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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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珥
李珥
1965년 김은호가 그린 이이의 초상화
1965年 김은호 가 그린 李珥의 肖像畫
朝鮮 吏曹判書
在任 1582年
賃金 朝鮮 宣祖
이름
別號 構圖章元貢(九度壯元公)
淑獻(叔獻)
栗谷(栗谷), 石潭(石潭) [1] , 우재(愚齋)
시호 문성(文成)
身上情報
出生日 1537年 1月 17日 ( 1537-01-17 )
出生地 朝鮮 江原道 江陵部 죽헌동 烏竹軒 몽룡실
死亡日 1584年 2月 27日 ( 1584-02-27 ) (47歲)
死亡地 朝鮮 漢城府 대사동 [2] 自宅
國籍 朝鮮
經歷 文官 兼 性理學者
本館 덕수 (德水)
父母 李元壽 (簿)
申師任堂 (某)
權氏 側室(庶母)
兄弟姊妹 누이 이매창, 兄 이番, 兄 이선,
동생 이우
配偶者 情實 谷山 盧氏 否認
側室 金氏
側室 李氏
子女 李氏(庶女)
學問 活動
分野 性理學
成果 理氣一元論
스승 백인걸

李珥 (李珥, 1537年 1月 17日 (陰曆 1536年 12月 26日)~ 1584年 2月 27日 (陰曆 1月 16日))는 朝鮮 의 文臣이자 性理學者이다.

官職은 吏曹判書(吏曹判書)에 이르렀다. 西人(西人)의 領袖로 推戴되었다. 이언적 , 李滉 , 송시열 , 박세채 , 金集 과 함께 文廟 從事와 宗廟 配享을 同時에 이룬 6絃 中 하나다. 아홉 次例의 過去에 壯元及第하여 構圖章元貢(九度壯元公)이라는 別稱을 얻었다. 그의 業績은 性理學 에서의 理氣一元論 의 學問을 밝힌것으로 잘알려져있다. [3]

槪要 [ 編輯 ]

15歲 때 어머니 申師任堂 이 죽자 3年間 廬墓살이를 한 後, 아버지가 繼母 權氏와 再婚瑕疵 金剛山 에 들어가 僧侶가 되었다. 이 때문에 後날 그가 죽은 後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僧侶가 되려다가 還俗한 사람'이라고 同人과 南人이 攻擊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 이 죽기 直前 朋黨의 肺에 關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惡하다'고 攻擊하였으며 以後 李浚慶의 處罰까지 常住하기도 했다. 그러나 後日 黨爭이 現實化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同人 , 西人 사이의 黨爭 調整을 平生 政治 理念으로 삼았다.

貢納(貢納)의 弊端 是正策人 代貢收米法 (代貢收米法) 實施를 主張하고, 兵曹 板書 로서 女眞族 이탕개 의 侵入을 擊退한 後, 10萬 養兵說을 主張해 壬辰倭亂을 豫言했다는 名聲을 얻었다. 또한 그는 鄕約의 普及에 參與하는 한便, 安定期에 접어들면서 混亂해진 社會를 改革할 方法으로 다시 建國 初期와 같은 初心으로 돌아가자는 警長論을 提示하였다. 그는 朋黨을 調停하지 못한 恨을 남긴 채 죽었으며, 事後 議政府 領議政 追贈 되었다. 成婚 , 송익필 , 김장생 等과 함께 記號 地域이 基盤인 西人 의 縱走로 推仰된다. 그를 文廟 에 從事하는 問題를 놓고 仁祖反正 以後 50年間 論爭의 對象이 되다가 肅宗 때 庚申換局 으로 西人들이 執權한 後 文廟에 從事되었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栗谷 이이는 1536年 江原道 江陵部 죽헌동 에 있는 外家인 오죽헌 (烏竹軒)에서, 덕수 李氏 通德郞 司憲府 監察 李元壽 와 평산 신氏 申師任堂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別채에서 태어났는데, 申師任堂이 胎氣를 느끼게 된 契機가 黑龍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放은 몽룡실(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以後 京畿道 坡州 에 자리限 本家로 와서 生活하였다.

李珥의 아버지 李元壽는 司憲府 監察, 水雲 判官과 通德郞 을 지냈으며, 中宗 때의 兄弟 政丞인 경재 이기 , 용재 履行 의 5寸 조카였는데, 이기는 議政府 領議政 을, 履行은 議政府 左議政 을 各各 지냈다. 또한 從叔(堂叔) 利己와 履行은 當代의 實權者들이었고, 그들은 外家쪽으로는 生六臣 성담수 , 성담년 의 조카이고, 死六臣 성삼문 의 外從조카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李元壽 通德郞 者眩仆 監察 에 이르렀다.

벼슬이 낮았던 아버지 李元壽는 昇進하고자, 일부러 堂叔이자 김종직 의 文人이며 글을 잘 썼던 이기 의 門下에 出入했으나, 夫人 申師任堂 의 勸告로 그만두었다. 野史에 依하면, 申師任堂 이 男便 李元壽 에게 이기 의 집에 出入하다가 禍를 當할 것이라고 警告했는데, 果然 이기 는 청렴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벼슬이 議政府 領議政 까지 이르렀지만, 乙巳士禍 에 加擔한데다 權力을 濫用한 탓에 明宗 末葉 官爵을 削奪 當했다.

어머니 申師任堂 은 學問的 素養이 깊었고, 詩文과 書畫에 能했다. 또한 어머니 申師任堂 은 높은 德을 지닌 人格者였을 뿐만 아니라, 節槪가 굳고 媤父母를 잘 섬긴다고 稱頌을 받던 人物이었다. 이러한 어머니를 두었던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學問을 배웠다. 이런 敎育環境 德에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그의 外할아버지 眞사 신명화(申命和)는 조광조 等과 가까이 지냈으며, 己卯士禍 때의 義理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外할아버지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만 여럿 두었는데, 딸들에게도 儒敎 , 性理學 을 가르치고, 孔子 , 孟子 , 走者 의 道理를 가르쳤다.

李元壽는 申師任堂 外에도 權氏라는 妾을 한名 더 두었다. 庶母 權氏는 酒母 出身으로 술酒酊이 甚하였는데, 申師任堂 에게는 근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申師任堂이 世上을 떠난 뒤, 權氏는 이이를 괴롭혔으나 그는 怨恨을 품지 않고 庶母를 極盡히 모셨다.

幼年期와 少年期 [ 編輯 ]

이이는 어려서 神童이라 불렸다. 그는 生後 1年도 안돼 말과 글을 깨우쳐서 周邊을 놀라게 하였는데, 3歲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申師任堂 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程度로 놀라운 天才였다. 이이는 4歲 때 中國 의 歷史冊인 《史略》의 첫 卷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이는 어머니에 對한 孝誠이 至極하여 5歲 때에 어머니 申師任堂 이 病으로 자리에 눕자, 外할아버지의 位牌를 모신 祠堂에 홀로 들어가 每日 1時間 동안 祈禱를 올릴 程度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行方不明이 된 이이를 찾던 家族들은 外祖父 신명화 의 祠堂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이이가 祈禱하는 모습을 보고는 歎服하였다 한다. 또 11歲 때에는 아버지 李元壽 가 病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끝으로 自己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祠堂에 들어가 아버지의 病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祈禱했다.

8歲 때는 화석정 (花石亭)에서 八世부시(八歲賦詩)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林亭秋已晩 / 騷客意無窮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 詩人의 是正은 그지없어라.

遠水連天碧 / 霜楓向日紅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 丹楓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

山吐孤輪月 / 江含萬里風
山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 江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 [4]

5萬원券 貨幣에 도안된 어머니 申師任堂

어머니 申師任堂 이 自主 病患에 눕자, 李珥와 兄弟들은 至極精誠으로 어머니 申師任堂 의 病구완을 하였다. 그러나, 1551年 (明宗 6年)에 어머니 申師任堂 은 끝내 病으로 世上을 떠났다. 以後, 이이는 精神的으로 彷徨하였는데, 徐某 權氏의 술酒酊과 괴롭힘은 그의 彷徨을 부추겼다. 그는 外할머니 이氏와 書信을 주고받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外할머니에게 依存하였으나, 그마저도 곧 世上을 떠난다.

그는 城主牧師 노경린 의 딸 谷山 盧氏 와 結婚하였고, 金氏 와 李氏 두名의 妾을 두었다. 그中 李氏의 庶女에게서 얻은 딸 李氏는, 이이가 죽은 뒤 그의 弟子였던 김장생 의 아들 金集 의 妾으로 出家하였다.

靑少年期 [ 編輯 ]

學問 數學科 親舊 [ 編輯 ]

스승 휴암 백인걸
(그는 조광조 , 金式 , 김안국 의 學統을 다시 栗谷 李珥 우계 成渾 에게 傳授하였다.)

1548年 , 이이는 13歲 때 어른들도 따내기 힘든, 進士 初試에 壯元 及第를 따내어 試驗管 뿐만 아니라 父母하고 周圍 사람들까지 놀랐을 程度였는데, 只今으로 친다면 初等學校 6學年 學生이 高位公務員 (政府 機關이나 地方 公共 團體의 높은 職責을 가진 사람) 試驗 에 合格한 것이나 다름없다.

李珥의 學問은 날로 깊어가서 16歲 때에는 더 가르칠 것도 없을 程度였으며, 儒敎 經書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冊까지도 通達하고 性理學을 깊이 硏究하였다.

스승 없이 조광조 를 私宿하다가 그는 조광조 의 門下生인 휴암 백인걸 을 찾아가 修學하였다.

백인걸 의 門下에서 雨季 成婚 을 만나는데, 成渾은 그의 오랜 親舊가 된다.

成婚 조광조 의 다른 門下生인 성수침 의 아들이자 성수침 의 門下生이기도 했다.

또한 故鄕 坡州는 親舊 成婚 의 아버지 성수침 의 緣故地이기도 했다.

靑年期의 李珥와 成婚 은 時流의 墮落을 論하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盟誓하였다. 그런데 1567年 宣祖 가 人材를 推薦받을 때 士林에서는 이 亂世를 治癒할 수 있는 人物로 우계를 薦擧하는데 京義 생각은 어떤가?" 라고 牛溪의 사람됨을 물었다.

宣祖 의 물음에 栗谷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爲人은 못 되고 學問에 힘쓰는 着實한 선비다" 라고 答辯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人物이라고 士林에 떠받드는 人物이기 以前에, 自身의 오랜 切親한 親舊를 着實한 선비에 不過하다고 한 것은 比較的 冷酷한 評價였다.

그런데 宣祖 가 이어서 "經過 우계를 比較하면 어떤가?"라고 묻자 이이는 "재주는 所信이 牛溪보다 自身이 낫긴 하나 受信하고 學問的인 努力에 있어서는 雨季에 미치지 못한다." 라고 率直하게 答辯했다.

成婚 亦是 李珥의 그러한 答辯에 遺憾을 갖지 않고 謙虛히 받아들였다.

母親喪과 彷徨 [ 編輯 ]

1551年 (明宗 6年)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水雲 判官 人 아버지 李元壽 平壤 으로 出張을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어머니 申師任堂 이 死亡하자, 墓所가 있는 坡州 두문리 者雲山에서 3年間 侍墓(侍墓)살이를 했다. [5] 孝誠이 남달리 至極하였던 이이는 家族들의 挽留에도 不拘하고 스스로 3年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墓幕을 짓고 生活하며 어머니의 冥福을 빌었다. 또 아버지가 病으로 누웠을 때는, 祠堂에 들어가 아버지의 病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祈禱했다.

또한 어머니 申師任堂 의 事後 子女들은 서모인 權氏 夫人에게서 受難을 겪어야 했다. [6] 溫厚하고 仔詳한 어머니였던 申師任堂과는 달리 權氏 婦人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盞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性格이었고, 조금만 脾胃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빈 독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어댄다든가 노끈으로 自殺 소等을 벌이는 等 行悖가 甚하였다. [6] 子女들이 當하는 苦痛은 말이 아니었다. [6] 참다못한 이이는 家出을 敢行할 程度였다. [6]

어머니 申師任堂 의 오랜 病患과 죽음은 그에게 心的, 精神的 衝擊을 주었다. 그는 사람이 왜 태어나고 죽는가에 對해 繼續 苦悶하면서 한동안 彷徨하게 된다. 結局 侍墓살이를 마친 뒤 金剛山 으로 들어가 僧侶가 되었고, 그가 뒤에 佛敎 에 入門했다가 還屬 한 뒤에도 問題 삼지 않고 받아준 것은 스승 백인걸 과 오랜 親舊 成婚 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入山 經歷은 그의 生前에도 송응개 等의 同人 (東人)들과 許穆 , 尹鑴 , 윤선도 等의 남인 (南人) 黨員들에게 異端 學問에 빠졌다는 理由로 思想攻勢를 當하는 原因이 된다. 이이가 僧侶이며 佛敎도 라는 同人, 男인, 北人系列 儒學者 (儒學者)들의 史上 攻勢는 1910年 (隆熙 4年) 朝鮮 이 滅亡할 때까지도 持續된다.

