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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안 바뀐다? 變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 哲學”|新東亞

“사람은 안 바뀐다? 變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 哲學”

우리 모두의 오은영 博士

  • 정혜연 記者, 이슬아 記者

    grape06@donga.com, island@donga.com

    入力 2022-07-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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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陸統領’에서 全天候 멘토로

    • “受精卵부터 100歲까지 보는 精神과 專門醫”

    • 小兒 精神 健康 위해 몸 바친 30代

    • 마흔넷에 大腸癌 手術 뒤 人生 2幕

    • “다시 주신 健康, 더 좋은 일 하라는 뜻”

    • “慣用的 社會 爲해 한 방울 힘 보태고 싶어”

    오은영 박사. [김도균 객원기자]

    오은영 博士. [金度均 客員記者]

    굳이 答을 듣지 않아도 얼마나 바쁠지 斟酌이 갔다. 進行하는 放送만 4件, 來年 年末까지 잡혀 있는 相談 日程, 新刊 出版 準備, 유튜브 放送까지. 인터뷰를 要請하면서도 承諾이 어려우리란 豫感이 剛하게 스쳤다. 몇 番의 通話가 오간 끝에 인터뷰 날짜가 잡히자 施惠처럼 느껴진 것도 誇張이 아니다.

    精神健康醫學科(以下 精神科) 專門醫 오은영(57) 博士는 大韓民國의 가장 바쁜 사람 리스트에서도 上位圈에 이름 올라 있을 법한 人物이다. 最近 2年 사이 그의 位相은 過去와 사뭇 달라졌다. 2000年代 初盤 小兒·靑少年 精神科 專門醫로 EBS ‘60分 父母’, SBS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等에 出演해 10餘 年間 솔루션을 提示하고, 日刊紙에 칼럼을 쓸 當時엔 ‘育兒 멘토’의 이미지가 剛했다.

    2016年부터 放送을 접고 本人의 클리닉에서 相談에 集中하며 出刊에만 沒頭하던 그에게 새로운 機會가 찾아온 건 2020年 初였다. 채널A 製作陣의 提案을 받아 一般人 父母와 子女의 關係 相談 및 解決策을 提示하는 프로그램 ‘요즘 育兒 금쪽같은 내 새끼’ 出演을 決定했다. 5月 첫 放送 以後 2年이 지난 只今 그의 人氣는 신드롬에 가깝다.

    放送街에서 그를 찾는 프로그램의 對象 年齡帶도 漸次 擴大됐다. 最近 1年 사이 後續으로 생긴 채널A ‘오은영의 金쪽 相談所’, MBC ‘오은영 리포트?結婚地獄’, KBS ‘오케이? 오케이!’ 等 3件의 프로그램은 모두 成人을 對象으로 한다. 個人, 夫婦, 社會 構成員 모두의 苦悶에 귀 기울이는 吳 博士를 大衆은 이제 ‘國民 疏通 專門家’라 부른다.

    50番째 小兒·靑少年精神科 專門醫

    日程과 日程 사이 잠깐의 인터뷰 時間이 주어졌다. 7月 12日 午後 6時께 서울 江南에 자리한 그의 相談室에 約束 時刻보다 10餘 分 일찍 到着했다. 다섯 坪 남짓한 大氣 空間 밖으로 院長室 안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相談 中인가 했으나 職員은 “電話로 業務를 보시는 中”이라고 說明했다. 時間을 1分도 허투루 쓸 수 없을 만큼 바쁜 듯했다.



    오은영 博士는 放送에서 보던 微笑 그대로 取材陣을 맞았다. 院長室은 한쪽 壁面에 장난감과 人形으로 가득 찬 冊欌, 테이블을 中心으로 마주 놓인 커다란 소파 두 個를 除外하곤 특별할 것 없이 정갈한 空間이었다. 다만 2003年부터 運營된 곳이라기엔 어제 꾸민 듯 最新式인 點이 疑訝했다. 吳 博士는 “찾아오는 患者도 訪問客도 늘어 元來 運營하던 事務室 以外에 아래層에 空間을 하나 더 마련했다. 사람들이 좀 더 便하게 머물러줬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半달 눈웃음을 지었다.

