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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 靑年이 쓴 北녘 설날 “줄唐콩 半으로 갈라 윷놀이”|新東亞

脫北 靑年이 쓴 北녘 설날 “줄唐콩 半으로 갈라 윷놀이”

  • 조의성 北韓離脫住民·연세대 4學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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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1-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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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날은 陰曆설보다 陽曆설

    • 열두 달 달曆 1張에 적은 年力 使用

    • 달曆은 最高의 名節 膳物

    • 北녘의 한 해는 鳶날리기로 始作

    • 설날 飮食은 饅頭국



    1월 1일 새해맞이 민속놀이를 하는 평양시민들. [뉴시스]

    1月 1日 새해맞이 民俗놀이를 하는 平壤市民들. [뉴시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鳶 띄우는 꿈을 꾸곤 한다. 꿈속 내 自我에는 天眞爛漫한 10代의 ‘나’와 脫北을 꿈꾸던 20代 時節의 ‘나’, 韓國에서 現在를 살아가는 30代의 ‘나’가 모두 投影돼 있다. 설날을 기다리는 10代의 ‘나’는 如前히 鳶살로 쓸 수숫대와 든든한 鳶실을 장만하기에 바쁜 개구쟁이다. 20代의 ‘나’는 鳶을 날리면서도 脫北에 對해서만 생각한다. 나는 分明 脫北에 成功했는데 20代의 나는 왜 아직도 北녘에 있는 걸까. 그러면서 ‘내가 연이라면 쉽게 脫北할 수 있을 텐데…’ 생각한다. 30代의 나는 어른답게 慰勞하는 役割을 맡는다. 서로 다른 時間에 있는 나의 두 自我에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이건 꿈이어서 괜찮아. 너는 꿈을 이루었고, 이젠 安全해.” 

    이렇게 말하는 渦中에도 30代의 나조차 或是 이게 꿈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不安에 種種 시달린다. 나의 세 自我는 꿈속에서 各自의 役割을 遂行하면서도 서로에게 重疊되고 干涉한다. 例를 들면, 10臺의 내가 南쪽으로 날려 보낸 鳶을 찾아 30臺의 내가 江原道의 어느 山기슭을 헤매기도 하고, 20臺의 내가 10代의 나에게 鳶을 만들 수 있는 큰 窓戶紙를 마련해 주기도 하는 式이다. 꿈속에서 나의 세 自我는 鳶을 통해 이어져 있다. 

    꿈을 깬 後 내게 남는 것이 꼭 서글픔뿐만은 아니다. 아련한 옛 時節의 追憶 또한 내 이부자리에 머문다. 半쯤 잠에 醉해 그 時節의 追憶에 잠겨 있노라면, 입꼬리가 어느새 슬그머니 치켜 올라간다. 이제 그 時節 설날의 追憶 속으로 여러분을 招待해 보려고 한다.



    2003年부터 公式的으로 陰曆설 쇠

    始作하기에 앞서 내 追憶 속 설날은 新正(陽曆 1月 1日)이라는 點을 分明히 해둬야 할 것 같다. 내가 태어났을 때 北韓에서 陰曆설은 生疏한 名節이었다. 오랜 歲月 傳統 名節이던 陰曆설은 日帝의 民族文化 抹殺 政策의 一環으로 1910年 以後 漸次 사라져갔다. 光復 後 北韓에서 陰曆설은 ‘封建 殘滓 타파’의 서슬 밑에서 復活하지 못했다. 

    1980年代 ‘朝鮮民族第一主義’ 口號 아래 民族文化 傳統을 固守하고 발전시키려는 試圖가 일어나면서 陰曆설과 秋夕을 비롯한 民俗名節이 再登場했다. 陽曆설에 익숙하던 住民들은 生疏한 規定에 쉽게 適應하지 못했다. 2003年 北韓 當局은 新正을 구정으로 ‘代替할 데’ 對한 指示를 내렸고, 陽曆설에 進行되던 國家 行事를 陰曆설에 맞춰 再編成했다. 설날 次例도 舊正에 맞춰 지내도록 指示가 내려왔다. 以前에 3日 동안 休息하던 陽曆설을 하루만 쉬게 하고 陰曆설을 3日間 쉬도록 했다. 舊正이라는 名稱도 설名節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 

