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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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렬
尹雄烈
윤웅렬
윤웅렬
別名 者(字)는 營中(英仲)
號(號)는 磻溪(磻溪)
出生日 1840年 5月 18日
出生地 朝鮮 忠淸道 牙山郡 둔포면
死亡日 1911年 9月 22日 ( 1911-09-22 ) (71歲)
死亡地 日帝强占期 京城府 에서 兵士
本館 해평 (海平)
父母 윤취동 (簿)
安東 金氏 否認(生母)
高齡 申氏 否認(繼母)
配偶者 全州 李氏 否認(初吹)
李廷武(契聚)
다옥(側室)
김정순(側室)
子女 딸 윤경희, 아들 윤치호 , 아들 이름 未詳(腰絶), 아들 윤치왕 , 아들 윤치창
親戚 윤영선 (孫子), 윤영렬 (동생), 尹氏(누나)
宗敎 儒敎 ( 性理學 ) → 改新敎 ( 監理會 )
服務 朝鮮 陸軍
大韓帝國 陸軍
服務期間 1856年 ~ 1907年 10月
最終階級 大韓帝國 陸軍 部長
指揮 咸鏡南道 兵營 指揮長
咸鏡北道 兵營 指揮長
別技軍 指揮長
기타 履歷 兵曹 板書 , 日本 帝國 男爵
웹사이트 해평 尹氏 홈페이지

윤웅렬 (尹雄烈, 1840年 5月 18日 ( 陰曆 4月 17日 ) ~ 1911年 9月 22日 )은 朝鮮 末期의 武臣이다.

履歷 [ 編輯 ]

그는 일찍이 武科 에 及第한 後 第2次 修信使의 一行으로 日本에 다녀왔고, 1882年 부터 敎鍊甁臺 創軍을 指導하였다. 1884年 甲申政變 에 加擔하였다가 政變 失敗를 豫想하여 官職을 辭讓했다. 甲午改革 以後 警務使와 軍部大臣 等을 지냈다.

1897年 大韓帝國 樹立 後 法部 代身 , 高等裁判所 判事 軍部大臣 等을 거쳐 乙巳 勒約 以後 官職에서 물러나 1907年 에는 國債補償運動 에 參與하였다. 全羅道 全羅南道 全羅北道 로 分道되자 初代 全羅南道 觀察使 가 되으며, 初代, 4代 全羅南道 觀察使 를 歷任하였다.

1910年 (隆熙 4) 10月 韓日 合邦 條約이 締結되자 그는 朝鮮貴族 으로 男爵 의 爵位를 받았으나, 1911年 에 死亡하였다. 윤두수 의 次男 尹昕 의 7代孫으로, 知中樞府事 를 지내고 事後 議政府 撰定 에 贈職된 윤취동 (尹取東)의 아들이며, 경재 윤영렬 의 兄이다. 後日 大韓民國 第4代 大統領 을 지낸 윤보선 (尹潽善)은 그의 宗孫이었다. 韓日 合邦 直後 死亡했다. 者(字)는 營中(英仲)이고 號는 磻溪(磻溪), 本貫은 해평 이다. 忠淸南道 出身.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磻溪 尹雄烈은 1840年 5月 18日 ( 陰曆 4月 17日 ) 윤취동 (尹取東)과 安東金氏의 아들로 本貫은 해평 이다. 本來는 朝鮮 宣祖 때의 領議政 윤두수 의 둘째 아들 尹昕 의 7代孫이었으나 그의 家計는 沒落하였다. 6代祖 尹趣旨 同知中樞府事 , 5代祖 輪彩는 世子翊衛司 死語 를 지내고 事後 李朝 參判 追贈 되었으며, 高祖父 尹歲兼 敦寧府 冬至使 를 지냈으며, 再從祖父 윤득우 兵曹 參判 光州 府尹 을 지냈으나 김일경 과 親分이 있던 少論 신치운 의 文人이라 하여 順坦치 않은 官僚生活을 보냈다.

以後 京畿道 水原 에 居住하던 中 曾祖父 尹發議 臺에 火星 建設을 理由로 忠淸南道 天安 某産面 으로 내려왔고, 1791年 부터 1794年 까지 잠깐 郎廳 職을 지냈지만 더以上 官職에 오르지 못하고 말았다. 할아버지 윤득실은 水原城에 編入된 地域 儒生, 武士들을 相對로 取材 試驗을 할 때 여러番 凝視했지만 번번히 낮은 等級을 받고 말았다. 윤득실 은 後에 官職에 올라 通德郞 까지 올라갔지만 을 좋아하다가 38歲로 夭折하였다. [1] 다시 할아버지 윤득실의 셋째 아들인 아버지 윤취동 이 分家하면서 아버지의 臺에 天安郡 某産面에서 牙山郡 둔포에 定着하였다. 그러나 尹雄烈은 庶孼이었고, 後日 그에 對한 同僚 벼슬아치들의 差別의 原因이 된다.

어려서 孤兒로 자란 아버지 윤취동 은 自手成家로 財産을 모아 牙山郡 둔포면 에 땅을 마련하였고, 官職에 나가 限職인 知中樞府事 를 지냈다.

아버지 윤취동 은 本部인 高齡申氏와 死別하고 나이 40歲가 넘도록 아들이 없어 山에 祈禱를 드린 뒤, 後娶 安東 金氏 에게서 첫 아들을 얻고, 後에 둘째 아들을 얻었다. 첫 아들에게는 마을에 있는 웅달山의 이름을 따서 雄烈이라 지었고 뒤에 얻은 次男에게는 첫아들 雄烈과 이름字를 맞추기 위해(영웅) 英烈이라 지었다. [2] 그들 兄弟가 태어난 記念으로 웅달産銀 집웅달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幼年期에 尹雄烈은 儒敎 性理學 을 배웠다.

靑少年期 [ 編輯 ]

동생 윤영렬

윤웅렬과 그의 동생 윤영렬 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로 소문났다. 洞里에 도둑, 癡漢이 나타나면 무쇠와 절구 , 멧돌 等을 들어 怪力을 자랑하니 도둑들과 癡漢들이 怯을 내고 먼저 달아났다는 것이다.

體力이 剛健했던 그는 武官의 길을 걷기로 決心한다. 尹雄烈은 어려서부터 氣骨이 壯大하고 學問보다 武術에 關心과 才能이 있어, 17歲에 單身으로 上京하여 武科에 應試했다. [3] 1856年 ( 哲宗 7年)에 武科 (武科)에 及第하였다. 그와 그의 동생 英烈 이 官職에 進出하면서 다시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그 뒤 宣傳官 이 되었다. 少年期 때 眞사 이현표(李玄豹)의 딸 전의李氏와 結婚하고 딸 한名을 얻었다. 1861年 全州 李氏 이일영의 딸 李廷武(李貞武)를 小室로 받아들였다. 李廷武에게서 딸 윤경희 (尹慶姬)와 아들 佐翁 윤치호 (尹致昊)를 얻고, 妓生 出身인 첩 다옥(茶玉)이 있었다. 그 뒤 또다른 妾인 김정순 (金貞順)에게서는 일찍 夭折한 아들과, 連이어 윤치왕 윤치창 이 태어났다.

