讓寧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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讓寧大君
讓寧大君
廢世子 (廢帝)
在位 1404年 9月 19日 ~ 1418年 7月 15日 (陽曆)
前任 王世子 방원 (太宗)
後任 王世子 도 (世宗)
이름
이제(李?)
시호 강정(剛靖)
身上情報
出生日 1394年
死亡日 1462年 11月 8日 ( 1462-11-08 ) (陽曆)
(享年 68歲)
父親 太宗
母親 원경왕후
配偶者 修城府否認 광산 金氏
子女 10男 17女
웹사이트 全州李氏 讓寧大君派
(財)지덕사-全州李氏 讓寧大君派 宗會

讓寧大君 (讓寧大君, 1394年 ~ 1462年 11月 8日 ( 陰曆 9月 7日 ))은 朝鮮 時代 初期의 王子이자 政治人, 畫家, 詩人이다. 太宗 의 長男이자 敵長男으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이다.

槪要 [ 編輯 ]

그는 朝鮮 太宗 원경왕후 閔氏의 長男으로 出生하였으며 本貫은 全州(全州) , 姓은 李(李), 휘는 第(?), 者 후백(厚伯), 諡號는 강정(剛靖)이다. 朝鮮 효령대군 , 世宗 , 성녕대군 의 첫째 親兄이다.

1404年 (太宗 4年) 王世子 에 冊封되고 1409年 부터 父王 太宗이 政事를 보지 않을 때 政治에 參與했고, 以後 1412年에서 1413年까지 父王 太宗 의 命에 따라 代理淸淨 을 1年間 하였으며 明나라 使臣 接待와 講武侍率行(講武時率行) 等 世子로서의 役割을 遂行했다. 自由奔放한 性格으로 父王 太宗 과 摩擦을 빚다가 柳政鉉 (柳廷顯) 等의 上疏로 廢位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忠寧大君(忠寧大君) 이 王世子가 되었다. 世子 廢位 以後에도 自由奔放한 活動이 問題가 되어 여러 番 彈劾을 當하였으나 世宗의 각별한 配慮로 處罰을 받은 적은 없었다.

平素 詩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作品들은 大部分 湮滅되거나 實戰되었다. 一說에는 王世子 자리를 讓步한 것은 그의 本心이었다는 說과 本心이 아니었다는 說이 兩立하고 있다. (贈) 議政府 左議政 광산군(光山君)에 贈職된 광산 金氏 김한로 (金漢老)의 딸이자 本妻인 守城軍夫人 金氏 사이에서 3男 5女를 두었으며, 妾에게서 7男 12女를 낳았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王子 時節 [ 編輯 ]

讓寧大君은 1394年 靖安軍 과 郡夫人 閔氏(뒤의 원경왕후 )의 長男으로 漢城府 에서 태어났다. 곧 1402年 (太宗 2年) 3月 8日 第(?)란 이름을 받았고 그 해 4月 18日 에 原子(元子)로 冊封되었다.

1404年 王世子 에 冊封되고, 1406年 明나라 使臣으로 다녀왔다. [1] 어려서 學者인 계성군 以來(李來)의 門下에서 효령대군 , 忠寧大君 等과 함께 修學하였으나 修業은 뒷전이고 참새나 바깥 風景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다.

1407年 (太宗 7年) 入朝하라는 明나라 聲調(成祖) 永樂帝 의 命을 받고 1407年 9月 25日 하진표社(賀進表使)로 明나라 에 가게 되었다. 이때 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 斷産府院君 李茂(李茂), 계성군 以來(李來), 提學 맹사성(孟思誠), 總裁 耳峴(李玄), 書狀官 집의 허주(許稠) 等 百餘名의 隨行員을 데리고 年庚 에 다녀왔다.

永樂帝 는 그에게 特別히 詩를 지어서 膳物로 주기도 하였다.

朝鮮의 王子 제가 朝貢 닦으러 萬里 길을 찾아오니

나이는 不過 열다섯이나 人材가 될 만하다.

