興親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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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면
완興群
在位 1900年 ~ 1910年
興親王
在位 1910年 8月 15日 ~ 1910年 8月 29日
在位 1910年 8月 29日 ~ 1912年
後任 이준용
이름
이재면
別號 재면(載冕), 이희, 初名은 再錄(載錄), 字는 무경(武卿), 號는 隅石(又石), 다른 作爲는 완興群
身上情報
出生日 1845年 8月 22日 ( 陰曆 7月 20日 )
出生地 조선의 기 朝鮮 漢城府 안국방 雲峴宮
死亡日 1912年 9月 9日 (68歲)
死亡地 일제강점기의 기 日帝强占期 京城府 안국정 雲峴宮
國籍 朝鮮 , 大韓帝國 , 日本 帝國
父親 흥선大院君 이하응
母親 여흥부大夫人 閔氏
配偶者 풍산 洪氏, 驪州 李氏, 첩 1名
子女 이준용 , 이문용
宗敎 儒敎 ( 性理學 )
墓所 京畿道 南楊州市 화도읍 창현리
陵墓 興親王陵→흥원 (興園) [1]
軍事 經歷
服務 大韓帝國 陸軍
服務期間 1907年 11月 27日 ~ 1910年 10月
最終階級 陸軍 部長(副將)
指揮 大韓帝國 陸軍
徐薰 大韓帝國 大勳位 金尺大首長
大韓帝國 大勳位 瑞星大首長
大韓帝國 大勳位 李花大首長

興親王 이재면 (興親王 李載冕, 완興群(完興君), 1845年 8月 22日 ( 陰曆 7月 20日 ) ~ 1912年 9月 9日 )은 朝鮮 末期의 王族·軍人·政治人이자 大韓帝國 의 皇族·軍人으로, 흥선大院君 의 嫡長子(嫡長子)이자 高宗 의 親兄이며 이준용 의 아버지이다. 大韓帝國 成立 後 완興群(完興君)에 冊封되었다가 1910年 興親王(興親王)으로 進封되었다.

1863年 淫書로 使用이 되었으며 이듬해 科擧에 及第하여 아버지 흥선大院君 의 執權期間 中 都承旨, 參議, 直提學 等을 지내고, 1874年 11月 흥선大院君 이 퇴출당하고 高宗의 親政 以後에도 吏曹와 刑曹, 兵曹 判書 等을 지냈다. 한때 흥선大院君 으로부터 동생 高宗 의 代案으로 檢討되기도 했다. 官職은 上輔國崇祿大夫 (上輔國崇祿大夫) 宮內府 代身, 陸軍 部長에 이르렀다.

1874年 11月 흥선大院君 高宗 과 [[中前閔氏(明成皇后)]를 몰아내고 이재면의 아들 이준용 을 推戴하려 했고, 4回의 쿠데타를 企圖했다가 失敗했다. 以後 李載冕은 高宗의 冷待를 받았고 1899年 (光武 2) 思悼世子 가 章宗으로 推尊된 뒤에도, 當時 皇帝의 親兄이었음에도 4代 承襲에 따른 爵位를 받지 못했다. 1907年 (隆熙 1) 완흥군에 冊封되었고, 1910年 (隆熙 4) 8月 興親王으로 進封되었다. 日帝强占期 에는 公族 으로 降等되어 이희 공이 되었다. 本貫은 全州 (全州)이고, 처음 이름은 再錄(載錄), 字는 무경(武卿), 號는 隅石(又石)이고 나중에 改名하여 이희(李熹)로도 알려져 있다. 첫 爵位가 완興軍이었으므로 완興群 이재면 으로도 부른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興親王 李載冕은 1845年 8月 22日 ( 陰曆 7月 20日 ) 漢城府 使動(寺洞) 私邸에서 흥선大院君 여흥부大夫人 閔氏 사이에서 2혐制中 長男으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再錄(載錄)이었다가 뒤에 材面으로 고쳤다. 朝鮮總督府 가 作成한 이희공實錄 에 依하면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어진 이름은 再錄이었다 한다. 朝鮮 憲宗 哲宗 이 連이어 後嗣 없이 死亡하면서 이재면 亦是 有力 王位繼承權者로 指目되었으나, 哲宗 이 死亡할 무렵 그는 成人이었기에 王位繼承權 序列에서 밀리게 되었다.

이는 哲宗 死亡 當時 12歲의 未成年者였던 이명복 ( 흥선大院君 의 次男)李 聖人인 興親王보다 操縱하기 쉬울 것이라는 흥선大院君 의 計略과 趙大妃 의 默認이 作用한 結果였다. 또한 흥선大院君 安東 金氏 의 一部를 包攝할 때, 김병학 (金炳鶴)의 딸, 或은 김병문 의 딸 中에서 둘째 아들인 冥福 의 配匹로 맞이하기로 約束한 바 있다. 이것 亦是 재면 보다는 冥福을 選擇하게 된 原因이 되었다. 한때 그는 아버지 興宣大院君에 依해 큰아버지 興완군 이정응의 養子로 보내지는 것이 考慮되기도 했다. 그의 興완군 兩者 指定 論難은 1864年 高宗에 依해 取消되어 最終 終結되었다.

