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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에밀레鐘은 울고 있다’ 펴낸 김일윤 前 議員|新東亞

[인터뷰] ‘에밀레鐘은 울고 있다’ 펴낸 김일윤 前 議員

“千年古都 慶州는 우리의 자랑, 힘 모아 다시 살려야”

  • 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20-01-21 14: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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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帝强占期 태어나 現代史 貫通하며 살아온 韓國人의 自畫像

    • 中學校 進學도 苦悶할 만큼 가난하던 어린 時節

    • 4手 끝에 議會 進出, 國會議員 活動하며 겪은 榮辱

    • 京釜高速鐵道 慶州路線 誘致 앞장서며 ‘高速鐵 議員’ 別名 얻어

    • 地域社會 元老로 消滅 危機 慶州 求하는 데 앞장서겠다

    [김형우 기자]

    [김형우 記者]

    김일윤(81) 前 議員은 5線 政治人이다. 慶北 경주대, 徐羅伐臺, 新羅고 等 5個 學校를 設立한 敎育者이기도 하다. 그가 80年 人生을 整理하는 自敍傳을 펴냈다. 內容은 興味津津하다. 歷史冊에서나 볼 법한 現代史의 여러 瞬間이 具體的 모습으로 펼쳐져 讀者를 끌어당긴다. 

    日帝 徵用 餘波로 아버지를 잃은 少年의 通한, 가난 때문에 醫大에 合格하고도 進學할 수 없었던 靑年의 눈물에 共感하며 冊張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韓國 經濟의 級成長期와 마주하게 된다. 그 흐름을 타고 事業에 成功한 金 前 議員이 政治에 뛰어든 뒤에는 韓國 政治史의 主要 場面 뒷얘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박순천, 全斗煥, 김영삼, 김대중, 박태준, 김윤환 等 한 時代를 風靡한 政治人들이 實名으로 登場한다.

    千年古都 慶州

    500쪽 가까운 本文을 貫通하는 키워드는 ‘慶州’다. 金 前 議員이 태어나 幼年期를 보낸 곳, 政治人으로서 英(榮)과 辱(辱)을 두루 經驗한 故鄕에 對한 愛情이 冊 全體에 걸쳐 흘러넘친다. 金 前 議員은 慶州에 對한 世上 關心을 喚起하고자 이 冊을 쓴 듯 보였다. 

    “요즘 言論에 競走가 消滅危險 都市로 報道된다. 한때 30萬 名에 이르던 人口가 25萬 名臺로 줄기도 했다. 競走는 文化와 歷史 面에서 어디 내놓아도 遜色없는 우리나라의 자랑이다. 慶州와 함께 千年都市 班列에 올라 있는 이탈리아 로마, 터키 이스탄불, 中國 시안, 日本 교토는 하나같이 世界 觀光 名所이자 大都市다. 慶州를 이렇게 放置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다.” 

    金 前 議員이 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다 “只今도 이런 걱정에 잠을 못 이루는 걸 보면 내가 아직 철이 없나 보다”며 설핏 웃었다. 



    -自敍傳 出刊 所感은. 

    “기쁘다. 지난 1年餘間 일하는 틈틈이 冊을 썼다. 그러면서 自然스레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됐다. 逆境이 없지 않았지만, 많은 분의 도움으로 이 자리까지 왔구나 싶었다. 모두에게 感謝하는 마음이 들었다.” 

    -日帝强占期 慶北 慶州 山村마을에서 태어나 힘든 時間을 보냈더라. 

    “1939年 내가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日本 홋카이도 炭鑛 勞動에 强制 動員됐다. 2年 뒤 거기서 큰 事故가 났다. 아버지는 九死一生 목숨을 건졌지만 오랫동안 病院 身世를 졌고, 光復 後 韓國에 돌아와서도 내내 後遺症에 시달리셨다. 1950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열한 살이었다. 어머니가 痛哭하다 精神을 잃고 쓰러지신 일, 그걸 보고 나도 尙州 지팡이를 내던진 채 같이 울었던 일이 기억난다.”

    가난한 집안 큰아들

    -以後 學業을 이어가기 힘들 만큼 가난을 겪었던데. 

    “그前에도 살림이 넉넉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病이 깊어지는 걸 알면서도 돈 걱정에 治療를 마다하셨다. 뒤늦게 病院에 갔을 때는 이미 손쓰기 어려운 狀態였다. 醫師가 ‘조금만 일찍 오셨으면 더 사셨을 텐데’ 라고 하더라. 그때부터 ‘醫師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以後 아프리카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 얘기를 들으며 꼭 醫師가 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겠노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現實은 中學校 進學도 힘든 狀況이었다. 어머니는 고사리와 酒醉뿌리(깊은 山中에 나는 藥草 뿌리)를 캐다 팔아 生計를 꾸리셨다. 그런 獻身과 周圍 분들 도움으로 艱辛히 中學校에 들어갔고, 高等學校 때부터는 登錄金을 벌어가며 學校를 다녔다.” 