글 읽고 道를 닦아 스스로 버리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서 집안 일을 毁損하지 말라.

예부터 禍福(禍福)은 定해져 있는 것이 아니요

높은 酸度 갈리고 바다도 옮겨지나니 操心하고 操心하라

世子 時節 [ 編輯 ]

1407年 (太宗 7年) 14歲에 광산 金氏 김한로 의 딸과 婚姻하였다. 김한로 는 權勢에는 關心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廢位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1408年 할아버지 太祖 李成桂 가 死亡하고 太宗 은 外戚 除去 目的으로 민무구 兄弟의 獄事 를 計劃한다. 양녕은 이들 두 外三寸이 抑鬱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自身도 事件에 連累되어 禍를 입을까 怯을 먹고 外叔인 민무구 兄弟가 太宗에게 當하는 것을 보고도 外面하였다. 1409年 부터 父王 太宗이 政事를 보지 않을 때 政治에 參與했고, 明나라 使臣 接待와 講武侍率行(講武時率行) 等 世子로서의 役割을 遂行하였다.

1410年 민무구 , 민무질 의 獄事가 發生했다. 이 일로 원경왕후 는 病席에 누웠고, 親庭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問病 次 大闕을 出入했다. 이때 민무휼과 민무회 兄弟가 讓寧大君을 찾아가 두 兄의 抑鬱함을 하소연을 했다. 讓寧大君은 어릴 때 外家에서 자라난 터라 이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은 두 外三寸의 付託을 딱 잘라 拒絶했다. 拒絶했을 뿐만 아니라 稟性이 잘못되었다며 도리어 外家를 非難했다.

양녕이 世子로 冊封된 뒤, 大君時節 스승이던 계성군 以來가 賓客 兼 世子의 스승으로 決定되어 王子들을 가르쳤다. 以來는 高麗 辛旽 에게 抵抗하던 선비인 이존오 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닮아 그만큼 剛直한 선비였다. 讓寧大君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窮理할 때 別監으로부터 계성군의 出入을 보고받자 일부러 方席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以來는 들어서자 이 怪常한 世子의 行動에 놀라 制止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個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以來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以來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對하였다. 以來는 밤 동안에 무척 憔悴해 보이는 世子의 顔色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病으로 取扱하였다. 그러나 양녕은 否認하였고 以來는 以後 太宗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을 報告하였다. 그 뒤로도 以來는 世子의 言行을 낱낱이 賃金 太宗에게 아뢰었다. 世子는 以來 等 四部들이 와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였다. 東宮의 뜰 앞에 새덫을 해 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또한 調整의 賀禮 때에는 머리가 아프니 배頉이 났느니 하고는, 東宮에서 혼자 새덫을 놓고 참새사냥을 즐기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品行이 自由奔放하고 色을 밝혀 잦은 問題를 일으켰다. 儒敎 敵 敎育과 嚴格한 宮中生活, 特히 王世子로서 지켜야 할 禮儀法度에 잘 適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父王인 太宗은 勿論 嚴格한 規範的 生活을 强調하는 儒學者들의 憂慮 對象이 되었고, 父王은 世子로서 模範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甚至於 罰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가 宮으로 데려온 한 妓生 出身 妾의 存在를 알게 되자 太宗 은 그 妓女를 死刑에 處했다. 讓寧大君은 父王 太宗 亦是 여러 女人을 妾으로 거느리는 것을 言及하며 抗議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以後에도 양녕의 品行은 自制되지 않았고 이에 柳政鉉 等이 上疏를 하여, 世子에서 廢位시킬 것을 常駐하였다. 이때 唯一하게 그의 世子 廢位를 反對한 것은 李朝 板書 黃熙 等 少數였다. 1418年 그는 世子에서 廢位되고 讓寧大君에 封해졌으며, 그 代身에 아우인 忠寧大君(世宗)李 世子로 冊封되었다.

