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癌을 이긴 사람들|新東亞

癌을 이긴 사람들

癌患者 3名 中 2名은 5年 以上 生存 ‘癌과 더불어’ 幸福하게 살아가는 法

  • 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20-02-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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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 캔서테인먼트 회사 ‘박피디와 황배우’를 통해 암 인식 개선 활동을 하고 있는 황서윤 씨. 황씨는 우리 사회가 암 생존자의 손을 잡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도균 기자]

    國內 最初 캔서테인먼트 會社 ‘朴피디와 黃俳優’를 통해 癌 認識 改善 活動을 하고 있는 黃書尹 氏. 黃氏는 우리 社會가 癌 生存者의 손을 잡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金度均 記者]

    1960年生 이경파(假名) 氏는 2018年 9月 乳房癌 診斷을 받았다. 림프까지 癌이 퍼진 狀態였다. 다음 달 바로 手術臺에 올랐고, 8回에 걸쳐 抗癌注射를 맞았다. 當時 그는 首都圈 한 地域兒童센터에서 英語를 가르치고 있었다. 보람과 기쁨이 컸다. 李氏는 病暇를 내며 ‘健康해진 모습으로 꼭 다시 돌아오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지난해 8月, 約 1年 만에 그 約束을 지켰다. 抗癌 治療 後遺症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진 狀態였지만, 同僚들은 그를 반겨줬다. 李氏 얘기다.
     
    “復職 初期 비니를 쓰고 다녔다. 그때 한 아이가 장난으로 帽子를 벗기려다 깜짝 놀라 ‘先生님 대머리예요?’ 하던 게 기억난다. 나는 ‘아니, 先生님이 癌 治療를 받아서 그래. 이제 곧 다시 머리카락이 자랄 거야’ 하고 答했다. 아이들 앞에서 아팠던 걸 숨기지 않으니 오히려 便하게 지낼 수 있었다. 요새는 學生들이 많이 자란 내 머리카락를 보면서 ‘先生님 이제 대머리 아니네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내가 다시 健康을 찾아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感謝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末期癌 딛고 社會 復歸

    암진단 당시 이정훈 씨의 PET-CT 사진과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하던 시절의 이씨.

    癌診斷 當時 이정훈 氏의 PET-CT 寫眞과 ‘80日間의 世界 一周’를 하던 時節의 李氏.

    1981年生 이정훈 氏는 大企業 會社員이다. 그는 2015年 여름, 자꾸 배가 아프고 속이 쓰려 內視鏡 檢査를 받았다가 癌에 걸린 걸 알게 됐다. ‘요즘 술을 자주 마셔 胃潰瘍이 생겼나’ 程度로 생각하던 그에겐 靑天霹靂 같은 診斷이었다. 不過 8個月 前 綜合檢診을 했을 때는 以上所見조차 없었다. 李氏는 두 달 前 마라톤도 完走한 참이었다. 그러나 PET-CT 撮影과 組織檢査 結果는 하나였다. ‘버킷림프종 血液癌 末期’. 醫師는 “癌이 거의 모든 臟器에 퍼져 手術조차 할 수 없는 狀態”라고 말했다. 

    李氏는 “그래도 生存 確率이 있다”는 한 마디에 希望을 걸었다. 休職屆를 내고 바로 抗癌 治療를 始作했다. 3日 만에 體重이 10kg 줄었다. 독한 藥의 影響으로 위에 구멍이 났다. 洗手하다 손이 머리 쪽을 스치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빠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治療 效果가 있었다는 點이다. 

    5個月間 이어진 病院 生活을 끝내고 退院했을 때 李氏에게 가장 懇切한 건 旅行이었다. 그는 처음엔 國內 內陸, 그다음엔 濟州島로 조금씩 範圍를 넓혀가다 2017年 1月, 美國行 飛行機에 몸을 실었다. 이어서 南美, 유럽까지 80日 동안 世界 곳곳을 돌아다녔다. 

