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黨 合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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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黨 合黨 (三黨合黨) 또는 保守大聯合 (保守大聯合)은 1990年 1月 22日 , 當時 執權 與黨 民主正義黨 (略稱 民政黨)과 第2野黨 統一民主黨 (略稱 民主黨), 第3野黨 新民主공화당 (略稱 共和黨)李 合當하고 民主自由黨( 1995年 신한국당 으로 改稱)을 出帆시킨 事件을 말한다.

背景 [ 編輯 ]

第5共和國 의 後身 勢力인 民主正義黨 (민정당) 勢力은 6月 民主 抗爭 이라는 政治的 危機 속에서도 政權 再創出 에 成功했으나, 繼續되는 國民들의 民主化 및 軍事政權 淸算 要求는 이들에게 負擔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狀況에서 1988年 第13代 國會議員 選擧 結果 民政黨이 過半數 議席 確保에 失敗하자, 노태우 政府 는 與小野大 政局을 打開하기 위해 이른바 '保守大聯合(4黨 合當)'을 祕密裏에 推進하기 始作했다. 이는 民政黨이 1986年 宸翰민주당 에 처음 提案했던 것으로, 當時에는 野圈에서 呼應이 없어 結實을 맺지 못했지만 이番에는 狀況이 달랐다. 金永三 민주당 總裁, 金鍾泌 공화당 總裁 等이 4黨 構圖로는 各自 本人들의 執權이 遙遠하다는 計算을 하고 있던 것이다. 3黨은 1990年 內閣制 改憲 等을 條件으로 統合에 合意했으며, '救國의 決斷'이라는 名分 아래 3黨 合黨을 發表했다. 3黨의 國會 議席 數를 합치면 改憲線人 200席을 훌쩍 넘긴다는 點, 各各 TK , PK , 忠淸 地域에 基盤을 두고 있던 3黨의 統合으로 事實上 湖南 外의 地域들이 모두 聯合하는 構圖가 됐다는 點 等에서 統合 新黨은 '怪物 與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黨合黨의 餘波로 노태우 大統領은 就任 2年 만에 80%에 肉薄하는 높은 數値의 支持率을 記錄한 적도 있었다.

各 黨의 事情 [ 編輯 ]

民主正義黨 [ 編輯 ]

保守大聯合의 起源은 1986年 5·3 仁川 事態 때로 돌아간다. 當時 學生 運動圈의 主導로 열린 民主化 促求 데모에서 急進的인 團體들이 反美·容共 性向의 主張들을 내놓아 反共 文化가 强하던 韓國 社會에 衝擊을 안겨주고 있었다. 學生들의 民主化 運動에 好意的이었으나 體質的으로 保守 政黨이던 宸翰민주당 (略稱 新民黨)까지도 이를 糾彈하고 나섰는데, 마침 强勁 野黨 신민당의 存在에 負擔을 느끼고 있던 민정당은 急進 左派 勢力을 막기 위해 保守 政黨들이 힘을 합쳐야만 한다며 신한민주당에 保守大聯合을 위한 黨對黨 統合을 提議했다. 민정당의 保守大聯合 提議는 以後로도 꾸준히 持續됐으나, 金永三·金大中·김종필 等 保守 野圈의 리더들은 民政黨이 直選制 改憲 以後 사라질 政黨이라고 判斷해 無視한데다, 딱히 進步 陣營이 政治 勢力化를 具體的으로 進行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던 탓에 呼應을 얻지 못했다.

민정당은 1988年 第13代 總選거 을 앞두고 27名의 現役 國會議員을 地域區 公薦에서 탈락시키는 强手를 두며 過半數 議席 確保에 全力投球했지만, 5共 淸算에 對한 國民들의 높은 熱望이 민정당에 對한 反感으로 이어져 湖南 地域에서 全滅한 것은 勿論 全國的으로 125席(地域區 87席, 全國區 38席)을 얻는 데 그쳤고, 이 後 정기승 大法院長 任命案 否決 및 國政監査 復活 等 野黨에게 政局主導權을 빼앗기면서 苦戰하고 있었다.

이에 민정당은 1986年 때부터 主張해오던 保守 政黨 大統合을 再推進하기로 했다. 特히 민정당은 第1野黨인 平和민주당 과 合黨하여 過半 議席도 確保하고, 湖南 地域에서의 支持 基盤도 마련하는 案을 構想하고 推進했다. 민정당은 김원기 當時 평민당 院內總務를 통해 5·18 問題 解決에 對한 全權을 주겠다며 合黨을 提議했으나, 평민당이 끝내 아무런 反應을 보이지 않자 代身 統一民主黨과 신민주공화당에 合當 提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統一民主黨 [ 編輯 ]

민주당은 13代 總選에서 23.8%의 得票率로 19.3%를 얻은 平和민주당 (略稱 평민당)보다 많은 票를 얻었음에도 不拘하고, 평민당의 70席에 못 미치는 59席으로 제2야당이 되었다. 民主黨의 金永三 總裁와 평민당의 金大中 總裁가 野圈의 次期 大權 走者 자리를 놓고 競爭 關係에 있던 가운데 이같은 結果가 나오자 김영삼 總裁는 危機感을 느꼈고, 4黨 構圖가 大選 때까지 維持될 時 自身이 大統領이 되기 어려울것이라 判斷했다. 그런 背景에서 김영삼 總裁는 野圈에 남아 김대중 候補와 競爭하는 代身 與圈의 大統領 候補가 되는 方法을 選擇하기로 마음먹었다.