尹致昊는 1898年 6月 9日子 自身의 日記에 Greatmother의 還甲日이라고 日記에 記述해놓았고, 그 嫡母가 낳은 異腹 누나와 그의 男便 미스터 金이 왔다고 記錄해두었다. 庶子로 태어났던 尹雄烈은 亦是 自身의 庶子였던 윤치호 의 才能을 아깝게 여겨, 本部인 전의李氏가 죽자 바로 妾이었던 全州李氏 李廷武를 正室 夫人으로 올려주고 尹致昊를 赤字(嫡子)로 認定하였다. 그러나 1907年 3月 4日 本部인 전의李氏가 죽자, 尹雄烈은 本夫人을 아버지 윤취동 , 어머니 安東金氏의 墓所가 있는 둔포면 석곡리 山의 酉坐(酉坐)에 埋葬하였다.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1859年 (哲宗 10年) 5月 18日 哲宗 의 特命으로 通政大夫 가 되었으나 [4] , 곧 折衝將軍으로 職級이 改正 任命되었다. 같은 5月 18日 副護軍에 補職되었다. 5月 23日 兵曹 의 薦擧로 五衛將 에 任命되고, 다시 같은 날 兵曹 의 建議로 僉知 中樞府 四가 되어 五衛將 을 겸하였다. 1859年 6月 23日 都城의 南門 을 맡는 濫訴僞裝(南所衛將)에도 兼任되었으며, 7月 5日 病으로 일을 보지 못한다는 兵曹의 建議에 依해 兼職하던 五衛將職과 남小委長職에서 解任되었다. 1860年 (哲宗 11年) 6月 3日 僉知 中樞府 社(僉知中樞府事)에 任命되었다가 1861年 1月 8日 病으로 職務를 遂行하지 못한다는 兵曹 의 系로 免職되었다. 1861年 (哲宗 12年) 6月 忠淸道 監營 中軍 公州 中軍 (忠淸道監營中軍兼公州中軍), 62年 咸鏡北道 北靑 兵馬 虞侯 (北靑兵馬虞侯) 兼 討捕使 (討捕使) 等을 지냈다. 그 뒤 閑職을 轉轉하던 尹雄烈은 高宗 卽位 後 흥선大院君 에 依해 拔擢되었다. 1864年 折衝將軍 이 되었다. 無關이면서도 學識이 있었던 그는 박규수 의 門下에 出入하며 新學問을 接하였고, 뒤이어 劉大致 오경석 의 門下生이 되었다. 이들의 門下에서 김옥균 , 김홍집 , 김윤식 , 어윤중 , 박영효 , 유길준 等을 만나 親分을 쌓게 된다.

1872年 (高宗 10年) 11月 御營廳 의 技師長(騎士將)李 되었으나 身柄을 理由로 遞職되었다. [5] 1878年 (高宗 15年) 5月 통리氣門衙門 慘事(統理機務衙門參事), 部令館(副領官)을 거쳐 그해 7月 外職人 南陽府社 (南陽府使) 等을 지냈다.

賂物과 背景이 없으면 昇進하기가 쉽지 않았던 時代에 胎生的 缺陷을 지닌 그가 出世한 것은 奇跡에 가까웠다. [6] 그가 가난한 庶孼 出身이라는 理由로 甚하게 差別待遇를 받았고, 同僚들로부터도 侮辱的인 待遇를 받는 것은 偶然히 아들 윤치호 가 目擊하고 그에게 影響을 준다.

尹雄烈은 自身이 庶孼에다가 武官이었고, 武官의 職責 亦是 賤待받던 職責이었으므로 아들만큼은 文官으로 키우려 努力하였다. 아들 尹致昊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고 官僚가 되려는 抱負를 가지고 學業에 熱中하였다. 그러나 尹致昊는 김정언의 門下에서 性理學을 배웠지만, 傳統敎育에 바탕을 둔 過去에는 그다지 戀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아들 윤치호 어윤중 의 門下에 보내 受學하게 했다.

官職 進出 [ 編輯 ]

彈劾과 파란 [ 編輯 ]

尹雄烈의 親筆 便紙書信

그의 官職 生活은 順坦치 않았다. 南陽 府使 時節에는 御史 의 監察에 걸렸고, 南兵使 在職 中에는 苛斂誅求를 하고 事務를 늦게 處理한다고 咸鏡道 觀察使 의 彈劾을 받았다. 그리고 報告書의 格式이 틀렸다고 議政府 의 彈劾을 받았다. [6] 以後에도 흥선大院君 이 失脚한 뒤에도 誠實性과 手腕을 發揮해 高宗 명성황후 의 寵愛와 信賴를 얻었다. 그러나 勢道家도 아니며 背景도 없던 그의 實力과 武藝에 周邊人들의 嫉妬心과 險談에 시달림당했다.

그래도 屈하지 않고 不快한 表情 한番 나타내지 않았다. 尹雄烈은 高宗 의 信任을 받으며 버텼다. [6] 1879年 長男 尹致昊가 晉州 姜氏의 딸과 結婚시켰다. 그러나 姜氏는 兩班家門度 아니었고, 윤치호 몰래 外道를 하였다. 自身이 庶孼이었으므로 姜氏가 兩班家門이 아닌 것에는 크게 介意치 않았지만 며느리의 外道를 알고 나서는 分離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介入하기 前에 尹致昊는 아내 姜氏의 外道 事實을 알고, 1885年 親庭으로 되돌려보냈다. 姜氏는 1886年에 死亡한다. 1880年 7月 第2次 修信使가 派遣될 때 禮曹參議 金弘集을 遂行하여 別軍官으로 다녀왔다.

日本 硏修와 歸國 [ 編輯 ]

윤웅렬 ( 1907年 )

1880年 (高宗 17年) 初 別軍官 (別軍官)에 任命되었다. 80年 陰曆 7月 도쿄 흥아회 (興亞會)가 朝鮮 人士들을 招請할 때 別軍官의 身分으로 第2次 修信使 김홍집 (金弘集) 等의 隨行員 으로 一行을 따라 濟物浦 에서 배便으로 日本 에 건너갔다.

함께한 이조연 (李祖淵), 姜瑋 (姜瑋) 等과 함께 東洋 三國의 合力을 趣旨로 하는 흥아회 모임에 參席하였으며, 도쿄 에 머물고 있던 開化勝 이동인 의 紹介로 日本 在野 人士들과 接觸하였다. 無關인 尹雄烈은 近代的인 軍隊의 組織과 訓鍊에 각별한 關心을 가지게 되었다. [3] 그는 中國語를 流暢하게 驅使하였고, 若干의 日本語도 서투르게나마 驅使했다고 한다.

