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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로의 肖像畫, 1738年(57歲) 奏請使(奏請使)로 北京에 갔을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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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의
領議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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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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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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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례(仲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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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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廳舍(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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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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衷情(忠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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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上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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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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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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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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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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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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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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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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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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黨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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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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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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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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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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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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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로
(金在魯,
1682年
~
1759年
)는
朝鮮
의 政治家이다. 字는 중례(仲禮), 號는 廳舍(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諡號는 衷情(忠靖), 本貫은
청풍
이다. 아버지는
右議政
金九
이고, 祖父는
全羅道
觀察使
김징
이다. 老論 僻派의 巨頭
김상로
,
左議政
을 지낸
김약로
는 四寸동생이다. 다른 四寸兄弟인 김익로는
尤史 金奎植
의 6對照이다.
김상로
,
김양로
等
老論
碧波
에 加擔한 親戚들과 달리
老論
內 淸明派에 加擔하여
老論
淸明派의 指導者가 되었다.
1728年
(英祖 5)
李麟佐의 亂
鎭壓 直後
噴霧
原從功臣
1等(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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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 肅宗
때 文科에 及第하여 地平·修撰 等을 지냈다. 1716年 옛 선비들에게 없는 罪를 거짓으로 꾸며 罰을 주었던
少論
의
유봉휘
·政 式 等을 彈劾하여 罷職하게 하였다.
警鐘
때 吏曹參議·大司諫·開城府 留守 等을 지냈으나, 辛壬士禍 때에 귀양을 갔었다.
英祖
때 풀려나와 大司諫이 되어 少論의 過激派 金一警을 死刑시키게 하였다. 當時
守禦使
,
刑曹參判
,
吏曹參判
,
禮曹參判
,
副提學
,
大司諫
,
兵曹參判
,
大司成
,
右副承旨
,
漢城副左尹
等을 지냈다.
1727年
丁未換局
으로
少論
이 再登場瑕疵 罷職되었다가 이듬해
李麟佐의 亂
이 일어나자 다시 忠州 牧師로 起用되어 亂을 收拾하는 데 功을 세웠다.
以後
兵曹判書
,
藥房提調
,
知經筵事
,
藝文館提學
,
左參贊
,
右參贊
,
戶曹判書
,
판돈녕府使
,
宗廟製造
,
吏曹判書
,
刑曹判書
,
禮曹判書
等을 지냈고,
慶尙道 觀察使
도 지냈다. 그리고
黃海道 觀察使
도 지냈다. 그 後 知春秋館事로서 實錄盜聽 當相을 兼職하면서 《景宗修正實錄》을 編纂하는 데 參與했고
辛壬士禍
로 죽은
김창집
·
이이명
의 抑鬱함을 풀어주었다.
1728年
(英祖 5)
李麟佐의 亂
鎭壓 直後
噴霧
原從功臣
1等(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738年
, 판
中樞府
社로
靑
에 가서 《名詞》(明史)를 얻어왔다.
그는
老論
碧波
에 加擔한 親戚
김상로
,
김양로
等과 달리
老論
內 僻派도 아니고, 老論 時派에도 加擔하지 않고, 老論 蕩平派에도 加擔하지 않고,
老論
淸明派에 加擔하였다. 그의 아들
김치인
과 從孫子
김종수
는 老論 淸明派의 指導者가 되었다.
以後
右議政
과
左議政
을 지냈고 1740年
議政府
領議政
에 올랐고, 官職 生活의 折半은 모두 代身으로 있으면서
領議政
과
左議政
을 번갈아하며 老論의 先鋒者로 活躍했다. 著書로 廳舍誘集(淸沙遺集) 本말錄(本末錄) 廳舍日記(淸沙日記),豫期보週(禮記補註) 警誤報(庚午譜) 闡義昭鑑諺解(闡義昭鑑諺解) 좌氏집線속(左氏輯選續) 金石錄(金石錄) 鑾輿(爛餘)等이 있다.
家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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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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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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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政院日記 英祖 卽位年 甲辰(1724, 雍正2) 12月 28日(精油) 記事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