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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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南誾
高麗國 社稷壇職
(高麗國 社稷壇直)
任期 1380年 2月 8日 ~ 1380年 4月 9日
君主 高麗 禑王 왕우
攝政 이인임

조선국 判中樞院事 兼 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朝鮮國 判中樞院事 兼 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任期 1392年 8月 9日 ~ 1395年 2月 15日
君主 朝鮮 太祖 異端
攝政 門하정승 照準 (前)

身上情報
出生日 1354年
居住地 朝鮮 漢城府
死亡日 1398年 10月 6日 ( 陰曆 8月 26日 ) (享年 45歲)
學歷 1374年(高麗 恭愍王 23) 文科 及第
正當 無所屬
本館 宜寧(宜寧)
父母 아버지 남을번(南乙蕃)
어머니 崔氏 夫人(崔氏 夫人)
兄弟姊妹 南在 (南在)
아우 남지(南贄)
配偶者 江陵 金氏 否認(江陵 金氏 夫人)
子女 남경수(長男)

남은 (南誾, 1354年 ~ 1398年 10月 6日 ( 陰曆 8月 26日 )은 高麗 말과 朝鮮 初의 文臣으로, 本貫은 宜寧 이다. 高麗 末期에 倭寇 討伐과 新進士大夫 政治人으로 活動하였으며 李成桂 를 도와 朝鮮王朝 個國에 功을 세웠다. 開國功臣 1等으로 義城郡에 封해졌고, 事後 議政府 領議政 追贈 된 뒤 義城府院君 으로 追封되었다.

本貫은 宜寧(宜寧)이고, 號(號)도 宜寧(宜寧)이며 諡號는 講武(剛武)이다. 杏村 李嵒 의 外孫女사위이기도 하다.

生涯 [ 編輯 ]

出生 [ 編輯 ]

남隱隱 1354年 檢校 [1] 市中(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의 아들로 태어났다. 兄은 後日 朝鮮 의 開國功臣이자 領議政 을 지낸 南在 , 아우는 偶像節度使(右廂節度使)를 지낸 남지(南贄)이다. 後日 領議政 을 지낸 남구만 이나, 將軍 남이 는 兄 南在의 後孫들이었다.

어려서부터 記憶力이 뛰어났고, 글을 잘 지었다. 또한 武人의 氣質도 있었다.

政治 活動 [ 編輯 ]

1373年 淫書 로 文官 官僚에 첫 薦擧된 그는 1年 後 1374年 (高麗 恭愍王 23年)에 文科 에 及第하여 禑王 三陟 에서 倭寇 를 무찔렀다. 1380年(禑王 6年) 社稷壇職(社稷壇直)李 되고 이어서 禑王 때 지三陟軍事(知三陟郡事)로 있다가 三陟 에서 倭寇를 물리친 뒤 司僕寺 情으로 昇進했다. 高麗 權門勢族 들의 腐敗에 厭症을 느낀 그는 그 뒤에 改革을 主張하는 李成桂 , 정도전 , 정몽주 等의 新進士大夫 에 加擔, 그 中 정도전 等과 함께 李成桂 勢力의 中心 人物이 되어 以後 정도전, 鄭夢周 等과 함께 明나라 와 外交關係를 締結해야 할 것을 極力 主張하였다. 1388年 (禑王 14年) 요동 征伐 當時에는 權門勢族 과 對立, 葛藤하며 大國에 挑戰해서는 안된다는 理由로 요동征伐을 反對하였으며, 조인옥(趙仁沃) 等과 함께 友軍都統使 李成桂 에게 大勢를 理由로 威化島 回軍 을 進言했다.

1388年 李成桂 는 그의 進言을 받아들여 威化島 回軍 을 斷行한다. 回軍 뒤에는 李成桂의 王位 推戴를 計劃하는 데 參與하였다. 1389年 (供養王 1年)에는 공양왕 推戴에 參與한 뒤 鷹揚軍 上護軍 兼 軍部 板書 (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가 되고 곧 密直副使 로 昇進하였으나 1391年 (供養王 1年)에 李成桂 海州 에 간 사이에 數 門下侍中 정몽주 의 彈劾으로 照準 , 정도전 , 윤소종 , 糟粕 等과 함께 流配되었다.

朝鮮 個國 [ 編輯 ]

1392年 (供養王 2年) 4月 정몽주 善竹橋 에서 殺害되자 流配에서 풀려나 政界에 復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任命되었으며 그해 정도전 , 照準 , 조인옥 等 52人과 함께 李成桂 를 王으로 推戴하여 朝鮮 王朝를 開局하였다.

建國 直後 그해 8月 佐命功臣 (佐命功臣)에 錄勳된 뒤 判中樞院事 (判中樞院事) 兼 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가 되고, 開國功臣 1等館에 책록된 뒤 宜寧郡(宜寧君)에 封해졌으며, 全(田) 2백結果 奴婢 25具를 下賜받았다. 그 뒤 다시 義城郡(宜城君)으로 開封되고 參贊門下府使가 되었다. 하지만 신덕왕후 姜氏 蘇生 이방석 을 世子로 冊封하는데 積極的으로 參與했고 "太祖가 鷄龍山 터를 보고 돌아때에 정안대군 李芳遠 이 남恩誼 帳幕(帳幕)에 들어가니, 南誾이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제부터 내 帳幕에 들어오지 마시오.’ 하기에, 李芳遠이 드디어 나와서 들어가지 않았었다. 이때에 太祖가(이성계) 世子를 남은에게 付託하시었다.”이로서 정안대군 과 敵을 지게 된다.