    인터뷰 要請 契機는 6月 中旬 열린 현대自動車 講演이다. 800餘 名의 職員이 吳 博士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講演場에 몰려들었고, 370餘 事前 質問 가운데 5가지 主題를 두고 疏通했다. 鄭義宣 현대자동차그룹 會長도 2時間 남짓 이어진 講演을 처음부터 함께하며 마지막 質問까지 던졌다. 오은영 博士에게도 특별한 時間이 아니었을까.

    “마음 健康을 챙기는 基本 體系는 個人에서 出發한다. 個人이 個人을 챙기고, 父母가 子息을 챙기고, 子息이 父母를 챙기는 體系는 所得水準이 올라가면서 많은 變化가 있었다. 國家와 政府, 機關이 國民을 돌보는 體系도 이제는 形成이 됐다. 이番 講演을 통해 會社라는 組織이 職員을 나처럼, 家族처럼 對해야 會社도 發展한다는 걸 認知하는 水準까지 왔다는 걸 느꼈다. 職員을 生産性 높이는 道具로 對하지 않고, 無形의 價値를 尊重하는 社會的 變化가 느껴져 뿌듯했다. 鄭義宣 會長께서 自身도 金쪽이라고 하자 職員들이 웃으며 便하게 받아들이더라. 그런 變化에서 新鮮한 衝擊을 받았다.”

    小兒·靑少年은 勿論 나이와 性別을 떠나 社會 構成員 모두의 精神 健康을 다루는 全天候 精神科 專門醫로서 大衆的 人氣를 누리는 最近의 變化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大衆的 이미지가 바뀌었다는 걸 體感한다. 그런데 난 元來부터 精神과 醫師였다. 우리나라도 美國도 精神科 專門醫 資格을 取得한 다음 小兒·靑少年精神科 專門醫 過程을 더 밟을 수 있다. 一般 精神과 醫師는 18歲 以上 患者를 보지만 小兒·靑少年精神科 專門醫는 모든 年齡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스개로 ‘저는 受精卵부터 100歲까지 봅니다’라고 말한다. 小兒·靑少年精神科 專門으로 알려졌으나 20年 前부터 個人 相談에서 아이 比重이 6이라면 어른이 4 程度로 적지 않았다.”

    小兒·靑少年精神科 專門醫는 말하자면 資格證이 2個인 셈이다. 精神科 專門醫 資格을 얻고 나서 한 番 더 工夫해야 하니까 選擇하는 이가 적고, 修鍊을 하는 病院도 몇 군데 없다. 1年에 뽑는 數字도 1名 남짓이라 選好度도 떨어진다. 신촌세브란스病院 精神科 專攻醫를 거쳐 서울삼성병원 小兒·靑少年精神科 專任의 過程을 마친 오은영 博士의 小兒·靑少年精神科 專門醫 番號는 50番이다. 그는 “앞에 49名 가운데 年老하셔서 돌아가시거나 隱退한 분도 많고, 뒤로도 數가 많지 않다. 내가 잘나서라기보다는 專門醫 數가 적고, 2000年代 育兒 專門家로 放送에 出演한 것을 契機로 大衆이 ‘아이들 보는 先生님’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이 精神保健 事業에 靑春 바쳐

    한때 吳 博士는 兒童 心理相談士라는 誤解를 많이 받았다. 알고 보면 그는 어린이 精神 健康에 누구보다 眞心인 醫師다. 小兒·靑少年精神科 專門醫 課程 修了 直後 吳 博士는 서른두 살 때인 1996年 아주대 醫大 精神科 敎授로 採用됐다. 精神保健法이 制定된 지 1年, 精神的 도움이 必要한 이들을 위한 社會的 配慮와 움직임이 可視化되던 때였다. 吳 博士의 가슴 깊은 곳에서도 ‘어린이 精神保健 事業에 앞장서야겠다’는 불길이 치솟았다.