    1940~50年代 이 땅에 살았던 平凡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듯한 그의 어린 時節 이야기는 自敍傳에 생생히 記錄돼 있다. 金 前 議員은 以後 千辛萬苦 끝에 서울에 올라와 首都醫大(現 高麗大 醫大)에 合格했다. 하지만 登錄金을 마련하지 못해 끝내 進學을 抛棄한다. 그는 이때를 回顧하며 “돈이 삶의 目的은 아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한 手段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時期”라고 했다. 

    以後 金 前 議員은 積極的으로 돈벌이에 나섰다. 그리고 20代 中盤, 서울에서 가장 큰 檢定考試學院을 經營하는 靑年 事業家로 우뚝 선다. 어떻게 그런 일이 可能했을까. 記者 質問에 金 前 議員은 “내가 생각해도 神奇한 일”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自敍傳에는 英語學院으로 始作했다고 적혀 있다. 

    “1960年의 일이다. 英語가 우리나라에서 出世 手段으로 浮上하던 때다. 敎育 需要가 많았다. 英語 講師가 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一旦 해보자 마음먹었다. 먼저 夜間에는 講義가 없는 펜글씨 學院을 찾아갔다. ‘저녁 時間에 敎室을 빌려주면 거기서 講義를 해 輸入의 20%를 賃借料로 내겠다’고 하자 院長이 欣快히 承諾했다. 그때부터 새벽에 有名 英語學院에 가서 授業을 듣고, 낮 時間 동안 內容을 熟知한 뒤, 밤에는 講壇에 섰다. 瞬息間에 學生이 몰려들었다.” 

    - 6個月 만에 그 學院을 引受했다고. 

    이어 金 前 議員은 出版業에도 뛰어들었다. 檢定考試學院에도 나오기 힘든 形便의 사람들을 위한 獨學龍 敎材를 製作, 販賣한 것이다. 이것이 또 한 番 큰 成功을 거뒀다. 아직 그가 大學 過程도 다 마치기 前의 일이다. 事業을 하며 韓國외국어대 英語科에 進學한 金 前 議員은 1967年 비로소 學士帽를 썼다.

    國會議員을 向한 3錢 4期

    事業 分野에서는 일찌감치 成果를 냈다. 하지만 政治 入門 過程에는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다. 

    “1973年 2月, 9代 國會議員 選擧 때 慶州 地域에 처음 挑戰狀을 냈다. 30代 中盤, 혈기왕성하던 時節이다. 故鄕 競走를 爲해 일다운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돌아보면 慶州에서 받은 게 무척 많다. 初等學校 6學年 때, 家庭 形便 탓에 中學校 進學을 망설이는 나를 위해 擔任先生님이 夜間過程이 있는 中學校에 推薦書를 써주셨다. 그 便紙를 받은 慶州 文化中 校長先生님은 내가 낮에는 敎務室에서 심부름하고, 밤에는 夜間學校에서 工夫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어머니가 登錄金을 마련해 주셔서 結果的으로는 晝間過程에 들어갔다. 하지만 꿈을 抛棄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분들 恩惠 德分이다. 高等學校 進學, 上警 等 人生의 決定的 瞬間에도 故鄕 분들 도움을 많이 받았다. 政治人이 돼 報答하고 싶었다.” 

    그러나 金 前 議員은 1985年 12代 國會에 入城하기까지 3番 연달아 失敗를 맛봤다. 落選한 게 아니다. 다양한 政治社會 力學 앞에 스스로 꿈을 접었다. 그사이 慶州實業專門大(現 徐羅伐臺)를 세우는 等 地域 活動을 繼續한 그는 國會議員이 됐을 때 心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는 말로 表現했다. 

    金 前 議員은 1988年 13代 國會議員 選擧에서도 當選해 再選 議員이 됐다. 그러나 以後 政治 人生은 順坦치 않았다. 14代 總選을 앞둔 1992年 2月, 동아일보에는 이런 記事가 실렸다. 

    ‘김일윤 議員이 25日 저녁 突然 美國으로 出國, 某種의 壓力을 받고 出馬를 抛棄한 게 아니냐는 疑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出國 前날까지 慶州市에서 繼續 總選 出馬를 準備하다 25日 서울로 올라왔으며 이날 午後 혼자 渡美했다.’ 

    當時 市民團體 ‘公明選擧實踐市民運動協議會’가 聲明을 내고 ‘김일윤 議員의 突然한 出國 事態와 關聯한 政治工作說에 對해 大統領이 解明해야 한다’고 밝혔을 만큼 世間의 耳目을 끈 事件이다. 金 前 議員은 自敍傳에서 이 事件의 內幕을 率直히 公開했다. 內容을 拔萃 紹介한다.

