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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遺書代筆 疑惑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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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遺書代筆 造作事件 (姜基勳 遺書代筆 造作事件)은 노태우 政權 의 實情에 抗議하는 焚身이 잇따르는 가운데 1991年 5月 8日 當時 김기설 全國民族民主聯合 社會部長의 焚身自殺 事件에 對해 檢察이 김기설의 親舊였던 檀國大學校 化學과 在學生 강기훈이 김기설의 遺書를 代筆하고 自殺을 幇助했다는 嫌疑로 起訴해 處罰한 人權侵害 事件이다. [1]

韓國基督敎敎會協議會 人權委員會(委員長 박광재 牧師)는 1991年 8月 28日 焚身自殺한 김기설 遺書代筆 事件으로 起訴된 강기훈에 對한 1次公判에 앞서 “裁判部가 正義와 良心에 따른 공정한 裁判을 통해 강기훈의 無罪를 立證해 줄 것을 期待한다 ”는 聲明을 發表하면서 “檢察은 강기훈을 비롯한 在野團體의 道德性을 失墜시키고 自身들의 잘못을 隱蔽하기 위해 有罪判決을 끌어낼수 있도록 自殺幇助4 以外에 國家保安法 違反嫌疑를 追加 起訴하는 또 한番의 잘못을 저질렀다 우리는 陋名을 쓰고 있는 강기훈의 人權과 名譽回復을 위해 最善을 다할 것이다”고했다. [2]

하지만 이 事件은 刑法上 自殺 關與罪에 對한 大法院 判決 가운데 實際로 罪로 認定된 唯一한 判例였으며, 강기훈은 法院으로부터 目擊者 等 直接的인 證據도 없이 國科搜의 筆跡 鑑定結果와 情況에 따라 自殺幇助 및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懲役 3年에 資格停止 1年 6月을 宣告받고 1994年 8月 17日 滿期 出所했다.

하지만 事件 發生 16年 만인 2007年 11月 13日 大韓民國 眞實和解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는 第58次 全員委員會 會議에서 ‘강기훈 遺書代筆 疑惑事件’에 對한 眞實糾明 決定을 내리고 國家의 謝過와 再審 等의 措置를 取할 것을 勸告했다. [3]

이에 따라 2012年 大法院의 再審이 開始되었으며, 2014年 2月 13日 再審 判決에서 서울高等法院은 當時 檢察이 提示한 筆跡 感情이 信憑性이 없으며, 遺書 代筆 및 自殺 幇助에 對해 無罪로 재판결하면서, [4] 自殺幇助4와 같이 處罰받은 國家保安法 違反 部分에 對해서는 강기훈이 再審請求를 하지 않아서 國家保安法 違反 部分에 對해서만 따로 懲役 1年 資格停止 1年의 刑을 宣告하였다. [5] 이에 檢察이 判決에 不服하여 大法院에 上告하였고 2015年 5月14日 大法院은 檢察의 上告를 棄却하고 再審에서 강기훈의 無罪를 宣告한 原審을 確定했다. [6]

再審 公判이 열린 2014年 1月 16日 서울高等法院 法廷에서 강기훈은 最後陳述에서 "무엇을 어떻게 表現해야할지 누구에게 辱을 해야할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면서 이 事件의 責任者들이라고 하면서 ' 강신욱 , 신상규, 송명석, 남기춘 , 임철, 郭尙道 , 윤석만 , 박경순, 노원욱, 임대화 , 부구욱, 박만호 , 전재기 , 정구영 , 金淇春 '의 이름을 읊었다. [7]

時代 背景 [ 編輯 ]

1991年 노태우 政權 執權 後半期로 公安統治와 3黨 合黨 等 政治的 激變期였고, 水西地區 特惠分讓, 國會議員 賂物外遊, 大邱 洛東江 페놀 放流 等 各種 非理事件이 發生하던 中 강경대 致死事件이 發生하자 이를 契機로 4.27 汎國民對策會議가 結成되었고, 이 對策會議가 明洞聖堂 에서 完全히 撤收하는 6月 29日 까지 約 60餘日間 全國에서 集會와 示威가 일어나 國民들의 民主化 要求가 매우 높았다.

4月 3日 경원대 천세용, 4月 29日 全南大 박승희 , 5月 1日 安東大 김영균 , 5月 8日 김기설(金基卨) 等이 焚身, 投身, 疑問詞로 死亡하여 이 期間동안 모두 13名이 死亡하였다.