    “費用에 拘礙하지 않고 아이들이 도움 받을 수 있는 社會的 體系를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이 컸다. 아주대가 京畿道에 있으니까 ‘京畿道 精神保健 事業’이라는 게 처음 始作됐다. 當時 이인제 京畿道知事를 찾아가 ‘이런 거 하셔야 한다’고 說得했고, 어린이 精神保健 事業 推進을 맡게 됐다. 우리나라 最初였다.”

    시스템을 만들려면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吳 博士가 于先 始作한 일도 데이터 蒐集이다. 京畿道 烏山市 內 8個 初等學校 1學年 學生들의 精神 健康 및 行動 發達 事項 傳授調査를 始作했다. 擔任 및 學父母를 一一이 찾아가 設問紙를 돌렸고, 未盡한 部分은 個別的으로 家庭을 訪問해 直接 記錄했다. 收去率 98%. 그는 “이 데이터로 美國 學會에 가서 發表했더니 많은 敎授가 놀라워하며 캘리포니아에 와서 좀 해달라더라”며 웃었지만 相當히 고생스러운 作業이었을 듯했다.

    “烏山市장님이 保健所 안에 空間을 割愛해 주셨다. 어떨 때는 집에도 못가고 거기서 밤을 새며 일했다. 어느 날 ‘애들이 父母도 없이 市場판을 돌아다닌다’는 申告를 받고 看護師와 出動했는데, 그 집에 가보니 아이 넷이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맞아주던 記憶이 난다. 虐待는 아니었으나 도움이 必要한 아이들이었다. 그 時節을 생각하면 모든 게 追憶이다.”

    吳 博士가 敎授로 일하면서 政府의 保健事業에 個人 時間을 割愛해 自己 일처럼 뛰어든 건 그 일이 좋아서였다. 좋아서 한 일은 變化를 낳았다. 烏山市에서 出發한 該當 事業은 京畿道 全域으로 퍼졌다. 京畿 地域社會 精神保健 事業에는 반드시 어린이 精神健康센터가 들어가게끔 規定이 마련됐고, 以後 全國으로 擴大됐다.

    30代 血氣를 불태운 오은영 博士는 2003年 敎授를 그만두고 開園했다. 組織 안에서 力量을 發揮했으나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그는 當時 “내가 追求하는 價値를 나를 따르는 사람들과 더 나은 方向으로 이뤄나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每日 患者를 診療하는 일은 그 나름대로 價値가 있었다. 그러나 外向的인 吳 博士의 性向上 若干의 아쉬움이 가슴 한 便에 자리했다.

    그러던 次에 2005年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出演 提案이 왔다. 體罰과 强壓的 訓育이 蔓延하던 時節, 吳 博士는 올바른 訓育에 對한 가르침을 傳播하는 데 나섰다.

    “칸트는 ‘人間은 敎育받지 않으면 人間답지 않다’고 했다. 敎育은 ‘배움’을 뜻하는 것이고, 人間은 배워야 한다. 子女 敎育도 마찬가지다. 그 時節 父母들은 重要한 主題일수록 ‘따끔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소리를 지르고, 다그치며, 體罰했다. 大多數 父母가 아이를 버릇없게 키우지 않기 위한 最善策이라고 생각했다. 그 思考方式은 내가 꼭 바꾸고 싶었다.”

    善한 意圖로 行한 體罰일지라도 누군가에겐 平生의 傷處로 남는다. 吳 博士는 그 傷處가 한 사람의 人生에 至大한 影響을 미친다는 것을 數十 年 間 相談 現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는 “父母와 子女의 關係는 人間關係의 出發點이며, 아이를 理解하는 것은 人間을 理解하는 첫걸음”이라며 父母의 變化가 무엇보다 重要하다고 强調했다.

    “모든 人間關係는 協同, 協助하는 關係다. 屈服, 服從을 要求하는 關係여서는 안 된다. 父母와 子女뿐 아니라 國家와 國民도 마찬가지다. 무서워서 꼬리를 내리면 마음 안에 ‘抑鬱함’이 생긴다. 大韓民國 國民 안에는 抑鬱함이 너무 많다. 이것을 풀려면 變해야 한다. 間或 ‘사람은 안 바뀐다’는 反論도 提起하신다. ‘사람은 變할 수 있다’는 믿음은 나의 가장 重要한 哲學이기 때문에 希望을 가지고 일한다.”

