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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中華料理 半世紀 산證人 ‘진진’ 왕육성입니다|신동아

韓國 中華料理 半世紀 산證人 ‘진진’ 왕육성입니다

먹는장사 基本은 ‘빗자루질’과 ‘웃음’… “장사꾼은 恒常 웃어야 해요”

  • 金賢美 記者

    khmzip@donga.com

    入力 2022-07-3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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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뭐 이런 中國집이 있어?”

    • “이렇게 맛있는 飮食이 왜 이렇게 싸요?”

    • 平生 20% 割引, 골목食堂 成功 祕密

    • 韓國 固有 ‘짜장면 한 그릇’ 文化

    • ‘서교동에서 世界로’ 오늘도 椿丈 볶는 ‘왕 師傅’



    서울 마포구 서교동 중식당 진진의 오너 셰프 왕육성 대표. [김도균 객원기자]

    서울 麻浦區 西橋洞 中食堂 津津의 오너 셰프 왕육성 代表. [金度均 客員記者]

    2014年 가을이 끝나갈 무렵 서울 麻浦區 잔다리로 123. 西橋洞이라는 地名이 더 익숙한 江北 住宅街 골목에 검정 바탕에 빨간 글씨로 ‘津津(진진)’이라는 看板이 걸렸다. 直前까지 오토바이 修理店이던 곳에 中古 테이블과 椅子 여덟 세트를 들여놓고 臨時로 食堂 門을 열었더니 지나가던 洞네 사람들이 기웃기웃하다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糖水肉 하나, 짜장 둘’ 注文을 해요. ‘罪悚합니다. 짜장면이 없습니다. 糖水肉은 안 합니다’라고 하니 ‘여기 中國집 아니오?’ ‘네, 맞습니다.’ ‘뭐 이런 中國집이 있어?’ 그러곤 나가버려요.”

    진진 代表 왕육성(68) 氏가 떠올리는 8年 前 風景이다. 호텔 中食堂 오너 셰프였던 그가 오가는 사람도 別로 안 보이는 으슥한 골목에 손바닥만 한 食堂을 열자 業界에서는 “왕육성이 亡했다”는 所聞이 돌고 있었다. 코리아나호텔 對象海 時節부터 王 代表의 弟子로 只今은 津津을 共同 經營하는 황진선(36) 셰프도 開業 初期 웃지 못할 場面을 떠올린다.

    “親舊 네 분이 술 한盞 마시다 是非가 붙었어요. 當場 테이블을 엎어버릴 氣勢로 싸워서 사고라도 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多幸히 計算은 잊지 않았기에 ‘맛있게 드셨어요?’라고 물었어요. 그때까지도 죽이네 마네 하던 아저씨들이 同時에 ‘飮食 眞짜 맛있네요’ ‘이렇게 맛있는 飮食이 왜 이렇게 싸요?’라고 되묻는 거예요.”



    골목食堂 津津은 ‘價性比’로 地域 住民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3年 뒤 世界的 레스토랑 評價서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別 하나를 받았다. 별 하나는 ‘差別化된 飮食으로 特別한 經驗을 膳賜하는 레스토랑’이라는 意味다. 2017年, 2018年, 2019年 3年 내리 별 하나, 2020年부터 ‘合理的 價格으로 훌륭한 飮食을 내는 食堂’이라는 意味의 ‘빕 舊르망’에 選定됐다.

    올해는 王 代表가 中食業界에 몸담은 지 50年이 되는 해다. 1972年 서울 성북구 장위동 大聖院에 ‘조바’(홀에서 잔심부름 하던 店員을 가리키는 日本語)로 就職해 廚房에서 飮食을 내오고 計算하고 틈틈이 鐵가방度 들던 少年은 어느새 ‘왕 쓰부(師父)’로 불리는 스타 셰프가 됐다. 最近엔 ‘진진, 왕육성입니다’(동아시아)라는 冊도 나왔다. 왕육성의 料理 人生은 곧 韓國 中華料理 半世紀의 記錄이다.

