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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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申叔舟
보물 제613호 신숙주 초상화 (15세기작)
寶物 第613號 신숙주 肖像畫 (15世紀作)
이름
범옹
희현당·保閑齋
시호 문충
身上情報
出生日 1417年 6月 20日 ( 1417-06-20 ) (陰曆)
出生地 朝鮮 全羅道 羅州郡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
死亡日 1475年 6月 21日 ( 1475-06-21 ) (58歲) (陰曆)
死亡地 朝鮮 漢城府
國籍 朝鮮
職業 文身
本館 高齡
父母 신장 (簿) · 羅州 鄭氏 (某)
配偶者 霧淞郡夫人 霧淞 尹氏(本部인)
側室 裵氏(妾)
子女 新株 · 新面 · 神饌 · 新正 · 神俊
神父 · 新型 · 宸筆
신氏(신명수의 妻) · 신결 · 宿願 신氏 (庶子)
親姻戚 신용개 (孫子)
精油(外祖父)
한명회 (査頓)
韓確 (査頓)

신숙주 (申叔舟, 1417年 8月 2日 ( 陰曆 6月 20日 ) ~ 1475年 7月 23日 ( 陰曆 6月 21日 ))는 朝鮮 電氣의 性理學 者·文臣·政治家이며 言語學 者, 外交官이다. 本貫은 高齡 (高靈), 者(字)는 범옹(泛翁), 號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保閑齋(保閑齋)이다. [1] 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신장 (申檣)의 아들이자 輪廻 의 孫女사위이기도 하다.

1438年 (世宗 20年) 生員 , 進士試 에 모두 合格하고 1439年 (世宗 21年) 親試 文科 (親試文科)에 及第하여 世宗 集賢殿 의 學士로서 성삼문 , 박팽년 , 정인지 等과 함께 訓民正音 의 創製와 硏究에 寄與하였다.

1447年 (世宗 29年) 文科 重試 (重試)에 4等으로 合格하여 堂上官 이 되었으며, 以後 癸酉靖難 世祖 反正 을 積極 支持하였고, 世祖 의 最側近으로 活躍했다. 문신의 身分이었으나 兵力을 이끌고 女眞族과 倭寇 討伐에 여러 番 出征하였으며 1461年 부터 1464年 , 1471年 부터 1475年 까지 議政府 領議政 을 歷任했다.

死六臣 과 함께 文宗의 遺言을 받들어 斷種 을 輔弼하기로 約束했으나 以後 變節하여 首陽大君( 世祖 로 卽位)의 便에 加擔하였다. 結局 癸酉靖難 으로 端宗의 王位를 빼앗았다. 以後 端宗 復位 運動 이 일어나자 端宗과 금성대군 의 處刑을 强力히 主張하여 貫徹시켰으며, 南怡의 獄事 남이 의 處刑에도 積極 參與하여, 事後 士林派 道學者 들로부터 批判과 指彈의 對象이 되었다. 1910年 (隆熙 4年) 以後 그의 한글 創製 에 對한 公的 再照明 輿論이 나타났으며, 1980年 代 以後부터 그에 對한 再評價 努力이 進行되었다.

뛰어난 學識과 글재주로 6代 王을 섬겼고, 《 國朝五禮儀 》, 《 高麗史 》, 《 高麗史節要 》, 《 國朝寶鑑 》, 《 東國正韻 》 等의 編纂에도 參與하였으며, 農業과 畜産業 技術에 對한 書籍인 《 農産軸목서 》를 編著하였다. 生前에 定難功臣 , 佐翼功臣 , 翊戴功臣 , 佐理功臣 等 4番 功臣에 책록되었다. 死六臣 生六臣 김시습 , 그 밖에 한명회 , 권람 等 다양한 人脈을 形成한 人物이기도 하다. 輪廻 , 정인지 의 文人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1417年 (太宗 17年) 陰曆 6月 20日 희현당 申叔舟는 高齡신氏 신포시 의 孫子이며 共助 參判 을 지낸 신장 (申檣)의 아들로 그의 外家가 있던 全羅南道 羅州郡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 [2] 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羅州 鄭氏는 지성주軍事(知成州郡事)를 지낸 精油(鄭有)의 딸이다. 위로 兄 新盟主(申孟舟), 신중주(申仲舟)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가 태어났다. 또한 廢妃 尹氏 의 親庭어머니인 夫婦인 신氏 는 申叔舟의 三寸 申平 (申枰)의 딸로, 申叔舟는 연산군 에게는 崴嵬再從祖父가 된다.

그의 祖上들은 本來 慶尙北道 高齡縣 (高靈縣)의 鄕里였으나 申叔舟의 7代祖가 되는 신성용 (申成用)李 처음으로 過去 試驗 에 合格하여 中央 政界에 進出 벼슬이 檢校 軍器監(檢校軍器監)에 이르렀다. 曾祖父 신덕린 (申德隣)은 全義 判書(典儀判書)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포시는 共助 參議 를 지냈다.

아버지 伸張은 남에게 맞서기를 싫어하는 溫和한 性品의 文人이었으나 술을 좋아하였는데 同僚 文人인 허조 는 "이런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며 恨歎할 程度였다. 朝鮮王朝實錄 의 졸기에 依하면 "사람됨이 溫厚하고 恭順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社長(詞章)에 能하고 草書 예서 를 잘 썼다. 性品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親히 命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禁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伸張은 아들들의 이름에 술을 뜻하는 意味의 主 字를 붙였는데, 다섯 아들들의 이름이 新盟主(申孟舟)·신중주(申仲舟)·申叔舟(申叔舟)·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였다. 아버지가 官僚生活을 하게 됨에 따라 故鄕 羅州 를 떠나 本家인 漢城府 로 移住하게 되었다. 伸張은 글씨를 잘 썼는데 崇禮門 의 懸板 글씨 中 하나는 그의 글씨體라는 傳說이 傳한다.

동생 신말주의 孫子 신공섭 朝鮮 後期의 有名한 畫家 신윤복 의 先祖로, 申潤福은 신공섭의 庶子 신수진 의 7代孫이었다. 한便 日帝强占期 의 歷史學者 丹齋 신채호 는 그의 直系 18代孫이 된다.

어린 時節 [ 編輯 ]

申叔舟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記憶力이 남달랐다. 자라면서 熱心히 工夫하여 읽지 않은 冊이 없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將次 큰 그릇이 될 것이라 豫見하고는 했다. 性格은 沈着하여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을 하였다. 申叔舟는 아버지로부터 學問과 글씨를 배웠는데, 글재주에 뛰어났다. 뒤에 輪廻 정인지 의 文人이 되어 그로부터 學問을 배웠다.

첫 스승인 윤회는 河崙 정도전 의 門人으로, 그를 통해 異色 백이정 , 安珦 의 學統을 師事하였다. 뒤에 그는 스승 輪廻의 孫女사위가 되는데, 申叔舟는 輪廻의 아들인 增 領議政府使 (贈領議政府事) 윤경연(尹景淵)의 딸 霧淞尹氏를 아내로 맞이했다. 뒤이어 鄭麟趾의 門下에서도 修學했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 의 學問도 繼承하였다.

그는 學問을 硏磨하면서도 洞里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書堂을 열고 千字文 小學 을 가르치기도 했다. 成人이 되어서도 讀書와 學問을 좋아하여 天下의 書籍을 두루 涉獵하였다. 또한 詩文(詩文)을 잘 지어서 描寫를 잘 하고 奔放하였다. 그는 일찍이 耽津江 榮山江 의 江물이 黃海 로 흐르는 것을 보며 바다는 山골 깊은 溪谷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다라고 하였다.

1438年 (世宗 20年) 21歲의 나이에 詩(詩)와 部(賦)로 生員試 에 入格하여 生員 이 되었다가 그해의 進士試 에도 모두 合格하여 바로 眞사 가 되었다. 그 뒤 初試(初試)에 壯元한 뒤, 覆試(覆試)에도 壯元하였다.

官僚 生活 [ 編輯 ]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1439年 (世宗 21年) 親試 文科 (親試文科)에 3等(丙等級. 3位와는 다르다.)으로 及第하였고 그해에 典農寺 職場 이 되었다. [3] 李朝 (吏曹)에서 그를 成均館 文廟 에 祭禮를 올릴 때 祭執事(祭執事)로 特別히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때 李朝의 어느 늙은 서리(胥吏)가 잊어버리고 첩지(牒紙)를 傳達하지 않아 일을 빠뜨리게 되자 司憲府 에서 彈劾하였다. 이때 申叔舟는 그 署理가 늙었지만 딸린 子女들이 많다는 事情을 알던 그는 胥吏의 딱한 處地를 念慮, 그가 罪를 받아서 파면당할 것을 念慮하여 신숙주 自身이 거짓으로 自服하고 代身 懲戒를 받았다. 그는 生員試와 進士試에 合格하고 初試와 覆試에 장원한 人物이며 正式으로 過去에 合格한 人材라서 罷免되지는 않았다. 뒤에 이 事實을 안 世宗이 그를 特別히 容恕해 주었고, 同僚들로부터 信望을 얻게 되었다. 申叔舟는 初試와 覆試에 壯元으로 合格하고 過去에도 兵科로 及第하였으며 글을 잘 지어 世宗의 눈에 들었다.