親同生 朝鮮 高宗冥福 이 있었고, 그 外에도 庶出 出身 異服兄 李在善 이윤용 의 妻가 된 李氏가 있었다. 한때 李在善 은 그의 동생으로 알려졌다가 李在善 謀逆 事件 當時의 審問, 追窮, 裁判記錄이 나타나면서 李在善이 그보다 年長者인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官職에 오르다 [ 編輯 ]

通德郞(通德郞)을 지낸 풍산 洪氏 홍병주(洪秉周)의 딸과 結婚하여 이준용 , 이문용 兄弟와 2女를 얻었으나 일찍 죽고 뒤에 38年 年下인 參奉 이인구(李麟九)의 딸과 再婚하였다. 그밖에 1名의 妾에게서 庶女 1名을 보았다. 남달리 나서는 것을 別로 좋아하지 않던 그는 아버지인 흥선大院君 의 뜻을 거슬리지 않았다. 아버지 興宣大院君은 그런 그보다 英特하고 野心滿滿한 孫子 映宣群 이준용 을 더욱 寵愛한다. 그는 여러番 過去 試驗 을 準備하였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落榜하였다.

哲宗 治世期間 中 흥선大院君 은 일부러 어리석음을 假裝하여 金炳基 에게 아들 이재면의 官職을 請託하기도 했다. 尹孝貞 흥선군 金炳基 에게 그의 過去 合格 請託을 했다 한다. 흥선군 은 일부러 金炳冀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 文科 合格을 請託했는데, 金炳基 는 마음 속으로는 沒知覺함과 卑劣함을 비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다. [2] 흥선군은 똑같이 金炳冀의 外조카 남병철에게도 똑같이 아들의 等과 合格을 請託하니, 南秉哲은 몹시 憤慨했다. 王室의 金枝玉葉인데, 이렇게 초라해진 形便으로 아들의 登科를 請託하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2] 그런데 박제형 近世朝鮮情感 에는 흥선군을 대놓고 蔑視하던 人物의 한 사람으로 南秉哲을 指目했다.

1863年 官職에 올랐고, 그 해 使用(司勇)이 되었다. [3] 11月 仁政殿(仁政殿)에서 哲宗 이 監製(柑製 [4] )를 親히 主管할 때 1等하여, 바로 過去 에 直赴殿試(直赴殿試)에 應試할 資格이 附與되었다.

官僚 生活 [ 編輯 ]

官僚 生活 初期 [ 編輯 ]

이재면 肖像畫 (靑年期)

1863年 12月 동생 再黃 이 後嗣없이 죽은 哲宗 의 뒤를 이어 朝鮮 王으로 卽位했다. 그는 바로 承候官副司勇(承候官付司勇)에 除授되었다. 1864年 (高宗 1年) 5月 文科 에 及第하여 그날로 奎章閣 大橋(待敎)에 任命되었고, 여러 高位 官職을 거쳤다. 그해 8月 아버지 興宣大院君은 다시 그를 아들 없이 죽은 兄 興완군 의 養子로 보냈다. 그러나 大王大妃 조氏의 特命으로 다른 宗親의 自制를 興완군 의 養子로 하도록 하고, 이재면의 兩者 入養은 取消되었다.

以後 高宗 執權 初期에 三四(三司)에서 翰林(翰林)과 州서(注書)를 歷任하고 藝文館 檢閱과 言官職을 거친 뒤에 奎章閣 시교, 藝文館 檢閱, 承政院 朱書 等을 지냈다.

大院君 攝政期間 中 [ 編輯 ]

그 뒤 堂上官으로 昇進 1865年 (高宗 2年) 1月 通政大夫로 昇進하여 承政院 同副承旨 에 任命되었다가 副護軍(副護軍)이 되었다. 1月 15日 哲宗의 殯殿의 鄕關(享官)으로 追加 選出되었다. 以後 다시 承政院 同副承旨가 됐다가 4月 成均館 大司成 , 李朝 參議 , 副提學 等을 거쳐 以後 成均館 大司成 · 承政院 都承旨 ㆍ吏曹參議ㆍ戶曹參議ㆍ禮曹參議, 副提學, 直提學 等을 歷任했다.

1866年 3月 藥房 副提調 [5] 가 되었다.

