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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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金正喜
조선국 承文院 檢校
(朝鮮國 承文院 檢校)
任期 1822年 3月 1日 ~ 1823年 1月 8日
君主 朝鮮 純祖 李公

이름
別名 者(字) 秋史(秋史), 號(號)는 阮堂(阮堂), 步澹齋(寶覃齋) 等
身上情報
出生日 1786年
出生地 朝鮮 忠淸道 豫算縣 입암면 용궁리
(現 大韓民國 忠淸南道 禮山郡 신암면 용궁리)
死亡日 1856年 (享年 70歲)
死亡地 朝鮮 京畿道 과천현 동면 주암동리 果地超黨
(現 大韓民國 京畿道 과천시 주암동 果地超黨 )
國籍 朝鮮
經歷 性理學者, 實學者, 考證學者, 書藝家, 畫家, 금석학자
正當 老論 僻派 殘存 後裔 性向 北學派 勢力
父母 김노영(양부)
南陽 洪氏 否認(羊毛)
김노경 (生父)
機械 劉氏 否認(生母)
配偶者 初配 寒山 李氏
計杯 瘞安 李氏
側室 韓氏
子女 김상무(量赤字)
김상우(庶子)
親姻戚 김이주(親祖父)
김노성(親叔父)
宗敎 儒敎 ( 性理學 ) → 佛敎 儒敎 ( 實學 )
金正喜가 그린 不二禪蘭圖(不二禪蘭圖)

김정희 (金正喜, 1786年 6月 28日 ~ 1856年 )는 朝鮮 後期의 代表的인 書藝家, 금석학자, 考證學者, 畫家, 實學者이다. 조선국 承文院 檢校 等을 지냈다.

主要 履歷 [ 編輯 ]

本館 慶州 이고, 者는 秋史(秋史)·원춘(元春), 는 阮堂(阮堂)·禮堂(禮堂)·詩庵(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農場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等等 오제봉(吳濟峯)李 調査, 蒐集한 ≪秋事先生雅號집 秋史先生雅號集≫에 依하면 無慮 503個나 된다.(史에 붓잡이 뜻도 있어서인지 普通 秋史로 알려져 있다.) 老論 北學派 實學者이면서 畫家, 書藝家였다. 韓國 金石學 의 改造(開祖)로 여겨지며, 韓國과 中國 의 옛 鼻紋 을 보고 만든 秋史體 가 있다. 그는 또한 蘭草 를 잘 그렸다.

一生 [ 編輯 ]

1809年(純祖 9) 生員이 되고, 1819年 式年試 (式年試) 甁과(丙科)에 及第하고 世子侍講院說書, 藝文館檢閱을 지냈다. 그뒤 三社의 言官을 거쳐 驍名世子 의 사부로써 報道하였으며, 1823年 奎章閣待敎가 되었다가 충청우도 暗行御史 로 나갔다. 그뒤 議政府의 檢詳(檢詳), 1836年(憲宗 2年) 成均館大司成과 兵曹參判, 吏曹參判 等을 歷任하였다.

1830年 生父 김노경 윤상도의 獄事 에 連累되어 古今島 (古今島)에 流配되었다가 純祖의 配慮로 풀려났으나 憲宗 이 卽位 初, 金正喜 自身도 윤상도 의 獄事에 連累, 1840年 (憲宗 6)에 濟州島로 流配되었다가 1848年 釋放되었다. 1851年(哲宗 2)에 憲宗의 墓를 옮기는 問題에 對한 領議政 권돈인 의 例論(禮論)으로 禮訟 論爭이 벌어지자 이에 連累되어 咸鏡道 北靑으로 流配되었다가 1853年 풀려났다.

秋史라는 者와 阮堂이라는 號를 많이 使用했으나 그밖에 100餘個 넘는 別號를 使用했다. 黨色으로는 老論 으로 外戚이었지만 碧波 나 蕩平黨에 들지 않고 北學派 가 되었다. 英祖 의 繼妃 정순왕후 의 親族이었고, 養어머니 南陽洪氏를 통해 남연군 과 姨從四寸間이 된다. 實學者 박제가 의 文人으로 燕巖 朴趾源 의 學統을 繼承하였으며, 흥선大院君 박규수 , 驍名世子 는 그의 文人들이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忠淸道 豫算縣 (現 忠淸南道 禮山郡)에서 兵曹判書를 지낸 金魯敬과 幽峻注意 딸 機械 劉氏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노영의 養子가 되어 漢城府 로 上京하였다. 그의 家門은 멀기는 했으나 王室의 이中 外戚으로 그가 文科에 及第하자 朝廷에서 祝賀를 할 程度로 勢力家였다.