1441年 다시 集賢殿 副修撰 (集賢殿副修讚)李 되었다. 그 뒤 入直할 때마다 藏書閣 에 파묻혀서 貴重한 書冊들을 읽었으며, 自請하여 宿直을 도맡아 하였다. 宿直이 없더라도 藏書閣에 있으면서 밤새도록 讀書를 하였다. 輪廻, 鄭麟趾의 訓導 外에도 다양한 讀書 德澤에 傾斜와 古典에 두루 能通하였고 歷史 知識이 該博하였다.

신숙주 親筆 夢遊桃源圖

集賢殿에 있으면서 그는 藏書閣에 들어가서 平素에 보지 못한 冊을 熱心히 읽고 同僚를 代身하여 宿直하면서까지 時間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工夫하기가 일쑤였다. 宿直이 아닌 때에도 藏書閣에 파묻혀서 貴重한 書冊들을 읽느라 밤을 샜다고 한다. 이러한 學問에 對한 熱誠이 世宗에게까지 알려졌으며, 世宗은 그가 熱心히 工夫하는 것을 發見하고 御醫 (御衣)를 하사하여 稱讚했다. 하루는 冊을 읽다가 잠이 든 그를 發見하고 王이 直接 自身의 옷과 포의, 이불을 내렸다 한다. 새벽에 깨어나 自身의 몸에 龍袍가 덮혀진 것에 깊이 感動한 그는 그는 오래도록 感泣하였다 한다.

1442年 (世宗 24) 訓鍊院 主婦 (訓練院主簿)가 되었다. 이때 日本 通信社 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선비를 書狀官( 書狀官)으로 삼기로 하였는데, 申叔舟가 이에 뽑혔다. 集賢殿 學士로서 言語 에 能해 中國語 , 日本語 를 비롯한 몽골語 , 여진어 , 琉球語 (琉球語) 等 東아시아 8個 國語에 能通했기 때문이다.

外交 活動 [ 編輯 ]

그 무렵 申叔舟는 過勞 로 오랫동안 病을 앓다가 그 무렵 病이 나아 일어난 直後였다. 兄弟나 親舊들이 여위고 疲困한 몸으로 어찌 먼 곳을 가겠느냐며 堪當 못하리라 하여 힘써 말리고 沮止하였으나 그는 自請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臣下된 사람에게는 平坦하거나 險한 것이 한 가지이다. 어찌 제 몸이 便安할 것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먼 길을 一家親戚이 모두 말렸으나 臣下된 사람으로 險하고 便한 것을 가릴 수 없다 하고 스스로 나섰다. 世宗이 引見하면서 病이 들었다 하는데 갈 수 있겠느냐고 念慮하자 그는 나아졌다며 어찌 回避하겠느냐며 日本으로 가기를 自請하였다.

1443年 2月 21日 副司直 (副司直)이던 그는 다시 訓鍊院 主婦 에 任命되어 朝鮮 通信社 변효문 (卞孝文)의 書狀官 兼 從事官 (書狀官兼從事官)으로 選拔, 通信使가 派遣되자 日本에 건너가서 우리의 學問과 文化를 誇示하고, 言語와 한자, 留學을 가르쳤다. 日本을 旅行할 때 그의 재주를 듣고 詩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卽席에서 붓을 들고 詩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感歎하였다. 10月 19日까지 9個月間 日本에 다녀와서, 當時의 見聞錄(見聞錄)과 日本의 人命·指名 等을 漢字音으로 記錄하였다. [4] 이 記錄을 통해 後에 <海東諸國記>(海東諸國記)가 1471年(成宗 2)에 完成되었다. 特히 이 冊의 ‘粗氷應接機’ 項에서는 日本 使臣의 應對法에 對하여 詳細히 規定하여 國家行事에 蹉跌이 없도록 하였다. [4]

訓民正音

1443年 에는 日本의 가는 곳마다 山川의 境界와 要害地(要害地)를 살펴 地圖를 作成하고 그들의 制度·風俗, 各地 領主들의 强弱 等을 記錄했다. 돌아오는 길에 對馬島 에 들러서 貿易 協定을 締結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對馬島 島主와 歲遣船(歲遣船)을 50隻, 歲賜米豆(歲賜米豆)를 200섬으로 制限하는 內容의 貿易協定 條約을 締結했다. 이 條約이 곧 癸亥條約 이다. 1443年 10月 배便으로 仁川港 을 통해 歸還했다. 歸國 以後 성삼문, 박팽년 , 鄭麟趾 等과 함께 世宗의 命을 받아 文字 開發 硏究에 着手했다.

集賢殿 學士와 한글 創製 [ 編輯 ]

申叔舟의 夢遊桃源圖 讚詩 ( 1447年 )

集賢殿 修撰 을 지내면서 그는 世宗의 뜻을 받들어 訓民正音 創製와 硏究에 心血을 기울였던 그는, 世宗의 名으로 成均館 主婦인 성삼문, 行事用(行司勇) 손수산 (孫壽山) 等과 함께 當時 罪를 짓고 滿洲 搖動 에 귀양을 와 있었던 明나라 의 翰林學士 황찬(黃瓚)을 찾아갔고, 황찬을 만나 音韻論 과 人間의 發音, 言語에 對한 主要한 知識을 얻었고, 以後 13番이나 搖動과 朝鮮을 直接 往來하면서 황찬을 찾아가 音韻 과 語彙에 關한 것을 議論하였다. 當代 最高의 言語學者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理解力에 感歎할 程度로 총명한 人物이었다. [3]

申叔舟는 集賢殿 內에서 새로운 글 硏究를 贊成, 支持하는 立場에 섰으며 같은 便에는 申叔舟와 그의 스승의 한 사람인 정인지, 申叔舟의 同僚인 성삼문, 정창손 , 박팽년 等이 있었다.

또한 明나라의 使臣이 朝鮮에 入國했을 때도 太平館 (太平館)에 親히 往來하면서 使臣으로 온 明나라學者에게 韻書 (韻書)에 對해 質問하여 그 音을 正確하게 하는 等 國內外를 돌아다니며 音韻을 硏究했다. 그의 學問열에 感激받은 明나라의 使臣은 朝鮮人 妓生도 마다하고 그와 討論, 談論하며 硏究하였다 한다. 그는 吏讀 는 勿論 中國語 · 日本語 · 몽골語 · 여진어 를 두루 驅使하였는데, 訓民正音을 硏究하는 過程에서 이들 言語를 比較 分析하고 朝鮮人의 發音과 比較 分析하여 類似點과 差異點을 가려냈다.

1446年 安堅 안평대군 의 꿈이야기를 듣고 夢遊桃源圖 를 그리자 이에 對한 讚詩를 써서 獻呈했다. 그는 天賦的인 才能으로 世宗大王이 企劃했던 말글政策을 忠實히 輔弼하였으며, 世宗大王이 1443年(世宗 25)에 創製한 訓民正音의 解說書 執筆에 參與하여 다른 일곱 學者와 함께 1446年 (世宗 28) 9月 訓民正音解例本 編纂을 完了하였다. [4]

1447年 (世宗 29年) 集賢殿 副應敎 (副應敎)가 되었다가 그 해, 文科 重視 (重試)에 4等으로 合格하여 通訓大夫 로 昇進하고 集賢殿 應敎 (應敎)에 任命되었다. 以後 이어 司憲府 掌令 (司憲府掌令), 집의 (執義)를 지냈으며 兼 競演 侍講官과 春秋館 修撰官 을 兼任하였고, 世子侍講院 弼善(弼善)도 兼任하여 世子를 報道하였으며 直提學 副提學 等을 두루 歷任한다. 그는 또한 《 東國正韻 》의 編纂에도 參與하였다. 그리고 申叔舟는 外國語만 잘한 사람이 아니라 豐富한 讀書로 敎養을 쌓은 知識人이기도 했다. [5] 1448年 부터는 世子侍講院 弼善 資格으로 世子 文宗 의 代理淸淨에도 參與하였다.

世宗 때에 明나라 使臣 例兼 (倪謙) 等이 朝鮮에 當到했을 때 많은 朝鮮의 大臣들이 學問이 짧다고 無視하였다가, 막상 漢江을 遊覽하면서 詩文을 주고 받을 때는 그를 當할 者가 없어서 亡身을 當하게 되었다. 이에 申叔舟가 成三問과 함께 王命을 받들어 例兼을 相對하게 되었고 申叔舟는 例兼과 서로 兄弟의 義를 맺었다.