조광조 의 直系 弟子였던 그의 스승 백인걸 은 比較的 자유로운 雰圍氣에서 儒生들과 靑年들을 가르쳤고,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 의 스승이자 自身의 思潮(師祖)가 되는 정암 조광조 조차 急進的이라며 거침없이 非難을 加하기도 했다.

僧侶 生活과 還屬 [ 編輯 ]

金剛山 九龍淵

墓幕에서 讀書에 熱中하던 이이는 佛敎 書籍을 읽고 儒敎와 色다른 學問에 興味를 느껴 3年喪이 끝난 1554年 (明宗 9) 金剛山 마가年 (摩訶衍)에 들어가 自身의 雅號 이기도 한 석담 (石潭)이라는 법명 으로 僧侶가 되어 佛敎를 硏究하였다.

佛道를 닦았는데, 그가 遂行하는 中 僧侶들 間에 生佛이 出現했다는 所聞이 藉藉했다고 한다. [7] 그러나 僧侶生活 내내 人間이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對한 그의 質問에 對한 解答을 얻지 못했다. 結局 佛敎 가 儒敎에 미치지 못한다고 確信하고 入山 1年 만에 마가年 을 떠나 金剛山에서 내려와 還俗한다. [8] 하지만 栗谷 李珥가 主氣論을 말하고 아래의 鳶飛魚躍 (鳶飛魚躍) 詩를 남긴 것은 이미 佛敎에 對한 工夫를 마쳤음을 말한다. 山에서 下山하며 그는 僧侶에게 이와 같은 詩를 남기기도 했다.

鳶飛魚躍 (鳶飛魚躍)

鳶飛魚躍上下動(鳶飛魚躍上下同) /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理致 위나 아래나 每 한가지
底盤翡色逆鼻孔(這般非色亦非空) / 이는 色도 아니요 또한 공도 아니라네
等閑日蘇間身世(等閑一笑看身世) / 실없이 한番 웃고 내 身世 살피니
獨立史양만목中(獨立斜陽萬木中) / 夕陽에 나무 빽빽한 수풀 속에 홀로 서 있었네

佛敎의 無念 無欲이 그의 氣質과는 맞지 않다고 判斷, 1555年 20歲에 金剛山에서 내려와 다시 性理學에 耽讀하며 儒敎의 眞理를 통해 現實 問題를 打開하겠다는 다짐을 說破하며 《자경문》(自警文)을 執筆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때 僧侶 로 있었다는 點은 後日 同人 남인 에 依해 人身攻擊의 對象이 된다. 이이가 죽고 2百年이 지난 뒤에도, 近畿 남인 의 指導者 許穆 , 尹鑴 , 윤선도 는 李栗谷을 學者의 탈을 쓴 스님이라고 攻擊했다.

學者 生活과 過去에 及第 [ 編輯 ]

백인걸 의 文人이기도 한 이이는 李滉 을 先學으로 모시고 尊敬하기도 하였다. 1558年 (明宗 13) 23살의 이이는 當時 大學者인 58歲의 退溪 李滉 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間 머물며 李滉 과 學問의 여러 가지 問題와 思想을 論하고 詩를 짓고 討論하였고, 李滉은 그의 才能에 크게 感歎하였다. 비록 見解를 一致시키지 못했지만 그 後 이들은 가끔 便紙를 서로 주고받으며 學問에 關한 質疑 應答을 나누곤 하였다. 그의 學識과 達辯을 높이 산 李滉 은 自身의 文人은 아니지만 厚生加外라 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次例 書信을 통하여 頃工夫(敬工夫)나 格物(格物)·窮理(窮理)의 問題를 서로 書信을 주고받으며 交流하였다. 그러나 李滉 을 訪問하여 談論하던 中 이와 氣의 問題를 놓고 李滉을 論破하려 드는 것을 目擊한 李滉 의 門徒들은 그를 異人(異人)으로 疑訝하게 보면서도 敵愾心을 품게 되었는데, 後日 調整에 出仕한 李滉 의 門徒들 中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를 스승 李滉을 侮辱하려 든 論敵으로 規定한다.

이이가 質問을 하면 李滉은 親切한 答辯을 보냈고, 佛敎 에서 果敢히 벗어나 儒敎로 되돌아온 勇氣를 높이 評價하며 稱讚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해 겨울 別試(別試)에 壯元하였는데, 이이는 13歲 以後로 29歲까지 生員試와 式年文科에 모두 壯元으로 及第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過去에 總 9番 壯元 及第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構圖章元貢(九度壯元公)李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또한 親舊 成婚 과의 因緣으로 대곡 星雲 , 南冥 曺植 等도 찾아가 그들과도 事物과 理氣論, 走者 와 陸九淵 等을 談論하기도 했다.

官僚 生活과 改革 活動 [ 編輯 ]

官僚 生活 初期 [ 編輯 ]

1564年 (明宗 19) 이이는 式年文科에 及第한 後 곧 好調 佐郞 이 되었다가 禮曹 佐郞 으로 前任하여 國家를 위해 일하기 始作하였다. 이때 이이는 王室의 外戚 윤원형 이 僧侶 普雨를 宮中에 끌어들여 飛行을 서슴지 않자 上疏를 올려 普雨를 濟州道 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 을 官職에서 몰아냈다.

以後 李朝 佐郞 을 거쳐 1567年 明宗 이 昇遐하고 宣祖 가 卽位하였으나, 明宗 代의 外戚인 左議政 심통원 [9] 은 大王大妃의 親族이라는 이름으로 逐出되지 않고 宰相職에 있으면서 橫暴를 일삼았다. 이때 이이는 다시 上疏를 올려 심통원 을 彈劾하였다. 인순왕후 는 곧 垂簾聽政을 거두었고, 심통원 은 削奪 官職되어 쫓겨났다.

그는 官僚生活 中에도 꾸준히 李滉 , 曺植 , 成婚 , 鄭澈 等과 書信을 주고받으며 學問을 硏究하였다. 1568年 (宣祖 1年) 千秋使 (千秋使)가 明나라 로 갈 때 使臣의 書狀官(書狀官)으로 年庚 에 同行한 뒤, 1569年 歸國 後, 弘文館 副校理가 되었다. 곧 弘文館 副校理로 春秋館記事官에 兼任되었으며, 《明宗實錄》의 編纂에 參與했다. 이때 그는 退廳後 오랜 親舊인 成婚 과 '地選女中(至善與中)' 및 '안資格雉城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等 朱子學의 根本問題들을 놓고 書信으로 長期間 討論하였다. 그해 弘文館敎理를 지냈으며, 1569年 陰曆 9月에는 松江 鄭澈 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冊을 써서 宣祖에게 올렸다. 그 무렵에 가장 關心 갖고 推進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時務’(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用語를 使用하며, 急先務로 解決해야 하는 政治가 어떤 것인가를 明確히 밝혔다. 機會가 있을 때마다 이이는 繼續 ‘時務’가 어떤 것인가를 繼續하여 上疏로도 올리기도 하였다.

심의겸 은 栗谷 李珥가 自身의 從祖父 심통원 等을 攻擊하여 彈劾, 沒落시켰음에도 李珥에게 사사로운 感情이나 怨恨을 갖지 않고 繼續해서 親하게 지냈다. 심의겸 은 이이를 人格的으로 信賴하였다. 이이는 그런 심의겸 의 人品에 歎服하여 乙亥黨論 以後에도 심의겸 을 救援해주려 努力했고, 심의겸 은 이이를 西人 의 精神的 支柱로 推戴하였다.

同僚들과의 葛藤 [ 編輯 ]

靜寂의 한사람인 許曄

그는 虛禮와 虛飾을 批判하였다. 그러나 道德 倫理 와 禮節이라는 이름으로 假裝된 僞善과 形式, 겉치례가 澎湃한 社會에서 栗谷의 이러한 事物의 本質에 立脚한 正直한 姿勢는 通用되기 어려웠다. [10]

栗谷의 이러한 事物이나 人間에 對한 正直한 姿勢는 많은 誤解를 불러일으켜 當時 同僚는 勿論 先輩와 元老大臣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誤國小人(誤國小人)이라고까지 指彈을 받았다. [10] 特히 元老大臣들 中 許曄 이준경 等은 栗谷을 禮節과 根本도 모르는 人間이라고 憤을 터뜨렸다. [10]

李珥의 率直함과 冷靜함에 火가 난 이준경 은 李珥의 스승 백인걸 을 찾아가 抗議를 한 일도 있다. 한番은 이준경 백인걸 을 찾아가 "자네가 推薦한 이 아무개라는 人間이 왜 그 模樣인가? [10] " 하고 드러내놓고 逆情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發言이 李珥의 귀에 들어가면서 이이는 이준경 을 相當히 否定的으로 생각했고, 이준경 亦是 李珥의 人格을 疑心하였다. 그런데 李珥의 再從祖父 이기 는 그가 攻擊했던 東古 이준경 과 靜寂關係이기도 했다. 一部에서는 사사로운 怨恨關係로 그가 이준경 을 싫어한다, 미워한다는 人身攻擊性 浪說이 돌기도 했다.

이이는 徐坰德 의 氣中心의 설을 性理學 者 답지 않게 道에 치우쳤다며 攻駁했고, 李滉 의 四端七情人 理氣互發說을 批判하여 理와 氣는 한 몸體에서 나온다며, 基는 能動性이 있지만 이는 없기 때문에 師團 뿐만 아니라 漆程度 機가 發動하고 理가 그것을 貪으로서 發生된다는 氣發理乘일도설을 主張했다. 曺植 에 對해서는 '世上을 避하여 홀로 서서 뜻과 行實이 높고 깨끗하겠지만, 學問을 하면서 實際로 體得한 主張과 見解가 없고, 上訴한 것을 보아도 나라와 百姓을 위한 方策은 없다'며 庭球 , 정인홍 , 김우옹 等의 文人들이 그를 推仰해 道學君子라고 하지만 이는 지나친 말이라 하였다. 이는 徐坰德 曺植 , 李滉 의 門下生, 追從者들의 憤怒를 자아냈고, 許曄 김효원 , 송응개 , 윤승훈 , 許篈 , 송응형 等은 이이를 줄기차게 非難하고, 攻擊하게 된다.

人材 薦擧 [ 編輯 ]

그러나 私心 없이 事物을 判斷하려는 그의 姿勢는 宣祖 를 매료시켰고, 宣祖 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諮問하곤 했다. 젊은 나이에 王의 諮問役을 맡게 된 것을 부담스러워하여 스스로 辭讓하였으나, 王은 繼續 그를 불러들였다.

士林의 薦擧로 親舊 成婚 이 重望에 오르자 宣祖는 栗谷을 불러 "士林에서는 이 亂世를 治癒할 수 있는 人物로 우계를 薦擧하는데 京義 생각은 어떤가?" 라고 그에게 成婚 의 사람됨을 물었다. [10] 栗谷과 우계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同心一體의 交友關係를 지닌 사이였다. 하지만 宣祖 의 물음에 栗谷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爲人은 못 되고 學問에 힘쓰는 着實한 선비입니다" 라고 答辯했다. [10]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人物이라고 士林 에서까지 떠받드는 切親한 親舊를 着實한 선비에 不過하다고 한 이 答辯 亦是 日常의 常識으로는 理解하기 어려운 冷酷한 評價다. 宣祖가 이어서 經過 우계를 比較하면 어떤가라고 묻자, 栗谷은 "재주는 所信이 牛溪보다 좀 나으나 受信과 學問의 힘씀에 있어서는 雨季에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答辯했다. 栗谷다운 正直한 答辯이었다. [10]

어느 땐가 宣祖가 "卿은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자, 栗谷은 "殿下께서는 善한 意志를 가지고 계시니 學問에 힘쓰고 努力하면 현주賢主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答辯했다. [10] 이러한 答辯을 통하여 宣祖에게 賢明한 임금이 되어 달라는 말을 한 것이다. 栗谷은 自身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眞實되게 對答했다. 또 宣祖가 栗谷에게 어떠한 사람을 登用해야 하는가를 묻자, 栗谷은 "電荷에게 忠誠을 다짐하는 사람은 되도록 避하고, 自己 일에 忠誠을 다짐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電荷에게 忠誠을 다짐하는 사람은 殿下를 背信할 可能性이 있지만, 自己 일에 忠誠을 다짐하는 사람은 殿下를 決코 背信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答辯했다. [10] 그는 自身의 이름을 걸고 職務에 忠實한 사람이, 사사로운 衷心을 主張하는 者보다 더 믿을만 하다고 보았다.