    나는 바뀌어버린 설날이 混亂스러웠다. 15歲 少年에게 當時의 措置는 90餘 年 前 日帝의 民族文化 抹殺 政策과 별다를 게 없는 暴力이었다. 우리 家族은 陽曆설을 固守하기로 合意했다. 적어도 次例는 꼭 陽曆설에 지내자고 다짐했다. 祖上님들이 祭祀날 바뀐 줄 모르고 祭祀床 받으러 왔다가 그냥 돌아가면 그런 不孝가 또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아버지의 論理였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좀 무서웠다. 長孫인 나는 決心했다, 앞으로 永遠히 陽曆설만 認定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陽曆설을 설날로 쇠왔기 때문에 北韓에서는 只今도도 陽曆설에 茶禮를 지내는 이가 더 많다.

    달曆은 最高의 名節 膳物

    2020년 북한 달력.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이 북한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1월 25일은 설 명절, 4월 15일은 태양절이라고 적혀 있다. [박해윤 기자]

    2020年 北韓 달曆. 김일성 生日인 4月 15日이 北韓에서 가장 큰 名節이다. 1月 25日은 설 名節, 4月 15日은 太陽節이라고 적혀 있다. [박해윤 記者]

    어릴 적 나의 설 準備는 유난히 일찍 始作됐다. 마을 밖 수수밭에 탐스러운 수수이삭이 익어가고 수수밭 主人아저씨의 입가에 微笑가 피어오를 때가 설 準備를 始作하는 타이밍이다. 于先 아저씨에게 큰 鳶을 만드는 데 必要한 긴 수숫대를 付託해야 한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는 秋收가 끝나면 第一 길고 튼튼한 수숫대를 이삭 바로 밑까지 바싹 잘라서 한 묶음씩 가져다주곤 했다. 

    鳶을 만들기 爲해서는 큼직한 종이가 必要하다. 그 時節 내가 求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종이는 ‘年力’이다. 年力은 열두 달 달曆을 종이 한 張에 적은 것이다. 物資가 貴하다 보니 北韓에서는 只今도 달曆을 쓰는 家庭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달曆은 最高의 名節 膳物이기도 하다. 高位 幹部들에게는 김일성 敎示, 金正日 말씀 같은 게 날마다 적힌 日曆을 黨에서 提供한다. 

    해마다 새해가 오면 人民班을 통해 國家에서 世代別로 年力을 한 張씩 供給한다. 年力은 가로 50㎝, 세로 70㎝로 鳶을 만들기에 제格이다. 앞面에는 該當 年度의 年力과 體制 宣傳 寫眞이 印刷돼 있으나 뒷面은 白紙다. 설날까지 열흘쯤 남으면 父母님께 年力을 써도 되냐고 묻기를 反復했다. 마침내 父母님이 許諾하면 鳶 만들기가 始作된다. 종이 中心部에 適當한 크기의 구멍을 내고 잘 말린 수숫대를 쪼개서 만든 鳶살을 붙이고 네 모서리에 兆·국·痛·일이라고 큼직하게 써넣는다. 이 모든 作業은 愼重에 愼重을 期해야 한다. 쓸 수 있는 종이가 單 한 張밖에 없기에 鳶 만들기를 망치면 한 해를 망치는 것과 같았다. 다 쓴 空冊 서너 張을 바르게 잘라 聯의 몸통에 붙이면 꼬리까지 完成이다. 낚싯줄을 풀어 얼레에 감고 聯과 連結하면 準備가 끝난다. 아직까지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試驗飛行이 남아 있다.

    北녘의 한 해는 鳶날리기로 始作

    북한의 설날 연날리기. [북조선 녀성 페이스북]

    北韓의 설날 鳶날리기. [北朝鮮 女性 페이스북]

    試驗飛行은 普通 學校 運動場에서 親舊들과 함께 한다. 鳶의 均衡과 安定感 程度만 確認하고는 바로 끝낸다. 동생이 좀 더 날리자고 아무리 떼를 써도 어림없다. 설날을 위해서 참아야 한다. 北韓의 한 해는 鳶날리기로 始作된다. 