黨色으로는 老論 으로 그의 집안은 西人 重鎭인 김홍욱 의 後孫이었다. 老論 의 黨員이 된 뒤에는 高祖父 김흥경 英祖 때의 宰相이었고, 曾祖父 김한신 英祖 의 庶女 和順翁主 의 駙馬가 되어 월성위가 되었다. 또한 曾祖父 김한신과 10寸 兄弟間인 김한구 의 딸은 英祖 의 繼妃인 정순왕후 金氏였다.

그의 집안은 老論 外戚 系列이었지만 高祖父 김흥경과 曾祖父 김한신은 黨派에 超然했고, 秋史 亦是 碧波 나 蕩平黨에 들지 않고 北學派 에 加擔하였다. 7歲 때 그는 立春大吉이라 쓴 글을 門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 이 報告는 金正喜에게 張差 名筆이 되겠다고 稱讚했다고 한다. [1] 庶孼 出身으로 詩, 서, 貨에 모두 能했던 박제가 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박제가 를 통해 北學派 朴智元 의 學問을 繼承하였다.

英祖의 딸 和順翁主가 出嫁한 粤省위 집안에서 태어난 金正喜의 집안에는 代代로 名筆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機械 柳氏가 妊娠한 지 24個月 만에 出産했다는 傳說이 있다. [2]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다.

靑少年期 [ 編輯 ]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 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等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家門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養子로 入籍된 뒤 15歲의 나이로 同甲인 寒山 李氏 와 婚姻한다. 結婚하던 그해 正祖가 昇遐하고( 1800年 ), 그의 曾大姑母뻘인 김대비( 정순왕후 )가 垂簾聽政을 하였으며, 그 緣故로 1年 後 1801年 , 그의 生父인 김노경 銀 鐘3品까지 벼슬이 오른다.

養어머니 南陽洪氏를 통해 남연군 과 姨從四寸間이 된다. 이러한 因緣으로 後에 흥선大院君 이 金正喜의 門下에서 글을 배우게 된다. 生母가 34歲로 世上을 떠나자, 悲歎과 虛無感에 故鄕 豫算으로 내려가 한때 佛敎 에 心醉하기도 한다.

스무살 되던 해( 1805年 ) 大王大妃가 昇遐하고, 그 다음달에는 夫人 寒山 李氏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朴齊家가 流配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養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養어머니의 三年喪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閨秀와 再婚한다. 이듬해인 1809年 (純祖 9) 生員試에 壯元及第하여 生員 이 되고 成均館 에 들어가 修學하였다.

學問과 思想 形成 [ 編輯 ]

16歲 때 北學派의 代價이자 3次例 以上 請을 오가며 學問의 幅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朴齊家)의 弟子가 되면서 그로부터 北學派 思想을 배우고 燕巖 朴趾源 의 學統을 繼承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淸나라 考證學 (考證學)에도 興味를 가지게 되었다. 1809年(純祖 9) 24歲 때 冬至使(冬至使) 兼 謝恩使(謝恩使)의 一行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府使(副使)인 父親 김노경을 따라 自制軍官의 職責으로 連行(燕行) 길에 올랐다.

當時 燕京의 學者 옹방강(翁方綱)과 阮元(阮元)을 만나 以後 學問 活動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일찍이 〈四庫全書 四庫全書〉의 編纂에 關與했으며, 經學(經學)에 精通하고 文章·金石·書畫·詩에 能한 學界의 元老였다.