尹雄烈은 東京 滯留期間에 이조연, 姜瑋(姜瑋) 等과 함께 東洋三國의 合力을 趣旨로 하는 흥아회(興亞會)에 參席하여 日本 在野人士들과 接觸하기도 했다. [7] 또한 그는 當時 도쿄에 머무르고 있던 開化勝 李東仁의 紹介로 主日英國公使館의 어네스트 샤토禹(Ernest M. Satow) 書記官과 接觸하기도 했다. [3]

샤토友誼 日記에서 '李東仁이 尹雄烈을 데리고 찾아와 點心을 함께 했다는 것과 尹雄烈이 서투른 日本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尹雄烈은 分明히 開化派에 屬하는 人物이었다는 것 [8] '이다. 隨行員의 身分이었지만 日本 의 새로운 文物과 軍事 施設을 視察하였고, 日本 滯留 中인 1881年 統理機務衙門 慘事(參事)에 任命되었다. 그는 돌아와 1881年 4月 敎鍊甁臺 創軍에 參與한 뒤 新式軍隊를 指導하였다.

그는 形式的인 兵士 訓鍊에서, 體育을 통한 體力 强化 目的으로 兵士들에게 運動과 鍛鍊을 시켰다. 그러나 그의 新式 軍隊 조련 및 體力 鍛鍊을 두고 日本 和라는 重傷誹謗, 陰謀가 나돌기도 했다.

1881年 朝鮮 政府에서 다시 日本 調査視察團 派遣을 推進하자 그는 아들 윤치호 를 積極的으로 推薦해 視察團에 합류시켰다. 目的은 日本 留學이었다. [9] 1880年 臺 尹雄烈은 高宗 이 信賴하던 몇 안되는 武裝이자 開化派와도 깊은 關係를 맺고 있는 人物이었다. [9] 그해 5月 17日 部令館(副領官)에 任命되었다.

尹雄烈은 庶孼이기는 했지만 國王의 寵愛를 받는 朝廷의 高官이었고, 아들 윤치호 어윤중 의 弟子로 소문난 秀才였다. [9] 그러나 아들 尹致昊는 過去에 及第할 與件은 充分히 갖춘 狀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庶孼의 子息이라는 굴레와 不當한 待遇를 克服할 수 없다고 判斷했다. [9] 當時 그는 高宗과 閔妃의 寵愛를 받았지만 勿論 自身은 自己 能力에 맞는 待接을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9]

別技軍 創設 [ 編輯 ]

1881年 御營廳 中軍을 거쳐 그해 5月 7日 御營廳 慘事(參事)가 되었다. 같은 해 咸鏡南道 兵馬節度使 가 되었다가 다시 中央으로 돌아와 別技軍 創設에 加擔하여 5軍영(五軍營)에서 志願者 80名을 選拔하여 別技軍을 만들고, 座副領官(左副領官)으로서 別技軍의 運營을 主導했다. 이어 訓鍊院 下都監(下都監) 身柄大將(新兵隊長), 別技軍의 敎鍊소 右部領官 等을 지냈으며, 以後 新式 軍隊를 養成하면서 日本 과 癒着하였다. 後날 別技軍에 對한 不滿에서 始作된 壬午軍亂 때는 軍人들이 日本 公館을 襲擊할 計劃으로 움직인다는 事實을 日本 側에 미리 通報했고, 騷擾가 擴大되어 韻웅렬의 집이 부서지고 日本公館度 襲擊당하자 公使 一行과 함께 나가사키 로 避身했다. 元山으로 避했다가 日本 僧侶 이사카瓦家 貨物처럼 가마니로 말아서 日本으로 密航시켰다는 말도 있다. [10] [11]

1881年 5月 7日 座副領官(左副領官)이 되었다가 陰曆 尹7月 15日 京畿道 南陽 府使 (南陽府使)로 發令되었다. 그러나 그는 陸軍 參領館(參領官)의 階級은 維持하였고, 別技軍 의 訓鍊에 隨時로 關與하였다.

1882年 別技軍의 實質的인 責任者가 되었다. [11] 以後 左部領官(左副領官), 前靈長(前營將 [12] [13] )을 거쳐 그해 5月 다시 統理機務衙門史를 거쳐 南陽府使로 任命되었으나 病을 理由로 그해 6月 遞職되었다. 그해 陰曆 윤 7月 다시 南陽府使가 되었다. 8月 27日 에는 高宗 이 親히 別技軍 騎兵隊의 技藝를 試驗瑕疵, 尹雄烈은 陸軍 正領官의 한 사람으로 試驗에 參與하였다. 1881年 9月 에 發生한 李在善 推戴 事件에 連累되어 義禁府 에 投獄, 9月 20日 에는 李在善 과 對質審問을 받았으나 嫌疑없음이 밝혀져 풀려났다.

尹雄烈은 日本語 , 中國語 에도 能通하였다. 當時 日本 에 調査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派遣된 아들 윤치호 는 農業學校로 豫定되어 있었다. 그러나 尹雄烈은 아들의 才能을 社長시킬까 念慮하여 이노우에 가오루 , 후쿠자와 유키치 等을 說得하여 都塵샤 에 입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初期 官職生活은 順坦치 않았다. 隨時로 彈劾과 疾視가 繼續되었다. 그러나 尹雄烈은 高宗 의 信任을 받으며 버텼다. 南兵使로 在職 中 議政府 의 感謝와 彈劾을 받은 眞正한 理由는 鄕校에서 세운 향헌費를 헐어버렸으며, 法대로 軍人을 徵發하고, 鄕校를 軍隊 訓鍊場으로 만든 것 때문이었다. [14] 그는 保守的인 傳統 兩班 家門의 行世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14]

그는 周邊에서 人脈도 없었고, 緣줄도 없었고 順順히 自身의 能力으로 官僚生活을 보냈다. 邊方의 滿洲族 馬賊이 쳐들어오면 주저않고 討伐해서 쫓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所信 있고, 破格的인 行動을 하면서 尹雄烈은 官僚 世界의 險難한 波高를 헤쳐 갔다. [14]

壬午軍亂과 亡命, 歸國 [ 編輯 ]

1882年 壬午軍亂 으로 日本 亡命中, 長男 윤치호 (오른쪽에 앉은 이)와 함께
작은 배로 脫出한 日本 公使館員

1882年 6月 病이 있다는 理由로 言官들의 彈劾을 받고 南陽 都護府使 (南陽都護府使)에서 罷職당하였다.

1882年 (高宗 20年) 壬午軍亂 이 일어나자 庭園(偵員) 이승모(李承謨)를 보내 情勢를 確認한다. 이어 이승모를 日本 公使館에 보내 郡民들이 日本公館을 襲擊할 計劃을 세우고 있다는 情報를 入手하여 政府의 指示로 日本 辦理工事(辦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郡民들이 日本公館을 襲擊할 計劃을 세우고 있다는 消息을 通報하고 自衛策을 講究할 것을 要請했다. [15] 郡民들이 親日派 人物들의 집을 破壞하고 日本 公使館을 急激하자 그는 漢城府 를 脫出하여 元山을 거쳐 釜山으로 가서, 박제경(朴齊絅)과 日本軍 中尉 가이즈(海津)의 周旋으로 日本 나가사키縣(長崎縣)으로 亡命했다. [15]

壬午軍亂 으로 日本 에 亡命한 그는 留學 中이던 아들 윤치호 와 一時的으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日本 이 門閥 打破 및 人材 登用과 政治犯 釋放을 朝鮮 調整에 要求하자 곧 復權되어 歸國하였다.