1451年 (文宗 1) 例兼이 다시 朝鮮에 오자 그는 王命으로 成三問과 함께 詩짓기에 나서 東方거벽(東方巨擘, 東方에서 가장 學識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讚辭를 얻기도 했다. [3] 이 해에 司憲府 掌令, 執義를 거쳐 直提學 이 되었다. [3]

書籍 編纂 [ 編輯 ]

日本 에 다녀온후 執筆한 海東諸國記 海東帝國顚倒
海東諸國記 일본국쓰시마섬도

1445年 (世宗 27年)에는 勸第 , 정인지, 안지 等이 지어 올린 龍飛御天歌 의 內容을 다른 學者들과 함께 1447年 (世宗 29)까지에 걸쳐 補完하였다. [4] 이 外에도 우리나라의 傳承된 漢字音을 整理하여 標準 漢字音을 만들려는 目的에서 編纂한 『東國正韻』을 1447年 (世宗 29年)에 6卷으로 完成시키고 1448年 (世宗 30年) 出刊하였다. [4]

1448年 (世宗 30年) 集賢殿 應敎 를 거쳐 1449年 世孫講書院 右翊善(講書院右翊善)으로 있을 때, 世孫에게 師傅를 세워 敎育할 것을 請하였다. 以後 世宗의 名으로 輪廻, 김종서 等과 함께 高麗史節要 , 高麗史 等의 編纂 作業에 參與하였다. 그 過程에서 그는 禑王 昌王 辛旽 의 子孫이라고 主張한 정도전 의 見解를 疑心하기도 하였다. 世宗은 晩年에 病患이 깊어지자 集賢殿의 學士들을 불러서 어린 元孫 홍위(後日의 斷種 )의 앞날을 付託한다고 했다. 이때 世宗에게 어린 元孫을 付託한다는 付託을 들은 臣下들 中에는 신숙주 外에 成三問과 朴彭年 等이 있었다.

그는 官僚生活을 하는 한便으로 退廳 後에는 글을 가르치고, 歷史 關聯 書籍을 入手하여 이를 耽讀하기도 했다. 그는 헛된 名分論 보다는 百姓들에게 도움이 되는 學問을 해야 함을 力說하였다. 1450年 (文宗 卽位年) 司憲府 掌令으로 在職 中 世宗이 죽자 山陵全義 首班에 讓寧大君 이 薦擧되자, 太宗 때의 得罪를 理由로 讓寧大君을 彈劾하였으나 文宗이 듣지 않자 繼續해서 讓寧大君을 彈劾하였다. 그해 末 수司憲府 집의(守司憲府執義)로 陞任되었다.

1451年 (文宗 1) 明나라 使臣 例兼 (倪謙) 等이 다시 朝鮮 에 오자 그는 王命으로 성삼문 과 함께 詩짓기에 나서 東方거벽(東方巨擘)이라는 讚辭를 받았다. 그해 直提學 에 任命되었다.

首陽大君과의 交流 [ 編輯 ]

平素 人間關係가 넓었던 그는 한명회 , 권람 等과도 만나서 親分關係를 쌓았다. 當時 韓明澮는 開國功臣 의 孫子였으나 敬德宮 직이라는 낮은 職位에 있었고, 권람은 일찍 父母를 잃고 不遇한 處地에 있었지만, 우연한 機會에 이들이 새로운 雄志를 품고 있음을 看破하고는 이들을 더욱 각별하게 對한다.

集賢殿 直提學을 거쳐 1452年 (文宗 2年) 司憲府執義가 되었다가, 그해부터 集賢殿 直提學 知製敎 競演 侍讀官 兼 지승문元士(通訓大夫行集賢殿直提學知製敎經筵侍讀官兼知承文院事)로 春秋館 記注官을 겸하여 《 世宗實錄 》의 編纂에 參與하였다. 《世宗實錄》은 2年만인 1454年 (端宗 2年) 3月 에 完成되었다.

端宗이 卽位하자 首陽大君 은 明나라의 고명에 答하기 위해 謝恩使를 自請했는데 이 때 韓明澮와 권람의 助言에 따라 申叔舟가 書狀官(書狀官)으로 同行하며 그를 遂行했다. [6] 首陽大君 一行은 公式的인 業務가 끝나자 都城인 年庚(現在의 베이징)으로부터 多少 떨어져 있는 明나라 成祖 永樂帝 章陵 (長陵)을 찾아갔다. [6] 首陽大君은 申叔舟의 官吏로서의 才能을 아꼈는데, [7] 이듬해 4月 朝鮮에 돌아온 뒤부터 둘 사이는 急激히 가까워졌고, 結局 首陽大君의 擧事에 申叔舟는 間接 支援의 形態로 加擔하게 되었다. [8] 1453年 初 歸國한 申叔舟는 上護軍 (上護軍) 兼 지 兵曹 社(知兵曹事)가 되었다.

癸酉靖難과 世祖 反正 [ 編輯 ]

世祖

1453年 3月 承政院 同副承旨가 되었다. 그해 10月 首陽大君이 韓明澮, 권람 等과 癸酉靖難 의 擧事를 謀議할 때 參與하여 어린 端宗의 뒤에서 實力을 行使하는 김종서, 황보인 等을 除去하는데 同參한다. 이때 그는 首陽大君에게 集賢殿 學士들을 包攝할 것을 建議한다. 成三問, 박팽년, 成勝 等은 首陽大君을 못마땅히 여겼으나 그의 懷柔와 勸告로 定難功臣 의 地位를 一旦 受容했다.

그해 10月 右承旨 를 거쳐 癸酉靖難이 成功하고 集賢殿의 學士들까지 包攝하여 反撥을 撫摩시킨 功勞로 그는 水蟲挾冊定難功臣 (輸忠協策靖難功臣) 1等館에 오르고 이듬해 承政院 都承旨 로 昇進했다. 申叔舟는 이에 對한 報答으로 都承旨의 位置에 있으면서 右副承旨 권람, 同副承旨 구치관 과 함께 端宗의 一擧手一投足을 綿密하게 監視, 觀察하여 世祖에게 報告했다. [8] 反政 直後 그는 流言蜚語를 一掃하는 한便, 어린 王의 治世期間 中 一部 權臣들과 宰相들이 어린 王의 눈과 귀를 가리고 政事를 마음대로 獨斷的으로 行使하였으며 民心이 바로 傳達되는 것을 遮斷하였다며 民生을 위한 政策을 펼칠 것을 宣言, 洶洶해진 民心을 收拾하였다. 그해 7月 경희展 고 同家第(景禧殿告動駕祭)의 贊禮館(贊禮官)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여 不宗廟 秋享 大帝(?宗廟秋享大祭)의 亞獻官 以下의 官僚를 褒賞할 때 채端初(綵段?) 各各 1匹(匹)을 下賜받았다.

1455年 世祖가 卽位하자 同德佐翼功臣 (同德佐翼功臣) 1等에 高靈郡(高靈君)으로 封君된 뒤 藝文館 大提學 으로 任命되었다. [9] 同年 그는 새 王의 卽位를 알리는 冊封 奏請使 의 所任을 띠고 明나라에 가서 明나라 皇帝의 冊封 誥命을 받아들고 歸國길에 아내가 죽었다는 消息을 接하고 1456年 歸國하였다.

明나라에 있을 當時 大明會通 과 宋書, 漢書, 水西 等의 中國 歷史冊을 耽讀하였고 中國의 文人들을 만나 詩文을 주고받기도 했다. 歸國 後, 그는 世祖의 冊封 고명을 成事시킨 功으로 그는 많은 量의 黃金과 土地, 奴婢, 按摩(鞍馬)를 下賜받았으며, 이어 世祖의 寵愛를 얻어 兵曹判書가 되었으며, 그해 兵曹判書로 在職 中 全羅南道 와 多島海 海岸가를 侵略하는 倭寇를 討伐하고 되돌아왔다.

死六臣의 亂과 端宗復位運動 [ 編輯 ]

정인지

歸國 直後 申叔舟는 成三問 等과 再會했다. 이때 死六臣으로부터 世祖 3父子 處刑 擧事에 同參할 것을 要請받았으나 그는 斷乎하게 拒絶했다. 申叔舟는 成三問 等의 端宗 復位 運動 이 名分上으로는 옳지만, 人力과 裝備 不足으로 實現히 不可能하다고 判斷했다. 그는 한명회나 권람 等에게는 이 事實을 告變하지 않았는데, 뒤에 金叱 이 自身의 丈人 정창손 의 說得으로 擧事를 暴露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死六臣의 擧事를 密告했다는 所聞이 퍼지면서 김시습 等은 그를 醜한 背信者와 變節者로 糾彈하였고, 士林派들의 嘲弄거리가 되었다. [10]

아내의 葬禮 後 큰아들 神主가 22살로 世上을 떠나고 큰며느리 韓明澮의 딸이 孫子 신종호(세째)를 낳았으니 어린 孫子들을 생각하면 그때의 心境을 헤아려 볼 만하다.

그는 自身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6] 이로써 死六臣과는 訣別을 決心했다.

자네와는 모시기로 한 主君이 달라져서 이제 가는 길도 어긋났지만 자네의 굳은 節義는 眞心으로 尊敬하고 있네. 萬若 내가 자네와 같은 選擇을 했더라면 나도 자네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程度 흉내는 냈을 것이네.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는구먼. '굼벵이는 더럽지만 매미로 變해 가을바람에 맑은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엔 빛이 없지만 그곳에서 나온 반딧불은 여름밤을 빛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깨끗함은 恒常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음은 恒常 어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便 死六臣 中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切親한 벗이었지만, 成三問은 端宗 復位 擧事를 圖謀할 때 '비록 申叔舟는 나의 平生 벗이긴 하나 罪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8] 또한 死六臣의 동정론과 함께 自身에게 加해지는 非難에 對해 端宗 卽位 後 權臣들이 어린 王의 눈과 귀를 가리고 權力을 濫用하는 것을 傍觀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며 反駁하였고, 하위지 等이 世宗의 한글創製 當時 이를 反對, 批判한 點을 들어 文盲을 救하려던 世宗의 意志를 反對하던 臣下들과 死六臣을 比喩, 盲目的인 保守性을 批判하였다.