當時 淸의 學風은 한臺의 學問을 崇尙하고 宋나라 , 明나라 性理學 을 觀念的이라며 排斥하는 것이었는데, 옹방강은 한나라 宋나라 學問의 折衝을 主張하고 있었다. 淸나라 중기의 經學의 代價였던 阮元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비롯한 考證學 의 學問的 體系樹立에 影響을 주었다. 燕巖 朴趾源 北學 思想과 淸나라 考證學 思想의 影響을 받은 그는 性理學 만이 眞理라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

官僚 生活 [ 編輯 ]

淸나라 往來 [ 編輯 ]

24歲 때인 1810年 (純祖 10) 아버지 金魯敬이 淸나라 에 冬至使 兼 謝恩使로 捨身行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自制軍官 으로 따라갔다. 6個月 동안 淸나라에 머물면서 淸나라 第一의 學者 옹방강 (翁方綱), 阮元 (阮元) 等에게 才能을 인정받아 考證學 을 배우게 된다. 阮元은 自己가 지은 《 소재필機 (蘇齋筆記)》를 처음으로 金正喜에게 寄贈까지 하였으며, 金正喜가 朝鮮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書信을 주고받았다. 朝鮮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等을 發表하여 北學 (北學)의 學問的 水準을 높이는 한便 性理學的 觀念論을 批判했다.

金正喜는 그밖에도 《 主役 》에도 造詣가 깊었으며, 殿閣(篆刻)을 藝術의 境地로 끌어올렸다. (茶)를 좋아하여 韓國의 多聲(茶聖)이라 불리는 初의 스님, 백파 스님과 親分을 맺었다.

1811年 에는 朝鮮 通信社 와 面談中이던 코가 歲이리 (古賀精里)의 請으로 特別히 日本 畫家 타니 分秒 (谷文晁)의 그림 富士山度(富士山圖)에 饌을 썼다. 타니 分秒의 다른 그림 山水圖(山水圖)에는 泰和 이현상 이 찬하였다. [3]

科擧 及第와 世子의 師傅 [ 編輯 ]

1819年 (純祖 19年) 式年試 (式年試) 甁과(丙科)로 合格하여 權知世子侍講院, 禮曹 參議를 거쳐 世子侍講院 설서로 驍名世子 를 輔弼하였고 藝文館 檢閱을 거쳐 三社의 言官을 두루 歷任한 뒤 承文院 檢校, 1823年 奎章閣 大橋, 暗行御史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親舊 趙寅永의 조카사위이자 19歲의 驍名世子 를 가르치는 世子侍講院 報德을 거쳐 弼善이 된다. 하지만 驍名世子가 죽고 나자 權力을 잡은 安東 金氏 집안의 金佑明이 그를 彈劾하여 罷免되었으며, 1830年 그 아버지 金魯敬은 윤상도(尹尙度)의 獄事에 關聯된 嫌疑로 古今島(古今島)로 귀양을 가게 된다. 金佑明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暗行御史로 내려온 金正喜에게 罷職된 바 있었는데, 이때문에 金正喜에게 怨恨을 품고 있었다. 金魯敬은 順調가 죽던 1834年 (純祖 34年) 純祖의 特別 配慮로 流配에서 풀려난다.

충청우도 暗行御史 로 나갔다가 議政府 의 檢詳(檢詳)으로 되돌아온 뒤 1835年 (憲宗 1年) 親分이 있던 풍양 조氏 가 政權을 잡자 成均館 大司成 , 李朝 參判 吏曹判書 等에 이르렀다. 1836年(憲宗 2) 成均館大司成과 兵曹參判을 거쳐 다시 成均館大司成을 歷任하고 判義禁府事(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金石學과 拷問判讀 分野 開拓 [ 編輯 ]

그는 以前까지 司書六卿 의 補助 學問으로 存在하였던 金石學(金石學), 私學, 文字學, 音韻學, 千産學(天算學), 地理學, 天文學 等의 學問에 對한 包括的인 硏究를 始作하였다. 實生活에 有用한 學問을 硏究해야 한다는 朴智元 박제가 의 가르침은 그가 實用的인 學問을 찾아서 硏究하게 하는 理念이 되었다.