    李氏는 只今 癌 診斷을 받기 前 몸담았던 바로 그 會社에서 다시 일하며, 靑年 癌患者 支援 커뮤니티 ‘當身을 또 봅니다(줄임말 또봄)’를 運營하고 있다. 團體 이름에는 ‘當身의 健康한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와 ‘아픔을 이겨내고 또다시 봄을 만났다’는 두 가지 意味가 담겨 있다. 



    한때 ‘癌=죽을病’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只今은 다르다. 앞선 두 事例처럼 癌이 相當히 進行됐다는 判定을 받고도 健康을 回復해 社會에 復歸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들은 定期的으로 癌 追跡檢査를 하지만, 여느 慢性疾患者와 다를 바 없이 日常的 삶을 살아간다. 政府는 지난해 12月 24日, 癌 確診 後 5年 넘게 살고 있는 이른바 ‘癌 生存者’ 數가 100萬 名이 넘었다고 發表했다. 關聯 統計를 낸 以來 最初 記錄이다.

    癌 生存者 100萬 名 時代

    國內 全體 癌患者 數는 約 187萬 名. 그中 折半 以上(55.7%)李 生存 期間 5年을 넘겼다. 5年은 一般的으로 癌이 完治됐다고 判斷하는 基準點이다. 이날 政府가 내놓은 癌 關聯 統計가 하나 더 있다. 2013~17年 사이 癌 診斷을 받은 患者의 5年 相對生存率(生存率)李 70.4%라는 것이다. 生存率은 癌患者와 一般人의 5年 期待生存率 비(比)를 가리키는 用語다. 癌患者 10名 中 7名 程度가 診斷 後 5年 以上 산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癌患者 3名 中 2名은 ‘完治’ 얘기를 듣는 世上이다. 

    國內 癌 生存率은 1993~95年 42.9%를 記錄한 以後 빠른 速度로 上昇 趨勢다. 2001~2005年 54.1%를 거쳐 이제 70%를 넘겼다. 現在 갑상샘·前立샘·乳房癌 患者의 生存率은 90%가 넘는다. 如前히 膵臟癌(12.2%), 膽囊 및 其他膽道癌(28.9%), 肺癌(30.2%) 等 相對的으로 治療가 어려운 癌이 없지 않지만, 該當 疾患者 가운데서도 ‘希望의 證據’는 繼續 나타나고 있다. 

    問題는 社會 認識이 醫學 發展 速度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 있다. 相當數 癌患者는 治療 前後 職場을 잃고, 社會 復歸에도 어려움을 겪는 게 現實이다. 1982年生 黃書尹 氏도 그中 한 名이다. 

    뮤지컬 俳優로 일하던 黃氏는 2016年 샤워를 하다 가슴에서 멍울을 發見했다. 組織檢査 結果 乳房癌이었다. 1基에서 2期로 넘어가는 段階라고 했다. 림프전이도 없었다. 黃氏는 “놀라긴 했지만 世上이 무너질 만큼 衝擊을 받지는 않았다. ‘잘 治療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手術과 放射線 및 호르몬 治療 過程도 견딜 만했다. 治療가 어느 程度 마무리된 뒤 그는 스페인 산티아고로 旅行길에 올랐다. 오랜 歲月 마음에 품고 있던 ‘버킷 리스트’를 實現하기 위해서였다. 돈이 많이 들까 봐, 다음에 언제든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此日彼日 미뤄뒀던 꿈을 이참에 이루자고 생각했다. 現地에서 한 달間 800km를 거뜬히 걸었다. 그리고 前과 다름없는 日常이 펼쳐질 것을 期待하며 돌아온 韓國에서, 그는 豫想 못한 現實과 맞닥뜨렸다. 

    “癌 宣告 받고 1年쯤 現場을 떠난 동안 나를 둘러싼 環境이 달라진 거다. 배우는 캐스팅을 받아야 일하는데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 내가 演技를 指導하던 아이들은 그사이 모두 다른 先生님을 찾아갔다. 아직 젊은데 世上이 나를 外面하는 것 같았다. ‘멘탈’이 무너지고 感情이 바닥을 쳤다. 癌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때보다 이때가 훨씬 힘들었다. 남들 잘 사는 모습이 보기 싫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脫退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바리스타 資格證, 숲解說社 資格證 等을 땄지만 未來가 漠漠했다.”

