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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爆彈을 맞았고, 깨진 破片에 나는 滿身瘡痍가 됐다”|신동아

“삶은 爆彈을 맞았고, 깨진 破片에 나는 滿身瘡痍가 됐다”

大法 ‘無罪’ 宣告 받은 박유하 世宗大 名譽敎授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3-11-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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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만난 박유하, 그리고 親日派라는 烙印

    • 全혀 豫想치 못한 大法院 宣告

    • 原告들은 사라지고 피고만 남은 裁判

    • 告發당한 건 冊 때문이 아니었다

    • 버팀木은 ‘틀리지 않았다’는 確信

    • “나는 胎生的으로 平和主義者”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지 8년 만인 10월 26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은 박유하 교수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그간의 심경을 담담하게 밝혔다. [지호영 기자]

    著書 ‘帝國의 慰安婦’에서 日本軍 慰安婦 被害者의 名譽를 毁損한 嫌疑로 起訴된 지 8年 만인 10月 26日 大法院으로부터 無罪判決을 받은 박유하 敎授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그間의 心境을 淡淡하게 밝혔다. [지호영 記者]

    박유하 敎授의 冊 ‘帝國의 慰安婦’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日本人을 통해서였다. 아사히신문 前 主筆이던 와카미야 요시浮靡였다.

    只今은 故人이 된 와카미야 前 主筆은 ‘東亞日報’ 客員 論說委員으로 定期 칼럼을 長期 連載하고 있었는데 2014年 7月 31日子 칼럼에서 ‘帝國의 慰安婦’가 韓國에서 名譽毁損으로 告訴된 消息을 ‘憂鬱한 뉴스’라고 안타까워하며 “朴 敎授를 右翼으로 부른다면 나도 右翼으로 부르라”라는 主張을 칼럼에 실었다.

    10年間의 苦痛, 그리고 無罪判決

    日本에서 右翼은 帝國主義 侵略을 認定하는 사람들이다. “獨島를 韓國에 讓步해 友情의 섬으로 하자”는 挑發的인(?) 主張을 아사히신문 칼럼에 실었던 와카미야 主筆은 日本 社會 內部에서 ‘賣國奴’ 攻擊까지 받았던 進步的 知識人으로 右翼과는 距離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朴 敎授가 右翼이라면 나도 右翼이라고 擁護하면서 그가 自身보다 훨씬 勇氣 있는 사람이라고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韓日關係에 關한 限 自由로운 主張을 펼치기가 韓國이 훨씬 좁다. 나는 이 冊으로 할머니들의 名譽가 損傷됐다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 다른 意見도 좋고 論爭은 奬勵해야 하지만 司法에 呼訴해 자유로운 言路를 막는 것은 韓國의 民主主義에 플러스가 아니다.”



    日本의 代表 進步 知識人의 擁護에도 不拘하고 朴 敎授는 1年 뒤인 2015年 檢察에 依해 結局 起訴되면서 學問의 自由를 둘러싼 뜨거운 論爭의 한복판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를 直接 만나 인터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즈음이었다.

    當時 인터뷰를 準備하며 關聯 記事들을 檢索하면서 나는 두 番 놀랐다. 于先 國內 言論들이 ‘帝國의 慰安婦’가 막 나온 2013年 8月 當時에는 8對 2 程度로 好評이 많았다는 것에 놀랐고, 두 番째 놀란 것은 朴 敎授와 冊이 困境에 處하자 辯護하는 記事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10년 전 출간된 ‘제국의 위안부’. [지호영 기자]

    10年 前 出刊된 ‘帝國의 慰安婦’. [지호영 記者]

    冊을 正讀하면서 平生 글을 써온 記者 立場에서 볼 때 慰安婦 할머니들에게 傷處를 주려거나 貶毁하려는 意圖가 보이지 않았다는 判斷이 들었다. 오히려 그동안 잊고 지내던 할머니들을 더 깊게 理解하고 解決策을 위한 眞摯한 苦悶을 하게 됐다.

    무엇보다 著者 主張에 同意하든 하지 않든, 學者의 硏究 結果와 主張에 學界 內部 評價가 아닌 法의 잣대를 들이민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朴 敎授를 直接 만나 두 時間餘에 걸쳐 對話를 나눴다. 그의 學者的 良心과 眞摯함, 韓日關係를 보는 眞情性에 共感하게 됐고, 그로부터 얻은 또 다른 冊 두 卷도 꼼꼼하게 읽고 난 뒤 2015年 12月 동아일보에 長文의 인터뷰 記事를 揭載했다. “學者의 良心에 法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內容의 칼럼도 실었다.