1866年 都承旨, 1867年 에는 直提學이 됐다가 그해 3月 嘉善大夫 同知經筵事(同知經筵事)로 昇進하였고, 바로 李朝 參判 이 되었다. 以後 同知經筵事, 宗正卿에 除授되었고, 議政府 堂上을 歷任하였다. 그 뒤 兵曹 板書 , 禁衛大將, 李朝 板書 , 禮曹 板書 等을 지냈다. 1873年 宗正卿(宗正卿)李 되었으나 1874年 11月 아버지 흥선大院君 명성황후 에 依해 攝政職에서 强制 축출당한 뒤에도 그는 悠悠하고 고분고분한 性格 德에 繼續 官職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동생이 國王이었고 아버지는 攝政인데도 自身에게는 낮은 職位가 附與되었던 것에 不滿을 품기도 했다. 이때문에 그는 한때 명성황후 側에 加擔하기도 했다. 外家인 閔氏 戚族에게 阿附한 것 亦是 官職을 繼續 維持하는 祕訣이었다.

大院君 逐出 以後 [ 編輯 ]

아버지 興宣大院君

1878年 (高宗 16年) 資憲大夫로 昇進하여 지 競演 社(知經筵事)가 되었고, 宗正府, 春秋館, 義禁府史를 兼任하였으며, 1879年 刑曹 板書 (刑曹判書), 侍講院 右副賓客(侍講院右副賓客), 侍講院 左賓客, 別入直(別入直)을 거쳐 種1품으로 特書되었다. 그해 崇政大夫에 昇進하여 行 兵曹判書가 되었고, 判義禁府事(判義禁府事), 1880年 兵曹 判書, 1881年 1月 禁衛大將, 판돈녕府使(判敦寧府事) 等을 지냈다. 이어 1月 末 판돈녕府使로 統理機務衙門堂上, 事大交隣堂上(事大交隣堂上)에 올라 吏曹判書, 禮曹 判書를 지냈다. 그해 崇祿大夫로 昇進하였다.

1881年 4月 侍講院 右賓客(侍講院右賓客)李 되고 以後 禁衛大將 과, 知訓鍊院事를 거쳐 같은 해 8月 吏曹判書가 되었다. 그해 10月 李在善 의 獄舍가 있자 上疏를 올려 李在善 의 嫡兄임을 들어 스스로 罪를 請하였고, 곧 辭職했다. 그 뒤 이재선의 獄事 關聯者들에게 逆賊의 律로 다스려야 된다는 司憲府 司諫院 成均館 儒生들의 非難을 받을 때 그는 逆謀 加擔者의 가까운 親族이었음에도 特別히 禍를 면할 수 있었다. 1882年 3月 輔國崇祿大夫 로 昇進, 行 禮曹判書가 되고, 戶曹判書를 겸하였다. 이어 訓鍊大將, 宣惠廳 堂上, 판三軍府史를 歷任했다.

壬午軍亂과 步政府 往來 [ 編輯 ]

1882年 6月 壬午軍亂 으로 아버지 흥선大院君 이 다시 攝政으로 再推戴되자 一時的으로 無爲大將(武衛大將)으로 事態收拾에 힘썼다. 好調 板書 · 宣惠廳 堂上(宣惠廳堂上)·知 三軍府 社(知三軍府事)· 訓鍊 大將을 겸하였다.

1882年 7月에 아버지 흥선大院君 이 拉致되어 淸나라 에 護送, 톈진 의 步政府(保定府)에 抑留되어 監禁生活을 한다는 消息을 接하다. 그는 大院君의 텐진 拉致期間 中 아버지와 書信 連絡을 주고받았다.

아버지 흥선大院君 淸나라 軍人과 文人들의 屈辱과 侮辱을 甘受하면서도 그는 祕密裏에 國內에 便紙 書信을 보내 自身을 救해줄 것을 要請하기도 한다. 이는 1973年 10月 4日 大韓民國 月刊 문학사상 資料 調査硏究室에서 發掘되어 世上에 알려지게 되었다. [6]

便紙를 쓸때 그는 順 한글 체로 썼는데, 이는 漢字나 英語로 썼다가는 發覺되었을 때 淸나라의 軍人들이 解釋할 것을 念慮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 來日 아침에 떠나 出發하면 이틀만에 天眞에 到着할 수 있다. 往復에 7~8日이 虛費하리라 한다. 이 배에서 다 말하기를 오늘날 太公(興宣大院君을 指稱)李 千兆에 들어가는 것이 크게 多幸이라 한다. 총총이 겨우 써서 숨겨두고, 前篇(傳便)을 기다려 부칠 생각이다. 動하지(충동당하지) 말고 安定하라

1884年 陰曆 7月 15日 淸나라로 끌려가는 배 안에서 몰래 쓴 便紙 [6]

텐진의 步政府에 監禁된 뒤에도 몰래 祕密裏에 便紙를 써서 人便을 통해 故國으로 부쳤다.

