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月 民主 抗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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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民主 抗爭
(6月 民主 抗爭)
1987年 7月 9日 낮 故 이한열 君의 運柩行令을 따라 서울市廳앞까지 追慕行進을 벌인 數十萬名의 學生 市民들이 낮 1時頃부터 市廳앞 廣場에서 大衆 集會를 가졌다.
날짜 1987年 6月 10日 ~ 6月 29日
地域 대한민국 大韓民國 轉役
原因
目的 護憲 措置 撤廢 및 大統領 直選制 改憲 要求
種類 抗議 , 示威 , 籠城 , 集會
狀態 終了
示威 當事者
主要 人物
參與 人員
400萬~500萬 餘 名 [1]
警察 8萬 2千名 以上

6·10 民主 抗爭 , 6月 民主 抗爭 ( 韓國 漢字 : 六月民主抗爭, 文化語 : 6月人民抗爭 [2] ), 簡單히 6月 抗爭 ( 韓國 漢字 : 六月抗爭)은 1987年 6月 10日 부터 6月 29日 까지 大韓民國 에서 全國的으로 벌어진 反政府 示威 이다.

4·13 護憲 措置 [3] 富川警察署 性拷問 事件 ,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그리고 李韓烈 催淚彈 被擊 事件 等이 導火線이 되어 6月 10日 以後 全國的인 示威가 發生하였고, 이에 6月 29日 盧泰愚 收拾案 發表로 大統領 直選制 로의 改憲이 이루어졌다. 以後 1987年 12月 16日 새 憲法에 따른 大統領 選擧 가 치러졌다.

6月 抗爭은 大韓民國의 民主化에 큰 影響을 주었으며, 社會 運動이 飛躍的으로 上昇하는 效果를 가져왔다.

이 抗爭은 韓國 都心의 中心 景福宮 을 中心으로 東西南北으로 催淚彈이 터지며 始作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李韓烈 을 비롯한 學生들이 催淚彈을 맞거나 朴鍾哲 烈士와 같게 拷問으로 죽게 되는 學生들도 몇 있었다.

抗爭 以前 [ 編輯 ]

新軍部 쿠데타 前後 [ 編輯 ]

1979年 10·26 事件으로 第4共和國 의 大統領 朴正熙가 죽고, 새로 就任한 大統領 최규하는 國民들의 民主化 要求를 臨하겠다고 밝힌다.( 서울의 봄 ) 하지만 이 기쁨도 暫時, 1979年 12月12日 전두환 等을 비롯한 新軍部( 하나회 )가 軍事叛亂을 일으켜 軍部 內 實權을 掌握했다. 以後 전두환은 최규하를 꼭두각시처럼 操縱했고, 執權 시나리오에 따라 執權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光州 市民들이 民主化 運動 을 벌이기 始作했다. 곧바로 示威 規模는 커졌고, 示威 參加者들도 急激하게 늘어나기 始作했다. 하지만 新軍部는 이를 武力으로 流血 鎭壓하였다. 以後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依해 장충체육관에서 大統領으로 推戴되어, 새 大統領으로 就任하게 된다.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 [ 編輯 ]

서울대학교 言語學科 3學年에 在學 中이던 朴鍾哲은 1987年 1月 13日 子正 警 下宿집에서 治安本部 (現 警察廳) 對共分室 搜査官 6名에게 連行되었다.

‘大學文化硏究會’ 先輩이자 ‘民主化推進委員會’ 指導委員으로 手配 받고 있었던 박종운 을 잡기위해 連行한 것이였다. 取調室에 連行해간 公安 當局은 朴鍾哲에게 박종운 의 所在를 물었으나, 朴鍾哲은 順順히 對答하지 않았다. 이에 警察은 殘酷한 暴行과 電氣拷問, 물拷問 等을 加하였고, 朴鍾哲은 끝내 1987年 1月 14日 治安本部 對共搜査團 남영동 分室 509號 調査室에서 死亡했다. 11時 45分 警 중앙대 용산病院으로 옮겨졌는데 醫師가 檢診했을 當時 이미 숨져 있었다.

