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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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年 1月 13日子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앙리 메예(Henri Meyer)의 '反逆者'. 1895年 1月 5日에 이루어진 드레퓌스의 解任式 現場을 그린 것이다.

드레퓌스 事件 (Dreyfus Affair)이란 보불戰爭 後 19世紀 後半 프랑스 를 휩쓸었던 軍國主義, 反유대主義, 强迫的인 愛國主義 때문에 抑鬱하게 獄살이를 한 프랑스 砲兵大尉 드레퓌스 의 間諜嫌疑를 놓고 프랑스 社會가 無罪를 主張하는 드레퓌스波와 有罪를 主張하는 反드레퓌스波로 兩分되어 激烈하게 鬪爭했던 政治的인 스캔들로서, [1] 國家權力에 依해 恣行된 代表的인 人權蹂躪, 間諜 造作事件을 말한다.

社會正義 實現과 眞實糾明을 위해 再審을 要求했던 드레퓌스派(再審要求派)는 進步, 左派, 공화파, 社會主義者들이었고, 反드레퓌스파는 再審을 反對하였으며 國試, 軍隊의 名譽, 國益을 위해서라면 判決이 飜覆될 수 없음을 主張했고 軍部와 로마가톨릭교회, 王黨派들이 主流를 이루었다. 본 事件은 블랑제 事件, 파나마運河 스캔들과 함께 프랑스 第3共和國을 뒤흔든 3代 事件 中 가장 큰 危機를 겪게 만든 政治的 事件이라는 評價가 있다. [2] [3]

이 事件은 1894年에 參謀本部에서 勤務하던 드레퓌스 大尉의 筆體가 프랑스 情報要員이 파리駐在 獨逸 大使館에서 빼돌린 文書(明細書)의 筆體와 비슷하다는 理由만으로 逮捕되어 終身刑을 宣告받고 외딴섬에 流配되면서 始作되었다. [4] 證據, 犯行 動機, 犯行 方法과 時機 等이 明確지 않은 狀態에서 無理하게 起訴되었으며 實質的으로는 유대人이라는 理由가 드레퓌스를 眞犯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家族의 救命運動과 少數 知性人들의 努力으로 1897年 眞犯이 拘束되었으나, 明白한 證據가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軍部는 信賴 墜落을 理由로 事件을 隱蔽하고 證據를 造作한 後 眞犯을 풀어주었다. [5]

이런 事實에 激怒한 프랑스의 大文豪 에밀 졸라 가 "나는 告發한다"라는 글을 1898年 1月 新聞에 揭載하여 軍部의 不道德性을 大衆에게 告發하며 眞實을 알렸다. [6] 이 글은 可히 暴發的인 影響力을 發揮하며 大衆을 憤怒하게 만들었고, 프랑스 社會는 本格的으로 드레퓌스派(再審派)와 反드레퓌스派(再審反對派)로 나뉘어 內戰 水準에 準할 程度로 激烈하게 鬪爭하였다. 示威, 暴動, 決鬪, 테러, 頻繁한 暴力事態와 流血衝突이 벌어졌고, 家族 間에도 이 問題로 인하여 甚하게 다투는 일이 茶飯事로 벌어졌다. [7] 政治的인 爭點으로 飛火되었고 國際社會도 이 일에 關心을 가지게 되었다. 結局 多少間에 迂餘曲折을 겪기는 했으나 1906年에 再審을 통해 無辜함이 立證되며 事件이 終結되었다.

이 事件으로 軍部는 改革이 進行되었으며 王政復古를 期待하던 王黨派의 勢力은 사라지고 共和政이 安着되어갔다. 또한 事件 以後 執權限 공화파 勢力은 매우 嚴格한 水準의 政敎分離 政策을 果敢하게 實施하여 公的 領域에서 로마가톨릭의 影響力을 徹底하게 排除시키며 敎會를 膺懲하였다. [8] [9] 이는 프랑스의 가톨릭교회가 드레퓌스 事件 中에 眞實을 外面한 채 거짓을 擁護하고 反유대主義 煽動에 앞장서며 共和制를 反對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프랑스式의 政敎分離人 라이시테 原則이 樹立되었으며 더 나아가 드레퓌스 支持派들의 理念과 戰略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全域에서 班敎權主義 運動의 모델이 되었다.