    以後 記者는 朴 敎授와 같은 배를 탄 同質感을 느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辱說과 함께 ‘親日 記者’ ‘慰安婦 할머니에게 傷處를 준 記者’에서부터 ‘告發하겠다’는 內容의 메일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感情을 앞세우기보다 理性과 論理를 앞세우는 목소리가 이렇게 罵倒되는가 싶어 錯雜했다. 새삼 朴 敎授가 處한 狀況이 理解되면서 憐憫의 感情까지 느낀 記憶이 있다.

    朴 敎授와의 만남은 인터뷰 以後로도 間間이 이어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긴 裁判 過程에서도 그는 차분함을 잃지 않았고 自身을 攻擊하는 사람들에 對한 非難이나 서운함을 말하기보다 도와주는 사람에 對한 고마움을 優先했다.

    3年 前 2020年 ‘尹美香 事態’가 터졌을 때도 나는 그의 立場을 듣는 인터뷰를 ‘신동아’에 실었다. 그때도 朴 敎授는 尹美香 事態가 불러올 自身의 裁判 結果에 對한 關心보다는 마지막까지 友情을 나누며 ‘나눔의 집’에서 나오고 싶어 했던 高(故) 배춘희 할머니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2審 敗訴 判決 後 無慮 5年 2個月餘가 흘렀다. 訟事를 經驗한 사람은 안다. “遲延된 裁判은 定義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法廷다툼 自體도 스트레스지만, 判決이 不知何歲月로 늘어지면 被告의 日常은 엉망진창이 된다. 解決해야 할 法廷 싸움이 늘 머릿속에 걸려 있을 때 當事者가 겪는 心的 苦痛은 크다.

    大法院 宣告에 큰 關心을 갖고 지켜보던 나는 아침에 날아든 無罪 決定 文字에 安堵의 마음이 들었다. 그로부터 一週日 뒤, 朴 敎授와 다시 마주 앉았다. 表情이 밝았다.

    有罪와 無罪, 모두 對備한 聲明書

    宣告를 앞두고 조마조마했겠어요.

    “當日 아침까지 緊張의 끈을 놓칠 수가 없었죠. 제 앞의 事件들 判決을 들으니 大部分 2023年 事件에 ‘棄却’이 많이 나오니까 氣分이 妙했어요. 저만 2017年 事件인 데다 나도 棄却 處理가 나면 어쩌나 하는 不安感이 들었어요. 前날 有罪가 나왔을 境遇와 無罪가 나왔을 境遇를 모두 對備한 聲明書를 準備했어요.
    有罪라고 생각하면서 쓰려고 하니 뭐라고 쓸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結果가 나와서 一旦은 安堵했습니다. 저 個人的으로도 勿論 기뻤지만 오랜 期間 저를 應援해 주신 분들에게 失望을 주지 않고 그분들의 名에를 지켜주었다는 것이 多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大法院 宣告가 全혀 豫想치 못한 時點에 갑자기 나왔다”고 했다.

    “이番 政府에서도 거의 抛棄 狀態였다고나 할까요. 2審 敗訴 後 大法 主審 判事가 只今의 盧貞姬 判事로 바뀌면서 5年 2個月이 흘렀습니다. 노 判事는 文在寅 大統領이 임명한 분인데 事實 저는 지난 政權에서 제대로 된 判決이 나오기를 바랐습니다.

    保守 政權으로 바뀌어 제게 友好的 判決이 나오면 ‘政權이 바뀌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거든요. 노 判事는 ‘李在明 無罪’를 宣告한 분이어서 제 判決에도 影響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어떻든 結果가 빨리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2審 敗訴 後 3年, 4年이 흐르면서부터는 어쩌면 文在寅 政府가 끝날 때까지 判決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政權이 바뀌어도 宣告 幾微가 보이지 않자 노 判事 任期가 來年에 끝나는데 二分 任期 內에도 判決을 내리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한便으로는 ‘有罪라고 判斷했으면 趁卽 結論을 냈을 텐데 안 내리고 있다는 것은 深思熟考하는 것 아닌가’ 等等 正말 생각이 많았지요.