그러나 當時 政府는 拷問으로 死亡했다는 事實을 隱蔽하기 위해 '冊床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라고 死亡原因을 發表하였다.

2月 7日 全國 主要 都市에서 "박종철君 汎國民追悼式" 및 都心 示威가 열렸고, 이어 3月 3日 에는 " 박종철君 49재와 拷問追放 國民大行進 "과 함께 또 다른 示威가 열렸다. 以後 4月 2日 서울大學校 學生들의 學父母 130餘 名이 建國大學校 事態 等 時局關聯 拘束學生의 懲戒撤回를 要求하며 徹夜 籠城을 벌였다.

政府의 改憲論議 留保 [ 編輯 ]

하지만, 전두환은 그들의 要求를 들어주지 않았다. 1987年 4月 13日, 그는 '大統領 特別談話'를 發表, [4] 改憲(改憲) 論議를 留保하겠다고 밝혔다.

本人은 얼마 남지 않은 促迫한 任期와 現在의 國家的 狀況을 綜合的으로 判斷하여 重大한 決斷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本人은 任期 中 改憲이 不可能하다고 判斷하고 現行 憲法에 따라 來年 2月 25日 本人의 任期 滿了와 더불어 後任者에게 政府를 移讓할 것을 闡明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本人은 平和的인 政府 移讓과 서울올림픽이라는 兩大 國家 大使를 成功的으로 치르기 위해서 國論을 분열시키고 國力을 浪費하는 消耗的인 改憲 論議를 止揚할 것을 宣言합니다. 本人의 이 決斷은 오늘의 亡國을 打開하고 國家 目標를 遂行하는 데 現實的으로 最善의 길이라는 判斷에 따른 것으로서 國民 여러분께서 全幅的인 도움과 信賴를 보내주실 것을 懇曲히 當付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國家 大使를 完成한 後에 充分한 時間을 두고 改憲 問題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百年大計를 위한 좋은 方案이 發見될 수 있을 것으로 本人은 確信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政治도 나라와 社會 成長發展에 副應하는 先進 政治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信念에서 本人은 남은 期間 동안 民主發展의 基盤을 더욱 넓히고 社會 安定과 國民 和合을 다지기 위한 措置들을 더욱 果敢하게 推進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努力의 하나로 本人은 國民의 政治 參與를 擴大하기 위한 地方自治制를 强制的으로 實施해 나갈 計劃입니다. 이 問題가 早速히 매듭지어져서 本人의 任期 內에 地方 自治가 始作된다면 民主 發展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土臺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本人이 强調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政治도 時代의 變遷과 社會의 發展에 따라 꾸준한 新陳代謝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事實입니다. 낡은 時代의 낡은 思考方式에 젖어 있는 人物에게 發展하는 나라의 將來를 依託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點에서 轉換期의 政治를 이끌어나갈 斬新하고 有能한 政治 新進들을 廣範圍하게 包容하고 育成하는 政黨의 努力은 매우 必要하다고 하겠습니다.

? 1987年 4月 13日 大統領 전두환 [4]

以後 전두환은 大統領 選擧人團 選擧와 大統領 選擧는 1987年 內에 공정한 選擧管理를 통해 自由 競選의 雰圍氣가 保障되는 가운데 蹉跌없이 實施할 수 있게 모든 努力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民政黨 의 後任 大統領 候補는 早速한 時日 안에 國民의 支持를 받을 수 있는 人物 가운데 서 黨憲 節次와 민주 方式에 따라 全黨大會에서 選出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5]

하지만, 이는 '護憲 措置'라는 그 이름대로 現行 憲法에 따라 權力을 移讓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國民들의 큰 期待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6] 期待는커녕 오히려 反撥을 가져오는 要因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月 14日 天主敎 金壽煥 樞機卿 等 各界 人士들이, 護憲 措置를 批判하는 時局 聲明을 發表하기에 이른다.

