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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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滉
李滉
이름
警護(景浩)
退溪(退溪)·退도(退陶)·도수(陶?)
시호 문순(文純)
身上情報
出生日 1501年 陰曆 11月 25日
陽曆 1502年 1月 3日
出生地 朝鮮 慶尙道 瘞安玄
(現 慶尙北道 安東市 도산면 )
死亡日 1570年 陰曆 12月 8日
陽曆 1571年 1月 3日 (69歲)
死亡地 朝鮮 慶尙道 瘞安玄
國籍 朝鮮
職業 文官, 性理學者, 思想家, 詩人, 政治家, 著述家
本館 進步 (眞城)
父母 父 移植(李埴)
初吹 義城 金氏 (死別)
母 어머니 春川 朴氏 (生母)
兄弟姊妹 온契 理解 (兄)
配偶者 初吹 金海 許氏
再娶 安東 權氏
妓妾 頭向
子女 李儁(長男), 理債(次男)

李滉 (李滉, 1502年 1月 3日 ( 1501年 陰曆 11月 25日 ) ~ 1571年 1月 3日 ( 1570年 陰曆 12月 8日 ))은 朝鮮 中期의 文臣, 學者이다. 本貫은 進步 (眞寶). 字는 경호(景浩), 號는 退溪 (退溪), 諡號는 문순(文純)이다.

栗谷李珥에게 申師任堂이 있다면, 退溪李滉에게는 春川 朴氏 어머니가 있다.

아버지 移植이 義城金氏와 死別한 後, 春川朴氏(박치의 長女)貞敬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언적 의 思想을 이어받아 嶺南學派의 中樞的 學者가 되었으며 나아가 韓國을 代表하는 性理學者가 되었다. 學脈은 東西 分黨 뒤에 同人 의 核心을 이루고, 다시 同人이 남인 - 北人 으로 갈릴 때, 李滉 弟子들은 南人, 曺植 弟子들은 北人을 이룬다. 한便 그의 著述 中 一部는 壬辰倭亂 當時 日本軍이 掠奪해갔는데, 日本 性理學 發展에 影響을 주기도 하였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庭 環境 [ 編輯 ]

退溪 李滉은 1502年 (燕山君 7) 慶北 안동부 瘞安玄(오늘날의 安東市 예안면 ) 온計利(溫溪里)에서 眞사(進士)移植(李埴) [1] 科 否認 門所 金氏 (2男 1女) 春川 朴氏 (5男)의 7男 1女 中 막내로 태어났다. 本館 進步 (眞寶), 는 警護(景浩), 는 退溪(退溪-退去計上[退居溪上]의 줄임말, 물러나 市內 위에 머무르다 는 뜻), 시호 는 문순(文純)이다. 事後 利子 (李子), 이부자 (李夫子)로 尊崇되었다. 朝鮮 政治史에서 特히 同人 남인 系列의 縱走이며 一部 北人 도 그의 文人들이었다.

安東府使를 지낸 송재 이우의 조카이자 門下生이다. 李滉이 태어날 때 李滉의 父母는 胎夢을 꾸었는데 移植이 40歲 때 進士試에 合格한 해에 어머니의 꿈에 ' 孔子 가 大門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李滉을 낳았다하여 大門을 성림門(聖臨門)이라 일컬었다. [2]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個月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死亡하여, 李滉은 홀어머니 春川朴氏 밑에서 자라야 했다.

兄은 온契(溫溪) 理解 (李瀣)로 마찬가지로 學者였으나 구수담 (具壽聃)의 一派로 連累되어 流配가는 途中 病死하였다. 家庭的으로도 不幸하여 일찍이 金海 許氏와 結婚하였으나 27歲에 傷處하고, 再婚한 安東 權氏 亦是 46歲에 死亡하였으며 둘째 아들과 曾孫의 夭折을 보았다. 喪妻한 後 偶然히 그의 사람됨을 본 卷帙 이 病弱한 自身의 딸을 付託한다고 請하자, 그는 拒絶하지 못하고 卷帙의 딸을 받아들였다. 卷帙의 딸은 精神疾患이 있었는데, 後日 20世紀의 學者 유홍준 은 《 나의 文化遺産 踏査記 》에서 權氏 婦人을 사이코 라고 表現하였다. 그 外에도 退溪에게는 妾이 1名 있었으나 妾도 庶子 1名을 낳고 일찍 夭折하였다. 退溪는 本部인 許氏 蘇生 子女들에게 生母와 繼母를 差別하지 말도록 가르쳤고, 이에 權氏 夫人이 死亡한 뒤에도 子女들은 權氏 夫人의 3年喪을 侍墓살이하였다.

數學 [ 編輯 ]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代代로 물려오는 財産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生活했다. 1508年 (中宗 3) 8歲 때 重刑(仲兄) 李澄(李澄)李 칼에 손을 베였는데 다른 兄弟들 中 그만 이를 보고 痛哭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손을 베인 兄은 울지 않는데, 네가 어째서 우느냐고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어찌 저렇게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어려서 書堂에서 漢學을 受學하던 李滉은 1512年(中宗 7) 12歲에 叔父 송재 이우(李?)로부터 『 論語 』를 배웠다. 송재는 當時 官職에 있었는데, 바쁜 日課 中에도 親히 조카 退溪를 비롯한 洞里 靑年들을 가르쳤다. 1514年(中宗 9) 14歲頃부터 혼자 讀書하기를 좋아하여, 特히 陶淵明 의 詩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欽慕하여, 陶淵明과 走者 를 人生의 辭表로 삼았다.

叔父 이우에게 受學한 뒤 鄕里의 용수사에서 工夫하였고, 1520年 (中宗 15) 20歲 무렵부터 寢食을 잊고 밤낮으로 讀書를 하고 《 主役 》 工夫에 沒頭한 탓에 健康을 해쳐서 病을 얻었는데, 以後부터 그는 잔病치레에 시달렸다.

結婚과 家庭 生活 [ 編輯 ]

1528年 (中宗 23) 退溪가 28歲 때, 夫人許氏는 둘째 아들을 낳고 1個月 만에 死亡하였다. 비록 아내는 죽었으나 사위로서의 義理를 저버리지 않고, 홀로 된 丈母를 도와 그가 죽을 때까지 처가집의 大小事를 끝까지 챙겼다. [3] 當面한 學問에 專念하면서 어린 두 子女를 돌보는 것은 無理가 따랐지만, 事情이 어렵다고 本妻가 死亡한 後 바로 後妻를 들일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慣習대로 妾을 한 사람 들였는데, 그 妾은 집안 살림을 잘 돌 보면서 退溪를 至極 精誠으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어린 두 아들도 親母처럼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4] 또 나중에 穩全치 못한 둘째 夫人 權氏를 맞이한 後에도 障礙가 있는 權氏를 代身해 實質的인 안살림을 充實하게 챙겼다. 退溪는 이러한 妾에 對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두 子女들에게도 親어머니와 同一하게 對하라고 하였다. [4]