1882年 12月 1日 別軍職에 任命되었다가 12月 2日 僉知가 되었다. 그 뒤 12月 19日 다시 南陽 府使 로 除授되었다. [16] 1883年 (高宗 21年) 陰曆 3月 17日 다시 咸鏡南道 兵馬節度使 로 發令을 받았다. [17] 1884年 陰曆 1月 警, 통리軍國衙門에서 親騎衛 軍士를 自體 推薦토록 狀啓를 올려 王의 允許를 받았다. [18] 壬午軍亂이 失敗한 後 歸國하여, 김옥균 (金玉均) 等 開化黨 人物들과 가깝게 지냈으나 組織에 直接 參與하지는 않았으며 그들의 急進的이고 革命的인 行動에는 反對하여 愼重論을 펼쳤다. [15] 그는 甲申政變의 失敗를 미리 豫見하였다고도 한다.

甲申政變 直前 [ 編輯 ]

古筠 김옥균

그는 朝鮮 社會가 賣官賣職, 血緣과 學緣, 地緣에 依한 人事 採用 等으로 腐敗했다고 보고, 腐敗한 體制를 一掃하기 위해서는 革命, 改革이 必要하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甲申政變 主動 勢力들의 年齡이 너무 어리다는 點과 動員할 軍事力은 自身의 軍事力과, 김옥균 , 홍영식 , 박영효 , 서재필 , 서광범 等 집안의 財力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絶望한다. 以後 그는 現實에 安住하게 되었고, 아들 윤치호 는 아버지가 所信도 神意圖 없다며 反感을 들고, 대들며 따지기도 했다.

以後 穩健開化派 로 活動하며 1884年 7月 嘉善大夫 (嘉善大夫)로 昇進하고, 7月 27日 摠戎廳 中軍 에 任命되어 漢城 으로 上京했다가 다음날인 7月 28日 親軍全英 正領官 (親軍前營正領官)이 되었다. 그해 8月 同知中樞府事, 8月 16日 同知訓鍊院事, 8月 25日 親軍全英 禹正領官(親軍前營右正領官) 等을 歷任하였다. 9月 14日 弓術에서 命中하자, 9月 16日 高宗 의 名으로 努力의 功勞로 特別히 嘉義大夫 로 昇進하였다.

이番에 全榮 上番 兵丁의 調鍊을 보니, 활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맞추고 걷고 치는 것이 자못 볼 만하였다. 여러 해 努力하고 매우 애쓴 것이 假想하니, 全 南兵使 윤웅렬(尹雄烈)을 特別히 가자하라. [19]

1884年 陰曆 10月 23日 漢城府 堂上에 落點되었으나 別軍職 으로 任命되었다.

甲申政變 直前 開化派가 政變의 武力 基盤으로 세 個의 部隊를 準備하고 있었다. 光州留守 박영효 가 이끄는 親軍營 電影과 後榮의 部隊와 咸鏡南道兵士 尹雄烈이 指揮하는 北靑郡이었다. [20] 親軍營의 兵力이 全英, 後榮 합쳐서 1000名, 北靑郡이 500名이었다. [20] 그러나 그는 北靑의 南兵營 軍을 全部 動員하지 않고 一部 兵力만 데리고 南下한다.

甲申政變 前後 [ 編輯 ]

그러나 守舊派度 낌새를 눈치채고 朴泳孝를 光州優秀에서 解任시켰다. 그러자 開化派는 高宗 을 說得하여 尹雄烈의 部隊를 上京시켜 高宗의 親衛軍으로 삼도록 한다. 그러나 마지막 瞬間 守舊派의 猛烈한 反對에 逢着한다. [20] 高宗은 北靑郡 500名 中 250名을 돌려보내라는 命令을 내린다. 그러자 尹雄烈은 발을 뺀다. [20] 윤웅렬과 尹致昊는 開化派에 對한 高宗의 支持가 確固하지 않은 以上 政變이 失敗할 可能性이 크다고 判斷했다. [20]

擧事 한달 前, 尹雄烈은 北靑郡 全員을 北靑 으로 되돌려보내고 70名 만을 남겼다. 政變 1週日 前에는 甲申政變의 主力이 된 親軍營 전영의 指揮官職을 辭任했다. [21] 그러나 國王 側에 政變陰謀를 고자질하지는 않았다. [21] 그는 김옥균 , 홍영식 等과 親分이 있었지만 이들이 失敗할 것을 豫想하며 不安해하였다. 한便 그의 이같은 態度를 두고 論難이 많았다. 그러나 유영렬은 '尹雄烈은 1884年 甲申政變 當時에는 分明히 開化派에 屬하는 人物 [8] '로 보았다. 日本에 滯留 中이던 尹雄烈은 日本語를 익히는 한便 李東仁의 周旋으로 만난 駐日本英國大使館의 어네스트 사토 書記官과 자주 接觸하였다.

1884年 10月 김옥균 等의 甲申政變 에 參與하여 刑曹判書 를 맡았으나 [22] 甲申政變 이 進行되는 동안에 아들 尹致昊에게 外勢에 依支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으며, 少數의 日本軍으로는 多數의 淸나라 軍隊에 對抗할 수가 없다는 等 6가지 理由를 들어 失敗할 것이라고 否定的으로 보았다.

生涯 後半 [ 編輯 ]

亡命과 歸國, 流配生活 [ 編輯 ]

甲申政變 은 失敗했고, 甲申政變 3日 뒤 政變의 失敗로 그는 능주 (綾州)로 流配되었고 [22] , 大司憲 윤성진 (尹成鎭)은 甲申政變의 與黨으로 신기선(申箕善)·윤웅렬(尹雄烈) 等을 處罰할 것을 主張하였다. [23] 그러나 풀려나 곧 漢城府 左尹이 되었다.

以後 그는 隨時로 壬午軍亂 甲申政變 에 同調한 戰力을 놓고 隨時로 攻勢의 對象이 되었다. 아들 윤치호 亦是 生命의 威脅을 感知하고 留學을 目的으로 1885年 中國 상하이 로 떠난다. 그 뒤 아들 치호는 中國과 美國에서 留學한 뒤 歸國하게 된다. 1885年 1月 다시 召喚되어 美國 公使館 近衛隊腸이 되었으나, 다시 繼續된 彈劾을 받고 1884年 6月 全羅南道 능주 로 다시 情配當했다. 그러나 司憲府 司諫院 에서는 1894年 까지 여러 番 그에게 罪를 줄 것을 請하는 彈劾 上疏를 올렸으나 高宗 이 듣지 않아 危機를 謀免하였다. 1894年 (高宗 32年) 6月 釋放되었다. 7月 6日 漢城으로 돌아왔다.

1894年 淸日 戰爭 김홍집 의 親日 內閣이 들어서자 警務使 (警務使)를 거쳐 軍部大臣 의 자리에 올랐다. [22] 이어 그의 아들 윤치호 學部 協辦 에 올랐다. 그해 7月 尹雄烈은 護軍을 거쳐 8月 17日 親軍壯衛營 丙方(親軍壯衛營兵房)李 되었으나 9月 8日 身柄을 理由로 辭職하여 高宗이 允許하였다. 그러나 9月 14日 다시 病房에 任命되었다. 그러자 尹雄烈은 9月 20日 身柄을 이우로 辭職하여 免職되었다. 9月 말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11月 다시 警務使가 되었다.

