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寅洋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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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洋擾
날짜 1866年 10月 15日 ~ 1866年 11月 18日
場所
江華島 一帶
結果 프랑스의 政治的 目的 達成 失敗
외규장각 圖書 等 文化財 掠奪 및 破壞
朝鮮의 通商 修交 拒否 政策 强化
朝鮮의 勝利
交戰國
朝鮮 프랑스 第2帝國
指揮官
李龍熙
이경하
양헌수
이기조
신관호
한성근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海軍 大領 올리비에
海軍 中領 보쉐
兵力
約 15,000名 海兵隊 600餘 名
戰艦 1隻
巡洋艦 2隻
包含 2隻
通報艦 2隻
被害 規模
5名 死亡
2名 負傷
7名 失踪
3名 死亡
35名 浮上

丙寅洋擾 (丙寅洋擾 [1] )는 1866年 ( 高宗 3年)에 丙寅迫害를 名分으로 프랑스가 일으킨 戰爭이다. 흥선大院君 에 依해 進行된 天主敎 彈壓인 丙寅迫害 로 프랑스 宣敎師 9名이 死亡하자 이를 口實 삼아 天眞에 있던 프랑스 極東司令官 로즈 提督이 艦隊를 이끌고 朝鮮을 侵攻하였다.

1次 侵攻때는 漢江을 거슬러 올라와 楊花나루 와 西江까지 巡察만 한 後 조용히 물러갔으나 이내 電力을 補强하여 江華島를 侵攻한 後 占領하였다. 프랑스는 責任者 處罰과 通商修交를 要求했으나 興宣大院君이 拒否하자 兩側間에 物理的인 衝突이 發生했다. 1866年 11月에 退却하면서 강화읍을 破壞하고 放火하였으며 强化 离宮 外奎章閣 等에서 各種 武器, 數千卷의 書籍, 國王의 印章, 19萬 프랑 相當의 銀塊를 掠奪하였다. [2]

프랑스가 丙寅洋擾를 일으킨 本意는 天主敎 迫害에 對한 報復을 口實로 朝鮮의 門戶를 開放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意圖를 가짐은 戰爭 名分의 옳음과는 無關함 에 注意하여라.

이 事件으로 말미암아 天主敎에 對한 彈壓을 더욱 거세졌고 朝鮮 鎖國政策 은 한層 强化되었다.

背景 [ 編輯 ]

러시아의 南下政策 [ 編輯 ]

哲宗 의 在位기에 勢道政治를 하던 安東 金氏 門中은 天主敎에 對해 寬大한 便이었다. 이 時期에 베르뇌 主敎 , 리델 新婦 (1861年 入國) 等 프랑스 宣敎師가 많이 들어와 宣敎에 힘썼는데, 1861年 (哲宗 12年)에는 天主敎人의 數가 18,000名, 1865年 (高宗 2年)에는 23,000名을 헤아리게 되었다. [3]

한便 1864年 (高宗 1年) 러시아 人들이 咸鏡道 의 경흥부에 訪問해 朝鮮 政府에 通商을 要求하였다. 이런 갑작스러운 要求에 朝鮮 政府는 아무런 對策을 세우지 못하고 唐慌하고 있을 때, 當時 朝鮮에 宣敎를 目的으로 訪問 中이던 天主敎 宣敎師 들이 朝鮮 政府가 프랑스 , 英國 과의 同盟을 締結한다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3歲 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南下를 沮止할 수 있음을 主張했다. 하지만 러시아 側의 通商要求는 時日이 지나면서 사그러들었기에 朝鮮 政府는 安心하게 되었고, 宣敎師들이 提案했던 三國 同盟은 霧散되었다.

丙寅迫害(1866年) [ 編輯 ]

1864年에 執權한 흥선大院君 은 天主敎를 彈壓할 생각이 없었다. [4] 그러나 淸나라에서 天主敎를 迫害하는 方向으로 政策을 轉換한후 이런 雰圍氣에 便乘한 反對勢力들의 攻勢가 이어지자 政權 維持를 위해 1866年 天主敎 박해령을 宣布하였다. [5] 남종삼 · 丁義培 (丁義培) 等 朝鮮의 天主敎徒 8,000餘 名이 處刑되고, 프랑스 宣敎師 12名 中 9名이 處刑된다. [3] 迫害를 避해 1866年 5月 8日 朝鮮을 脫出한 리델 新婦 [3] 는 7月 6日 淸의 駐푸港에 到着했다. 그는 프랑스 極東艦隊(極東艦隊)司令官 로즈 提督 을 만나러 톈진을 向했다. 텐진에서 로즈를 만난 리델 神父는 프랑스 神父들의 殉敎消息을 傳하고 生存해 있는 다른 神父 두 名의 身邊을 保護하기 위해 卽刻 艦隊를 出航시켜줄 것을 要請했다. 로즈 提督은 인도차이나의 叛亂을 鎭壓하기 위해 出動한 主力艦隊가 돌아오는 대로 朝鮮 遠征을 斷行할 것을 約束했다. [6]

