事件은 10月이 끝나갈 때 즈음 全南에서 始作되었다. 10月 30日부터 和順 地球의 鑛夫들은 光州를 向해 行進을 試圖했다. 다음 날인 31日에도 婦女子와 아이들까지 帶同하여 行進에 나섰으나 別 다른 衝突 없이 美軍의 說得으로 中斷되었다. 그러나 정작 11月 4日에 鑛夫들은 美軍과 警察에 對한 激烈하게 맞서면서, 鑛夫와 民間人들은 道路와 다리를 막고는 軍警이 탄 지프車를 전복시켰다. 그리고 돌과 彈丸을 날리며 이들에 對한 敵愾心을 드러냈다. [27]

務安 에도 示威가 發生했다. 左翼靑年團體員 50餘名이 警察支署를 襲擊하고 騷擾가 發生해 7名이 목숨을 잃었다. 一路에서는 群衆이 警察을 攻擊했으며, 安城에는 示威隊가 鐵道驛을 攻擊하려고 했으나 鐵道警察과 應援警察의 抵抗으로 失敗했다. 木浦 에서까지 學生과 勞動者로 構成된 많은 群衆들이 派出所를 불태우고 警察署까지 攻擊하는 일이 일어나자, 木浦와 務安郡 一帶에 夜間通行禁止令이 宣布되었다. [28]

光州 에서는 罷業參與者들이 示威를 벌였고 學生들도 示威를 벌이면서 學校가 休校당하기도 했다. 광산군 송정리에서는 美軍과 對話를 한 韓國人이 群衆에 依하여 親美派로 몰려 無差別 暴行당했다. [29] 그런가하면 咸平에선 群衆들이 다른 곳에서 온 煽動者들과 함께 警察과 衝突을 일으켰고, 靈光 에서도 警察과의 衝突이 發生했다.

羅州 地域에서 事件은 和順과 함께 全羅道 地域에서는 大規模이자 極烈的이었다. 5000餘名의 群衆이 羅州 進入을 試圖하였고 一團의 群衆이 銃을 쏘는 警察에 달려들어 10名의 死亡者를 낳았다. 11月이 되자 8000餘名의 群衆이 集結해서는 集結하여 鎭壓하려는 美軍을 沮止하고 各 警察支署를 攻擊했다. (約 9個의 警察支署를 推算 1萬餘名의 群衆이 攻擊했다. 그 外에도 寶城 에서 面長과 마을維持, 右翼靑年團員들이 攻擊당하는 일이 發生했고, 筏橋 ,長興,海南,强震,靈巖에도 11月과 12月에 걸쳐 조그마한 事件들이 여러 番 發生했다. (將星,潭陽地域에도 事件이 發生했다는 記錄이 있으나 確實하지는 않다.)

全南의 事件이 매우 激烈했던 것과는 달리 全北에서는 오직 南原과 淳昌에서만 작은 크기의 事件이 發生했다.(전북의 左翼勢力이 分裂되어 葛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全州에서 神經過敏的인 警察의 發砲 [30] 를 끝으로 大邱 10.1 事件은 終末을 告했다.

被害 [ 編輯 ]

10月 事件은 全國的인 規模의 示威로 擴張되면서 警察力만으로는 鎭壓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各 地域에서 美軍과 南朝鮮國防警備隊 를 비롯하여 한민당 勢力, 民族靑年團 , 西北靑年會 , 百意思 等 反共主義 右派 人士들의 도움이 必要했다. 이로 因해 族靑 , 百意思 , 西北靑年會 等 各種 反共主義 右派團體 關聯者들이 示威에 加擔한 左派 를 逮捕한다는 名分으로 테러 또는 財産 被害를 입히는 境遇가 續出했다. (이를 避하기 위해 一部 左翼勢力과 民間人들은 山으로 避身하기까지 하였다. [31] )

이 事件의 正確한 規模는 記錄 未備로 알려지지 못하였고, 2次 被害를 憂慮한 參加者들의 申告도 적어 被害 狀況은 明確히 推算할 수 없다. 大邱를 包含한 慶尙北道 地域에서만 死亡者가 公務員 63名, 一般人 73名으로 總 136名인 것으로 發表되었다. 亦是 慶北 地域에서만 官廳 建物 4洞과 一般 建物 6棟이 불에 타 全燒되기도 했다. 이 事件으로 인해 逮捕된 사람은 數千 名에 이르렀다.