한便, 파리에 主宰하며 이 事件을 지켜본 유대系 오스트리아 言論인 테오도르 헤르츨 팔레스타인 에 유대人 國家를 建國하겠다는 시오니즘 運動을 本格的으로 始作하게 되었다. [10] 그의 主導로 1897年 스위스 바젤에서 第1次 시오니스트 大會가 開催되었으며 시오니스트 機構와 組織을 組織하였다. 시오니스트 會議는 以後 1901年까지 5次例 開催되었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1904年에 死亡한다. 이러한 그의 行動은 1948年 이스라엘 建國, 이스라엘-팔레스타인 紛爭의 씨앗이 된다.

에밀 졸라를 비롯한 少數의 정의로운 知識人들의 勇氣 있는 活動으로 인해 知識人의 이미지가 좀 더 肯定的으로 變化하였다. 旣存의 傳統的인 知識人이란 單純히 知識과 情報를 傳達하는 엘리트 知性人 階層이었으나 드레퓌스 事件 以後에는 社會的 理想을 實現하기 위해 社會 問題에 對해 積極的으로 앞장서며 參與하는 階層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지게 된 것이다.

事件의 展開 [ 編輯 ]

프랑스 防諜部隊가 入手한 文書(1894.10.13. 撮影)

보불戰爭(1870~71) 에 悽慘하게 敗北한 프랑스에서는 愛國主義와 反獨逸 感情이 나날이 높아져갔고, 前 유럽은 民族主義로 因해 反유대主義 가 澎湃해 있었다. 이런 狀況에서 1894年 9月, 프랑스 情報局 要員이 파리의 獨逸大使館에서 몰래 빼내온 文書(편지) [11] 를 통해 프랑스軍 內部에 軍事機密을 獨逸로 流出시키는 間諜行爲者가 있다는 事實이 알려지게 되었다. [12] 搜査가 進行되던 中 參謀本部에서 勤務하는 陸軍 砲兵大尉 알프레드 드레퓌스 가 筆跡이 비슷하다는 理由로 犯人으로 指目되었다. [13] 그는 유대人이고, 또한 그 當時 프랑스 사람들의 反獨逸 感情의 對象이었던 獨逸系라는 것이 그의 嫌疑를 짙어지게 만들었고 裁判 에 回附되었다. [14]

1894年 12月, 드레퓌스 反逆罪 로 有罪 判決을 받은 後 終身刑 과 恥辱的인 軍的 剝奪式을 宣告받았다. [15] 그는 軍的 剝奪式場에서 끝까지 自身의 無罪를 외쳤지만 "猶太人을 죽여라"라는 群衆들의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는 强制로 不名譽 轉役한 뒤, 1895年 2月 21日 프랑스領 기아나 惡魔섬 으로 流配 當한다. [16] 事實 裁判 過程에서 署名 과 自身의 글씨體 가 다르다는 異議 가 있었으나, 被告 가 글씨體를 바꾸어 썼다는 말도 안 되는 根據 를 내세워 默殺 하였다. 實際 自身의 글씨體를 바꾸어 쓰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事件의 顚末 [ 編輯 ]

一部에서 드레퓌스에 對해서 無罪 主張이 있었으나, 그 當時 澎湃했던 愛國主義, 反유대主義, 反獨逸主義에 依해 가볍게 默殺되었다. 드레퓌스는 不足한 證據 資料에 기초해 有罪 判決을 받았으며 事實 드레퓌스는 無罪였다(발견된 情報 流出 文件에서 發見된 暗號名 'D'에 따라 유태系 將校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그 이름의 첫글字가 暗號와 一致한다는 理由로 間諜으로 指目됐다). 유대人에 對한 偏見이 드레퓌스를 間諜 으로 몰아간 것이다. 當時 高級 將校들은 그들의 失手를 덮으려고 事實을 隱蔽했으며, 反紐帶的人 가톨릭교회 保守主義 言論 들도 드레퓌스 事件을 針小棒大하여 유대人 들을 非難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自身의 無罪를 외치며 抑鬱함을 呼訴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2年 뒤 1896年 3月, 조르주 피카르 中領이 우연한 機會에 眞犯인 에스테라地 少領을 摘發하게 되었다. [17] 그는 參謀本部 情報局에서 일하면서 또 다른 間諜事件을 調査하는 過程에서 드레퓌스는 無罪이며, 眞犯은 에스테라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그는 參謀本部 上部에 이 事實을 알리며 드레퓌스의 無罪를 主張했다. 하지만 1898年 1月 10日에 열린 裁判에서 眞犯 에스테라地 少領은 無罪로 풀려난다. [18] [19]