徐坰德 , 曺植 , 李滉 等에 對한 批判 外에도 宣祖는 當代 著名 學者들의 人物評을 내려보라고 栗谷에게 指示하였다. 宣祖 賃金은 雨季와 더불어 當時 政丞감으로 物望에 오르고 있던 沙巖 朴淳, 退溪 李滉, 그리고 스승 백인걸 에 對해 人物評을 했다. [10] 백인걸 에 對한 人物評을 要求받은 栗谷은 한마디로 "基苦學黃氣高學荒" 이라고 答辯했다. 쉽게 말해서 "氣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 [10] 조광조 의 門下生 中 首弟子요, 自身의 스승이자 노상 自身이 가까이 모신 어버이 같은 人物에 對해 普通의 常識으로는 理解하기 어려운 冷酷한 評價였다. [10] 이언적 에 對해서도 박학하며 글을 잘 짓고, 몸가짐을 장중히 하고 입에서는 못쓸 말이 없었다고 하면서도 世上을 다스리고 百姓을 求하는 데는 큰 才質이 없었고 벼슬에 올라가서도 切開가 없었다고 評했다. 또한 李彦迪이 옛 書籍을 많이 읽고 著述을 잘했을 뿐, 家庭에서는 不正한 女色을 멀리하지 못하고 朝廷에 나와서는 道를 行하지 못했다며, 그를 어찌 道學者로 推薦할 수 있겠느냐는 評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同人 에 依해 李珥의 人格을 걸고넘어지는 꼬투리로 作用하게 된다.

朋黨 調節 努力 [ 編輯 ]

東西 分黨 直前 [ 編輯 ]

1570年 (宣祖 3年) 官職을 辭退하고 黃海南道 海州 野두村(海州野頭村)에 돌아가 學問의 터를 닦았다. 이듬해인 1571年 朝廷의 부름을 받고 淸州牧師로 任命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鄕約을 定하고 百姓들의 自治 生活을 勸奬하여 큰 成果를 거두었다. 다음해 그는 學問 硏究를 위하여 身邊을 핑계로 辭職하고 海州로 落鄕했다가 坡州의 栗谷村으로 돌아와 學問에 힘썼다.

1572年 이준경 이 病으로 臨終하기 直前에 士林들이 黨을 나누어서 다투게 될 것을 豫見하였다. 그리고 黨爭의 中心人物로 이이를 指目하였다. [11] 火가 난 이이는 이준경 이 自身을 謀陷하는 것이라며 反駁하였다. 이이는 朋黨政治를 無條件 批判할 것이 아니며, 사람은 各自 思想이 다를 수 있다고 反駁했다. 이이에 依하면 朋黨은 國家政治를 紊亂하게 하는 무리가 아니라 뜻이 맞는 이들끼리의 모임이라고 反駁했다. 그는 小人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君子들끼리 集團을 이루는 것은 當然하다고 보았다.

또한 相對方 政黨이라고 해서 全部 小人輩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指摘했다. 이준경 이 黨爭을 豫見하는 글을 쓰자 그는 이준경 을 向해,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邪惡하다며 强度 높게 非難했다. 그러나 一部 士林 人士들은 그의 從祖父 이기 이준경 과 怨讐였던 것과, 官僚生活 初盤 그의 率直함을 批判하고 禮儀 없는 人間으로 몰고간 것에 對한 恨풀이로 解釋하였다. 뒤늦게 1575年 乙亥黨論 으로 同人 , 西人 분당이 確實해지자, 그때 黨論을 認定하고 自身의 失策을 認定하였다. [12] 그러나 後에 이이는 自身의 著書 석담日記 에서 이준경 을 가리켜 '임금을 道路서 引渡하지 못하고 오직 自己만 잘난 척 하면서 사람을 받아들이는 度量이 없었다'고 하였다.

1572年 坡州 율곡리에 머무르며 親舊인 成渾과 理氣論, 四端七情論, 仁心道心說 等을 論하였다. 主로 成婚 의 主張에 李珥가 反駁 또는 補充說明을 하거나, 成婚 이 李珥에게 質疑하고 이이가 回答하는 形式이었다. 이때 成婚 李滉 의 理氣二元論度 옳을 수 있다고 하여 長期間 書信과 訪問 討論을 벌이기도 했다. 한便 윤근수 , 윤두수 , 鄭澈 , 송익필 等이 그와 親해졌고 그는 自然스럽게 西人 으로 기울게 된다.

政治 活動과 學問 硏究 [ 編輯 ]

政治的 同志 松江 鄭澈

그러나 1573年 (宣祖 6年) 다시 先祖의 부름을 받아 承政院 의 同副承旨가 되었다가 右副承旨로 옮겨 《漫言奉仕》(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上疏文을 올렸다. 이 上疏文에서 李珥는 朝鮮의 政治와 社會 風習 中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國家的 근심거리라고 指摘하였고 細細하게 說明하여 改善策을 講究하라는 要求 事項을 列擧하였다. 宣祖는 이이가 올린 上疏文을 보고 感動하여 稱讚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곧 兵曹 참지 에 任命되었다가, 그해 陰曆 3月 이이는 司諫院 大司諫 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病으로 辭退하고 다시 故鄕인 京畿道 坡州 栗谷村으로 내려가 學問 硏究에 專心하였다.

1574年 (宣祖 7年)에는 右副承旨에 任命되었다가 또 朝廷의 要求로 黃海道 監査로 赴任, 約 半 年 間 在職하였다. 그 後에도 자주 朝廷과 故鄕을 往復하면서 司諫院大使間·司憲府大司憲·戶曹判書·大提學·吏曹判書·議政府右贊成·兵曹判書 等을 歷任하였다.

1577年 黃海道 海州의 석담으로 落鄕하여, 隱居하면서 兒童敎育서 兼 文盲 啓蒙,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한 基礎知識 敎育 書籍인 《擊蒙要訣 (擊蒙要訣)》을 著述했다. 學問 硏究와 後學 養成에만 힘을 쓰다가 1580年 다시 先祖의 부름을 받아 하는 수 없이 政界에 進出하였다. 이듬해 陰曆 9月 弘文館 副提學으로 있으면서, 朱子學의 核心內容을 要約한 要約本人 《聖學輯要 (聖學輯要》를 著述, 發刊하여 普及시켰다. 5篇으로 構成된 李珥의 冊을 받아본 宣祖는 “이 冊은 참으로 必要한 冊이다. 이건 副提學(栗谷)의 말이 아니라 바로 聖賢의 말씀이다. 바른 政治에 切實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不敏한 賃金으로 行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며 極讚을 아끼지 않았다. 1580年 (宣祖 13) 記者 의 一代記인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執筆하였다.

이이는 平生 동안 大使間에만 9番이나 任命되었고, 宣祖의 信任은 繼續되었다. 1581年 司憲府 大司憲 이 되었다가 곧 藝文館 提學 에 任命되어 大司憲 으로 藝文館 提學 을 兼任하고, 同知中樞府事를 거쳐 藝文館 大提學과 弘文館 大提學을 兼任한 兩館大提學(兩館大提學)李 되었다. 1582年 吏曹判書에 任命되었으며 이때 宣祖 의 王命을 받고 《仁心道心說 (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으며, 같은 해 김시습 의 一代記 《金時習傳 (金時習傳)》과 學生 啓蒙書 《學校模範 (學校模範)》을 著述하였다.

政爭 調整 努力과 失敗 [ 編輯 ]
栗谷 李珥 書翰

同人 西人 의 黨爭이 激化되자 그는 同人 김효원 , 西人 심의겸 鄭澈 을 同時에 彈劾하여 兩黨의 强勁派들을 一線에서 후퇴시킴으로써 黨爭을 調節하려 하였다. 그러나 同人 들은 그가 일찍이 佛敎 에 歸依하여 僧侶가 된 것과, 그 僧侶가 되는 過程에서 徐某(庶母) 權氏와 싸웠던 點을 集中 浮刻시켜 그를 攻擊하였다. 또한 當時 士大夫家에서는 妾을 거느리는 것이 慣行이었는데, 그가 妾을 두名 거느린 點 [13] 亦是 同人 (東人)黨의 人身攻擊의 對象이 되었다. 또한 同人 들은 그의 再從祖父 이기 [14] 가 長利(貪官汚吏)의 사위라서 官職에 制限을 받아야 했으나 이언적 의 救濟를 받고 出仕했는데도 明宗 乙巳士禍 에 加擔하였고, 末年에 權力을 壟斷하다가 削奪官職 當한 것까지 그에게 連結시켜서 攻擊하였다. [15]

이이는 同人 , 西人 이 모두 學問을 하는 사류(士類)이며, 그 分裂은 時局觀, 環境, 意見의 差異, 個人의 思想, 觀點 差異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當初 走者 가 처음 主張했던 진붕, 위붕이나 군자당, 小人當 等으로 나누는 君子小人 區別論은 이제와서 適用시킬 수 없다고 主張했다. 同時에 양시兩非論(兩是兩非論)과 步合調劑論(保合調劑論)을 提示하게 된다. 그는 東人, 西人 葛藤의 始發點인 심의겸, 김효원 間의 軋轢, 是非에 對해 양시兩非論을 適用하여 非生産的인 論爭을 中斷하고, 같이 調整에 出仕하여 國事와 民生問題를 論할 것을 呼訴하였다.

그는 黨爭의 調節과 政爭 中斷을 促求하였지만, 東人, 西人 朋黨은 旣存의 君子의 朋黨과 小人의 朋黨이 存在한다는 見解를 固守했고, 西人 을 君子의 朋黨, 同人 은 小人의 朋黨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黨爭을 調節하는데 努力하였지만, 比較的 西人 의 立場에 서서 黨爭을 調節하려 하였고, 이는 同人 에게 늘 不平不滿과 敵愾心의 對象이 되었다. 그의 黨爭 調節을 中立的이지 못하다고 判斷한 정여립 西人 에서 脫黨하여 同人 으로 건너간다. [16] 그는 어느 朋黨에나 君子, 消印이 있음을 거듭 反復하였다. 또한 自身을 批判한 同人 界 人事에 對해서도 釋放 赦免을 歎願하기도 했다. 그러나 1583年 自身을 面前에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小人, 奸臣으로 攻擊하는 송응개 等 三社의 言官에 對해서는 赦免 要求를 拒否하며, 嚴正한 是非分別을 要求하기도 했다.

그는 黨爭을 調節할 目的으로 심의겸 김효원 을 同時에 批判하고, 정인홍 과 함께 상주하였다. 그런데 이건창 黨議通略 에 依하면 정인홍 이 그뒤 홀로 심의겸 을 攻擊하면서 沈義謙이 윤두수 , 윤근수 , 鄭澈 을 끌어들였다고 指摘했다. 그러자 이이가 정인홍 에게 鄭澈 은 氣槪가 있는 사람이라 심의겸 이 시키는 데로 움직일 사람도 아니라고 反駁하고, 내가 鄭澈 을 推薦했는데 只今 鄭澈이 彈劾한다면 나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鄭仁弘이 難處해지니까 이이가 글을 올려 鄭澈 심의겸 의 無理가 아니라고 하고, 自身의 官職을 替直시킬 것을 上疏했다. [17] 이때 윤승훈 이 普通 사람은 뜻이 같고, 性格도 같은 뒤에 親해지는데 이미 鄭은 두텁다고 해놓고, 어떻게 性格은 멀어서 같지 않다고 하느냐고 反駁했다. 이이는 윤승훈 에게 唐나라 韓愈 유종원 , 宋나라 때의 司馬光 , 王安石 , 消息 장돈 等이 사귈 때 鄭은 兄弟같았지만 속마음은 燕나라 , 越나라 와 같았다고 答하였다. 그러나 윤승훈 의 反駁을 不快하게 여긴 이이는 私席에서 " 윤승훈 은 無識해서 士林에게 붙어서는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하였다. 同人 에서는 이 發言을 問題삼아 李珥의 人格을 言及하며 批判하게 되었다. [18]

改革 方案 [ 編輯 ]

이이는 朝鮮 이 建國하고 2百年이 經過하였으므로 다시 社會의 紀綱을 바로세워 官民에게 다시 個國 初期의 姿勢로 돌아가야 한다며, 變法 警長論을 主張하였다. 栗谷 李珥가 말하는 變法警長(變法更張)은 나라의 紀綱이 무너져 제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指摘한 뒤 主張한 것으로서 다음 內容을 가지고 있다.