다시 뵈옵도 못하고 世上이 올이지 않以下리신이 紙筆을 다해야 寒心하오니다. 태평히지니시옵기 니니 발아옵니다. - 步政府 安置罪 以上서
(다시 뵙도 못하고 이승에서 내 목숨이 오래지 못하겠으니 종이와 붓을 마주 對하기 寒心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 步政府 安置罪 以上서

1884年 陰曆 10月 12日 步政府에서 몰래 쓴 便紙 [6]

민승호 의 兩者 민영익 흥선大院君 이 민승호 一家를 爆彈테러로 죽였다고 斷定하고 復讐하겠다고 다짐했다 [6] 한다. 이 消息을 接한 大院君은 바로 祕密便紙를 作成하여 아들 이재면에게 도움을 要請한다.

新聞紙의 警坪이( 경평군 )는 내 便이고, 영익이( 민영익 )는 딴 便으로 말하고, 영익이가 머리 깎았다 하면서 一番 奇別하여 怨讐를 갚는다 하였으니 우습다. 使臣 [7] 을 또 보내어야 되지, 안보내면 上監이 不孝의 이름을 면치 못할 것이니 부디 周旋하되 (올繡 있으면) 너더러 들어가라

1884年 날짜 未詳, 步政府에서 몰래 쓴 便紙 [6]

나가고 安易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上監 쳬면이 쳔下衣 빗치 나기시니 부디 잘 알외어니 一身을 살려다고....
(나 되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上監의 體面이 天下에 빛이 나겠으니, 부디 잘 아뢰어 내 한몸을 살려다오)

1884年 날짜 未詳, 步政府에서 몰래 쓴 便紙 [6]

大院君의 救助 要請을 祕密裏에 接한 興親王은 배便으로 1884年 6月 부터 텐진 의 步政府로 往來한다. 그해 12月 그는 仁川港 을 出國, 淸나라 에 幽閉中이던 아버지 흥선大院君 을 訪問하여 慰勞하고, 1883年 3月 에 一時 歸國하였다. 다시 그해 5月 에 다시 淸나라 에 가서 흥선大院君 을 奉養하다 歸國하였다.

이재면 推戴 未遂 事件 [ 編輯 ]

1883年 兵曹判書에 任命되었고 1885年 閔氏 政權이 親러, 親日 等의 性向을 보이며 淸나라 를 牽制하려 하자 러시아 를 牽制하려는 淸나라 政府와 위안스카이 等의 政治的 計算으로 4年餘 만에 歸國하게 되었다. [8] 大院君은 1887年 淸나라 위안스카이 와 結託하여 高宗 을 廢位시키고 큰 아들 李載冕을 擁立하여 再執權하려다가 失敗하였다. [3] 李在善 과 李載冕을 擁立하려던 推戴祈禱가 失敗로 돌아가면서 흥선大院君 은 長孫인 이준용 을 推戴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준용 推戴 試圖 亦是 水泡로 돌아갔다.

이러한 事件들이 연이어 터진 以後 興親王과 高宗 間의 關係는 疏遠해졌다.

壯年期 [ 編輯 ]

甲申政變의 失敗와 隱居 [ 編輯 ]

1894年 (高宗 31) 6月 特別히 上輔國崇祿大夫(上輔國崇祿大夫)로 昇進하여 領宗正卿과 영돈녕府使를 歷任했다.

1884年 김옥균 , 홍영식 , 서재필 等에 依해 甲申政變 이 發生하자, 開化派 와도 人間 關係를 形成했던 그는 政變 內閣의 議政府 左贊成 (左贊成) 兼 左右參贊이 되었다. 그러나 甲申政變 은 3日만에 鎭壓되었고, 그도 左贊成 兼 左右參贊에서 解任되었다. 判宗正卿의 職位를 받았으나 甲申政變 當時 高位職에 任命되었다는 理由로 閔氏 一派의 攻擊을 받았으며, 政變 關聯者들과 內通하였다는 疑心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國王의 親兄이라는 理由로 不文律에 붙여진다. 그 後 興親王은 7年間 雲峴宮 에서 蟄居하였다.

1887年 12月 첫 夫人 풍산洪氏와 死別하였다. 喪妻한 그는 57歲에 20歲인 驪州李氏 이인구의 딸과 結婚하였다. 驪州李氏는 그의 아들 이준용 보다 13살 年下였고, 며느리인 광산 金氏 보다도 5年 年下였다. 結局 雲峴宮 의 살림은 며느리 광산 金氏의 몫이 되었다. [9]

雲峴宮 蟄居生活 中 [ 編輯 ]

첫째 아들 映宣群 이준용

1892年 , 雲峴宮 에서 火藥이 터지고 여러 建物에 裝置된 火藥이 發覺된 事件이 發生하였다. 黃玹 명성황후 를 背後로 指目하였다. 黃玹은 雲峴宮의 爆彈 테러 事件을 명성황후 가 大院君 一家를 爆殺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主張하였다. [10] 이때 흥선大院君 의 舍廊채와 이재면, 이준용 富者의 居處에도 爆藥이 裝置되어 있었으나 多幸히 點火되지 않은 狀態에서 發覺되었다. 이는 흥선大院君 명성황후 의 오빠인 민승호 에게 爆藥을 보내 一家를 暴死시켰던 前例에 對한 政治的 報復劇이라는 批判이 提起되었다. [10]