그 뒤 卷帙의 딸 權氏婦人과 再婚하였다. [4] 權氏 夫人의 할아버지 勸酒(權柱, 1457-1505)는 1503年 慶尙監司로 在職 中에 甲子社會(1504年) 때 연산군 의 生母 廢妃 尹氏 에게 死藥 을 가져갔다는 罪目으로 評해 땅에 流配된 後 교살당하였다. 그리고 할머니는 官奴 가 되었으며, 親庭아버지 卷帙은 연산군 을 誹謗하는 諺文 投書事件에 連累되어 巨濟島 에 流配되었다. [4] 어린 나이에 士禍의 慘酷함을 經驗한 權氏 夫人은 精神的 後遺症으로 異常 情勢를 보였다. 아버지 卷帙은 1506年 中宗反正 以後 解配(解配)되었으나, 己卯士禍 後 다시 無故(誣告)로 因한 獄舍인 誣獄으로 瘞安 땅에 流配되어 있었는데, 平素 退溪의 사람됨을 눈여겨 본 後 退溪를 불러 집안의 慘劇으로 引下地 않은 衝擊으로 精神이 昏迷한 自身의 딸을 依託하였다. [4] 딸을 付託할 때 自身의 딸이 어려서 겪은 집안의 모진 일을 當한 後 精神이 昏迷하여 아무도 색시로 데려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事實도 알리면서 ?부디 罪人의 所願을 들어 주시게나?하며 딸을 付託하였다. [4]

오랫동안 沈默하던 退溪는 ?例 고맙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께 承諾을 받고 禮를 갖추어 婚禮를 올리도록 하겠으니 마음 놓으시고 氣力을 잘 保存하십시오.?라고 하였다. [5] 그는 深思熟考 後 例를 표하고 어머니의 允許를 받고 婚禮를 갖출 테니 心慮 마시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卷帙이 瘞安으로 流配된 지 9年이 되는 1530年에 權氏 夫人을 맞이하였다. [5]

둘째 夫人인 權氏 夫人은 아버지 卷帙이 辭典에 말한 것처럼 不足한 部分이 많아 退溪는 마음苦生도 많이 하였다. 그러한 夫人을 理解하고 아끼며 林地가 어디든지 同行하며 精誠을 다하여 仔詳하게 對한 德으로 둘 사이는 別 頉 없이 잘 지냈다고 한다. [5]

그러나 어느 날 祭祀를 지내기 위해 一家親戚들이 宗家(宗家)에 모였을 때, 權氏 夫人이 느닷없이 차려진 祭祀 床의 飮食을 집어먹으며 上位에서 떨어지는 를 치마 속에 숨겼다. 이 光景을 目擊한 一家親戚들이 못 마땅한 눈치를 주어, 結局 退溪의 兄嫂가 叱責하자 退溪는 泰然하게 ‘祭祀도 지내기 前에 며느리가 飮福 하는 것은 禮節 에 벗어난 일이지만, 祖上께서는 철不知를 귀엽게 여기실망정 孫子며느리의 行動에 노여워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兄嫂님 罪悚합니다. 앞으로는 低價 잘 가르치겠으니. 容恕하여 주십시오.?라며 精神的인 問題가 있는 夫人을 따뜻하게 감쌌다. [5] 退溪의 이 말에 東西를 꾸짖던 큰 兄嫂도 입가에 微笑를 지으며 ?同壻는 참으로 幸福한 사람이야. 書房님 같이 좋은 분을 만났으니?라고 하였다고 한다. 祭祀를 끝낸 後 아내를 불러 왜 그러한 行動을 하였느냐고 묻자 배가 몹시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여 退溪는 權氏 夫人을 위해 배를 손수 깎아 주었다고 한다. 또 退溪가 어느 商街(喪家)에 弔問(弔問)을 하러 가려던 때에 흰色 道袍 자락이 해어져 있어 夫人에게 꿰매 달라고 하자 해어진 흰 道袍에 큼지막하게 빨간 헝겊으로 기웠다. [5]

到着한 商街에서 禮學(禮學)에 밝은 사람이 ‘흰 道袍를 어찌 빨간 헝겊으로 기워 問喪(問喪)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하고 왔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退溪는 별다른 對答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고 한다. [6] 이와 같이 權氏 夫人이 모자람에도 不拘하고 退溪는 끝까지 그女를 아끼고 尊重하였다.

1546年 (明宗 元年) 47歲 때, 權氏 婦人과 婚姻한지 16年이 되는 해였는데, 夫人이 出産 中 難産으로 死亡하였고 태어난 아이도 며칠 後 죽고 말았다. [6] 權氏 夫人이 死亡한 後에도 前妻 所生의 두 아들은 平素 親어머니처럼 깍듯이 禮遇할 것을 當付한 아버지 退溪의 말대로 繼母 權氏 무덤이 있던 山기슭에 老幕(廬幕)을 지어 侍墓살이 를 하였고, 退溪는 그 건너便에 庵子 를 짓고 1年餘를 起居하였다. [6]

平素 退溪는 子女들에게 사람들이 親母와 繼母를 差別하는 것은 잘못이니 그러한 行動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던 대로 子女들은 權氏 婦人을 至極精誠으로 모셨다. [6] 退溪 또한 아내의 祭祀날이 되면 아무리 貴한 손님이 찾아와도 손님 接待 後,自身은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 妾이 죽은 後에도 그女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移籍을 自身의 戶籍 에 올렸고, 此後에 이적의 後孫들이 嫡庶 差別을 받을 것을 念慮하여 族譜에 嫡庶의 區別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6]

退溪는 모든 사람에게 鄭重한 例와 高邁한 人格, 差別 없는 인애로서 對하였다. [6]

政治 活動과 學問 硏究 [ 編輯 ]

1527年 (中宗 22) 鄕試에서 進士試와 生員試 初試에 合格하고, 어머니의 所願에 따라 過去에 應試하기 위해 成均館 에 들어가 다음 해인 1528年 (中宗 23)에 小科인 生員試에 及第하였다.

1533年 (中宗 28) 成均館 에서 河西 김인후 와 더불어 서로 交遊하며 뜻이 맞아 끊임없이 討論하고 硏究하며 서로 도와 學問과 德을 닦았다. 이때 《心境부주 心經附註》를 入手하여 크게 心醉하였다. 또한 노수신 過度 만나 親分을 쌓았는데, 李滉은 조광조 의 直系 弟子는 아니었으나 盧守愼은 趙光祖의 弟子인 이연경(李延慶)의 文人이었으므로 그를 통해 趙光祖의 影響을 받게 된다. 1533年 歸鄕 途中 김안국 을 만나 聖人君子에 關한 見聞을 넓혔다.

1534年 (中宗 29) 文科에 及第하고 承文院副正字(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關係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9年 (中宗 34) 弘文館 修撰이 되었으며, 同年 곧 湖堂(湖堂)에 들어가 賜暇讀書(賜暇讀書) 하였다. 1540年 (中宗 35) 弘文館 敎理에 除授되는 等 昇進을 거듭하였다.

中宗 末年인 1543年 (中宗 38) 調整이 어지러워지자 8月에 父母 奉養의 乞養을 請하여 먼저 故鄕으로 落鄕하는 親友 김인후 를 漢陽에서 떠나보냈다. 10月에 成均館 四星이 되었으나, 省墓를 핑계삼아 辭職하고 故鄕에 들어가 學問을 硏磨하였다.

그러나 以後 朝廷에서 다시 불러 1545年 (人種 元年) 6月 弘文館 傳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바로 日本 과 强化를 하고 邊境을 防禦할 것을 請하는 上疏를 올렸다. 그해 1545年 (明宗 卽位年) 10月 이기 로부터 乙巳士禍 의 逆臣인 金佇 와 같은 무리라 彈劾 當하여 削奪官職 되었으나, 곧바로 10月 末 利器가 罪가 없다고 하여 다시 復官되었다. 그 뒤 司僕寺 情 兼 承文院 參校가 되었다.

1546年 (明宗 元年) 私服市井(司僕寺正)을 거쳐, 그해 3月 知製敎(知製敎)로 있을 때 明나라 에 보내는 咨文을 잘못 지어 謝恩使 남세건의 彈劾을 當하였다. 大提學(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의 辯護로 處罰을 謀免하고, 그해 8月 校書館 敎理(校書館校理)를 거쳐 1547年 (明宗 2) 7月 安東 大都護府使(安東大都護府使)로 赴任했다가, 1個月 만에 弘文館 副應敎로 任命되어 다시 上京하였다.