父王과의 葛藤 [ 編輯 ]

太宗은 數次例에 걸쳐 女色을 禁하고 人君으로서의 資質과 德望을 쌓으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父王 太宗이 女色을 밝히고 後宮을 들이는 것을 指摘하였다. 그가 들인 後宮을 太宗이 來侵으로서 父王 太宗과의 葛藤이 繼續되었다. 1417年 太宗이 아무도 모르게 保管하라고 준 왕친錄(王親錄)을 열어봤다가 發覺, 이것이 所聞으로 퍼지면서 父王 太宗 의 不信을 사게 되었다. 또한 前中樞 郭璇(郭旋)의 妾을 取한 事實도 밝혀졌다.

當時 朝鮮 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所聞이 난 김호생 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士族 出身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好奇心에 양녕은 김호생 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大闕에 들어와 世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祕密裏에 出入하던 中 內侍에게 發覺되어 逃走하다 붙잡혀 御殿에서 太宗 에게 審問을 받았다. 太宗은 양녕이 몰래 市中의 雜것들을 불러들여 장난을 치는 等 體統없는 짓을 한다 하여 잡는 대로 或 귀양보내기도 하고 或 죽이기도 했다는데, 김호생 에게 붓을 만들게 한 뒤 그의 才能을 본 뒤 오히려 기특히 여기고 김호생 에게 특별이 共助(工曹)로 보내 筆匠(筆匠)職을 내렸다.

世子 廢位 前後 [ 編輯 ]

어느날 밤 父王 太宗 과 母后 원경왕후 의 對話를 祕密裏에 엿듣던 中 셋째 아들인 忠寧大君 의 材質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對話하는 內容을 엿듣게 되었다. 원경왕후 亦是 太宗의 主張에 同調하였다. 父王과 母后의 뜻이 讓寧大君에게서 떠나있다는 것을 看破한 효령대군 은 熱心히 工夫하였다. 하루는 讓寧大君이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다. 그는 효령에게 '工夫해야 所用이 없다' 고 말했다. 父王의 뜻이 忠寧大君 에게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는 野史가 傳해 온다. 이에 크게 落心한 孝寧大君은 每日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程度로 세게 쳤다. 그래서 俗談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한다. 結局 衝擊을 견디지 못한 효령대군 은 모든 工夫를 中斷하고 出家한 後 陜川 海印寺 로 들어갔다.

1418年 (太宗 18年) 柳政鉉 等이 世子 양녕을 彈劾하였다. 이때 이미 사람들에게 信望을 잃은 양녕을 庇護한 이는 黃熙 等 少數였다.

世子 廢位 背景 [ 編輯 ]

김시양(金時讓)은 著書 自害筆談(紫海筆談)에서 讓寧大君의 廢世子 原因에 세가지 推論을 하였다. [1] 첫 番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太宗의 關係에 對해서 그는 讓寧大君이 世子로 있을 때 太宗의 뜻이 世宗(忠寧大君)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辭讓하니 太宗이 곧 廢하여 世宗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番째로는 讓寧大君과 동생 忠寧大君 의 關係에 對해서, 讓寧大君이 世子 자리에서 廢位된 뒤 漢城 에서 外地로 쫓겨나 京畿道 伊川郡 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世宗大王이 몰래 讓寧大君을 불러 慰勞했다고 한다. [1]