1893年 그는 東學 農民軍이 上京하여 景福宮 앞에서 複合上疏運動을 벌이는 機會를 利用하여 이준용 을 王으로 推戴하려 하였다. 精巧 는 1893年 2月 11日 부터 2月 13日 까지 3日間 박광호를 小斗로 하는 約 50名의 東學敎徒들이 上京하여 宮闕 앞에서 敎祖 身元을 歎願하며 連坐示威를 벌인 事件을 大院君이 시킨 일이라고 主張하였다. 이때 精巧 는 大院君이 隱密히 東學黨 數萬 名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張差 不軌를 圖謀하여 그의 孫子 이준용을 (王으로) 推戴하려 했으나 結局 失敗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10]

1894年 6月 日本軍의 景福宮 쿠데타로 大院君이 執政하자 統理機務衙門(統理機務衙門)의 同文司堂上經理使(同文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 [3] 7月 14日 特別 加資되어 上輔國崇祿大夫(上輔國崇祿大夫)의 品階를 받고, 7月 15日 宮內府 代身에 任命됐다. 8月 13日 영돈녕元士(領敦寧院事)에 任命되었다. 이어 宮內府 大臣을 거쳐 1895年 8月 에 다시 宮內府 代身에 任命되었다.

乙未事變 前後 [ 編輯 ]

乙未事變을 일으킨 浪人들( 漢城신보 社屋 앞에서)

1895年 (高宗 32年) 乙未事變 이 일어났을 때 그는 亂에 加擔하지 않고 袖手傍觀하였다. 乙未事變 으로 明成皇后가 除去되자, 그는 흥선大院君 과 駐韓 日本 公使館 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密約에 依해 金弘集內閣(金弘集內閣 [11] )의 宮內府大臣이 되었다. [3]

1897年 大漢門 앞 명성황후 國葬行列.

명성황후 의 局長 때 그는 宗戚 執事(宗戚執事)로 任命되었고, 殯殿에서 王과 王子들이 曲을 할 때 王의 가까운 親戚으로써 喪服을 입고 哭하는 班列에 參與하였다. 이듬해 2月 初 宮內府 代身(宮內府大臣)을 辭退한 뒤, 總護使(總護使)에 任命됐다가 2月 中旬 高宗이 러시아 公使館으로 退去, 俄館播遷 이 일어나자 罷免되었다.

以後 영돈녕府使 (領敦寧府事)로 任命되었다. 1898年 1月 어머니 여흥부大夫人 에 이어 아버지 흥선大院君 의 臨終을 지켰다. 흥선大院君 은 죽기 直前 魚價가 大闕을 떠났느냐며 高宗의 行次 與否를 물었으나 그는 默默不答이었다. 흥선大院君 이 死亡한 直後에도 高宗에게 아버지의 臨終을 알렸다가 禍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沈默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大韓帝國 樹立 以後 [ 編輯 ]

1899年 (光武 3年) 9月 1日 思悼世子 가 장종대王으로 推尊되면서 9月 1日 부터 9月 29日 사이에 思悼世子의 4貸損에 該當되는 子孫들은 현주에서 翁主로 格上되거나 生前 品階보다 높은 品階를 받았다. 同時에 軍의 爵位를 받지 못한 高宗의 동항렬 人士들은 軍의 爵位를 받았지만 그는 除外되었다.

1900年 (光武 4年) 4月 완興軍(完興君)에 封해졌다. 그러나 乙未事變 의 關聯者로 指目되어 言官들의 彈劾을 받았다. 이재면이 乙未事變 에는 直接 參與하거나 同調하지 않았으나, 乙未事變으로 생겨난 第1次 김홍집 內閣에서 宮內府 大臣을 歷任한 것이 非難의 理由였다. 한동안 벼슬이 없던 그는 生活이 곤란한 處地에 놓였다. [12]

1902年 日本 에 亡命中인 長男 이준용 으로부터 生活費 支援要請을 받자 그는 임정규를 通해 充分하지 못한 額數의 生活費를 支援하였다. [13] 1907年 까지 李載冕은 별다른 官職도 職業도 없이 生計가 곤란하였다. 하지만 이준용은 亡命地에서 生命의 威脅을 느끼는 自身을 保護하지 못한 아버지 李載冕을 內心 怨望하고 있었다. 日本 은 이재면에게 生活費를 支給하여 王族으로 禮遇함과 同時에 그를 懷柔하려 하였다. 1907年 그는 동생 高宗으로부터 大訓이화장(大勳李花章), 서성장(瑞星章)을 받았고, 1907年 11月 27日 大韓帝國 陸軍 部長(副將)에 任命됐다. 이어 日本에 보내는 特別報聘使節團에 任命되고, 아들 이준용 은 陸軍 參將에 任命되어 隨行員이 되었다. 그해 11月 報聘使節團 과 隨行員 이준용 , 이달용 等을 帶同하고 日本 도쿄 에 다녀왔다.