    癌患者라는 資格證

    암환자의 삶을 유쾌하게 그린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의 한 장면.

    癌患者의 삶을 愉快하게 그린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의 한 場面.

    그때 黃氏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있다. 1975年生 朴피디(假名)다. 그는 2008年 皇氏가 出演한 뮤지컬의 演出者였다. 皇氏보다 한 해 빠른 2015年 乳房癌 診斷을 받고 治療 中인 狀態이기도 했다. ‘黃俳優’가 아프다는 消息을 듣고 朴氏는 治療 時 注意點, 健康管理法 等을 꼼꼼히 整理한 長文의 e메일을 보냈다. 朴氏 얘기다. 

    “내가 癌 確診을 받은 건 公演 準備로 한창 바쁘던 時期다. 그때 ‘當場 治療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醫師한테 ‘公演이 한 달도 안 남았다. 어쩌라는 거냐’고 했었다. 癌이 뭔지 잘 몰랐고, 내 몸 아낄 줄도 몰랐다. 以後 治療를 받으면서 내 몸으로 癌에 對해 알고 느끼게 됐다. 누가 아프다는 消息을 들으면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그래서 朴氏는 治療받는 病院의 新規 乳房癌 患者를 돕는 멘토, 이른바 ‘핑크메이트’로 活動했다. 좋은 評價를 얻었고 이름이 조금씩 알려졌다. 2017年 어느 날, 서울 한 保健所가 運營하는 癌患者 自助 모임이 朴氏를 ‘癌 專門家’로 招請했다. 朴氏는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專門家라니’ 하며 웃었다”고 털어놓았다. 

    “생각해 보니 癌 診斷과 治療를 經驗한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專門性이 있더라. 癌患者라는 게 감추려들면 弱點처럼 느껴지지만 드러내면 强點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었다. ‘癌에 걸린 德에 資格證이 하나 생겼네’ 생각하니 마음이 便했다.” 

    마침 그 무렵 앞날에 對한 걱정으로 憂鬱感에 빠져 있던 ‘黃俳優’가 朴氏에게 連絡을 해왔다. 朴氏는 自身이 얻은 깨달음을 傳했고, 그게 黃氏에게 새로운 希望이 됐다. 두 사람은 2018年 ‘藥은 藥師에게, 診療는 醫師에게, 癌 經驗談과 慰勞는 癌患者에게!’를 標榜하는 팟캐스트 ‘내가 癌이라니’를 만들었다. 現在는 우리나라 最初의 캔서테인먼트(Cancer+Entertainment) 企業 ‘(週)朴피디와 黃俳優’를 세운 狀態다. 이 會社를 통해 癌 經驗者의 삶을 愉快하게 그린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를 製作한다. 黃氏는 “그동안 여러 資格證을 取得했지만 癌患者 資格證만큼 進入 障壁이 높은 게 없었다. 갖기 어려운 資格證을 갖고 있으니 社會에 도움이 되게 잘 使用하자고 ‘朴피디’와 意氣投合했다”며 웃었다. 

    두 사람 앞에 힘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朴氏 抗癌手帖 겉張에는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몸은 쓰면 쓸수록 强한 精神力이 나온다’는 글句가 적혀 있다. 그가 每瞬間 渾身의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證據다. 乳房癌 發見 後 16次例에 걸친 抗癌 治療와 手術, 放射線 治療를 經驗한 朴氏는 2018年 子宮內膜癌이 發見돼 또 한 番 手術臺에 누웠다. 酷毒한 治療를 견디는 사이 糖尿, 不整脈 等 다른 疾病까지 생겨났다. 現在 治療와 再活을 竝行하며 公演 製作까지 하는 狀況이다. 種種 痛症이 찾아올 때면 苦痛에 몸부림치기도 한다. 그래도 只今 삶이 무척 幸福하다며 朴氏는 눈을 반짝였다. 

