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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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
朴珪壽
박규수의 영정
朴珪壽의 影幀
朝鮮 의 敦寧府知事
任期 1865年 8月 ~ 1866年 2月
君主 高宗 李兄
攝政 흥선大院君 이하응
領議政 趙斗淳

朝鮮 京畿道 水原府 留守
任期 1876年 2月 ~ 1876年 12月
君主 高宗 李兄

身上情報
出生日 1807年 10月 27日
出生地 朝鮮 漢城府 北部 陽德房 계생동界
死亡日 1877年 2月 9日 (71歲)
死亡地 朝鮮 京畿道 水原郡 에서 老患으로 兵士
國籍 朝鮮
學歷 憲宗(憲宗) 14年(1848) 무신(戊申) 增廣試(增廣試) 甁과(丙科) 25位 (42歲 때)
經歷 弘文館 大提學
議政府 右議政
正當 老論系 洛論 隸下 北學派 後裔 性向 開化派
本館 潘南 (潘南)
父母 박종채 (簿)
全州 류氏 否認(某)
兄弟姊妹 박선수 (親아우)
配偶者 沿岸 李氏 否認
子女 박제응
親姻戚 燕巖 朴趾源 (親祖父)
이준수(匠人)
웹사이트 박규수 - 두산世界대백과사전
賞勳 大匡輔國崇祿大夫 (大匡輔國崇錄大夫)
박규수
한글 表記 : 박규수
漢字 表記 : 朴珪壽
改正 로마字 表記 : Bak Gyusu
매큔-라이샤워 表記 : Pak Kyusu
예일 表記 : Pak Kyuswu

박규수 (朴珪壽, 1807年 10月 27日 ~ 1877年 2月 9日 )는 高宗 치셋 時節에 敦寧府 知事 · 京畿道 水原府 留守 等을 지낸 朝鮮 時代 末期의 文身이다. 本貫은 潘南 (潘南). 初名은 박규학 (朴珪鶴), 字는 환경(桓卿, ?卿) 또는 情景(鼎卿), 號는 桓齋(桓齋, ?齋), 憲裁(獻齋), 桓齋擧事(?齋居士) 等이다.

朴智元의 아들인 박종채의 아들이다. 秋史 김정희 等과 交流가 깊었고, 제네럴 셔먼號 를 擊退하고 景福宮 再建의 總責任을 맡는 等 흥선大院君 으로부터도 그 能力을 認定받았다. 그러나 燕巖 朴趾源 의 學問 및 思想을 繼承하는 이로서 斥和論(斥和論)에 反對하고, 淸나라 에 使臣으로 갔다온 後 兩廡 運動 처럼 西洋 技術의 選擇的 導入과 國際 通商을 主張했다. 김옥균 , 홍영식 , 박영효 , 서재필 , 박정양 , 윤치호 開化派 靑年들을 길러냈으며 日本과 江華島 條約 이 締結될 때는 衛正斥邪派의 名分論 [1] 을 反對하고, 幕後에서 朝廷 大臣들을 움직여 條約 締結을 이끌었다.

1848年(憲宗 14年) 42歲 때 增廣試 에 合格해 出仕했다. 當時 勢道 政治 下에서 非主流였던 北學派 出身으로 要職과 距離가 멀었지만 1862年(哲宗 13年) 晉州民亂 을 收拾하고 제너럴셔먼호 事件 에서 勝利하는 等 잇따른 亂을 平定한 功으로 크게 昇進했다. [2] 司憲府 大司憲 弘文館 提學 을 거쳐 朝鮮 儒學의 最高 榮譽의 하나인 大提學 에 올랐고, 以後 李朝 參判 , 刑曹判書 를 거쳐 右議政 에 이르렀다. 1876年 江華島 條約 때까지 줄기차게 開化를 主張하면서 흥선大院君 및 斥邪派들과 繼續 葛藤을 빚고 失脚했다. 1877年 水原府 留守 로 在職 中 죽었다. 諡號는 文益(文翼)이다. 宗廟 高宗 실에 配享된 宗廟配享功臣 이다.

生涯 [ 元本 編輯 ]

生涯 初盤 [ 元本 編輯 ]

出生과 젊은 時節 [ 元本 編輯 ]

박규수 집터 標石

1807年 [3] (純祖 7年) 10月 27日 只今의 서울 鍾路區 季冬 에서 縣監 박종채 (朴宗采)와 情5品 通德郞 留營(柳詠)의 딸인 全州 류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종채 는 大科에 及第하지 못해 官職은 縣監에 그쳤지만, 잇따른 亂을 平定한 아들의 공으로 1863年에 李朝 參判 , 1865年에 吏曹判書 , 그리고 1873年에는 領議政 에 거듭 追贈 됐다.

두 夫婦는 結婚 後 8年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었다. 어느날 류氏가 婚需品으로 데려온 이 앞길을 引導하는 胎夢을 꿨고, 아버지는 燕巖 朴趾源 에게 玉板(玉版)을 膳物받는 꿈을 꾸고 妊娠 事實을 알았다. 正말 어렵게 가진 子息이었다. 胎夢 때문에 이름을 규學(珪鶴)이라 했다가 30歲에 閨秀로 改名했다.

代代로 老論 이었지만 일찍이 高祖父 박필균 때부터 黨爭 을 스스로 拒否했고, 할아버지 燕巖 朴趾源 亦是 老論 內의 外戚·蕩平黨으로서, 當時 主流였던 碧波 와는 다른 北學派 라는 새로운 傾向을 創始해 領袖(領首)가 됐다. 朴珪壽는 成長 後에도 이런 先代의 思想을 繼承해 積極的인 西洋文物 導入 및 外國과의 通商强化를 主張했다.

어린 時節부터 風采가 컸고 論語 를 즐겨읽어 練習帳에 反復했다. 特히 '孝道하는 사람이 임금을 섬길 수 있다. 君子란 남을 恭敬할 망정 蔑視하지는 않는다. 反面 小人輩들은 남을 蔑視하고 尊重할 줄 모른다 (孝民可以爲臣(효민街蛜蝛神) / 君子可敬而不可侮(君子佳境이불가모) / 小人可侮以不可敬(소認可모이不可警)'는 句節을 좋아했다고 한다.