1456年 (世祖 2年) 성삼문, 하위지 等의 端宗 復位 計劃이 發覺되고 死六臣과 그 關聯者들이 處刑되었다. 申叔舟는 政丞들과 함께 入朝하여 端宗을 降等시키고 西人으로 만들 것을 建議했고, 端宗은 魯山君으로 降等되었다. 死六臣인 成三問과 朴彭年은 刑問을 當하면서도 屈하지 않고 申叔舟를 向해 反逆者, 背信者라고 糾彈하였는데 이때 申叔舟는 그들에게 그들은 端宗의 忠臣이지만 金賞(世祖)의 忠臣은 아니라며 抗辯하였다. 申叔舟는 世祖 옆에서 그들의 拷問 場面을 지켜봤으며 成三問의 叱咤에도 默默히 자리를 지켰다.

死六臣의 處刑 直後 그는 邊方 의 築城을 强化하고 南海 海岸가에 出沒하는 倭寇를 擊退하게 하였으며, 對馬島 逃走에게 조약문의 寫本을 보내 警告하였다. 곧 이어 慶尙北道 地域에서 이보흠 금성대군 等의 擧事로 端宗 復位 運動이 다시 發生하자, 彈劾 上疏를 올려 魯山君과 錦城大君의 處刑을 强力히 主張하여 世上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는 魯山君과 錦城大君의 處刑을 貫徹시켰다. 이때 그는 魯山君의 夫人 宋氏 를 自身의 奴婢 로 내려줄 것을 要請했지만 世祖도 그것만은 許諾하지 않았다. [11] 世祖는 身分만 비(婢)일 뿐 奴婢로서 使役시킬 수 없다 하여 정업원(淨業院)에 혼자 살게 하였다. [12] 이 事實이 알려지면서 山林에 隱遁中인 學者들은 그가 다른 뜻을 품지 않았는가 하며 疑惑과 嘲笑를 퍼부었다. 金時習은 그가 行次할 때마다 나타나서 面駁을 주거나 變節者라는 말로 嘲弄하기도 하였다.

1456年 (世祖 2年)에 兵曹判書 로서 國防에 必要한 外交應待의 일을 委任받아 事實上 禮曹 의 일도 管掌하였다. 1456年 兵曹判書와 禮曹判書 를 지내고 判中樞院事(判中樞院事)가 되어 판病調査(判兵曹事)를 겸하였으며, 그해 여름 議政府右贊成이 되어 成均館 大司成 을 지낸 뒤 1457年 가을 議政府 左贊成 (左贊成)李 되었다. 그 뒤 申叔舟는 世祖의 命을 받아 《東國正韻》의 編纂에 參與하였고, 農業과 牧畜에 對한 簡單한 백서인 《農産軸목서》를 찬하祈禱 했다.

倭寇와 女眞族 討伐 [ 編輯 ]

野戰부시도(夜戰賦詩圖)

1456年 野人(野人)들이 平安道 咸鏡道 에 자주 들어와 擄掠질을 하므로 賃金이 征伐하려고 하였으나 朝廷의 의론이 一致되지 않았다. 公만이 홀로 征伐할 수 있다고 하며 强勁 討伐을 主張하자 世祖는 '警의 말이 내 뜻에 꼭 맞다.'며 同意하였다. 그는 오래도록 邊方을 掠奪하던 女眞族 과 海岸가를 통해 忠淸道 까지 올라오는 倭寇 들에 對한 强勁 鎭壓과 嚴한 處罰을 建議하였다. 그는 直接 自身이 出廷하고 앞장서겠다고 하며 世祖에게 軍士를 일으킬 것을 建議하기도 했다.

1458年 (世祖 3年) 9月 左贊成 으로 平安道 都體察使 를 겸하였으며, 1458年 末 議政府 右議政 , 1459年 (世祖 5年)에 議政府 左議政 이 되었다. 1458年 (世祖 4)에 右議政이 된 뒤에도 그는 10年間 禮曹判書를 겸하여 國家 外交에 있어서도 큰 功績을 세웠다. 이는 左議政이 된 뒤에도 禮曹判書를 겸하게 된다. 그는 오래도록 禮曹判書로 在職하면서 明나라와 日本과의 外交關係를 맡는 等 外交政策의 立案者 兼 責任者로서도 活躍했다.

신숙주 親筆 便紙 書信

또한 軍事 指導者로서의 指導力 이 있어서 1460年 (世祖 6)에는 江原道 ·平安道· 咸吉道 都體察使 宣慰使 (宣慰使)가 되어 兵力을 이끌고 2次例에 걸쳐 東北方面에 자주 出沒하여 掠奪하던 모련위(毛憐衛) 女眞族을 掃蕩하기 위해 出征하였다. 모련위 女眞族과의 交戰에서 北方 誤診 (五鎭)에 이르러 그는 直接 江을 건너, 山岳地帶로 女眞族을 誘引하여 뛰어난 戰術을 驅使하여 野人의 巢窟을 掃蕩하고 돌아왔다.

그는 將兵을 여러 部隊로 나누어 豆滿江邊에 陣을 친 뒤 여러 길로 한꺼번에 進擊하도록 하여, 깊숙이 進擊하여 野人을 討伐하고 돌아왔다. 그날 저녁 女眞族이 밤을 타서 뒤를 攻擊해 오자 營中 (營中)에서 이들을 相對했으나 그는 唐慌하지 않고 침착히 對應했다. 그는 누워서 일어나지 않은 채 幕僚(幕僚)를 불러 詩 한 數를 倉貨(唱和)하였는데 그 詩에 ' 오랑캐 땅 서리 내려 邊方은 찬데, 鐵器는 百里 사이를 누비네. 밤 싸움은 그치지 않았는데 날이 새려 하네. 누워서 北斗星 보니 영롱히 반짝인다'라고 하였다. 夜밤의 奇襲攻擊이었지만 장사들이 공이 이렇게 便安하고 閑暇한 것을 보고는 勇氣를 내어 오히려 動搖하지 않았다. 그 方略(方略)을 가르쳐 주고 勇氣있는 者나 겁내는 者 모두 奮發하게 하여 오히려 女眞族을 驛追擊하여 그 다음날 女眞族의 巢窟을 完破하였다.

1461年 (世祖 7)에 이에 對하여 王命으로 < 北征錄 >(北征錄)을 著述하였다. 또한 南海岸에도 兵力의 派遣을 建議하여 南海岸을 掠奪하는 倭寇 를 討伐하게 했다. 以後에도 海岸가와 邊方에 城郭을 收縮, 改補修하고 火砲類를 設置하여 未久에 있을 外侵을 對備할 것을 常駐하였다. 1品冠이 되자 그의 功臣 爵位 亦是 高齡府院君(高靈府院君)으로 進封되었다.

生涯 後半 [ 編輯 ]

領議政 任命 [ 編輯 ]

1462年 (世祖 8年) 5月 20日 領議政府使 로 昇進하였다. 그의 領議政府使 任命 直後 死六臣과 갈라선 것에 對한 非難 輿論이 일어나자 一旦 辭任하였다가 다시 復職했다. 그러나 그는 自身의 地位가 너무 높아진 것을 念慮하여 1464年 領議政府使職을 辭職했다. [8] 世祖는 그의 社稷을 許諾하지 않았으나 그는 거듭 辭職하여 물러났다. 1464年 (世祖 10年) 領春秋館事 (領春秋館事)가 됐다.

1464年 7月 日本에 派遣되는 通信社 (通信使)가 되어 배便으로 日本을 訪問하였다. 그러나 7月 19日 日本 國王 高하나條노 가 病으로 죽었으므로 日本側의 待接은 疏忽하였고 그해 12月 배便으로 歸國하였다.

1466年 9月 外職에 오래 머물렀던 功臣 楊汀 이 任期가 차서 中央에 召喚되면서 世祖가 北方에서 오래 勤務한 일로 慰勞宴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糧政은 醉中에 世祖에게 '上監께서도 오랫동안 王位에 계셨으니 이제 便히 餘生을 즐기는 것이 어떠냐'며 王位를 宣威(禪位)하라고 進言하였다. 申叔舟 等은 그의 發言을 말렸으나 事態는 擴大되었다. 糧政의 醉中 發言에 火가 난 世祖는 承旨를 불러 그 뜻을 말하고 皇位를 世子에게 물려주려 하니 承旨 들은 限死코 이에 應하려 하지 않고 氣勢가 매우 險惡하였다. 申叔舟는 죽음을 覺悟하고 讓位 事態를 말려서 撫摩하였다.

1467年 에는 李施愛의 亂 때 亂에 協力했다는 誣告를 當했으나 王이 듣지 않았다. 1467年 建州衛 討伐에 出征하여 功을 세워 그해 12月 軍功 3等(軍功三等)에 錄勳되었다. 以後 그는 平安道와 咸鏡道에 城郭을 쌓고, 各 軍에도 城郭을 改補修하게 하여 未久에 있을 女眞族과 몽골族 等의 侵略에 對備할 것을 建議하였다. 1467年 禮曹判書를 兼任하였다.