    固定觀念 깬 洞네서 즐기는 호텔 料理

    2013年 12月 31日 還甲을 코앞에 두고 왕육성 氏는 코리아나호텔 中食 레스토랑 對象海 門을 나섰다. 華僑學校를 中退하고 中食業界에 발을 들여놓은 지 40年, 對象해와 因緣을 맺은 지 28年 만이었다. 남들은 隱退를 생각할 때 그는 새로운 挑戰을 했다. 테이블 몇 個짜리 작은 食堂에서 洞네서 즐기는 호텔 料理를 해보기로 한 것. 權利金이 없는 자리에, 施設 投資를 많이 하지 않고, 廚房長 한 名과 補助 서너 名이 堪當할 수 있는 40~50席 規模라면 해볼 만했다. 施設에 들어갈 費用을 줄여 材料에 投資하고 職員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주면 호텔 못지않은 高級 料理와 서비스를 提供할 自身이 있었다.

    點心 장사는 하지 않고 午後 5時 가게 門을 열어 5時, 7時, 9時, 2時間 單位로 豫約을 받기로 했다. 메뉴는 작은 廚房에서 적은 人員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10가지를 嚴選했다. 살아 있는 우럭의 피를 빼서 冷藏 熟成시킨 後 통째로 쪄내 大파채·固守·生薑·간醬소스·紅고추와 함께 먹는 칭찡우럭, 獨特한 香과 아삭한 食感을 지닌 臺灣 菜蔬 카이란과 소고기 볶음, 다진 새우살을 食빵 사이에서 徐徐히 溫度를 높여가며 튀기는 멘보샤, 그리고 對게살볶음, 五享冷菜, 麻婆豆腐, 顚覆八寶菜, 마의상수, 御鄕가지, 소고기量상추쌈이 包含됐다.

    反面 짜장면, 짬뽕 같은 食事거리와 어느 中國집에나 있는 糖水肉과 洋張皮는 뺐다. 脆弱한 洞네 商圈에서 고만고만한 食堂들과 競爭하지 않겠다는 原則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테이블 위에서 간醬, 食醋, 고춧가루를 치우고 基本 贊에서 단무지, 洋파, 椿丈을 없앴다. 代身 호텔 中食堂처럼 字差異무침, 볶은 땅콩, 固守 세 가지를 내놓았다.

    料理가 부담스러워 망설이는 손님들을 안심시킨 것이 會員制였다. 3萬 원만 내면 津津의 平生會員으로 20% 割引을 받는다. 한두 番만 利用해도 加入費가 빠지니 費用을 의식하지 않고 料理를 즐기는 사람이 늘었다. 그만큼 食堂의 利益은 줄지만 代身 會員이 되면 再訪問 頻度가 높고 다른 食堂보다 價性比가 좋으니 더 많은 料理를 시켜 賣出이 늘었다. 門을 연 지 8年 만에 會員이 10萬 名 가까이 된다면 이처럼 成功한 마케팅이 또 있을까.

    “競爭하지 않겠다”는 장사의 神

    ‘서교동진향’에서 직접 웍을 돌리며 짜장면을 만드는 왕육성 대표. [김도균]

    ‘西橋洞辰向’에서 直接 웍을 돌리며 짜장면을 만드는 왕육성 代表. [金度均]

    營業을 始作한 지 두 달도 안 돼 津津은 連日 門前成市였다. 待機 줄이 길어지고 豫約 競爭이 熾烈해졌다. 마침 本店 건너便에 빈 가게가 나와 信管을 열었다.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 德分에 周邊 商圈도 彈力을 받았다.

    “信管을 열면서 點心도 할 計劃이었어요. 그런데 周邊 食堂 主人이 便紙를 보내 왔어요. 장사가 안 돼 걱정이니 自己네 가게를 引受하면 어떻겠냐는 內容이었죠. 아차 싶더라고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손님을 진진이 빼앗을 수는 없잖아요. 新官道 點心 장사는 안 하기로 했죠. 진진이 門을 열기 前까지 周邊에 고깃집과 국밥집 두 군데밖에 없었어요. 저희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이 待機 줄이 너무 길면 一旦 다른 食堂에 가서 수肉 한 접시 먹으며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니 나중에는 洞네에서 歡迎을 받았어요.”

    1年 뒤 弘大驛과 合井驛 사이 駐車場이 確保되고 大衆交通이 便利한 곳에 3號店 진진可燃을 열었다. 周邊 職場人을 겨냥해 點心 食事거리로 하얀 짬뽕을 메뉴에 넣은 것도 苦心 끝에 내린 決定이었다.