經過 [ 編輯 ]

피에르귀스타브 로즈 提督 (1812-1882)

侵攻 決意에서 일어난 天主敎 迫害에 對해 報告 받은 北京 프랑스 代理公使(代理公使) 벨로네(Henri de Bellonet)는 淸나라 總理衙門(總理衙門)의 首班이었던 恭親王 혁흔(恭親王 奕?)에게 書翰을 보내 抗議하며 朝鮮 征伐의 決意를 表明했다. [3] 하지만 淸나라 側은 “朝鮮은 비록 淸의 屬國이긴 하지만 예로부터 內政과 外交는 自治的으로 行해 왔다.”라는 式으로 朝鮮이 비록 屬國이나 '內政과 外交는 自主'임으로 請이 介入할 餘地는 實質的으로 없다는 式의 答信을 보내, 事件이 淸나라와는 無關함과 向後 이에 對해 어떤 일이 發生하더라도 淸나라 政府는 干涉할 수 없음을 프랑스 公使館 側에 通告했다. 한便 淸나라를 통하여 프랑스의 侵略 意思를 傳해들은 大院君은 彈壓을 더 甚하게 하는 한便 變更의 防備를 더 굳게 하였다. [3]

開戰 [ 編輯 ]

1866年 10月 19日 로즈 提督 이 引率하는 프랑스 軍艦 3隻이 리델 神父와 朝鮮人 信者 3名의 案內로 오늘날의 仁川 앞바다에 다다랐다. [3] 特히 리델 神父는 프랑스 軍艦이 朝鮮 沿岸에 出現하면 朝鮮의 天主敎 信徒들이 蜂起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지만 實際로 信徒는 한名도 찾지 못했다. [7] 巡撫營에서 프랑스 艦隊에 檄文을 보내니 回答 檄文이 왔다. 그에 따르면 宣敎師가 罪없이 죽었으므로 때문에 왔다고 主張하면서, 죽은 프랑스 天主敎會 宣敎師 9名에 갈음하여 朝鮮人 9,000名을 죽이겠다고 脅迫하였다.

1866年 10月 26日 只今의 마곡철교 下端部를 通過하여 漢城府 ( 서울 ) 近郊 楊花津(楊花津)·西江(西江) 一帶에 進出했다. . [3] 이로 인해 서울 都城은 恐怖와 混亂 속에 빠지게 되었다. [3] 이에 朝鮮 政府는 急히 御營大將 李龍熙 를 派遣하여 漢江 沿岸 警備를 强化하였다. [3] 프랑스 艦隊에서는 3隻의 소(小)艦隊로써 都城의 攻擊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附近의 地形만 偵察하고 11月 2日 淸나라 로 물러났다. [3] 朝鮮 政府는 더욱 軍備를 갖추고 漢江 一帶의 警備를 嚴하게 하였다. [3]

1865年 日本 나가사키 港 周邊에 碇泊 中이던 프랑스 艦隊의 모습. 中央에 보이는 것이 旗艦인 巡洋艦 게리에르(Guerriere)이다.

江華島 侵攻 [ 編輯 ]

그 해 11月 17日 로즈 提督은 프리깃함 게리에르 (Guerriere)를 包含한 7隻의 軍艦과 日本 요코하마 에 駐屯해 있던 海兵隊 300名을 包含한, 都合 1,230餘 名 假量의 海兵隊를 動員해 다시 江華島 附近의 勿雉島 (勿淄島) 近處로 進出하였다. [3] 11月 20日 에는 프랑스 陷穽 4隻과 海兵隊의 一部가 江華島의 갑곶진(甲串鎭) 附近의 高地를 占領한 뒤 漢江의 水路를 封鎖했다. 이어 11月 22日 에는 프랑스軍의 全君이 動員되어 江華城을 攻略해 占領하고 여러 書籍 等을 掠奪하였다.

이에 朝鮮 政府는 이경하 (李景夏)·이기조(李基祖)·이용희·이원희(李元熙) 等의 將帥들을 急히 楊花津 ·통진(通津)·廣城鎭(廣城津)·富平(富平)· 濟物浦 等의 여러 要素와, 문수산性 · 鼎足山城 等地에 派遣하여 都城 守備를 强化하면서 11月 25日 에는 프랑스 側에 公文을 보내 프랑스軍의 撤收를 要求했다. [3] 그러나 로즈 提督은 朝鮮 側의 宣敎師 處刑 等의 天主敎 彈壓行爲를 非難하면서 全權大臣의 派遣을 要求했다.