그는 學問을 함에 있어서 어떤 條件이나 權威, 偏見을 두지 않았다. 이언적 , 이현보 等에게도 便紙를 주고 받으면서 생각과 見解를 주고받는가 하면 기대승 過度 便紙를 주고받으면서 論爭을 하기도 했다. 이때 李滉은 自身의 나이나 經歷은 말하지 않고, 純粹하게 學問的인 內容만으로 論爭을 이어나갔다. 李滉과 奇大升의 討論과 便紙論爭은 後代의 士類들에게 話題가 되기도 했다.

그는 安東 의 대장장이로 自身이 弟子들을 가르칠 때 몰래 授業 內容을 듣던 대장장이 背順(裵純)이 自身의 授業을 듣는 것을 確認하였다. 배순은 대장장이이자 쇠,遺棄 等을 다루는 匠人으로 製作한 그릇이 비뚤어지거나 欠이 있으면 市場에 내놓지 않았고, 그의 名聲이 알려져서 배순의 집을 直接 찾아오기도 했다. 누군가 萬若 欠이 있는 그릇을 사려 하면 廉價로 販賣하기도 했다. 몰래 自身의 授業을 들은 것을 確認한 李滉은 그에게 講演한 內容들을 물어보았고, 배순은 하나도 틀림없이 對答하였다. 배순의 學問的 熱情에 感服한 李滉은 身分을 뛰어넘어 背順을 自身의 弟子로 받아들였다. 배순은 李滉의 弟子로 認定되어 正式으로 그에게서 學問을 배울수 있었고, 이에 感動한 배순은 더욱 熱心히 學問을 授業하였다. 나중에 風紀 로 移徙한 뒤에도 李滉을 찾았던 배순은 李滉의 訃音 消息을 接하고 3年喪을 치루었으며, 金屬으로 李滉의 撤床(鐵像)을 손수 만들어 祭祀를 지내 話題가 되었다 한다.

走者大展 入手와 耽讀 [ 編輯 ]

그는 宋나라 走者 의 文書인 走者大展을 入手하려고 오랫동안 努力을 기울였다. 各處를 搜所聞한 끝에 1543年 (中宗 38) 그는 드디어 走者大展을 入手하였다. 그는 이언적 이 쓴 著書들, 조광조 가 쓴 著書들을 모두 耽讀, 讀破하였는데 李彦迪의 著書가 많고, 司書六卿과 走者에 對한 原文과 그에 對한 解釋, 註解와 이언적 自身의 생각, 見解를 적은 것을 읽고 크게 稱頌하였다. 그러나 趙光祖의 著書나 詩文이 相對的으로 적은 것에 많이 唐慌해하기도 하였다. 그는 朱子의 冊을 直接 읽어보기로 다짐하고 走者大展을 入手하기 위해 오랫동안 搜所聞하였다.

이언적과 趙光祖의 著書 外에도 그는 이미 心境부주, 太極圖說, 主役, 논어집주까지 이미 다 玩讀한 狀態였다. 李滉이 1543年 (中宗 38)에 入手한 走者大展은 明나라 嘉靖帝 때에 재간행한 家庭刊本(嘉靖刊本)의 復刻本(復刻本)으로, 家庭間本의 原本은 聖火刊本(成化刊本)의 修正, 補充本이었다 한다. 1549年 풍기군 數를 辭退한 直後부터 走者大展을 읽기 始作해서 玩讀하였다.

地方官 生活과 落鄕 [ 編輯 ]

1545年 (明宗 卽位年) 乙巳士禍 때 彈劾을 當하여 한때 罷職되었다가 復職되었다. 1547年 (明宗 2)에는 安東大都護府社, 弘文館 副應敎, 儀賓府 經歷 等으로 任命되었으나 病을 理由로 辭職하고 故鄕으로 내려가 土階(兎溪) 隣近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學問에 沒頭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沒頭하여 性理學 을 硏究하여, 마침내 大成하여 '東方의 走者 ', '이부자'라는 稱號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四方에서 學者들이 모여들어 學問을 배웠다.

1548年 (明宗 3) 1月 忠淸道 丹陽 郡守 로 赴任하여 妓女 頭向을 만났다. 얼마 되지 않아 兄 理解 가 忠淸道 觀察使로 發令받자, 上皮制(相避制)에 따라 慶尙道 풍기郡守로 옮겼다. 풍기郡守 時節에 書院들을 支援하였으며, 紹修書院 賜額을 실현시켰다. 地方官으로 活動하면서 鄕約 과 朱子家禮의 奬勵와 普及에 置重하였고, 退廳 後에는 門下生을 敎育하여 性理學 者들을 養成했다.

書院 建立과 後學 養成 [ 編輯 ]

풍기郡守 在職 時節 賃金 明宗 의 親筆 賜額(賜額)을 받아 백운동書院을 紹修書院 으로 만듦으로써 死厄 書院의 模範 先例가 되었고, 士林派 는 書院을 根據地 삼아 勢力을 擴大해 나가게 된다. 그의 紹修書院 死厄 實現은 士林派의 勢力이 擴張하는 決定的인 契機를 마련하였다.

1552年 (明宗 7年) 다시 內職으로 召喚되어 弘文館 敎理가 되었고, 侍讀官(侍讀官)이 되었다. 이어 佛敎 를 排斥할 것을 建議하였다.

賃金이 힘써야 할 일은 庚戌(經術)을 擇하고 王都(王道)를 높이고 霸功(覇功)을 抑制하는 것일 뿐인데, 조금만 잡되어도 霸道로 흐르게 됩니다. 只今은 精神을 가다듬어 다스려지기를 圖謀할 때여서 바야흐로 王道가 行해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佛敎가 조금이라도 섞이게 되면, 비록 王道에 마음을 다하더라도 마침내는 佛敎에 빠지고 맙니다. 只今 星學(聖學)李 고명(高明)하기는 하나 格物 致知(格物致知)의 道에는 未盡한 點이 있는 듯싶습니다. 그 설(說)에 ‘百姓들의 苦痛을 없애고 나라의 福을 延長하는 것은 이 가르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格致(格致)의 學問에 밝아 그 거짓됨을 환히 안다면 勸하더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素地(小紙)를 꺼내어 어商(御床)에 놓으며 아뢰기를,

神이 1547年 (明宗 2)에 小隊(召對)하라는 命을 받고 입시하였을 적에 《論語》의 애공(哀公)이 社(社)에 對해 물은 腸(章)의 前(傳)에 ‘재여(宰予)의 對答이 社(社)를 세운 本意(本意)가 아니다.’라는 데 이르러 上께서 下問하셨으나 신이 변변치 못하여 卽時 進達하지 못하였고, 그 뒤 外觀(外官)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亦是 아뢰지 못했습니다. 여기 이 所持에 쓴 것은 모두 社(社)를 세운 制度입니다. 堤川(祭天)·敎師(郊祀)는 우리 나라에서 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 例(禮)는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에 敢히 써서 아룁니다.

그해 5月 司憲府 집의, 6月 弘文館 副應敎(弘文館副應敎), 7月 성균 大司成 知製敎(成均大司成知製敎)를 거쳐 그해 11月 辭職하였다. 1553年 成均館 社例를 거쳐 다시 大司成 에 任命되었으나 스스로 辭職上疏를 올렸다. 以後 成均館 大司成·副提學·共助參判 等에 任命되었으나 모두 辭讓하고 故鄕으로 돌아갔다. 앞서 風紀 郡守의 職을 버리고 故鄕에 내려왔을 때 그는 漢書癌을 짓고 1557年에는 倒産書堂 (陶山書堂)을 세우기 始作했다. 李珥 가 그를 訪問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明宗이 그가 官職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化工에 命하여 倒産(陶山)의 景致를 그려오게 하여 玩賞한 것도 이때의 美談이다.