  1. 門閥이나 出身보다는 能力 있는 사람을 起用하자.
  2. 身分을 가리지 말고 平民을 包含하여 폭넓게 人材를 養成하자.
  3. 中央에서는 外戚의 權力 集中化를 막고, 地方에서는 守令의 資質을 높이며 李曙(吏胥)들에게도 祿俸을 주어 民弊를 막아야 한다.
  4. 朋黨을 막기 위해서는 士林의 公論을 尊重하고 士氣를 높여야 한다.
  5. 民生을 괴롭히는 防納 을 是正해야 한다.
  6. 王室 私有財産을 抑制하고 王室의 經費를 줄여야 한다.
  7. 軍布에 對한 族徵 隣徵 을 禁止해야 한다.
  8. 公奴婢의 船上(選上)을 改善하여 負擔을 줄여야 한다.
  9. 社創製 를 實施하여 貧民을 救濟해야 한다.

이는 栗谷 李珥가 當時 改革的인 性格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栗谷 이이는 租稅 制度에 對한 徹底한 管理 및 大將 記錄의 重要性도 說破하였다. 貪官汚吏가 貢納이나 進上物을 憑藉하여 喝取한 物品을 私的인 蓄財에 쓴다며 거듭 主張했다.

軍制와 公職 改革 [ 編輯 ]

1583年 (宣祖 16) 兵曹 板書 에 任命되고, 兵曹判書로 始作된 그해 陰曆 2月 에는 國防力 强化를 위해 《時務六曹》를 繼進하였는데 內容은 첫째 어진이를 登用하시오, 둘째 軍隊와 百姓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國境을 堅固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平素 戰爭에 나갈 軍馬(軍馬)를 充分하게 確保하고,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番째는 敎化(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같은 해 陰曆 4月 다시 ‘奉仕’(封事)를 宣祖에게 올려 그동안 主張했던 廢井에 對한 改革을 實施할 것을 다시 反復해서 要求하였다.

奉仕에는 公安(貢案)의 改革, 軍籍을 고치고 地方의 郡縣을 合倂하여 不必要한 公職者 數를 줄이고, 觀察使(道知事)의 任期를 保障하여, 觀察使로 하여금 地方을 제대로 다스릴 機會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要求였고, 庶孼 制度 를 廢止하며 身分에 關係없이 賤民 이나 奴婢 中에서도 能力 있는 사람은 平等하게 公職에 拔擢하여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 等이었다. 그리고 '撰集廳'(纂輯廳)이라는 官廳을 新設하여 國家 에서 各種 書籍들의 編纂 事業을 主管해야 한다고 主張했으며, ‘經濟史(經濟司)’를 新設하여 國家의 經濟 問題의 解決을 擔當하는 專擔 部署로 活用해야 한다고 方案을 내놓았다.

이이는 搪塞을 超越해서 人材를 求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에 依하면 同人 西人 에 君子만 있는 것이 아니라 消印도 있을 수 있다며, 庶人에 君子가 있으면 消印도 있고, 同人에도 小人輩만 있는게 아니라 君子도 있을 수 있다며, 黨派 爲主로 서로 自己 黨派 사람만 薦擧하고 끌어주고 밀어주는 人事政策에 反對하며, 搪塞을 떠난 採用을 主張했다. 그러나 그의 主張은 같은 西人 들로부터도 同人 에게 友好的인 것이 아니냐는 疑心을 받았다.

그는 兩班에게도 똑같이 軍役 을 賦課하고 兵力을 增强할 것을 奏請하였다. 軍士費用 發生에 對한 代案으로 그는 不必要한 官職者의 數爻를 줄이고, 失職에 있지 아니한 者에게는 品階 亦是 回收할 것을 建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主張은 兩班들의 集團 反撥에 부딛쳐 攻勢의 對象이 되었다.

庶孼 許通론 [ 編輯 ]

1583年 (宣祖 16年) 邊方에서 이탕개의 난 이 일어나자 當時 兵曹 板書 栗谷 이이는 國難을 克服하기 위한 提案으로, 戰爭에서 功勳을 세우거나 軍糧米를 내면 庶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主張을 하였다. 그러나 太宗 의 遺言을 빌미삼아 庶孼差待에 執着했던 兩班들의 反對에 부딛혀 挫折되었다. 그러나 李珥의 納粟 許通 主張은 庶孼許通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 때 이언적 의 鉏孫子이자 이전인 의 아들인 이준도 納粟許通을 받아 自身과 後孫들의 過去 凝視 길을 열었다. 이언적 의 庶子 이전인 은 뛰어난 學行과 孝心이 남달랐으나 庶子라는 理由로 李彦迪의 代를 잇지 못했다.

庶孼 許交 主張 亦是 遊學 者들에 依해 太宗 李芳遠 의 維持를 거스르는 行爲라는 非難을 繼續하였고, 同人 에서는 그가 사사로운 怨恨으로 佛敎 에 入門했던 點을 繼續 들먹이며 그가 社會를 어지럽힐 생각으로 庶孼 의 許通을 主張한다며 攻勢를 繼續하였다.

그의 庶孼 許通 은 身分制를 紊亂하게 만들 憂慮가 있다는 同人 들의 攻擊을 받았고, 甚至於는 같은 黨인 西人 들로부터도 非難의 對象이 되었다. 그런데 唯一하게 同人 류성룡 庭球 가 그의 庶孼 許通 主張에 '人材를 가려 쓰는 데는 差別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搪塞을 超越하여 同意하였다.

十萬 養兵說 [ 編輯 ]

또한 이이는 先祖에게 10萬 養兵說을 主張하여 同人의 反感을 사기도 하였다. [19] 그는 日本 의 戰國時代는 終結될 것이며, 日本을 統一할 武士는 日本 內 勢力 內 葛藤 緩和와 國內 關心事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目的으로 未久에 明나라 朝鮮 을 侵攻할 것이라고 主張했다. 日本의 挑發에 對한 對應으로 그는 10萬 名의 精兵을 養成하여 日本의 侵略에 對備할 것을 建議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見解는 同人 에 依해 王을 眩惑하기 위한 發言으로 置簿되었고, 西人 조차 그의 생각이 지나친 想像力과 虛言이라며 呼應해주지 않았다.

이이가 10萬 養兵說을 主張하던 當時, 朝鮮의 總 兵力數는 帳簿上으로는 30萬 名이 넘었으나, 實際 戰鬪 可能한 兵力 數字는 1,000名 程度가 되었다고 한다. [20] 1581年 大提學 在職 中 오랫동안 著述하던 《經筵日記》의 完成을 보았다.

宣祖의 두터운 信任을 받은 이이는 1582年 吏曹判書와 刑曹判書를 거쳐 兵曹判書에 任命되어 女眞族 의 叛亂을 鎭壓하였고, 大提學을 歷任하고 右贊成 에 올랐다. 이듬해 黨爭의 調整을 試圖하였으나 오히려 彈劾을 받아 一時 退職되었다가 다시 吏曹判書가 되는 等 反對派의 彈劾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經綸와 所信을 펼칠 만한 機會는 不足하였다.

十萬養兵說에 關한 疑惑 [ 編輯 ]

李珥의 十萬養兵說에 關해 疑惑을 提起하고 있는 學者도 있다. 그의 主張에 依하면, 十萬養兵說은 當時 朝鮮의 社會的, 經濟的 能力으로 보았을 때 絶對的으로 不可能한 事案이었으며, 그러한 限界를 分明히 把握하고 있던 實務的 儒學者인 李珥로서는 오히려 十萬養兵說을 主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推測이 可能하다고 한다.

實際로 이이가 올렸던 上疏文과 各種 글을 모은 文集을 살펴보면 當代 다른 重臣들도 즐겨 쓰던 '良兵'이란 글字는 나올지언정 '十萬養兵'에 關聯된 內容은 一切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軍縮을 해야 한다는 上疏文이 十萬養兵說 代身 자리 잡고 있다고 主張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十萬養兵說에 關聯된 內容은 後代에 세워진, 栗谷 李珥를 기리는 碑文에 처음으로 登場한다고 하며 이는 栗谷 李珥를 崇拜하던 後代 朝鮮 儒學者들이 一種의 神聖化를 노려 任意로 追加하였다고 한다.

後學 養成 [ 編輯 ]

정여립 은 일찍이 李珥의 門下에서 修學하였다. 李珥의 다른 弟子들은 정여립 을 "넓게 배우고 많이 記憶하여 經典 을 通達하였으며, 議論이 過激하고 드높아 바람처럼 發하였다"고 하여 肯定的으로 評價하기도 했다. [21] 李珥 亦是 鄭汝立의 재주를 寵愛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그의 過激性을 눈여겨보았고 때로는 그를 警戒하게 된다.

後날 鄭汝立이 科擧에 及第하고 李珥의 門下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가 西人 黨을 왜 찾아왔는지 까닭을 묻자, 鄭汝立은 "저는 西人 黨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栗谷 先生님을 찾아온 것입니다"라고 對答하였다. [22]

한때 鄭汝立의 재주를 아껴 寵愛했다던 이이는 죽기 석 달 前에 여러 가지 理由를 들어 官職( 吏曹判書 職)의 辭退의 上疏를 宣祖 에게 올리면서, "鄭汝立은 박학하고 재주는 있으나 議論이 過激하여 다듬어지지 못한 病弊가 있다"고 指摘하였을 程度였다. [21] 이에 宣祖 임금도 "그런 사람을 어찌 쓸 수 있겠는가? 사람을 쓸 때는 그 이름만 取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試驗을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21] "라고 答하였다고 한다.

李珥와 宣祖가 鄭汝立을 이처럼 評하고 排斥하였던 데는 다른 私的인 問題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이는 當時의 狀況을 어느 程度 正確하게 感知하고 있었던 것 같다. 卽 그 때는 同人과 西人間의 對立이 漸次 兩極化되기 始作한 때였고, 宣祖는 이를 제대로 克服하기 어려운 狀況에 있었다. 이런 때에 재주와 出世 意識, 過激한 性格을 가진 鄭汝立은 자칫 紛亂의 素地가 될 수 있다는 點을 李珥와 宣祖는 警戒했던 것이다. [21] 鄭汝立이 뛰어난 才質과 大膽한 勇氣를 가진 人物임을 한便으로 認定하면서도, 先祖와 그 廁神들은 鄭汝立이 이이를 排斥했다는 理由로 그를 鄕里로 追放하고, 結局 反逆의 굴레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21]

生涯 後半 [ 編輯 ]

정여립과의 葛藤 [ 編輯 ]

鄭汝立은 총명하고 論辯을 잘하여 널리 理致를 探究하는 데에만 힘썼으며, 特히 市警 과 訓詁, 物名(物名)에 精通한 것으로 自負하였다. [22] 그는 李珥의 門下만이 아니라 成婚 의 門下에서도 修學하였다. 李珥와 成婚 도 鄭汝立의 博識, 총명함을 좋아하여 그를 調整에 積極 薦擧하기도 하였다. [22] 1570年(宣祖 2年) 式年 文科 乙科에 及第한 정여립 은 다시 스승인 李珥의 門下에 出入하며 受學하였다. 그러나 當時 李珥 門下에 드나드는 선비들이 오직 西人 뿐이고 同人들은 全혀 보이지 않자, 李珥에게 다음과 같이 指摘하였다. [22]

  • 정여립 : 西人만이 이 나라 士大夫입니까?
  • 李珥 : 同人들은 늘 反對만 하거든.
  • 정여립 : 그래도 그렇지, 同人에도 반드시 人物이 있을 텐데 無條件 白眼視하는 건 좋지 않은데요.
  • 李珥 : 뭐야?
  • 정여립 :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同人 西人 나뉘었다고 一部 선비들이 그들을 짐승으로 取扱할 것 까지는 없잖습니까?
  • 李珥 : 내가 虎狼이 새끼를 키웠나 [22]