少年 時節 [ 元本 編輯 ]

일곱 살 무렵, 朴珪壽가 外家에 놀러 갔을 때 逸話다. 恒常 무언가 그리길 좋아했던 그는 땅바닥에 佛塔을 그리며 놀았다. 그런 모습을 外從組이자 스승인 榴花 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榴花는 高明한 性理學者였음에도 '선비가 될 놈이 왠 佛塔이냐'라는 式으로 面駁을 주진 않았다 [4] . 代身 그에게 詩 한 數를 지어줬다. [4]

네가 石塔을 그릴 때 한 層 한 層 높아지듯이

聖人君子가 되는 일도 平凡한 데서 始作한다.
네게 가르치나니 讀書法은 이것이다. [4]

段階的으로 學問을 이루라는 忠告였다. 單純히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일곱 살짜리 外조카孫子가 或是라도 가르침을 잊을까 詩 한 수 [4] 를 주었다. 學問의 길을 自然스럽게 가르치고자 했던 셈이다. 이렇게 그는 깎아내고 注入式으로 强要하는 敎育보다는 물 흐르는 듯한 가르침 속에서 자랐다. 청렴했던 家風 탓에 어려서는 넉넉치 못해 主로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가끔 陳外從祖父 [5] 이정리 (李正履), 이정관 (李正觀)과, 外從祖父 榴花(柳?) 等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工夫를 잘할 뿐만 아니라 獨特하고 폭넓은 見解를 갖게 된 그는 15歲의 어린 나이에도 조종영 (趙鍾永) 等 名望높은 性理學者들과 나이를 뛰어넘어 親舊가 될 만큼 (忘年之交, 忘年之交) 學問的으로 成長했다. 18歲 무렵에는 할아버지 燕巖 朴趾源 의 文人들을 찾아다니며 이곳저곳 가르침을 請했는데, 個中에는 當代의 名筆이자 畫家이며 금석학자 였던 김정희 도 있었다. 또한 金正喜의 스승은 亦是 燕巖 朴趾源 의 文人이었던 實學者 박제가 였다. 할아버지의 學緣 을 活用한 셈이다.

그는 地球 가 둥글다는 事實을 배워 알고 있었다. 열여섯 살 때 道峯山 頂上에서 하늘을 두고 읊은 詩 한 首가 남아있다. 10代 時節의 詩集인 <金유시집>에 실린 一部다. [4]

세 個의 커다란 丸藥이 虛空에 떠 있구나.

하나(A)는 스스로 빛나서 밝구나.
하나(B)는 德性이 고요하여
그저 生命을 자라게 할 뿐이구나.
하나(C)는 컴컴하기가 거울과 같아서
빛을 빌려 비추어주네. [4]

太陽(A)·地球(B)·달(C)에 對한 天文學的 洞察을 詩로써 整理한 것이다. 요즘 式으로 말하면, '科學探究 領域'을 工夫한 學生이 새로운 知識을 詩로 整理하는 것과 類似하다. 詩 쓰기를 통해 復習한 셈이다. [4] 또 다른 文集인 <長岩詩集>에는 地球科學的 知識을 整理한 것도 보인다. "아아! 큰 眼目으로 볼 때, 地球를 만져보면 호두 속살 같을 거야"라고 했다. [4]

그를 아는 사람中에는 朴珪壽가 늘 特異한 것에 關心을 둔다며 奇人이라 評하기도 했지만, 그의 집안 어른들은 그의 폭넓은 知的 好奇心을 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북돋아 줬다. [4] [6]

靑年期와 隱遁 生活 [ 元本 編輯 ]

1828年 弱冠의 朴珪壽는 驍名世子 (孝明世子)와 親分을 나누며 開化를 論했고, 親舊 以上의 關係로 學問과 未來를 討論했다. [7] 主로 《 主役 》과 나랏일이었다.

後日 翼宗으로 推尊되는 驍名世子 는 代理淸淨 2年째에 아직 벼슬도 없던 20歲의 朴珪壽를 불러들여 '박규학의 學問은 누구도 따를 수 없으리만큼 出衆하다'며 그를 곁에 뒀다. 主役 을 臣下들 앞에서 進講케 하는 한便, 祖父 朴智元 의 著作을 모두 모으라 命하고, 朴珪壽 自身의 著述도 있으면 같이 올리라 했다. 이때 直接 上告圖說 (尙古圖說) 80卷을 지어 驍名世子 에게 바쳤다. 驍名世子 는 이런 그를 몹시 아꼈다.

驍名世子 는 代理淸淨 中에 安東 金氏 勢道門閥 들을 排除하고 妻家인 풍양 조氏 老論 內 非主流 및 남인 을 重用하는 한便, 李麟佐의 亂 以後 逐出됐던 少論 까지 果敢히 登用하는 等 改革君主로서의 싹을 보였다. 朴珪壽는 이런 驍名世子의 改革 可能性에 모든 期待를 걸었다. 그러나 驍名世子 가 1832年 갑자기 薨去하면서 그의 꿈은 꺾였다. 슬픔과 失望이 너무 컸던 나머지 元來 自身의 者와 好意 '환'(桓: 굳셀 圜 )이라는 글字를 '환'(?: 玉笏 [8] 환, 재갈 얼 )으로 바꿀 程度였다.

安東 金氏 勢道 政治 가 繼續됐던 데다가 驍名世子 , 어머니 劉氏, 아버지 박종채 의 연이은 죽음으로 傷心한 그는 20年 蟄居에 들어간다. [7] 그는 할아버지 朴智元 의 著作들 [9] 을 거듭 읽어 北學 思想을 精巧化하고, 할아버지의 弟子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請했다. 윤종의(尹宗儀), 남병철(南秉哲), 金榮作(金永爵) 等 當代 綺羅星같은 儒學者들과도 깊은 交分을 나눠, 後日 弘文館 大提學 에 오를 程度의 朱子學的 깊이까지 더하게 된다.

科擧 及第와 官僚 生活 [ 元本 編輯 ]

官僚 生活 初盤 [ 元本 編輯 ]

1848年(憲宗 14年) 42歲가 된 그는 文科 增廣試 (增廣試)에 甁과(丙科) 25位로 合格했다. 憲宗 은 '일찍이 父王의 사랑을 받던 너를 내가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 앞으로 크게 쓸 것이니 盡力하라'고 했다. 司諫院 정언(正言)李 되고 兵曹 正郞 을 지냈으며 龍岡 縣令 (龍岡縣令)으로 外職에 나간 동안 憲宗 이 死亡했다.

1850年(哲宗 1年) 全羅北道 扶安 縣監 으로 赴任한 그는 大實學者 磻溪 柳馨遠 의 史跡地를 찾아 磻溪隨錄 等 그의 著書들을 入手해 耽讀한 後, 世上을 求할 學問이 쓰이지 못했다며 讚歎했다 한다. 그 해 司憲府 地平 으로 宮에 復歸한 뒤 弘文館 修撰 이 됐다.

1851年(哲宗 2年) 司憲府 掌令 에 任命됐다.

1854年(哲宗 5年) 承政院 同副承旨 를 거쳐 그해 경상좌도 暗行御史 로 民情을 視察했다.