統一민주당 創黨 妨害 事件 [ 編輯 ]

軍事政權의 抑壓속에 大統領 直選制 改憲을 主張하는 雰圍氣가 높아졌지만, 宸翰민주당 李珉雨 總裁, 이철승 等은 當時 政府의 內閣制 改憲에 對해 支持意思를 밝혔다. 이에 反撥한 金永三 , 金大中 等은 70餘名의 議員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脫黨하여 統一民主黨 創黨을 推進하였다.

이에 전두환이 그냥 넘어갈 理가 없었다. 1987年 4月 20日 부터 4月 24日 까지, 統一민주당의 20餘個 地區黨에 暴力輩들이 亂入하여 器物을 부수고 黨員들을 暴行하는등 亂動을 부렸으며, 이로 因해서 創黨大會는 隣近 食堂이나 길거리에서 略式으로 치러졌다. 統一民主黨 側은 처음 이 일은 政府가 介入한 卑劣한 政治工作이라 糾彈하고 嚴正한 搜査를 促求하였으나, 搜査는 제대로 進行되지 않았다.

李韓烈 催淚彈 被擊 事件 [ 編輯 ]

1987年 5月 17日 , 勞動者였던 황보英國은 부산상고(現 開城高) 앞에서 '獨裁打倒' 等을 외치며 焚身했으며, 一週日 뒤 死亡하였다. [7] 이튿날인 5月 18日 鳴動聖堂에서 光州抗爭 7周年 미사에 正義具現司祭團 김승훈 神父가 박종철 顧問 致死 事件이 警察에 依해 縮小·隱蔽되었음을 暴露하였다. [8] [9] 이에 第5共和國 政權을 批判하던 國民들은 전두환 軍事獨裁政權의 옳지 못함에 크게 憤怒하였고, 以後 民主化를 要求하는 示威가 全國에서 자주 일어났다. 以後 5月 23日 " 박종철 拷問殺人隱蔽造作糾彈 汎國民大會 準備委員會 "가 結成되었고, 이들은 6月 10日 에 糾彈大會를 갖기로 決定하였다(그날은 노태우가 民政黨 大選 候補로 選出된 날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後繼者로 國務總理 盧信永을 指名했으나, 5月 26日 拷問致死事件에 對한 責任을 물어 盧信永 國務總理를 更迭하였다. 以後 이한기 를 新任 總理로 交替하였다. 이튿날 全國의 在野指導者 2200餘 名이 함께 " 民主憲法爭取國民運動本部 "를 結成하였고, 韓國 基督敎 長老會 향린敎會 에서 發起人 大會 [10] 를 열었고, "護憲 措置 撤回 및 直選制改憲 共同爭取 宣言"을 發表하였다. 이를 향린敎會에서는 敎會門에 記念牌를 만들어 記憶하고 있다.

6月 9日 延世大學校 에서 6.10 大會 出廷을 爲한 年歲인 決意大會를 마친 學生들이 示威를 하며 校門으로 나오는 學生들을 警察이 催淚彈을 쏴대며 示威를 하는 學生들을 鎭壓했다. 이過程에서 示威에 參與한 延世大學校 學生인 李韓烈 이 警察이 쏜 催淚彈 에 뒷머리를 맞고 浮上( 7月 5日 死亡)을 입었다. 이 事件은 當時 한 美國人 記者에 依해 捕捉되어 新聞에 올라가면서 全 世界的으로 耳目을 끌게 되고, 이 事件은 示威의 規模를 더욱 커지게 만드는 事件이 된다. 李韓烈은 몸살로 元來 參加하면 안되는 狀態였으나 約束을 지켜야 한다는 한 마음으로 結局 示威에 뛰어 들었다. 4時 45分 頃 이한열이 마지막으로 뛰어들어가는 瞬間 한 戰警이 이한열의 머리를 照準해 깡筒彈이라는 催淚彈이 李韓烈을 被擊 한 것이였다. 李韓烈은 1달後 死亡했다. 이한열 烈士의 葬禮行列은 延世大 學校, 景福宮, 望月 墓地를 巡으로 進行되었다. 그는 忙月墓地公園 에 安葬 되었다.