이이는 同人들의 攻擊으로 同人들에 對한 感情이 極度로 惡化되어 있었다. 한便 다시 찾은 스승 李珥가 아직도 공정하고 合理的으로 바라보리라 생각했던 정여립 은 失望하게 된다. 이미 李珥와 정여립 사이에는 이미 틈이 벌어지기 始作하였고, 西人 이 大部分인 李珥의 다른 弟子들과도 摩擦을 빚었다. 정여립에 對한 李珥의 不信이 깊었던 것으로 斟酌된다. [22] 이런 理由로 정여립 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攻擊을 받게 되었고, 끝내 그 報復을 받았던 것이다. [22]

李珥와 정여립 사이에 西人과 同人에 對한 認識 差異로 若干의 葛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朋黨에 얽매이는 것을 別로 좋아하지 않았던 人物들이다. [23] 이이는 平素 宣祖에게 朋黨을 超越하여 人材를 登用할 것을 建議한 바 있었고, 鄭汝立은 李珥 門下에 意外로 西人 黨이 많고 그들이 偏見이 甚하다는 事實에 反撥하였던 것이다. 그런 理由로 鄭汝立은 이미 이이가 죽기 前에 서인당을 떠났던 것이다. [23] 그런가 하면 鄭汝立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當時 西人 들의 主張에도 不拘하고, 鄭汝立은 이이를 참다운 聖人으로 崇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3] 오히려 이이는 鄭汝立의 過激한 性格을 상기시켜 그가 吏曹銓郞의 物望에 올랐을 때 反對하였다. [23]

過勞와 病勢 [ 編輯 ]

1582年 (宣祖 15年) 吏曹判書 에 任命되었다가 刑曹 板書 를 거쳐 兵曹 板書 로 任命되었다. 兵曹判書 로 있을 때부터 갑자기 過勞로 쓰러진 그는 官職을 辭退하고 療養하게 된다. 하루는 그가 出勤 길에 眩氣症 을 느끼고 주저앉은 것을 놓고도 同人 側에서는 態度가 不良하다며 非難을 加했다. 同人 은 繼續 그를 彈劾하고 攻擊하였다.

그는 一旦 黨爭의 調節을 위해서 西人 의 領袖인 심의겸 을 批判하였고, 정인홍 심의겸 彈劾 上疏에도 同調하였음에도 1583年 (宣祖 17年) 黨爭을 助長한다는 同人 의 거듭된 彈劾으로 스스로 辭職했다가, 같은 해 다시 돈녕부 判事 에 任命되고, 다시 李朝 板書 가 되었다. 同人 의 黨員 송응개 는 朝廷에서 이이는 나라를 말아먹은 艱辛이라고 面前에서 酷評하였다. 송응개 는 이이가 佛敎 僧侶 가 還俗해서 自己가 最高라고 우기며, 언제는 심의겸 도 좋다, 언제는 김효원 도 좋다고 兩非論을 펼치며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는 百姓을 속이니, 李珥 같은 者야말로 나라를 팔아먹은 奸臣이 아니냐고 酷評을 加했다. 이이는 自身을 攻擊하다가 罷職되거나 彈劾된 人物들이 自身을 批判한 理由를 꼼꼼히 따져보고, 오히려 自身을 批判한 이들의 釋放과 歎願을 要求했다. 그러나 송응개 가 處罰받을 때는 한 張의 歎願書도 써주지 않았다. 同人 은 이이가 執務를 마치고 退廳하던 中 眩氣症 을 느끼고 비틀비틀한 것까지도 問題삼았다. 結局 그의 黨爭을 調節하려는 努力은 水泡로 돌아갔고 同人 들에 對한 李珥의 미움과 怨望, 人間的인 感情은 極에 達하게 되었다. 또한 黨爭 調節 努力에 協助하지 않는 같은 西人 黨員들 一部에게도 人間的인 嫌惡感과 幻滅感을 느끼게 된다.

1583年 (宣祖 16年) 정여립 禮曹佐郞 이 되었는데, 이어서 李朝전랑의 物望에 올랐다. [24] 이이는 當時 吏曹判書 職에 있었으며, 아마도 鄭汝立의 過激한 性格을 看破하였던지 그의 任命을 反對하였다. [24] 이이는 自身의 文人이기도 했던 그의 過激性을 보고는 慇懃히 그를 警戒했다. 그러나 이이는 病勢가 惡化되어 結局 官職 生活을 오래 繼續하지 못하고 世上을 떠났으며, 이이가 죽은 두달 後 정여립 弘文館 修撰에 올랐다. 鄭汝立은 修撰에 오른 뒤 李珥를 非難하고 [25] , 同人界 人士들과 가깝게 지내게 된다. 結局 정여립 은 이이가 싫어했던 同人 들과 가까이 했다는 批判을 받았으며, 結局 宣祖 의 미움을 사서 벼슬을 辭職하고 故鄕으로 돌아갔다. [25]

죽음 [ 編輯 ]

黨色으로는 西人에 屬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同人 西人 의 黨爭을 調節하려고 努力하였음에도 成果를 거두지 못하고 同人의 攻擊 對象이 되었다. 그는 朋黨에 對해서도 小人이라 하더라도 그 재주를 取해야지, 小人輩들이라고 排斥하는 것은 百姓을 救濟하는 道理가 아니라 하였다. 그는 成婚 , 류성룡 , 庭球 , 우성전 , 송익필 , 조헌 等의 知己들에게 黨爭을 調節하려다가 同人 의 미움을 산 일을 恨歎하며 痛哭하였다. 同人의 集中 彈劾을 받아 지친 이이는 모든 官職에서 물러나 警長(更張)하고 싶어하던 救國의 뜻을 풀지 못한 채 病을 얻어 辭退하고 臥病하였다.

病席에 누운 동안에도 同人의 攻擊은 繼續되었다. 그는 京畿道 坡州郡 주내면 栗谷村에서 療養하던 中 差度가 없음을 알고 漢城으로 내려왔으며, 1584年 (宣祖 19年) 陰曆 1月 16日 새벽 漢城府 대사동(大寺洞) 自宅에서 享年 49歲를 一期로 死亡하였다. 그가 남긴 財産은 書齋에 가득한 冊들과 부싯돌 몇 個였다.

文人으로는 조헌 , 김장생 等이 있다. 이 中 김장생 은 그의 親舊인 송익필 의 門下와 成婚 의 門下에서도 受學하였는데, 송익필 奴婢 로 환천 되면서 學問的 淵源을 李珥와 成婚 에게서만 찾게 되었다. 1592年 (宣祖 25) 4月 壬辰倭亂 이 터지자 宣祖 는 御駕를 타고 義州 播遷 길에 恨歎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事後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英競演 弘文館 春秋館 觀象監社에 追贈 (追贈)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同人 同人 의 分派인 北人 , 남인 은 이이가 1年間의 入山 經歷이 있음을 놓고, 佛敎와 關係했다 하여 온갖 트집을 잡아 誹謗을 하였다. 1591年 (宣祖 24) 宗系辨誣가 成事되자 그는 그해 陰曆 潤 3月 2日 광국 原從功臣 1等(光國原從功臣一登)에 特別히 追錄되었다.

事後 [ 編輯 ]

弟子이자 學問的 繼承者인 沙溪 金長生
西人 禮學의 宗祖였다.

葬地는 京畿道 坡州市 법원읍 동문리 者雲山 先塋에 장사되었다. 領議政에 追贈되고 諡號는 문성공(文成公)의 諡號가 내려졌다. 壬辰倭亂 當時 그의 夫人 橋下 盧氏와 下女 1人이 그의 墓所 周邊에서 侍墓살이를 하며 墓所를 지켰다. 倭軍이 盧氏와 下女를 劫奪하려 하자 이들은 自決로서 抗拒하였는데, 壬辰倭亂 이 終結된 뒤 後代에 그들의 屍身을 收拾하면서 누가 否認 橋下 盧氏이고 누가 下女인지 分揀할 수 없었으므로 이들의 屍身은 栗谷 李珥의 墓所 앞에 合掌하였다. 婦人과 下女의 墓所가 李珥의 墓所 앞에 所在한 것은 그 때문이다.

1615年 (光海君 7年)에 栗谷의 愛弟子 김장생 等의 公義로 故鄕 坡州 에 그를 모신 祠堂 門成事 (文成祠)가 設立되었다. 門成事 는 1649年(孝宗 卽位年) 孝宗 왕이 賜額 을 내려 紫雲書院 (慈雲書院)이라 하였다. 1631年 (仁祖 8年) 京畿道 坡州市 법원읍 동문리에 李珥의 神道碑(神道碑)가 세워졌다. 이항복 (李恒福)李 글을 짓고 신익성 (申翊聖)李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 (金尙容)李 새겨 넣었다.

雨季 成婚 과 구봉 송익필 과는 이웃에 사는 切親한 親舊였는데 人組 때 西人이 執權하면서 李珥와 成婚 文廟 에 從事해야 한다는 輿論이 나타났으며 1682年 (肅宗 8)에는 雨季 成婚 과 함께 文廟에 從事되었다. 다시 己巳換局으로 出鄕되었다가 甲戌換局 으로 西人들이 執權한 後 다시 文廟에 從祀되고 繼續 祭享되었다. 그가 죽은 後 黃海道 百千(白川)에 門會서원 (文會書院)李 建立되어 그를 祭祀하였으며, 江原道 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 그밖에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黃州의 白鹿洞書院(白鹿洞書院) 等에 配享되었다. 等 全國 20餘 個 書院에 背向 되었다.

1970年代 부터 使用되던 5千원 銀行圈, 當時 우리나라에는 製造 技術이 不足했던 탓에, 英國에서 代身 만든 터라 栗谷 李珥의 肖像畫가 西洋 사람처럼 描寫되어 있다.
1983年 6月 11日 부터 2006年 1月 1日 까지 使用되던 大韓民國 의 5千원 銀行圈

1972年 7月 부터 大韓民國 에서 發行中인 5千원券 紙幣 圖案의 主人公으로 選定되었다. 以後 몇 次例에 걸쳐 貨幣 圖案이 變更되었으나 5千원券의 모델로는 只今도 採擇되고 있다. 하지만 草創期에는 大韓民國에서 銀行圈 製造 技術이 不足했기 때문에 英國 에 委託했는데 英國에서는 李珥를 그의 肖像과는 너무 다르게 描寫했기 때문에 結局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2007年 神權이 導入되었을 때도 旣存 貨幣에 그려진 肖像들과는 相當히 다르게 그려졌고, 1千원券 紙幣, 1萬원券 紙幣와는 달리 同一人物임에도 初喪이 繼續 變貌했다.

朴正熙 는 그의 改革案을 높이 評價하여 李舜臣 , 世宗大王 , 廣開土大王 , 李滉 等과 함께 歷史的인 國民 英雄으로 强調하였는데, 이는 그를 政治的으로 利用하기 위한 目的이었다는 批判이 提起되고 있다.

李珥의 思想 [ 編輯 ]

李珥의 思想과 學問은 沙溪 김장생 (金長生)을 거쳐 金集 , 안방준 , 尤庵 송시열 -水癌 권상하 - 한원진 (韓元震) 等 西人 老論 으로도 이어졌고, 雨季 成婚 의 文人들과 結束韓 沙溪 김장생 (金長生)과 金集 의 또다른 門下生 一部, 尹煌 윤선거 等을 통해 西人 少論 에게도 繼承되었다.

壬辰倭亂 丙子胡亂 , 丁卯胡亂 으로 逃亡奴婢 發生 및 身分制度 解體가 加速化되자 李珥의 門下生들은 封建社會 解體 樣相에 反撥, 新進官僚·地主 中心의 社會 運營을 合理化하며 송익필 系列의 禮學을 내세운다. 그러면서도 한便으로는 이이를 自身들의 精神的 支柱임을 再宣言했고, 李珥의 思想이 朱子學을 正統으로 繼承했음을 强調했다. 李珥의 正統性을 立證하기 위해 庶人은 繼續 李珥의 成均館 文廟 從事運動을 벌였고, 이이는 스님일 뿐이라는 근기남人界 許穆 , 尹鑴 , 윤선도 等의 正面反駁을 받게 된다. 當初 執權勢力의 牽制를 위해서는 反對勢力이 少數나마 存在해야 한다, 朋黨에 關係없이 어느 黨에도 小人과 君子는 있다는 李珥의 見解를 固守하던 西人, 老論은 1623年 仁祖反正 때까지만 해도 남인 과 聯立政權 構成을 試圖하기도 했다. 그러나 禮訟 을 契機로 李珥의 見解를 버리고 男인 및 反對派에 對한 彈壓政策을 實施하게 된다.

