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민주혁명당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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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민주혁명당 事件 (民族民主革命黨 事件, 略稱 민혁당 事件)은 1999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指令을 받아 大韓民國 內에서 地下 政黨 活動을 하던 민족민주혁명당을 摘發하여, 그 構成員인 金榮煥 , 하영옥 , 李石基 等이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逮捕되어 有罪判決을 받은 事件이다.

事件 槪要 [ 編輯 ]

北韓은 1980年代 學院街 親北 鬪爭을 主導한 主思派 核心勢力을 包攝해 朝鮮勞動黨에 加入시켜 南韓 內 革命 前衛組織으로 민혁당을 構築했다. 이에 따라 金榮煥 , 李石基 , 하영옥 等은 1989年 主體思想 을 指導理念으로 하는 靑年革命組織인 反帝靑年同盟 을 結成하고, 以後 全國的인 組織事業을 위해 이를 黨으로 轉換하기로 決定하고 1992年 민혁당을 結成하였다. 이들은 南韓 社會를 ' 植民地 反資本主義社會'로 規定하고, 民族自主權을 爭取하고 民主主義를 발전시키며 祖國을 平和的으로 統一한다는 當面目標 아래, 勞動者, 農民,인텔리, 學生, 都市 小市民, 小資本家들을 動力으로 하여 反美 自主化와 反파쇼 民主化를 鬪爭路線으로 採擇하여, 民族解放人民民主主義革命 (NLPDR)을 達成하는 것을 目標로 하여 活動하였다.

민혁당 中央委員 김영환은 朝鮮勞動黨 에 加入하고 2次例 密入北해서 金日成 을 만나 工作金을 受領하였으며, 하영옥은 김영환의 勸誘로 朝鮮勞動黨에 加入하고 北韓勳章을 授與받았다. 민혁당은 金榮煥, 하영옥, 朴아무개(李石基는 나중에 中央委員이 됨)로 構成된 黨 中央指導部 아래에 都堂 性格의 京畿南部委員會, 영남위원회, 全北委員會와 地域別委員會(蔚山, 城南, 釜山, 馬山·昌原), 部門別 事業地圖部(靑年運動, 統一運動, 市民團體, 學生運動, 首都南部地域)를 두었다.

李石基 는 민혁당 京畿南部委員會 委員長이었고, 李相奎 는 首都南部地域을 擔當하였으며, 이의엽, 박경순은 민혁당 地域組織人 영남위원회 委員長(釜山委員會 및 蔚山委員會 等)이었으며, 김창현, 방석수는 영남위원회 組織員이었고, 서울대의 愛國靑年先鋒隊를 비롯한 學生運動도 민혁당의 指導 下에 있었다.

민혁당의 存在는 1998年 麗水 에서 擊沈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半潛水艇 에서 하영옥이 間諜과 連絡해 왔다는 證據가 나오면서 처음 밝혀졌다. 以後 민혁당 및 이른바 '영남위원회'는 法院에서 反國家團體 또는 利敵團體로 認定되었고, 위 事件 關聯者들은 國家保安法 違反罪로 有罪判決이 宣告되어 確定되었다.

서울高法 刑事1部는 被告人 李石基에게 懲役 2年 6個月을 宣告하면서 “민혁당은 김일성 主體思想으로 徹底히 武裝하고 北韓의 對南 革命戰略 戰術에 따라 社會主義 社會 建設을 目標로 活動하기 위해 國家를 변란할 目的으로 構成된 反國家團體”라며 “(민혁당을 만든 김영환 氏가 北韓과 隨時로 連絡하며 指針을 받고 狀況을 報告하는 等 北韓과 連繫해 왔던 事實을 認定할 수 있다”고 하면서 李石基에 對해선 “민혁당 京畿南部委員長으로 從事했다”고 明示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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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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