交戰과 退却 [ 編輯 ]

12月 2日 에는 120餘 名의 프랑스軍이 문수산성을 偵察하다가 埋伏 中이던 한성근(韓聖根) 等 朝鮮軍의 攻擊을 받고 27名의 死傷者를 내고 물러났다. [3] 12月 13日 프랑스軍은 다시 교동部(喬桐府)의 京畿水營(京畿水營)을 砲擊하고, 大領 올리비에의 指揮로, 앞서 江華府를 占領한 160餘 名의 프랑스 海兵이 鼎足山城 의 攻略을 試圖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埋伏 中이던 千摠(千摠) 양헌수 (梁憲洙) 및 射擊에 能한 500餘 名의 朝鮮軍 砲手들의 攻擊을 받아 6名이 死亡하고 30餘 名이 負傷을 입으면서 프랑스軍의 士氣는 크게 低下되었다. [3] [8] :189

로즈 提督은 朝鮮 侵攻의 無謀함과 더 以上의 交戰이 不利함을 깨닫고 撤收를 決定했다. 12月 17日 프랑스 軍은 1個月 동안 占據한 江華城을 撤去하면서, 長寧殿(長寧殿) 等 모든 官衙(官衙)에 불을 지르고 掠奪한 金銀塊와 大量의 書籍, 武器, 寶物 等을 가지고 갑곶진을 거쳐 淸나라로 撤軍했다. [3] [8] :189 다만 프랑스軍 記錄에선 丙寅洋擾 全體 期間 中 프랑스軍의 被害는 3名의 戰死者와 35名의 負傷者가 全部였다. [9]

影響 [ 編輯 ]

흥선 大院君

天主敎 彈壓 强化 [ 編輯 ]

이 事件에 憤怒한 흥선大院君 은 "西洋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을 西學인의 피로 씻음이 마땅하다" 고 하면서 楊花나루 옆의 잠두봉에 兄丈을 設置해 天主敎人들을 處刑하게 하였다. [10]

이때 數千名의 天主敎人들이 이곳에서 죽게 되었다. 잘린 목은 漢江에 던져졌고, 漢江물이 핏빛으로 變하였다 傳해진다. 잘려나간 머리가 山처럼 높이 쌓였다 하여 이곳은 切頭山(切頭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11] 丙寅洋擾로 말미암아 天主敎徒들에 對한 彈壓은 더욱 거세졌다.

鎖國政策 强化 [ 編輯 ]

結果的으로 프랑스軍을 물리친 일로 自信感을 가진 大院君 은 旣存에 固守하고 있었던 通商 修交 拒否 政策 을 더욱 强化하게 된다. 丙寅洋擾는 두 달 만에 끝났지만 江華島 外奎章閣 에 保管돼 있던 貴重圖書와 銀塊 19箱子 等을 약탈당했다고 한다. [12] 또한 이 事件으로 말미암아 大院君은 鎖國攘夷(鎖國攘夷) 政策을 더욱 固執하여 天主敎 彈壓에 더욱 拍車를 加하게 되었다. 한便 프랑스가 掠奪해간 외규장각 圖書는 2011年 永久 賃貸 方式으로 返還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洋擾"는 西洋 오랑캐가 騷擾를 일으킨 事件이라는 뜻이다. 신동준 《朝鮮의 王과 臣下 富國强兵을 論하다》 살림(2007) 547쪽 ISBN   978-89-522-0739-5
  2.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107
  3.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丙寅洋擾
  4.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丙寅邪獄〉
  5. [네이버 知識百科 ] 丙寅迫害 [丙寅迫害]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6. 장학근, 《朝鮮 平和를 짝사랑하다 ―붓으로 칼과 맞선 500年 朝鮮戰爭社―》 플래닛미디어 (2008) 287쪽 ISBN   978-89-92326-30-8
  7. 《Roze 提督(1866年 10月 6日)-> 海軍植民部 長官에게 보내는 便紙 (近代韓國外交文書編纂 委員會,近代韓國外交文書 ,第1卷,(東北亞歷史財團,2012)》
  8. 장지연, 《3日 만에 읽는 OK韓國史》 미네르바(2007) ISBN   978-89-90299-35-2
  9. "Expedition de Coree en 1866, <<Le Spectateur militaire>> 프랑스 (Ch. Martin, 1883) 265쪽
  10. 민경배 <韓國基督敎會社> 연세대학교 出版部 1995年 p98
  11. [1] Archived 2021年 8月 19日 - 웨이백 머신 [네이버 知識百科] 文明과 野蠻 (살아있는 韓國 近現代史 敎科書, 2011. 8. 8., 김육훈)
  12. [說往說來]丙寅洋擾 - 世上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世界日報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王權의 再確立과 鎖國策"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