한便 그의 門下에서는 著名한 學者들과, 當代의 政丞 10餘名과, 板書 30餘 名이 輩出되었다.

調整 出仕와 辭退 [ 編輯 ]

1553年 (明宗 8) 行上護軍 으로 殯殿에서 庶孼 方今法 許容 論議에 參席하였다. 이때 그는 庶孼 許通을 支持하였는데 그는 一部 庶子들이 嫡長子를 無視할 수 있음을 言及하였으나 庶子라고 해도 實力이 있는 者는 採用해야 된다며 人材 採用時 貴賤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强調하였다. [7]

1554年 (明宗 9) 5月 刑曹 參議 에 任命되어 上京하였고, 6月 兵曹 參議 를 거쳐 그해 12月 僉知中樞府事로 轉任되고 故鄕으로 내려갔다.

1555年 (明宗 10) 2月 다시 上護軍에 任命되어 漢城에 왔는데, 上京할 적에 가난하여 衣服과 寬大(冠帶)가 없으므로 判書 조사수(趙士秀)가 겉옷 1벌을 주었지만 辭讓하고 옷을 받지 않았다. 5月 에 辭職하고 故鄕으로 내려가자 僉知中樞府事에 任命되었으나 辭讓하였다. 12月 參贊官 박민헌이 말하기를 「經筵官으로서 神 같은 무리는 「書經」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는 處地이니, 모름지기 儒學者 李滉과 김인후 를 求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講論한다면 道理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556年 (明宗 11) 5月 弘文館 副提學 에 任命되었으나 辭讓하고, 그해 8月 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나 亦是 辭讓하고 故鄕으로 내려갔다. 1558年 (明宗 13) 成均館 大司成을 거쳐 共助參判에 任命되었으나 모두 固辭하였고, 限職인 忠武衛相互軍職에 任命되었다. 1559年 (明宗 14) 다시 共助參判에 除授하여 불렀으나 올라오지 않았고, 여러番 그에게 올라올 것을 勸告하여 그해 7月 上京하여 政事를 올려 辭職하였다. 바로 同知中樞府事에 任命되고 落鄕하였다.

學問 硏究와 思想的 完成 [ 編輯 ]

退溪 李滉의 書翰

그는 故鄕에서 學問 硏究와 思索, 後進 養成에 主로 置重하였다. 明宗 은 그를 尊敬하여 자주 그에게 出仕(出仕)를 慫慂하였으나 그는 조광조 의 죽음을 봤고 王의 出仕 要請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出仕 要請을 繼續 拒絶하자 明宗 은 謹愼들과 함께 ‘초현敷地彈(招賢不至嘆)’이라는 題目으로 詩를 짓고, 몰래 化工을 倒産으로 보내어 그 風景을 그리게 하고, 宋寅 (宋寅)으로 하여금 陶山記(陶山記) 및 倒産雜詠(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屛風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朝夕으로 李滉을 欽慕하였다.

明宗 의 寵愛를 안 慶尙道 觀察使 移監 (李戡)은 隨時로 그를 찾아 例를 표하고 優待하였다. 그의 思想은 50~60歲에 걸쳐 完成되었는데, 辯論·著述·編著 等 重要한 것은 모두 이 期間에 되었으며,《 朱子書節要 》, 《송계원名이학통록》, 《啓蒙傳疑》, 《心經釋疑》 및 奇大升과 問答한 《四端七情分離器서》와 같은 것은 그의 代表的인 名著이다.


生涯 後半 [ 編輯 ]

學問 硏究와 後學 養成 [ 編輯 ]

1560年 (明宗 15) 故鄕 토계동에 倒産書堂(陶山書堂)을 짓고 雅號를 陶翁(陶翁)으로 고쳤으며, 以後 7年間 主로 書堂에 起居하면서 讀書·修養·著述에 專念하는 한便, 많은 門下生들이 찾아와 이를 指導하였다. 1565年 (明宗 20) 4月 다시 同知中樞府事職을 辭職하였으나 王이 返戾하였다. 1566年 다시 同知中樞府事에 任命되었으나 病으로 辭職하자 王이 返戾하였다. 以後 明宗 末에 禮曹 判書가 되고 大提學·判中樞 兼 知經筵事 等이 되어 有名한 《무진六曹소》와 《聖學十圖》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國恩에 報答하고 學問을 開發하기 위한 晩年의 代表作이다.

明宗 이 갑자기 죽고 宣祖 가 卽位하여 그를 先王의 行裝을 짓는 行長수찬청當上京(行狀修撰廳堂上卿) 및 禮曹判書에 임명하였으나 疾病으로 不得已 歸鄕하게 되었다. 宣祖가 卽位한 後 宣祖가 여러番 부를 때마다 市井의 弊端을 諫하는 辭退 上疏를 올리고 落鄕했다가 거듭된 付託으로 出仕, 大提學, 地境連이 되어 性理學을 그림과 함께 쉽게 敍述한 《聖學十圖》(聖學十圖)를 지어 王에게 올려 性理學이 國家 理念임을 밝히게 한다. 또한 그는 兒女子들도 쉽게 理解하게 하기 위해 聖學十圖를 諺文 으로 飜譯한 것을 印刷, 刊行하여 配布하기도 했다. 生涯 後半에 그는 親舊로서 湖南의 大學者 河西 김인후 , 司馬試에 함께 及第한 김난상 等과 交流하였다.

當代 最高의 理論家였던 退溪는 弟子들과 討論하기를 즐겼으며, 性理學에 關한 다양한 著述을 남겼다. 1568年 (宣祖 元年) 1月 行知中樞府事에 任命되었으나 辭意를 표하였고, 그해 7月 判中樞府事에 任命되어 上京하였다.

죽음 [ 編輯 ]

1569年 (宣祖 2) 李朝 板書 가 되어 上京하였으나 여러番 辭職 上疏를 올린 끝에, 辭職訴가 修理되어 다시 故鄕으로 되돌아왔다. 平生 謙遜함을 强調하며 청렴하게 살았으며, 생각이나 헤아림을 멈춘 狀態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思索과 '卿'(敬)을 重視했다. 晩年에 病을 핑계로 落鄕, 1570年 (宣祖 3) 陰曆 12月 8日 故鄕인 安東 토계동에서 衣冠을 整齊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享年 70歲였다. 그가 죽자 宣祖는 3日間 情事를 罷하고 照會를 하지 않았다.

事後 喪禮와 石物을 華麗하게 하지 말고 작은 碑石이나 하나 세우라는 그의 遺言에 따라, 山所에는 退度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쓴 작은 碑石이 하나 세워졌다.

事後 [ 編輯 ]

그 뒤 門巡功의 諡號를 내리고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英競演 弘文館 春秋館 紗를 追贈 하였으며, 1610年 (光海君 2) 成均館 文廟 (文廟)에 從事되었다. 安東의 도산書院을 비롯한 全國 40餘 個 書院에서 祭祀하고 있다.

學問上으로는 嶺南 地域이 基盤인 同人과 南人의 宗統이었다. 東西 分黨의 原因이라 일컬어지는 성암 김효원 , 그리고 漢江 庭球 等은 李滉과 曺植 둘에게서 배웠다. 그의 代表的인 弟子는 유성룡 김성일 이며 많은 다른 弟子들이 있었다. 漢江 庭球는·미수 許穆 에게 이어지며, 許穆은·성호 利益 等 南人 實學者로 이어진다. 또한 여헌 장현광 等은 李滉과 李珥 學說의 折衝을 한다. 李滉은 嶺南學派의 核心을 이루었으며, 그의 弟子들은 黨色으로는 同人 남인 이었다. 李滉 自身은 東西 分黨 前에 죽었기 때문에 黨派에 所屬되지 않았다.