學問觀 [ 編輯 ]

그의 學問 卽 성리설의 特徵은 論理的이다. 反面에 李滉은 體驗을 重視한 것이었다. 그는 學問에 對하여 實生活에 適用할 수 있는 學問을 참된 學問이라고 規定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고 高潔한 理論이라고 해도 現實에 適用이 不可能하다면 이는 헛된 空理空談이라는 것이 그의 思想이었다. 그러나 그의 後輩인 西人 은 그의 實用思想을 死藏시키고 觀念的이고 敎條的으로 나아가 黨爭을 격화시키게 된다.

警長論 [ 編輯 ]

當時 性理學 이나 다른 學問에서는 事物, 어느 國家나 社會에 生成機, 創業期와 數性器가 있고, 그 다음으로 滅亡, 消滅의 段階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이는 數性器와 滅亡 사이에 警長(更張)이라는 것이 必要하다고 보았다. 始作, 創業期를 거쳐서 創業에서 멀지 않은 時點에 危機를 겪고 이를 잘 克服하는 것을 水性이라 하였다. 數性器의 段階를 거친 뒤에 어느程度 時間이 잡히고 定着된 뒤에는 다시 官僚主義 에 빠지거나 無事安逸, 頹廢에 빠진다고 보았다. 이때 그는 다시 國家와 社會를 다시 다잡을 必要性을 力說하고 그러한 中쇠나 官僚主義, 固着化를 克服할 代案으로 다시 팽팽하게 조인다, 다시 緊張시킨다는 뜻의 警長이라는 槪念을 導入하고 警長論(更張論)이라 하였다. 그리고 警長의 方法으로 變通(變通), 全面 改正이 아닌 一部 修正, 再整備를 警長의 方法으로 提示하였다.

그는 自身이 살던 社會를 朝鮮 이 建國한 뒤 어느程度 體制는 安定되었지만 整備된 各種 制度가 무너져가는 中쇠機(中衰期)의 段階라고 보고, 一種의 國家 再建, 組織 再建과 비슷하게 時急한 國家의 再整備가 必要하다고 보고 이를 警長(更張)이라 하였다. 그는 當時 時代가 바로 警長이 要求되는 時代라고 判斷하였다. 따라서 傳統이나 舊秩序에 執着하지 말고, 旣存의 것을 現實에 맞게 修正, 고치는 變通(變通)을 통한 一帶 警長이 必要하다고 보았다. 그는 自身의 著書 《동호문답》, 《漫言奉仕》 等에서 警長의 方法, 社會를 다시 改革하는 안, 安民(安民)을 위한 國政 改革案을 提示하였다.

《漫言奉仕》에서 그는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을 强調하였다. 그는 "政治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所重하고 일에 있어서는 實質的인 것에 힘쓰는 것이 重要하다"고 하였고,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時代의 變化, 環境의 變化에 따라 때에 따라 變通을 하고, 各種 制度와 法을 마련하거나 旣存의 法, 制度를 整備해서 百姓을 救濟하는 것이라고 主張하였습니다. 因習에 安住하거나 執着하지 않고 變化된 時代나 生活에 맞춰서 現實에 맞도록 고치고 改正하는 것이 百姓을 救濟하는 것이라 보았다. 時代가 바뀌고 環境이 바뀌면 制度나 法이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現實에 맞지 않다면 그 時代 雰圍氣, 環境에 맞게 制度를 改革, 整備해야 되고 이러한 變通을 통해 警長을 할 수 있다, 그리고 時代의 問題와 社會의 不條理, 百姓들의 不便함을 解消, 救濟할 수 있다고 提示하였다.

그는 自身이 살던 朝鮮 중기를 中쇠岐路 指摘한 理由로, 各種 民生 犯罪, 流浪民 增加, 倭寇나 女眞族의 隨試 掠奪, 兩班 官僚層의 紀綱 解弛 等을 들고 이를 百姓들의 經濟的 破綻現象으로 診斷했다. 그는 이러한 百姓들의 生活 破綻의 原因으로 各種 오래된 制度와 因習의 弊端, 現實을 代辯하지 못하는 理想論, 觀念論에 對한 執着으로 規定했다. 따라서 警長의 方法으로 國家의 統治體制 整備, 公安(貢案)과 軍政(軍政)等 賦稅(賦稅)制度의 改革, 老人과 아이에게까지 거둬가는 稅金과 各種 地方官과 鄕里들에 依한 苛斂誅求 改善, 稅金 納付 項目과 國家 租稅 等에 對한 一元化 및 稅金額數 均等化 等을 提示했다. 그는 國家와 社會의 再整備가 必要하고, 그 再整備의 方法으로 그는 큰 틀은 維持하되 法律 改革, 制度 改善 等을 통해 當時 現實, 時代相을 反映하게 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百姓들의 社會敎化 亦是 警長의 하나라고 보고 西原鄕約(西原鄕約), 海州鄕約(海州鄕約), 사창契約속(社倉契約束) 等을 만들어 鄕約과 社倉法을 實施하고 地方에 서원, 鄕校, 書堂의 建立을 普及, 積極 奬勵하여 地方 人心 習俗의 敎化를 力說했다.

일도설 [ 編輯 ]

그는 이와 氣는 하나라고 判斷했다. 그의 思想은 氣發理乘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退溪의 四端七情(四端七情)說로서 理氣互發說을 排擊하였다. 그가 23歲 때 지은 《薦度策(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卽 栗谷은 李滉이 氣(氣)와 이(理)는 서로 獨立되어 있다는 데 異說(異說)을 提起하여 宇宙의 本體는 理氣二元(理氣二元)으로 構成되었다는 것은 認定하나 理와 基는 空間的으로나 時間的으로나 分離되거나 先後(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基는 最初부터 同時에 存在하며 永遠無窮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笊籬(條理), 卽 當然의 法則으로 宇宙의 체(體)요 氣는 그 調理를 具體化하는 活動이니 宇宙의 龍(用)이라 主張하였다.

卽 李滉의 說은 毫髮說이고 이이는 일圖說이었다. 하지만 李滉의 七情설인 氣發理乘說만을 取한 것이다. 反面에 그의 師團說人 理髮器수(理發氣隨)說을 批判하였다. 또한 그것은 李滉과 四端七情說論爭을 벌인 奇大升의 影響을 받은 것이다. 또한 徐敬德에 對해서도 氣中心의 說로서 獨創的이지만 問題가 있다며 批判한다. 그의 설은 機가 運動하고 이는 그 原因이 된다는 說에 根據한 것이다. 그는 自己의 主張을 발전시키면서 이 主張이 走者 의 뜻과 어긋나면 走者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自身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學問으로 有名할 뿐 아니라 經世家(經世家)로서도 赫赫한 業績을 남겼다. 後날 嶺南의 有職이 孝宗元年에 올린 上疏文에서 李珥의 설을 佛敎와 六王(陸九淵과 王守仁)과 같은 週期說로서 異端이라고 攻擊하였다. 그는 李滉이야말로 주리說로서 정학이라는 思想에 根據하여 李珥를 批判했던 것이다. 그後 주리說은 停學이고 週期說은 異端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上疏로 인하여 有職은 朝廷으로부터 處罰받아 過去試驗을 應試할 수 있는 資格을 박탈당하였다. 하지만 李珥 亦是 氣의 뿌리가 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주리說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李滉과 李珥 모두 氣의 뿌리가 리라고 했기 때문에 모두 理一元論 또는 理氣一元論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著作인 《 동호문답 (東湖問答)》, 《 聖學輯要 (聖學輯要)》, 《 仁心道心說 (人心道心說)》, 《 時務六曹소 (時務六條疏)》 等은 모두 賃金의 道理와 時務를 論한 名著로 그의 政治에 對한 態度는 儒學者의 以上인 요순 時代를 實現하는 것이었다.

鄕約과 規例 [ 編輯 ]

이 밖에 政治的 腐敗의 打開와 百姓의 救濟에 對한 方策에 關해서는 한層 具體的인 抱負를 가지고 있었다. 《漫言奉仕(萬言封事)》에서 栗谷은 腐敗의 시政策 7個項을 提示하였는데 特히 그 中 十萬養兵說 을 主張하여 壬辰倭亂을 豫言한 것은 有名한 事實이다. 이 밖에도 大同法 의 實施와 社倉 의 設置 等을 提議한 일은 朝鮮 社會 政策에 劃期的인 革新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一般 民衆의 啓蒙을 위하여 《西原鄕約(西原鄕約)》, 《海州鄕約(海州鄕藥)》, 《사창契約속(社倉契約束)》, 《동거계사(同居戒辭)》, 《學校模範(學敎模範)》, 《海州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約束(約束)》, 《文獻書院學規(文獻書院學規)》 等의 規例를 많이 만들었다.

政黨觀 [ 編輯 ]

그는 旣存의 性理學 의 思想처럼 政黨을 君子의 政黨과 小人의 政黨이 存在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朝鮮 明宗 때까지만 해도 朋黨을 形成하는 것은 罪惡으로 보는 視角이 强했는데, 그는 朋黨을 否定할 것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李珥의 朋黨官은 旣存의 性理學 敵 朋黨館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小人의 政黨을 完全히 排斥할 수 없음을 認定하고, 다만 君子의 政黨을 相對的으로 많이 登用함으로써 問題를 줄여가는 것으로 解決해야 된다고 判斷하였다.

女性 敎育館 [ 編輯 ]

그는 旣存의 儒敎 性理學 의 男女 差別에 反對하였다. 女性 亦是 하나의 人間이자 人格體로 看做하였고, 女性에게도 儒敎 性理學 을 가르쳐 仁義禮智와 道德的 素養을 가르쳐야 된다고 確信했다. 그의 이런 思想은 집안의 女性들에게 四書三經을 直接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또한 그는 어머니 申師任堂 의 影響을 받았는데, 이는 딸들에게도 儒敎 性理學 을 가르쳤던 外할아버지 신명화의 影響力이기도 했다. 그러나 同時에 여러 名의 妾을 거느리는 二重的인 面貌를 보이기도 한다.

讀書館 [ 編輯 ]

이이는 그의 著作 自警文(自警文)에서 讀書에 對한 생각을 規定하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來日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處理에 마땅한 方道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讀書를 한다. 讀書란 옳고 그름을 糞便(分辨)하여 일을 行하는 데 實踐하는 것이다. 萬若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讀書만 한다면, 無用한 學問이 된다. [26]

또한 擊蒙要訣 의 4章에서 栗谷은 讀書에 對해 詳細히 論하고 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이 마음을 保存하여 事物의 誘惑에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理致를 따져보고(窮理), 選(善)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行해야 할 道理가 눈앞에 드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道(道)로 드러내는 데는 理致를 따지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理致를 따지는 데는 讀書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聖賢(聖賢)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본받거나 警戒해야 할 善과 惡이 모두 冊에 있기 때문이다. [26] '라고 하여 讀書를 世上, 事物의 理致와 眞理를 깨우치는 가장 基本的인 段階로 解釋하였다.

學脈 [ 編輯 ]

이이는 學問的으로는 김종직 學派의 直系로서, 親舊인 成婚 과 함께 백인걸 의 門下生이었다. 成婚 백인걸 外에도 성수침 에게도 師事했는데, 백인걸 성수침 조광조 의 文人이었다. 이들의 親舊였던 노수신 亦是 이연경 의 文人으로, 이연경 亦是 조광조 의 文人이었다.

그는 官僚生活 中에도 스승인 백인걸 을 자주 찾았는데, 李珥가 백인걸 과 함께 정암 조광조 와 退溪 李滉 의 人物評을 論하면서 정암과 退溪의 優劣을 놓고 評을 했는데, 이때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 에게 조광조 에 對해 타고난 性品은 훌륭하였지만 學問이 成熟하지 못한 채 官職에 나가서 일을 그르쳤다고 所信을 披瀝했다. 백인걸 조광조 의 門下生이었다.