南怡의 獄事 前後 [ 編輯 ]

1468年 世祖는 죽음을 앞두고 ' 唐 太宗 에게는 魏徵 , 나에게는 宿主'라고 말했다고 한다. [3] 世祖가 申叔舟를 唐 太宗의 魏徵에 比肩한 것은 自身도 唐 太宗처럼 申叔舟를 통해 文化 統治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便으로는 그만큼 申叔舟를 信賴했다는 뜻이 된다. [3]

1468年 世祖가 病으로 죽고 睿宗 이 어려서 卽位하자 申叔舟는 한명회, 구치관, 鄭麟趾 等과 함께 原狀 (院相)의 한사람으로 承政院 에 들어가 정희왕후 와 함께 抒情(庶政)을 處決하고 混亂을 收拾하였으며, 睿宗 卽位 後 南怡의 獄事 가 發生하자 그는 유자광 等과 함께 尉官으로 參與, 남이 將軍과 康純 等을 심문한 뒤 肅淸하여, 數充補사병기靖難 翊戴功臣 (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義警世子 腸 이 갑자기 病으로 死亡하고 史家로 나가게 된 수빈 韓氏(後日의 仁粹大妃 )는 自身의 一族인 한명회 外에 그의 집에도 자주 枉臨하였는데, 그는 수빈의 둘째 아들 字乙山君 穴(後날의 成宗 )을 눈여겨보게 된다. 義警世子가 病으로 죽자 현덕왕후 의 詛呪로 죽었다는 所聞이 各地에 擴散되자, 그는 이를 根據없는 헛所聞이라며 一蹴하였다. 義警世子가 斷種보다 일찍 死亡하였으나 현덕왕후의 詛呪로 義警世子가 죽었다는 所聞은 繼續 擴散되었다.

成宗 卽位 直後 [ 編輯 ]

신숙주 影幀 ( 1749年 作)
申叔舟의 親筆 時

1469年 睿宗이 在位 1年 만에 죽자 그는 呈戱王后에게 義警世子의 둘째 아들 字乙山君 穴을 王으로 推薦했다. 정희왕후 가 字乙山君으로 後繼者를 決定하였을 때 龜城君 을 推薦하는 反對 意見이 나오자 그는“속히 尙州(喪主)를 定하여서 人心을 안정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여 呈戱王后의 決定을 積極 支持한다. 1469年 禮曹判書 代理, 兼 春秋館 領事(兼春秋館領事)를 지냈다.

그는 1467年 부터 오래 禮曹判書를 兼任하였다. 그는 事大交隣 (事大交隣)을 自身의 信念처럼 여겼다 한다. 明나라와 女眞族, 日本, 유구국 等에 보내는 表詮(表箋)과 使命(辭命) 文件을 모두 그가 直接 最終 檢討를 하였다. 外交業務를 맡으면서도 오히려 주는 것은 厚하고 받는 것은 적어서 國內 사람들의 誤解를 받기도 했지만, 相對 外交國으로부터는 언제나 歡心을 얻었다.

사람과 交際하는 것이 말로는 쉬운 일 같지만 實狀은 어려운 것이다. 오직 至極한 精誠만이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 精誠을 쏟지 않고, 眞心이 없는데 어찌 相對方을 감동시키겠는가? 中部 (中孚)의 神(信)도 熱心히 믿으면 돼지나 물고기에게까지도 感動을 줄 수 있다 하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影響이 미치지 못하겠는가?

사람들은 그를 外交의 達人이라며 稱讚하였지만, 그는 사람을 사귀는 것과 脾胃를 맞추는 것을 例로 들며 外交든 對人 接賓이든 쉽지 않음을 吐露하였다.

1469年 (成宗 1年) 12月 29日 王命으로 한명회, 구치관, 崔沆 , 조석문 (曺錫文), 金叱 等과 함께 經筵廳 領事(經筵廳領事)를 兼任하였다.

書籍 編纂과 領議政 在任 [ 編輯 ]

成宗이 卽位하자 그를 推戴한 功勞로 1471年 (成宗 2年) 純聲明輛經濟紅花 佐理功臣 (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等에 책록되고 다시 領議政 에 任命되었다. 그는 이때 老兵을 理由로 여러番 辭職하였으나 成宗의 允許를 받지 못했으며, 以後 政治的, 學問的 影響力을 發揮하며 政界에 남아 있었다. [8]

申叔舟는 兵力 1萬 以上을 增强하도록 建議하여 兵力을 養成하여 北方과 海岸가의 防備에 힘썼다.

勳舊 功臣의 地位에 있었으나 功臣과 勳舊派 의 勢力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判斷한 申叔舟는 平生 사치스럽게 行動하지 않았고, 自身의 地位를 利用해서 威勢를 부리지 않고 謙遜하게 處身하여 世人들의 稱頌과 德望높은 人物이라는 好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死後 그의 儉素함과 謙遜함은 묻혀지게 된다. 그러나 金時習만큼은 그를 끝까지 認定하지 않았는데, 그의 가마나 餃子 行次 詩에 나타나 辱說과 嘲弄을 퍼붓고 揶揄를 보냈다. 申叔舟의 下人들이 김시습 을 制止하려 하였으나 그는 下人들을 나무라며 挽留하였다.

그는 麻浦 漢江邊 淡淡情 (淡淡亭)을 짓고 文人, 詩人들과 交遊하였다. 또한 書室을 짓고 文人들에게 글과 司書六卿, 歷史와 古典 等을 가르치는 한便 그림에도 能하여 그림과 書畫 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書室에는 많은 글과 學問, 그림, 書藝를 배우고자 하는 靑年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死六臣과 生六臣 은 斷種에게는 忠臣이지만 世祖의 立場에서는 忠臣이 아니며 個人에게는 忠臣이지만 國家의 百年大計를 봤을 때는 옳은 行動은 아니라고 判斷하였다. 한便으로 同僚 功臣들의 專橫을 눈여겨보면서 그는 功臣들의 映畫가 永遠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判斷하였다. 그는 自身의 孫子 신용개 김종직 에게 보내 受學하게 했다.

領議政 在職 中 最後 [ 編輯 ]

申叔舟의 墓碑

1473年 忠勳府 堂上 (忠勳府堂上)李 되었으며 경혜공주 의 아들 정미수 (鄭眉壽)가 分에 넘치는 惠澤을 받는다는 理由로 彈劾하였으나 成宗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 (成宗 5年) 2月 病을 理由로 辭職을 請하는 上疏를 올렸으나 成宗이 이를 返戾하였다.

1474년 4月 24日 공혜왕후 의 國喪 時 國葬都監 都提調(國葬都監都提調)에 任命되어 그해 6月 까지 葬禮式을 主管하였다.

1475年 病으로 辭職을 請했으나 王이 許諾하지 않아 繼續 領議政 職에 있었다. 王이 그에게 特別히 几杖 과 眼帶를 下士하려 하였지만 그는 自身이 几杖을 받을 나이는 아니라며 조용히 辭讓하였다. 한便으로 日本과 餘震 을 警戒하여 北方과 海岸가의 防備에 注力할 것을 建議하기도 하였다. 臨終 直前에 問病 온 成宗이 助言을 묻자 '日本과의 和親 關係를 잃지 마소서'라고 遺言하였다. 그러고는 病으로 죽었다 [13]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書藝 로도 才能을 發揮해 特히 松雪體를 잘 썼다고 한다. 그는 松雪體 의 流麗한 筆致를 보여주는 《 夢遊桃源圖 》에 對한 撰文과 해서 체의 眞面目을 보여주는 《火名士 例兼 시고》 等의 作品을 남겼다. [8]

많은 市와 다양한 著作과 作品을 남겼으나 後日 士林派 에 依해 逆賊으로 斷罪되면서 그의 著書와 作品, 詩, 글씨들 中에는 中宗 때와 壬辰倭亂 , 丁酉再亂 , 丙子胡亂 때 多數 燒却되거나 湮滅되었다. 또한 그가 死後 變節者, 背信者로 罵倒당하면서 그의 作品과 著書, 詩, 그림 等은 大部分 외면당하고 말았다. 現在 傳하는 作品으로는 著書인 《保閑齋集》(保閑齋集), 《北征錄》(北征錄), 《四聲通攷》(四聲通攷), 《農産軸목서》, 《海東諸國記》(海東諸國記) 等이 있고, 글씨로는 松雪體 의 流麗한 筆致를 보여주는 《 夢遊桃源圖 》의 撰文(贊文)과 楷書體 의 作品 《火名士例兼시고 (和明使倪謙詩稿)》 等이 現傳한다. [8] 特히 《保閑齋集》은 1644年 (仁祖 22年) 申叔舟의 6代孫인 信宿 (申?)李 榮州郡守 로 있을 때 校書館 에 所藏되어 있던 文集의 完帙을 빌려서 模寫한 것이 傳한다.