甲午更張 以後 [ 編輯 ]

1895年 (高宗 33年) 第3次 金弘集 內閣 警務使 (警務使)로 任命되었다. 그해 1月 동지중추원사 , 2月 경상좌도 兵馬節度使 를 歷任하였다.

乙未事變 以後 甲午更張 軍部大臣 으로 在職中, 10月 12日 美國 公使를 비롯한 駐朝鮮 美國 外交官들의 協力을 얻어 高宗 을 宮城 밖으로 모셔나와 親日 政權을 打倒하고 새 政權을 樹立하려던 親美派 가 主導하여 發生하는 춘생문 事件 (春生門事件)에 呼應, 積極 內通했다가 失敗하자 元杜尤 의 집에 避身해 있었다. 그 뒤 中國 으로 逃避, 상하이 (上海)로 건너갔다. [15] 상하이 亡命 生活 中, 그는 武藝에 能하였으므로 朝鮮 에서 김홍집 이 보낸 親日 暗殺團을 스스로 물리친 뒤 隱身하고 있다가 배便으로 仁川港 에 돌아왔다. 1896年 2月 歸國 直後, 大韓帝國 中樞院 1等衣冠(中樞院一等議官), 3月 24日 軍部 協辦 에 任命되었다. 4月 陸軍 富寧 에 任命되어 親衛軍 第1聯隊長이 되었다.

그 해 5月 陸軍 參將(參將)으로 特進, 軍部 協辦(軍部協辦)에 任命되었으며 軍部 大臣署理事務(軍部大臣署理事務)·法部 協辦· 議政府 撰定 等을 兼任했다. [15] 1896年 6月 26日 에는 全羅南道 觀察使 에 任命되었지만 固辭하다가, 그 해 9月 2日 全羅南道 觀察使 (全羅南道觀察使)로 나갔다. 全南 觀察使 在職 中 選定을 베풀어 善政碑가 建立되었다. 尹雄烈의 善政碑는 광주향교 옆에 세워졌다. 7月 18日 特命으로 全羅南道 觀察使 로 兼任 全羅南道裁判所判事(兼任全羅南道裁判所判事)에 任命되었다.

全羅南道 觀察 社 在職 當時 그는 日本 에서 건너온 僧侶 오쿠무라 엔신 (奧村圓心)을 後援, 定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오쿠무라 엔신 光州 不老洞에 본원사(本願寺, 日本 혼간지로부터 由來函)를 建立하였고, 以後 엔싱의 누이인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가 건너와 敎育, 慈善事業을 펼쳤다. 그는 日本 人 男妹에게 朝鮮 社會의 開化의 必要性을 力說하였는데, 그가 軍部大臣으로 離任하고 간 뒤에도 오쿠무라 이오코 1898年 본원사 敷地 안에 '오쿠무라實業學校'를 設立하였다. 1897年 高宗 이 國號를 朝鮮 에서 大韓帝國 으로 바꾸자 國號만 바꾼다고 하여 없던 氣像이 나타나느냐며 懷疑的인 視角으로 바라보았다.

1898年 (光武 1年) 潤 3月 17日 中樞院 一等衣冠에 任命된 뒤 5月 警務使에 任命되어 觀察社稷을 兼任하다가 6月 3日 漢城 으로 召喚되었다. 그해 6月 17日 內部協辦(內部協辦), 9月 19日 兼任 內部大臣 서리事務가 되었으며, 10月 9日 後任 內部大臣을 임명하지 못함에 따라 다시 內部大臣 서리事務를 兼任하였다. 以後 大韓帝國 에서 軍部 代身(軍部大臣) 等 要職을 맡았다.

大韓帝國 樹立 以後 [ 編輯 ]

첫 夫人 全州李氏(오른쪽), 長男 윤치호(가운데), 며느리 南浦白氏 백買戾(왼쪽) 等(1907年)
家族 寫眞, 左路부터 孫子 윤영선 , 윤웅렬, 長男 윤치호 , 맏孫女 윤봉희 順

1897年 (建陽 1年) 法部 代身 兼任 高等裁判所裁判長을 거쳐 軍部大臣에 任命되었다. 1898年 (光武 1年) 5月 21日 다시 警務使가 되고, 6月 17日 內部 協辦 에 任命되었다가 그 해 10月 法部 協辦 이 되었다. 그 해 9月 19日 內部協辦으로 內部大臣署理事務를 兼職하다가 12月 다시 法部 協辦이 되었고, 곧 高等裁判所 判事에 兼任되었다. 이틀 뒤 다시 議政府 찬정이 되었으나 스스로 辭職하였다. 그 뒤 다시 議政府 撰定에 任命된 뒤 그해 11月 兼 警務使를 兼任하다가 議政府 贊政 兼 法部大臣, 高等裁判所 判事, 陸軍 參將(參將)을 거쳐 다시 議政府 찬정이 되었다.

그러나 獨立協會 會員을 斗頓한다는 理由로 척新黨의 論斥을 받기도 하였다. 1899年 1月 宮內府 特進官, 貴族遠景(貴族院卿), 그해 5月 다시 宮內府 特進官을 거쳐 10月 軍部大臣이 되었다. 1900年 警務使에 任命되었다.

1901年 (光武 4年) 1月 全羅南道 觀察使 가 되었다. 이때 全羅南道 에 賦課된 8萬兩을 納付하지 못한 罪初 前任 觀察使 조종필(趙鍾弼)李 罷免된 狀態에서 赴任하였다. 道內 財政이 좋지 않은 것을 確認한 尹雄烈은 全羅南道 에 凶年이 들어서 稅金 納付가 어려움을 呼訴하고, 全羅南道 內에서 가장 環境이 좋지 않은 郡縣의 現況을 골라서 調整에 보냈다. 1902年 2月 宮內府 特進官 에 任命되어 內職으로 召喚된 뒤 같은 달 特進官으로서 平理院 裁判長事務(平理院裁判長事務)를 지내고, 10月 大韓帝國 國軍 元帥府 軍務局總長, 11月 平理院 裁判所長 事務 臨時署理가 되었다. 1903年 初 다시 軍部大臣에 任命되었으며, 이어 內臟遠景事務(內藏院卿事務)를 겸했다. 1903年 軍部大臣으로 元帥府검사국總長事務(元帥府檢査局總長事務)에 任命되어 元帥府 검사국總長 事務를 兼任했다. 그해 7月 元帥府 記錄局 總長을 거쳐 10月 陸軍 部長(陸軍副將)으로 昇進했다. 1903年 10月 元帥府 檢査國 總長을 거쳐 1904年 1月 다시 軍部大臣이 되었다.

