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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첫 開化思想家 오경석 아닌 박규수” :: 文化日報 munhwa

“韓國 첫 開化思想家 오경석 아닌 박규수”

  • 文化日報
  • 入力 2011-03-1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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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化期에 活動한 驛館이자 書畫家, 금석학자였던 오경석(1831~1879)을 ‘韓國의 첫 開化思想家’로 보는 旣存 見解는 飼料의 誤讀 等 許多한 實證的 誤謬를 內包하고 있다는 批判이 提起됐다.

燕巖 朴趾源(1737~1805)과 그의 孫子인 桓齋 박규수(1807~1877) 硏究의 權威者인 김명호(國語國文學) 서울大 敎授는 最近 出刊된 攀緣間 學術敎養誌 ‘韓國史 市民講座’(일조각·寫眞) 第48輯에 寄稿한 ‘實學과 開化思想’이란 글에서 “吳慶錫이 1853年에서 1859年 사이 우리나라에서 最初로 開化思想을 形成했다는 主張은 거의 推論의 連續일 뿐”이라며 開化派의 스승을 吳慶錫이 아닌 朴珪壽로 보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金 敎授에 따르면 吳慶錫을 ‘韓國의 첫 開化思想家’로 보는 側이 내세운 세 가지 實證的인 證據들 모두 問題 투성이다. 假令 朴齊家의 實學을 이어받은 證據 資料로 提示된 ‘槿域書畫徵(槿域書畵徵) 박제가條’에 실린 吳慶錫의 글 ‘千죽재차록(天竹齋箚錄)’은 ‘朴齊家가 그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中國에 畫家로 잘못 알려졌다’는 內容일 뿐이다. 吳慶錫이 1858年 또는 1863年 北京에서 만난 張之洞(張之洞)·吳大澂(吳大徵)·왕의영(王懿榮) 等 양무파 改革思想家의 影響을 받아 開化思想을 形成했다는 主張도 當時 歷史的 事實과 矛盾된다. 吳慶錫이 張之洞 等을 만난 것은 그가 朴珪壽를 遂行해 北京에 갔던 1872年이며 當時 그들은 翰林院의 新進官僚로 양무파에 對해 批判的인 保守的 淸流派에 屬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吳慶錫과 朴珪壽가 1860年代 이미 切親한 思想的 同志였다는 證據로 擧論되는 朴珪壽가 吳慶錫에게 보냈다는 便紙도 實際는 趙大妃의 조카로 權勢를 누렸던 조영하(1845~1884)에게 보낸 便紙라고 金 敎授는 說明했다.

朴珪壽의 思想이 實學에서 開化思想으로 論理的으로 發展하는 過程을 살펴본 金 敎授는 “朴珪壽가 北學派인 朴趾源의 後裔로서 英·正祖時代 實學의 成果를 누구보다 忠實히 繼承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門下에서 金允植과 김옥균, 金弘集, 朴泳孝, 兪吉濬 等 開化派의 主要 人物들이 輩出된 만큼 實學이 開化思想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論理的으로 決코 無理한 主張이 아니다”고 强調했다.

特히 朴珪壽가 ‘開化 君主’ 高宗의 卽位 初부터 10年 동안 學問 指導를 맡았으며 大院君 失脚 뒤 高宗을 最側近에서 輔弼하는 元老大臣으로 活躍했다는 點에서 그가 高宗의 思想的·政治的 스승이었음을 金 敎授는 指摘했다.

金 敎授의 寄稿는 ‘韓國史 市民講座’ 第48輯이 1930年代 鄭寅普 等이 國學(造船學) 運動을 펼친 것을 起點으로 삼아 企劃한 特輯 ‘韓國 實學 硏究 80年’에 실린 總 8篇의 글 가운데 하나다. 反朱子學, 在野知識人의 學問이란 範疇에서 이뤄졌던 初期의 實學 硏究를 批判하고 朱子學이 重視한 義理學과 經世學, 名物度數學 等으로 構成된 儒學 가운데 義理學을 除外한 後者들이 朝鮮後期에 發達해 實學의 內容을 이룬 것이라고 主張한 유봉학(國史學) 한신대 敎授의 ‘實學의 系譜와 學風’이란 글 等이 이番 特輯에서 注目을 끈다.

최영창記者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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