1855年(哲宗 6年) 다시 경상좌도 暗行御史 로 派遣됐다. 當時 貪官汚吏들을 封庫罷職 [10] 한 顚末을 記錄한 受戒 (繡啓) 等이 남아있다. [11]

1858年(哲宗 9年) 黃海道 谷山府使로 나갔다.

外交 活動과 諮問 作成 [ 元本 編輯 ]

1860年(哲宗 11年) 祖父 燕巖 朴趾源이 그랬듯, 淸나라 사신단에 裂罅府使 (熱河副使)로 任命돼 6個月 間 年庚 에 다녀왔다. 이 때 그는 처음으로 當時 國際情勢의 흐름과 帝國主義 侵略의 實相을 接했다. 業務 外 時間에는 4年 前 애로우 號 事件 때 영·프 君의 北京 , 톈진 占領 直後 함풍제 (咸豊帝)의 對應 方式과 그 後 4年 餘의 戰爭에 對해 仔細히 調査했다. 朴珪壽가 淸國에 當到한 때는 4年 戰爭도 끝이 나고 베이징 條約 이 締結될 時點이었다. 巨人 中國이 不平等 條約으로 홍콩 주룽半島 沿海州 를 生으로 뺏기고 外交的 威信이 깎이는 모습을 現場에서 目擊하며 深刻한 問題認識을 가지게 됐다. 또한 심병성(沈秉成), 王症(王拯), 風知己(馮志沂) 等 百餘 名의 現地 文人, 學者들과 交流해 見聞을 넓혔다.

1861年(哲宗 12年) 初 歸國 後 成均館 大司成 이 됐다. 얼마 後 그는 裂罅府使로 다시 淸나라 에 갔다. 第2次 阿片 戰爭 直後라 淸나라 를 통해 激變하는 國際 情勢를 살피기 위해 일부러 蛇行(使行)을 다시 支援했다. 그는 이때부터 1871年 辛未洋擾 때까지 承文院 에서 各種 外交 文書들을 作成했다. 英語 를 몰랐던 當時 朝鮮 政府였기 때문에 그는 英語 를 解釋한 中國 文獻들에 기초해서 西洋과 外交 文書를 作成했다.

2番에 걸친 洋擾(洋擾) 때 淸나라 로 보낸 咨文(咨文) 및 美國 에 對한 힐文章(詰問)과 通商 要求에 對한 拒絶 文件을 大部分 그가 만들었고, 江華島 條約 때도 調整 衆論을 모으는 것을 넘어, 日本 을 相對로 한 外交文書 多數의 諮問과 監修, 校閱에 參與했다.

흥선大院君 에게 朴珪壽를 薦擧한 趙大妃
民亂 收拾과 出世 [ 元本 編輯 ]

1862年(哲宗 13年) 2月 晉州民亂 (晋州民亂)李 慶尙右道 一帶로 擴大되자 按覈使(按?使)로 나가 事態 收拾을 맡았다. 地方官과 地域 鄕班들의 腐敗로 인한 百姓들의 慘狀을 報告하고 稅金 減免과 救恤을 奏請해 성사시켰다. 그는 民亂의 原因이 三政의 紊亂 에 있음을 確認하고, 根本的 解決策을 마련하도록 調整의 衆論(衆論)을 모을 特別機構를 建議했다. 그의 헌冊으로 陰曆 5月 26日 三政釐正廳 이 設置된다. 同年 10月 李朝 參議 로 昇進했다.

1863年(高宗 卽位年) 12月 承政院 都承旨 에 任命돼 高宗 을 側近에서 모시게 됐다. 막 卽位한 高宗은 翼宗(翼宗) 의 養子로 入承大統 [12] 돼 寶位에 오를 수 있었는데, 驍名世子 (翼宗)의 整備이자 高宗의 養어머니가 된 趙大妃 (趙大妃)가 男便의 生前 切親했던 朴珪壽를 흥선大院君 에게 薦擧했다. '朴珪壽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翼宗 께서 크게 쓰려던 人物이다. 그가 벼슬한 뒤 이제까지 그의 재주를 마음껏 發揮할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데, 한 番 써보는 것이 좋겠다'며 懇曲히 付託했다고 한다.

1864年(高宗 1年) 兵曹 參判 을 거쳐 司憲府 大司憲 , 弘文館 提學 , 李朝 參判 을 두루 거쳤다. (모두 要職이었으나 같은 種2品階)

1865年 營建都監 製造 (營建都監提調)를 겸해 흥선大院君 이 着手한 景福宮 重建 作業 實務를 總括했다.

1865年(高宗 2年) 漢城府 判尹 (正2品)을 거쳐 工曹判書 兼 知經筵事(知經筵事)에 轉任됐다. 景福宮 이 完成될 때까지 營建都監 諸組織은 繼續 兼任했다. 그 뒤 禮曹判書 , 司諫院 大司諫 을 거쳐 그 해 8月 돈녕부 知事 (敦寧府知事)에 올랐다.

1866年(高宗 3年) 高位 官吏는 반드시 地方 外職을 循環해야 하는 規定에 따라 그 해 陰曆 2月 平安道 觀察使 로 赴任했다.

제너럴 셔먼 號 事件 (1866年) [ 元本 編輯 ]

1866年( 高宗 3年) 제너럴셔먼호 事件 이 터졌다. 宣敎師 토마스 (韓國式 이름 최난헌 ) 等을 태운 美國 商船 제너럴 셔먼號 (The General Sherman)가 朝鮮 政府의 분명한 通商要求 拒絶에도 許可없이 大同江 을 거슬러 올라오자 平壤 感謝 朴珪壽가 攻擊 命令을 내렸다. [13]

셔먼호는 商船이었으나 武裝을 積載한 狀態였고 밀물을 타고 江을 거슬러 올라왔지만 곧 潮水가 밀려나가면서 모래톱에 坐礁됐다. [2] 朴珪壽는 逮捕組를 構成하는데 賞金을 걸었다. 이 때 한 巧拙 [14] 이 곧 自願해 漁村에서 徵發한 怪被選 [15] 여러 隻에 기름먹인 섶을 가득 실어 셔먼號 옆에 붙였다. 그리고 弓手들로 一齊히 불화살을 당기게 해 火攻했다. [2] 化工이 始作되자 셔먼 號 內部의 引火物質에 옮겨 붙으면서 셔먼 呼價 航行 不能에 빠졌다. 美國人들이 多急히 배에서 뛰어내려 도망쳤으나 大槪가 射殺되고 船長과 宣敎師 토마스는 平壤 府民들에게 맞아죽었다.