    “癌을 일찍 發見해 잘 治療한 黃俳優는 ‘早期 診斷, 早期 治療’가 얼마나 重要한지 보여주는 ‘早期 發見의 아이콘’이다. 反面 나는 ‘克服의 아이콘’ 같다. 癌 確診 當時 이미 림프까지 轉移된 狀態였다. 2次 癌도 생겼다. 그래도 挫折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산다. 熱心히 運動하고, 좋은 걸 먹으며 내 몸을 챙긴다. 癌 治療法은 繼續 開發되고 있고, 漸漸 더 많은 사람이 癌을 管理하며 살게 될 거다. 癌 때문에 삶을 抛棄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癌을 克服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朴氏 얘기다. 

    이 觀點에서 보면 이두리 氏도 ‘癌을 이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987年生인 그는 지난해 4月, 첫아이를 낳고 두 달도 안 된 時期에 癌 診斷을 받았다. 結婚 後 濠洲로 移住한 李氏는 現地에서 出産했다. 以後 母乳가 나오지 않고 가슴 痛症이 날로 심해져 病院을 찾았지만 젖몸살이라는 얘기만 들었다. 아무래도 異常하다 싶어 韓國行 飛行機를 탔고, 뒤늦게 乳房癌을 確認했다. 이름도 生疏한 三重陰性乳房癌, 병기는 이미 3期를 넘어간 狀態였다. 李氏 얘기다.

    有病長壽 時代, 버티면 낫는다

    삼중음성유방암 인식 개선 활동을 하고 있는 이두리 씨(왼쪽)와 임구슬 씨. 임씨는 암 진단 후 결혼식을 올렸다.

    三重陰性乳房癌 認識 改善 活動을 하고 있는 이두리 氏(왼쪽)와 임구슬 氏. 林氏는 癌 診斷 後 結婚式을 올렸다.

    “診斷을 받고 포털사이트 檢索을 해보니 하나같이 ‘豫後가 나쁜 癌’이라고 적혀 있었다. 많이 울었다.” 

    그에 따르면 乳房癌 앞에 붙은 ‘三重陰性’은 세 가지가 없다는 뜻이다. 各各 에스트로겐 受容體, 프로게스테론 受容體, 그리고 HER-2 受容體를 意味한다. 最近 乳房癌 患者 生存率이 크게 높아진 건 항호르몬 治療와 HER-2 標的 治療 技術이 發展한 德分이다. 三重陰性乳房癌에는 이런 藥이 듣지 않는다. 뾰족한 治療劑가 없다. 이 때문에 ‘治療가 어렵다’는 評을 듣는다. 그래도 李氏는 갓 태어난 아이를 생각해 勇氣를 냈다. “딸아이가 커가는 걸 보면서 같이 成長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 關聯 資料를 뒤지며 熱心히 工夫했다. 알아보니 4期 診斷을 받고도 問題없이 사는 患者가 무척 많았다. 몸 管理를 잘 한다면 언젠가 革新的인 治療法이 開發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自身이 생겼다. 

    “요즘은 於此彼 有病長壽 時代다. 癌이라고 다른 病과 다를 게 없다. 암은 누구에게나 感氣처럼 찾아온다. 내가 잘못해 아픈 게 아니고, 이 病 때문에 곧 죽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나아졌다.” 