그때 證據資料를 몰래 複寫해서 실어 낸 어느 한 新聞에 依해 드레퓌스 事件이 世上에 公開된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相對는 眞犯인 에스테라地 本人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놓고 다녔고, 놀랍게도 參謀本部는 그의 거짓말을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事實이 알려지자, 軍事 法廷은 많은 非難을 받았고, 一部 사람들은 피카르 와 드레퓌스의 無罪를 主張하였다.

反유대主義 [ 編輯 ]

드레퓌스 事件이 벌어지기 前, 프랑스를 비롯한 全 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煽動으로 反유대主義 가 氣勝을 부렸다. 가톨릭교회는 《라 크루優雅》, 《라 리브르 파롤》, 《랭트랑支障》 같은 가톨릭 系列 新聞들을 통해 "유대人은 프랑스의 敵이다. 買占賣惜한다. 神을 殺害한 民族이다. 그들은 詛呪받았고 우리는 基督敎人이다"며 反유대主義를 助長했다. 이 反유대主義는 民族主義, 國粹主義와 結合하여 온 프랑스를 휩쓸었다. 드레퓌스 事件은 이런 反유대主義가 만들어낸 政治的 醜聞이라 할 수 있다. 드레퓌스가 逮捕된 事實을 맨 처음 特種으로 報道한 新聞도 바로 《라 리브르 파롤》이다. 《라 리브르 파롤》은 1894年 11月 19日 "大逆罪, 유대人 將校 逮捕"라는 題目으로 드레퓌스 事件을 最初로 報道했고, 이 報道로 프랑스는 極度의 葛藤과 分裂 樣相에 빠지게 된다. [20]

나는 告發한다 [ 編輯 ]

輅路르지 실린 에밀 졸라의 檄文 '나는 告發한다'.

作家 에밀 졸라 1898年 1月 13日 新聞 輅路르( L'Aurore , 餘名)에 〈 나는 告發한다! 〉('J'accuse!')라는 題目으로 大統領 펠릭스 포르 (Felix Faure)에게 보내는 有名한 公開 便紙를 寄稿함으로써 波長이 擴大되었다. [21] 에밀 졸라는 軍法會議를 中傷謀略했다는 理由로 懲役 1年을 宣告받고 抗訴 中에 英國으로 亡命했다가 1899年에 歸國한다. 歷史學者 바브라 투흐만 은 이를 한마디로 '歷史上 偉大한 騷動'의 하나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여러 知識人과 新聞社 르 피가로 等이 에스테라地 犯人說을 主張했지만 大部分 言論들은 反유대主義 感情 때문에 '드레퓌스는 죽어라'는 等의 暴言을 일삼았다.

드레퓌스가 惡魔섬 에서 流配되어 있는 동안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無罪를 主張하는 드레퓌스波와 그렇지 않은 反유대主義를 主張하는 半(反)드레퓌스波로 完全히 兩分되었다. [22] 유대人들은 間諜으로 몰리기까지 하자 테오도르 헤르츨 을 中心으로 하나님이 約束했다는 '約束의 땅'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을 建國하겠다는 시오니즘 運動을 始作한다.

