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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兆 까먹으면 어떤가, 내가 責任지겠다”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新東亞

“1兆 까먹으면 어떤가, 내가 責任지겠다”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投資 안 하면 後輩들은 언제 1等 해 보겠노” 李健熙 勝負手 適中하다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7-0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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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分水嶺 된 16메가 D램 量産 라인

    • 世界 最初 12인치 工場 만든 事緣

    • 黃昌圭로부터 들은 다른 앵글의 證言

    • 投資 決定 못하는 狀況서 들은 叱咤

    • 진대제度 어떤 技術 유리할지 몰랐다

    2011년 9월 22일 이건희 회장이 경기 삼성전자 반도체 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임직원 대표로부터 16라인에서 생산된 ‘1호 반도체 웨이퍼’를 전달받고 있다. [삼성전자]

    2011年 9月 22日 李健熙 會長이 競技 三星電子 半導體 나노시티 火星캠퍼스에서 任職員 代表로부터 16라인에서 生産된 ‘1號 半導體 웨이퍼’를 傳達받고 있다. [삼성전자]

    生前의 李健熙 會長이 입버릇처럼 말했듯 “半導體는 徹底하게 타이밍 事業”이다. 말이 쉽지 타이밍을 計算할 때 넣어야 하는 變數가 너무 많다. 特히 半導體는 完製品(세트)李 아닌 部品이다. 半導體 自體 革新은 勿論 全 世界 完製品들의 現在와 그 完製品이 變化, 發展, 進化해나갈 未來까지 考慮해야 한다. 거의 ‘神의 境地’나 다름없는 判斷力을 要求하는 것이다.

    “가자” 한마디로 끝낸 李健熙 會長

    8인치 웨이퍼를 생산하는 기흥 5공장 준공식이 1993년 6월 열렸다. [삼성전자]

    8인치 웨이퍼를 生産하는 器興 5工場 竣工式이 1993年 6月 열렸다. [삼성전자]

    三星電子는 1993年 메모리 部門 賣出 世界 1位로 뛰어올랐다. 이 神話創造의 分水嶺이 된 契機는 8인치를 適用한 16메가 D램 量産 라인(5工場)이었다. 三星電子가 8인치에 뛰어든 1990年과 1991年, 世界 D램 市場에는 또 다시 不況이 닥쳤다. 6인치로 앞서 달리며 世界 先頭를 主導하던 日本 業體들도 投資 規模를 줄이고 新規 投資를 躊躇했다.

    當時만 해도 世界 標準은 6인치였다. 8인치의 境遇 도시바, NEC, 히타치도 파일럿(試驗 運用) 라인만 運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會長은 신경영이 한창이던 1993年 6月 D램 業界 最初로 8인치 量産 라인인 5工場을 竣工한다. 5工場은 月 2萬張의 8인치 웨이퍼로부터 16메가 D램 300萬 個를 生産할 수 있는 世界 最大 D램 生産라인이었다.

    李 會長의 勝負手는 的中했다. 1990年과 1991年 極甚한 不況을 겪던 市場은 인터넷 擴散으로 PC 烈風이 불면서 다시 好況 사이클로 急反轉됐다. 三星電子는 1994年 1兆6800億 원, 1995年 3兆5400億 원이라는 ‘檀君 以來 最大’ 利益을 낸다. 1995年의 境遇 메모리 半導體 利益만 2兆7000億 원에 達했다.

    李 會長의 攻擊 經營은 8인치에서 끝나지 않았다. 世界 最初로 12인치 工場을 짓게 된 것이다. 權五鉉 前 會長은 이렇게 말한다.



    “삼성전자가 1993年 처음으로 D램 1位에 올랐을 때만 해도 日本은 如前히 威脅的인 存在였습니다. 펀더멘털(經濟 基礎)李 剛하고 源泉 技術도 대단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日本과 달랐던 點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投資 타이밍이었습니다. 三星은 不況 때 好況 局面이 앞으로 오겠다고 내다보고 果敢하게 投資를 늘린 反面 日本 企業들은 好況일 때 投資에 나서 製品을 量産할 때쯤 되면 不況을 맞는 엇拍子를 繼續 演出했습니다.

    웨이퍼 크기를 6인치에서 8인치로, 8인치에서 12인치로 늘릴 때가 代表的이었습니다. 日本은 三星이 先導的으로 치고 나가면 6個月에서 1年 程度 있다가 쫓아왔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先發走者인 三星이 市場 大部分의 收益을 거둬간 後인 境遇가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면 누구나 그 타이밍을 알 것 같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지요.