6月 民主 抗爭 示威의 進行 [ 編輯 ]

6月 10日 [ 編輯 ]

1987年 6月 10日 蠶室體育館에서 民主正義黨 第4次 全黨大會 및 大統領 候補 指名大會 開會가 열렸고, 노태우는 이 大會에서 민정당의 第13代 大統領 候補로 選出되었다. [11]

그러나 같은 날 全國에서 反政府 民主化 示威가 일어났다. "民主憲法爭取國民運動本部"의 主催로 大韓聖公會 서울敎區 서울주교좌大聖堂 에서 " 박종철君 拷問致死 造作, 隱蔽 糾彈 및 護憲撤廢 國民大會 "를 開催하였다. [12] 이를 大韓聖公會 서울敎區 서울主敎座大聖堂에서는 '6月 民主抗爭 發生地'記念碑를 만들어 記憶하고 있다. 民主憲法爭取國民運動本部는 午後 6時를 期해 전두환 獨裁政權에 對한 民衆抗爭의 뜻으로 車를 세워서 警笛을 울려줄 것 또는 흰 손手巾을 흔들어 달라고 指針을 내리어 택시 運轉勞動者들의 警笛소리와 市內버스 에서 흰 손手巾을 흔드는 市民들이 줄을 이었다.

女高生들은 民衆抗爭 參與者에게 마실 도시락 을 가져다 주는 等의 積極的인 參與와 支援을 하여 서울都心에서 民衆抗爭이 進行될 수 있었고, 特히 明洞聖堂 籠城 當時 聖堂 옆 계성여고 等에서 도시락과 물 等의 積極的인 支援으로 籠城이 進行될 수 있었다. 當時 聖公會 서울주교좌大聖堂 에서는 感謝聖餐禮 (聖公會 미사)때 피아노 를 연주할 前例 奉仕者가 必要하다는 名分으로 民主憲法爭取國民運動本部 關係者가 警察 의 監視를 避해 聖公會 大聖堂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6月 11日 [ 編輯 ]

在野와 市民團體의 示威가 터지자, 治安當局은 前날 있었던 野圈의 集會는 '暴力性을 드러낸 法秩序 蹂躪行爲'였다고 指摘하였고, '앞으로도 法秩序 破壞 行爲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斷乎하게 對處하겠다'고 밝혔다. [13] 當時 治安本部長이었던 권복경 은 野圈의 集會와 關聯한 發表를 통해서 主催 側이 非暴力集會를 열겠다고 公言하고도 全國에 걸쳐 暴力的 亂動事態를 誘發한 것은 法秩序 蹂躪行爲였다고 指摘했다. [13]

이 날 서울 明洞聖堂에서는 大學生 等 600餘 名이 警察과 對峙하며 1週日 째 示威를 繼續했고, 南大門市場 等 鳴動 外郭 地帶에서조차 散發的인 示威가 벌어졌다. [14]

6月 12日 [ 編輯 ]

6月 10日 大會 끝에 明洞聖堂에 들어간 示威籠城者들은 사흘 째 示威籠城을 벌였고, 서울 都心에서도 散發的인 示威가 터졌다. [15] 그러자 當局은 明洞聖堂 示威 事件에 斷乎하게 對處한다는 方針을 세우는 한便 事態 解決을 위해서 積極的인 움직임을 보였다. [15]

明洞聖堂을 占據한 뒤 示威를 벌여온 籠城者들은 當初 600餘 名에서 350餘 名으로 數字가 줄어들었으나, 警察의 解散 慫慂에도 不拘하고 繼續 籠城을 벌였다. [15] 示威 籠城者들은 11日과는 달리 바리케이트를 撤去하고 極烈한 行動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聖堂을 占據한 채 籠城을 풀지 않고 繼續 警察과 對峙하였다. [15]