    ‘까치설날’은 설레는 날이면서도 苦役(苦役)이다. 설飮食을 만드는 어머니를 도와 잔심부름을 하고, 설날에 입을 옷도 손질해 둬야 한다. 윷놀이 판에 한 해 동안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새로운 윷을 準備하는 일도 내 몫이다. 第一 어려운 것은 밤 12時까지 잠을 참는 것이었다. 그 時節 나는 初저녁잠이 많았다. 電氣가 供給되는 날에는 그나마 좀 괜찮았지만 ‘電氣불’이 없는 겨울밤에 子正까지 기다리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어린 마음에 눈썹이 하얘지기는 싫었다. 어른들은 설날을 맞이하기 前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말했다. 나중에야 어른들이 떡가루(떡을 만들기 위해 穀食을 빻은 가루)를 아이들의 눈썹에 발라놓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무슨 할 飮食이 그렇게 많으신지 밤을 새셨다. 아버지가 長男이어서 次例 飮食 장만이 설 準備에서 큰 比重을 차지했다. 祭祀 飮食을 만드는 것은 아주 까다로운 일이다. 當時에는 돌이 섞이거나 껍질이 채 벗겨지지 않은 쌀이 많았다. 나와 동생이 쌀에서 不純物을 골라냈는데도 어머니가 쌀 함박으로 數次例 不純物을 걸러내야 했다. 아버지에 따르면 次例나 祭祀 飮食을 만드는 途中에 맛을 봐서는 絶對로 안 된다. 祖上님이 맛보기 前에 먼저 飮食을 먹는 것은 禮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祖上님께 드릴 飮食을 만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느낀 그 感情을 아직도 나는 形容하지 못하겠다. 

    설날 아침 第一 먼저 하는 意識은 次例다. 午前 5時 以前에 茶禮를 지냈는데, 동생은 늘 잠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狀態에서 절을 하곤 했다. 다른 집 祖上님들보다 일찍 食事 待接을 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가 이른 時刻을 固執하는 理由였다. 나 또한 長男이었기에 祭祀床차림을 恒常 集中해서 觀察했다. 아버지는 紅東白西, 左脯右醯, 魚東肉西, 反噬炕洞을 읊으면서 床차림의 例들을 외우시곤 했다. 

    床차림과 次例 進行은 規則도 많지만 順序도 複雜하다. 아버지는 늘 順序를 헛갈리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以前에 했던 順序를 알려드려야 했다. 그런 일이 反復되면서 아버지는 順序가 헛갈릴 때마다 으레 내 쪽을 넌지시 바라보시곤 하셨고 나는 속으로 으쓱해지곤 했다. 올해 설에도 아버지는 어김없이 順序를 헛갈리고 계실 텐데 누가 그걸 바로잡아 주고 있을까.

    설날 飮食은 饅頭국

    茶禮를 지낼 때는 大門과 出入門을 조금씩 열어놓아야 하는데 그 사이로 祖上님이 들어오시기 때문이랬다. 門 여는 일은 恒常 내 擔當이었다. 大門에서부터 出入門까지 거리는 5m 程度인데 어둠 속에서 지나는 그 5m는 나에게 形言할 수 없는 期待感과 두려움을 주었다. 期待感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或是나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고, 두려움은 이미 죽은 사람과 어둠 속에서 함께 걷는다는 섬뜩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늘 궁금했다. 얼마나 많은 祖上님이 오는지, 온다면 親家에서 올지 外家에서 올지. 나는 내가 親熟한 할아버지와 外할머니가 오길 바랐지만, 그때마다 親할머니와 外할아버지는 어쩌지 하는 걱정이 함께 들었다. 나는 大門을 여는 瞬間 휙 하고 들어오는 바람 속에서 어떤 때는 할아버지의 마라草(종이로 말아 만든 작은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어떤 때에는 내 귀에 대고 소곤소곤 옛말 이야기를 들려주던 外할머니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事實을 父母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次例가 끝난 後에는 兄弟姊妹가 나란히 父母님께 歲拜를 드린다. 크리스마스가 없는 北韓에서 설날은 家族끼리 膳物을 나누는 名節이기도 하다. 膳物은 普通 겨울철 옷이나 帽子, 或은 平素에 갖고 싶어 했던 것을 父母님이 記憶했다가 사주곤 하셨다. 膳物을 나눈 後에는 아침食事를 하는데 普通 饅頭국을 먹었다. 饅頭는 돼지고기와 시래기, 豆腐를 잘게 썰어 함께 볶아낸 소를 넣은 것으로 어른 주먹보다 조금 작게 빚었다. 우리 집에서는 설날 當日에는 饅頭국을 먹었고, 떡국은 나중에 먹었다. 北韓에서는 설날에 大部分 饅頭국을 먹는다. 떡국 떡을 만들기 위해 긴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떡국대’라고 한다. 家族이 함께 빚은 饅頭와 떡국대를 밖에 내놓아 自然 冷凍시킨다. 北쪽 地方이어서 可能한 일이다. 