드레퓌스 再審 [ 編輯 ]

에밀 졸라 를 비롯하여 아나톨 프랑스 , 앙리 푸앵카레, 張 조레스 等의 수많은 進步的인 知識人들이 프랑스 軍部와 政府에 對해 剛하게 批判하였으며 全 世界 言論들도 이에 同調하자 프랑스 政府는 外交的인 負擔이 加重되었다. 1898年 8月 31日 眞犯인 에스테라紙와 함께 文書를 造作한 앙리 中領이 監房에서 自殺하였다. [23] 1899年 6月 3日 高等法院이 再審을 進行할 것을 決定했고, 6月 10日에 드레퓌스는 流配地인 惡魔섬을 떠날 수 있었다. [24] 드레퓌스에 對한 再審이 進行되었고 1899年 9月 9日 10年型을 宣告받았으나 10日 後인 9月 19日에 大統領이 赦免하여 釋放되었다. [25] 다만 復權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04年 에 드레퓌스에 對한 再審이 請求되었고, 1906年 에 大法院에서 無罪가 宣告되었으며, 드레퓌스는 모든 嫌疑를 벗고 復權되어 陸軍에 復職했다. 그 後 少領으로 昇進함은 勿論, 레지옹 도뇌르 勳章까지 받게 된다. 1年 後 退役했으나 第1次 世界大戰이 터지자 參戰하였고 1935年에 持病으로 死亡했다. 그러나 이 事件은 드레퓌스의 삶에 너무나도 큰 傷處를 입혔고, 그 後에도 右派는 끝까지 드레퓌스의 有罪를 외쳤다. 그러면서 드레퓌스의 傷處는 더 깊어졌다. 이 事件은 後代에 反유대主義와 反獨逸注意가 낳은 最惡의 事件으로 評價되고 있다.

가톨릭 敎會의 煽動 [ 編輯 ]

〈라 크루와〉(La Croix, 十字架라는 뜻)와 〈르 펠렝〉 等 가톨릭 系列 主要 日刊紙와 地方 新聞 等 〈聖母昇天修道會〉 會員들이 經營한 新聞들은 體系的으로 反드레퓌스派를 支持하기 위한 宗敎的인 領域을 맡고 있었으며, 民族主義를 讚揚하고 유대人들을 敵國 國民으로, 그리고 外國 市民으로 甚至於 이웃 國家가 派遣한 스파이라고 罵倒했다. 〈라 크루와〉를 비롯한 反드레퓌스派 新聞들은 集團的인 反드레퓌스派 프랑스의 이미지를 傳播하는 데 온갖 努力을 다했다. [26]

예수회의 造作 [ 編輯 ]

1893年 <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 1面에 실린 反猶太主義 캐리커처

드레퓌스 事件이 일어날 當時, 프랑스 陸軍 士官學校 生徒들은 가톨릭 예수회 敎團이 運營하는 豫備學校 過程(폴리테크니크 豫備學校)을 거쳐야 했다. 드레퓌스 事件이 發生하자 參謀本部에 屬한 이들의 大部分은 예수회 敎團과 結託해 共和國을 흔들고 있었다. 이와 같은 背景으로 비요 將軍(當時 國防長官)은 參謀本部를 〈예수회派〉(Jesuitiere)라는 이름으로 指稱했다. 또한 드레퓌스 支持派들度 輕蔑的인 意味로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27] 앙리 中領이 監獄에서 自殺하자 <라 리브르 파롤〉은 그를 유대人들에게 犧牲된 殉敎者로 만들며 未亡人을 위한 募金 運動을 全國的으로 展開했다. 이때 예수회가 運營하던 폴리테크니크 豫備學校들은 團體로 寄附金을 냈는데, 한 學生이 寄附金을 못 내겠다고 버티자 學校는 學生을 退學 시킨 일도 있었다. [28]

이에 에밀 졸라 는 有名한 < 나는 告發한다 >를 쓰기 前 1898年 1月 7日 《프랑스에 보내는 便紙》라는 팸플릿을 통해 "프랑스餘 그대는 敎會가 支配하던 過去로 되돌아가려고 하는가"라며 痛歎했다. [29]

라 리브르 파롤 資金 支援 [ 編輯 ]