1909年 大訓金尺大首長 (大勳金尺大綬章)을 받았다.

親王 進封과 强制 倂合 [ 編輯 ]

韓日合邦 直後 興親王과 側近들

1910年 8月 15日 韓日合邦 條約 署名을 不過 數日 앞두고 興旺(興王)에 封해져 이름을 이재면에서 이희(李熹)로 고치고, 合邦 恐怖 하루 前인 28日에 冊封式을 가졌다. 冊封式 다음날 日帝에 依해 王에서 降等, 世襲할 수 있는 공(公)族으로 分類되어 이희 공(李熹公)에 封해졌다.

그러나 當時 이미 鄭1品 上輔國崇祿大夫 의 地位에 있던 아들 이준용 은 그의 作爲와는 相關없이 男爵 의 地位를 받았다. 韓日 合邦 直後 莫大한 量의 合邦 公採金을 받았다. 그러나 朝鮮總督府 에 別途로 協力하거나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死亡 [ 編輯 ]

雲峴宮의 이로당에서 居住하다가 1912年 9月 病勢가 危篤해졌고 純宗은 全義(典醫)를 그의 집에 보내 往診(往診)을 시켰다. 德壽宮(德壽宮)에서도 李太王 高宗은 自身의 語의(御醫)를 보내 興親王을 진료하게 했다. 그러나 病勢는 甚해져 1912年 陽曆 9月 9日 에 67歲를 一期로 雲峴宮 正寢에서 病으로 病死하였다. 어느 病患으로 死亡했는가 與否는 알려져있지 않다. 그가 죽으면서 그의 工作 의 地位는 아들 이준용 이 相續하였다. 所生으로 映宣群 이준용 , 이문용 과 딸 1名을 두었다. 興親王이 죽자 高宗 은 親히 그의 殯所에 가서 喪服을 입고 哭을 하였다.

처음 그의 屍身은 京畿道 金浦郡 고란對面 (古蘭臺面) 풍곡리 野山 座곤(坐坤)에 安葬되었다가, 1921年 9月 1日 楊州郡 화도면 창현리(後日의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移葬되었다. 이때 처음 廣州郡 세촌面 水穀痢 計座에 安葬되었다가 다시 楊州郡 회암면 회암리 (後日의 회천읍 회암리)에 安葬되었던 夫人 풍산洪氏 亦是 弛張되어 合葬되었다. 그의 墓所 北西便, 이우 의 墓所 右側 언덕에 後日 흥선大院君 內外의 墓所가 里長, 造成되었다.

事後 [ 編輯 ]

興親王 이재면 神道碑

이재면의 居處는 雲峴宮의 영로당이었다. 그가 居處하던 雲峴宮 의 泳路黨은 1917年 그의 아들 映宣群 이준용 이 오랜 病치레 끝에 死亡하자, 이준용의 계실 광산 金氏가 그의 主治醫에게 事例로 주었다 한다. 이 主治醫는 金張法律事務所 代表辯護士 김영무와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의 아버지이다. 두 番째 夫人 驪州李氏는 29歲에 男便을 잃고 宗親會議 도움으로 혼자 살아가다 1978年 1月 8日 에 雲峴宮에서 死亡했다.

한便 그의 아들 映宣群 이준용 은 아버지 興親王 이재면이 死亡한 뒤에도 그는 殯所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아저씨뻘 되는 이재완 等에게 호된 叱責을 當하기도 했다. 이는 國王 의 親兄인 아버지가 自己 아들의 身元을 要請하지 못하고 刺客들의 日本 行도 막지 못한 點, 日本 亡命 中에 아버지의 充分한 經濟的 支援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經營하지 못한 데 對한 失望感 等이 複合的으로 作用한 것이었다. [14]

1920年 楊州郡 화도면 창현리(現, 南楊州市 화도읍 창현리)로 移葬되었다. 神道碑는 1919年 5月 세워졌다. 草創期에는 이희공電話 信徒悲鳴이라고 세웠지만 [15] , 後날 누군가에 依해 毁損되고 1948年 神道碑를 다시 세울 때는 흥친왕신도비로 題目 3글字가 바뀌어져서 세워졌다.

기타 [ 編輯 ]

親日 行跡 論難 [ 編輯 ]

2006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調査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06人 名單 에 包含되었다. 1910年 8月 22日 韓日 合倂 條約 締結에 關한 會議에서 大韓帝國 皇族 代表로 參席해 條約 締結에 同意하는 데 加擔 [16] [17] [18] 했다는 것이 그가 親日派로 指目된 理由였다. 그러나 興親王의 親日 行跡이나 恩賜金 守令이 日帝에 依한 懷柔策이지 興親王의 自發的인 行跡은 아니라는 異見이 提起되어 왔다.