그가 父王의 뜻이 忠寧大君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世子 冊封 直後라는 說과 世子 冊封 後 어느 날 偶然히 듣게 되었다는 傳說이 傳한다. 父王의 沈澱으로 問安次 들어가던 中 그는 門 밖에서 父王 太宗과 母后 閔氏의 對話를 祕密裏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依하면 父王 太宗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將次 百姓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太平聖代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恨歎하였고 母后 閔氏 亦是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朝鮮王朝實錄 에서는 이와 다르게 記錄하고 있는데, 世子(讓寧大君)의 繼續된 飛行으로 아버지 太宗 이 몇番 叱責하자, 不滿을 품고 太宗에게 “自身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太宗)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上疏를 올려 太宗을 非難했다. 이에 憤怒한 太宗은 世子를 廢하여 伊川郡 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忠寧大君 에게 世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2] 그해 5月 結局 世子에서 廢位되고 만다. 다른 傳承에 依하면 지난 날 父王 太宗과 方席, 방번, 그리고 房間 等 叔父들과의 骨肉相爭을 떠올리며 最終的으로 충녕에게 讓步하기로 決心했다는 傳承도 傳한다.

世子 廢位 以後 [ 編輯 ]

以後 出宮을 請하는 上疏가 거듭되어 太宗은 하는 수 없이 出宮을 命하였고, 京畿道 廣州郡 의 私邸로 내려갔다. 떠나는 讓寧大君에게 女子 종 13人과 男子 종 10女人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한 特別히 配慮하여 그가 平素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女人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外에 日常 쓰던 여러 가지 家財道具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고 한다. 太宗은 모든 것을 讓寧大君이 살기에 不足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命令하였다.

大闕을 떠나던 날 讓寧大君은 광나루 浦口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番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恨歎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傳說이 傳해지기도 한다. 光州의 私邸로 나온 讓寧大君에게 冊이라고는 다만 論語(論語)와 大學(大學) 以外의 冊은 禁止시켰다. 그 뒤 그는 八道 各地를 流浪하며 士大夫, 風流客, 妓女들과 사귀면서 一生을 마쳤다.

1418年 忠寧大君 이 王位에 올랐다. 동생 世宗大王 伊川郡 에 流配된 兄 讓寧大君을 釋放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卽位 以後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世宗의 卽位 뒤에도 여러 番 非行을 저질렀는데, 父王 太宗과 母后 원경王后의 事後 非行의 强度가 더해졌다. 過去의 王世子였고 現在 王이 동생이라는 點 때문에, 一擧一動이 細密한 觀察과 監視의 對象이 되어 番番이 그것도 數十 次例에 걸쳐 言官들로부터 彈劾되었다. 特히 自身의 며느리까지 犯하는등 人間 以下의 行爲까지 서슴지 않았고 이에 衝擊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自決할 程度였다.

이러한 그의 飛行에 對해 臣下들은 여러 番 彈劾하였으나 世宗은 그를 配慮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53年 癸酉靖難 이 일어나자 首陽大君의 便을 들어 그를 督勵했고, 甚至於는 安平大君을 私私시키라고 懇請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癸酉靖難이 끝나자 端宗을 죽이라고 懇請까지 했다고 한다. 一說에는 自身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世宗 에 對한 報復이라는 說이 있으나 確實하지 않으며, 이에 對한 理由는 아직도 論難이 되고 있다.

死亡 [ 編輯 ]

1462年 (世祖 8年)에 69歲로 世上을 떠났다. 文學에 才能이 있었다고 한다. 詩와 西에 能하였으며 國寶 1號였던 崇禮門의 懸板의 글씨도 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子女는 正室에서 3男 5女를 두고, 側室에서 7男 12女를 두었다. 죽으면서 遺言하기를 '나라의 禮狀을 받지 말며 墓碑도 세우지 말것이며 床石도 놓지 말고 酸素治粧을 極히 儉素하게 하라.'고 하였다. 강정(剛靖)의 諡號가 내려졌다.

事後 [ 編輯 ]

葬地는 京畿道 金川郡 强敵骨 坤坐艮向에 安葬되었는데, 只今의 '서울特別市 동작구 上島洞 山65-42'(양녕로 167)이다. 事後 世宗 의 廟庭(廟庭)에 配享되었다. 石物을 세우지 말라는 遺言에도 不拘하고 그의 7代孫 參判 萬(曼)과 8代孫 星港(性恒)李 相議하여 단출한 上席을 놓고 짤막한 墓碑를 세웠다. 그러나 1910年 韓日倂合 前夜인 8月 26日 밤 갑자기 破壞되었다.