當代의 이모저모 [ 編輯 ]

박헌영 은 이 事件을 "'10月 人民抗爭'으로 부르며, ' 東學農民運動 , 3.1 運動 과 함께 朝鮮의 3代 偉大한 人民抗爭'이라 評價했다. 實際로 朝鮮共産黨 은 公式的으로 示威를 煽動한 적이 없다고 主張하지만, 地域의 共産黨員들은 邑面마다 터진 示威隊의 맨 先頭에 서서 싸우다가 죽거나 監獄으로 끌려갔다. [32]

한便, 右翼勢力들은 一齊히 이 事件을 激烈히 批判했는데, 特히 한국민주당 勢力에서는 '이番 罷業鬪爭은 박헌영 一派의 謀略 煽動에 起因한 것'이라며 一齊히 猛非難했다.

左翼 內部에서도 이 事件에 對한 批判이 쏟아졌다. 朝鮮共産黨 을 除外한 左翼系列 9個 政黨 代表들( 정백 이영 )은 緊急 會同을 갖고 이番 싸움이 ' 박헌영 의 共産黨이 벌인 冒險主義'라며 激烈히 非難했다. [32]

左右合作 勢力에서는 兩非論을 내세웠는데, 여운형 김규식 은 10月末 美軍政廳 브라운 所長과의 會談에서 "‘10·1 暴動’이 警察에 對한 反感, 軍政 내 親日派의 存在, 一部 韓國人 管理의 腐敗, 破壞分子들의 煽動 탓에 일어났다."고 軍政廳에 非難을 했다. 이어서 自稱 '大邱暴動'李 美軍政의 政策破綻에 따른 韓國 民間人의 不滿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事態를 殺戮과 破壞로 몰고 간 責任은 ‘神殿술’로 過激한 鬪爭 路線으로 기울어 잘못된 政策을 採擇한 朝鮮共産黨 에 있다."고 主張했다. [33] 김규식 은 '이러한 行動들은 國際的으로 朝鮮 民族의 威信을 떨어뜨려 獨立을 妨害하는 結果를 가져올 뿐'이라며 自制를 促求했다. [34]

1946年 10月 24日 德壽宮 韓美共同會談에 參席한 首都警察廳 首都國葬 최능진 은 "大邱暴動은 共産主義者들의 策動에 依한 不幸한 事件이다. 그러나 그 原因은 우리 警察 內部에도 있다. 國立警察은 親日警察과 腐敗 警察官들의 避難處가 되었다고 말했다." 當時 10月 事件의 理由 中에 하나였던 親日警察의 實態를 自身들의 입으로 證據한 것이었다. [4]

意義 및 影響 [ 編輯 ]

10月 事件은 大邱慶北을 中心으로 周邊 慶尙南道까지 번진 大規模로 200萬 名이 넘는 사람들이 參加한 大規模 示威이고, 參加者의 視角에서 두가지 見解로 갈라진다.

2007~2010年 '眞實和解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大邱 10月事件’을 調査했던 김상숙은 虐殺의 現場을 目擊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묶으며 이 事件을 ‘抗爭’으로 명명하고 1946年 3~4月 絶頂에 達했던 食糧危機가 大邱 事件의 中心이었다 主張한다. 以後 永川, 先山을 비롯해 12月 中旬까지 南韓 全域 73個 市郡에 農村 抗爭이 일어났는데 學界에서는 이 抗爭들을 大邱 抗爭과 無關하게 ‘秋收 蜂起’(브루스 커밍스), ‘田民 抗爭’(정해구) 次元에서 硏究했다. [35]

1945年産 秋穀 蒐集에서 狼狽를 본 美軍政은 1946年産 河谷 蒐集부터는 地方行政機關뿐만 아니라 警察, 右翼團體, 때로는 武裝한 美軍 兵士들까지 動員하여 家宅搜索과 檢問, 檢索과 處罰 等의 强壓的 方法을 使用하여 穀物을 供出했다. 夏穀은 日帝도 供出을 삼갔던 만큼 河谷 蒐集과 供出에 動員된 强壓的 方法은 占領軍과 農民 사이에 緊張感만 높여갔고, 農民들은 10月抗爭으로 自身의 不滿을 表出했다. 美軍은 10月抗爭의 原因을 調査하기 위해서 死後에 大邱地域 著名人士 19名을 個別的으로 인터뷰했는데, 그들은 軍政의 糧穀蒐集政策, 非效率的인 쌀 配給, 供出 過程에서 警察이 보여준 任意的이고 殘忍한 手法, 配給 過程에서 警察과 管理의 不正과 腐敗 等 美軍政 食糧政策의 失敗를 優先的으로 指摘했다. [36]

이 事件의 根本原因은 蘇聯軍政 의 스티코프의 命令과 資金 이 介入되었으며, 指示를 받은 朝鮮共産黨 , 日帝 强占期 의 그대로 남은 一部 制度, 美軍政과 軍政廳의 食糧政策 失敗, 苛酷한 收買, 美軍政 警察 및 西北靑年團, 反共靑年團의 一般人 사냥 等으로 民心이 洶洶하게 된 憤怒에 있었다. [37] 이런 狀況에서 10月 事件을 主導한 朝鮮共産黨과 박헌영 系列이 示威隊를 煽動하여 美軍政 의 經濟 政策에 對한 反撥과 警察과 같은 核心 行政機構에 親日派 를 그대로 登用한 過去事 未淸算에 對한 反對, 行政과 治安에 人民이 參與하는 人民委員會 設置 要求 等의 主張을 내걸어 民間人의 參與를 誘導했다.