    現在 李氏는 三重陰性乳房癌에 對한 社會的 關心을 促求하고, 어려움을 겪는 同僚 患者들을 돕기 위한 非營利財團 設立을 推進하고 있다. 그와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있는 또 다른 三重陰性乳房癌患者 임구슬 氏는 1988年生으로 李氏보다 한 살 어리다. 國樂을 專攻하고 公演企劃者로 活動하던 林氏는 2019年 2月, 結婚式을 한 달 앞두고 癌을 發見했다. 結婚을 다시 생각하려 했지만 媤家 어른들과 豫備男便이 펄쩍 뛰며 말렸다. 癌 治療를 바로 始作할 수 있게 오히려 結婚 날짜를 당기자고들 했다. 林氏는 癌 診斷 直後 式을 올렸고, 現在 男便과 함께 抗癌 治療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다. 그는 “처음엔 많이 망설였는데 結果的으로 좋은 選擇이었다. 그때 結婚을 抛棄했다면 只今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 같다. 每瞬間 男便이 큰 힘이 된다”고 털어놓았다.

    2040 癌患者의 꿈과 사랑

    戀愛와 結婚, 出産은 젊은 癌患者들의 큰 苦悶거리 가운데 하나다. 最近 癌 發生 年齡이 낮아지면서 이 問題로 苦痛받는 靑年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2018年 胃癌 3期 診斷을 받은 大學生 卷殷栗 氏(假名)는 “癌 確診 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女子親舊 얼굴이었다”고 했다. “내가 그 親舊를 繼續 만날 수 있을까. 언젠가 結婚하고 家庭을 꾸릴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權氏는 아직 같은 女子親舊와 잘 만나고 있지만, 女子親舊 家族은 그의 鬪病 事實을 모른다. 專門家들은 이 또한 癌에 對한 偏見 때문에 發生하는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 專門醫는 “女性의 境遇 抗癌劑 卵子 또는 生殖 호르몬 分泌에 影響을 미쳐 妊娠을 어렵게 만드는 境遇가 생기곤 한다. 反面 男子는 精子 數와 機能이 正常的이면 一般的으로 癌 治療 後 6個月 程度 지나면서부터 妊娠 計劃을 세울 수 있다”고 밝혔다. 最近엔 女性 癌患者 難妊을 改善할 多樣한 醫學 技術도 開發되고 있다고 한다. 

    三星서울病院 乳房外科 이정언 敎授 硏究팀은 2017年, 治療 中인 乳房癌 患者의 卵巢 機能을 一時的으로 떨어뜨려 폐경 狀態를 誘導할 境遇 抗癌 治療 後 妊娠과 出産이 可能하다는 硏究 結果를 發表했다. 이 方法을 통해 2002年 1月부터 2012年 4月까지 乳房癌으로 手術받은 20歲 以上 40歲 以下 旣婚 患者 41名 中 15名이 妊娠과 出産에 成功한 것으로 確認됐다. 出産을 願치 않은 11名을 빼면 妊娠 希望者(30名) 折半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 中 早産한 患者 1名을 除外하곤 遺産이나 畸形兒 出産도 없었다. 

    最近에는 抗癌 治療 始作 前 癌患者의 卵子·程子나 受精卵을 凍結 保管해 追後 妊娠을 可能하게 하는 技術도 널리 活用되고 있다. 專門家들은 “醫學技術은 빠르게 發展하고 있다. 癌患者들을 眞짜 고통스럽게 하는 건 疾患 自體가 아니라 ‘癌患者는 안 될 것’이라는 偏見”이라고 입을 모은다.

    癌 治療 넘어 社會 復歸

    이는 癌患者의 社會生活에도 큰 障礙 要因이 된다. 2017年 5月 國立癌센터가 一般人 1500名을 對象으로 實施한 設問 調査 結果 ‘癌이 있는 職員은 同僚를 配慮해 사내 行事에 參席하지 말아야 한다’(54%)는 應答이 折半을 넘었다. ‘癌 生存者의 職業 能力은 一般人보다 낮다’(57%) ‘家族 中 癌 生存者가 있는 사람과의 結婚을 避하고 싶다’(63%)는 應答도 매우 높게 나타났다. 