    웨이퍼 인치를 늘리는 게 좋다는 건 다 알고 있지만 于先 投資額數가 너무 크고 또 새로운 生産 施設을 運營해본 經驗이 없기 때문에 다들 앞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르모트(實驗用 쥐)가 되는 건데 굳이 하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거든요. 남이 하는 거 보면서 뒤쫓아 가는 게 쉽지, 남보다 앞서 나가기는 어렵잖아요. 그런데 李健熙 會長은 앞서가려면 리스크 테이킹(危險 甘受)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責任은 내가 다 진다, 果敢하게 投資하라’고 決定하셨으니까요.

    特히 12인치의 境遇는 三星이 世界 처음으로 가게 된 겁니다. 다른 會社들도 생각은 하고 있었겠지만 그런 果敢한 決定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앞서 갔다가 여러 施行錯誤를 다 겪게 될 텐데 그렇게 危險한 選擇을 할 必要가 있을까요, 두 番째로 가는 게 安全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씀드리면 會長님은 ‘가자’ 이 한마디로 끝내셨습니다.”

    이番에는 三星電子 半導體 硏究所長을 지낸 이문용 前 副社長 말이다.

    “4인치, 5인치, 6인치, 8인치까지 갈 때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가장 큰 고비는 12인치로 갈 때(2001年)였습니다. 9·11 테러가 있던 해였고 美國 마이크론이 營業 損失率 24.8%를 記錄하는 等 大部分 業體들이 어려웠거든요.

    三星電子는 7.9%라는 營業利益率을 記錄하긴 했지만 12인치 決定은 李健熙 會長의 뚝심이 없었다면 不可能했습니다. 이듬해 大部分 메모리 半導體 業體들이 損失을 記錄했는데 三星電子는 30.8%라는 營業利益率을 記錄해서 12인치로의 決定이 옳았음을 立證했거든요. 8인치에서 12인치로 갈 때는 世界 처음이었고 워낙 크기가 커지는 것이어서 그야말로 工場 生態系를 다 바꿔야 하는 變化였습니다. 모든 設備를 다 바꿔야 했기 때문에 于先 裝備 業體들을 說得하고 이끄는 리더십부터 만만치 않았습니다.

    웨이퍼 工程이란 게 膜을 씌우고 酸化 處理를 하고 寫眞을 찍고 表面을 깎고 이온을 注入하고 다시 表面을 處理하는 8代 工程이 있지 않습니까. 引致를 늘리면 公正 分布, 緻密度, 均一도 等이 함께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失手가 있으면 바로 不良이 나와 버리지요. 內部 實務陣들로서도 굳이 이런 危險을 甘受할 必要가 없고 裝備 業體들로서도 왜 굳이?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自己들은 그런 挑戰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이들을 끌고 가는 리더십이 重要한데, 이럴 때 오너가 ‘1兆 까먹으면 어때, 내가 責任진다, 해 보자’ 하면 다 같이 突進하는 힘이 생기죠.”

    極甚한 닷컴不況에도 “12인치로 가자”

    무엇보다 대단했던 건 이 會長이 12인치로 가자고 했을 當時 市場 狀況은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極甚한 不況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때였다는 點이다. 정인성의 冊 ‘半導體 帝國의 未來’에는 그런 狀況이 잘 整理돼 있다.

    엘피다 로고. 일본 유일의 D램 반도체 회사였지만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2013년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인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엘피다]

    엘피다 로고. 日本 唯一의 D램 半導體 會社였지만 經營難을 이기지 못해 2013年 美國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引受되면서 歷史 속으로 사라졌다. [엘피다]

    2000年 10月 닷컴 버블이 崩壞하기 始作했고, 不況이 닥쳐왔다. D램市場은 겪어보지 못한 레벨의 市場 崩壞를 經驗하기 始作하였다. 버블이 絶頂일 때 64메가비트當 20달러였던 D램 價格은 2001年 2月 3.8달러까지 下落해 80%가 넘는 大暴落을 하게 된다. 2001年에는 9·11 테러라는 史上 初有의 事態까지 發生했다.