事後 [ 編輯 ]

事後 京畿道 楊州郡 별내면 高山梨(現 議政府市 고산동) 산5번지 野山에 安葬되었으며 夫人 霧淞郡夫人 霧淞尹氏와 雙墳으로 造成되었다. 後日 그의 子孫들 墓所도 近處에 造成되면서 墓域이 되었다. 墓碑文은 이승소 (李承召)가 썼고, 神道碑 門은 정난종 (鄭蘭宗)李 찬하였다. 以後 의 卯正에 從祀되고, 문충(文忠)의 諡號가 追敍되었다. 忠北 淸州市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當 (九峯影堂), 淸州市 낭성면 관정리의 墨釘서원 (墨井書院) 等에 祭享되었다. 定難功臣 , 佐翼功臣 , 翊戴功臣 , 保社功臣 , 佐理功臣 等에 책록되었으므로 成宗은 그에게 不祧之典을 내려 不遷之位 가 되었다.

그의 肖像畫는 1445年 警 明나라 化工에 依해 그려진 底本設色에 肩章簇子로 된 影幀과 15世紀 後半, 死亡 直後에 그려진 影幀, 1445年 明나라畫家本 및 其他 影幀들을 參考로 그린 1749年 본 影幀 等이 傳한다. 1445年 警 明나라 化工本 影幀은 現 淸州市 에 位置한 구봉영黨에 奉安되어 있다가 1970年 以後 公開되었고, 模寫本은 墨釘影堂 과 고잔墓 等에 奉安되어 있었다. 이 中 1445年 에 明나라 畫家가 그린 元本 신숙주 影幀은 1977年 11月 15日 大韓民國 寶物 第 613號로 指定되었다.

家族 關係 [ 編輯 ]

三寸 申平(申枰)의 딸로 四寸누이가 廢妃 尹氏 의 母親이자 연산군 의 外할머니인 夫婦인 신氏이다. 넷째 아들 신정의 딸 申氏는 太宗의 庶子 온녕군의 孫子인 衿川道政 異變과 結婚하였다. 아들 神主의 아들인 신종호는 世宗의 庶孫女사위이며, 신종호의 아들이자 그의 曾孫인 신항 은 다시 成宗의 庶女 惠宿翁主 와 結婚하여 王室과 姻戚關係를 形成하였다. 夫人 尹氏는 1456年 丙子年 1月 21日 死亡하였다. 死六臣의 獄舍는 尹氏의 죽음 5個月 뒤인 6月의 일이었음을 世祖實錄에서는 적고있다.

  • 할아버지 : 신포시 (申包翅)
  • 할머니 : 慶州 金氏 - 김충한(金沖漢)의 딸
  • 아버지  : 신장 (申檣, 1382年 ~ 1433年 2月 8日)
  • 어머니  : 羅州 鄭氏 - 精油(鄭有)의 딸
    • 兄 : 新盟主(申孟舟)
    • 兄 : 신중주(申仲舟, 1412 ~ 1447)
    • 男동생 : 신송주(申松舟, 1419 ~ 1464)
    • 男동생 : 신말주 (申末舟, 1429 ~ 1503)
    • 女同生 : 조효문(? ~ 1462)의 妻
    • 否認  : 霧淞郡夫人 霧淞 尹氏 (茂松郡夫人 茂松 尹氏, ? ~ 1456年 1月 23日) - 윤경연(尹景淵)의 딸
      • 長男 : 新株(申澍, 1434年 ~ 1456年 2月 21日)
      • 며느리 : 淸州 韓氏 - 한명회 (韓明澮)의 長女
        • 孫子 : 新種흡(申從洽, 1454 ~ ?)
        • 손自負 : 소숙옹주 (太宗의 庶女)의 딸 해평 尹氏
        • 孫子 : 신종옥(申從沃, 1455 ~ ?)
        • 孫子 : 신종호(申從濩, 1456 ~ ?) - 의창군 (世宗의 庶子)의 사위
      • 次男 : 新面 (申沔, ? ~ 1467年 5月 21日)
      • 며느리 : 鄭氏 - 정호(丁湖)의 딸
        • 孫子 : 신용관(申用灌, 1459 ~ ?)
        • 孫子 : 신용개 (申用漑, 1463年 10月 5日 ~ 1519年)
        • 孫女 : 講學손(姜鶴孫)의 妻
      • 3男 : 神饌(申澯)
        • 孫女 : 정유강(鄭有綱)의 妻
      • 4男 : 新正 (申瀞, 1442 ~ 1482)
      • 며느리 : 全州 李氏 - 후령群 (太宗의 서7남)의 딸
        • 孫子 : 신영홍(申永洪, 1469 ~ ?)
        • 孫子 : 신영철(申永澈, 1471 ~ ?)
      • 5男 : 神俊(申浚, 1444 ~ ?)
      • 子婦 : 유수창(柳秀昌)의 딸
        • 孫子 : 신복순(申復淳, 1464 ~ ?)
        • 孫女 : 신氏 - 衿川道政 異變(太宗의 庶子 온녕군 의 孫子)의 妻
      • 6男 : 新婦(申溥, 1446 ~ ?)
        • 孫女 : 조수강(趙壽崗)의 妻
      • 7男 : 新型(申泂, 1449 ~ ?)
      • 며느리 : 連日 鄭氏 - 政府(鄭溥)의 딸
        • 孫子 : 신광윤(申光潤, 1468年 9月 24日 - 1554年 10月 15日)
        • 孫子 : 신광한 (申光漢)
      • 8男 : 宸筆(申泌, 1454 ~ ?)
      • 며느리 : 坡平 尹氏 - 精神翁主 의 아들 윤삼원(尹三元)의 次女
        • 孫子 : 신세연(申世淵, 1473 ~ ?)
        • 孫子 : 신세광(申世洸, 1474 ~ ?)
        • 孫女 : 晉州 河氏 縣監(縣監) 하형(河瀅)의 妻
        • 孫女 : 최준(崔俊)의 妻
        • 孫女 : 丹陽 于氏 參奉(參奉) 優勢犯(禹世範)의 妻
      • 長女 : 신氏(1455 ~ ?) - 神明數(申命壽)의 妻
    • 側室  : 裵氏(裵氏)
      • 9男(庶子) : 신결(申潔)
      • 次女(庶女) : 宿願 신氏(淑媛 申氏) - 世祖의 後宮

關聯 作品 [ 編輯 ]

텔레비전 드라마 [ 編輯 ]

演劇, 映畫 [ 編輯 ]

기타 [ 編輯 ]

業績 [ 編輯 ]

그는 多國語에 能하였고, 卓越한 學識과 문재로써 다양한 冊을 編纂하고 歷史的, 學問的 素養이 깊어 學問 敎育에도 業績을 남겼다. 그는 儒敎 司書六卿 外에도 風水地理學 노장 思想 등에도 該博한 知識을 갖고 있었다. 世祖의 文化 統治를 위해 王들의 龜鑑이 될 《國朝寶鑑》을 編纂했고, 國家 秩序의 基本을 적은 《國朝五禮儀》를 矯正, 刊行하였으며 [8] , 사서 五經 의 口訣을 새로이 만들었다. [8] 또한 《世祖實錄》과 《睿宗實錄》의 編纂에 參與하였고 《東國通鑑》의 編纂을 總括하였고, 《東國正韻》, 《영모록》(永慕錄) 等을 撰修하였으며,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編纂에도 參與하였다. 日本에 通信使 書狀官으로 다녀 온 後 몇番 日本을 往來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記錄, 이를 土臺로 日本의 風物과 慣習, 言語, 政治 勢力, 日本의 氣候, 自然 條件, 日本과의 外交視 必要한 事項 等을 詳細하게 밝혀 놓은 《海東諸國記》를 著述하여 向後 日本과의 交隣外交에 參考가 되게 하였다. 또 申叔舟는 그림을 잘 그려서 日本과 餘震의 地圖, 베이징 의 指導를 만들었으나 後에 모두 實戰되었다.

그의 著書 中 四聲通攷는 後代에 實戰되었지만, 中宗 때의 漢語 通譯官 이자 言語學者인 최세진 이 그의 四聲通攷를 參照하여 《四聲通解》(四聲通解)를 짓기도 했다.

그는 退廳 後에도 別途의 書室을 열고 文人들을 길러냈다. 世祖 때에 過去 試驗의 注視館(主試官)을 13回나 過去 試驗을 하여 合格者들을 選拔하여, 座主 門生關係를 形成하니 直接 길러낸 弟子들 外에도 座主-門生 關係를 통해 사람을 얻음이 當代에서 가장 많았다.

또한 訓民正音의 擴散을 위한 事業에도 參與하여 수많은 古典과 佛經 의 諺解本 等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4] 그는 特히 外交와 國防에 卓越한 能力을 發揮했는데, 當時 이 分野에 關聯된 大部分의 著述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程度였다. [8]

史上 [ 編輯 ]

改革官 [ 編輯 ]

그는 새로운 人材를 登用하는 것이 改革이라 생각했다. 成三問과 申叔舟의 政治改革에 對한 處方은 비슷하면서도 若干 다르다. 成三問은 '制度改革보다 마음을 바로 하는 것이 더욱 重要하다 [15] '고 强調하는 反面 申叔舟는 '制度改革보다 人材를 바로 登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5] 그는 사람이 바뀌지 않고는 制度의 改革이 어렵다고 判斷했고, 改革이 어려운 理由로는 旣得權의 反撥을 指目했다.