    合理的 父母, 獨立的 아들

    只今 오은영 博士는 風采가 좋고 健康해 보이지만 어린 時節 32週 만에 1.9㎏의 未熟兒로 태어나 父母 걱정을 깨나 끼쳤다. 氣質도 까다로워 잘 울었고, 偏食이 甚해 다섯 가지 飮食 外엔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體軀도 작았고, 잦은 病치레로 小兒科 단골손님이었다. 그런 아이를 父母는 넉넉한 마음으로 키웠다. 딸의 明晳함을 알아본 아버지는 그 時節 富者집 아이들만 다니던 幼稚園에 딸을 입학시켜 배움에 눈뜨게 했고, 어머니는 生鮮 한 種類라도 먹기만 한다면 대여섯 가지로 料理해 食卓에 올렸다.

    “父母는 父母의 位置에서 아이에게 해줘야 하는 役割과 사랑이 있다고 늘 말씀드리는데, 그게 우리 父母님께 받은 影響이다. 아버지는 合理的인 분이셨고, 어머니는 사랑이 넘치셨다. 그러니 어릴 때 抑鬱한 일이 많지 않았다. 늘 堂堂했고, 청파동에서 南營洞까지 30分 距離를 幼稚園 때부터 씩씩하게 걸어 다녔다. 只今 92歲이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데 每日같이 이런저런 對話를 많이 나눈다.”

    合理的이고 사랑이 넘치는 父母 밑에서 자란 사람이니 自己 子息도 그렇게 키웠으리라.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오은영 博士와 子女의 關係’가 어떤지 물었다. 그는 “집에서는 허당 엄마”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들과 時間을 많이 보내진 못했다. 그러나 일을 싸들고 退勤하진 않았다. 집에서는 오로지 ‘엄마’의 役割에 忠實했는데, 또 그리 完璧한 엄마는 아니었다. 집에서 입는 옷에 구멍이 난 걸 보고는 아들이 ‘오 博士님이 집에서 이러고 사는 거 아무도 모를 거야’라고 하더라. 곁에서 아버지가 ‘너는 돈도 버는 애가 좀 사 입지 그러냐’라고 하셔서 같이 웃었다.”

    吳 博士는 子息을 키울 때 두 가지 原則은 꼭 지켰다. 때리지 않을 것, 노여워하지 말 것. 그렇다고 오냐오냐하며 키우지는 않았다. 問題가 생기면 對話로 풀었다. 20代가 된 아들이 가장 좋아하면서도 어려워하는 사람은 엄마 오은영이다. 그는 “TV에서 내가 말한 鐵則과 基準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自負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마음이 便하고, 周邊 사람과 두루 잘 지내는 어른으로 컸다”고 말했다.

    人生에 屈曲이라고는 없었을 것 같은 吳 博士에게도 試鍊은 있었다. 2008年 마흔넷에 膽囊癌 末期 判定을 받았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治療하면서도 自身의 健康은 돌보지 않던 時節, 어느 날 邊의 굵기가 가늘어져 異常함을 느꼈다.

    “그 무렵 江南 세브란스에서 同門들을 對象으로 健康檢診 프로모션을 했다. 맨 마지막에 腹部 超音波를 보는데 後輩가 ‘惡性 腫瘍 可能性이 93%’라더라. 사이즈가 크고 大腸癌 前이 可能性도 높아서 나흘 뒤 바로 手術이 잡혔다. ‘轉移됐을 境遇 길어야 3個月’이라는 말에 오히려 차분해지더라.”

    슬퍼할 겨를도 없이 診療를 봤다. 1~2年 前부터 豫約을 잡고 生業을 뒤로한 채 地方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 生의 마지막을 準備했다. 重要한 計座와 各種 證書를 男便에게 넘기고, 맡았던 일들의 뒤處理를 付託했다. 男便에게 “내가 죽으면 혼자 너무 아파하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 結婚하라”고도 말했다. 年老한 父母에게 直接 말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作別人事를 告했다. 마지막까지 그가 걱정한 사람은 아들이었다.