朝廷에 顚末이 報告된 後 朴珪壽는 乘車 (品階가 昇進됨) 됐고 한낱 地方 衙前 (中人 階級) 에 不過했던 巧拙度 情3品 眞藏 [16] (鎭將)에 올랐다. [2] 外勢에 對해 民心이 洶洶했던 次에 朴珪壽는 全國的으로 人氣를 얻었고 아울러 大院君 의 각별한 總哀悼 얻게 됐다.

開港, 開國論과 葛藤 [ 元本 編輯 ]

天主敎徒에 對한 寬大한 待遇 [ 元本 編輯 ]

1866年(高宗 3年) 10月 丙寅迫害 로 天主敎徒들이 많이 죽었다. 當時 8千 餘 名의 平信徒와 프랑스 파리 外方傳敎會 出身의 宣敎師 等이 處刑된 事件으로, 發端은 러시아 의 南下 政策에 危機를 느낀 흥선大院君 이 프랑스 宣敎師들을 통해 韓佛 同盟을 맺으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天主敎 를 惑世誣民에 무군무부 [17] 의 思想이라며 彈壓했기 때문이었다. 朴珪壽는 天主敎 迫害가 國際 紛爭의 原因이 될 수 있는 데다, 百姓이 天主敎 에 惑하는 것은 結局 苛斂誅求와 惡政 때문이므로 處罰보다는 敎化하고 先導하자며 寬大한 處分을 常住했다.

全國的으로 酷毒한 檢擧 및 拷問 處刑이 이어질 때도 그는 拘禁 程度의 寬大한 處罰만 내렸다. 觀察使 때 그의 管內에는 處刑者가 없었다. 結局 丙寅迫害가 原因이 돼 丙寅洋擾 가 터지면서 그의 先見之明이 證明됐다. 그는 民心離叛을 막기 위한 方策으로 稅金을 減免하고 凶年이 든 農家를 救濟하며, 業務 後에도 따로 書室을 열고 선비들을 모아 글을 읽어 平安道 선비들이 過去에 應試해 官職을 얻을 수 있게 애쓰는 等 選定을 베풀었다. 2年 任期 後에도 1869年 4月까지 滿 3年 2個月 間 留任됐다.

兩廡 運動 導入 挫折과 박영효 [ 元本 編輯 ]
藝文館提學 當時 지은 淸나라 발 朝鮮의 外交 文書(1871年 5月 27日 者)

1871年(高宗 8年) 藝文館 提學 弘文館 提學 을 겸했고 外交 諮問을 直接 淸나라 에 지어보내 글씨 좋다는 稱讚을 들었다. 이듬해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이 돼 朝鮮 遊學 의 終場으로 認定받았다.

1872年(高宗 9年) 哲宗 의 하나 남은 血肉인 영혜翁主 (永惠翁主)의 婚禮를 定하게 됐다. 부마자리를 두고 4月 수원부留守 신석희(申錫禧)와 함께 自身의 門下生이자 같은 一族인 박영효 를 駙馬로 推薦했다. 朝鮮 王室은 그의 推薦대로 朴泳孝를 駙馬로 삼아 金陵위의 封爵을 주는 한 篇, 高宗의 親戚 妹弟 뻘이 된 10살짜리 朴泳孝에게 三政丞의 品階인 上輔國崇祿大夫 도 내리고 王室宗親 班列에 올렸다. 高宗의 親兄인 이재면 의 品階보다 높았다.

1872年(高宗 9年) 淸國 皇帝 同治帝 의 婚禮式에 進賀使 (進賀使) 情事(正使)로 書狀官 강문형(姜文馨)과 水域(首譯) 오경석 (吳慶錫) 等의 使臣段을 꾸려 건너갔다. 이 때 그는 前年度 淸나라 使臣으로 프랑스 에 다녀온 삼구通商大臣 완안 숭後(完顔崇厚) [18] 를 만나 世界 情勢를 묻고 아울러 西歐의 書籍과 武器, 火砲, 建築術에 對한 資料도 손에 넣었다. 淸나라 調整이 西歐 列强에 對抗해 自救的 努力의 一環으로 일으킨 洋務運動 (洋務運動)에 깊은 感銘을 받고 歸國 後 個國과 開化의 必要性을 力說했지만, 흥선大院君 의 鎖國 政策과 최익현 , 김평묵 等 朱子學的 名分論의 攻擊에 막혀 挫折해야 했다.

1873年(高宗 10年) 5月 刑曹判書 에 任命됐고 陰曆 12月에 마침내 右議政 에 올랐다. 그 때까지도 그는 흥선大院君 에게 個國의 必要性을 여러 次例 力說했으나 採擇되지 않았다. 朴珪壽는 어디까지나 調整 衆論에 따랐으면서도 當時 日本과의 國交問題에 있어서까지 줄기차게 個國을 主張했다.

大院君과의 葛藤과 失脚 [ 元本 編輯 ]

1873年(高宗 10年) 12月 日本 이 自身들의 王政復古 와 이에 對한 正式修交 要請을 通告해 왔다. 메이지 維新 을 성공시킨 日本은 從前의 西界 格式을 버리고 高宗 에게 '皇'(皇), '勅令'(勅令), '大日本'(大日本) 等의 表現을 써보냈다. 이른바 書契問題(書契問題)로서 朝鮮 政府로서는 적어도 對等한 位置도 아니고 日本이 상국의 位置에서 써보낸 外交 傳聞에 對해 修理를 拒否했다.

朝鮮 政府에서 衝擊 속에 激論을 벌이는 가운데 그는 "職銜(職銜)을 가서(加書)한 것은 저네들 自身 그 나라의 精靈(政令)李 一身되어 그 人君의 偶像(優賞)을 입은 것을 誇示한 것뿐이다. 所謂 官爵 (官爵)을 昇進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相關인가? 從來의 格式과 다르다고 하여 이를 詰責하며 받지 않는데, 이것이 一介 通譯官의 見解라면 怪異할 것이 없겠지만, 何必 朝廷 스스로 이를 敎界(較計)하려 하는가? 可히 一笑에 붙일 일이다." 라며 그냥 形式的인 것이니 戀戀하지 말자고 主張했다. 흥선大院君 을 直接 찾아가 日本이 平和的인 뜻으로 修交하려는 한 大局的 見地에서 書契를 받아들이자고 說得하였으나 亦是 拒否됐다.

1874年(高宗 11年) 9月 領議政 이유원 過度 繼續 衝突하고 自身의 뜻이 더以上 통하지 않는 걸 納得하게 된 그는 辭退했다. 官職에서 물러난 그는 舍廊房에 出入하는 젊은 兩班子弟들에게 朴智元 의 思想을 講義하기도 하고 中國 을 往來한 使臣이나 譯官 들이 傳하는 새로운 思想을 傳하기도 했다. 《燕巖集 燕巖集》, 《海國圖志 海國圖志》 等에 對한 講演과 自鳴鐘 , 時計 , 胎葉 , 機械 , 西洋畫 等을 紹介하는 한便, 西洋 列强의 무서움 및 中國의 敗北와 兩廡 運動 等 世界의 情勢를 傳하고 富國强兵을 力說했다.