金日成 의 1953年 남로당 肅淸을 살아남았던 박갑동 은 9月 總罷業 示威가 激化되는 中에 朝鮮共産黨 全國農民會總聯盟 , 전평의 組織이 介入되었으나, 當時 共産黨 古參 幹部들은 事態를 어떻게 收拾을 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었다고 主張한다. [13] [38]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박인경 (2006年 10月 4日). “10月, 歷史 뒤의 숨은 眞實을 再照明하다” . 경북대新聞 . 2008年 6月 22日에 確認함 .  
  2. 民主중보 1946年 10月 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民主중보 1946年 11月 15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 軍政期 時節 警察은 '國立警察'이라고 불리었다.
  4. KBS 다큐멘터리 《人物現代史》 20篇, -民族이 最善이다.- 최능진 便.
  5.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 이지영 (2011年 6月 2日). “모두 蘇聯指示-蘇聯資金이었다, 總罷業-大邱暴動眞實” . 뉴데일리.  
  7. 當時 박헌영은 美軍政의 逮捕令을 被害 祕密裏에 越北, 海州에 있다가 蘇聯을 訪問하였다.
  8. 박헌영 評傳, 안재성 지음. p379
  9. 蔚山저널 - 이관술을 사슬에 채운 때 벌어진 9月 總罷業과 박헌영 越北
  10. 김용한 (2006年 10月 2日). “[大邱] 10月 事件 거리巡禮 및 追慕祭 開催 - 잰걸음 내딛는 大邱의 10月 事件” . 오마이뉴스 . 2008年 6月 22日에 確認함 .  
  11. 박헌영 評傳, 안재성 지음. p380
  12. 오마이뉴스 - 손가락 까딱하면 "妥當"... 朴正熙 大統領 兄마저도
  13. 《박헌영 評傳》, 안재성 저. 실천문학사. p380
  14. <獨立新譜>, 1946年 11月 1日子
  15.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CIC report", 358p
  16. <10月 人民抗爭 硏究>, 정해구
  17. 平和뉴스 - 獨立運動家 '박상희' 先生 再照明을 期待한다
  18. 每日勞動뉴스 - 獨立運動家 列傳 <삶과 넋> 62 朴正熙 셋째 兄, 慶北 社會主義 獨立運動家 박상희
  19. <G-2 Periodic Report>, USAFIK
  20. <G-2 Weekly Summary No.57>, USAFIK
  21. 정영진 《暴風의 10月》 한길사, 1990年, 391~395쪽.
  22. 박헌영, '10月 人民抗爭', <박헌영路線 批判>(서울:世界,1986)
  23. 정해구, <10月 人民抗爭 硏究>, P169~172
  24. <朝鮮日報>, 1946年 10月 22日 <서울新聞>, 1946年 10月 23日
  25. <G-2 Weekly Summary No.59>, USAFIK
  26. <G-2 Weekly Summary, No.59>, USAFIK
  27. <G-2 Weekly Summary, No.61>, USAFIK
  28. <서울新聞>, <영남일보>, 1946年 11月 5日
  29. <G-2 Periodic Report, No.381>, USAFIK
  30. 左翼靑年團體가 合法的으로 集會를 열었으나 集會時間을 조금 넘긴 것을 理由로 警察이 群衆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發布해 6名이 죽었다
  31. <世代>,大邱 10.1 暴動 事件,p231,이목우
  32. 박헌영 評傳, 안재성 지음. p382
  33. “<新東亞> 2006年 3月號. -左右翼 對決에서 親日警察 抗爭으로 이어진 大邱 10·1暴動-” . 2012年 12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9月 14日에 確認함 .  
  34. 《박헌영 評傳》, 안재성 저. p382
  35. 韓國日報 - 暴動 아닌 抗爭이 있었다, 70年前 大邱의 오늘
  36. 한겨레 - 美軍政은 왜 日帝도 안 했던 河谷 供出을 强行했나
  37. 《박헌영 評傳》, 안재성 저. 실천문학사. p383
  38. 2010年 6月, 前 남로당 出身이자 박헌영 이 祕書였던 박갑동 의 口述 證言.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