하지만 午後가 되자 示威의 規模는 커졌다. 午後 1時 쯤에는 코스모스 百貨店 앞에서, 午後 5時 무렵부터는 各 大學에서 市內로 나간 學生들이 鳴動을 中心으로 롯데 쇼핑 앞과 中央劇場 앞, 삼일 高架道路, 乙支路, 光敎 射距離, 市廳 周邊 等에서 奇襲 示威와 解散을 거듭했다. [15]

6月 13日 [ 編輯 ]

示威가 繼續되는 가운데, 政府와 與黨 은 黨政會議를 잇달아 열어서 6.10 大會 以後에 繼續되고 있는 示威 事態에 對處 方案을 論議하였으며, 社會混亂 行爲에 對해서는 强力히 對應하기로 決定했다. [16]

한便 明洞聖堂 은 별다른 衝突 없이 婚配聖事 미사 가 豫定대로 열리는 等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팽팽한 緊張은 繼續되었다. [17] 聖堂을 占據하고 있는 350餘 名의 示威 籠城者들은 午前 9時와 11時 50分 두 次例에 걸쳐 警察沮止線 50m앞까지 進出해 反政府 口號를 외치며 示威를 벌였다. [17] 하지만 籠城者들이 돌이나 火焰甁을 던지지 않았고, 警察도 催淚彈을 쏘지 않아 서로가 自制하는 모습이 歷歷했다. [17] 平和的인 모습이 繼續되었으나 占據學生들은 이番 事件과 關聯해 連行, 拘束된 사람들이 全員 釋放될 때까지 籠城을 繼續하겠다고 밝혔고, 午後 2時부터는 서울地域 200餘 名의 天主敎 司祭들이 이番 事態와 關聯해 對策會議를 열고 學生들을 支持하고 保護하겠다는 前날의 聲明을 再確認했다. [17]

6月 14日 [ 編輯 ]

明洞聖堂에서 籠城을 벌이고 있는 學生들은 午前 한때 聖堂 入口 밖으로 나와서 口號를 외치며 示威를 벌였으나 10時 20分 以後부터는 文化館 大講堂에서 時局 討論會를 가졌으며 信徒들은 午前 7時 미사를 비롯해서 豫定된 休日 미사에 參加했다. [18] 午前, 午後 미사가 끝난 뒤에 聖堂 廣場에서 한때 連坐示威가 있었으나 衝突없이 곧 解散했다. [18]

그 날 午後 明洞聖堂 周邊에 모여든 서울市內 大學生 2000餘 名은 商業銀行 本店, 롯데쇼핑, 사보이 호텔, 中央劇場 그리고 퍼시픽 호텔 앞 等 鳴動 一帶에서 散發的인 示威를 벌였다. [18] 그러나 警察은 催淚彈 發射를 自制했으며, 示威隊 亦是 돌과 火焰甁을 던지지 않아 以前과 같은 激烈한 示威 樣相은 없었다. [18] 김병도 明洞聖堂 主任 神父는 聲明을 낸 뒤, '民主化를 위한 學生들의 努力에 聲援을 보내지만, 敎會가 使命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든 部分에서 學生들과 뜻을 같이할 수 없는 限界가 있기 때문에 職場과 學校 그리고 家庭으로 돌아가 달라'라고 勸告했다. [18]

6月 15日 [ 編輯 ]

明洞聖堂을 占據하고 있던 籠城者들은 司祭團의 뜻을 받아들여 解散했다. [19] 그들은 午後 1時 30分 籠城을 解散하겠다는 內容의 聲明을 發表하였고, 午後 2時 聖堂 入口에서 解散式을 가졌다. [19]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地域에서 散發的인 示威가 繼續되었고, 特히 서울의 境遇 鳴動을 비롯한 市內 一部 大學에서 明洞 事態를 支持하는 示威가 散發的으로 繼續됐고 釜山, 大田, 大邱 等 一部 地域에서도 學生들의 示威가 있었다. [19]

6月 16日 [ 編輯 ]