1875年(高宗 12年) 5月 朝鮮 政界에서 隱退한 몸임에도 大院君 을 찾아가 '萬若 저들(日本)李 砲聲을 한 番 發射하기에 이르면 以後 받으려 해도 이미 때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라며 再次 說得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江華島 條約 以後 [ 元本 編輯 ]

1875年(高宗 12年) 9月 日本은 운요 號 ( 운양호 )로 江華島를 砲擊했다. 그와 弟子 김홍집 , 譯官 오경석 等은 다시 한 番 修交를 强力히 促求하고 說得해 이듬해 2月 江華島 條約 을 맺게 됐다. 以後 多數에 依해 賣國奴로 糾彈받고 謀陷에 시달린 그는 病席에 누웠다. 그의 文人 中 한 사람인 雲養 김윤식 은 "공 (朴珪壽를 指稱) 은 늘 天障을 쳐다보며 길게 歎息하며, 潤氣(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將次 따라서 亡하리니 可憐한 우리 生民(生民)李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했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病席에 누웠다."라고 했다.

1875年(高宗 12年) 11月 25日 大王大妃의 加上尊號玉冊文製述官(加上尊號玉冊文製述官)을 겸했다.

1876年(高宗 13年) 1月 健康도 좋지 않았을 뿐더러 七旬을 맞은 그는 致死(隱居)를 상주했으나 不許됐고 代身 老臣들의 모임인 耆老所 (耆老所)에 所屬돼 几杖 (지팡이)과 椅子, 按摩를 下賜받았다.

1876年(高宗 13年) 2月 水原府 留守 (水原府 留守)에 任命됐으나 健康이 惡化돼 가지 못했고, 病勢가 差度를 보이던 8月 9日 水原府 留守 에 再次 任命돼 水原으로 내려갔다.

1877年(高宗 14年) 2月 9日 [19] 에 林地인 水原府 廳舍에서 71歲를 一期로 死亡했다. 高宗 은 슬퍼하며 '度量과 識見이 告明하고, 文學이 剝蝕해서 내가 依支하고 온 朝野(朝野)가 期待하던 사람이다. 近來에 右議政의 벼슬을 벗은 것과 關聯하여 特別히 거기에 머물러 살게 한 것은 바로 平時에 精力이 剛直하여 暫時 休息하게 해주면 다시 登用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어찌 까닭모를 病으로 갑자기 永永 가버릴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내 슬픔과 恨歎이야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라며 承旨 를 보내 致祭하게 하고, 3年値 祿俸(祿俸)을 賻儀로 支給했다.

事後 [ 元本 編輯 ]

朴珪壽의 門下生들
(왼쪽부터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윤치호 順)

1877年(高宗 14年) 京畿道 楊州郡 노원면 하계리 (現, 서울特別市 蘆原區 하계동) 산 20-3番地 現在 徐羅伐 高等學校 자리에 安葬됐다. [20]

1878年(高宗 15年) 11月 1日 文益(文翼)의 諡號가 내려졌다. 그의 思想과 學問은 김옥균 , 박영효 , 유길준 , 윤웅렬 , 김홍집 , 윤치호 , 홍영식 , 서재필 等에게 繼承됐다. 그가 죽은 後에도 劉大致 , 오경석 等이 門下生들의 訓育을 맡았다. 兩廡 運動 모델의 동도서기를 主張했던 朴珪壽와 달리 弟子들은 메이지 維新 모델의 急進的인 開化를 向해 나아간다.

1884年(高宗 21年) 10月 그의 弟子들인 김옥균 , 박영효 , 서재필 , 유길준 等이 甲申政變 에 失敗해 大擧 日本 美國 으로 亡命갔다. 門下生들이 逆徒들이 되자 이미 死亡한 그 亦是 官爵을 모두 삭탈당했으며, 집은 헐려 空터가 됐다가 1906年 寶城中學校 敷地가 됐다.

1894年(高宗 31年) 淸日戰爭 에서 勝利한 日本을 등에 업고 開化派들이 朝廷에 復歸해 甲午更張 을 實施한 뒤에야 赦免復權됐다.

1910年 大韓帝國 滅亡 後 그의 開化 思想과 삶을 紹介한 文集이 처음 刊行됐다. 燕巖集 亦是 처음으로 正式 刊行됐다.

1921年 3月 31日 日帝强占期 였지만 李王職 (李王職) 等으로 命脈은 維持하던 純宗 의 名으로 신응조 (申應朝), 이돈우 (李敦宇), 민영환 (閔泳煥) 等과 高宗 의 卯正에 配享됐다.

1950年 6.25 戰爭 桶에 京畿道 廣州郡 에 保管 中이던 그의 著書와 遺物 相當數가 消失됐다. 開化派 들에 對해 解放 以後에도 評價가 좋지 않아 같이 잊혀져 가는 듯했던 그의 思想은 1970年 代가 돼서야 國史編纂委員會 를 통해 한글로 飜譯됐고, 70年代 中盤부터 日本 덴리대學校 朝鮮學會 에서도 그의 著書와 思想 等에 對한 本格的인 硏究가 進行됐다.

思想과 信念 [ 元本 編輯 ]

그의 開化 思想은 實學 思想의 近代志向的 側面을 內在的으로 繼承한 위에 외발的 要因이 作用해 觸發된 것으로, 先代의 北學派 學者들이 主張한 利用厚生(利用厚生)이었다. 두 次例에 걸친 連行을 통하여 世界 情勢를 把握하고 西歐에 보다 優秀한 文明이 있음을 認定, 좋은 것은 果敢하게 受容하자는 意見을 開陳하게 됐다. 中國의 開化派 官吏들과 接觸하면서 開化의 必要性을 切感하고 個項을 力說했다.

開港, 開國論 [ 元本 編輯 ]

그는 西洋事情에 밝아 신문물의 輸入과 門戶開放을 主張했다. 그는 個項을 통해 西歐의 先進 文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할아버지 朴智元 의 思想을 後代의 開化派에게 傳達하여 北學派 의 改革, 實用主義 學問을 가르쳤다. 그는 現實에 有用하게 쓰이지 못하는 學問은 죽은 學問이라 했다.

그의 開國論은 그가 운양호 事件 直前 '日本이 守護를 云云하면서 兵船을 이끌고 온 것은 理解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使臣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先攻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萬一 意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武力을 行使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有事時 武力 衝突도 不辭한다는 自主的 個國으로, 武力的 屈服에 따른 他律的 個國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開國論은 日本 에 屈服하는 것처럼 曲解됐다.