    次例와 아침食事가 모두 끝나고 午後가 되면 洞네 사람들이 모여들기 始作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은 名節 때마다 洞네 사람들의 모임 場所가 됐다. 사람들은 그 理由가 우리 집 윷놀이 판이 洞네에서 第一 크고 멋져서라고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平素에는 말 한마디 없다가도 손님만 오면 말 꾸러미를 풀어놓으셨는데, 지루하기 그지없는 러시아의 10月 革命 이야기도 아버지 입을 거치고 나면 한 篇의 童話처럼 興味津津해졌다. 

    우리 집에 사람들이 모이는 데는 TV도 한몫했다. 2000年代 初盤까지만 해도 洞네에 TV가 있는 집이 몇 집 안 됐다. 電氣 事情이 어려운 北韓이지만 설날만큼은 電氣가 供給되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電氣도 名節 供給’이라며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어쨌든 설에 이웃들이 모여 함께 TV를 보는 風景도 내 追憶의 重要한 部分이다. 交通 事情上 名節에 親戚들 間 往來가 쉽지 않은 北韓에서 이웃들 間 交流는 매우 重要하다.

    줄唐콩 갈라 ‘윷’ 만들어

    지난해 2월 5일 노동신문이 윷놀이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공개했다. [노동신문]

    지난해 2月 5日 勞動新聞이 윷놀이를 즐기는 市民들의 모습을 公開했다. [勞動新聞]

    TV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윷놀이가 始作된다. 윷놀이는 普通 家族 單位로 便을 나누는데 勝敗로 한 해 運數를 알 수 있다는 認識이 있어 勝癖(勝癖)李 대단하다. 윷은 줄唐콩으로 만든다. 北쪽 地方의 강낭콩을 줄唐콩이라고 하는데, 韓國의 강낭콩보다 알이 크고 굵으며 큰 것은 어른의 엄지발가락만한 것도 있다. 잘 영근 줄唐콩은 윷으로 쓰기에 그만이다. 보통의 줄唐콩은 검은色이다. 줄唐콩을 半으로 가르면 윷이 된다. 승부욕이 지나쳐 바닥에 쾅쾅 뿌리다 보면 때로 콩알이 박산(깨어져 散散이 부서지는 것)나기도 한다. 

    윷놀이가 아무리 신난다 해도 설날의 白眉는 亦是 鳶날리기다. 나는 동생과 함께 벌거숭이 뒷山으로 올라간다. 거기서는 벌써 아이들이 鳶을 날리고 있다. 北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季節風은 鳶날리기엔 安城맞춤이지만 시베리아의 찬 기운은 매섭게도 시리다. 