事後 그는 淫亂함과 紊亂함의 代名詞가 되어 그의 詩文과 作品 中 相當數가 湮滅되거나 사라졌다. 또한 1457年 (世祖 2年) 斷種 의 죽음을 哀悼하며 지은 時까지 言及되며 問題視되었다. 그러나 肅宗 肅宗 이 偶然히 頹落한 그의 祠堂을 發見함으로써 復權되고 祠堂 個數의 命이 내려졌다.

後日 1966年 1月 小說家 박종화 가 그의 一代記를 背景으로 한 小說 讓寧大君 을 釜山日報에 連載하여 1968年 12月 31日 까지 連載하였다.

作品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本部인 修城府否認 광산金氏에게서 3男 5女, 妾室에게서 7男 12女 等 總 10男 17女를 두었다.

  • 政府인 : 修城府否認 광산金氏(隨城府夫人 光山金氏) - 광산군(光山君) 김한로(金漢老)의 딸
    • 敵1男 : 순성군(順成君) 희안공(僖安公) 李塏(李豈)(1414年6月23日-1462年9月2日)
    • 子婦: 신氏(申氏, ? ~ 1453年 11月 27日 )
    • 貼付: 이름 未詳, 良民 出身
      • 庶孫 : 五千 否定(烏川副正) 이사종(李嗣宗), 長孫이지만 庶孫이라서 奉祭祀를 두고 둘째 三寸 이포의 後孫들이 異議를 提起하였다.
    • 敵2男 : 咸陽郡(咸陽君) 이안공(夷安公) 이포(李布, 1417 - 1475年 6月 21日 )
    • 子婦 : 態인 郡夫人(泰仁郡夫人) 李氏(李氏)
    • 敵3男 : 瑞山郡 (瑞山君) 泥鞋(李?, 1420年 - 1451年 4月 10日 )
    • 子婦 : 陽川 賢夫人(陽川縣夫人) 金氏(金氏, ? - 1464年 6月 5日 )
    • 敵1女 : 載寧郡週 (載寧郡主, 또는 全義현주 全義縣主, ? ~ 1444) - 驪州 李氏 知敦寧(知敦寧) 利子(李孜)에게 出家(出嫁)
    • 敵2女 : 慶州 李氏 中樞副使 이番(李蕃)에게 出家(出嫁)
    • 敵3女 : 永平현주(永平縣主) - 安東 金氏 主婦(主簿) 김철균(金哲勻)에게 出家(出嫁)
    • 敵4女 : 密陽 朴氏 郡守(郡守) 박수종(朴壽宗)에게 出家(出嫁)
    • 敵5女 : 永川君主(永川郡主, 1412年 ~ 1442年 4月 5日 )
  • 妓生 封止련 : 讓寧大君이 婚姻하고 4年後 情을 통했던 妓生이다.
  • 이름 未詳
    • 서1남 : 固定否定(古丁副正) 二兼(李謙)
    • 서2남 : 長平否定 이흔 (李?), 事後 道程으로 追贈됨. 李承晩 의 15代祖
    • 서3남 : 界천도정 理性(李誠)
    • 서4남 : 鳳山否定 耳順(李諄)
    • 서5남 : 안창정 이심(李諶)
    • 서6남 : 밀산否定 이광석(李廣石) (船員系譜에는 밀산(密山)不正으로 쓰여 있으나, 實錄에는 돌山(突山)不正으로 記錄됨)
    • 서7남 : 禁止不正 이광근(李廣根)
  • 妓生 어리 : 元來 郭璇의 妾이었다.
    • 서1녀 : 이애중(李愛重, 1451 ~ ?) - 上場(上將) 이종경(李宗慶)과 婚姻
  • 超弓匠 : 초궁腸은 讓寧大君의 百部 上王 定宗의 愛妾이었다
  • 妓生 丁香
  • 妓生 漆點生
  • 奴婢 出身(이름 未詳)
  • 側室(이름 未詳)
    • 서4녀 : 縣監(縣監) 김승간(金承幹)과 婚姻
    • 서5녀 : 辭職(司直) 김오(金澳)와 婚姻
    • 서6녀 : 광산 金氏 縣令(縣令) 김원(金瑗)과 婚姻
    • 서7녀 : 佐理功臣 領議政 淸聲府院君(淸城府院君) 領議政 한치형 (韓致亨)의 初吹(첫 番째否認)
  • 奴婢 出身
  • 이름 未詳
    • 서9녀 : 强震 劉氏 窓勝(倉承) 유석번(兪碩蕃)과 婚姻
    • 서10녀 : 奉仕(奉事) 金의(金儀)와 婚姻
    • 서11녀 : 扶安 林氏 정남 임중(林重)과 婚姻
    • 서12녀 : 현주 이건이