當時 新羅 高麗 時代의 墓碑와 誌石 等이 各地에서 發見, 出土되기 始作하면서 文字 解讀이 이루어졌고, 金石學 은 文字學과 書道史(書道史)의 硏究와 더불어 獨自的인 學問 分野로 發展하기 始作했다. 그는 朝鮮에서 金石文 硏究를 "金石學"의 班列에 올려놓은 先驅者이다. 金正喜는 淸나라에서 考證學을 배울 때 金石學度 함께 배웠다. 그는 金石資料를 好古跡(好古的) 趣味로 對하던 當時까지의 風潮를 批判하고, 中國의 境遇를 들어 金石學이 하나의 獨立된 學問으로 發展하였음을 主張하였다. 또 經學科 歷史學에서 必須 不可缺한 補助的인 學問 分野라고 하여 그 效用을 力說하였다. [4] 淸나라에서 歸國한 뒤 親舊인 김경연 , 조인영 等과 함께 碑文을 보러 八道를 踏査하기도 했다. 金正喜가 남긴 金石學의 가장 큰 業績은 1816年 當時까지 “ 無學 大使 의 非” 또는 “ 高麗 太祖 의 非”라고 알려져 있던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를, 碑文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句節을 통해 眞興王의 巡狩碑라는 것을 밝혀냈다. 巡狩碑를 밝혀낸 過程과 그 事實的인 證明은 그가 著述한 《 禮堂金石過眼錄 (禮堂金石過眼錄)》에 記錄되어 있으며, 《 振興吏批고 (眞興二碑攷)》 等과 같은 著書도 남겼다. 그의 學問 態度를 밝힌 글로서 有名한 〈 실사구시설 〉은 科學的이며 客觀的인 方法으로 眞理를 探究해야 한다는 內容으로 되어 있다. 그는 北學派 學問과 淸나라 考證學 까지 두루 涉獵하였으므로 經學을 비롯한 모든 分野에서 많은 影響을 받아 自制軍官으로 連行을 다녀와 科擧에 及第한 後에는 官僚生活 틈틈이 金石學 硏究에 沒頭하였다. 또한 문무왕非 와 金仁問 墓碑 等에서 發見한 新羅 性한王 이라는 글字에 注目, 慶州 金氏의 歷代 族譜와 比較, 對照하여 성한왕이 김알지 또는 김알지 의 아들인 歲寒과 同一人이라는 結論을 내리게 된다. 또한 소호금천씨와 破鏡진백, 투後에 對한 單語도 確認하고 이를 記錄으로 남겼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金櫃에서 태어났다는 門中의 時調 說話와 背馳되는 것이라 여러 사람의 批判을 받는 原因이 됐다.그리고 金石文 資料를 찾고 保護하는데 많은 努力을 기울이게 되었다. 金石文 에 對한 解讀, 文字判讀에 對한 體系的인 硏究와 整理를 바탕으로 後學을 指導하여 朝鮮 金石學파를 성립시켰다. 그의 金石學 을 繼承한 學者들로서는 神位 , 조인영 , 권돈인 , 신헌 , 조면호 (趙冕鎬) 等이 있다.

生涯 後半 [ 編輯 ]

流配 生活 [ 編輯 ]

그러다가 1840年 (憲宗 6年) 무렵 安東 金氏가 執權하자 이番에는 金正喜 自身이 윤상도(尹尙度)의 玉(獄) 에 關聯되어 濟州島로 流配를 가게 된다. 1842年 陰曆 11月 夫人이 世上을 떠났으며, 그 예순세 살인 1848年 陰曆 12月 6日 에 流配에서 풀려난다. 濟州島에서 流杯하던 때에 三國時代로부터 朝鮮에까지 내려오는 韓國의 書法을 硏究하여 만든 書體가 秋史體이다. 이 秋史體는 韓國의 筆法뿐만 아니라 韓國의 碑文과 中國의 碑文의 筆體를 硏究하는 過程에서 만들어졌다.

流配地에서의 困窮한 生活 가운데 繼續 글과 作品을 썼다. 그의 流配地에는 安東 金氏 勢道家의 김유근 等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의 대쪽 같은 性品은 그 뒤로 安東 金氏의 標的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親舊 권돈인 (權敦仁)李 議政府 領議政 으로 金正喜를 돌봐 주었는데, 宮中의 祭禮와 關聯하여 그가 失手를 하게 되었다(→ 憲宗廟薦 問題 ). 1850年 (哲宗 1年) 또는 1851年 에 失手한 議政府 領議政 權敦仁은 勿論이고 親舊였던 김정희까지 咸鏡道 北靑 으로 流配를 가게 된다.