    이런 狀況에서 300㎜(12인치)로의 轉換은 相當한 冒險이었다. 一旦 數兆 원의 裝備가 投入되어야 했다. 그리고 한 番 稼動하면 絶對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確信이 必要했다. (…) 2001年 9月 몇몇 言論을 통해 財務的 壓迫에 시달리던 日本의 엘피다(NEC 히타치 미쓰비시가 세운 日本 唯一의 D램 半導體 會社. 經營難을 이기지 못해 2013年 美國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引受되면서 歷史 속으로 사라졌다)가 300㎜로의 轉換을 9個月 늦추겠다고 發表했다.

    本來 엘피다는 2001年 12月에 裝備 搬入을 始作해 2002年에 量産 體系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市場 狀況이 惡化되는 것을 보고 量産 日程을 늦추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正確히 한 달 뒤인 2001年 10月, 三星電子는 300㎜ 웨이퍼를 基盤으로 한 新型 120나노 基盤 D램 量産을 始作했음을 發表했다. 뿐만 아니라 이 D램의 칩 當 容量은 無慮 512메가비트로, 다른 會社들은 아직 開發조차 完了하지 못한 狀況이었다.

    삼성전자의 技術優位와 합쳐진 新型 工場은 그야말로 破壞的인 威力을 보여 주었다. D램 市場이 好況이었던 2000年에는 모든 會社가 或者였지만, 最惡의 不況이었던 2001年에는 삼성전자만 或者를 維持했다. 다른 會社들이 不況의 影響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던 2002年에는 30%臺 營業利益率로 獨走했다.


    日本 엘피다는 市場 狀況이 좋아지고 나서야 뒤늦게 300㎜ 레이스에 뛰어들었으나, 新型 300㎜ 工場은 2003年 1月에나 稼動될 수 있었다. 이미 三星電子는 2001年 末 以後부터 壓倒的 原價 및 物量을 통해 反騰한 메모리 價格의 利益을 누리며 體級을 더욱 키우고 技術을 開發한 뒤였다.

    2002年 엘피다의 營業利益率은 ?37.7% 程度였지만, 삼성전자의 營業利益率은 無慮 30.8%에 達했다. 三星電子가 300㎜로 轉換하지 않고, 엘피다가 했다면 이 갭은 相當히 좁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現實에서는 反對로 先頭 會社가 冒險을 하고 2等 會社가 安定을 追求한 셈이었다. 그 代價로 엘피다는 正말로 어려운 狀況에 處하게 되었다. 엘피다가 黑字 轉換하게 된 것은 2004年의 일이었다. 勿論 以後 다시 赤字가 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黃 社長, 當身은 1等도 해보았고…”

    黃昌圭 前 社長은 이 會長의 12인치 決定에 對해 다른 앵글의 證言을 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이 會長이 “後輩들을 위해 1等의 記憶을 全數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다.

    “三星 半導體의 成就는 李健熙 會長의 正確한 判斷과 全幅的인 支援을 礎石으로 삼았지만 이 會長의 리더십은 單純히 未來에 對한 慧眼이 豐富하다는 말로만 說明할 수 없는, 뭔가 더 있다고 봅니다.

    제가 겪은 代表的인 에피소드 하나가 바로 12인치 投資로의 果敢한 決定이었습니다. 2001年은 그야말로 ‘50年 情報通信(IT) 歷史 中 最惡의 해’로 불릴 程度로 한치 앞도 모르는 危機의 時期였습니다. 지난 몇 年間 最大 好況을 누렸는데 이제 赤字가 날 수도 있다는 危機感이 퍼지고 있었으니까요. 그 渦中에 제 어깨를 짓누르던 또 하나의 苦悶이 있었으니 이미 開發을 完了한 12인치(300㎜) 웨이퍼를 市場에 내놓을 것이냐에 對한 苦悶이었습니다.

    當時엔 8인치(200㎜)가 商用化되고 있었습니다. 한 番에 많은 製品을 찍어 單價를 낮춰야 하는 메모리 半導體 特性上 12인치는 8인치보다 競爭力이 相當했지만 初有의 不況이 닥친 狀況에서 兆 單位 投資를 하기에는 無理였으니까요.”

    그러던 그는 이 會長으로부터 電話를 받는다. 다시 黃 前 社長 말이다.

    “會長께서 ‘요즘 여러 가지로 어렵지? 硏究, 開發은 잘 進行되고 있는가’ 簡單한 人事말 뒤에 바로 다른 나라 12인치 開發 狀況에 對해 물으셨습니다.

    當時에는 지멘스가 獨逸 政府 도움을 받아 12인치 웨이퍼의 一部 量産 投資를 막 始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狀況을 말씀드리며 ‘獨逸이 우리보다 조금 앞서 投資가 일어날 것 같다’고 對答했습니다.