또 드레퓌스 事件을 最初로 報道한 新聞은 예수회가 資金을 支援한 <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지였고, 바일리 神父가 創刊한 <라 크로와> 等 餘他 가톨릭 系列 新聞들이 앞장서서 드레퓌스의 有罪를 主張했고 反猶太人 情緖를 날마다 되풀이했다. 이 <라 리브르 파롤>誌의 發行人 에두아르 드뤼몽(Edouard Drumont)에게 資金을 대준 사람이 예수회 의 뒤落(Du Lac) 神父였다. 그는 또 當時 國會 內의 忠實한 가톨릭 敎會 擁護者이자 '勞動者 클럽'(英文: The Society of Catholic Worker Circles, 불어: Oeuvre Circles Catholiques d'Ouvriers)을 만든 알베르 드묑 (Albert de Mun) 伯爵과 參謀本部의 總參謀長 드 브와데프르의 告解神父이기도 했다. [30]

프랑스의 가톨릭 系列 新聞인 라 크루窪地(La Croix)는 드레퓌스 事件이 터지자 "드레퓌스는 프랑스 國民을 파멸시키고 프랑스 領土를 차지하려고 劃策해온 國際的 유대人 組織의 스파이"라고 報道했다. [31] 가톨릭 硏究가 에드몽 파리 는 "大部分의 聖職者와 主敎는 드레퓌스의 犯罪를 確信하고 있다"고 부르게레트는 記錄하였으며, 생디칼리슴 의 理論價 조르주 소렐 (Georges Sorel) 또한 이렇게 公言하였다. "드레퓌스 事件으로 社會 全體가 分裂된 反面 가톨릭界는 徹底하게 一致하여 再調査에 反對하였다. 敎會의 모든 政治力이 드레퓌스 事件에 集中되었다."며 예수회가 만든 新聞과 가톨릭교회와 예수회가 主軸이 된 軍部가 한통속이 되어 드레퓌스 事件을 造作했다고 主張하고 있다. [32]

또 예수회의 機關紙 <氏빌打 카톨리카(Civilta Cattolica)>에는 '猶太人 드레퓌스라는 題下의 記事로 다음과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立場을 明確히 表明하였다. "猶太人들은 프랑스 共和國을 掌握하고 프랑스的이기보다는 히브리的인 나라로 이끌어왔다. 猶太人들은 어느 곳에서나 反逆을 圖謀하는 스파이로 하나님께서 創造하셨다. 猶太人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獨逸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伊太利에서도 追放되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過去의 偉大한 平和를 再建하게 되고, 帝國은 잃어버린 幸福을 되찾게 될 것이다." [33] 이 新聞은 後날 敎皇이 드레퓌스를 免罪한 後에도 그가 繼續 有罪라고 主張할 程度로 莫無可奈였다. 이 新聞의 編輯長인 라파엘레 발리니 神父는 유대人들이 드레퓌스를 無罪로 만들기 위해 '유럽의 모든 新聞과 良心을 샀다'고 公言하기도 했다. 또 유대人들이 每年 '아이를 十字架에 못 박고 그들은 '苦痛 속에서 죽어야 한다'고도 썼다. [34]

앙리 中領 죽음의 背後 [ 編輯 ]

에스테라紙와 함께 文書를 造作한 앙리 中領이 逮捕되었으나 그는 監房에서 自殺하였다. [35] 參謀本部가 證據를 僞造하는등 積極的으로 事件을 造作한 陰謀가 드러나자 左派 共和主義者들은 驚愕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와 軍部가 安保를 口實로 政治와 公共生活을 얼마나 侵蝕해 들어갔는지 認識하기 始作했다. 張 조레스 는 이때 드레퓌스 事件을 파헤치는 案內書 《證據들》이라는 冊을 펴냈다. 이때부터 드레퓌스의 再審을 要求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로로르지는 監獄에서 自殺한 앙리 中領이 自殺하지 않았다는 記事를 실었다. 輅路르는 "예수회 會員들이 앙리 中領의 손에 面刀날을 쥐어주면서 不名譽 退役으로 追放되겠느냐 아니면 그의 未亡人에게 年金을 주는 條件으로 自殺하겠느냐 둘 中 하나를 擇하라고 强要했다"는 것이었다. [36]