그는 斥和論을 空理空談과 不必要한 體面으로 規定했다. 할아버지 朴趾源의 思想을 繼承하여 최익현 , 김평묵 等의 朱子學的 名分論에 立脚한 斥和論(斥和論)을 헛된 名分論으로 規定, 反對·批判했다. 그는 積極的인 西洋文物의 導入 및 外國과의 通商强化를 主張했고, 北學派의 思想을 開化派에게 傳授했다. 政界에서 隱退한 後 開化派 靑年들을 指導하여 김옥균 , 박영효 , 서재필 , 윤치호 , 박정양 , 이상재 等에게 影響을 주었다.

鎖國 政策에 對해 [ 元本 編輯 ]

個項波로 알려진 朴珪壽의 行跡에 對해서는 論難의 餘地가 있다. 成均館 大學校 韓國漢文學과 김명호 敎授에 따르면, 그가 斥邪論者들과 마찬가지로 大院君의 羊이 政策에 同調했으며 다만 交涉 餘地를 주어 西洋을 中華文明 에 歸依시키려 했을 뿐이란 것이다. [21]

제너럴 셔먼 號 를 불태우던 1866年 朴珪壽는 强勁한 斥和派처럼 보인다. 이어 셰난도漁戶 內航 때에도 그가 美國·中國 等에 直接 지어 보낸 各種 文書는 어디까지나 政府 側의 强勁한 立場 乃至 詰問長들이었다. [21] 1871年 辛未洋擾 때에도 美國과의 交戰을 主張하고 이를 貫徹했다.

김명호 敎授에 依하면 “朴珪壽가 洋夷를 主張하는 李杭魯 의 上疏를 稱讚했으며 西洋 오랑캐와 화친 不許 等을 담은 大院君의 攘夷策을 全幅 支持했다”며 朴珪壽를 代表的인 主和論者나 個國을 構想한 人物로 보기는 어렵다는 見解를 밝혔다. [21] 그는 “ 辛未洋擾 時期에 朴珪壽가 對美修交를 願했다는 從來의 論議는 斷片的인 資料를 통해 擴大解釋한 結果”라고 主張했다. [21]

한便 제너럴 셔먼 號에 乘船했다가 殺害된 토마스 宣敎師가 大同江을 거슬러온 것이 朴珪壽의 招請 때문이었다는 說에 對해서도 김명호 敎授는 이를 否定했다. 토마스 牧師가 베이징 에서 朴珪壽를 만나 宣敎活動의 支持와 後援 約束을 받았다는 說은 全혀 事實 無筋으로, 셔먼號 事件을 전후해 朴珪壽는 베이징 에 간 事實이 없다는 것이다. [21]

僞善的인 道德觀에 對한 批判 [ 元本 編輯 ]

北學派 들의 問題 認識 속에는 兩班 社會의 矛盾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박규수 亦是 士大夫들의 道德과 名分論이 허울이며 僞善임을 指摘했다. 先代의 선비들이 現實 政治나 벼슬길을 멀리했던 것은 道德的 問題가 아니라 但只 自己 自身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음은 벼슬길에 出仕한 後 親知에게 보낸 便紙 中 一部다.

大抵 先輩들이 벼슬길을 멀리한 것은 그들이 淸廉潔白한 때문은 아니라 봅니다...(인용문)...중고 時代의 士大夫들은 실은 꿋꿋한 節槪를 崇尙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利害得失에 밝았던 분들일 것이외다. 自己 聰明과 氣力을 浪費할까봐, 아니면 於此彼 牽制 때문에 배운 바를 發揮하기 어려우니까, 或은 廉恥不拘하고 봐도 뜯어먹을만한 것이 없었던지요. 先代의 옛사람들도 우리같은 人間일 뿐, 行長이나 傳記文에서 지나치게 그들을 정의롭고 道德的 存在인 것처럼 美化했을 따름입니다.

[22]

工夫가 完熟해질대로 完熟해진 42歲 以後의 出仕길이니까 젊은 血氣로 한 말은 아니다. 그를 비롯한 北學派 들의 作品이나 言及에서 나타나는 朝鮮 社會 矛盾의 核心은 兩班들이었고 그들의 僞善과 我執이 歷史的 發展을 막았기 때문에 오늘의 問題가 繼續된다는 共通的인 問題意識이 있었다.

合理的인 外交論 [ 元本 編輯 ]

外交關係에 있어서 道義的인 것과 感情 보다는 實利를 찾을 수 있는 것이 外交의 基本이라 主張했다. 이에 따라 衛正斥邪派 의 盲目的인 閉鎖論에 抵抗하고 西歐의 文物을 받아들이는 한便 外國의 主張이 合當하다면 이를 無條件 排斥할 것이 아니라 어느程度 受容해야 됨을 力說했다. 外國의 主張을 受容하는 한便 妥協을 통해서 折衷案을 찾자고 主張했다.

日本 과 丙子修好條約이 締結될 때는 幕後에서 反對派를 說得하여 條約 締結에 決定的으로 貢獻했다. 그는 重要한 것은 呼稱 問題가 아니라며 實質的으로 朝鮮이 獲得할 수 있는 利益을 찾아야 함을 力說했다. 1875年(高宗 13年) 운요호 事件 으로 日本 이 修交를 要求하자 최익현 (崔益鉉) 等의 强力한 斥和 主張을 물리치고 江華島 條約 을 맺게 했다. 그 뒤 그는 斥邪派로부터 온갖 人身攻擊에 시달리게 된다.

동도서기論 [ 元本 編輯 ]

그의 弟子들이 메이지 維新 式 開化를 主張했기 때문에 그도 같은 立場으로 誤解되는 境遇가 많으나, 實狀 그는 淸나라 의 동도서기論을 主張했다. 어디까지나 兩廡 運動 모델을 따른 것이다. 그는 西洋法(西洋法)에 對한 東洋 學問과 道德性의 優越함을 確信했던 儒學者로, 北學派 思想의 延長線上에서의 個國通商論이었다. 그의 弟子들은 各自 스승인 朴珪壽의 思想을 時代的 狀況에 맞게 實踐한 것 뿐이다. 西洋의 物質 文明은 亦是 優秀하나 阿片 戰爭이나 包含 外交 等을 미뤄봤을 때 分明 西洋의 것을 踏襲해선 안된다는 認識이 있었다. 東洋의 精神을 지키면 西洋 亦是 배울 點이 있고 改善될 點이 있을 것이라는 見解였다.

士大夫와 百姓 [ 元本 編輯 ]

朴珪壽는 百姓이 있은 뒤에야 士大夫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士大夫가 百姓의 윗사람이 아니라 百姓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그 職分이라 가르쳤다. 이를 實踐에 옮기기도 했다. 다음은 그 逸話다.