    停年退任 前에 決定이 나오기를 바랐는데 이제 學校도 退任했고 이런 式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時間을 虛送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來年에는 美國에라도 가서 工夫할까 마음이 心亂했죠. 그런데 判決 1週日 前에 갑자기 宣告 날짜를 通報받았습니다. 普通은 한 달 前에 알려준다고 듣고 있었는데 이것도 너무 意外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태 判決을 미루던 大法院이 왜 그렇게 빨랐을까요.

    “저야 모르지요. 10月 末이면 2審 敗訴한 지 滿 6年째인데 6年은 넘길 수 없다는 判斷이 든 걸까요(웃음).”

    記者가 反弄談式으로 “裁判部가 그렇게까지 細心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자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엇보다 決定이 너무 늦어지면서 事件이 잊히는 게 걱정됐어요. 1人 示威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으니까요. 그러다 昨年 ‘法律新聞’에 이인복 前 大法官의 인터뷰 記事가 실렸는데 인터뷰하신 분이 내 事件을 물어봐 준 게 반가웠어요.

    더 고마웠던 것은 이 前 大法官이 ‘내 任期 中에 ‘帝國의 慰安婦’ 件이 案件으로 올라왔으면 했고, 萬若 올라왔다면 박유하 敎授는 無罪’라는 말을 하신 거예요. 아무리 前任이라고는 해도 大法 宣告 前인데 그런 意見을 밝힌다는 것 自體가 참 感謝했죠.

    제 立場에서는 裁判官들 안에 그런 雰圍氣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저도 얼마 後 法律新聞과 인터뷰했는데 結果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懇曲히 呼訴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갑작스러운 宣告 決定에) 影響을 미쳤을까요?”

    지난해에는 記者會見도 했지요.

    “事實은 學校를 위해서라도 退任 前에 宣告가 내려졌으면 했는데 그러지 않았지요. 退任이 코앞에 다가온 狀況에서 제 事件이 이대로 잊히는 게 싫어서 ‘只今 내가 싸우는 사람은 慰安婦 할머니가 아니라 支援 團體’라는 말을 했습니다.

    ‘帝國의 慰安婦’ 裁判이 아직 進行 中이라는 걸 世上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事件이 너무 오래前 일이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아예 內容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으니까요. 檢察 起訴로부터 따지면 8年, 告發받은 時點부터 거슬러 가자면 9年 4個月이 흘렀으니까요.”

    아직 남은 裁判들, 事實上 피고만 남아

    참으로 긴 時間인데요.

    “2014年 6月에 假處分, 民事, 刑事 告發을 한꺼번에 當했습니다. 이 中 첫 判決은 이듬해 2月 나온 假處分 裁判이었는데 冊 內容 中 34곳을 削除해야만 流通시킬 수 있다는 判決이 나와 그해 6月에 削除版을 내야 했습니다. 이듬해인 2016年 1月 民事에서 9000萬 원을 賠償하라는 判決이 나왔고 刑事에서는 1審에서 無罪가 나왔지만 곧 2審에서 有罪判決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면서 民事는 暫定 中斷됐고요.

    이番 大法 宣告가 나와도 끝난 게 아닌 것이 高法 判斷이 남아 있습니다. 2, 3個月 걸릴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期日을 받지 못했어요. 民事는 이番에 宣告가 내려진 날 바로 期日이 잡혔다고 連絡이 왔습니다. 11月 22日입니다.”

    民事의 原稿는 누군가요.

    “나눔의 집 慰安婦 할머니들입니다. 元來 아홉 분이셨는데 여섯 분이 돌아가시고 세 분이 生存해 계십니다. 이 中 두 분도 健康 問題로 外部에 나오지 못하는 狀態라고 들었습니다.

    只今 이 事件의 當事者는 저 혼자 남은 거나 다름없어요. 저를 告發한 나눔의 집 안신권 所長은 監獄에 있고, 정대협 尹美香 議員도 裁判 中이고 할머니들도 한두 分밖에 남아 계시지 않으니까요. 時間이 너무 오래 흘러버려 저 홀로 남겨진 裁判이 됐다는 自愧感에 사로잡혀 있다가 이番에 宣告를 받은 겁니다.”