讓寧大君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演劇 [ 編輯 ]

野花 [ 編輯 ]

충녕大君이 王이 되고 나서 어느날 讓寧大君이 孝寧大君이 있는 절에 가서 고기를 구워먹은적이 있었다. 효령과 중들이 그걸 말리려 했지만 양녕의 말 한마디로 모두 潛潛해졌다. " 내가 살아서는 임금의 兄님이고 내가 죽어서는 佛者의 兄님인데 내가 무엇이 두렵겠느냐?" 王이 되지는 못했지만 世宗보다 오래 살며 사냥도 하고 人生을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 編輯 ]

'靈媒'(詠梅)

讀書三月不窺園 / 글 읽노라 庭園도 돌아보지 못했는데

未覺苑林綠已繁 / 어느덧 原林에 綠陰이 우거졌네

梅子欲成春又晩 / 梅實이 익어가니 봄도 다 갔는데

?將幽思立黃昏 / 부질없이 깊은 생각에 黃昏도 모르네

祭享山僧軸(題香山僧軸)

山霞朝作飯 / 山의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

蘿月夜爲燈 / 숲 사이 돋는 달로 밤에 燈불을 三네

獨宿孤庵下 / 외로운 庵子 찾아와 홀로 자니

惟存塔一層 / 중들은 어디가고 塔만 서 있네.

기타 [ 編輯 ]

政治에는 關心이 없었고 詩, 書藝 等 藝術에 關心을 가졌고 一生을 風流客으로서 自由奔放한 生을 지냈다. 詩(詩)에 能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서울 南大門의 扁額(扁額) 崇禮門 (崇禮門)은 그의 筆跡이었다.

아들 瑞山郡의 鬱火病 [ 編輯 ]

朝鮮王朝實錄 世宗實錄 의 世宗 32年의 記事에 依하면 3男 瑞山郡 의 飛行과 事故 原因에 對해 아버지 讓寧大君이 그의 妾을 빼앗았기 때문이라 記錄하였다. 그에 依하면 '慧(?)는 양녕 大君(讓寧大君) 이제(李?)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妾을 아비에게 빼앗기고 心火病을 얻어, 술김에 자주 사람을 죽인 까닭에, 이 命令을 내린 것이다. [3] '라는 것이다.

奴婢 王손 [ 編輯 ]

讓寧大君에게는 奴婢 出身 妾에게서 얻은 딸과 奴婢 外孫女가 있다. 王子가 賤民에게서 子女를 얻었을 境遇에는 賤民으로 看做하지 않고 王族으로 看做한다. 따라서 王族이 賤民에게서 얻은 子女는 朝鮮 의 法律上 賤人이 아니기에 賤人과 結婚할 수 없다. [4] 그의 8番째 庶女 離垢地 는 男便 권덕영 의 事後 권덕영의 種 賤隷(天禮)와의 사이에서 딸 [5] 을 얻었는데 이름은 準備(准非 [6] )이다. 準備는 1488年 무렵 平民에게 出嫁하였으나 男便의 人的事項은 傳하지 않는다.