에드몽 파리는 조셉 레이나크(Joseph Reinach)의 말을 引用해 이 事件을 이렇게 結論 내린다. "보다시피 이 凶惡한 事件은 예수회 會員들의 陰謀다. 事實 드레퓌스 事件은 하나의 口實에 지나지 않으며 眞正 그들이 願하는 것은 그들도 認定하듯이 社會的인 偶像들과 1789年 大革命 精神을 破壞하는 것이다." [37]

事件의 影響 [ 編輯 ]

드레퓌스 事件을 둘러싼 當代 프랑스 國民들의 分裂을 諷刺한 1898年 2月 14日子 萬坪. 大家族의 食事 時間에 “오늘은 드레퓌스 事件에 對해 이야기하지 맙시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바로 다음 場面에서 “結局은 이야기했다”라면서 온 家族이 亂場판이 되도록 싸우고 있다.

이 事件으로 右派 高級 將校들 等 裁判 管理者들은 많은 非難을 받았고, 結局 이런 非難이 드레퓌스를 無罪로 이끌어가는 데 成功했다. 그러나 이 事件으로 反유대主義의 問題를 많이 느끼게 되었고, 結局 反유대主義는 徐徐히 없어지기 始作하다가 結局 1948年 이스라엘 建國 以後 거의 사라졌다.

民衆의 敵 [ 編輯 ]

드레퓌스 事件은 프랑스를 드레퓌스의 有罪를 믿는 가톨릭을 中心으로 한 保守層과 無罪를 믿는 改新敎人과 知識人層 둘로 갈라놓았다. 家族 親知 間에도 드레퓌스의 有無罪를 놓고 싸우고 對立했다. 마침 파리에서 헨리크 입센 의 演劇 《民衆의 敵》(En folkefiende)李 公演하고 있었다. 이 演劇은 그런데 演劇의 內容이 마치 에밀 졸라 를 연상시킨다는 理由로 觀客들의 亂鬪劇을 불렀다. 結局 演劇 公演은 取消되고 말았다. [38]

政敎分離(라이시테) [ 編輯 ]

드레퓌스 事件은 '라페르'(l'Affaire:事件)라고도 불리는데 프랑스 第3共和國 의 歷史와 現代史에 重要한 里程標가 되었다. 이 事件의 소용돌이 속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主軸으로 한 保守派와 공화파 間 確然하게 나뉘어 이들을 中心으로 서로 다른 政治·社會的 勢力들의 立場 差異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 事件의 影響으로 마침내 프랑스에서는 1901年의 '結社에 關한 法(Association loi de 1901)' [39] 의 規定과 以後 다음과 같은 새로운 一連의 法律들을 통해서 敎會와 國家의 關係가 새롭게 定立되었다. [40]


  1. 1902年 7月 法을 통해 國家的으로 許可를 받지 않은 約 3000個의 모든 가톨릭學校 閉鎖가 決定되었다. [39] 이것은 매우 甚한 大衆的 反撥을 불러일으킨 措置였는데, 74名의 主敎들이 抗議書에 署名을 하여 明示的인 反對 및 抗議 意思를 表示하였다. 洞 法을 통하여 政府를 통한 主敎의 給與 또한 停止되었다.
  2. 1903年 3月 法을 통하여 예수회를 包含한 모든 男性 首都團體의 解散이 決定되었다.
  3. 1903年 7月 法에서는 모든 女性 首都團體의 解散이 決定되었다.
  4. 1904年 7月의 法은 새로운 首都團體의 結成을 禁止하였고 現在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마침내 1905年 政敎分離法人 ‘國家와 宗敎 分離에 對한 法(佛語: loi de separation des Eglises et de l'Etat, 英語: 1905 French law on the Separation of the Churches and the State)’이 通過됐다. [39] [41] [42] 이 法은 當時 首相인 콩브 (Combe)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Loi Combe” 卽 콩브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國家와 宗敎의 分離를 위한 洞 法은 오늘날에도 如前히 有效한 政敎分離原則, 卽 政治와 宗敎의 完全한 分離를 의미하는 ‘ 라이시테 ’(laicite: 非宗敎性)原則을 確立하였다. 이 法에 따라 프랑스 共和國에서는 어떠한 宗敎도 國敎로 認定하지 않으며 [39] , 어떠한 宗敎에도 經濟的 支援을 하지 않고 [39] , 宗敎 建物은 公共 財産으로 還元하고, 宗敎는 어떠한 政治的 權限도 行使할 수 없음을 規定했다. [43] 이 法이 通過되자 當時의 敎皇인 비오 10世는 司牧書翰 “프랑스 精巧分離法에 關하여(Vehementer nos)”를 通해 公開的으로 剛하게 宗敎的 非難을 하였고, [44] 以後 數 年 동안 프랑스와 가톨릭교회의 關係는 惡化되었다. [45]