1904年 (光武 7年) 다시 議政府贊政이 되고 그해 7月 23日 서리農商工部大臣事務(署理農商工部大臣事務)를 兼任하였으나 이틀만에 農商工部大臣署理職에서 解任되었다. 8月 에는 兼任하던 서리내장원경事務에서 免官되었고, 參謀部 部長에 任命되었다. 9月 參謀部 部長이 되었다가 參謀部總長署理(參謀部摠長署理)를 겸하였으며, 1905年 2月 軍部 饌母管을 거쳐 臨時軍部大臣이 되었다가 1905年 6月 中樞院贊意가 되고 勳 2等에 徐薰되었다. 그러나 러일戰爭 무렵 政界를 隱退한 後 基督敎 에 歸依하였다.

政界 隱退 [ 編輯 ]

1905年 (光武 8年) 3月 强化育英學校에 寄附金 50원을 獻納하다. 1905年 10月 乙巳保護條約 이 締結되자 그는 不當한 條約 締結은 있을 수 없다며 高宗 에게 建議하였으나 默殺되었고, 條約은 締結되었다. 尹雄烈은 乙巳 條約 締結者들의 處罰을 建議했으나 亦是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10月 尹雄烈은 國民敎育會 에 寄附金 100원을 寄附하고, 바로 漢城府 로 가 辭職書를 體줄, 官職에서 隱退한다. 不可抗力이라 생각한 그는 以後 一切의 政治 活動에서 完全히 손을 떼게 된다.

1905年 京城府 에 알 수 없는 傳染病이 돌자, 1905年 6月 부터 尹雄烈은 鍾路房 전동의 本家 代身 都城 城門 彰義門 바로 앞이자 景勝地로 손꼽히던 京城府 무桂洞(武溪洞, 後日 付巖洞 에 編入됨)에 別莊 을 짓고, 1906年 3月 完工되자 移徙하여 居住했다. 이때 尹雄烈은 새 別莊은 建築家를 불러 2層 甓돌 樣式으로 짓게 했다. 後代에 그의 別莊 磻溪 윤웅렬 別墅 라는 이름으로 서울特別市 民俗資料 第12號로 指定된다. 傳染病이 사라지자 다시 鍾路房 전동의 本家로 돌아왔다.

1907年 (光武 10) 3月 4日 本部인 전의李氏가 死亡하자, 尹雄烈은 아들을 낳아 준 첩 全州李氏 李廷武와 正式으로 結婚하였다. 庶子 윤치호 의 才能을 平素 아깝게 여겼던 尹雄烈은 本部인 전의李氏에게는 딸만 한 名 있었기에, 庶子 윤치호 를 赤字로 올려주고자 李廷武를 正室 夫人으로 認定하고 結婚式을 올렸다. 곧 尹雄烈은 집안의 財産과 自身의 아버지 祭祀, 할아버지 祭祀를 包含한 가장(家長)의 地位를 尹致昊에게 徐徐히 넘기려 했다.

生涯 後半 [ 編輯 ]

國債補償運動과 社會 活動 [ 編輯 ]

大邱 中區 國債補償路 鐘閣네거리
道路 왼便이 國債補償運動記念公園이다.

1907年 (隆熙 1年) 6月 重薯童 商業專門學校 校長 에 就任했고 1910年 에 물러났다. 1907年 國債 補償 運動 이 全國에서 벌어지자 윤웅렬度 서상일 等과 함께 國債 補償 運動 에 參與하였고, 國債補償支援金總合소의 第2代 所長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國債 補償 運動 은 日帝의 妨害로 失敗하고 만다. 그해 9月 19日 陸軍 部長 으로 退職하였다.

韓國痛感 부는 윤웅렬에게 "補償金 3萬원 中 베델 양기탁 이 詐取하였으므로 그 返還을 要請한다"는 請願書를 提出토록 使嗾하였다. 尹雄烈은 이 四柱에 따라 國債補償金 返還請求書를 提出하였다. [24]

1908年 8月 國債補償支援金總合소 所長으로 在職 中 補償金 中 3萬원을 英國人 베델이 詐取했으므로 返還을 要請하였으나 거부되자 補償支援金 總合所長職을 辭退한다. 日本 의 策動에 便乘하여 一進會 의 機關紙인 國民新報 베델 양기탁 國債補償金 을 橫領했고, 그 事實이 綻露났다고 記事化하였다. [24] 베델 에게 一部 맡긴 國債補償金 中 베델은 高利貸金을 하였으나 一部 金額은 끝내 還收하지 못했고, 베델과 朝鮮 國內 輿論 사이에서 그는 葛藤하였다.

8月 記號興學會 會長에 推戴되고 1909年 4月 부터 6月 까지 日本觀光團의 一員으로 選拔되어 日本 도쿄 , 나가사키 等을 視察하고 歸國하였다. 以後 忠南 牙山 의 別莊에 蟄居하다가 1910年 (隆熙 4年) 8月 27日 正憲大夫 (正憲大夫)로 昇進했다.

그는 日本語와 中國語를 能通하게 驅使할 수 있었고, 簡單한 英語를 驅使했다. 이는 後日 朝鮮에 온 美國人, 英國人 宣敎師들과의 對話에도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朝鮮에 온 宣敎師들의 便宜를 봐 주고, 사람을 시켜 그들이 禮拜堂으로 쓸 場所를 物色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韓日合邦과 最後 [ 編輯 ]

윤웅렬(왼便 담배 피우는 이)

1910年 (隆熙 4年) 10月 韓日 合邦 條約 以後 日本 帝國 男爵 (男爵)의 爵位를 받고 메이지 天皇 으로부터 公採 2萬 5千원을 下賜받았다. 男爵 爵位는 1911年 死亡 後 長男인 윤치호 에게 승계되었다. 그해 12月 國債補償金 4萬 2千원을 納付者들에게 되돌려주고, 納付者를 確認할 수 없는 資金은 朝鮮總督府 警務摠監部에 委託하였다.

韓日合邦 直後 倒産 안창호 가 擧國歌를 남기고 出國하자 아들 윤치호 는 葛藤, 彷徨하였다. 尹致昊는 病患中인 아버지와 老母와 아내, 2男 2女가 있고 徐某에게서 어린 異腹同生 둘이 있어서 이들을 책임져야 된다는 壓迫感 때문에 出國을 躊躇했다. 이상재 는 치호에게 여러 番 李承晩 , 안창호 의 事例를 들며 美國 으로의 亡命을 勸告하였으나 끝내 拒絶하였다. 尹雄烈은 1911年 陽曆 9月 22日 漢城府 自宅에서 享年 72歲로 死亡하였다.

事後 [ 編輯 ]

第2共和國의 大統領인 宗孫 윤보선 (오른쪽에서 두 番째)과 總理 場面
동생 윤영렬 과 한진숙 內外

바로 新聞內 禮拜堂 에서 葬禮式을 擧行한 後 9日場을 한 뒤 1912年 9月 30日 忠淸南道 牙山郡 온양읍 옥계리 厚祿 子坐의 墓地에 埋葬되었다. 뒤에 京畿道 平澤市 팽성읍 객사리 [25] 부용산에 移葬되었다. 동생 경재 윤영렬 의 墓所 亦是 近處 京畿道 平澤市 팽성읍 객사리 [26] 부용산에 있다. 平澤郡 팽성읍 에 있던 墓所는 後에 忠淸南道 牙山郡 둔포면 夕哭1里 先塋으로 다시 里長하였으며, 2009年 封墳으로 造成되었던 尹雄烈의 墓所는 平平한 돌무덤으로 開場되었다.