政權에 抗議하는 焚身이 連日 繼續되자 一部 言論에서는 運動圈 사이에 죽음을 讚美하는 小英雄主義 虛無主義的 雰圍氣가 集團 感染되듯 擴散되고 있다며, 金芝河 는 “죽음의 굿판 當場 걷어치워라”는 글을 發表하고, 예수회 神父인 서강대학교 朴弘 總長은 “只今 우리 社會에는 죽음을 煽動하는 어둠의 勢力이 있다”며 聖經위에 손을 올리고 記者會見을 벌이기도 했다. [3] [8]

예수회 薄紅 神父의 記者會見 以後부터 김기설 學生의 焚身 自殺에 背後가 있다는 報道가 言論에 塗褙질을 하기 始作했고, 강기훈(姜基勳) 전민련 總務部長의 이름이 登場했다. 檢察과 警察은 合同으로 搜査本部를 꾸려 大大的인 公安몰이 搜査를 벌여 "강기훈 氏가 金 氏의 遺書를 代身 썼다"며 姜 氏를 拘束起訴했다. [9]

事件 經過 [ 編輯 ]

김기설은 1991年 5月 8日 아침 8時 7分 警 서울 麻浦區 신수동 서강대학교 本館 5層 屋上에서 焚身 後 16.5 미터 아래로 投身하여 아침 8時 25分 頃 死亡하였다. 屋上에서는 “單純하게 變革 運動의 導火線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歷史의 里程標가 되고자 함은 더욱이 아닙니다……”로 始作되는 遺書 2張이 發見되었다.

檢察 은 강기훈을 遺書代筆者로 指目하여 國立科學搜査硏究所 의 筆跡鑑定 結果를 根據로 自殺幇助 嫌疑와 利敵團體 加入, 利敵 表現物 所持 等의 嫌疑로 起訴하여, 1992年 7月 24日 大法院에서 判決이 確定되었다. [3]

檢察 主張 [ 編輯 ]

當時 檢察은 강기훈이 全國民族民主運動聯合 에 함께 勤務하던 社會部長 김기설이 1991年 4月 26日 강경대 쇠파이프 致死事件 發生으로 在野 運動圈 및 反政府 鬪爭雰圍氣가 造成되자 民衆을 刺戟하여 高調된 半 政府 鬪爭雰圍氣를 더욱 擴散시키기 위하여 焚身自殺을 計劃한 것을 알고 김기설 名義의 遺書 2枚를 作成하여 焚身自殺을 幇助했다고 主張했다. [3]

裁判 參與 人物 [ 編輯 ]

裁判은 강기훈에게 有罪, 1審에서 懲役3年 資格停止 1年 6月이 宣告되어 3審에서 原審대로 確定되었으며, [10] 裁判에 參與한 人物은 다음과 같다. [11]

職責 參與者
法院 서울
脂肪
法院
部長判事 노원욱(1936年 平北 先天), 陪席判事 定日性(1958年), 이영대(1962年 서울)
서울
高等
法院
部長判事 임대화(1942年 忠南 대덕), 判事 윤석종(1954年 서울), 부구욱(1952年 釜山)
大法院 大法官 박우동(1934年 慶南 咸安), 大法官 김상원 (1933年 京畿 利川), 主審 大法官 박만호(1936年 慶北 義城), 大法官 윤영철 (1937年 全北 淳昌)
大檢察廳
(强力部)
總指揮 部長檢事 강신욱 (1944年 慶北 慶山), 主任檢事 신상규(1949年 江原道 鐵圓), 實務檢事 송명석(1956年 서울), 윤석만(1957年 忠南 大田)
辯護士 김창국 等 辯護人團 3 名

當時 法務部長官은 檢事 出身 金淇春 이었고, 그는 以後 朴槿惠 大統領의 祕書室長을 지냈다. 當時 搜査檢事는 강신욱, 신상규, 송명석, 안종택, 남기춘, 임철, 郭尙道, 윤석만, 박경순 檢査 等 9名이다. 안종택 檢事는 公安部 所屬 檢事로서 遺書代筆 部分 搜査에는 關與하지 않고, 警察에서 別途로 送致된 國家保安法 違反 事件만 追加 起訴하였다.

강신욱 當時 强力部長은 大法官을 지내고 2007年 박근혜 大選캠프에서 法律支援特報丹粧을 歷任했다. 신상규 檢事는 同德女大 理事長이고, 남기춘 檢事 亦是 박근혜 캠프에서 클린檢證 小委院長을 맡았고, 郭尙道 檢査는 박근혜 候補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國家未來硏究院 發起人에 參與했다. 朴槿惠政府 靑瓦臺 民政首席을 지낸후 現在 大韓法律救助公團 理事長을 맡고 있다. [12] 윤석만 檢査는 올해 大田地域에서 새누리당 豫備候補로 出馬했으며, 박근혜 候補를 支持하는 外郭 組織 大戰希望포럼 代表로 있다. 임철 檢事는 2008年 總選 當時 한나라당 候補로 나서기도 했다. [13]


裁判 結果 [ 編輯 ]

2015年 5月 14日 大法院 은 筆跡 鑑定人이 었던 김형영이 1991年 5月과 7月 두 次例 낸 鑑定書에서 姜氏가 檀國大 化學과 在學 時節 쓴 化學노트 筆跡道 遺書의 筆跡과 同一하다고 한 것도 信賴하지 않았다.