    會長님은 바로 우리 開發 狀況을 물으셨어요. 저는 梁山 準備는 거의 했는데 最惡의 不況 때문에 선뜻 投資를 決定하지 못하고 있는 狀況을 說明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强한 톤의 叱咤가 쏟아졌습니다.”

    어떤 叱咤였나요.

    “‘皇 社長, 當身은 只今까지 큰 目標를 向해 달려서 1等도 해보았고 그렇게 해서 只今 자리까지 온 거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머뭇거리고 投資를 안 하면 後輩들은 언제 1等 해 보겠노’라고 말하면서 本社 次元에서 積極 支援하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量産 投資에 對한 諸般 準備를 마치고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죠. 李 會長은 ‘서둘러야 할 것’이라면서 電話를 끊으셨습니다.”

    黃 前 社長은 “以後 祕書室과 電子 本社를 뛰어 다니며 ‘會長께서 指示했다, 내가 할 테니까 믿고 投資를 풀어 달라’고 해 12인치 웨이퍼 梁山에 拍車를 加할 수 있었다”고 回顧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그렇게 해서 2004年 12인치 웨이퍼 工場 라인이 京畿 華城에 지어져 稼動하게 됩니다. 會長님이 直接 오셔서 職員들과 食事도 하고 투어도 하셨습니다. 제 房 會議室까지 들어오셔서 ‘隘路事項 없나? 人材들은 잘 確保했고?’ 이러셨지요. 늘 그러셨듯이 恒常 ‘人材 具하라’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12인치 웨이퍼 投資 決定을 두고 言論에서는 ‘果敢하지만 危險한 投資’라는 批判 一色이었습니다. 結局 三星電子는 市場을 치고 나갔고 以後 ‘成功의 수레바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지난 20餘 年 동안 12인치 生産 라인은 華城 事業場(9個)을 始作으로 器興, 平澤, 美國 오스틴, 中國 試案까지 總 17個로 늘었습니다. 世界 最高 技術과 製造 生産能力을 갖춘 壓倒的 모습으로 韓國經濟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木이 된 거죠.”

    스택이냐 트랜齒냐

    이番에는 이 會長이 技術 追跡 過程에서 내렸던 두 番째 決定的 選擇, 스텍(stack)과 트렌치(trench) 方式에 對한 이야기를 해보자.

    半導體 産業社(史)를 보면 어떤 技術을 選擇했는지가 企業의 成敗를 결정짓는 境遇가 있다. 스택과 트렌치度 그 境遇다. 1989年이 되면서 D램의 크기가 4메가비트를 넘자 D램의 貯藏所 形態가 問題가 되기 始作했다. 以前까지 D램은 全部 하나의 平面 위에 트랜지스터와 D램 貯藏所를 함께 늘어놓는 方式이었다.
    1메가까지는 큰 問題가 없었다. 4메가부터는 集積度가 갑자기 올라가다 보니 손톱만한 칩 平面 위에 모두 늘어놓는 게 物理的으로 不可能해졌다. 密度를 높이려면 D램 貯藏所를 複層으로 해야 했다. 여기서 나온 게 스택 方式이냐, 트랜齒 方式이냐 하는 것이었다.

    建築도 그렇지만 칩도 複層으로 만들려면 위로 세울 수도 있고 地下層을 팔 수도 있다. 스택은 위로 쌓는 方式으로, 트렌치는 地下로 파고 들어가는 方式으로 셀 個數를 늘리는 것이다. 各各 長短點이 있었다. 트렌치가 安全하基는 했지만 公正이 까다로워 經濟性이 떨어졌고 무엇보다 回路가 보이지 않았다. 스택은 作業하기 쉽고 經濟的이었지만 品質이 不安定했다.

    長短點이 엇갈리다 보니 先發 業體들의 選擇도 나라別, 會社別로 갈렸다. 美國 會社들은 大部分 트렌치를 擇했다. 日本의 境遇 도시바와 NEC는 트렌치를 選擇했으며 히타치, 미쓰비시, 마쓰시다, 후지쯔는 스택을 採擇했다. 三星도 苦悶이 깊었다. 一旦 둘 다 해보기로 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美國팀이 트렌치, 韓國의 器興팀이 스택을 採擇해 進行했다.

