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南誾,
1354年
~
1398年
10月 6日
(
陰曆 8月 26日
)은
高麗
말과
朝鮮
初의 文臣으로, 本貫은
宜寧
이다.
高麗
末期에 倭寇 討伐과 新進士大夫 政治人으로 活動하였으며
李成桂
를 도와 朝鮮王朝 個國에 功을 세웠다. 開國功臣 1等으로 義城郡에 封해졌고, 事後
議政府
領議政
에
追贈
된 뒤
義城府院君
으로 追封되었다.
本貫은 宜寧(宜寧)이고, 號(號)도 宜寧(宜寧)이며 諡號는 講武(剛武)이다.
杏村 李嵒
의 外孫女사위이기도 하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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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出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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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隱隱
1354年
檢校
[1]
市中(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의 아들로 태어났다. 兄은 後日
朝鮮
의 開國功臣이자
領議政
을 지낸
南在
, 아우는 偶像節度使(右廂節度使)를 지낸 남지(南贄)이다. 後日
領議政
을 지낸
남구만
이나, 將軍
남이
는 兄 南在의 後孫들이었다.
어려서부터 記憶力이 뛰어났고, 글을 잘 지었다. 또한 武人의 氣質도 있었다.
政治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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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3年
淫書
로 文官 官僚에 첫 薦擧된 그는 1年 後
1374年
(高麗 恭愍王 23年)에
文科
에 及第하여
禑王
때
三陟
에서
倭寇
를 무찔렀다. 1380年(禑王 6年) 社稷壇職(社稷壇直)李 되고 이어서 禑王 때 지三陟軍事(知三陟郡事)로 있다가
三陟
에서 倭寇를 물리친 뒤
司僕寺
情으로 昇進했다.
高麗
權門勢族
들의 腐敗에 厭症을 느낀 그는 그 뒤에 改革을 主張하는
李成桂
,
정도전
,
정몽주
等의
新進士大夫
에 加擔, 그 中
정도전
等과 함께
李成桂
勢力의 中心 人物이 되어 以後 정도전, 鄭夢周 等과 함께
明나라
와 外交關係를 締結해야 할 것을 極力 主張하였다.
1388年
(禑王 14年)
요동 征伐
當時에는
權門勢族
과 對立, 葛藤하며 大國에 挑戰해서는 안된다는 理由로 요동征伐을 反對하였으며, 조인옥(趙仁沃) 等과 함께 友軍都統使
李成桂
에게 大勢를 理由로
威化島 回軍
을 進言했다.
1388年
李成桂
는 그의 進言을 받아들여
威化島 回軍
을 斷行한다. 回軍 뒤에는 李成桂의 王位 推戴를 計劃하는 데 參與하였다.
1389年
(供養王 1年)에는
공양왕
推戴에 參與한 뒤
鷹揚軍
上護軍
兼 軍部
板書
(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가 되고 곧
密直副使
로 昇進하였으나
1391年
(供養王 1年)에
李成桂
가
海州
에 간 사이에 數
門下侍中
정몽주
의 彈劾으로
照準
,
정도전
,
윤소종
,
糟粕
等과 함께 流配되었다.
朝鮮 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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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2年
(供養王 2年)
4月
에
정몽주
가
善竹橋
에서 殺害되자 流配에서 풀려나 政界에 復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任命되었으며 그해
정도전
,
照準
,
조인옥
等 52人과 함께
李成桂
를 王으로 推戴하여
朝鮮
王朝를 開局하였다.
建國 直後 그해
8月
佐命功臣
(佐命功臣)에 錄勳된 뒤
判中樞院事
(判中樞院事) 兼 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가 되고,
開國功臣
1等館에 책록된 뒤 宜寧郡(宜寧君)에 封해졌으며, 全(田) 2백結果 奴婢 25具를 下賜받았다. 그 뒤 다시 義城郡(宜城君)으로 開封되고 參贊門下府使가 되었다. 하지만
신덕왕후
姜氏 蘇生
이방석
을 世子로 冊封하는데 積極的으로 參與했고 "太祖가
鷄龍山
터를 보고 돌아때에 정안대군
李芳遠
이 남恩誼 帳幕(帳幕)에 들어가니, 南誾이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 帳幕에 들어오지 마시오.’ 하기에, 李芳遠이 드디어 나와서 들어가지 않았었다. 이때에 太祖가(이성계) 世子를 남은에게 付託하시었다.”이로서
정안대군
과 敵을 지게 된다.
1394年
3月
三四 左僕射(三司左僕射)가 되었다.
요동征伐 祈禱와 失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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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5年(太祖 4年) 父親喪을 當하여 辭職하였으나, 兄인
南在
와 함께 特別히 敍用되어
1396年
參贊門下府使 兼 判尙瑞司事가 되었다.