立場을 整理한 김영삼 總裁는 민정당과 祕密裏에 合當協商을 펼쳤고, 또한 自身의 側近인 서석재 1989年 東海市 補闕選擧 當時 無所屬 候補를 買收한 嫌疑로 檢察 에 拘束되자 合黨의 決心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택 , 金正吉 , 장석화 , 金相賢 , 朴燦鍾 , 홍사덕 , 이철 , 盧武鉉 等 8名은 獨裁 政府의 後身인 민정당과 함께 할 순 없다며 김영삼과 訣別하고 民主黨 (一名 꼬마민주당)을 結成하였다.

新民主공화당 [ 編輯 ]

共和黨은 13代 總選에서 地域區 27席, 全國區 8席 等 35席을 얻으면서 交涉團體 確保에 成功했지만 票밭이라고 할 수 있는 忠淸道 地域에서 27席 中 15席을 獲得하는 데 그치는 不振을 보였다. 또한 같은 軍事 政權 出身 政黨인 민정당과 差別點이 거의 없었고, 2次例 補闕選擧에서의 全敗와 野黨生活에 適應하지 못한 옛 民主공화당 出身 人士들의 不滿 高調로 黨을 꾸려나가기 어려운 狀況이었다. 또한 金鍾泌 總裁 本人도 이대로는 더 以上 大權에 挑戰하는 것 自體가 힘들다고 判斷하여 內閣制 改憲에 對한 期待를 갖고 民政黨, 민주당과의 合黨에 나서게 된다.

結果 [ 編輯 ]

이로써 民主 陣營의 兩大 走者였던 金永三 , 金大中 2人의 統合은 끝내 이뤄지지 않게 되었다.

新生 民主自由黨은 218席을 保有한 絶對多數 政黨으로 政局의 主導權을 行使했으나, 2年 後 1992年 第14代 總選 에서는 改憲線은커녕 299席 中 149席으로 過半 達成에도 失敗하는 慘敗를 當한다. 이는 系派 間 公薦 葛藤의 餘波로 落薦者 中 相當數가 無所屬으로, 或은 통일국민당 候補로 出馬를 强行한 結果로 分析되었다. 異質的인 여러 系派가 한 黨에 섞인 것에 對한 副作用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1992年 末 14代 大選 에서 김영삼이 민주自由黨 候補로 出馬해 大統領으로 當選되고, 以後 野黨 및 無所屬 議員들을 大擧 迎入하여 다시 國會 過半數의 巨大 與黨이 되었다.

當選 後 民主自由黨 總裁를 겸하게 된 金永三 大統領은 黨을 革新한다는 名分 下에, 민정系와 공화系를 彈壓·逐出했다. 系派 葛藤의 餘波로 金永三 에 依해 黨 內 權力에서 밀린 김종필 等은 1995年 에 民主自由黨을 脫黨하고 自由民主聯合 을 創黨하는 等, 民主自由黨은 漸漸 김영삼黨으로 變形되었다.

批判 [ 編輯 ]

民主 陣營에서는 "民主陣營 分裂과 不信을 招來시켰다"라고 批判한다. 進步 陣營에게는 "機會主義的 巨大保守聯合"이라 批判받는다. 또한 이것으로 地域感情을 부추겨 地域主義 政治와 보스政治를 招來했다는 批判도 있다. 軍事政權과의 野合이라는 批判도 있다. 政黨의 成立과 發展에 있어 國民的 意思를 無視한 채, 長期執權을 劃策한 '政黨쿠데타'라는 批判도 있다. 또한 "3黨 合黨으로 인하여 湖南을 政治的으로 徹底하게 고립시켰다"는 批判을 받고 있다. 歌手 정태춘은 5輯 收錄曲 <아, 大韓民國···>의 歌詞 中 "하루 아침에 偉大한 背信의 칼을 휘두르는 저 民主 人士와 함께"로 김영삼을 批判하였다.

3黨 合黨으로 인해 軍事政權 殘滓의 解決과 釜馬抗爭 , 光州 民主化 運動 等 整理해야 할 過去事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다는 批判이 있다. 정작 事件의 責任을 추궁당해야 할 人士들이 巨大 保守黨의 中心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기에, 政府次元의 眞相糾明과 問題解決 努力이 未備하다는 主張이다. 如前히 부마抗爭 被害補償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1] 光州 民主化 運動에 對해 池萬元 等 保守 人士들은 政府의 發表와 無關한 北韓 介入論을 主張하여 國論을 分裂한다는 批判도 있다. 軍事政權의 弊害도 問題가 되어, 維新憲法 의 無效 宣言을 要求하는 學界의 主張 [2] 5.16 쿠데타 를 革命이라고 主張하는 一部 保守言論과 人士들의 發言으로 社會的 論難이 加重되는 等, 이러한 問題들이 3黨 合黨으로부터 觸發되었다는 批判이다. [3] [4] [5]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정민규 記者 (2014年 11月 6日). “低調한 부마抗爭 被害補償 申請... 始作부터 '삐끗 ' . 《오마이뉴스》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  
  2. 전병역 記者 (2012年 8月 31日). “維新憲法은 무엇이었나… 超憲法的 緊急措置, 三權分立 否定, 世界史的 ‘憲政 破壞’” . 《京鄕新聞》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  
  3. 정민규 記者 (2014年 11月 6日). “低調한 부마抗爭 被害補償 申請... 始作부터 '삐끗 ' . 《오마이뉴스》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  
  4. 김윤경 記者 (2014年 10月 13日). “大韓民國은 왜 ‘駙馬民主抗爭’을 잊었나” . 《부대신문》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  
  5. “光州 聽聞會” . 《5.18記念財團》. 2012年 3月 22日. 2015年 4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3月 31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