墓所의 가운데는 尹雄烈의 墓이고 右側은 김정순, 左側은 李廷武를 安葬하였다. 첫 夫人 전의李氏는 둔포면 석곡리 선영 近處 酉坐(酉坐)에 安葬되었다.

서울 에 있던 그의 別莊들 中 一部는 賣却되었고, 牙山 의 別莊은 後日 아들 윤치창 이 買入하여 한때 居住하기도 했다. 京城府 鍾路房 付巖洞(現 서울特別市 鍾路區 付巖洞)에 있는 磻溪 윤웅렬 別莊 [27] 은 여러番 主人이 바뀌다가 1970年 臺에 서울特別市 에서 買入하여 1977年 3月 17日 '付巖洞 윤응렬 大監가'라는 이름으로 서울特別市民俗資料 第12號로 登錄되었다.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에서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選定되었고, 2006年 에는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日帝强占期 初期 親日反民族行爲 106人 名單 에 包含되었다.

1900年 代 初 全羅南道 光州市 內에 세워졌던 그의 善政碑인 '觀察使 允恭雄烈 善政碑'(觀察使尹公雄烈善政碑)는 훼손당할 危機에 處했다가 1957年 光州公園 入口에 옮겨졌고 1965年 다시 東쪽 언덕에 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기타 [ 編輯 ]

그가 親日派 라는 主張에 對해 作爲 를 받은지 1年만에 死亡하였으므로 積極的으로 親日行爲 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視角도 있다. 하지만 解放 直後 建國準備委員會 를 비롯한 여러 社會政治團體와 美軍政 에 依해 設立된 南朝鮮過渡立法議院 에서 制定한 特別條例 等에서 日本 政府 로부터 功位 및 作爲 를 받거나 世襲限 水攻(受公), 襲攻(襲公), 酬酌(受爵), 習作(襲爵) 行爲者는 當然犯으로서 處理되었으며, 反民特委 에서도 酬酌과 習作 行爲는 反民族行爲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爵位를 받은 그 行爲 自體로도 積極的인 親日行爲 가 다름 없다는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의 解釋이 나왔으며, 日帝强占下 反民族行爲 眞相糾明에 關한 特別法 第2條 7號에도 酬酌과 習作行爲를 親日反民族行爲로 規定되어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윤취동
(尹取東)
1798~1863
全州李氏
(全州李氏)
1844~1936
磻溪 윤웅렬
(磻溪尹雄烈)
1840~1911
김정순
(金貞淳)
1879~1959
硏究 윤영렬
(蓮龜尹英烈)
1854~1939
윤영렬 家計도
한진숙
(韓鎭淑)
1851~1938
尹氏
(尹氏)
1835~1920
친 누이同生 (花峴妹)

佐翁 윤치호
(佐翁尹致昊)
1865~1945
南浦 윤치왕
(南圃尹致旺)
1895~1982
윤치창
(尹致昌)
1899~1973
손眞實
(孫眞實)
洪政旭 家計도 參照
庶子 윤치왕 . 그는 醫學者, 軍醫官이었다.
長孫 윤영선

일화 [ 編輯 ]

1884年 淸나라 의 介入으로 甲申政變이 失敗로 돌아가고 그는 全羅南道 和順郡 능주로 流配되었다. 그가 능주에서 3年이나 귀양살이를 하며 지내던 中 잔심부름을 하는 床奴가 마을에 傳하는 所聞을 듣고 그에게 '아래 마을에 皿斗(媽媽를 앓다 죽은 어린 女子아이의 鬼神, 태주)가 있는데 앞일은 무엇이든 아주 잘 맞춘답니다. 먼 곳 陸地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서 묻고 하는데, 족집게라 하더이다. 大監마님께서도 한 番 가서 물어보시면 어떠 하시온지요?'라 하였다. 그는 迷信이라 不信하면서도 앞일이 너무나 궁금하고 流配地의 生活이 갑갑하여 심심풀이 삼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床奴를 앞세우고 태주를 모신다는 巫俗人의 집에 가서 그에게 물었다. 그가 自身이 누구인가를 묻자 태주는 漢陽의 高官임을 말했고 尹雄烈이 언제 釋放되는가를 묻자 보름쯤 뒤에 풀려난다고 豫言하였다. 豫言대로 보름쯤 뒤 그는 釋放되었다. 그는 아들 윤치호 와의 相逢을 묻자 태주는 아들이 먼 西洋에 있고 淸나라 女性과 結婚하고 그 前에 그와 만나리라고 豫見하였다.

前生과 來世, 輪廻說에도 關心이 있던 그는 태주에게 自身의 前生을 물었다. 巫俗人이 말하기를 그는 前生은 僧侶로서, 法號는 海波(海波)요 勝名은 旅順(與淳)이었다. 그는 咸鏡道 安邊 釋王寺 에서 熱心히 精進하였기 때문에 그 功德으로 中國에 태어나 1품代身으로 큰 功勞를 세우며 富貴하였고, 그 다음인 今生에는 다시 朝鮮에 태어나 顯達했고 張差 軍部大臣이 될 것이며, 五福을 鉤足하여 富貴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같이 遂行하던 僧侶를 묻자 태주는 前生에 함께 出嫁한 兄이 있다 말하고 스님 노릇을 잘못하여 公金을 橫領했는데 法堂을 重修한다, 改金佛事를 한다고 하면서 모은 施主金을 함부로 消耗하였고, 부처님의 삼보정재를 도둑질한 罪로 地獄에 떨어져 苦楚를 받다가, 이제 다시 人間의 몸을 받았지만 가난한 果報를 받아 끔찍이 苦生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어 江原道 通川에서 술장사를 하며 사는데, 이름은 이경운이라 하며 술집 이름은 '새술막이'라 하고, 두 손이 모두 조막손이라는 것이다. 그 뒤 尹雄烈은 태주의 豫言대로 流配地에서 풀려나 家族과 아들 尹致昊를 만나고 淸나라 出身 며느리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는 自身의 前生이 釋王寺 스님이었다는 태주의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1903年 (光武 7年) 그는 아들 윤치호와 護衛兵들을 이끌고 安邊 釋王寺를 찾아갔다. 水軍當(壽君堂)이라는 절의 寮舍채에 宿所를 定하고 그 이튿날, 山中 스님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는 '海波 旅順(海波 與淳)이란 스님이 百餘 年 前에 이 절에 있었는가? 그 眷屬이 누구이며, 그 스님의 行裝을 아는 이가 있는가'등을 確認해 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果然 前生이란 없는 것인가?'라는 말을 疑心하던 그는 巫俗人의 말을 믿은 自身을 어리석다 여겼다. 그러나 태주의 말대로 2週日 있다가 流配地에서 풀려났고, 1年 뒤 가을에 아들이 上海에서 結婚式을 한 것과, 富者가 相逢한 일, 自身이 軍部大臣의 자리에 오른 일 等을 奇異하게 여겨 山中의 元老 스님인 泄下를 찾아가 다시 물었으나 亦是 對答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답답하게 여기면서 뒷山으로 사냥을 하러 갔습니다. 山꼭대기 바로 밑의 行跡骨 속으로 노루를 몰아넣고 隨行員을 引率하며 사냥하던 中 내원암 入口에서 暫時 쉬게 되었는데, 바로 눈앞에 不渡가 一列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無心코 일어나 不渡들을 살피던 中 '해派黨 旅順'(海波堂 與淳)이라 쓴 不渡를 發見하게 되었다. 그는 아들에게 隨行員들을 데려와 不渡에 절하게 하였다. 尹致昊는 아버지 命이므로 영문도 모른채 절부터 하였고 尹雄烈은 一行을 데리고 釋王寺로 돌아와 스님들을 모아놓고 莞島에서 점친 前後의 일을 說明하자 大衆들이 모두 歎服하였다.