1394年 3月 三四 左僕射(三司左僕射)가 되었다.

요동征伐 祈禱와 失敗 [ 編輯 ]

1395年(太祖 4年) 父親喪을 當하여 辭職하였으나, 兄인 南在 와 함께 特別히 敍用되어 1396年 參贊門下府使 兼 判尙瑞司事가 되었다.

이때 明나라 로 보낸 正朝使(正朝使)가 가져간 李成桂 의 親筆 表文(表文) 中 明나라 洪武帝 의 脾胃를 거슬리는 單語가 있어 使臣 定總 等이 殺害되고 刑罰을 받았으며, 그 글의 草案者인 정도전 을 明나라에 押送하도록 壓力을 加해오자, 明나라 의 使臣들을 달래서 되돌려보냈다. 軍糧을 備蓄하였으며 사람을 보내 요동 周邊의 情勢를 把握, 偵探케 한다. 그 뒤 隱密히 搖動 周邊의 지리, 地形, 地物을 記錄한 珍島(陣圖)를 製作하는 等 요동征伐을 計劃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요동 征伐 計劃은 明나라 에 漏泄된다.

1397年 明나라 의 謝恩使가 가지고 온 諮問(咨文)에서 朝鮮 朝廷에 요동 征伐을 中斷하라고 警告했다. 요동 征伐을 目的으로 明나라와 싸우기 위해 그는 정도전 과 함께 兵力을 徵發하는 한便 王族들과 여러 豪族으로부터 沒收한 士兵들을 새로 新設한 義興三軍府에 倂合한 뒤 그가 지은 珍島(陳圖)에 따라 大大的인 軍事 訓鍊을 實施하였다. 이러한 鄭道傳의 改革과 明나라와의 戰爭 準備는 같은 開國功臣 照準 等의 反撥을 불러일으켜 끝내 訣別하게 되고 만다.

남은과 정도전 은 함께 6月 確保한 兵力으로 漢陽 에서 震度(陣圖) 訓鍊을 하면서 太祖 李成桂 에게 出兵을 要請하였는데, 이때 照準 의 强力한 反對로 實行하지 못했다.

第1次 王子의 亂과 죽음 [ 編輯 ]

1398年 第1次 王子의 亂 때 남恩誼 妾의 집인 송현방에 모여 政事를 論하던 中 李芳遠 에게 襲擊을 받고 하경(河景)과 催運(崔?)이라는 隨行員을 데리고 逃走하였으나 붙잡혀서 最後를 맞이하였다. 정안대군 도 그를 정도전 의 一派라고 非難하면서도 그의 家族이나 親戚에게 緣坐制를 適用하지 않았고, 그의 兄과 동생, 아들들은 繼續 官職에 登用된다.

事後 [ 編輯 ]

屍身은 京畿道 龍仁郡 에 安葬되었다.

世宗 卽位 以後에 남은, 이제는 罪가 있어도 그 功을 잊을 수 없다 하여 議政府 左議政 으로 贈職 되었다가 다시 領議政 에 秋層되었고 義城府院君으로 追封 (追封)되었으며, 世宗大王 卽位 後 1421年 (世宗 3年)에 太祖 의 卯正에 配享되어 시호 는 講武로 내려졌다.

그는 第1次 王子의 亂 當時 정도전 의 便에 선 理由로 殺害되었지만 그의 아들들 남경수(南景壽), 남경우 (南景祐), 남경복(南景福), 남境地(南景祉)는 連坐되지 않았다. 死亡할 當時 이미 네 아들이 태어나 있어서, 朝鮮王朝實錄에 있는 그의 졸기에 네 아들의 이름이 言及되었는데, 이미 成人이었는지 與否는 不確實하다. 둘째 아들 남경우는 世宗大王 때부터 斷種 , 世祖 때까지 中樞院의 職責과 刑曹參判, 司憲府掌令, 慶州府尹 等을 두루 지내고 種1품官職에 올랐으며 奉朝請 에 들어갔다.

家族 關係 [ 編輯 ]

南誾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各州 [ 編輯 ]

  1. 檢校는 高麗時代와 朝鮮 前期의 官職 中 失職이 아닌 名譽職의 職責 앞에 붙여, 名譽職임을 나타내는 稱號였다.
  2. 南乙京義 孫子인 남계영(南季瑛, 1415年 ~ ?)의 門過放牧 家族 記錄에는 乙頃(乙卿)으로 되어 있다.
  3. 檢校는 名譽職에 붙는 稱號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高麗史
  • 高麗史節要
  • 太祖實錄
  • 定宗實錄
  • 大東野乘
  • 國朝寶鑑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