서울市廳 隣近 步行路에 새겨진 獨裁 糾彈 文句 (7月 9日)

明洞聖堂 占據 籠城에 이어 示威가 繼續되어 慶南 晉州에서는 派出所 4個에서 火災가 發生했다. [20] 治安 本部에 따르면 當日 全國 57個 大學에서 4萬餘 名이 校內 示威를 벌였는데 主로 釜山과 晉州, 大邱 地域에서 過激한 示威가 있었던 것으로 集計되었다. [20] 그리고 10日 當時 拘束되었던 사람들을 釋放하겠다고 밝혔다. [21]

그러나 示威가 繼續되자 서울교육대학교에 對해 無期限 休業令을 내렸다. [22]

6月 17日 [ 編輯 ]

前날에 이어 示威를 이어가던 晋州 경상대 學生들이 南海高速道路로 再次 進入, 道路를 占據하고 LP 運搬 車輛 2代를 奪取하여 爆破 脅迫을 하며 晉州市內 進入을 試圖해 情村派出所를 불태웠다. 이 初有의 事態에 治安當局도 驚愕하여 警察特攻隊까지 投入, 示威隊를 겨우 解散시키고 運搬 車輛을 再奪還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示威隊가 다시 뭉쳐 慶全線 鐵道를 占據하는 바람에 鐵道 運行이 一時 中斷되었다. 馬山에서 大規模 示威가 이어져 勞動部 馬山 事務所, 珊瑚 1 派出所가 全燒되고 防犯哨所가 全燒되었다.

6月 18日 [ 編輯 ]

釜山에서는 좌천동 高架道路에서 當時 27살이던 이태춘이 警察의 催淚彈을 直擊으로 맞고 다리아래로 떨어져 南區 대연동에 있는 病院으로 옮겨졌다가 病院의 施設未備로 인해 午前 12時 鳳笙病院으로 옮겨져 治療를 받던중 24日밤 숨을 거두었다.

派出所 29곳, 警察署 2곳, 민정黨舍 4곳이 불탔다. 民主憲法爭取 國民運動本部는 이날의 平和大行進에 6·10 大會 때의 3倍가 넘는 100萬 名이 參與했다고 推算했다. [23] 特히나 會社員들, 넥타이 部隊들의 示威 參與로 6月 抗爭은 學生 抗爭에서 市民 抗爭으로 變化했다는 評價를 받았다. 警察力은 明白히 限界를 드러냈고, 國民들의 行進을 막을 수 있는 物理力은 戒嚴軍밖에 없었다. 6月 抗爭은 孤立된 한 都市에서가 아니라, 全國 同時多發로 進行되었다. 一線을 비워둔 채 全君을 示威 鎭壓에 投入하지 않는 限 6月의 行進을 制壓할 方案은 없었다. [24]

6月 29日 [ 編輯 ]

7月 9日 이한열 追慕 行進의 群衆
이한열 追慕 行進의 前景

民政黨 大選 候補였던 노태우는 全斗煥 에게 直選制 改憲案을 受容할 것을 建議하여 승락을 받아냈다. 以後 노태우는 大統領 選擧 直選制 改憲, 金大中 赦免復權 및 拘束者 釋放, 赦免, 減刑 等을 비롯 野黨과 在野 勢力이 主張해온 憲法 改憲 等의 韓國의 民主化를 위한 要求를 大幅 受容하고 直選制 形態의 大統領 選擧를 骨子로 하는 內容의 8個項의 時局收拾方案( 6·29 宣言 )을 發表한다. [25] 이것으로 第5共和國의 停職先制 改憲을 하고 새 憲法에 依한 大統領 選擧를 통해서 1988年 2月 平和的인 政府移讓을 實行하도록 한다.