迷信에 對한 排擊 [ 編輯 ]

그는 巫俗 과 占術 等을 迷信이라며 批判하였다. 1443年 (世宗 25年) 10月 日本에 使臣으로 갔다 歸國하는 길에 玄海灘 앞바다에서 風浪을 만나 배가 沈沒될 危險이 닥치자, 當時 沙工들은 點을 쳐서 배가 坐礁될 危機에 處한 것은 그 배에 乘船한 妊娠한 女子 때문이라는 怨聲이 일며 그女는 바다에 던져 龍王의 瞋怒를 풀어야 된다고 하였다.

이 妊産婦는 바다에 던져질 危機에 處했으나 申叔舟가 나서서 이를 말렸다. 그는 氣候의 變化는 自然의 뜻이라며 '每事를 어떻게 占術과 豫言 에만 依存하려 하느냐'며 '남을 죽여서 나 살기를 求하는 것은 人間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라면서 말렸다. 얼마 뒤 구름이 걷히면서 風浪이 멈추었고, 그의 機智로 妊産婦는 劇的으로 목숨을 救하였다.

名分論에 對한 拒否 [ 編輯 ]

그가 首陽大君을 따라 明나라에 使節로 派遣되었을 때 明나라는 永樂帝 建文帝 사이의 王位 다툼이 끝나고 이른바 '人選의 치'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永樂帝와 建文帝의 帝權 다툼과 永樂帝가 淨化 等을 重用하여 文治와 貿易으로 明나라를 繁榮시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다. 그는 新興國家로서 興隆하는 明나라의 모습을 보며, 朝鮮의 선비社會를 支配하는 名分論과 義理論에 對한 批判的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첫 스승인 輪廻를 통해 程度前科 河崙 의 學統을 繼承한 것과 스승 정인지를 通해 정몽주 의 學統 等 多樣한 스승의 學問을 接한 것도 그가 한가지 思想에 얽매이지 않는 要因이 됐다. 이것이 뒤에 成三問, 朴彭年 等과 現實政治에서 길을 달리 걷게 된 思想的 原因 中의 하나가 된다.

그는 現實에 도움이 되지 않는 名分은 廢棄處分해야 된다고 하였다. 朝鮮王朝實錄 에 依하면 그는 '恒常 根本的인 것만 밝히고 지나치게 細細한 것은 따지지 않았으며 臺詞를 處理하고 大義를 決斷하는 것이 降下(江河)를 터 놓은 듯 시원스러웠다'고 한다.

성삼문과의 比較 [ 編輯 ]

申叔舟는 現實이 重要한 것이며 남는 것은 人間이 成就해 놓은 業績이라고 생각했고, 成三問은 以上이 重要한 것이고 남는 것은 大義라고 생각했다. [6] 成三問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成三問은 죽어가면서 自身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申叔舟는 端宗의 廢位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自身의 갈 길을 갔다. [6]

申叔舟와 달리 成三問은 政治的인 것보다는 學問的이며 儒敎的인 性向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人物이었다. 그에게 政治的 經綸은 그리 重要할 것이 없었다. 그의 窮極的 關心은 充軍과 절의, 그리고 學問이었다. [6]

世祖와의 關係 [ 編輯 ]

申叔舟는 癸酉靖難의 公的 面에서는 한명회보다는 적을지는 모르나, 世祖에게 끼친 政治的 影響力과 個人的인 親分에서는 누구보다 앞섰다. [3] 따라서 定社를 論하는 것과 關聯하여 申叔舟는 斷然 世祖의 오른팔格이었다. [3] 世祖는 그의 豪放하면서도 緻密한 性品을 높이 샀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그에 對한 當代의 評은 '大義를 따르는 果斷性 있는 人物'이었으나 後代에는 死六臣, 生六臣 等을 쫓는 道學的인 雰圍氣가 形成돼 '機會에 能한 變節者'로 評價되었다. [14]

肯定的 評價 [ 編輯 ]

査頓이기도 한 용재 履行 은 그를 많은 知識을 集大成하고 實戰, 實務에 適用시키는 能力을 높이 評價하였다. 申叔舟는 訓民正音 硏究에 오래 參與하였고 集賢殿에 勤務하는 동안 退勤도 잊고 讀書室에서 硏究로 밤을 새는 일이 許多하였다. 또한 集賢殿 學士로 있으면서 當直을 自請하였고 當直이 아니라도 書庫에서 날을 새는 그의 熱情을 世宗은 높이 評價했다. 世宗이 世子에게 말하기를, '申叔舟는 文武에 두루 能하여 國史를 付託할 만한 者이다.'라고 하였고, [2] 世祖를 만나서는 計策이 行해지고 말은 받아들여졌다. 世宗과 世祖는 그를 各別히 信賴하여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렀다.

建國 初期 不便했던 조일(朝日) 關係를 正常化시켰고, 江原道와 咸吉道 의 體察使(體察使)로 派遣되어 餘震]의 侵略을 막았으며, 몇 十 年 동안 禮曹判書와 兵曹判書로 國家에 奉仕하는 等 朝鮮時代 가장 뛰어난 語學者, 外交街, 著述家, 飜譯家, 經綸家, 軍事專門家, 名宰相으로서 많은 功을 세웠으나 世祖의 反正功臣이라는 理由로 士林派에 依해 그 功勞가 貶下되었다. [6] 王政의 非能率性이 人爲的으로 除去되지 않는 當時의 時代 狀況에서 申叔舟가 一身의 영달 만을 圖謀했다고 보기는 어렵는 見解도 있다. [6] 死後 50年 뒤에 編纂된 1525年 慵齋叢話 에는 申叔舟를 가리켜 '그 文章과 道德에서 모두 一帶의 尊敬을 받았다'는 記錄이 있다.

그는 靖難에 犧牲되지 않고 살아남아 한글 硏究와 普及, 傳承에 寄與했다는 評價가 있다. 또한 大義를 따른 果敢한 人事라는 評價도 있다. 그는 世祖가 卽位하는 것을 돕고 많은 重要한 職責에 올랐기 때문에 變節者라는 批判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가장 偉大한 臣下 中 하나였고, 訓民正音을 創造할 때 크게 貢獻한 臣下로 稱頌받는다. 하지만 訓民正音 創製에 申叔舟, 成三問 等 集賢殿 學者들의 功이 있다는 얘기는 어떤 記錄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否定的 評價 [ 編輯 ]

成宗 以後 士林派가 政界에 進出하면서 申叔舟는 世宗의 遺言을 저버린 背信者, 同僚들을 背信한 變節者로 指目되어 糾彈의 對象이 되었다. 死六臣과 生六臣이라는 用語는 中宗 以後 士林派가 만들었다. [2] 이는 士林派의 大義 名分이라는 價値觀에 立脚한 貶下였다. 또한 그가 死六臣의 擧事를 密告했다는 出處不明의 所聞이 돌면서 金時習 等으로부터 甚한 批判을 받기도 했다. 世祖의 功臣으로 있을 때는 王의 뜻에만 便乘하여 承順(承順)만을 힘썼고, 睿宗 때에는 刑罰을 내릴 때 공정함을 잃었으며, 南怡와 康純義 抑鬱함을 救濟하지 않았다 하여 當代에 批判을 받기도 했다.

柳子光 等이 南怡를 處刑할 때 同調한 點 亦是, 남이 에 對한 동정론과 함께 맞물려서 그에 對한 非難의 素材의 하나로 活用됐다. 民族的 節義를 高揚시킬 必要가 切實했던 日帝强占期에는 쓰여진 一種의 非公式 歷史書인 金澤榮의 《 한死境 》에는 世祖 卽位 前後의 生死를 오가는 權力鬪爭의 渦中에서 申叔舟가 美貌에 끌려 端宗費 宋氏를 奴婢로 들이겠다고 請했다는 虛構的이면서도 多少 煽情的인 이야기가 登場할 程度였다.

한때 申叔舟는 志操와 義理가 强調되던 時代에 쓰여진 [2] 이광수 의 《 단종애사 》나 月灘 박종화 의 《 錦衫의 피 》, 《 목메이는 女子 》 等의 作品에서 否定的으로 描寫되기도 했다. 特히 日帝强占期 《단종애사》는 널리 읽히는 小說이었고 이는 光復 以後 敎科書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流行 亦是 신숙주에 對한 否定的인 評價를 擴散시키는데 寄與했다. [6] 신복룡 건국대 敎授는 사람들이 드라마와 野史, 신숙주에 對한 否定的인 記錄만을 信賴하여 申叔舟를 一方的으로 否定的으로 評價했다고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에 이광수(李光洙)의 小說 하나쯤은 읽고 感動을 받았던 經驗을 갖고 있다. 나 自身도 例外는 아니어서 꿈 많던 學窓 時節에 ‘흙’을 읽으면서 浪漫的인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고,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으며 눈물을 훌쩍거린 적도 있다. 特히 ‘단종애사’는 어린 時節 깊은 感動과 함께 歷史學에 對한 關心을 일깨워 주었다. ‘단종애사’를 읽은 大部分의 讀者들은 悲憤慷慨할 수밖에 없다. 讀者들은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死六臣의 절의(節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反面 首陽大君(首陽大君)과 그의 追從者였던 신숙주(申叔舟)에 憤怒한다. 特히 成三問이 國文(鞠問)을 當하고 죽던 날 申叔舟가 집에 돌아오니 그의 아내 尹(尹)氏가 男便을 向해 오랜 同志인 成三問과 함께 節義를 지켜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을 詰責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다락에 올라가 목을 매어 自殺하는 場面에서는 더욱 悲感(悲感)함을 禁할 수 없다. 이같은 野史(野史)를 記憶하고 있는 우리는 申叔舟와 成三問의 政治的 功過나 善惡을 따질 때면 成三問의 便을 드는 데 익숙해졌다. 成三問은 醫人이요 申叔舟는 비겁자라는 것이다. [6]