그리고 下人 有大房이라는 사람을 江原道 通川으로 보내 두 손 모두가 조막손人 '새술막이' 술집 主人 이경운을 搜所聞하여 存在한다는 것을 確認, 데리고 와서 隨行員에게 引繼하였다. 隨行員은 곧 그를 윤웅렬 大監이 居處하는 房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절을 하도록 指示하였다. 그런데 그가 절을 하지 못하게한 뒤 前生의 關係를 들려 주었다.

現在의 生活이 매우 어려우신 模樣이니, 前生의 兄님에게 돈 百兩과 옷감 열 疋을 드립니다. 弱小한대로 논도 사고, 밭도 사서 늙은 內外 便히 지낼 수 있는 生計를 마련하시지요. 그리고 아무쪼록 過去事를 뉘우쳐 부처님의 恩德을 잊지 마시고, 念佛을 많이 하여 罪業을 消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內生에는 不法 門中에서 다시 만나 今生에 못다한 遂行을 함께 하십시다.

이어 그는 돈과 옷감을 가져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할까봐 郡守에게 換錢表를 떼어 주고 運搬을 돕도록 配慮하였다. 이경운 老人은 百倍 監査하고 눈물을 흘리며 다짐하였다.

이제 大監님의 恩惠로 저의 前生 罪業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런 大恩까지 내리시니 鎭靜 갚을 길이 없습니다. 大監님의 가르침을 暫時도 잊지 않고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있는 힘을 다해 받들겠습니다.

그의 存在까지 確認한 尹雄烈은 釋王寺 大衆을 불러 大衆供養을 올렸고, 自身이 前生에 工夫하던 道場임을 생각하며 돈 五百兩을 施主하고 갔다 한다. 이는 安邊郡 의 <釋王寺地>에 記錄되었다.

尹雄烈을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各州 [ 編輯 ]

  1. 그의 贈職人 增 通政大夫 吏曹參議와 增 嘉善大夫 議政府 供饌 等은 事後 윤웅렬, 윤영렬 兄弟의 榮貴로 追贈된 贈職 벼슬이다.
  2. 어머니 安東金氏가 祈禱드리던 곳은 鹽水臺라는 地名이 붙었다.
  3. 유영렬, 《開化期의 윤치호 硏究》 (한길사, 1985) 18
  4. 承政院日記 1859年(哲宗 10年) 5月 18日子 (定해)
  5. “新兵이 있는 技師長 尹雄烈을 改差할 것을 請하는 御營廳의 界” . 2016年 3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8年 11月 9日에 確認함 .  
  6. 任用한, 《亂世에 길을 묻다》 (施工社, 2009) 312
  7. 韓國開化思想硏究 일조각, 1981) 35
  8. 유영렬, 《開化期의 윤치호 硏究》 (한길사, 1985) 19
  9. 任用한, 《亂世에 길을 묻다》 (施工社, 2009) 317
  10. 임종국 (1991年 2月 1日). 《實錄 親日派》.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서울: 돌베개. ISBN  [[Special:BookSources/89-7199-036-8 쪽=44~45쪽| 89-7199-036-8 쪽=44~45쪽 ]] |isbn= 값 確認 必要: invalid character ( 도움말 ) .   |ISBN= 에 라인 피드 文字가 있음(위치 14) ( 도움말 )
  11. 尹致昊 日記 - 한 知識人의 內面世界를 통해 본 植民地 時期(尹致昊, 역사비평사, 2002) 182페이지
  12. 이때의 展은 箋中後榮의 前이다.
  13. “南陽의 속誤 軍兵들의 봄 濕組는 統理機務衙門의 關門으로 인하여 停止하겠다는 壯禦營의 界” . 2016年 9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8年 11月 9日에 確認함 .  
  14. 任用한, 《亂世에 길을 묻다》 (施工社, 2009) 314
  15. 윤웅렬 - Daum 百科事典
  16. 永興 府使의 後任에 南陽 府使 이명재를 除授하라는 全校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7. 고종실록 20年 3月 17日
  18. 고종실록 21年 1月 27日 .
  19. 承政院日記 1884年 9月 14日
  20. 任用한, 《亂世에 길을 묻다》 (施工社, 2009) 320
  21. 任用한, 《亂世에 길을 묻다》 (施工社, 2009) 321
  22. “1856年에 武科에~ 자리에 올랐다.” : 反民族問題硏究所,《親日派99人》(돌베게, 1993年) 160쪽( 김도훈 執筆 部分).
  23. 윤성진: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4. 장동학, 《韓國經濟 100年 果然 어떤일이?》 (無限, 2002) 26페이지
  25. 엔싸이버 百科檢索 - 윤웅렬墓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6. 大韓民國 第4代 大統領 尹潽善과의 만남 忠南道정신문 2010年 3月 18日子
  27. 또는 磻溪 윤웅렬 別墅
  28. 아버지 윤취동의 本部인
  29. 尹致昊日記 1898年 6月 9日子에 登場한다.
  30. 尹致昊 日記 - 한 知識人의 內面世界를 통해 본 植民地 時期(尹致昊, 역사비평사, 2002) 188페이지
  31. 윤치호, 《尹致昊 日記:1916-1943》 (尹致昊 지음, 김상태 驛, 역사비평사, 2001) 636페이지
  32. 윤치왕 義務感의 將校自力票
  33. 윤치왕의 將校自力表에는 윤웅렬과 김정순의 次男으로 되어 있다.
  34. 조용헌 (2001年 8月). “[韓國의 名家 名擇 11] 서울 都心의 숨은 名當 ‘안국동 8番地’解圍(海葦) 윤보선(尹潽善) 古宅” . 《新東亞》. 東亞日報. 533 ~ 549쪽 . 2008年 5月 20日에 確認함 .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

參考 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6年 12月). 〈윤웅렬〉 (PDF) . 《2006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257~262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2007年 10月 8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6月 21日에 確認함 .  
  • 윤치호, 《尹致昊 日記 1916~1943》 (김상태 便역, 역사비평사, 2001)
  • 유영렬, 《開化期의 윤치호 硏究》 (京仁文化史, 2011)

★尹雄烈의 初吹情實은 全州李氏가아니고 全義李氏進士玄豹醫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