    財産上 損害도 많았을 텐데요

    “辯護士 費用도 私費로 充當하고 있습니다. 1審 民事에서 지자마자 2016年 1月 給與 押留가 들어와서 두 달 給與 押留도 當했고요. 辯護士와 相議 끝에 4500萬 원을 法院에 供託을 맡긴 狀態입니다.”

    다른 목소리 불쾌해하던 사람들의 告發

    박유하 교수는 “고발 이후 10년에 이르는 시간을 보내며 송사에 에너지를 쓰느라 하고 싶은 연구를 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지호영 기자]

    박유하 敎授는 “告發 以後 10年에 이르는 時間을 보내며 訟事에 에너지를 쓰느라 하고 싶은 硏究를 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지호영 記者]

    平生 工夫만 하던 분이 너무 豫期치 않은 일에 휘말려 10年을 보냈네요.

    “人生이 아무리 豫測 不可能하다 해도 저의 50代 後半이 이렇게 흘러갈 줄 全혀 豫想하지 못했지요. ‘帝國의 慰安婦’ 冊을 낸 것이 2013年 8月인데 그때만 해도 많은 言論이 保守 進步 할 것 없이 注目했어요. 그로부터 10個月 뒤 告發을 當했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告發을 當한 것이 冊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요.

    “冊을 내고 나서 慰安婦 할머니들을 直接 만나러 다니고 심포지엄을 통해 나눔의 집이나 挺對協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할머니들 意見을 傳하려고 했던 것이 告發을 觸發했다고 생각해요. 收監 中인 나눔의 집 안 所長으로부터 直接 들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자꾸 이렇게 할머니들과 接觸하고 다른 목소리를 낸다면 法的으로 對應하겠다’는 말을 제게 直接 했으니까요. 그로부터 한 달 後에 正말 告訴狀이 날아왔습니다. 제가 나눔의 집을 가지 않고 심포지엄을 열지 않고 저와 마음을 나누던 배춘희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事態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告發當한 以後 삶을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참으로 힘든 時間이었습니다.

    “(暫時 沈默이 흐른 뒤) 友軍이 돼줄 것이라 믿었던 知識人들이 깊은 傷處를 주었어요. 어떻든 裁判이 始作됐으니 여기에 對應해야 하잖아요. 日常이 完全히 깨졌죠. 假處分 告發에 對應하느라 그해 여름放學을 고스란히 返納했어요. 李在明 代表는 ‘같은 하늘에서 못 사는 親日派’라고 페이스북에 銃칼을 들이대고…. 가장 險難했던 時期가 2015年까지였어요. 言論界, 學界에서 제 이야기를 들으려는 분은 極少數였으니까요.”

    檢察 調査는 當해보지 않은 사람은 想像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더구나 事實關係의 眞僞를 떠나 自救의 解釋을 둘러싸고 主張을 다투는 일이라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警察·檢察 調査, 裁判 過程은 正말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刑事裁判은 國家가 介入하는 일이라 무섭기도 했어요. 警察 調査는 세 番 불려갔는데 多幸히 警察官이 親切했고 ‘이런 일로 罰을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며 無罪로 結論을 올려서 걱정을 안 했어요.

    以後 檢察 調査가 2016年 1, 2月에 있었는데 40代 젊은 檢事 態度가 正말 威壓的이었어요. 제 옆에는 오랏줄로 묶인 犯罪者가 앉아 있고, 저는 搜査官으로부터 調査를 받는데 檢査가 저쪽에 앉아서 제가 抗辯하면 인터넷 記事 프린트物을 휙 던지면서 ‘이런 걸 알고나 있냐. 웬 딴소리냐’며 윽박지르는데 正말 慘澹하더군요. 그때가 한겨울이었는데 檢察廳舍 오가는 길이 얼마나 춥던지….

    그런데 擔當 檢事가 2個月 만에 또 바뀌어버려서 거의 모든 걸 다시 始作해야 했어요. 두 番째 檢事는 그래도 態度는 젠틀했지만 高壓的이긴 마찬가지였지요. 假處分 訴訟에서 指摘한 서른다섯 곳을 摘示하며 저를 마치 서른다섯 個의 犯罪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對했으니까요.