2007年 1月 18日 이재면의 曾孫 李某氏가 自身의 增ㆍ祖父의 行爲를 親日行爲로 規定한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의 決定을 取消해 달라며 訴訟을 提起했다. [19] 親日反民族行爲 眞相糾明委員會가 日帝强占下 反民族行爲 眞相糾明에 關한 特別法에 根據해 舊韓末 自身의 曾祖父와 祖父의 行跡을 親日行爲로 規定해 發表하자, 2006年 11月 憲法上 保障된 人格權 等 基本權을 侵害當했다며 憲法訴願審判을 請求했다. [17] [20] [21]

1月 18日 서울行政法院에 따르면 李氏는 訴狀에서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위가 曾祖父와 祖父의 行爲를 日帝 强占期下에서의 親日反民族 行爲로 決定한 根據法律人 反民族特別法이 違憲이기 때문에 이 決定은 效力이 없어 取消돼야 한다"고 主張했다. [19]

李氏는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위의 決定이 違憲이라는 點에 對해서는 追後 提出할 違憲審判提請申請書에서 仔細하게 밝히겠다고 덧붙였다. [19] 그러나 2009年 10月 5日 그의 曾孫이 낸 訴訟은 大韓民國 憲法裁判所에서 却下되었다. [16]

2009年 10月 5日 裁判部는 "親日反民族行爲 決定을 通한 後孫의 人格權 侵害는 法律條項 自體에 依한 것이 아니라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의 調査에 따른 決定과 飼料의 公開라는 具體的인 執行行爲를 媒介로 發生하는 것이고 이에 對해서는 行政訴訟으로 救濟받을 수 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決定했다. [16] [18] "사자(死者)인 調査對象者에 對한 親日反民族行爲 決定이 있으면 死者와의 關係를 통해 스스로의 人格上을 形成하고 名譽를 지켜온 後孫의 人格權도 制限된다는 點을 認定하면서도, 이는 一般 行政訴訟의 方法으로 救濟받을 수 있다는 理由로 基本權 侵害의 直接性을 否認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17]

裁判部는 "이 事件 親日反民族行爲 決定은 該當 法律 條項 自體에 依한 것이 아니라 糾明委員會의 調査結果에 따른 決定과 이에 隨伴되는 調査報告書 및 飼料의 公開라는 具體的인 執行行爲를 媒介로 비로소 發生한 것"이라며 "이는 一般 行政訴訟의 方法으로 救濟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李氏의 審判 請求는 基本權 侵害의 直接性을 認定할 수 없다"고 밝혔다. [21]

이어 "親日反民族行爲 決定으로 인해 調査對象者 및 그 後孫의 人格權이 制限받게 되더라도 이는 附隨的 結果에 不過할 뿐 이것을 두고 一種의 刑罰로서 數値型이나 名譽刑에 該當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따라서 請求人의 基本權 侵害의 可能性을 認定할 수 없다. [21] "는 것이다.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發表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도 收錄되었다.

恩賜金 論難 [ 編輯 ]

親日派 나 積極的인 親日本 人士는 아니었으나 韓日 合邦 直後 83萬 엔(2010년 大韓民國 基準 166億 원)이라는 巨額의 恩賜金 [22] 을 받아 論難이 되었다. 이는 乙巳五賊 가운데 한 사람인 이완용 이 받은 15萬 엔, 정미七赤 가운데 한 사람인 송병준 이 받은 10萬 엔의 約 6, 7倍에 該當되는 額數라 指彈받는 原因이 됐다.