이때
明나라
로 보낸 正朝使(正朝使)가 가져간
李成桂
의 親筆 表文(表文) 中
明나라
洪武帝
의 脾胃를 거슬리는 單語가 있어 使臣
定總
等이 殺害되고 刑罰을 받았으며, 그 글의 草案者인
정도전
을 明나라에 押送하도록 壓力을 加해오자,
明나라
의 使臣들을 달래서 되돌려보냈다. 軍糧을 備蓄하였으며 사람을 보내 요동 周邊의 情勢를 把握, 偵探케 한다. 그 뒤 隱密히
搖動
周邊의 지리, 地形, 地物을 記錄한 珍島(陣圖)를 製作하는 等 요동征伐을 計劃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요동 征伐 計劃은
明나라
에 漏泄된다.
1397年
明나라
의 謝恩使가 가지고 온 諮問(咨文)에서
朝鮮
朝廷에 요동 征伐을 中斷하라고 警告했다. 요동 征伐을 目的으로 明나라와 싸우기 위해 그는
정도전
과 함께 兵力을 徵發하는 한便 王族들과 여러 豪族으로부터 沒收한 士兵들을 새로 新設한 義興三軍府에 倂合한 뒤 그가 지은 珍島(陳圖)에 따라 大大的인 軍事 訓鍊을 實施하였다. 이러한 鄭道傳의 改革과 明나라와의 戰爭 準備는 같은
開國功臣
人
照準
等의 反撥을 불러일으켜 끝내 訣別하게 되고 만다.
남은과
정도전
은 함께
6月
確保한 兵力으로
漢陽
에서 震度(陣圖) 訓鍊을 하면서
太祖 李成桂
에게 出兵을 要請하였는데, 이때
照準
의 强力한 反對로 實行하지 못했다.
第1次 王子의 亂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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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8年
第1次 王子의 亂
때 남恩誼 妾의 집인 송현방에 모여 政事를 論하던 中
李芳遠
에게 襲擊을 받고 하경(河景)과 催運(崔?)이라는 隨行員을 데리고 逃走하였으나 붙잡혀서 最後를 맞이하였다.
정안대군
도 그를
정도전
의 一派라고 非難하면서도 그의 家族이나 親戚에게 緣坐制를 適用하지 않았고, 그의 兄과 동생, 아들들은 繼續 官職에 登用된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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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屍身은
京畿道
龍仁郡
에 安葬되었다.
世宗 卽位 以後에 남은, 이제는 罪가 있어도 그 功을 잊을 수 없다 하여
增
議政府
左議政
으로
贈職
되었다가 다시
增
領議政
에 秋層되었고 義城府院君으로
追封
(追封)되었으며,
世宗大王
卽位 後
1421年
(世宗 3年)에
太祖
의 卯正에 配享되어
시호
는 講武로 내려졌다.
그는
第1次 王子의 亂
當時
정도전
의 便에 선 理由로 殺害되었지만 그의 아들들 남경수(南景壽),
남경우
(南景祐), 남경복(南景福), 남境地(南景祉)는 連坐되지 않았다. 死亡할 當時 이미 네 아들이 태어나 있어서, 朝鮮王朝實錄에 있는 그의 졸기에 네 아들의 이름이 言及되었는데, 이미 成人이었는지 與否는 不確實하다. 둘째 아들 남경우는
世宗大王
때부터
斷種
,
世祖
때까지 中樞院의 職責과 刑曹參判, 司憲府掌令, 慶州府尹 等을 두루 지내고 種1품官職에 올랐으며
奉朝請
에 들어갔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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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曾祖父: 남翊儲(南益?)
- 祖父: 남천로(南天老)
- 조某 : 咸陽朴氏(咸陽朴氏),
中郞將
鎛鐘(朴琮)의 딸
- 아버지:
남을번
(南乙蕃)
1320年
-
1395年
2月 13日
, 檢校
[3]
門下侍中
, 諡號는 庚熱(敬烈))
- 어머니: 崔氏(崔氏)
- 否認: 가순택週 江陵金氏(嘉順宅主 江陵金氏), 金보손(金寶孫)의 딸
- 丈人: 金보손(金寶孫)
- 妻祖父: 김광병(金光丙)
- 妻外祖父:
李嵒
(李?, 號는 杏村, 本貫은
高聲
, 1297(忠烈王23)-1334(恭愍王13))
- 妻叔父: 김덕손(金德孫)
- 外祖父: 最强(崔江)
- 査頓: 이거경(李居敬)
- 査頓:
조영무
南誾이 登場한 作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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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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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檢校는 高麗時代와 朝鮮 前期의 官職 中 失職이 아닌 名譽職의 職責 앞에 붙여, 名譽職임을 나타내는 稱號였다.
- ↑
南乙京義 孫子인 남계영(南季瑛, 1415年 ~ ?)의 門過放牧 家族 記錄에는 乙頃(乙卿)으로 되어 있다.
- ↑
檢校는 名譽職에 붙는 稱號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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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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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 高麗史
- 高麗史節要
- 太祖實錄
- 定宗實錄
- 大東野乘
- 國朝寶鑑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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