    每日 아침 10時부터 저녁 6, 7時까지 이어지는 裁判을 받다 보면 녹초가 됐지요. 그나마 1審 裁判官은 제게도 發言 機會를 주었고, 2017年 1月에 勝訴 判決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輿論은 全혀 바뀌지 않았어요. 保守 進步 할 것 없이 온갖 非難을 쏟아냈고 及其也 2017年 11月 2審에서는 敗訴하게 된 거죠. 그러는 過程에 學校 授業도 해가면서 裁判에 對備하느라 心身이 正말 弱해졌어요. 慰安婦에 關한 모든 硏究서, 資料를 다 읽으며 反駁 資料를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그 德分에 工夫도 많이 했습니다(웃음).”

    그는 裁判 過程에서도 巨大한 힘에 맞서 혼자 싸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學界까지 퍼진 ‘너 죽고 나 살자’

    “(相對 쪽) 辯護人은 저를 惡女로 取扱하는 感情的 發言을 쏟아내고 휠체어 탄 慰安婦 할머니들을 앞세워 心理的으로 威脅하기도 했어요. 2014年 여름에는 身邊의 威脅까지 느꼈습니다. 나눔의 집 사람들이 할머니들을 모시고 學校 正門으로 몰려와 ‘박유하를 罷免하라’고 示威를 두 番이나 했어요. 집으로 찾아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습니다. 밖에 나갈 때는 선글라스와 帽子를 쓰고 다닐 程度였으니까요.”

    2審 敗訴 後 大法院 宣告까지 5年餘가 흘렀는데 그동안 뭐 하고 지냈나요.

    “쉬어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世間의 非難에 제가 一一이 反應하지 않으면 ‘박유하가 自己 잘못을 認定하고 있다’고 罵倒하는 거였어요. 學問의 길을 걷는 분들이 저를 魔女 取扱하고 書評이라는 이름으로 제 뜻을 曲解하고 맹공하는 걸 보면서 絶望했습니다.

    特히 저야말로 페미니스트 學者인데 女性學者들까지 제 意圖를 誤解하고 攻擊하더군요. 結局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 法廷에서 겪은 일들을 冊으로 묶어내어 알리는 일에 注力했습니다. 그렇게 뭔가에 沒頭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나날의 連續이었죠. 지난 10年은 基本的으로 가라앉고 憂鬱 狀態라고 할까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던 그女 눈瞳子에 눈물이 맺혔다. 朴 敎授를 만난 以後 눈물을 보인 건 이番이 처음이었다. 記者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긴 沈默이 흐르고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表現은 쓰고 싶지 않지만, 한마디로 滿身瘡痍가 돼버린 것 같아요. 제 삶이 爆彈을 맞는 바람에 家族과 周邊 사람들에게도 破片이 튀어 日常이 깨진 일이 일어난 거니까요.”

    힘든 時間을 버틴 動力은 뭐였을까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確信이죠. 내가 信賴하는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믿음도 있었고요. 日本에서도 吳에 겐자부로 先生, 日本의 代表的 페미니스트 學者 우에노 지즈코 先生 等 正말 고마운 분이 많아요.”

    韓國 社會가 理念의 內戰 狀態라는 느낌이 드는데 親日이냐 反日이냐 하는 問題는 親北, 反北과는 또 다른 프레임인 것 같아요.

    “‘學問의 政治化’가 甚한 것 같아요. 言論도 그렇고 學問도 그렇고. 생각하고 말하기 前에 陣營에 不利한지 유리한지를 먼저 思考하면서 利害得失을 따지는 文化가 굳어졌어요.

    第 事件에 對해서는 保守조차 ‘이건 韓國에 不利한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文學하는 사람이어서 有不利를 따지기보다 民族이나 國家에 適用되는 加害者와 被害者라는 틀이 個人의 領域으로 들어가면 善惡을 알 수 없는 模糊함과 複雜함을 가졌다고 보는 사람이라 아주 少數의 사람들만이 理解해 주더군요.

    相對를 理解하기보다 處罰瑕疵, 告發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안타까워요. 各自 다 생각이 있으니 어느 程度 對話로 풀고 接點을 찾아야 하는데 ‘너 죽고 나 살자’ 雰圍氣가 너무 澎湃해요. 조금 論理가 飛躍일 수 있겠지만 저는 ‘低出産’도 社會 全般的으로 사랑의 에너지가 줄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봐요. 男女도 사랑하지 않고, 餘裕와 配慮의 에너지가 너무 낮아 社會 雰圍氣가 正말 刻薄해요. 그래도 이番 大法 裁判部가 저의 執筆 動機와 文章과 文脈의 意圖를 正確하게 理解해 줘서 기뻤습니다.”