    이 硏究의 한 가운데에 진대제 前 社長(전 情報通信部 長官)이 있다. 晉 前 社長은 美國 스탠퍼드대에서 博士學位를 받고 IBM 等에서 일한 後 실리콘밸리 三星半導體硏究所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트랜齒와 스택 두 가지 方式으로 4메가 硏究를 進行한다. 그의 말이다.

    “4메가 D램은 1메가 D램보다 集積度는 4倍로, 構造的으로는 2次元에서 3次元으로 가는 最初의 칩이었습니다. 이 過程에서 스택이냐 트렌치냐 하는 工程 方式은 어느 게 유리한지 當時로서는 全혀 알 수가 없었어요. 製品 安定性이나 經濟性 外에도 엔지니어들의 想像力과 根性, 甚至於 哲學까지 連結된 問題라 各 社에서 온갖 創意的 方法이 動員돼 다양하게 開發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美國 삼성연구소에서 4메가 D램을 開發할 때 2年餘 동안은 IBM에서 배운 트렌치 方式을 썼습니다. 1메가도 트랜齒 方式으로 해서 成功했기 때문에 4메가 工程도 그렇게 한 것이었지요. 1987年 9月 韓國으로 돌아와 器興 工場에서 勤務를 始作했는데 餘談이지만 當時 器興은 1工場, 2工場이 稼動되고 있었고 事務棟과 硏究棟만 덩그러니 서 있어 只今처럼 世界에서 가장 큰 半導體 團地의 威容과는 距離가 멀었습니다.

    어떻든, 鬐興에 와서는 스택 方式으로 設計를 바꿔보았습니다. 때마침 日本의 한 두 個 會社가 스택으로 바꾸고 있다는 情報가 들려와 어쩌면 스택이 더 有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技術者로서의 六感이 剛하게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晉 前 社長은 疑心에 疑心을 거듭하며 無謀한 挑戰에 뛰어들었고 結果는 大成功이었다. 다시 그의 말이다.

    “普通 設計를 바꾸려면 1年 程度는 족히 걸리는데 두 달 만에 바꾸는 强行軍이다 보니 技術者들이 엄청나게 苦生했습니다. 只今 생각해보면 正말 無謀하고 怯 없는 挑戰이었지요. 그런데 奇跡이 일어난 겁니다. 한 달 만에 스택 方式에서 4메가 動作 칩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前人未踏의 新天地에서 새로운 可能性을 發見한 興奮에 모두 萬歲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스택이 훨씬 쉽다!’는 結論을 얻었습니다.

    트렌치는 아래로 구멍을 뚫기 때문에 구멍 속을 들여다볼 수 없어서 問題가 생기면 거의 束手無策이었는데 스택은 外郭을 볼 수 있어서 다음 工程을 處理하는 데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두 番째 奇跡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1988年 1月 完全 動作 칩이 나온 겁니다. 開發 當事者였던 저희들 스스로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實際 狀況이었습니다.”

    自尊心 問題로 飛火

    이제 스택 方式을 採擇하면 되는 것인가. 그런데 豫期치 않은 狀況이 벌어졌다. ‘스택 方式 4메가 完全 動作 칩이 나왔다’는 消息을 傳해들은 美國 팀에서 ‘愼重하者’고 意見을 보내온 것이었다. ‘試製品 段階에서는 알 수 없으니 나중에 量産 段階에 가서 둘을 比較하자’며 美國팀은 트렌치 方式을 固守하겠다고 했다. 事實 美國팀의 判斷도 無理는 아니었다. 그만큼 各各의 長短點이 뚜렷했고 여기에 對해서는 누구도 섣불리 斷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問題는 時間이 別로 없었다는 點이었다. 當時 半導體 先發 業體 사이에서는 4메가 量産 競爭이 熾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도시바는 1985年 11月 試製品을 發表하면서 이미 工場을 着工한 狀態였고 1986年 開發을 끝낸 히타치와 美國 TI도 量産을 서둘렀다.

    三星도 하루 빨리 4메가를 開發해야 했다. 이 渦中에 公正 方式을 決定하지 않고 內部 論爭만 하는 건 時間을 消耗하는 것이었다. 時間이 흐르면서 스택과 트렌치는 어느새 器興팀과 美國팀의 自尊心과 生存이 걸린 問題로까지 飛火되고 있었다. 萬若 4메가 開發이 스택으로 決定될 境遇 美國 硏究所는 存在 理由까지 疑心받는 狀況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會社 생각은 안 하고 技術者들이 서로 我執을 부리고 있다는 뒷말까지 터져 나왔다. 드디어 李健熙 會長이 칼을 뽑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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