드레퓌스 事件 100周年 [ 編輯 ]

1998年 1月 13日은 에밀 졸라 가 드레퓌스 事件에 抗議하여 輅路르 지에 名文 《 나는 告發한다 》를 發表한 지 100周年이 되는 날이었다. 國家理性의 이름으로 한 無辜한 人間에 加해졌던 人權蹂躪의 代表的 例로 記錄되는 드레퓌스 事件에 對해 자크 시라크 大統領은 졸라가 生前에 살던 집에서 懸板式을 갖고 記念碑를 獻呈했다. 프랑스 國立圖書館은 졸라가 쓴 나는 告發한다 의 原本과 드레퓌스 事件 關聯 文書들을 陳列했다. 또 졸라가 安置된 팡테옹 에서는 當時 歪曲된 公權力의 象徵이던 法務部와 國防部의 首長이 參席해 다시는 國家 權力의 이름으로 暴力을 行使해서는 안 될 것임을 다짐하며 졸라에게 敬意를 표했다. [46]

外部 링크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네이버 知識百科] 드레퓌스 事件 [Dreyfus Affair] (두산百科)
  2.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史> 기린원 1998.11.10 p503 ~ 512
  3.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史> 청아출판사 2005.12.10 p325 ~ 326
  4. 박영준 <섬의 世界史> 嘉藍企劃 1999.3.23, p308 - p311
  5.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史> 기린원 1998.11.10, p510
  6. 柳時敏 <거꾸로 읽는 世界史> 푸른나무 2003.8.18 p18
  7. 朴元淳 <內 목은 매우 짧으니 操心해서 자르게, 世紀의 裁判이야기> 한겨레新聞社 2000.3.28 p232
  8.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歷史> 까치글房 2013.3.11 p349
  9. [네이버 知識百科] 드레퓌스 事件 (프랑스史, 2005. 8. 1., 김복래, 위키미디어 커먼즈).....그 後, 3, 4年 동안 프랑스는 急進 共和黨과 左派 社會黨의 聯合 內閣에 依해 支配되었다. 이렇게 勝利한 共和國 政府는 '穩健 共和國'에서 '半聖職者 共和國'으로 履行하여, 共和國에 敵對 行爲를 보인 가톨릭교회를 膺懲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政府는 1905年 '正校 分離法'을 宣布했다. 그때까지 프랑스 政府와 가톨릭교회와의 關係는 1801年 나폴레옹과 로마 敎皇 사이에 맺어진 有名한 火藥에 따라 政府는 社交 任命權을 가짐과 同時에 聖職者에게 俸給을 支給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5年의 法律은 國家의 宗敎 管理 制度를 完全히 破棄한 것이다. 政府는 社交 任命이나 俸給 支拂을 中止했으며, 가톨릭교회는 모든 特權을 喪失하고 다른 宗敎 團體와 같은 取扱을 받게 되었다.
  10. 아서 골드워그 <이즘과 올로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12.4, p131
  11. 크리스티안 마이어 外 <누가 歷史의 眞實을 말했는가> 푸른역사 p328...便紙 形式으로 되어있으며 祕密情報가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獨逸에 넘겨준 프랑스軍隊의 祕密文書 目錄이 적혀있다. 그래서 後날 '明細書'라고 불리게 된다. 原本은 現在 存在하지 않고 寫眞撮影된 필름이 存在한다. 6조각으로 찢어져 이를 테이프로 붙인 痕跡이 분명하게 보인다.
  12. 柳時敏 <거꾸로 읽는 世界史> 푸른나무 2003.8.18 p11
  13.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史> 청아출판사 2005.12.10 p326
  14. 柳時敏 <거꾸로 읽는 世界史> 푸른나무 2003.8.18 p12
  15. 柳時敏 <거꾸로 읽는 世界史> 푸른나무 2003.8.18 p14
  16. 朴元淳 <內 목은 매우 짧으니 操心해서 자르게> 한겨레新聞社 2000.3.28 p226