肅宗 때까지 그를 기리는 뜻에서 紹修書院과 도산書院에서 特別 過去가 主管되었다가, 老論 執權 後 英祖 때 廢止되었으나 正祖 때 가서야 正祖가 行次하면서 復活하였다. [8] 1968年 大統領 朴正熙 의 特別 指示로 1千원 卷의 첫 主人公으로 圖案이 完成되었다. 以後 30年間 千원券 紙幣의 도안 人物로 繼續 維持되었다.

思想과 信念 [ 編輯 ]

李滉의 著書 《 退溪文集

그는 自身의 생각을 他人에게 强要하지는 않았지만, 佛敎 陽明學 은 二段이자 火(禍)로 看做하고, 賃金에서부터 同僚, 學者들에 이르기까지 佛敎 排斥, 陽明學 排斥을 한결같이 말하였다.

理氣 二元論 [ 編輯 ]

李珥 와 더불어 韓國 性理學 ( 遊學 )의 가장 代表的인 學者로 走者 의 理氣二元論的 思想 및 嶺南學派 의 創始者인 이언적 주리說 을 繼承하여 自身의 思想을 발전시켰다.

그는 徹底한 哲學的 思索을 學問의 出發點으로 하여 演繹的 方法을 採擇, 謙遜하고 신중한 態度로 學問에 臨하여 어디까지나 獨斷과 輕率을 排擊하였다. 그는 宇宙 萬物은 이와 基의 二元的 要素로 構成되어 그 中에 하나라도 缺乏되면 宇宙의 萬象을 表現할 수 없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이·記意 道德的 價値를 말함에 이는 旬宣舞樂한 것이고 基는 架線歌樂한 것이니, 卽 이는 絶對的 價値를 가졌고 基는 相對的 價値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心性 問題를 解釋함에도 亦是 이러한 絶對·相對의 價値를 가진 理氣二元으로 分析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論爭이 벌어진 有名한 ‘四端七情論’으로 以後 韓國 儒學者로서 이 問題를 言及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重要한 主題를 던진 것이다. [9]

그의 學問 은 日本에도 큰 影響을 끼쳐, 에도 時代 에는 期몬 學派와 구마모토 學派가 있었고, 메이지 時代 의 敎育 理念의 基本 精神을 形成하였다. 그러나 李滉의 學問的 根本 立場은 眞理를 理論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眞理는 平凡한 日常生活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信念으로 知와 行의 一致를 主張, 그 基本이 되는 것이 性이요, 그에 對한 努力으로서 ‘卿’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實로 그의 學問·人生觀의 最後 決定은 이 經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卿을 70餘 生涯를 통하여 實踐한 것이 李滉이었다. 그는 文學·考證學에도 造詣가 깊었으며 그 思想·學風이 後世에 繼承되어 嶺南學派를 形成, 儒學界에 많은 影響을 주었다.

早食과의 論爭 [ 編輯 ]

李滉은 曺植 에 對해 "傲慢하여 中庸의 道를 期待하기 어렵고, 老將에 물든 病통이 있다"고 批判 [10] 했다.

그러자 曺植 은 선비들이 工夫한다는 핑계로 自身의 父母의 膏血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弊를 끼친다고 應酬했다. 南冥은 "요즘 學者들은 물 뿌리고 淸掃하는 節次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千里(天理, 하늘의 眞理)를 談論하며 虛名(虛名)을 훔친다"고 맞對應 하는 等의 神經戰을 벌이기도 했다. [11] 그러나 李滉의 曺植 批判은 後日 정인홍 이 曺植을 擁護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한番 再現된다.

臣(鄭仁弘)李 젊어서 曺植 (曺植)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恩惠를 重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君師父一體(君師父一?)의 義理가 있고, 늦게 星雲 (成運)의 認定을 받아 마음을 열고 許與하여 後輩로 보지 않았는데, 義理는 비록 輕重이 있으나, 두 분 모두 스승이라 하겠읍니다. 臣이 일찍이 故 贊成 李滉(李滉)李 曺植 (曺植)을 誹謗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相對에게 傲慢하고 世上을 輕蔑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中道를 求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老莊을 崇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星雲 에 對해서는 淸隱이라 指目하여 한 조각의 節槪를 지키는 사람으로 認識하였습니다. 臣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 番 辯論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중략) 曺植과 成運은 같은 時代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道가 같았읍니다.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기와 精金美玉(精金美玉)과 같은 資質에 學問의 工夫를 篤實히 하였으니 ...(中略)... 李滉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道에 살았읍니다만 平生에 한 番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읍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甚하게 誹謗하였는데, 神이 試驗삼아 그를 위해 辯論하겠읍니다. 李滉은 過去(科擧)로 出身하여 完全히 나아가지 않고 完全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世上을 欺弄하면서 스스로 中道(中道)라 여겼습니다. 曺植과 星雲은 일찍부터 過去를 斷念하고 山林(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道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滉이 대번에 怪異한 行實과 老莊의 道라고 認識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中略) 더구나 曺植 星雲 은 비록 世上을 避해 隱居하였다고 하지만 先代 朝廷의 부름을 받아 調整으로 달려가서 한 番 賃金을 尊重하는 뜻을 폈고, 累次 上疏를 올려 精誠을 다해 治安과 時務를 발씀드렸는데, 이것이 果然 怪癖의 道理이며 異常한 行實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出仕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山으로 돌아가 自身의 行實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果然 中道(中道)에 지나치고 怪異한 行實을 한 것이며 世上을 輕蔑하는 老莊의 學問이란 말입니까 신은 疑惑스럽습니다.

後日 曺植 의 弟子와 李滉의 弟子들은 栗谷 李珥 成婚 의 弟子들과 對立하며 同人 을 形成했다. 그러나 李滉의 弟子와 曺植의 弟子 간 思想의 差異는 다시 同人 을 兩分化시키는 原因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巨儒의 相異한 出世館과 學問觀은 結局 남인 北人 의 分化로 이어졌고, 黨爭을 격화시키는 重要한 原因이 되었다. [11]

기대승과의 論爭 ; 47 論爭 [ 編輯 ]

秋晩 정지운 이 [天命圖說]을 지었고, 이를 偶然히 본 李滉이 몇 句節을 고쳤다. 정지운이 "4段 = 發於理, 7梃 = 發於氣" (4段은 里에서 드러나고, 7定은 基에서 드러난다"고 한 것을 李滉이 "4段 = 理之發, 7梃 = 氣之發" (4段은 里의 드러남이고, 7定은 基의 드러남)이라고 고쳤다. 偶然히 이것을 본 기대승 이 異議를 提起하는 便紙를 李滉에게 보내면서 論爭이 始作되었다.

李滉은 當時에 最高의 學者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李滉에게 便紙로 問議했다. 기대승 도 便紙를 주고받으며 李滉과 論爭을 했다. 기대승 은 리와 氣가 '함께 있음, 붙음'(不相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主張했다. 李滉의 命題는 리와 氣를 서로 갈라놓는다.