    “3號店 周邊에는 中食糖이 두 군데나 있었어요. 진진이 들어오면 다 죽는다고 했죠. 그래서 저희는 다른 집 메뉴에 없는 하얀 짬뽕을 냈어요. 빨간 짬뽕과 糖水肉을 願하는 손님에겐 저쪽 집으로 가시면 된다고 案內했어요.”

    그 무렵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連絡이 와서 資料를 要請했다. 登錄 與否는 審査해 봐야 알 수 있다고 했지만, 베이징이나 상하이도 아니고 서울의 洞네 中食堂에 關心을 가질 理由가 뭐 있겠나 싶어 잊어버렸다. 그런데 2016年 11月 7日 ‘미쉐린 가이드’ 서울 便 發刊 行事에 參席해 달라고 했다. 진진이 別 하나를 받았다는 것도 行事場에 가서야 알았다. 2020年 ‘빕 舊르망’으로 評價 等級이 한 段階 떨어졌을 때 섭섭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王 代表는 “오히려 마음이 便했다”고 했다.

    “별을 받을 때도 過分하다고 생각했어요. 진진이 格 있는 料理를 앞세웠지만 規模와 施設이 변변찮은데 왜 줬을까 싶었죠. 별 받은 食堂들을 보면 한 끼에 數十萬 원씩 하는 곳이잖아요. 一般人은 到底히 가볼 엄두가 나질 않죠. 진진 같은 洞네 食堂은 ‘빕 舊르망’이 딱 좋아요. 누구나 한番 가볼까 할 만큼 만만해야 하니까요.”

    별을 받고 나서 王 代表는 職員들에게 “괜히 우쭐할 일이 아니다. 化粧室 淸掃 한 番 더 하고, 끈적이는 테이블을 바꾸고, 基本을 지키자. 頂上을 오르기는 어렵지만 내려가는 길은 今方이다”라고 했다.

    王 代表는 只今도 每日 빗자루를 들고 나와 가게 앞을 淸掃한다. 비질은 그가 처음 社會生活을 하면서 배운 장사의 基本이었다. 1970年 12月 서울 연희동 華僑學校 4學年(高等學校 1學年) 1學期 期末考査를 앞두고 그는 學校를 그만뒀다. 朝會時間에 擔任先生님이 “月謝金 아직도 안 낸 놈 있지? 손들어 봐”라고 한 것이 發端이었다. 가난은 부끄럽지 않지만 數値는 참을 수 없었던 自尊心 剛한 少年은 無作定 寄宿舍를 나왔다. 어려운 살림에도 長男을 서울로 留學 보낸 어머니가 흘릴 눈물을 생각하니 到底히 家族이 있는 大田으로 갈 수 없었다. 代身 外三寸이 中國집 청평管을 運營하고 있는 忠州로 갔다. 정작 忠州에 到着한 뒤 食資材, 織物, 雜貨를 都賣로 取扱하는 영풍上廻 配達員으로 就職했다. 그때 華僑였던 主人 할아버지에게 第一 먼저 배운 것이 ‘비질’이고, 두 番째로 배운 것이 ‘웃음’이었다.

    “장사꾼은 恒常 웃어야 한다. 손님을 보면 無條件 먼저 한番 웃고 이야기를 始作해라. 그래야 내 말이 손님 귀에 들어간다.”

    진진 料理의 뿌리는 톈진

    “진진이 무슨 뜻인가요?”

    손님들이 한 番씩 하는 質問이다. 진진 두 글字에는 韓國 華僑의 歷史가 담겨 있다. 王 代表의 아버지 王俊乂(1913~1983) 氏의 故鄕은 中國 荒墟 下流로 톈진(天津)에서 가까웠다. 5兄弟의 막내였던 王俊乂 氏는 鑄物工場에서 일하다 1937年 中日戰爭이 터지자 仁川行 배에 올랐다. 돈을 벌면 中國에 남은 家族들에게 부치고 오가는 人便에 安否를 確認했으나 大陸에 共産 政權이 들어서고 6·25戰爭이 터지면서 消息이 끊겼다. 아버지는 끝내 故鄕 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津津의 첫 글字는 아버지의 故鄕 톈진에서 따왔다. 두 番째 晉은 只今 그가 살고 있는 漢江邊 麻布에 있던 옛 나루터 楊花津에서 따왔다. 西海를 사이에 두고 톈진과 楊花津이 이어지는 것을 떠올리면 津津은 韓國과 中國이 料理로 만나는 興味로운 空間이 된다.