  1. 直選制 改憲이라는 制度의 變更뿐만 아니라 이의 民主的 實踐을 위하여 自由로운 出馬와 公正한 競爭이 保障되어 國民의 올바른 審判을 받을 수 있는 內容으로 大統領 選擧法을 改正하여야 한다.
  2. 政治權은 勿論 모든 分野에 있어서의 反目과 對決이 果敢히 除去가 되어 國民的 和解와 大團結을 圖謀하여야 한다.
  3. 人間의 尊嚴性은 더욱 尊重되어야 하며, 國民 個個人의 基本的 人權은 最大限 伸張되어야 한다.
  4. 言論自由의 暢達을 위해서 關聯制度와 慣行을 劃期的으로 改善해야 한다.
  5. 社會 各 部分의 自治와 自律은 最大限 保障되어야 한다.
  6. 政黨의 健全한 活動이 保障되는 가운데 對話와 妥協의 政治風土가 早速히 마련되어야 한다.
  7. 밝고 맑은 社會建設을 위하여 果敢한 社會 淨化 措置를 講究해야 한다.

이어 " 民主憲法爭取國民運動本部 "와 在野 團體는 卽刻的인 改憲作業着手와 全員釋放 및 手配解除를 促求하는 聲明을 發表 했었다.

抗爭 以後 [ 編輯 ]

盧泰愚 民主正義黨 代表의 6·29 收拾 宣言 以後 直選制 改憲이 本格的으로 推進되었고, 第6共和國 새 憲法 改正을 위한 國民投票를 거쳐 1987年 10月 [26] , 大統領 直選制 改憲이 이루어졌다.

大統領 直選制 改憲으로 16年 만에 大統領選擧가 直接選擧로 치러졌지만, 正統 民主勢力이자 當時 野黨의 中心軸이었던 金大中 當時 統一民主黨 拷問과 金永三 當時 統一民主黨 總裁가 大統領候補 出馬를 놓고 公式 選擧戰을 앞둔 1987年 10月에 分裂을 일으키면서 讀者 出馬를 强行하게 되었다.

結局 6月 抗爭의 中心 役割을 했던 民主勢力의 統合이 不發되었고, 12月 16日 치러진 第13代 大統領 選擧 에서는 民主正義黨 盧泰愚 候補가 當選되었다.

抗爭의 意義 [ 編輯 ]

6月 抗爭은 軍事的 獨裁 政治가 終熄을 告하는 契機가 되었다. 形式的으로는 노태우 政權의 出帆으로 歸結돼 軍事主義가 完全히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政治·社會·文化的으로 民主主義 의 理念과 制度가 뿌리내리는 決定的 契機가 되었고, 各界各層의 民主的인 市民運動 이 飛躍的으로 發展하는 契機가 되었다. 6月 抗爭은 勞動者, 學生, 市民, 貧民, 農民 等이 社會 全般에 걸쳐 全 地域的으로 展開한 鬪爭이었고 抗爭의 全 過程은 바로 이렇게 參與한 모든 사람들이 覺醒하고 組織的 힘을 發하는 契機가 되었다. 特히, 勞組를 통해 組織化되어 나타난 7月과 8月, 9月의 勞動者 大鬪爭 은 向後 勞動者 의 社會的 位相을 急激하게 드높이는 結果를 가져왔고 社會的으로 注目할 만한 現象이 되었다. [27]

기타 [ 編輯 ]

  • 6月 抗爭이 일어난 6月 10日 日帝强占期 1926年 , 朝鮮 마지막 임금 純宗 (純宗)의 葬禮 때 獨立運動勢力과 學生들이 主軸이 되어 6.10 萬歲運動 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2007年 한국일보의 設問調査에 따르면 大學生 10名 中 6名은 6月 抗爭을 잘 모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28]
  • 6月 抗爭이 進行되던 6月 19日 午前 10時 30分 전두환은 軍 投入 準備 指示를 내렸다. 그러나 美國의 反對로 같은 날 午後 4時 30分 非常措置 計劃과 軍 出動 指示는 留保됐다. [29]
  • 전두환은 任期가 끝나자마자 輿論이 두려워 江原道 雪嶽山의 百潭寺 에 들어가 生活했다.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 編輯 ]