    내 信號에 따라 동생이 잡고 있던 鳶을 놓는 瞬間 鳶은 마치 새매(수리科에 屬한 小型 猛禽類)처럼 蒼空으로 날아오른다. 우리 마음도 덩달아 鳶과 함께 붕붕 뜬다. 많은 연 中에 내 것이 第一 크고, 第一 높이 난다. 아이들이 周邊에 모여들어 와와 感歎한다. 聯銀 우쭐한 내 마음인 量 바람을 타고 잘도 춤을 춘다. 어느덧 煙室이 다 풀려서 鳶이 하나의 點으로 까마득하다.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當身이 어릴 적에는 鳶을 大門짝만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鳶살은 대나무로 만들고, 煙室은 明紬실을 밧줄처럼 여러 겹으로 꼬아서 썼다고 한다. 연 종이는 窓戶紙를 겹쳐서 풀漆해서 썼단다. 鳶이 커서 혼자 띄우지 못하고 여러 名이 함께 날려야 했다고도 한다. 

    나는 할아버지께 들은 얘기를 되새기면서 한없는 空想에 잠긴다. 自己도 날려보겠다고 콩콩 뛰던 동생은 손을 호호 불며 조금 날려보더니 이내 춥다고 집으로 내려가 버렸다. 하지만 내 空想은 繼續된다. 

    ‘萬若 鳶을 크게 만들 수 있다면 내가 그 위에 탈 수도 있을 텐데. 아니면 줄을 튼튼하게 만들어 매달릴 수라도 있을 테지. 큰 鳶을 만들자면 뭐가 必要하지? 대나무는 내가 愛用하는 낚싯대를 쓰면 되겠고, 緣줄은 낚싯줄을 몇 겹으로 엮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탈 수 있을 만큼 充分히 큰 종이를 어디서 求한담. 종이만 求할 수 있다면 다음 설에는 큰 鳶을 만들어볼 수 있을 거야’ 

    空想에 빠진 동안 어느새 겨울의 짧은 해가 西쪽으로 기울었고, 나는 천천히 鳶줄을 감는다. 설날이 저물고 있는 것이었다.

    南녘으로 훨훨 날아간 年

    설날이 지난 以後에도 나는 種種 鳶을 띄웠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제 鳶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물녘 鳶을 들고 뒷동산에 올랐다. 뒷山에 오르기 前 크레용으로 ‘祖國統一’ ‘2001軸’이라고 쓴 글字를 한 番 더 津하게 덧漆했다. 

    나는 따라오겠다는 동생을 期於코 떼어놓고 갔다. 왠지 둘만의 離別로 간직하고 싶었다. 바람은 如前히 南쪽으로 불고 있었고 차가웠다. 그곳에는 오직 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鳶을 띄우고 鳶줄을 풀었다. 聯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 높이 잘도 올라갔다. 힘차게 돌아가던 얼레가 멈춰 서고 가벼운 衝擊이 손으로 傳해질 때 마음이 철렁했다. 暫時 동안 葛藤했다. 그러고는 얼레에 묶여 있는 煙室의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실의 끝이 얼레를 스쳐 지나다 잠깐 멈추었던 刹那의 瞬間을 記憶한다. 나는 연 또한 나처럼 떠나기를 暫時 망설였음을 確信했다. 喪失의 瞬間이자 自由의 瞬間이었다. 點이던 聯銀 먼지가 되더니 漸次 空氣가 됐다. 鳶이 사라진 내 눈 속에서 물방울이 솟아났다. 나는 苦痛과 快感을 함께 느꼈다. 그 瞬間의 아련한 喪失感은 내 靈魂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 苦痛과 快感은 첫사랑을 追憶할 때의 感情과 닮았고, 많은 사람이 첫사랑의 追憶을 所重히 꺼내 보듯이 나도 그때를 所重히 追憶한다. 

    해마다 年末年始가 다가와 鳶 날리는 꿈을 꾸고 나면, 2001年의 그 鳶이 唯獨 잊히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듯 또렷하다. 그 時節 날려 보낸 鳶을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그 鳶은 果然 南녘의 어느 山기슭에 걸려 내려앉아 있을까. 덧漆해 놓은 크레용 자국은 20年 風霜에 얼마나 바랬을까. 萬若 奇跡이 그 鳶을 찾아 떠난 나에게 再會를 許容해 준다면 나는 묻고 싶다, 蒼空을 나는 自由가 喪失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가, 그 自由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만큼 價値가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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