그의 집안은 高祖父 代에까지는 漢城府 의 閥閱家門이었지만 祖父 朴智元 의 代부터는 財産이 없었다. 그의 處地를 안타깝게 여긴 門下生인 生員 인 朱氏(周氏)가 박규수 모르게 논 80席을 사뒀다. 그런데 신氏(申氏) 姓을 가진 시골 老人이 찾아와 '年前에 詐欺를 當해 大監宅 땅을 모르고 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했다. 朴珪壽는 週 生員을 불러 땅 文書를 신氏 老人에게 주라 했다. 주생원이 後生들을 위해 그러지 말라고 哀乞하였으나 朴珪壽는 '百姓이 있고 士大夫가 있는 法'이라며 끝내 老人에게 주게 했다.

기타 [ 元本 編輯 ]

유길준 家門과의 惡緣 [ 元本 編輯 ]

燕巖 朴趾源 과 兪吉濬의 5代祖 유한준 은 當代 雙璧을 이루던 文章家들로 本來 文友(文友)이자 親舊였는데, 燕巖 朴趾源 이 유한준의 글을 諷刺한 데서 憾情싸움이 오가다가 이런저런 일이 있어 둘은 끝내 怨讐가 됐다. 싸움은 代를 이어 後日 朴智元 의 아들 박종채 과정록 에서 유한준을 깎아 내렸다.

유한준은 아버지 ( 朴智元 을 말함) 가 自身의 글을 褒貶한 便紙로 인해 아버지에게 怏心을 품게 됐다. 아버지가 中年 以來 誹謗을 받은 것은 모두 이 사람이 뒤에서 操縱하고 使嗾한 것이었다. 當時 慶州 金哥가 權勢를 잡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本디 이들과 사이가 안 좋았으므로 유한준은 이때를 틈타서 아버지를 해치려 했던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陰險한 字인가! 이 者는 우리 집안 百歲(百世)의 怨讐이다.
 
과정록 中에서

저癌 유한준과 燕巖 朴趾源은 집안끼리 親分이 있었고 年輩도 비슷해 젊은 時節부터 切親한 사이였다. 그런데 燕巖 朴趾源 이 유한준에게 '글이 너무 技巧에 치우쳤다'고 여러 次例 酷評했다. 그러자 저癌은 燕巖에게 '오랑캐의 年號를 쓴 글(虜號之稿)을 쓴다'라며 몰아붙였다. [23] 決定的으로 先山 移葬 問題가 불거지면서 怨讐가 되는데, 燕巖이 祖父 박필균 과 親父 박사유 의 墓를 移葬코자 한 곳이 마침 機械 劉氏 先山 近處였었다. 유한준은 이를 反對하다가 막을 方法이 없자, 元來 집안의 亭子가 있던 곳이라며 어린 나이(15歲)에 죽은 自己 孫子를 박필균 墓 위에 埋葬해 法律로 다투게 됐다. 이에 박종채는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百歲의 怨讐'로 規定한 것이었고, 이에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度 燕巖을 '매우 잡스러운 人間'이었다라고 받아치는 等 感情의 골은 돌이킬 수 없게 됐었다.

1871年 弘文館 提學 朴珪壽는 鄕市 에서 壯元으로 뽑힌 詩 한 數를 읽고는 壯元及第者를 呼出했다. 그가 當時 16歲의 유길준 으로 바로 유한준의 5代孫이었다. 그러자 유길준 의 아버지 유진수가 '어떻게 怨讐같은 者를 찾아간다는 말이냐'며 頑强히 反對했다. 그러나 弘文館 提學으로 유길준 을 만난 朴珪壽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를 거듭 稱讚하고는,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些少한 問題로 佛畫했으나 이제부터 옛날처럼 다시 和睦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어른들이 풀지 못하셨던 感情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는게 아니겠냐'며 感慨無量해했다. 또한 힘써 工夫할 것을 當付하고 舊怨(舊怨)을 잊고 자주 찾아오라며 慇懃하게 對했다. 그의 人品에 感服한 유길준 은 그 때부터 朴珪壽를 스승으로 禮遇하고 배웠으며 開化派 로서 平坦하지만은 않은 삶을 貫徹했다.

學問 硏究와 交遊 [ 元本 編輯 ]

할아버지 朴智元 을 비롯하여, 유형원 , 박제가 , 利益 , 정약용 , 서유구 , 김매순(金邁淳), 조종영, 홍석주(洪奭周), 윤정현(尹定鉉) 等을 先輩로서 私淑했고, 文友로서 남병철, 金榮作, 金相賢(金尙鉉), 신응조(申應朝), 윤종의, 신석우(申錫愚) 等과 主로 交遊했다.

그의 學風은 弟子의 한 사람인 김윤식 (金允植)의 指摘에의 하면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金石(金石)·고고(考古)·意氣(儀器)·雜卜(雜服) 等의 日까지 硏究하여 正確하고 實事求是(實事求是)하지 않는 바가 없고, 規模가 宏大하고 綜理(綜理)가 微細 精密"했다 한다.

朴趾源의 孫子로서 人脈으로도 北學派에 直結되는 그가 私淑한 先輩 中에는 朴智元 , 박제가 老論 北學派 外에도 남인 정약용 (丁若鏞), 서유구(徐有?), 北人 유형원 , 尹鑴 等의 學問도 幅넓게 私淑했다. 多樣한 先輩 學者들의 學問을 私宿하였던 탓에 어떤 특정한 思想만이 正答은 아니라는 結論을 내리게 된다. 또한 少論 유수원 의 學問에도 關心을 갖기도 했다.

白衣政丞 劉大致 , 中人 出身 外交官 오경석 等과는 身分을 超越하여 親舊로 사귀었고, 僧侶 이동인 은 思想을 떠나 親舊로 지냈다. 朴珪壽는 사람은 身分이나 地位로 評價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評價해야 된다고 했다. 朴珪壽는 自身의 門下에서 김옥균 , 박영효 , 박정양 , 서재필 , 김윤식 , 김홍집 , 유길준 , 어윤중 , 윤웅렬 等의 弟子, 文人들을 길러냈다.

作品 活動과 地圖 製作 [ 元本 編輯 ]

坪魂의 封套

그림도 좋아해 數百 餘 篇의 그림과 글씨를 남겼다고 하나 6.25 戰爭 때 作品들이 大部分 消失됐다. [4] 앞에서 記述했듯 그의 글씨는 淸나라 高官大爵들의 稱讚을 받기도 했었다.