出家와 執筆生活 [ 編輯 ]

北靑 流配는 1852年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知人과 弟子로부터 古代의 石器를 모아오게 하여 韓國의 古代 文化를 硏究하였다고 한다. 12年間의 流配生活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墓所가 있는 果川에 隱居하면서 書畫와 禪學(禪學)에만 沒頭했다. 이 때는 安東金氏의 勢道家門이라 서용의 命令은 내려졌으나 現職으로 復歸하지는 못했다.

北靑에서 돌아온 金正喜는 京畿道 果川에 果地超黨 (瓜地草堂)이라는 居處를 마련하고 後學을 가르치며 餘生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僧服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月 果川으로 돌아와 生을 마쳤으며, 죽기 前날까지 執筆을 하였다고 한다. 作品 中에는 後日 國寶 第180號로 指定된 歲寒圖(歲寒圖)와 某質도(??圖), 部作亂刀(不作蘭圖) 等이 特히 有名하다. 文集으로 완당집, 阮堂尺牘 阮堂尺牘, 담連載시고 覃硏齋詩藁 等이 있고 1934年 에 刊行된 阮堂先生全集 이 있다.

事後 [ 編輯 ]

書藝家로 名聲을 날렸고 事後 흥선大院君 이 執權한 後 그의 思想과 學問이 再照明되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北學派 思想에 對한 碧波 爲政 斥邪派 系列의 反感으로 1910年 大韓帝國 滅亡 以後부터 本格的으로 그의 思想과 學問에 對한 檢討, 硏究가 始作되었다. 1934年 에 가서 그의 文集과 著書, 詩文 等을 모은 阮堂先生全集 이 刊行되었다.

評價 [ 編輯 ]

金正喜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다. 神位 , 박규수 , 유홍기 , 오경석 , 민태호 , 민규호 , 姜瑋 等 中人 階層과 兩班 士大夫 階層 等을 이끄는 巨大한 學派의 指導者였다. 그의 門下生이 많아 “秋史의 門下에는 3千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程度였다. 그들은 19世紀 後半 開化 思想家로 이름을 남기게 되며, 大院君의 政策도 北學에 기초한 實學思想에 바탕을 두고 있다.

學問에서는 考證學에 뜻을 두어 中國의 學者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考證學을 輸入하였고, 金石學 硏究로 北漢山의 眞興王 巡狩碑를 考證하는 等 考證的인 功勞도 크다.

書藝 ·圖書·詩文· 墨花 에서 獨創的이며 뛰어난 業績을 남겼으며, 墨畫에서는 蘭草·대나무· 山水畫 等도 잘 그렸다. 한便 그에게 金石學을 배운 有名한 人物로는 오경석 이 있고, 蘭草를 배운 이는 이하응 이 있다.

그리고 知人에게 蘭草를 그려 줄 때 別號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韓國의 偉人 가운데 가장 많은 別號를 가지고 있다. 秋史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別號로서 西湖(書號)이다.

그러나 多方面에 걸친 業績에 만큼 그에 對한 批判도 만만치 않다. 그 亦是도 儒敎的 權威主義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8世紀에 싹튼 風俗畫와 眞景 山水畫를 낮게 評價했다. 平素 佛敎의 敎와 線에 깊은 眼目과 水症을 바탕으로 지내었으며 末年에 不法에 歸依하고 果川에서 隱居하였다.

秋史 硏究의 디딤돌을 마련한 사람은 日帝時期 경성제국대학 敎授를 歷任했던 歷史學者 후지츠카 지카시(藤塚?, 1879~1948)이다. 그는 最初의 專門的인 秋史硏究가라 할 수 있다. 보기 드문 "秋史매니아"이기도 하다. 秋史의 人格과 學問에 魅了되었던 후지츠카는 한  · 中  · 日 國境을 넘나들며 秋史와 關聯된 資料들을 廣範圍하게 蒐集하여 文集 等 基礎資料의 不實을 補完하는 데 一生을 바쳤다. [5]

기타 [ 編輯 ]

귀양을 가고 풀려나기를 反復하여 一生 동안 귀양살이가 都合 13年이나 되었다.

號는 阮堂(阮堂)·禮堂(禮堂)·詩庵(詩庵)·노과(老果)·農場인(農丈人) 等 2014年 까지 確認된 것만 540餘 種에 이른다.