이에 李滉은 기대승 의 批判을 받아들여서 "4段 = 理發而氣隨之, 7梃 = 氣發而理乘之" (4段은 理가 드러나면 機가 그것을 따르고, 7定은 機가 드러나면 理가 그것을 올라탄다)고 命題를 바꾸었다. 이 命題는 '而' 以下의 뒷部分을 빼면 "4段-理髮, 7梃-騎撥"이고, 李滉의 元來 命題와 다를 것이 없다. 李滉은 리와 氣의 '떨어짐, 分離됨, 區別됨'(不相雜; 서로 섞이지 않음)을 主張했다. 붙음과 떨어짐, 이것은 奇大升과 李滉의 基本的 差異이다.

기대승 은 붙음을 主張해서 리와 氣를 하나로 만든다. 그 結果 理가 드러남을 否定하고 欺瞞 드러남을 主張한다. 李滉의 두 命題 가운데 氣發만 認定한다. 反面 李滉은 리와 氣를 分離시킨다. 따라서 理髮과 旗발을 다 認定한다. 2原論이다. 이렇게 되면 論爭은 理髮을 認定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나간다.

李滉은 朱熹 의 講義錄 母音인 [朱子語類]를 읽다가, 朱熹가 "4段 = 理之發, 7梃 = 氣之發" 理라 한 것을 發見한다. 그리고 自身의 見解가 틀리지 않았으며, 朱熹의 말을 따르자고 기대승에게 提案한다. 奇大升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 기대승 의 立場은 뒤에 栗谷 李珥 가 그대로 이어받는다. 李珥 成婚 과 論爭하면서 奇大升의 立場을 反復한다. 成渾은 若干 兩者 折衝을 한 李滉의 立場에 선다. 以後 이이가 創始한 庶人들은 騎撥 하나만 認定하는, 리와 氣의 붙음을 堂老로 定한다. 나아가 韓元震은 {走者 言論 동이고}를 써서, 朱熹가 "4段 = 理之發, 7梃 = 氣之發" 理라 한 것은 弟子들이 잘못 記錄한 말이라 否定한다. 好勝心에 사로잡혀 이기려고 執着하다 보니 原文까지 否定하는 地境에 이른 것이다.
  • 이이는 너무 어려서 李滉과 論爭한 적이 없다. 李滉이 죽기 前에 도산書院으로 李滉을 訪問해서 며칠 머물며 가르침을 받았다. 돌아가서 便紙를 몇通 주고 받는다. 60代 大學者에게 20代 學生이 묻는 것 以上이 아니다.

日本 留學에 影響 [ 編輯 ]

壬辰倭亂 當時 그의 著書들이 日本 君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李滉의 著書와 作品, 書翰, 便紙 等은 日本 留學 의 發展에 寄與하였다.

1592年 (宣祖 25年)부터 發生한 壬辰倭亂 當時 慶尙道 地域의 書籍과 道公 等이 相當數 掠奪當했는데, 이때 李滉의 著書가 相當數 약탈당하였다. 慶尙北道 의 海岸가를 통해 流出된 李滉의 書籍, 書翰들은 後日 日本 性理學 發展에 影響을 주었다. 18世紀 美國 에 依해 西歐 文物이 强制로 流入되기 前까지 日本 에는 朝鮮 에서 傳來된 李滉 系列의 性理學이 幕府 勢力의 思想的 基盤이 되어 流行하였다.

陽明學에 對한 異端視 [ 編輯 ]

李滉은 陽明學 을 異端으로 規定하였다. 後에 崔明吉 은 退溪에 依하여 異端으로 指目되었던 陽明學을 남몰래 工夫하여 陽明學的人 思想을 著述에서 暗暗裏 드러낸다. [12]

李滉은 <傳習錄便>(傳習錄辨)에서 陽明學 을 '沙門(斯文·朱子學)의 禍'라고 批判했다. 그가 陽明學 을 '沙門의 禍'라고 批判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始作했다. [13] 그러나 李滉의 批判에는 陽明學의 核心인 '致良知說'(致良知說)에 關한 內容이 빠져 있으니 <傳習錄> 全體를 보지 못하고 批判한 셈이 된다. [13]

門下生 [ 編輯 ]

그 門下生으로는 西厓 류성룡 , 鶴峯 김성일 [14] , 小鼓 박승임 , 성암 김효원 , 蝗災 심의겸 等이 있다. 월천 條目(趙穆), 송암 권호문(權好文), 斗斛 高應陟이 그의 文人이었으며, 特히 권호문에게 글 쓰는 法을 說明한 筆法을 膳物하였다. 권호문은 이를 退盜先生筆法-退盜先生柳妾(退陶先生筆法─退陶先生遺帖)이라는 이름의 冊으로 만들어 所藏하고 後代에 傳하였다. 김효원 同人 의 領袖가 되었고, 심의겸 西人 의 領袖가 되었다. 심의겸 은 李滉의 文人임에도 李珥 , 成婚 과 어울린 탓에 自然스럽게 西人 이 되었다. 박승임 은 學問 硏究에 沒頭하였으나 그 弟子 가운데 一部는 北人 , 一部는 남인 으로 出仕한다. 류성룡 과 그의 周邊 人物, 弟子는 모두 남인 으로 이어진다. 368人 門人 가운데 정유일(鄭惟一), 매암 이숙량, 葯胞 鄭琢(鄭琢), 김취려(金就礪)도 그의 文人이었고, 漢江 庭球 曺植 의 門下에서도 數學했지만 그의 門下에서도 修學하였다.

退溪 門下生은 류성룡 의 門下生인 西厓學派와 鶴峯 김성일 의 門下生인 鶴峯學派로 나뉜다. 히後 류성룡 김성일 모두에게서 受學한 경당 장흥효 는 退溪學派나 周邊으로부터 宗統으로 認定받았다. 장흥효 外孫은 肅宗 때 著名한 嶺南南人 學者이자 政治人인 갈암 이현일 이다.

兩班家 自制 外에 상민의 子弟도 그의 門下에 出入하여 배울 수 있었다. 그가 紹修書院 에서 性理學 講學 할 때 대장장이 配點이 뜰에 꿇어 엎드려 배우기를 懇請하자 그는 이를 許諾한다. 그가 죽자 配點은 3年間 喪服 입고 消息(素食)하며 心象(心喪)했다.

退溪 直系 門下生은 아니지만 畿湖學派 系統의 李珥 도 그를 스승의 例에 準해서 待接했다고 한다.

不幸한 家庭事 [ 編輯 ]

生後 1年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成長했다. 그러나 45歲 되던 해 乙巳士禍 로 親兄 理解가 連累되어 처형당한다. 첫 夫人 許氏를 27歲에 잃고, 再婚한 둘째 夫人은 精神이 穩全치 못한 사람으로, 46歲에 死別한다. 그러나 그는 이 둘째 夫人을 무척 가여워했다고 傳해진다. 以後 그는 再婚하지 않고 48歲 때 만난 妓女 出身 消失 頭向 外에는 一切 女子를 가까이 하지 않고 平生을 보냈다.

1548年 (明宗 3) 2月 李滉의 둘째 아들이 일찍 夭折하였다. 그는 둘째 며느리가 定婚한지 1年도 안되어 男便이 죽고 靑孀寡婦가 되자, 며느리의 凱歌를 許容하고 남의 눈을 避해 親庭으로 몰래 돌려보낸다. 그가 宣祖 卽位 初 漢城府 로 가던 길에 한 酒幕에 들렀을 때, 그의 입맛에 딱 맞는 飮食을 해온 이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凱歌를 許容한 둘째 며느리였다 한다.

漢城府 에 分家한 그의 孫子 內外가 아이에게 高熱이 있어서 危重瑕疵, 그에게 도움 要請을 하였으나 그는 冷靜하게 拒絶한다. 그의 曾孫子는 病을 治療하지 못하고 그보다 앞서 死亡하고 만다.