    王 代表의 어머니 왕경령(89) 氏의 故鄕은 산둥省 무핑현으로 只今은 옌타이市에 編入됐다. 어머니는 1949年 家族과 함께 共産 政權을 避해 仁川에 왔지만 6·25戰爭이 터지자 또다시 避難民 身世가 됐다. 淸州에서 살던 아버지가 忠州로 避難 온 어머니를 만나 結婚했고, 다시 安東으로 移徙해서 왕육성이 태어났다. 왕육성이 영풍商會를 그만두고 다시 서울로 와서 1972年 中國집 大聖院에 就職한 것도 어머니 德分이었다. 大聖院 안主人이 어머니와 같은 洞네 出身이었다.

    1974年 봄 대관원으로 옮겼다. 가게는 鍾路3街와 水標橋 사이 관수동에 있었다. 鳴動, 소공동과 함께 서울 3代 차이나타운을 形成하던 관수동에는 한때 中國食堂 열댓 個가 몰려 있을 만큼 蕃盛했다.

    “韓國 經濟가 高度成長하던 時期라 海外 바이어가 많이 찾아왔고 그들을 接待할 곳이 必要했어요. 그中에서도 대관원은 長壽朱 廚房長을 비롯해 칼板牆 誤賠償, 面板牆 왕선명, 불판腸 진학부 等 傳說 같은 料理師들이 布陣해 있었죠. 먹는 事業이 有望하니 一流 食堂에서 高級 料理를 배우고 싶었어요. 대관원 왕서무 社長과 親分이 있는 外三寸에게 推薦書를 받아 들고 갔죠.”

    社長은 廚房長에게 “자리 하나 만들어주라”라고 指示했다. 그런데 조금 뒤 廚房長이 따로 부르더니 “只今 (廚房에 들어오려고) 5名이 줄 서 있어. 社長님이 指示했는데 안 된다고 할 수는 없고 一旦 홀에서 일하며 기다리면 넣어줄게”라고 해서 크게 失望했지만 “料理는 廚房에서 배우는 게 아니야. 홀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라는 말에 精神이 번쩍 났다.

    廚房 일은 설거지를 擔當하는 싸완 또는 솨완(?碗), 麵을 뽑고 饅頭를 빚는 面판, 食材料를 다듬고 써는 칼板, 材料를 볶고 튀기고 끓이는 불판으로 나뉜다. 불판이 廚房長이 되는 境遇가 많지만 그날그날 場을 보고 材料에 맞게 메뉴를 짜는 칼版이 그 役割을 하기도 한다. 왕육성은 廚房 살림을 맡는 칼판이 되고 싶었다.

    “冷藏庫가 없던 時節에는 材料 管理가 까다로워 가게의 興亡를 左右하는 게 칼板이었죠. 豫約 손님 狀況을 보고 날씨를 豫測해서 適當量의 材料를 確保하고 그날로 消盡해야 해요. 消盡하지 못하면 赤字가 나는 거죠.”

    목소리만 들어도 住所까지 記憶해

    그 時節 料理 師父들의 月給은 補助들에 비해 많게는 열 倍, 적어도 일고여덟 倍 差異가 났다. 新參들은 하나라도 더 빨리 배우려 했고 그럴수록 料理師들은 쉽게 技術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함부로 가르쳐줬다가 自己 자리가 威脅받을 뿐 아니라 설움과 受侮를 겪으며 배운 技術을 쉽게 넘겨주고 싶지 않은 心理도 作用했다. 왕육성은 迂廻 作戰을 썼다. 가장 먼저 出勤해 홀 淸掃와 손님 맞을 準備를 마치면 廚房에 들어가 材料를 다듬었다. 自己들이 할 일을 代身해 주니 未安했던지 칼板 先輩들이 슬쩍 칼질할 機會를 주곤 했다. 대관원 時節 홀에서 勤務하며 손님 모시는 法을 배웠고, 눈동냥으로 高級 料理를 익혔다. 料理法을 노트에 적고 그림으로 그렸다. 홀 勤務者가 2年 만에 中食調理士 資格證을 따자 대관원 職員들 모두 놀라워했다.