    歷史 問題에서 被害者가 加害者가 되고 加害者가 被害者가 되는 複雜함을 主張하는 일이 危險한 主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나요.

    “全혀요. ‘帝國의 慰安婦’가 나오기 前에도 民族主義를 批判하는 主張을 해왔기 때문에 放心했는지도 모르죠(웃음). 저는 只今도 그렇지만 一貫되게 植民地主義, 帝國主義를 批判해 온 學者입니다.

    저는 胎生的으로 平和主義者이고 暴力을 싫어합니다. 告發이나 起訴는 暴力이었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周邊 사람이 被害를 보는 狀況을 보는 게 견디기 힘들었어요. 大法 宣告가 났지만 事實 제 名譽回復은 힘들지 않나요. 10年 前만 해도 韓國과 日本 學會에서 멀쩡하게 活動하던 學者였는데 只今 韓國 學會에서는 불러주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저의 關心 領域을 繼續 擴張해 나갈 것이었는데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 名譽는 散散조각이 난 거죠. 老年을 앞둔 60代 中盤을 빡세게 맞고 있습니다(웃음).”

    작은 體軀에 柔弱해 보이는 그女는 對話 中間에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어려운 瞬間을 지나오면서도 그것에 지지 않는 强靭한 內面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진 ‘威嚴’이 느껴졌다.

    光復 前後 朝鮮에 살던 日本人 硏究하고파

    이제부터는 硏究에 더 沒頭하셔야죠. 하고 싶은 테마가 있나요.

    “많지요. 告發당하기 前부터 植民地 時代 硏究, 그中에서 小테마로 光復 前後 朝鮮에 살고 있던 日本人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를 硏究하고 있었어요. 갑작스러운 光復으로 北韓에 살던 日本人 3萬 名이 餓死, 凍死, 傳染病으로 죽었는데 이건 팩트입니다. 蘇聯이 갑자기 38線을 막는 바람에 平壤, 元山에서 걸어오다가 죽은 사람도 많고요.

    當時 10代 少年으로 그 慘酷함을 經驗한 日本人 中에 後날 作家나 詩人이 된 사람들의 記錄이 남아 있어요. ‘歸還 文學’이라고 하죠. 이렇게 거친 歷史를 살았던 個人의 삶은 民族이라는 이름으로 加害者다, 被害者다 딱 規定할 수 없는 삶의 複雜함이 있습니다. 日帝 强占期에 徵用工으로 日本에서 살던 朝鮮人과 結婚한 뒤 光復 後 男便을 따라 건너온 日本人 女性들의 삶도 悲劇的인 境遇가 많아요. 이제 우리도 韓日關係를 이렇게 서로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共感과 配慮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餘裕가 생긴 거 아닐까요, 아직 이른가요?”

    記者는 선뜻 答을 내지 못했다. 우리 社會가 아직 얼마만큼 日本을 바라보는 視線에 열려 있는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朴 敎授는 2007年 國內 學者로는 처음으로 日本 內 내로라하는 知識人들이 審査하는 아사히新聞社 論壇賞을 받았는데 앞서 紹介한 와카미야 主筆도 審査委員 中 한 사람이었다. 와카미야 主筆은 몇 年 前 記者에게 直接 “日本에서 賞을 받으면 或如 朴 敎授가 親日派 烙印이 찍히지 않을까 걱정도 있었지만 冊 內容이 워낙 卓越해서 首相을 決定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實際로 日本人으로서는 처음 美國 歷史學會 會長을 지냈으며 日本의 過去事 侵略을 叱責해 온 이리에 아키라 하버드대 名譽敎授는 심사평에서 “學問的 水準이 높고 時事問題 解說書로도 均衡이 잡혀 있다. 게다가 읽기 쉬운 文章으로 쓰인 보기 드문 酬酌이다. (…) 이런 冊이 韓國과 日本에서 出版됐다는 것은 兩國 關係의 健全한 發展을 위해 기뻐해야 할 것”이라는 評을 내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記者는 그가 하루빨리 에너지를 얻어 韓日關係와 兩 國民을 더 깊이 理解하는 硏究 結果物을 내는 데 集中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學問의 自由를 擁護한 大法院의 決定에 拍手를 보내며 朴 敎授의 남은 삶도 이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心情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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