評價 [ 編輯 ]

그의 弟子 中 鶴峯 김성일 은 先生께서 山과 溪谷을 거닐 때면 마치 '神仙 같다'고 評하였다.

유홍준 은 '退溪는 平生에 處事가 되기를 願하여 죽을 때 影幀에 벼슬이름을 적지 말고 '處士'라고 써주기를 希望했다지만 그는 處事 志望生이었지 處事는 아니었다. [15] '라고 評하였다.

當代에 이미 그의 弟子들은 경상좌도와 嶺南 學派를 形成하였으므로 影響力이 있었다. "경상좌도에는 退溪가 있고 우도에는 南冥이 있다. [15] '는 讚辭를 받기도 했다.

親舊 河西 김인후 는 退溪에 對하여 '선비 社會에서도 드물게 道理를 다하였고, 말과 行動이 一致되었다'고 評하였다. [16]

기타 [ 編輯 ]

1983年 6月 11日부터 2007年 1月 21日까지 쓰였던 大韓民國의 1000원 紙幣에 실린 李滉의 肖像
2007年 1月 22一部로 쓰이는 大韓民國의 1000원 紙幣에 실린 李滉의 肖像

大韓民國 1000원 紙幣 앞面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의 도산書院에서는 많은 學生들이 輩出되었고, 同人과 南人, 北人 學者와 政治人들을 養成한 搖籃으로서 1910年 以前까지는 성역화되었다. 그러나 儒敎 性理學을 批判하던 1920年 代의 慶尙北道 共産主義 者들은 도산書院 을 도산書院(盜産鼠院)이라 하여 도둑들을 生産하는 쥐새끼들의 巢窟이라고 露骨的으로 非難하여 物議를 빚게 되었다.

그는 이언적 조광조 의 著書와 文集을 整理하여 刊行하는 일을 主管하였다. 그는 晦齋 이언적 이 사서 六卿에 對한 解釋과, 사서 六卿에 對한 見解를 남긴 것을 높이 評價했다. 反面 김종직 에게는 薄한 評價를 내렸다. 李滉은 김종직 을 가리켜 學問에 몸담은 사람이 아니라 華麗한 社長을 즐기는 文章 잘하는 선비였을 뿐이라는 인색한 評을 남겼다.

壬辰倭亂 以後 李滉의 著書와 글들이 日本 으로 건너가면서, 李滉의 思想과 著述에 感動받은 日本 의 사무라이 知識人 中에는 陽明學 이나 其他 學問에서 性理學 으로 思想的인 轉向을 하기도 했다.

士林 擴散에 寄與 [ 編輯 ]

풍기郡守 在職 中 書院들에 對한 支援을 繼續했으며, 백운동 書院 의 懸板을 王의 死厄 下士運動을 推進하여 성공시킨다. ( 심통원 參照) 以後 書院의 普及과 賜額書院의 數가 늘어나면서 士林派 (士林派)의 勢力 擴張에 寄與하였다.

또한 曺植 의 門下生인 北人 小북 對北 으로 나뉜 뒤, 소북이 對北에게 肅淸되고 對北은 西人 에게 肅淸되면서 그의 門下는 衰退했고, 이언적 은 많은 弟子를 내지 못하여 李滉의 弟子들이 嶺南學派의 主流를 이루게 되었다.

星湖學派에 影響 [ 編輯 ]

後代의 實學者 星湖 李瀷 은 自身의 學問的 뿌리를 李滉에게서 찾으려 했다. 星湖 李瀷 의 아버지 이하진 을 비롯한 先代 人士들은 大部分 尹鑴 와 가깝게 지냈다. 利益 의 6寸 兄님뻘 되는 磻溪 유형원 도 尹鑴와 어느程度 距離를 두면서도 切親한 사이였다. 또한 星湖 李瀷의 스승 中 한사람인 송곡 이서우 는 尹鑴와 許穆 모두에게서 修學하였다. 이에 따라 星湖 李瀷의 門徒들 中에는 尹鑴 와의 聯關性을 主張하며 그의 學問을 繼承했음을 强調하였다. 尹鑴 와의 關係를 多少 부담스럽게 여겼던 星湖 李瀷 은 自身의 學統을 退溪 李滉이 根源임을 여러番 强調하였다.

利益 家門의 學問은 17世紀까지 북인 系列의 尹鑴 와 相當히 類似하였다. 이하진 이나 이잠 兄弟, 糟下酒 等은 尹鑴 와 學問的으로나 政治的으로 매우 密接한 關係였다. [17] 利益의 6寸 兄인 유형원 尹鑴 와 자주 만나며 連絡하던 사이였다.

反面 뒷날 利益 이 繼承한 人物로 評價받는 許穆과는 政治的으로나 學問的으로 距離가 있었다. 이때까지 利益 집안의 學問은 性理學的 흐름과는 無關하였으며, 오히려 朱熹에 對해 매우 批判的이었다. [17]

1699年 (肅宗 25) 이잠은 정시한을 豫防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退溪學 受容의 證據로 指目된다. [17] 정시한은 李滉의 學問을 繼承한 人物 中의 한사람이었다. 이서우는 朱熹의 經典 解釋을 따르면서 李滉의 學問을 受容하였다. 利益 段階인 1710年 以後에는 本格的으로 理氣心性論과 關聯된 著述을 하면서 學派를 開創하기에 이르렀다. 退溪學 을 受容하고 理氣心性論과 關聯된 成果를 낸 星湖 李瀷 은 이제 李滉과 自身을 連結하고자 하였다. [17] 그러나 尹鑴 의 學問이 多少 過激하고 急進的이라는 批判的인 見解가 繼續 提起되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星湖 李瀷 은 學問的 傳統을 尹鑴 에게서 찾던 兄 섬界 이잠 이나 유형원 等과 달리 許穆 을 거쳐서 退溪 李滉 으로 連結하려 했다. 이러한 試圖는 [利益의 스승 中 한사람인 이서우 許穆 과 尹鑴 모두에게서 修學한 것에서 根據로 삼았다.

1715年 (肅宗 41)에서 1720年 (肅宗 46) 사이 星湖 李瀷 은 全代에 距離가 있었던 許穆과 이하진의 關係를 强調하면서, 許穆을 自身이 私淑한 스승으로 規定하였다. [17] 西人 老論이 栗谷 李珥를 自身들의 學問的 뿌리로 삼은 것에 對抗해서, 李瀷은 서울 地域(近畿) 南人들의 學問的 根源을 李滉에서 찾으려 試圖했다. 利益은 47 論爭에 關한 冊을 쓰고, 또 李滉의 글을 拔萃한 {利子 手語}도 編纂한다. 이러한 試圖는 서울地域 南人들에게 一般的으로 收容되었다. 한便 利益은 許穆 의 後學으로 子正韓 以後에도 經典解釋이나 經世論 分野에서는 如前히 尹鑴의 影響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一部에서는 傳統的인 尹鑴와의 系統을 强調하였는데, 이들은 相對的으로 開放的인 學問 傾向을 보였다. 尹鑴 를 强調하던 人士들이 辛酉 迫害로 沒落하면서 星湖 學派의 學統은 오로지 退溪學과 關聯된 內容으로 傳承되게 된다. [17]

利益 은 李滉의 思想을 直接 繼承하지는 않았으나 利益 의 스승 中 한名인 이서우 許穆 의 文人이고, 許穆 의 스승인 庭球 는 李滉의 門下에서도 배웠고, 曺植 의 門下에서도 工夫하였다. 利益 은 이 點을 들어 退溪 李滉과의 關聯性을 繼續 强調하였다.