종과 姦通하여 얻은 딸을 婚姻시키는 過程에서 姦通 事實이 드러나 김종직 等의 彈劾 [5] [6] 을 받고 官衙로 끌려가 推鞠당하면서 王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離垢地 는 賜死되었으나, 種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準備는 이미 婚姻했음으로 連坐되지 않았다.

評價 [ 編輯 ]

김시양은 評價하기를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속마음을 감추고 이럭저럭 지내감으로 周圍 사람들의 歡心을 얻었으며 世宗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여러 次例 大闕로 맞아들여 술을 待接하였다. 또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매 世宗이 여러 番 城밖으로 나아가 맞이하시니 兄弟間의 至極한 正義가 이를 데 없었다'라고 評價하였다.<양녕대군은 世子가 되었을 때, 太宗의 뜻이 世宗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체하고 辭讓하니, 太宗이 結局 廢하고 世宗을 세웠다.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自己의 재주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이럭저럭 지냈기 때문에 內外(內外)ㆍ上下(上下)에 모두 歡心을 얻었고, 世宗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매양 大闕로 맞아들여 술을 待接하고 거의 每日 서로 즐겼다. 여러番 잔치하는 機構를 주셨고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世宗이 여러番 城 밖으로 나가 請하니, 至極한 正義가 無肝(無間)하였다. 世祖(世祖)가 임금이 된 뒤에 王子와 大臣이 많이 죽음을 當하였지만, 양녕은 능히 智慧로써 스스로를 保全하였고, 世祖도 嫌疑없이 높이 待遇하니, 사람들은 그가 임금 자리를 辭讓하여 어진 이에게 밀어 준 것을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고, 끝까지 몸을 잘 保全한 것을 더욱 어렵다 하였다.> [1]

기타 [ 編輯 ]

서울特別市 銅雀區 上島洞 산65-42에는 지덕사부묘소 (至德祠附墓所)가 있는데 지덕(至德)이란 中國 週(周)나라 때 太王(太王)李 맏아들 太白과 둘째아들 雨中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戒力에게 王位를 勿慮할 때 太白과 愚衆 두 兄弟는 父王의 뜻을 헤아려 削髮하고 隱居하며 王位를 辭讓했다. 後날 孔子 (孔子)가 太白은 지덕, 雨中은 靑權이라고 稱頌하였다. 이러한 故事를 바탕으로 讓寧大君을 모시는 祠堂을 지덕사부묘소, 효령대군 을 모시는 祠堂을 청권사부묘소라 하였다. [7]

各州 [ 編輯 ]

  1. 風雲兒인가-처세의 達人인가 東亞日報 마이다스, 박성수 칼럼
  2. 朝鮮王朝實錄 太宗代王實錄 參考
  3. 世宗實錄 127卷, 世宗 32年(1450 경오 / 名 경태(景泰) 1年) 2月 11日(甁술) 2番째記事
  4. 이때문에 燕山君이 廢黜된 뒤, 燕山君의 첩 장녹수의 딸과 結婚한 賤民이 處罰받은 事例가 있다.
  5. 成宗實錄 218卷, 成宗 19年(1488 무신年) 7月 12日(戒喩) 1番째記事
  6. 成宗實錄 221卷, 成宗 19年(1488 무신 / 名 紅치(弘治) 1年) 10月 4日(甲午) 4番째記事
  7. 李炡根 (2005年 9月 18日). “세종대왕의 '兄님'으로 世上 살아가기” . 오마이뉴스 . 2012年 11月 30日에 確認함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太祖實錄
  • 太宗實錄
  • 世宗實錄
  • 文宗實錄
  • 端宗實錄
  • 世祖實錄
  • 國朝寶鑑
  • 大東野乘
  • 燃藜室記述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정안대군
朝鮮 代理淸淨
1412年 ~ 1413年
後任
文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