賞勳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朝鮮 王室과 雲峴宮 家計도

系譜 :    朝鮮 王室    興宣大院君의 4代祖    雲峴宮


異種
第16代 人組
已往
소현세자
二號
第17代 孝宗
俚謠
인평대군
이연
第18代 顯宗
李煜
福녕軍
耳順
第19代 肅宗
釐革
議員軍
利潤
第20代 警鐘
泥金
第21代 英祖
이훤
연령군
이숙
안흥群
履行
晉종
이선
莊祖
이온
落薦群
이진익
離散
第22代 正祖
異人
은언군
李瑱
은신군
이병원
理工
第23代 順調
李珖
電界大院君
耳垢
남연군
이영
文鳥
異變
第25代 哲宗
이창응
興녕群
이재원
완림軍
이기용
自作
李珖
의친왕의 7男
이환
第24代 憲宗
이정응
興완군
이재완
婉順軍 · 侯爵
이달용
侯爵
이해선 이철주
이최응
흥인군
이재긍
完營群
이지용
伯爵
이해충 이영주
伯爵
이하응
흥선大院君
이재면
興親王
이준용
映宣群
이우
의친왕의 2男
이청
長男
餘興 閔氏
여흥부大夫人
풍산 洪氏
情實
南陽 洪氏
情實
朴燦柱
박영효 의 孫女
異種
次男
驪州 李氏
繼室
광산 金氏
繼室
전순혁
消失
이진완
庶女
윤원선
윤치소 의 3男
이문용
次男
全州 李氏
長女
金仁圭
全州 李氏
次女
김두한
朱氏
消失
全州 李氏
三女
김규정
이희
第26代 高宗
이척
第27代 純宗
餘興 閔氏
명성황후
餘興 閔氏
순명효황후
해평 尹氏
순정효황후
寧越 嚴氏
순헌황귀비
이은
醫민태자
李瑱
長男
마사코
義民太子妃
耳垢
次男
利原
의친왕 9남의 長男
줄리아 멀록
1982年 離婚
慶州 李氏
貴人
이선
완親王
덕수 張氏
貴人
李堈
의친왕
沿岸 金氏
의친왕費
樹冠當 鄭氏
側室
이건
長男
이충
長男
요시코
1951年 離婚
이옥자
長女
이기
次男
函開封
側室
李甲
9男
淸州 양氏
貴人
이덕혜
덕혜옹주
소 마사에
소 다케유키
伯爵
全州 李氏
長女
조경호
全州 李氏
三女
조정구
계성月
消失
李在善
완銀群
이주용
全州 李氏
次女
이윤용
男爵


評價 [ 編輯 ]

豪宕한 性格의 아버지인 흥선大院君 이나 아들 映宣群 과는 다르게 悠悠한 性格을 가진 好人型의 人物로 그는 危險한 줄타기에도 不拘하고 老鍊한 處身으로 天壽(天壽)를 保存했다. [24] 한때 아버지 흥선大院君 은 그를 推戴하고 攝政이 될 計劃을 세웠지만 그의 優柔不斷한 性格과 好人的인 性格만큼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뒤에 아들 映宣群 준 이 동생 高宗 의 代案字로 指目되면서 이준용 高宗 의 사이에서 傍觀者로 남았다.

興親王을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6年 12月). 〈이재면〉 (PDF) . 《2006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162~170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2007年 9月 26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6月 18日에 確認함 .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01100094

各州 [ 編輯 ]

  1. 後에 化粧되어 흥원 西北쪽 納骨墓에 安葬되었다.
  2.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百姓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亡國史》 (다산초당, 2010) 167페이지
  3.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a0288a
  4. 每年 감과 橘이 처음 열리는 날 直後에, 朝鮮의 賃金이 柑橘 열리는 것을 記念하여 直接 主管하는 過去 試驗이다.
  5. 신병주, 奎章閣에서 찾은 朝鮮의 名品들 (冊과함께, 2007) 232페이지
  6. 京鄕新聞 1973年 10月 4日子 記事 7面
  7. 淸나라로 오는 眞珠紗
  8. daum 事前
  9. 며느리 광산 金氏 亦是 아들 이준용의 再娶였다.
  10.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2007.4, 京仁文化史) 315~316쪽.
  11. 第1次 金弘集 內閣
  12. "韓國의 名建物 (2) 雲峴宮", 京鄕新聞 1984年 10月 10日子 9面, 生活/文化面
  13.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31p
  14.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42쪽.
  15. 初期의 拓本은 서울역사박물관에 所藏되어 있다.
  16. http://news.nate.com/view/20091005n08047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7. http://news.nate.com/view/20091005n08088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8. http://www.ytn.co.kr/_ln/0103_200910051412251653
  19.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23704
  20. http://www.fnnews.com/view?ra=Sent1201m_View&corp=fnnews&arcid=00000921782211&cDateYear=2009&cDateMonth=10&cDateDay=05
  21. “保管된 寫本” . 2014年 1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2月 25日에 確認함 .  
  2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41120011&code=940100
  23.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135페이지
  2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28/2008032801159.html

參考 文獻 [ 編輯 ]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日省錄
  • 承政院日記
  • 高宗時代社
  • 조선신使命感(朝鮮紳士名鑑)
  • 國朝榜目
  • 한국통사(朴殷植 저)

關聯 書籍 [ 編輯 ]

  • 石坡學術硏究院, 《興宣大院君 飼料휘편 (前4卷)》 (현음사, 2005)
  • 김제방, 《흥선 大院君·明成皇后》 (지문사, 2003)
  • 연갑수, 《大院君 執權期 富國 强兵 政策 硏究》 (연갑수 저, 서울대학교 出版部, 2001) ISBN   978-89-521-0240-9
  • 연갑수, 《高宗代 政治變動 硏究》 (일지사, 2008)
前任
홍순목
朝鮮 攝政
1883年 ~ 1884年
後任
김병국
前任
이하응
(흥선大院王)
第2代 雲峴宮 宗主
1898年 ~ 1912年
後任
이준용
(映宣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