北人界 學問의 傳統을 가진 尹鑴에게 影響을 받은 星湖 學派는 持續的으로 退溪學을 受容하면서 새로운 正體性을 찾고자 하였으며, 이는 18世紀 後半의 政治的 狀況 속에서 完成되었다. [18]

日本 留學에 影響 [ 編輯 ]

壬辰倭亂 當時 李滉의 著書들이 日本 君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李滉의 著書와 作品, 書翰, 便紙 等은 日本 留學 의 發展에 寄與하였e다.

妓生 頭向 [ 編輯 ]

그에게는 小室로 頭向 이라는 妓生이 있었다. 1548年 (明宗 3) 1月 丹陽郡守로 赴任한 後 만난 妓生 頭向 은 以後 그가 떠나간 뒤에도 그에 對한 節槪를 지켰다.

1571年 (宣祖 4) 그의 訃音을 들은 妓生 頭向 忠州 강선대에서 忠州湖 로 몸을 던져 投身했다. 그 뒤 每年 10月이면 李滉의 後孫들은 李滉에 對한 節槪를 지켜 殉死한 頭向의 墓所를 찾아 伐草하고 時祭를 드린다 한다.

資産 規模가 꽤나 컸던 地方 維持 [ 編輯 ]

가장 많은 奴婢를 所有한 弘文館 副提學 이맹현은 758名의 奴婢를 財産으로 물려줬다. [19] 退溪 李滉은 367名의 奴婢 文書를 남겼다. [19]

李滉의 境遇는 本人이 積極的인 努力을 기울여 富를 쌓은 事例이다. [20] 李滉은 生前에 自身이 늘 넉넉치 않다고 여겼으며, 가뭄이나 凶年이 들 때면 經濟的 困窮함을 吐露한 적도 많았다. [20] 中上層 以上의 財産을 所有했던 그의 이런 '缺乏' 意識은 財産 增殖의 當爲性과 原動力을 提供했던 것으로 보인다. [20] 生計 걱정 없이 學問에만 專念했던 地方 地主들의 財産이 平均 田畓 300~500두락, 奴婢 100餘名이라는 點을 考慮하면 田畓 3000斗落에 奴婢 250餘名 가까이 거느린 李滉은 꽤 잘 사는 축에 屬했던 것만큼은 確實하다. [20]

일화 [ 編輯 ]

그가 도산書院 에 있을 때 어느 行人이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시중을 들던 弟子들과 下人들이 지나가는 이의 無禮함을 指摘했다. '先生님, 저 사람 行動이 지나칩니다. 先生님 앞을 지나면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李滉은 '내버려 두어라, 말 탄 사람이 그림속의 사람처럼 좋은 景致를 더해 주는데 무슨 허물이냐?'라며 下人과 弟子들에게 自身을 못알아보는 行人을 내버려 두라고 指示한다.

이문형 , 윤두수 , 윤근수 等을 彈劾했던 勳舊派 權臣 移監 慶尙道 觀察使 로 있을 때 그를 찾아 問安人事를 드렸다 한다.

著書 및 作品 [ 編輯 ]

著書 [ 編輯 ]

  • 《丹陽산수기》
  • 《有小白山錄》
  • 《啓蒙傳疑》
  • 朱子書節要
  • 《송계원名이학통록》
  • 《心經釋疑》
  • 《四端七情分離器서》

作品 [ 編輯 ]

  • 《무진六曹소》
  • 《聖學十圖》
  • 《自省錄》
  • 《退溪集》
  • 《陶山十二曲》

家族 關係 [ 編輯 ]

첫 夫人 許氏는 27歲때 死亡하고, 再婚한 權氏는 46歲 때에 死亡한다. 그 뒤 李滉은 再婚하지 않았고, 妓女 頭向을 小室로 맞이하였다. 둘째 아들이 일찍 죽자, 둘째 며느리가 再婚할 수 있도록 親庭에 돌려 보냈다.

한便 庶子 와 赤字를 差別하던 時代에 退溪는 서자 移籍을 自身의 戶籍에 올리고, 差別하지 않게 하였다.

또한 朝鮮 時代 當時 本妻와 後妻, 生母와 繼母를 慇懃히 差別하였지만, 李滉,先生은 子孫들에게 生母와 繼母를 差別待遇하지 말도록 가르쳤다.

關聯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文廟·宗廟 從事 6絃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各州 [ 編輯 ]

  1. 議政府 左贊成 에 贈職됨
  2. “歷史人物 奇行:退溪 李滉” . 2007年 11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5月 28日에 確認함 .  
  3. 退溪學釜山硏究院, 《退溪學論叢 第26輯》 (退溪學釜山硏究院, 2005) 27쪽
  4. 退溪學釜山硏究院, 《退溪學論叢 第26輯》 (退溪學釜山硏究院, 2005) 28쪽
  5. 退溪學釜山硏究院, 《退溪學論叢 第26輯》 (退溪學釜山硏究院, 2005) 29쪽
  6. 退溪學釜山硏究院, 《退溪學論叢 第26輯》 (退溪學釜山硏究院, 2005) 30쪽
  7. 明宗實錄 15卷, 明宗 8年(1553 癸丑 / 名 家庭(嘉靖) 32年) 10月 7日(競進) 1番째記事 "領議政 심연원 等이 庶孼 方今法 等에 對해 議論한 法 改正을 決定하다"
  8. 李麟佐의 亂에 抑鬱하게 連累된 嶺南 선비들을 慰問하는 뜻에서 도산書院, 紹修書院에서 行하는 別試를 부활시킨다.
  9. 朝鮮性理學을 理氣二元論, 理氣一元論으로 把握하는 것은 理氣論에 對한 無知에서 비롯된것이므로 修正하길 바람.
  10. 노대환, 《朝鮮의 아웃사이더》 (圖書出版 歷史의 아침, 2007) 204페이지
  11. 노대환, 《朝鮮의 아웃사이더》 (圖書出版 歷史의 아침, 2007) 205페이지
  12. 임석진 外 編著, 《哲學辭典》 (임석진 外, 中原文化, 2009)
  13. 어느 陽明學者의 커밍아웃 한겨레 21 2006年12月14日 第639號
  14. 黃允吉과 함께 日本 情勢를 偵探하러 派遣되었다.
  15. 나醫文化遺産踏査記: 産銀講을넘지못하고 (創作과 批評, 2007) 56페이지
  16. 退溪學釜山硏究院, 《退溪學論叢 第26輯》 (退溪學釜山硏究院, 2005) 28쪽
  17. 고려대학교 韓國史硏究所,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第12卷》 (고려대학교 韓國史硏究所, 2008) 131페이지
  18. 고려대학교 韓國史硏究所,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第12卷》 (고려대학교 韓國史硏究所, 2008) 132페이지
  19. “奴婢로 支撐된 朝鮮 封建 兩班制…退溪도 367名 奴婢 文書 남겨” . 서울&. 2018年 12月 20日.  
  20. " 富貴를 警戒하라"던 退溪 李滉은 어떻게 財産을 늘렸나” . 中央日報. 2018年 9月 15日.  
  21. 그는 1583年 陳誠李氏 族譜 刊行을 主管한다.

關聯 書籍 [ 編輯 ]

  • 노대환, 《朝鮮의 아웃사이더》 (圖書出版 歷史의 아침, 2007)
  • 이덕일, 士禍로 보는 朝鮮 歷史 (石筆, 2005)
  • 이덕일, 黨爭으로 보는 朝鮮 歷史 (石筆, 1997)
  •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웅진닷컴, 2004)
  • 부남철, 朝鮮時代 7人의 政治思想 (四季節, 1996)
  • 異常은 ,退溪의 生涯와 學問(서문당, 1973)
  • 유정동, 退溪의 生涯와 思想(박영사, 1974)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兩班文化의 隆盛"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