  17. 柳時敏 <거꾸로 읽는 世界史> 푸른나무 2003.8.18 p15
  18. 크리스티안 마이어 外 <누가 歷史의 眞實을 말했는가> 푸른역사 p334
  19.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史> 기린원 1998.11.10 p510
  20. 막스 葛盧. 《張 조레스 그의 삶》. 當代. 199쪽.
  21.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史> 청아출판사 2005.12.10 p326
  22.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歷史> 까치글房 2013.3.11 p347
  23.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歷史> 까치글房 2013.3.11 p348
  24. 크리스티안 마이어 外 <누가 歷史의 眞實을 말했는가> 푸른역사 p335
  25. 크리스티안 마이어 外 <누가 歷史의 眞實을 말했는가> 푸른역사 p336
  26. 임종권. 《프랑스 第3共和國의 政治勢力 - 右派와 가톨릭교회》. 崇實史學會, 通卷 29號.
  27. 에밀 졸라. 《前進하는 眞實》. 209쪽.
  28. 니콜라스 할라즈. 《나는 告發한다: 드레퓌스 事件과 集團 히스테리》. 한길사. 350쪽.
  29. 에밀 졸라. 《前進하는 眞實》. 164쪽.
  30. 예수회가 <라 리브르 파롤>지에 資金을 支援했다는 主張은 에드몽 파리의 《예수회의 祕密歷史》 165쪽, 니콜라스 할라즈의 《나는 告發한다: 드레퓌스 事件과 集團 히스테리》 64쪽과 182쪽에도 나옴.
  31. 니콜라스 할라즈. 《나는 告發한다: 드레퓌스 事件과 集團 히스테리》. 한길사. 96쪽.
  32. 에드몽 파리. 《예수회의 祕密歷史》. 172쪽.
  33. <The Civilta Cattolica>. 1898年 2月 5日子.
  34. 존 콘웰. 《Hitler's Pope: The Secret History of Pius XII》. 28쪽.
  35. 朴元淳 <內 목은 매우 짧으니 操心해서 자르게> 한겨레新聞社 2000.3.28 p235
  36. 니콜라스 할라즈. 《나는 告發한다: 드레퓌스 事件과 集團 히스테리》. 한길사. 335쪽.
  37. 에드몽 파리. 《예수회의 祕密歷史》. 175쪽.
  38. 니콜라스 할라즈. 《나는 告發한다: 드레퓌스 事件과 集團 히스테리》. 한길사. 302쪽.
  39. 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歷史> 까치글房 2013.3.11 p349
  40. 이석민. 《國家와 宗敎의 關係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大學院 博士論文. 24쪽.
  41. 브리태니커 百科事典. 〈드레퓌스〉 參照.
  42. 박준철外 13人 <西洋文化史 깊이 읽기> 푸른역사 2009.5.20 p400
  43. 민유기. 《프랑스 急進공화파의 班敎權主義와 1901年 結社法》. 韓國프랑스史學會. 프랑스史 硏究 第27號. 93~121쪽.
  44. 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옥스퍼드 敎皇事前> 분도출판사 2014.1月 初版 p463..... 프랑스의 에밀 콩브(Emile Combes) 內閣(1902~1905)에 依해 1801年의 政敎條約이 廢棄되었고, 敎會 財産은 平信徒 協會로 移轉(1905. 12. 9.)되었다. 敎皇 비오 10世는 政敎分離法을 猛烈히 非難했고(1906. 2. 11.), 主敎들의 助言에도 不拘하고 어떤 協商도 不許했다(1906. 8. 10.).
  45. 이석민. 《國家와 宗敎의 關係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大學院 博士論文. 25쪽.
  46. 《드레퓌스 事件 100周年 - 다시 묻는 權力과 眞實 / 그리고 知識人의 役割》. 1998年 1月 13日子.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