-> 노과(老果) -> 과노(果老)醫잘못된 表記 : 果川社는 늙은이라는 뜻임

咀嚼 [ 編輯 ]

著書 [ 編輯 ]

  • 《今世》
  • 《완당집》

그림 [ 編輯 ]

기타 [ 編輯 ]

畫風 [ 編輯 ]

그의 그림 畫風(畵風)은 大體로 消息 에게서 비롯된 詩, 서, 火 一致의 文人 趣味를 繼承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第2의 職業으로 볼 만큼 專門的으로 하였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文字向(文字香)을 主張하여 技法보다는 審議(心意)를 重視하는 文人畫風(文人?風)을 매우 尊重하였다. 또한 그는 筆墨의 아름다움을 主張하여 꾸밈없는 고담하고 簡潔한 弼善(筆線)으로 審議(心意)를 露出하는 文氣(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法을 隸書를 쓰는 法에 비겨서 그는 "'文字向'이나 '서권기'가 있는 然後에야 할 수 있으며 話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强調하였다. 그의 畫風은 조희룡(趙熙龍), 許維(許維), 흥선大院君 이하응, 電氣(田琦), 權敦仁 等의 文人들을 桶 排出, 繼承되었다.

家族 關係 [ 編輯 ]

  • 曾祖父 : 김한신 (金漢藎)
  • 曾祖母 : 和順翁主
    • 할아버지 : 김이주(金?柱)
      • 養아버지 : 김노영(金魯永) - 百部
      • 養어머니 : 홍대현(洪大顯, 南陽洪氏)의 딸 - 伯母
        • 否認 : 閑散李氏(이희민李羲民의 女)
          • 兩者 : 김상무(金商懋)
        • 否認 : 瘞安李氏(이병현李秉鉉의 女)
        • 側室 : 韓氏(韓氏)?
          • 庶子 : 김상우(金商佑,또는 金商禹)
      • 親아버지 : 김노경(金魯敬)
      • 親어머니 : 幽峻週(兪駿注, 機械油씨)의 딸
        • 親同生 : 金明熙(金命喜)
        • 親同生 : 金相姬(金相喜)
      • 中部 : 김노성(金魯成)
      • 中모 : 李學永(李學永, 閑散李氏)의 딸

關聯 作品 [ 編輯 ]

TV 시리즈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소준섭 (1996年 7月 10日). 〈秋史의 門下에 3千의 선비가 있다〉. 《朝鮮人物實錄 1》. 서울: 圖書出版 자작나무. ISBN   89-7676-225-8 .  

各州 [ 編輯 ]

  1. 소준섭. 《朝鮮人物實錄 1》, 256~264쪽.
  2. 글로벌稅契對百科 》, 〈庶民藝術〉, 김정희.
  3. 허경진, 김지인, 〈그림과 饌으로 畫幅 위에 남긴 朝ㆍ日 人士들의 交遊〉, 嘉泉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아시아文化硏究 第17輯》 (嘉泉大學校, 2009) pp.412
  4. 崔英成, 〈秋史 金石學의 再照明〉《東洋古典硏究》(第29輯) 229~230쪽. “秋史는 우리나라에서 金石文 硏究를 ‘金石學’의 班列에 올려놓은 先驅者이다. 秋史는 金石資料를 好古跡(好古的) 趣味로 對하던 當時까지의 風潮를 批判하고, 中國의 境遇를 들어 金石學이 하나의 獨立된 學問으로 發展하였음을 主張하였다. 또 經學科 歷史學에서 必須 不可缺한 補助的인 學問 分野라고 하여 그 效用을 力說하였다.”
  5. 崔英成, 〈秋史 金石學의 再照明〉《東洋古典硏究》(第29輯) 229쪽. “이러한 難點을 克服하고 秋史 硏究의 디딤돌을 마련한 사람이 日帝時期 경성제국대학 敎授를 歷任했던 歷史學者 후지츠카 지카시(藤塚?: 1879~1948)이다. 그는 우리나라 最初의 專門的인 秋史硏究가라 할 수 있다. 보기 드문 ‘秋史매니아’이기도 하다. 秋史의 人格과 學問에 魅了되었던 후지츠카는 한  · 中  · 日 國境을 넘나들며 秋史와 關聯된 資料들을 廣範圍하게 蒐集하여 文集 等 基礎資料의 不實을 補完하는 데 一生을 바쳤다.”

外部 링크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考證學"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