    “注文 電話가 오면 라조기, 난자완스, 깐풍기 받아 적고 끊어요. 금세 다시 電話가 와서 ‘住所를 얘기하지 않았는데 어딘지 알아요?’ 하고 물으면 ‘330-12番地, 師母님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요’라고 하죠.”

    단골의 목소리만 들어도 住所까지 記憶하는 홀 서빙 職員을 稱讚하지 않는 손님이 없었고 그 稱讚은 곧 社長의 귀에 들어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는 마케팅의 鬼才였다. 뚝섬 近處 性水原에서 일할 때 競馬場 안으로 짜장면 세트 메뉴를 만들어 配達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聖水洞에 새로 工場들이 생기면서 젊은 職員들이 늘어나자 그 會社의 總務課長을 說得해 工場 안으로 配達을 했다. 職員 名簿를 만들어놓고 各自 먹은 만큼 署名하면 俸給날 一括 收金하는 方式을 採擇했다.

    長位洞 大聖院, 뚝섬 性水原, 鍾路 대관원, 三星本館 海棠花, 大宇빌딩 紅寶石, 新村 만다린, 鳴動 사보이호텔 豪華臺斑點, 南山 다리원을 거쳐 1982年 봄 스물여덟 살의 왕육성은 플라자호텔 도원의 칼板腸이 됐다. 도원의 칼板長으로서 材料 需給과 管理, 메뉴 開發을 맡았다. 種種 靑瓦臺, 總理公館, 大企業 迎賓館으로 出張을 나갔다. 王 代表는 그 時節 “칼을 잡으면 時間을 잊고 집보다 廚房이 좋았다”고 말한다.

    低廉하면 더 시키고, 料理는 술을 부른다

    1985年 11月 태평로 코리아나호텔이 門을 열고 22層 食堂街에 中食堂 對象해가 자리 잡았다. 호텔 側은 홍콩 有名 中食堂의 料理師 세 名을 모셔왔다고 大大的인 弘報를 했지만 그 效果는 오래가지 않았다. 食堂 運營이 苦戰을 면치 못하자 도원의 部廚房長 왕육성에게 對象海 廚房長을 맡아달라는 提案이 왔다. 버린 장사를 살리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망설였지만 對象해의 帳簿를 열어보고 自信感을 얻었다. 이리저리 새는 費用을 막고 賣出을 늘리면 勝算이 있었다. 低廉하지만 高級스러운 코스料理를 만들었더니 입所聞이 나서 1年 만에 賣出이 10倍假量 뛰었다. 特級호텔에서 10萬 원 하는 料理를 原價 水準인 4萬 원에 냈다. 低廉하면 追加 注文이 이어진다. 料理는 술을 부른다.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1997年 호텔 側이 食堂街를 直營에서 賃貸로 轉換하면서 마흔셋의 왕육성은 廚房長에서 主人丈이 됐다. 中食界에 발을 디딘 지 25年 만에 오너 셰프가 됐지만 何必이면 金永三 政府 末期 金融危機가 찾아오고 企業들이 줄倒産을 하는 時期였다. 王 代表는 難關에 부딪힐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簡單한 料理 두세 가지가 나오는 비즈니스 코스를 開發해 職場人들이 負擔 없이 찾아오게 했고, 食資材 費用을 現金으로 支給해 더 좋은 物件을 더 低廉하게 供給받았다. 남들은 장사가 안 돼 門을 닫을 때 對象해의 收益은 오히려 늘어났다.

    2004年 週5日 勤務制 導入도 食堂엔 惡材 中의 惡材였다. 손님이 있든 없든 賃借料와 人件費는 繼續 나가기 때문에 週末에도 손님을 오게 할 方法을 찾아야 했다. 7萬2000원 호텔 코스 料理를 3萬6000원에 즐길 수 있는 週末 스페셜을 만들었더니 豫約 없이 온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大히트를 했다. 하지만 適當히 놀다 退勤하던 週末에도 손님이 몰려들자 職員들의 不滿이 커졌다. 설렁설렁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띄자 爆彈宣言을 했다. “다음 달부터 月給을 없애겠습니다.” 代身 賣出額에 聯動해서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했다. 아무도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장사가 더 잘되고 月給이 올라 모두 만족해했다.