조광조 는 다시 김종직 의 門下生의 한사람인 김굉필 의 門下生이기도 하다. 李珥와 成婚 의 門下生들 中의 한名인 沙溪 김장생 의 門下에서 송시열 송준길 等이 輩出되었고, 李珥와 成婚 은 後日 西人 의 縱走로서 推仰되었다.

評價 [ 編輯 ]

栗谷 李珥의 肖像이 쓰인 大韓民國의 5000원 紙幣

肯定的 評價 [ 編輯 ]

이항복 은 李珥의 神道碑를 썼다. 李珥의 弟子인 김장생 은 李珥의 가장 큰 弟子로 李珥의 一代記인 ‘行長’을 지어 李珥의 業績을 讚揚하였다. 金長生은 이이를 追慕한 栗谷行長에서 “高麗 末葉에 문충공 정몽주 先生이 처음으로 道學(道學)을 열어 名儒들이 이어져 朝鮮에 와서 繁昌한다. 그러나 學問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經國濟世의 力量을 堪當할 만하고 義理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趙光祖와 栗谷 두 분이었다.”라고 評價하고 栗谷이야말로 만세토록 太平聖代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功勞가 遠大하다 말하겠다며 極讚하였다. 그는 弟子들에게 東方知性人(東方之聖人)이라는 稱號를 받고 畿湖學派 를 形成하여, 後世의 學界에 强力한 影響을 끼쳤다. 그의 弟子로는 沙溪 김장생 , 重峯 조헌 , 수몽 정엽 , 묵재 李貴 等의 學者들이 栗谷의 門下였다.

栗谷이 大學者이면서 뛰어난 政治家로 評價 받을 수 있었던 點에는 몇 가지 要因이 있다.

첫째, 申師任堂 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點이다. 栗谷은 어렸을 때 文學, 藝術에 造詣가 깊은 申師任堂으로부터 修學했다. 朝鮮 時代에는 女性은 漢文 書籍을 읽지 않는 것이 慣例였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學問을 익히는 것은 極히 異例的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可能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獨自的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斟酌된다.

둘째, 退溪 李滉 이라는 先輩가 있었다는 點이다. 栗谷은 23歲 때 도산書院으로 直接 退溪를 訪問했고, 그 뒤로도 便紙를 주고받으며 學問과 個人的 身上에 關해 意見을 나눴다. 故鄕으로 돌아가려는 退溪를 極口 挽留했고, 退溪가 죽고 나서는 萬時(輓詩)를 지어 哀悼했다. 退溪와 함께 朝鮮 性理學의 두 줄기를 形成했다는 評價를 받는다. 後代 學者들이 學派와 朋黨의 形成에 따라 退溪와 栗谷 사이에 건널 수 없는 江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學問的으로나 政治的으로나 敵對的인 關係처럼 되어버렸지만, 當代에는 서로를 認定한 좋은 先後輩였다. 栗谷은 그런 先輩와의 便紙 交流 等을 통해 學問的 硏磨를 할 수 있었고, 先輩가 이루어놓은 成果를 디딤돌로 해서 自身의 學問的 世界를 構築할 수 있었다.

셋째, 宣祖 時代에 活動했다는 點이다. 栗谷이 官職에 進出하자마자 文定王后 가 死亡하고 外戚인 윤원형 이 彈劾을 받았다. 史話로 얼룩졌던 時代는 지나가고 士林 이 中央의 舞臺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改革 意志가 剛하고 學問的 力量이 있었던 栗谷이 士林派가 政界의 中心이 된 때에 官職에 들어갔다는 것은 幸運이었다. 栗谷보다 서른다섯 살 位였던 退溪의 境遇 士林이 萎縮되었던 때에 關係에 있었으므로 朝廷에 厭症을 느끼고 故鄕으로 물러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對比된다. 勿論 先祖의 限界, 士林의 分裂 等 以後 展開되는 狀況이 栗谷을 괴롭혔다는 點을 看過할 순 없다. '十萬 養兵說' 等의 建議에 對해 宣祖가 微溫的으로 받아들였고, 또 朋黨에 對해 中立的인 立場을 堅持하여 調律하려고 했으나 同人 西人 兩쪽으로부터 攻擊을 받는 結果를 낳아 政治的 成果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栗谷은 恒常 中央 政界의 한 中心에 서 있었다.

넷째, 學問的 知識이 있었던 親舊들과 交流했다는 點이다. 平生의 親舊인 成婚 , 송익필 , 鄭澈 等 當代의 人士들이 周圍에 있어 學問的으로나 政治的으로나 個人的으로 不足한 것을 채워주고 激勵해 주어 自身의 力量을 펼칠 수 있었다. 栗谷은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挫折될 때면 先代의 故鄕인 坡州 로 물러나 學問과 敎育에도 關心을 기울였다. 그 結果 學問과 敎育 分野에서도 많은 成果를 거둘 수 있었고 弟子도 많이 養成했다.

否定的 評價 [ 編輯 ]

이준경 이 黨爭의 火를 豫言했을 때, 그는 뒤에 後悔하고 信念을 바꾸기는 했으나 이준경 을 剛한 語調로 非難하여 그에 對한 處罰 輿論을 形成하게끔 誘導하기도 했다. 유성룡 等이 이준경 을 擁護했는데 이는 後日 李麟佐의 亂 當時 慶尙北道 地域이 集中的으로 呼應하는 原因을 提供한다.

黨爭의 調節을 위한 努力을 기울였으나 西人 의 立場에서 調節하려 努力한 限界點이 있다.

擇里志 의 著者 이중환 은 그가 同人 人士들이 流配되도록 使嗾했다며 批判하였다. 그에 依하면 '栗谷은 儒學者로서 이름이 높았고 또 西人으로 自處하지 않았으나, 세 次例에 걸쳐 귀양 보낸 일에 손을 쓴 것은 輕率했다. [27] '며, '이 일로 調整이 混亂에 빠져 收拾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責任을 免하기 어렵다. [27] '고 批判했다.

지나치게 王에게 依存的이었다는 批判도 있다. 이이는 지나치게 王에게 依存하는 態度를 보였는데, 그것 亦是 잘못이다. 그는 宣祖 를 착한 改革君主로 만들어 朝鮮 을 再建하려는 政治路線을 信奉했다. [28] 그러나 心理的으로 健康하지 않은 人物에게 成人(聖人)이 되라고 要求하는 것은 意味없는 일이다. 勿論 意志薄弱으로 큰 뜻을 세우지 못하는 王에게 큰 뜻을 품으라고 說得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28]

正祖 처럼 좋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기에 이이는 착하지만 世上일에 뜻이 없는 아버지에 對한 未練을 버리지 못하고 그 結果 지나치게 王에게 執着했다. [28]

著書 및 作品 [ 編輯 ]

파일:擊蒙要訣.PNG
著書 《 擊蒙要訣

著書 [ 編輯 ]

  • 聖學輯要 》(聖學輯要)
  • 擊蒙要訣 》(擊蒙要訣)
  • 《동호문답》(東湖問答)
  • 《소학집주》
  • 《漫言奉仕》
  • 《기자실기》
  • 《經筵日記》(經筵日記)
  • 《석담日記》(石潭日記) - 經筵日記의 一部였으나, 朝鮮 肅宗組 以後 따로 석담日記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普及되었다.
  • 純言 》(醇言)
  • 〈仁心道心說〉
  • 〈金時習傳〉
  • 〈薦度策〉

作品 [ 編輯 ]

  • 《西原鄕約(西原鄕約)》
  • 《海州鄕約(海州鄕藥)》
  • 《사창契約속(社倉契約束)》
  • 《동거계사(同居戒辭)》
  • 《學校模範(學敎模範)》
  • 《海州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 《約束(約束)》
  • 《文獻書院學規(文獻書院學規)》
  • 《자경문》

飜譯된 著書 [ 編輯 ]

  • 《 栗谷先生 行狀記 Ein Stern im fernen Osten der koreanische Gelehrte Yul-Gok》 《Grundel, 2004 獨逸》獨逸語 이양숙 飜譯 [29]
  • 《 擊蒙要訣 Wegweiser fur die unwissende Jugend von Gelehrte Yul-Gok》《Grundel, 2005 獨逸》 獨逸語 이양숙 飜譯
  • 《 栗谷先生의 金剛山 時 Lyrische Reise in das Diamanten-Gebirge Koreas, Geum Gang san Shi》《Grundel, 2007 獨逸》獨逸語 이양숙 飜譯

家族 關係 [ 編輯 ]

講評공(康平公) 이명신 (李明晨)의 5代孫이며, 中宗 때의 宰相 이기 , 履行 兄弟의 再從孫이자 通德郞 司憲府 監察을 지내고 事後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에 追贈된 李元壽(李元秀)와 貞敬夫人 申師任堂 의 셋째 아들이었다.

  • 祖父 : 利川(李?)
  • 조某 : 南陽 洪氏 (南陽洪氏), 鴻歸손(洪貴孫)의 딸
    • 아버지 : 李元壽 (李元秀, 1501 ~ 1561) - 通德郞 司憲府監察 水運判官 歷任, 左贊成에 追贈
  • 外祖父 : 신명화(申命和, 1476 ~ 1522)
  • 外祖母 : 龍仁 李氏 (龍仁李氏, 1480 ~ 1569), 移徙온(李思溫)의 딸
    • 어머니 : 申師任堂 (申師任堂, 1504 ~1551)
      • 兄 : 이선(李璿, 1524 ~ 1570)
      • 兄嫂 : 先山 郭氏 (善山郭氏), 곽연성(郭連城)의 딸
        • 조카 : 이경진(李景震)
        • 조카 : 이경항(李景恒)
        • 조카 : 조덕용(趙德容)에게 出家
        • 조카 : 정효전(鄭孝傳)에게 出家
      • 누나 : 이매창(李梅窓, 1529 ~ 1592)
      • 사위 : 조대남(趙大男, 1530 ~ 1586)
        • 조카 : 照準(趙峻)
        • 조카 : 造營(趙嶸)
        • 조카 : 調印(趙?)
      • 兄 : 이番(李?, 1531~1590)
      • 兄嫂 : 南陽 洪氏 (南陽洪氏), 홍구성(洪九成)의 딸
        • 조카 : 이경승(李景升)
        • 조카 : 李警正(李景井)
      • 누나 : 윤섭(尹?)에게 出家
        • 조카 : 윤담(尹聃)
      • 女同生 : 홍천우(洪天祐)에게 出家
        • 조카 : 홍석윤(洪錫胤)
      • 동생 : 이우(李瑀, 1542 ~ 1609)
      • 祭需 : 德山 黃氏 (德山黃氏), 孤山(孤山) 황기로 (黃耆老)의 딸
        • 조카 : 이경절(李景節)
        • 조카 : 정유성(鄭維城)에게 出家
        • 조카 : 권상정(權尙正)에게 出家
        • 조카 : 이시발(李時發)에게 出家
        • 조카 : 權軫(權縉)에게 出家
        • 조카 : 권태일(權泰一)에게 出家
        • 조카 : 김치(金緻)에게 出家
      • 情實 : 谷山 盧氏 (谷山盧氏, ? ~ 1592年 [30] ), 牧師 노경린 의 딸
      • 側室 : 龍仁 李氏 (龍仁李氏)
        • 서장남 : 이경림(李景臨)
        • 庶女 : 金集 (金集)에게 出家
      • 側室 : 全州 金氏 (全州金氏)
        • 서차남 : 李警正(李景鼎)

論難과 疑惑 [ 編輯 ]

1579年의 곽사원의 第放送社가 정언지 等에 依해 1589年 터지게 된다. 이 10年 된 事件은 結局 主管 部處인 共助의 參判 정언지 의 上疏로 先祖의 決心을 얻어 調査하게 되었다. [31] 그 過程에서 疑惑이 있는 송익필 一家의 뒤를 이이가 봐주었다는 것이다.

土木 工事를 둘러싼 不正 事件에 송익필 의 조카 사위(宋翼弼의 兄 송한필의 사위)가 關聯되었고, 그 동안 이이가 이 事件을 極力으로 돌보아주었다 [31] 는 疑惑이 있다.

同人의 南北 分當時 疑心 [ 編輯 ]

理髮 , 정인홍 等이 우성전 의 蓄妾을 問題삼은 것 亦是 同人 强勁派들의 穩健派에 對한 不信, 疑惑의 한 原因이 되었다. 우성전 은 여러 名의 妾을 두었는데 이 點이 一部 同人 少壯派들에 依해 疑惑으로 提起되었다.