    總選 앞두고 外部 壓力으로 美國行

    12臺와 13代 國會에서 맡은 일에 最善을 다한 나는 어렵지 않게 14代 國會에 登院할 것이라는 豫測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選擧를 앞둔 1992年 1月 17日子 동아일보에 全혀 豫想치 못한 記事가 실렸다. 

    ‘競走는 서수종 前 安企部 祕書室長이 民主自由黨 公薦 內定으로 알려졌다.’ 

    나를 비롯한 同僚 議員들 모두 깜짝 놀랐다. 當時 安企部는 權力 核心이었다. 박태준 (民主自由黨) 總裁와 김윤환 總長은 답답해하면서도 나를 위해 별다른 措置를 取하지 못했다. 安企部는 超法的 權力機關이었고 權力의 頂點인 大統領과 通하는 公式機關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無所屬 出馬를 決心하고 뛰기 始作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거꾸로 安企部를 刺戟한 模樣이었다. 事務局長이 느닷없이 린치를 當해 갈비뼈 6個가 부러져 應急室로 실려가 누웠다. 選擧 事務室 앞에는 正體 모를 健壯한 사람들이 서성이며 出入하는 사람들을 威脅했다. 나는 安企部의 政治工作 蠻行을 하나하나 메모했다가 記者會見을 통해 滿天下에 公開하기로 하고 서울로 向했다. 그런데 이런 내 動向마저 安企部는 미리 把握하고 있었다. 

    2月 25日 金浦空港에 到着하자마자 한 通의 電話를 받았다. 소공동 롯데호텔에 왔다 가는 것이 身上에 좋을 것이라는 脅迫電話였다. 호텔로 갔더니 그들은 正體조차 밝히지 않고 나를 壓迫했다. 

    ‘이番 出馬를 抛棄하십시오. 固執 피우시면 議員님 身邊에 큰 變化가 올 것입니다. 오늘 午後 飛行機 便으로 美國으로 떠나십시오. 選擧 前에 돌아오시면 안 됩니다.’


    金 前 議員은 結局 14代 總選 때 出馬는커녕 候補 登錄도 못했다. 12, 13代 國會에서 京釜高速鐵道 慶州路線 誘致에 總力을 기울이던 그로서는 痛恨의 瞬間이었다. 事實上 確定된 듯 보였던 高速鐵道 ‘慶州驛’은 金 前 議員이 院外에 있던 期間 再檢討 手順을 밟았고, 그는 15代 總選에서 當選해 國會에 들어간 뒤 또 한 番 ‘목숨 걸고’ 이 일에 매달렸다. “京釜高速鐵道 慶州路線 誘致에 慶州의 未來가 걸려 있다고 判斷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스터 高速鐵

    1월 13일 경북 경주시에서 열린 ‘에밀레종은 울고 있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김일윤 전 의원. [김형우 기자]

    1月 13日 慶北 慶州市에서 열린 ‘에밀레鐘은 울고 있다’ 出版記念會에 參席한 김일윤 前 議員. [김형우 記者]

    1999年 京釜高速鐵道가 慶州를 지나는 게 確定된 뒤 KBS 第1라디오는 國會 速記錄 等을 土臺로 다큐멘터리 드라마 ‘京釜高速鐵道 現住所’를 製作 放送했다. 이를 통해 慶州路線 確定까지의 迂餘曲折과 金 前 議員의 活動相이 世上에 드러났다. 金 前 議員은 “以後 地域 住民들에게 ‘고맙다’는 人事를 많이 들었다. 議政 活動에서 무척 보람 있었던 일로 記憶한다”고 밝혔다. 

    그는 16代 國會 時節인 2002年, 汎地球的 奉仕活動 活性化를 目標로 國際社會奉仕議員聯盟(IPSS) 創立을 主導한 일도 ‘뜻깊은 記憶’으로 꼽았다. 當時 金 前 議員은 奉仕活動이 國家 境界를 넘어 擴大되려면 各國 國會議員이 協力해야 한다고 보고 國際機構 設立을 推進했다. 그해 8月 서울에서 열린 IPSS 創立式에는 35個國 70餘 名의 國會議員이 參席했으며, 그가 初代 議長으로 選出됐다. 

    80年 人生의 키워드를 敎育事業, 政治, 奉仕 세 單語로 꼽은 金 前 議員은 앞으로도 한 市民으로서 競走를 위한 奉仕를 繼續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1月 13日,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消滅都市慶州危機對策委員會’를 出帆시킨 것도 그 一環이다. 金 前 議員은 “이제 地域社會 元老로서 千年古都 慶州가 發展하도록 하는 데 힘을 쏟겠다”는 抱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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