    다시 짜장면에 꽂힌 까닭은

    暴雨가 쏟아지던 6月 마지막 날, 왕육성 代表는 西橋洞辰向에서 일찌감치 點心 장사를 마감하고 홀로 짜장면 소스를 硏究하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엔 짜장면처럼 기름氣 있는 飮食을 찾는 손님이 많아요. 1時 半쯤 오늘 準備한 材料가 消盡돼 門을 닫았어요.”

    西橋洞辰向은 진진, 진진可燃, 진진夜宴(深夜食堂)에 이어 네 番째 브랜드다. 그는 이곳을 짜장면 硏究所라고 부른다. 스스로 津津의 메뉴에서 빼버린 짜장면을 다시 硏究하게 된 契機는 박찬일 셰프가 쓴 冊 ‘짜장면-곱빼기 있어서 얼마나 多幸인가’(세미콜론)였다. 當時 박찬일 氏의 要請으로 오래前 記憶 속의 짜장면 레시피를 復元하면서 짜장면에 對한 一種의 責任感을 느꼈다고 한다.

    “1960~70年代의 記憶이야. 于先 칼板에서 넘어온 돼지고기를 받아요. 主로 다릿살이 많고, 비게도 섞여 있어. 情(깍뚝썰기)으로 썰어. 비게도 기름 뽑으려고 웍에 加熱하면 阿附라기라고, 기름이 뽑히고 난 纖維質이 있어요. 이게 아주 맛있어. 튀긴 건 다 맛있을 때니까, 이것도 짜장에 넣어요. 그때는 洋파가 비쌌어요. 철따라 무슨 材料든 다 썼지. 늙은 호박, 애호박, 무말랭이, 그것도 없으면 삶은 무를 넣기도 해요. 고구마, 감자, 洋배추度 많이 썼어요. 요새는 거의 四철 일정한 菜蔬가 있지만 그때는 제철에만 뭐가 나왔거든.”

    짜장면 硏究所의 最終 目標는 한番 먹으면 자꾸 생각나는 짜장면이다.

    “짜장면의 基本 材料는 長이죠. 예전처럼 張을 直接 製造하면 집집마다 짜장면 맛이 懸隔하게 差異가 날 거예요. 只今은 張을 市中에서 購入해 쓰기 때문에 出發點이 다 같아요. 그래서 된醬을 섞거나 고추醬을 넣거나 朝鮮간醬, 콩가루, 밀가루를 볶아서 넣기도 해요. 짜장이라는 用語가 腸을 기름에 튀긴다는 뜻이에요. 같은 張이라도 튀길 때 불의 溫度와 타이밍에 따라 맛이 달라져요. 짜장이 200度 기름에 들어가는 것과 180度에서 들어가는 것은 微細한 맛의 差異가 있지만 된醬 混合은 큰 差異를 가져오죠. 例를 들어 시골 막장을 넣으면 깊은 맛이 나요. 카레가루, 후추를 넣기도 하고요. 方法은 無窮無盡하니까 모두 試圖해 봐야죠. 每日 變化를 줄 수는 없지만 다달이 달라질 수는 있어요. 職員들끼리 試食하고 손님들에게 評價받고 또 바꿔요.”

    西橋洞辰向을 찾는 손님들은 올 때마다 다른 맛의 짜장면을 먹는 셈이다. 王 代表는 짜장면 하나로 ‘서교동에서 世界로’라는 큰 꿈을 꾸고 있다.

    “짜장면은 中國에서 왔지만 韓國式 짜장면을 選好하는 사람이 많아요. 一旦 中國 짜장면은 너무 짜요. 또 中國에는 ‘짜장면 한 그릇 文化’가 없어요. 고깃집에서 後食 冷麵 먹듯 料理 먹고 짜장면 한 젓가락 먹는 程度죠. 韓國처럼 짜장면, 짬뽕 한 그릇을 먹기 위해 中食堂에 가지는 않아요. 이렇게 硏究하다 보면 언젠가 西橋洞 짜장면이 世界的인 짜장면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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