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護憲 措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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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護憲 措置 (4·13 護憲 措置)는 1987年 4月 13日 , 全斗煥 大統領이 取한 措置이다. 一種의 特別 宣言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現行 憲法을 維持한다"(보호한다, 守護한다, 지키겠다)는 意味를 담고 있다

背景 [ 編輯 ]

1980年 武力으로 政權을 掌握한 전두환 大統領은 第5共和國 憲法을 制定한 뒤 大統領에 就任했다. 以後 大統領의 任期 制限과 立法府의 權力 强化, 通禁 解除 및 校服 自律化 等의 宥和 措置를 取한다. 그리고 1986年 아시안 게임 1988年 올림픽 을 誘致하며 支持 基盤을 鞏固히 닦았다. 그러나 正反對로 在野 人士들에 對한 强勁 措置와 示威 彈壓은 더해갔다.

1985年 2·12 總選 以後 野黨과 在野勢力은 間選制로 選出된 第5共和國 전두환 大統領의 道德性과 正統性 缺如, 非民主性을 批判하면서 直選制 改憲을 主張하였다. 1986年 2月 各界 各層에서 大統領 直選制를 重點으로 하는 民主憲法爭取鬪爭이 擴散되고, 宸翰민주당 이 1000萬 改憲 署名運動에 突入하면서 改憲 論議는 더욱 擴散되었다.

이어 같은 해 7月 30日에는 與野 滿場一致로 憲法改正特別委員會가 發足하였다. 그러나 執權 與黨인 民主正義黨 殷 議員內閣制를, 野黨은 大統領 直選制를 主張함에 따라 改憲 論議는 처음부터 難關에 부딪혔다. 그後 1987年 1月 14日 서울大學校 在學生이던 朴鍾哲 이 治安本部 南營洞 對共分室 에서 調査를 받다 拷問과 暴行으로 死亡한 事件 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國民들의 民主化 要求는 거세지고, 大統領 直選制 改憲 論議가 活潑하게 이루어지자 政權 維持에 不安을 느낀 전두환은 그해 4月 13日 모든 改憲 論議를 禁止하는 措置를 斷行하였다. 이 措置가 4·13 護憲 措置이다. 與野가 憲法案에 合意하면 改憲할 用意가 있지만, 野黨의 억지로 合意가 不可能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間選制人 現行 憲法을 固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主要 內容이다. 一切의 改憲 論議를 中斷시키고, 1988年 2月 政府를 移讓하겠다는 것이 4·13 護憲 措置의 要地이다.

特別 宣言 [ 編輯 ]

1987年 4月 13日, 전두환은 ‘大統領 特別談話’를 發表했다. [1] 그는 特別談話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本人은 얼마 남지 않은 促迫한 任期와 現在의 國家的 狀況을 綜合的으로 判斷하여 重大한 決斷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本人은 任期 中 改憲이 不可能하다고 判斷하고 現行 憲法에 따라 來年 2月 25日 本人의 任期 滿了와 더불어 後任者에게 政府를 移讓할 것을 闡明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本人은 平和的인 政府 移讓과 서울올림픽이라는 兩大 國家 大使를 成功的으로 치르기 위해서 國論을 분열시키고 國力을 浪費하는 消耗的인 改憲 論議를 止揚할 것을 宣言합니다. 本人의 이 決斷은 오늘의 亡國을 他界하고 國家 目標를 遂行하는 데 現實的으로 最善의 길이라는 判斷에 따른 것으로서 國民 여러분께서 全幅的인 도움과 信賴를 보내주실 것을 懇曲히 當付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國家 大使를 完成한 後에 充分한 時間을 두고 改憲 問題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百年大計를 위한 좋은 方案이 發見될 수 있을 것으로 本人은 確信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政治도 나라와 社會 成長發展에 副應하는 先進 政治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信念에서 本人은 남은 期間 동안 民主發展의 基盤을 더욱 넓히고 社會 安定과 國民 和合을 다지기 위한 措置들을 더욱 果敢하게 推進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努力의 하나로 本人은 國民의 政治 參與를 擴大하기 위한 地方自治制를 强制的으로 實施해 나갈 計劃입니다. 이 問題가 早速히 매듭지어져서 本人의 任期 內에 地方 自治가 始作된다면 民主 發展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土臺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本人이 强調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政治도 時代의 變遷과 社會의 發展에 따라 꾸준한 新陳代謝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事實입니다. 낡은 時代의 낡은 思考方式에 젖어 있는 人物에게 發展하는 나라의 將來를 依託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點에서 轉換期의 政治를 이끌어나갈 斬新하고 有能한 政治 新進들을 廣範圍하게 包容하고 育成하는 政黨의 努力은 매우 必要하다고 하겠습니다.

? 1987年 4月 13日
大統領 전두환 [2]

以後 전두환은 大統領 選擧人團 選擧와 大統領 選擧는 1987年 內에 공정한 選擧管理를 통해 自由 競選의 雰圍氣가 保障되는 가운데 蹉跌없이 實施할 수 있게 모든 努力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後任 大統領 候補는 早速한 時日 안에 國民의 支持를 받을 수 있는 人物 가운데서 黨憲 節次와 민주 方式에 따라 全黨大會에서 選出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3]

餘波 [ 編輯 ]

政府 側은 談話 發表가 國民들의 큰 期待를 얻을 것이라 믿었다. [4] 그러나 이는 '護憲 措置'라는 그 이름대로 現行 憲法에 따라 權力을 移讓한다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國民들의 民主化 要求에 불을 댕기는 逆效果를 낳았다. 措置가 發表되면서 全國 各地에서 長期執權의 陰謀를 非難하고, 改憲을 要求하는 示威가 잇따랐다. 이 渦中에 박종철 事件이 애初에 當局이 發表한 內容과는 달리 拷問致死로 인해 死亡한 事實이 밝혀졌다. 以後 國民들의 示威는 더욱 激烈해져 1987年 6月 10日에는 全國 18個 都市에서 民主憲法爭取國民運動本部 가 主催하는 大規模 街頭集會가 열렸다.

마침내 전두환은 “더以上 이럴 순 없다”는 決斷을 내린 뒤, 與黨 總裁 盧泰愚 를 통해 時局收拾方案 을 發表하게 한다. [5] 이를 通해 '5年 單任의 大統領을 直接 選擧로 뽑는다'는 憲法이 定해졌으며, 이에 따라 치러진 選擧에서 與黨의 노태우 候補가 當選됨에 따라 第5共和國은 終末을 告하게 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MBC뉴스데스크 (1987年 4月 13日). “[전두환大統領 特別談話]任期 滿了 後 後任者에게 政府 移讓” . 2015年 4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4日에 確認함 .  
  2. MBC뉴스데스크 (1987年 4月 13日). “[전두환大統領 特別談話]任期 滿了 後 後任者에게 政府 移讓” . 2015年 4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4日에 確認함 .  
  3. MBC뉴스데스크 (1987年 4月 13日). “[전두환大統領 特別談話]大統領 選擧人團, 選擧 年內 實施 [윤종부]” . 2016年 6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4日에 確認함 .  
  4. MBC뉴스데스크 (1987年 4月 13日). “[전두환大統領 特別談話]談話 發表에 國民들 期待 가져[안재기]” . 2014年 12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4日에 確認함 .  
  5.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29日). “[6.29宣言]直選制 介淨關聯 特別宣言發表[강성구]” . 2014年 12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4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