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로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김재로
김재로의 초상화, 1738년(57세)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갔을 때 모습
김재로의 肖像畫, 1738年(57歲) 奏請使(奏請使)로 北京에 갔을 때 모습
朝鮮 領議政
이름
중례(仲禮)
廳舍(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시호 衷情(忠靖)
身上情報
出生日 1682年
死亡日 1759年
國籍 朝鮮
性別 男性
黨派 老論
本館 청풍
父親 金九

김재로 (金在魯, 1682年 ~ 1759年 )는 朝鮮 의 政治家이다. 字는 중례(仲禮), 號는 廳舍(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諡號는 衷情(忠靖), 本貫은 청풍 이다. 아버지는 右議政 金九 이고, 祖父는 全羅道 觀察使 김징 이다. 老論 僻派의 巨頭 김상로 , 左議政 을 지낸 김약로 는 四寸동생이다. 다른 四寸兄弟인 김익로는 尤史 金奎植 의 6對照이다.

김상로 , 김양로 老論 碧波 에 加擔한 親戚들과 달리 老論 內 淸明派에 加擔하여 老論 淸明派의 指導者가 되었다. 1728年 (英祖 5) 李麟佐의 亂 鎭壓 直後 噴霧 原從功臣 1等(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生涯 [ 編輯 ]

朝鮮 肅宗 때 文科에 及第하여 地平·修撰 等을 지냈다. 1716年 옛 선비들에게 없는 罪를 거짓으로 꾸며 罰을 주었던 少論 유봉휘 ·政 式 等을 彈劾하여 罷職하게 하였다. 警鐘 때 吏曹參議·大司諫·開城府 留守 等을 지냈으나, 辛壬士禍 때에 귀양을 갔었다. 英祖 때 풀려나와 大司諫이 되어 少論의 過激派 金一警을 死刑시키게 하였다. 當時 守禦使 , 刑曹參判 , 吏曹參判 , 禮曹參判 , 副提學 , 大司諫 , 兵曹參判 , 大司成 , 右副承旨 , 漢城副左尹 等을 지냈다. 1727年 丁未換局 으로 少論 이 再登場瑕疵 罷職되었다가 이듬해 李麟佐의 亂 이 일어나자 다시 忠州 牧師로 起用되어 亂을 收拾하는 데 功을 세웠다.

以後 兵曹判書 , 藥房提調 , 知經筵事 , 藝文館提學 , 左參贊 , 右參贊 , 戶曹判書 , 판돈녕府使 , 宗廟製造 , 吏曹判書 , 刑曹判書 , 禮曹判書 等을 지냈고, 慶尙道 觀察使 도 지냈다. 그리고 黃海道 觀察使 도 지냈다. 그 後 知春秋館事로서 實錄盜聽 當相을 兼職하면서 《景宗修正實錄》을 編纂하는 데 參與했고 辛壬士禍 로 죽은 김창집 · 이이명 의 抑鬱함을 풀어주었다. 1728年 (英祖 5) 李麟佐의 亂 鎭壓 直後 噴霧 原從功臣 1等(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738年 , 판 中樞府 社로 에 가서 《名詞》(明史)를 얻어왔다.

그는 老論 碧波 에 加擔한 親戚 김상로 , 김양로 等과 달리 老論 內 僻派도 아니고, 老論 時派에도 加擔하지 않고, 老論 蕩平派에도 加擔하지 않고, 老論 淸明派에 加擔하였다. 그의 아들 김치인 과 從孫子 김종수 는 老論 淸明派의 指導者가 되었다.

以後 右議政 左議政 을 지냈고 1740年 議政府 領議政 에 올랐고, 官職 生活의 折半은 모두 代身으로 있으면서 領議政 左議政 을 번갈아하며 老論의 先鋒者로 活躍했다. 著書로 廳舍誘集(淸沙遺集) 本말錄(本末錄) 廳舍日記(淸沙日記),豫期보週(禮記補註) 警誤報(庚午譜) 闡義昭鑑諺解(闡義昭鑑諺解) 좌氏집線속(左氏輯選續) 金石錄(金石錄) 鑾輿(爛餘)等이 있다.

家族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承政院日記 英祖 卽位年 甲辰(1724, 雍正2) 12月 28日(精油) 記事參照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內容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