    “手術室로 들어가는 複道가 50m도 되지 않았는데 그 마지막 瞬間에 아들 얼굴이 둥근 해처럼 떠오르더라. 아들 이름을 목 놓아 부르짖으며 울었다. 일하느라 時間을 많이 보내지 못했던 것에 後悔가 밀려와 ‘한 달 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多幸히 膽囊癌처럼 보였던 그것은 콜레스테롤 폴립(龍種)이었고, 大腸癌은 初期라 手術이 잘 마무리됐다. 數年間 追跡檢査를 했고, 完治 判定을 받았다. 아직도 그때의 衝擊이 커서 大將 內視鏡 檢査 前에 마시는 물藥 通만 봐도 嘔吐 症勢를 일으킨다고. 차라리 3日 굶는 便을 擇할 程度로 그에게는 一生一大의 事件이었다.

    來日 눈뜨면 또 하루를 더 살자

    吳 博士는 自身이 다시 健康을 찾은 데는 어떤 理由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남은 삶은 더 좋은 일을 하라는 神의 뜻이 아닐까 싶었다. 元來 해오던 相談도 일 以上의 使命感을 갖게 됐고, 사람들의 마음도 더 깊이 理解하게 됐다.

    “治療받아야 하는 子息을 키우는 父母의 마음이 前보다 더 理解됐다. 어떤 모습이든 人間의 삶은 모두 所重하다. 末期癌 患者인 父母가 ‘아이한테 뭘 남겨야 될까요?’라고 물을 때면 ‘當場 오늘 하루를 더 삽시다’라고 말해 드린다. 우리는 모두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 以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來日 눈뜨면 또 하루를 더 살자’는 마음으로 每瞬間을 살아가면 된다.”

    모두가 ‘危機’라고 말하는 時代다. 2年餘 코로나19 팬데믹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傷處가 남았다. 生計와 家族, 健康과 關係를 잃은 사람이 넘친다. 苦痛을 딛고 일어나려는 때 글로벌 經濟危機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코로나19 再流行까지 번졌다. 吳 博士는 삶의 現場으로 찾아가 작은 英雄들의 삶과 마음 健康을 챙기는 放送 프로그램 KBS ‘오케이? 오케이!’를 7月부터 始作했다.

    “撮影車 廣長市場과 세브란스 癌病棟을 찾아갔다. 各自의 자리에서 에너지를 갖고 熱心히 살아가는 商人, 아픔을 겪는 入院 患者, 保護者들과 生活人으로서의 苦悶을 같이 얘기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나를 激勵하고 健康을 念慮해 주시더라. 그날 새벽 3時에 일어나 이튿날 새벽 2時까지 23時間을 일하는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내가 받은 사랑을 갚는 거라 생각한다.”

    現場에서 吳 博士는 自身을 向한 大衆의 따뜻한 視線에 고마움을 느꼈다. 廣長市場에서 30代 女性은 2時間 半을 기다려 山 꽈배기를 撮影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에게 傳했고, ‘똥 냄새 날까 봐’ 그의 곁에 쉽사리 가지 못하던 癌病棟 淸掃 아주머니는 欣快히 寫眞을 찍어준 그에게 뜨끈한 떡을 건넸다. 吳 博士는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돌아오는 길에 車에서 엄청 울었다”고 말했다.

    精神科 專門醫로 일한 지도 벌써 30餘 年이 흘렀다. 吳 博士가 精神과 醫師로서 살아生前 이루고 싶은 職業的 召命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人間도, 社會도 아프고 힘든 時期가 있지만 그걸 잘 겪어나가면 成長한다. 다만 그 方向이 좋은 쪽으로, 사람을 좀 더 理解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尊重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우리나라가 좀 더 受容的이고 慣用的인 個人과 社會를 形成해 나가는 데 한 방울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마지막 對答을 듣고 나니 2時間이 훌쩍 넘어갔다. 二分의 時間當 相談料가 얼마였더라. 그야말로 금쪽같은 時間을 運 좋게 내어 받았다. 始終一貫 웃음을 잃지 않고 말을 이어가던 그와의 時間으로 삶의 에너지가 다시금 充電된 氣分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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