또한 小說 《단종애사》 속에서 節槪를 지키지 않은 男便을 부끄러워해 夫人 尹氏가 自殺했다는 描寫는 歷史的 事實과 全혀 다르다. 尹氏는 自然死로 죽었으며 死亡 時期도 申叔舟가 使臣으로 派遣되어 任務를 遂行하는 途中이었다. [16] [17]

現代의 評價 [ 編輯 ]

1910年 (隆熙 4年) 朝鮮이 滅亡한 後로 그에 對한 批判은 多少 수그러들었고, 肯定的인 評價와 함께 照明 輿論도 나타났다. 그의 墓所인 京畿道 議政府의 신숙주 墓 1970年 代까지도 버려졌다가 1980年 以後부터 申叔舟의 役割에 對한 照明과 再評價 努力이 進行되면서 비로소 飼料와 申叔舟의 作品, 著書들도 整理, 再出刊되고 버려져 있던 墓所도 整備되었다. 全南 羅州郡 오룡동에 있던 그의 外家와 生家도 大韓民國 樹立 以後 1980年 代부터 聖域化와 再整備가 始作되었다.

한글學會 에서는 1971年 10月 9日 한글날 에 京畿道 議政府市 고산동 山53番地에 位置한 신숙주 卯正에다 ‘한글 創製 寺跡碑’를 建立했다. 忠北 淸原郡(現在는 淸州市 로 昇格)에서는 申叔舟의 影幀을 奉安한 影堂 等을 ‘道指定 文化財’로 指定 [2] 하였다. 文化관광부 2002年 10月 의 文化人物로 申叔舟를 選定했다. [2] 2007年 9月 15日 京畿道 平澤市 청북면 고잔리에 신숙주 文學碑가 세워졌다.

墓所는 議政府 矯導所 건너便 議政府市 고산동 산5번지 野山에 있다.

일화 [ 編輯 ]

申叔舟에게는 平生 그를 周邊에서 護衛하며 未來를 豫知해준 靑衣童子(靑衣童子)가 있었다는 傳說이 傳한다.

世祖는 그를 놀려줄 생각으로 구치관을 불러서 舊政丞이라 불렀다. 그러자 具致寬이 對答하자 舊(舊) 正承을 불렀는데 왜 새 政丞이 對答하느냐며 구치관, 申叔舟에게 罰酒를 내렸다. 世祖가 신정승을 부르자 申叔舟가 對答했는데 새 政丞을 불렀는데 申叔舟가 對答했다며 罰酒를 내렸다. 舊政丞을 부르자 申叔舟가 對答하자 舊(具) 正承을 불렀는데 申叔舟가 對答했다며 罰酒를 내렸고, 신정승을 찾아 具致寬이 答하자 神(申) 政丞을 찾았는데 舊政丞이 答한다며 罰酒를 내렸다.

한番은 申叔舟가 술坐席에서 世祖의 脾胃를 건드리는 發言을 하였다. 火가 난 世祖는 참고 있었는데, 그는 平素 새벽에도 일어나 冊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韓明澮는 祕密裏에 사람을 보내 王이 사람을 보낼 것이니 불을 끄고 자라고 일러주었다. 그 날 새벽 그는 冊을 읽지 않고 불을 끄고 있었고, 世祖가 보낸 承旨 內觀 은 그가 醉해서 자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事後, 사람들은 '飮食을 한 지 一週日만에 傷하는 食用 나물'을, 그의 이름을 빗대 숙주나물이라 불렀으며, '오래도록 嘲弄'하였다. 또한 '숙주나물을 料理할 때 머리 部分을 맷돌이나 방망이'로 짓이기는데, 이 또한 '申叔舟를 짓이기는 것이라'며 놀리기도 하였다.

野史에 依하면 그는 奴婢가 된 斷種 의 王妃 정순왕후 를 自身의 집 奴婢로 달라고 世祖 에게 請했다가 거절당했다. 이는 所聞으로만 傳해지다가 後에 金澤榮은 自身의 著書 《한死境》에 이 野史를 記錄해두었고, 後日 日帝强占期 때 文人 春園 이광수 는 自身의 作品 단종애사에 이 野史를 收錄하여 後代에 알려지게 되었다.

著書 및 作品 [ 編輯 ]

著書 [ 編輯 ]

  • 《保閑齋集》
  • 《四聲通攷》

編著 [ 編輯 ]

東國正韻
  • 農産軸목서
  • 東國正韻(共著)
  • 國朝寶鑑 (共著)

紀行文 [ 編輯 ]

書藝 [ 編輯 ]

  • 《夢遊桃源圖》의 撰文

作品 [ 編輯 ]

갤러리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申叔舟의 故鄕 羅州에 가다 - 오마이뉴스 2004年 2月 16日
  3.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들녘, 1998) 117페이지
  4. 10月의 文化人物, 신숙주 先生 오마이뉴스 2002.09.26
  5. 이코노미 21, '經濟 거꾸로 읽기-어학천재 申叔舟와 英語마을'
  6. [1] Archived 2013年 12月 30日 - 웨이백 머신 [ 신복룡敎授의 韓國史 새로보기6 ] 成三問과 신숙주 東亞日報 2001.05.04
  7. 世祖의 킹메이커-신숙주 韓國放送 韓國史傳, 2007年 7月 7日 放映分
  8.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들녘, 1998) 118페이지
  9. 다만 世祖가 王位에 올랐을 當時 申叔舟는 日本에 使臣으로 가 있었다.
  10. 實際 擧事를 暴露한 이는 정창손의 사위인 金叱이었다.
  11. 李庸瑄, 《淸白吏 列傳 (下)》 (매일경제신문사, 1993) 114페이지
  12. 이규태, 《韓國人의 샤머니즘》 (신원문화사, 2000) 292페이지
  13. 유성룡 ; (이재호 驛) (2007年 5月 20日) [1604]. 《懲毖錄(懲毖錄)》 . 歷史醫아침. 34쪽. ISBN   978-89-958849-5-9 . 2010年 10月 27日에 確認함 . 申叔舟以書狀往來 卽其一也 後叔舟臨卒成宗問所欲言 叔舟對曰 源國家毋與日本失和   (申叔舟가 署長을 가지고 오간 것이 바로 그 하나다. 後날 申叔舟가 죽음을 맞을 때 成宗이 訪問하여 遺言을 묻자 申叔舟가 對答하기를, 나라가 日本과의 禍(和, 사이 좋음)를 잃지 말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14. 朴榮圭, 119페이지
  15. [文化] 朝鮮過去實錄 朝鮮日報 1997. 3. 13日子
  16. “[신복룡敎授의 韓國史 새로보기6]성삼문과 신숙주” . 2005年 1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9月 28日에 確認함 .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
  17. 윤승운 畫伯의 歷史 漫畫 맹꽁이 書堂 》에서도 같은 說明이 나온다.

關聯 書籍 [ 編輯 ]

  • 박덕규, 《申叔舟 評傳:사람의 길 ,큰 사람의 길》 (둥지間, 1995)
  • 박기현, 《朝鮮의 킹메이커:8人8色 參謀들의 리더십》 (위즈덤하우스, 2008)
  • 손보기, 《세종대왕과 集賢殿》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4)
  • 지두환, 《朝鮮過去實錄》(동연刊, 1997)
  • 이홍직, 《새國史事典》 (교학사, 1983)
  • 이이화, 《王의 나라 臣下의 나라》 (김영사, 2008)
  • 신봉승, 《國保가 된 朝鮮 막사발》 (圖書出版 삶과 꿈, 2000)
  • 김남이, 《集賢殿 學士의 삶과 文學 世界》 (太學士, 2004)
  • 김갑동, 《옛사람 72人에게 智慧를 求하다》 (圖書出版 푸른역사, 2003)
  • 김태완, 冊文:朝鮮 過去試驗의 마지막關門 (소나무, 2004)
  • 박경남, 《申叔舟 知識人을 말하다:새 世上을 꿈꾼 朝鮮의 魂 7》 (圖書出版 포럼, 2009)
  • 박현모, 《世宗, 實錄 밖으로 行次하다:조선의 政治가 9人이 본 世宗》 (圖書出版 푸른역사, 2007)
  • 이덕일, 士禍로 보는 朝鮮 歷史 (石筆, 1998)
  •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들녘, 1998)
  • 이이화, 《이야기 人物韓國史 3, 5》 (한길사, 1993)
  • 정두희, 《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 硏究》 (일조각, 1983)

參考 文獻 [ 編輯 ]

  • 世宗實錄
  • 訓民正音
  • 文宗實錄
  • 端宗實錄
  • 世祖實錄
  • 睿宗實錄
  • 成宗實錄
  • 大東野乘
  • 國朝寶鑑
  • 燃藜室記述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兩班官僚의 文化"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崔沆
朝鮮 의 上級 國喪
1472年 5月 23日 ~ 1475年 6月 1日
後任
한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