鑑定人이 2007年 眞實ㆍ和解를 위한 過去事整理委員會의 調査 當時 “化學노트의 境遇 遺書와 同一 筆跡의 特徵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웠고, 遺書와 單純하게 比較하면 相異한 點이 많았다”며 飜覆했기 때문이다. 大法院은 또 鑑定人이 혼자 筆跡 鑑定을 했으면서 國科搜 所屬 鑑定人 4名이 共同으로 遺書를 審議한 것처럼 法廷에서 僞證한 것도 鑑定 結果를 믿기 어려운 根據로 指摘했다.

裁判部는 그러면서 “檢事가 提出한 證據만으로 姜氏가 遺書를 代身 써 김기설氏의 自殺을 幇助했다는 公訴事實이 合理的 疑心 의 餘地가 없을 程度로 充分히 證明됐다고 볼 수 없다고 判示한 原審 判斷은 正當하다”며 檢察의 上告를 棄却했다.

그러나 大法院은 原審(서울高法)과 마찬가지로 感情 造作 與否나 遺書 作成者를 判斷하지 않은 채 事件을 마무리했다. 앞서 서울高法은 “姜氏와 김기설氏 筆跡 鑑定結果와 遺書 內容 等을 綜合할 때, 이 事件 遺書는 金氏가 直接 作成한 것일 可能性도 排除할 수 없다고 判斷된다”고만 言及했다.

姜氏가 24年 만에 陋名을 벗게 된 데는 김기설氏의 親舊가 2005年 警察廳 過去事委員會에 낸 金氏의 全大協 노트와 落書帳이 決定的이었다. 이를 土臺로 2007年 國科搜는 1991年 事件 때와 다른 結果를 내놓았고 이는 法廷에서 姜氏의 無罪로 連結됐다. [4]

疑惑 事項 [ 編輯 ]

강기훈은 檢察搜査 過程에서 밤샘調査를 받았고, 參考人도 强壓的으로 調査를 받는 等 拷問苛酷, 造作行爲 疑惑이 있고, 國科搜가 文書感情 處理規定 等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偏頗的인 筆跡鑑定을 했다는 疑惑이 있다. [3]

기타 [ 編輯 ]

1890年代 프랑스 에서 유대人 將校 드레퓌스가 筆跡 때문에 釋然찮게 反逆罪로 몰려 終身刑을 宣告받자 에밀 졸라 等 當代 知識人들이 擁護하고 나섰던 것과 比喩되어, 韓國판 드레퓌스 事件 으로 불렸다.

1992年 2月 11日 檢察이 有罪의 論據로 삼았던 筆跡 鑑定 責任者였던 國立科學搜査硏究所 김형영이 賂物을 받고 虛僞鑑定을 한 嫌疑로 拘束되었다.

2007年 11月 13日 眞實和解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再審 勸告로 2009年 9月 서울高法 은 再審請求를 받아들였고, 大法院 2012年 10月 19日 再審을 決定했다. 大法院 2015年 5月 14日에 강기훈 再審 無罪 確定 宣告했다. 姜氏는 다만 서울高法에서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에 對해서는 再審 對象이 아니라는 理由로 懲役 1年에 資格停止 1年을 別途로 宣告받았다

各州 [ 編輯 ]

  1. 이숙이. 강기훈과 그들의 24年 . 示唆IN. 2015年 5月 18日.
  2. [1]
  3. 政策弘報팀 (2007年 11月 13日). “강기훈 遺書代筆疑惑 事件 眞實糾明決定” . 眞實和解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2012年 4月 29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 大法, 國科搜 筆跡 感情에 虛點 認定… 感情 造作 可能性은 言及 안 해 韓國日報(4面4段, 2015.05.14) 記事 參照
  5. “遺書代筆 강기훈 24年 만에 無罪 確定” . 2024年 4月 20日에 確認함 .  
  6. “‘遺書代筆 事件’ 강기훈氏 無罪…大法院, 上告 棄却” (경향신문) . 2015年 5月14日에 確認함 .  
  7. [2]
  8. 全國民族民主遺家族協議會 拷問 박정기, 口述作家 송기역 (2012年 4月 5日). “靈安室서 김귀정 주검 지키며 警察 侵奪 맞서 / 박정기” . 한겨레 . 2012年 4月 29日에 確認함 .  
  9. “그들은 왜 遺書代筆事件을 만들었나?” (노컷뉴스) . 2015年 5月14日에 確認함 .  
  10. 大法院 1992. 7. 24. 宣告 92度1148 【自殺幇助,國家保安法違反】
  11. 전미숙 (1992年 9月). “강기훈을 有罪로 만든 判檢事들”. 《月刊말》 (75).  
  12. “無罪確定 '遺書代筆 事件' 搜査 檢事들은 '乘勝長驅 ' (聯合뉴스) . 2015年 5月14日에 確認함 .  
  13. 韓國판 ‘드레퓌스事件’ 檢事들이 왜 박근혜 캠프에… 미디어오늘 2012.9.1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