古典 읽기와 工夫 方法을 흥미롭게 엮은 '上告도회문儀禮' 16卷을 지었고, 그가 直接 製作한 地球본 設計圖 坪魂의(平渾儀)와 天文誌度 看坪의(簡平儀)의 種이 製作本 等이 現在 傳한다. [24]

文人畫와 水墨畫 外에도 또한 京畿道 地圖인 東進方略(東津方略)을 그렸고, 平安道 全圖를 그리기도 했다. 淸나라 의 世界地圖와 天文 道 等 여러 文獻을 參考해 世界 地圖 魂坪의 (渾平義)와 天文圖 , 看坪의 (簡平義) 等 天文地圖를 製作했다.

朴珪壽의 해時計 이자 天文圖인 ' 看坪의 (簡平儀)의 種이 製作本은 2006年 5月 實學博物館 起工式 때 公開됐다. [25]

家族 關係 [ 元本 編輯 ]

  • 否認 : 沿岸 李氏 (이준수의 딸)
    • 아들 : 박제응(朴齊應)
      • 孫子 : 박하양(朴夏陽)
      • 孫子 : 박희양(朴羲陽)

咀嚼 [ 元本 編輯 ]

著書 [ 元本 編輯 ]

桓齋文集 (1913年 印刷 影印本)

詩集 [ 元本 編輯 ]

  • 金유시집(錦?詩集)
  • 長岩詩集(莊菴詩集)
  • 金油脂林(錦?志林)

作品 [ 元本 編輯 ]

  • 天文圖
  • 魂坪의(渾平義), 世界地圖
  • 看坪의(簡平義), 天文誌度
  • 東進方略(東津方略), 京畿道 地圖

같이 보기 [ 元本 編輯 ]

事件 [ 元本 編輯 ]

關聯 人物 [ 元本 編輯 ]

朴珪壽를 演技한 俳優 [ 元本 編輯 ]

各州 [ 元本 編輯 ]

  1. “名分論(名分論)” . 2023年 6月 12日에 確認함 .  
  2.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 34페이지
  3. 一說에는 朴珪壽의 生年月日이 1808年 10月 27日이라는 說도 있다.
  4. (歷史 파고들기④) '朝鮮 天才' 朴珪壽의 特別한 學習法 -2012年 5月 31日 오마이뉴스 김종성 記者
  5. 陳外從祖父: 朴珪壽로 따지면 아버지의 外三寸. 다시말해 燕巖 朴趾源의 妻男.
  6. 朴珪壽를 비롯한 當時 사람들 中 一部는 地球가 둥근 形態이고 그 속에는 말랑말랑하거나 묽은 鎔巖이나 火山같은 것이 地球 속에 存在한다는 事實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火山 爆發이나 鎔巖을 神의 瞋怒, 鬼神의 災殃으로 여기던 朝鮮 大部分의 傳統的 視角이 變한 건 아니었다.
  7. 朝鮮의 마지막 希望이었던 '驍名世子' 오마이뉴스.
  8. 玉笏: 保釋 구슬을 裝飾한 莫大, 天子가 지니고 다녔음
  9. 燕巖 朴趾源의 厖大한 著作들을 하나로 묶어 刊行한 燕巖集은 大韓帝國 때인 20世紀 初에 正式 刊行됐다. 燕巖集을 刊行하려는 努力은 그 前에 한두 次例 있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燕巖集이란 이름의 著作은 當時 存在하지 않았다.
  10. 封庫罷職(封庫罷職):不正을 저지른 管理를 罷免하고 官庫를 봉하여 잠근다는 뜻의 故事成語. 封:封할 鳳 庫:倉庫 고 罷:그만둘 파 職:職分 職.
  11. 受戒
  12. 入承大統:대筒을 잇는 入養이란 뜻의 王室用語
  13. 문일평, 《호암전집》 第3卷, 서울: 粗鑛舍, 1939年, 267~268쪽.
  14. 巧拙: 朝鮮時代 서울의 宮中·官廳·軍營 및 地方官署에서 勤務하던 軍校(軍校)와 羅卒(羅卒)의 總稱. 地方衙前의 하나로 重要 人士들의 警護, 管轄 區域 防犯巡察, 犯法者의 逮捕 拘禁을 擔當했다.
  15. 怪被選: 나룻배. 작은 배의 總稱
  16. 鎭營將: 1627年( 人組 5年) 各 道의 地方軍隊를 管轄하기 위하여 設置된 陣營(鎭營)의 情3品 당상직 長官(將官)
  17. 무군무부(無君無父): 賃金이 누군지 아비가 누군지 몰라본다는 뜻
  18. 第2次 阿片戰爭이 있었던 1861年 以後 淸國은 總理各國通商事務衙門을 設置하고 三九·오구通商大臣 2名을 責任者로 했다. 숭後는 招待 삼구通商大臣(三口通商大臣)으로 베이징 條約에 依해 開港된 雨裝, 天津, 騰走의 對外事務를 專擔했다. 1870年 삼구·오구通商大臣은 北洋通商代身으로 單一化돼 袁世凱 가 거쳐갔다.
  19. (陰曆 1876年 12月 27日 )
  20. 現在 그의 墓所는 하계동 大單位 아파트 團地 開發 및 徐羅伐 高等學校 以前으로 1989年 8月 2日 忠淸北道 報恩郡 외속리면 불목리로 移葬됐다.
  21. “朴珪壽는 鎖國 同調한 大院君 側近” 京鄕新聞 2005.01.27
  22. [貞洞칼럼] 政治不信의 프레임 京鄕新聞 2010.03.10
  23. 유한준은 文章의 模範을 司馬遷과 班固 等 津한(秦漢) 時代의 拷問(古文)을 典範으로 삼았고, 朴趾源은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글을 본받아 個性的인 글을 創作하는 것)을 글쓰기의 目標였다.
  24. “實學 遺物 別것 다 있네” Archived 2016年 2月 25日 - 웨이백 머신 朝鮮日報 2007.10.03
  25. 朴智元 肖像 元本·묵매도 最初 公開 Archived 2015年 9月 23日 - 웨이백 머신 朝鮮日報 2007.05.07

參考 資料 [ 元本 編輯 ]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國際舞臺에의 進出"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 박은식, 《한국통사》
  •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
  • 金映豪, 〈實學과 開化思想의 硏究問題〉,《韓國史 硏究 8》(韓國史硏究會, 1972)
  • 이완재, 〈朴珪壽의 生涯와 思想〉,《私學論旨 3》 (私學論旨, 1975)
  • 金映豪, 〈開化思想의 形成과 그 性格〉,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 16》 (國史編纂委員會, 1975)
  • 김의환, 〈?齋先生集〉, 日本 덴리대學校 朝鮮學會, 《朝鮮學報 86》 (덴리대學校 朝鮮學會, 1978)
  • 김명호, 《桓齋 박규수 硏究》 (創作과 批評史, 2008)

外部 링크 [ 元本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