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동훈, 우상민’
尹錫悅 政府 첫 內閣에 布陣한 한동훈 法務部 長官과 李尙玟 行政安全部 長官을 壓縮的으로 表現한 말이다. 두 長官이 人體의 왼팔과 오른팔처럼 公權力의 象徵인 檢察과 警察을 맡아 國家元首이자 行政府 首班인 尹 大統領을 左右에서 補佐하고 있다는 意味다.
李尙玟 長官은 最近 열린 ‘全國 警察署長 會議’를 軍 內 私組織 하나회의 12?12쿠데타에 빗대 論難의 中心에 섰다. 李 長官은 25日 午前 브리핑에서 “警察은 物理力과 强制力, 甚至於 武器도 所持할 수 있다”며 “武裝할 수 있는 組織이 上部 指示를 違反해 任意로 모여 政府 施策을 反對하는 것은 대단히 危險하다”고 强調했다. 24日 午後 열린 ‘全國 警察署長 會議’를 正照準 한 것.
判事 出身으로 法曹 經歷이 豐富한 이 長官이 ‘쿠데타’를 입에 올린 것을 두고 法曹界에서는 ‘뜻밖이다’라는 反應이 많다. 李 長官을 잘 아는 한 法曹界 人士는 “合理的이고 鎭重한 性品의 李 長官이 쿠데타라는 强性 發言을 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行政安全部 내 警察局 新設에 反撥하는 警察의 組織的 反撥 움직임에 對해 尹 大統領이 ‘國家 紀綱의 問題’로 認識하고 있다는 點에서 이 長官이 主務長官으로 銃대를 메고 强力한 對應에 나섰다는 觀測이 나온다. 李 長官은 5月 13日 就任 直後부터 警察에 對한 民主的 統制 方案 마련에 나섰고 ‘警察局 新設’을 밀어붙여 貫徹시켰다.
李 長官은 尹 大統領의 冲岩高?서울法大 4年 後輩로 國會 人事聽聞會 때 “高校 同門會 자리에서 (尹 大統領을) 兄님으로 불렀다”고 言及할 만큼 大統領과 親分이 두텁다. 李 長官은 私席에서는 尹 大統領 夫人 김건희 女史에 對해 ‘兄嫂님’이라 부를 만큼 尹 大統領 夫婦와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 長官은 1986年 大學 4學年 때 師範試驗 28回에 合格했다. 1989年 2月 司法硏修院을 18期로 修了했다. 空軍 法務官을 거쳐 1992年 서울刑事地方法院 判事로 任官했다. 서울中央地方法院이 刑事地法과 民事地法으로 나뉘어져 있던 時節에는 判事 임관자 中 硏修院 成跡 首席이 서울民事地法, 次席이 서울刑事地法에 主로 配置됐다.
法院行政處 企劃調整室에서 法務擔當官과 企劃擔當官을 지냈고, 서울高法 指摘財産權專擔部 判事, 春川地法 原州支院長을 지냈다. 2005年부터 2007年까지 大法院 裁判硏究官을 지낸 뒤 法院을 떠나 法務法人 율촌에 2015年까지 몸담았다.
李 長官과 함께 大法院에서 勤務한 因緣이 있는 한 辯護士는 ”이상민 長官은 論理的으로 相對를 說得하는 能力이 뛰어났다“며 “鎭重하고 合理的 性品인데, 最近 剛한 發言을 쏟아내는 모습은 多少 意外”라고 말했다.
李 長官은 2012年 9月 새누리黨(現 國民의힘) 政治刷新特別委員會 幹事를 맡으며 政治權과 因緣을 맺었다. 2012年 大選에서 朴槿惠 大統領이 勝利한 後 第18代 大統領職引受委員會 政務分課 專門委員을 지냈다. 朴槿惠 政府 出帆 以後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諮問委員과 放送通信審議委員會 報道敎養放送特別委員會 委員을 거쳐 2015年 11月부터 2017年 12月까지 次官級인 國民權益委員會 副委員長으로 일했다.
文在寅 政府가 들어선 以後 이 長官이 當時 委員長을 맡고 있던 權益委 傘下 中央行政審判委員會를 法制處로 移管하려 하자 任期 1年 餘를 남겨 두고 辭表를 냈다. 當時 狀況을 잘 아는 한 人士는 “中央幸甚위가 政府 部處의 傘下 機構로 轉落하는 것을 막기 위해 辭表를 낸 것으로 안다”고 回顧했다.
權益委 副委員長에서 물러난 以後 法務法人 율촌으로 다시 돌아가 파트너 辯護士로 일했다. 20代 大選이 本格化한 以後부터 長官 任命 前까지는 양헌(現 金長利)으로 옮겨 代表를 맡았다.
李 長官은 2019年 7月부터 안대희 前 大法官이 出演해 設立한 社團法人 經濟社會硏究院 理事長을 지냈다. 경사연은 大選 當時 尹錫悅 大選候補 外郭 싱크탱크 구실을 했고 신범철 경사연 外交安保센터長이 尹錫悅 政府 初代 國防部 次官으로 任命됐다. 경사연 理事長을 지낸 李 長官은 尹錫悅 大統領 當選 以後 第20代 大統領職引受委員會 對外協力特別補佐官을 거쳐 行政安全部 長官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