  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2.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194
  3. 後任 大統領 亦是 選擧人團에 依한 間接選擧를 骨子로 한 旣存의 憲法으로 選出하겠다는 것으로, 改憲 要求를 全面 否定한 特別宣言
  4. MBC뉴스데스크 (1987年 4月 13日). “[전두환大統領 特別談話]任期 滿了 後 後任者에게 政府 移讓” . 2015年 4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4日에 確認함 .  
  5. MBC뉴스데스크 (1987年 4月 13日). “[전두환大統領 特別談話]大統領 選擧人團, 選擧 年內 實施 [윤종부]” . 2016年 6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4日에 確認함 .  
  6. MBC뉴스데스크 (1987年 4月 13日). “[전두환大統領 特別談話]談話 發表에 國民들 期待 가져[안재기]” . 2014年 12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4日에 確認함 .  
  7. 李尙玟·박진국·전대식, 市民이쓰는 6月抗爭 - (6) 靑春 불사른 황보영國氏 Archived 2011年 11月 24日 - 웨이백 머신 , 釜山日報
  8. 詳細한 것은 朴鍾哲 參照.
  9. 박종철 拷問致死 事件이 警察에 依해 縮小·隱蔽된 事實은 박종철의 삶을 素材로 定하여 製作한 文化放送 드라마에서 告發된 적이 있다.
  10. 향린敎會에서는 이 事件을 記念牌로 만들어 記念하고 있다.
  11.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0日). “[6.10 民政黨全黨大會] 全黨大會 및 大統領候補 指名大會[강성구]” . 2013年 10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5月 3日에 確認함 .  
  12. 現在 大韓聖公會 서울주교좌大聖堂 은 이 事件을 6.10民主抗爭 發生地라고 새긴, 돌로 만든 造形物로 記念하고 있다.
  13.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1日). “治安本部, 野圈集會 不法으로 看做. 秩序 破壞 嚴斷[김진원]” . 2016年 5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14.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1日). “오늘 大學生 中心 鳴動一帶 散發的 示威[강성구]” . 2014年 1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15.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2日). “[明洞示威]明洞聖堂 示威 사흘째, 都心內 散發的 示威[정태성]”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16.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3日). “[明洞示威]高位時局對策會議, 示威 對策 論議[김석진]”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17.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3日). “[明洞示威]明洞聖堂 籠城 나흘째, 結婚式 및 미사 擧行[정태성]” . 2015年 5月 2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18. MBC뉴스 (1987年 6月 14日). “[明洞示威]明洞聖堂 占據籠城 5日째,明洞 一帶 山발示威[朴洸瑥]” . 2015年 12月 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19.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5日). “[明洞示威]明洞聖堂 籠城 6日만에 自進 解散[朴洸瑥]”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20.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6日). “脂肪 散發 示威, 57個 大學 4萬餘名[강성구]” . 2015年 5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21.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6日). “檢察과 警察, 6.10 拘束者 大幅 釋放[문철호]”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22.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16日). “서울교육대학 無期限 休業令[유기철]” . 2014年 1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7月 9日에 確認함 .  
  23. 길윤형, 김소희, “벅찬 勝利였고 시린 傷處였다” Archived 2016年 3月 11日 - 웨이백 머신 , 한겨레新聞
  24. 유시춘 等, (實錄 民主化運動)84. 6·18 催淚彈 追放大會와 6·26 平和大行進 , 京鄕新聞
  25. MBC뉴스데스크 (1987年 6月 29日). “[6.29宣言]直選制 介淨關聯 特別宣言發表[강성구]” . 2014年 12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4日에 確認함 .  
  26. 10月 27日에 國民 投票
  27. 조성오,《우리歷史 이야기3卷》돌베개,307쪽
  28. “大學生 10名 中 6名 "6·10抗爭 잘 모릅니다 " . 2007年 9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5月 27日에 確認함 .  
  29. 全斗煥 “軍 動員” 엄포에도 國本 “6·26 强行"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