그런데 우성전 이 問題가 되었을 때도 同人 들은 이이를 (背後로) 疑心했다. 우성전 은 當時 同人들이 떠받들던 人物이었다. [32] 우성전 은 學問的 素養도 幅넓었고 智略이 남달랐으며, 經世에 對한 觀點이 뚜렷하였다.

同人 들이 "禹性傳이 代身이 된다면 萬百姓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程度로 同人 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指導者였다. 이런 우성전 에게도 한 가지 欠이 있었는데, 妓生 한 名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 [32] 甚至於 우성전 의 父母喪 때에도 이 妓生이 常例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禹性傳의 집에 出入할 程度였다. [32]

喪中에 妓生이 우성전 의 집에 出入하는 것을 보고 駭怪하게 여긴 人物은 同人 理髮 이었다. [32] 理髮 司憲府 掌令 으로 있던 정인홍 에게 禹性傳의 父母喪에 妓生이 出入하더라고는 事實을 이야기하였다. 後날 對北 (大北)의 領袖 가 되는 정인홍 은 在野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自身의 깨끗한 處身을 자랑삼아 온 人物이었다. [32] 그는 禮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 을 攻擊했다. [32]

정인홍 우성전 을 彈劾한 것은 이처럼 同人 理髮 의 吐露에 依한 것이었는데, 同人 들은 이것 亦是 이이가 뒤에서 操縱한 것이라고 이이를 疑心하였다. [32]

流配 使嗾 疑惑 [ 編輯 ]

後날의 남인 學者 이중환 은 自身의 著書 擇里志 에서 그가 ( 同人 界) 사람들의 彈劾, 귀양을 背後에서 使嗾했다. [27] 는 疑惑을 提起하였다.

佛敎 僧侶 疑惑 [ 編輯 ]

19歲에 어머니 申師任堂 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衝擊을 받은 그는 金剛山 에 들어가 1年間 僧侶 로 生活하였다. 그러나 後에 그의 政敵들은 이를 두고 그가 似而非 學者, 學者의 탈을 쓴 中( 佛敎 僧侶 )이라고 人身攻擊性 非難을 加하였다. 율友誼 文廟 從事 論爭이 벌어지자 許穆은 이이를 儒學者의 옷을 입은 佛敎 僧侶라고 批判했다. 尹鑴度 許穆과 같은 視角에서 이이를 批判했다.

人組 卽位 初부터 始終 栗谷 李珥와 우계 成渾 의 文廟 종사를 놓고 論難이 發生했다. 男인 中에서 栗谷과 牛溪의 文廟 종사를 反對한 核心 人物들은 未遂 許穆 과 孤山 윤선도 , 白虎 尹鑴 等이었다. [33]

율友誼 文廟 從事 論爭이 벌어지자 許穆 은 이이를 儒學者의 옷을 입은 佛敎 僧侶라고 批判했다. 許穆이 栗谷 李珥 의 文廟 종사를 批判한 名目은 그의 學問이 儒敎 가 아닌 佛敎 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33]

學問에는 次例가 있고 공(功)에는 順序가 있다. 栗谷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宏壯한 論議를 갖고서 自身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 그는 '먼저 重要한 길을 찾아 문정(門庭)을 훤히 연 뒤에라야 定해진 方向이 없이 널리 배울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度(道)를 보는 것을 먼저 하고 學問을 뒤로 돌린 것으로 學問 方法을 거꾸로 한 것이다. 이는 佛敎의 頓悟法(頓悟法)이지 孔子의 가르침이 아니다. [33]

許穆은 이이가 黨爭을 調節하는 것처럼 行世했지만 '栗谷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宏壯한 論議를 갖고서 自身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 [33] '며 이를 否認하였다.

白虎 尹鑴 도 許穆과 같은 視角에서 이이를 批判했다.

栗谷 李珥가 聖學輯要(聖學輯要) 序文에서 말하기를 '먼저 要路(要路)를 찾아서 문정(門庭)을 確實히 연 後에 定해진 方向 없이 널리 배우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 ...(以下 中略)... 栗谷의 말처럼 한다면 根本을 세움이 確實하지 못하고 方向이 定해지기도 前에 尿路와 문정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이하 中略)... 이는 不可(佛家)의 거꾸로 배우는 方法이지 孔子의 가르침이 絶對 아니다. [33]

許穆 尹鑴 에 依하면 栗谷은 儒學者가 아니라 儒學者의 옷을 입은 佛敎 僧侶에 不過한데 僧侶를 어떻게 文廟에 從事하느냐는 非難人 셈이었다. 許穆의 批判은 結局 栗谷 李珥 의 出家 經歷을 政治的으로 利用해 그의 文廟 종사를 막으려는 黨派的 批判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33] 남인 中에서 栗谷과 牛溪의 文廟 종사를 反對한 核心 人物들은 未遂 許穆 과 孤山 윤선도 , 白虎 尹鑴 等이었다. [33] 어린 時節 한때의 彷徨을 이들은 理解하지 않았다. [33] 許穆 , 尹鑴 等이 李栗谷 學者 가 아니라 佛敎 僧侶라고 몰고 가자 憤怒한 송시열 은 許穆과 尹鑴를 異端 似而非라고 糾彈하였고, 이들에 對한 感情的인 憤怒를 품게 된다.

性格 [ 編輯 ]

性格은 率直하였으며, 그는 僞善과 假飾을 極度로 嫌惡하여 꾸며서 말하기를 拒絶하였다.

그러나 道德과 倫理와 禮節이라는 이름으로 假裝된 僞善과 形式, 겉치례가 澎湃한 社會에서 栗谷의 이러한 事物의 本質에 立脚한 正直한 姿勢는 通用되기 어려웠다. [10] 栗谷의 이러한 事物이나 人間에 對한 正直한 姿勢는 많은 誤解를 불러일으켜 當時 同僚는 勿論 先輩와 元老大臣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誤國小人誤國小人이라고까지 指彈을 받았다. [10]

主로 李滉 徐坰德 의 文人이었던 同人 남인 , 北人 은 그가 18歲에 佛敎 에 入門했다가 還俗한 點과, 그의 할아버지가 윤원형 의 同僚인 이기 의 再從孫이라는 點을 걸고 넘어지며 그를 繼續 重傷, 人身誹謗하였다.

성삼문 百이 宿題 批判 亦是 그르다며 百이 宿題 도 옳고 朱 武王 亦是 옳다는 兩是論 亦是, 大衆을 眩惑하고 惑世誣民하려 한다는 理由로 同人 남인 系列의 꾸준한 人身攻擊 對象이 되었다.

기타 [ 編輯 ]

  • 1972年 以後 大韓民國 5千원券 紙幣에 그의 얼굴이 選定되어 있다.
  • 副室 慶州 李氏(慶州李氏)에게서 얻은 2男 1女中 딸은 그의 弟子인 沙溪 김장생 의 아들 愼獨齋 金集 의 不實이 되었다.
  • 李珥와 親分이 있던 송익필 송한필 에게서 禮學을 배운 弟子들 中 相當數는 송익필 의 집안이 雁堂 家門을 逆謀로 몰았던 일로 沒落하자, 송익필 의 弟子, 송한필 의 弟子임을 숨기고 李珥의 學脈을 繼承한 것처럼 自處하기도 했다. 이는 송익필 , 송한필 에게서도 배웠으며 李珥, 成婚 等에게서도 두루 修學한 김장생 과 그의 一家를 통해 學脈 洗濯을 했다.
  • 僧侶에서 還俗한 後 지은 《자경문》(自警文)은 一種의 轉向書로도 解釋된다.

遺跡地 [ 編輯 ]

文廟 에 配享되어 있으며, 甲戌換局 以後 文廟 從事는 確定되었다. 또한 京畿道 坡州市 에는 그의 位牌와 影幀이 奉安돼 있는 書院인 紫雲書院 과 餘生을 보낸 樓閣 화석정 이 있다. 黃海道 百千(白川)의 門會서원 (文會書院)에 配享되었다. 坡州 李珥 遺跡 (坡州 李珥 遺跡)李 2013年 2月 21日 大韓民國의 史跡 第525號로 指定되었다.

栗谷 李珥가 著述했다고 傳해지는 豫言書 [ 編輯 ]

栗谷 李珥가 썼다고 豫言書로 傳해지는 '七言高潔','옥룡자청학동祕訣','五百론泗沘期' 等이 있다. [34]

各州 [ 編輯 ]

  1. 佛敎 僧侶 時節에는 雅號 이기도 한 석담 (石潭)이라는 법명 으로 僧侶 生活
  2. 只今의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관훈동 · 仁寺洞
  3. (蔚山大學校 - 李珥의 里通旗國 理論의 形而上學的 缺如(缺如) DOI https://dx.doi.org/10.15750/chss.56.201505.001 - Yi Yi’s Theory of “The Principle is Universal, and the Material Force Limits It” in a Metaphysical Deficiency 손 영 式)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94333/1/01_%EC%86%90%EC%98%81%EC%8B%9D.pdf
  4. 科擧試驗 9番 壯元及第, 天才 李珥의 驕慢이었을까? - 오마이뉴스 2006年 9月 28日子 記事
  5. 이때까지만 해도 3年喪은 選擇事項이었고 禮訟 論爭 基 以後 3年喪이 法으로 規定化되었다.
  6.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71페이지
  7. "金剛山이야말로 眞짜 부처의 境地" - 오마이뉴스 2005年 3月 11日子
  8. 그러나 同人과 南人은 그가 한때 僧侶였다는 點을 300年 넘게 非難의 素材로 惡用하였다.
  9. 明宗費 仁順王后 沈氏의 從祖父이자, 할아버지 심연원의 親同生이었다.
  10. 백완기, <韓國史學에 바란다 - 열린 마음으로 6 栗谷으로부터 敎訓을> 《韓國史市民講座 第37輯》 (일조각, 2005)
  11. 이덕일 <黨爭으로 보는 朝鮮 歷史> 石筆 2004年 p56~57
  12. 이덕일 <黨爭으로 보는 朝鮮 歷史> 石筆 2004年 p58
  13. 첩 金氏와 妾 李氏 等 두名의 小室을 두었다.
  14. 할아버지 利川의 四寸 兄弟였다.
  15. 再從祖父 이기 는 그가 攻擊했던 東古 이준경 과 靜寂關係이기도 했다.
  16. 鄭汝立은 한때 그의 弟子라 스승을 背信한다 하여 論難의 對象이 되었다.
  17. 이건창, 黨議通略
  18. 이건창, 黨議通略
  19. 사이버儒敎, 李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20. 한영우 , 《다시 찾는 우리歷史》, 경세원.
  21.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102페이지
  22.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103페이지
  23.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105페이지
  24.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98페이지
  25.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99페이지
  26. [朝鮮의 人物, 朝鮮의 冊:栗谷 李珥의 讀書 禮讚] 冊 읽기는 人間이라면 當然한 日課 Archived 2015年 5月 25日 - 웨이백 머신 新東亞 2006年 第 541 號 (p 90 ~ 92)
  27. 이중환, 《擇里志》 (김흥식 驛, 서해문집, 2006) 175페이지
  28. 김태형, 《心理學者 正祖의 마음을 分析하다》 (歷史醫아침, 2009) 195페이지
  29. 派獨看護師 擊蒙要訣 獨語版 出刊 , 在外同胞新聞
  30. 壬辰倭亂 때 下女들과 함께 그의 墓所를 지키다가 殺害되었다.
  31.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111페이지
  32. 이덕일,《黨爭으로 보는 朝鮮歷史》 (石筆, 1997) 68페이지
  33. 黨爭으로 보는 朝鮮歷史 (石筆, 1997) 211 페이지
  34. '鄭鑑錄' 이민수 譯註, '松下祕訣' 黃南宋 譯註 큰숲 出版社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兩班文化의 隆盛〉"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본 文書에는 知識乙만드는지식 에서 CC-BY-SA 3.0 으로 配布한 冊 紹介글을 基礎로 作成된 內容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같이 보기 [ 編輯 ]

文廟·宗廟 同時 背向 人物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仁宗實錄
  • 明宗實錄
  • 宣祖實錄
  • 大東野乘
  • 석담日記
  • 國朝寶鑑
  • 國朝榜目
  • 司馬榜目
  • 國朝人物考
  • 국조인물지
  • 燃藜室記述
  • 東岳先生文集
  • 李珥 『栗谷全書』 / 정원재 pdf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