    盆唐서울大病院 再活醫學科 양은주 敎授와 심혜영 博士팀이 國內 職業環境醫學科 專攻醫 및 전임의 44名을 對象으로 實施한 調査에서는 75%(33名)가 ‘職場에 復歸한 癌 生存者를 진료해 본 적이 없다’고 答했다. 職業環境醫學科 醫師는 企業體와 連繫한 特殊健康檢診, 事業場 保健管理 等을 擔當한다. 이들이 醫療 現場에서 職場人 癌患者를 거의 接하지 못한 셈이다. 國內 胃癌 生存者 中 46.6%가 癌 診斷 後 失職했다는 統計도 있다. 襄 敎授는 “癌 生存者는 後遺症으로 身體的 限界가 있지만 再活 治療를 받으면 業務에 復歸할 수 있다”며 “企業과 國家에서 治療 및 檢査를 위한 有給休暇, 彈力勤務 方案을 함께 苦悶해야 한다”고 强調했다. 

    이는 癌 生存者들도 强力히 要求하는 內容이다. 國家癌統計에 따르면 國內 癌 生存者 中 約 57%가 滿 65歲 未滿이다. 한창 社會生活을 할 나이다. 5年 以上 生存率이 꾸준히 높아지는 只今 이들을 일자리에서 排除하는 건 經濟的 觀點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조주희 三星暑鬱病院 敎授(癌敎育센터長)는 “그동안 우리 保健 當局은 癌患者를 위한 健康保險 保障性 强化에 集中해 왔다”며 이제는 癌生存者의 社會 復歸에도 關心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强調했다.

    癌患者 職場 復歸, 언제가 좋을까
    (도움말 · 三星서울病院)

    [GettyImage]

    [GettyImage]

    癌患者는 普通 確診 判定을 받은 後 ‘不正-憤怒-妥協-憂鬱-受容’의 5段階 過程을 거친다. ‘내가 癌에 걸렸을 理 없다’고 否定하다가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라고 憤怒하고 ‘그래, 내가 그동안 過勞와 스트레스가 많았지’ 하며 妥協하다 ‘癌에 걸렸으니 곧 죽겠구나’ 같은 憂鬱感에 빠진다. 마침내 收容하고 治療에 나서기까지 時間이 오래 걸릴수록 苦痛이 길어진다. 

    癌生存者의 職場 復歸를 政策的으로 支援하면 우리 社會에 蔓延한 ‘癌=죽음’ 認識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 專門家들은 癌患者에게 職業 活動은 癌 診斷 前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癌患者는 社會生活을 함으로써 身體的 疲困에 適應하고, 自尊感을 높이며 心身의 健康을 되찾는다. 

    그렇다면 癌患者가 다시 일을 하기에 適切한 時期는 언제일까. 이는 個人의 身體的, 精神的 狀況과 職場 要因(業務의 物理的, 精神的 强盜) 및 治療 日程에 따라 달라진다. 職場 復歸를 考慮하는 癌患者는 먼저 自身의 活動 時間, 疲勞 水準 等을 記錄해 現在 體力이 어느 程度인지 具體的으로 把握하는 게 좋다. 에너지 水準은 每日 다르므로 一週日 동안 記錄하는 게 바람직하다. 方法은 다음과 같다. 

    ? 氣象 時間부터 하루 동안 한 모든 活動을 時間帶別로 적는다(낮잠, 食事 包含). 

    ? 어떤 活動인지 簡單하게 記入한 後 所要 時間을 記錄한다. 

    ? 活動 以後 體力 消耗 程度를 낮음에서 매우 높음의 5段階로 체크한다.이렇게 整理하면 活氣를 불어넣는 活動과 消耗시키는 活動을 區分할 수 있다. 

    ? 體力이 不足한 時間에는 일의 量과 强度를 줄인다. 反對로 에너지가 많이 必要한 일은 컨디션이 좋은 時間으로 配定한다. 

    조주희 三星暑鬱病院 敎授(癌敎育센터長)는 “癌生存者의 職場 復歸는 患者 個人의 努力만으로는 이뤄지기 어렵다. 各 企業 人事擔當者를 對象으로 한 認識 改善 敎育, 自營業 癌患者를 爲한 支援 시스템 마련 等 政策的 努力이 必要할 것”이라고 提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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