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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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잠
雪岑
설잠 船社(梅月堂 김시습 先生) 肖像
出生 1435年
朝鮮 漢城府
入寂 1493年 (59歲)
朝鮮 忠淸道 홍산군 無量寺
俗名 김시습
金時習
學歷 1447年 重視 白日場에 壯元 及第
配偶者 南氏 夫人
父母 金日成(簿), 蔚珍 張氏 否認(某)
親戚 김겸間(祖父)
남孝例(匠人)
安氏 否認(丈母)

김시습 (金時習, 1435年 ~ 1493年 )은 朝鮮 初期의 文人, 學者이자 佛敎 僧侶이다. 生六臣 의 한 사람이다. 漢城府 에서 出生하였고 지난날 한때 慶尙道 金海 를 거쳐 江原道 江陵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本貫은 江陵 , 者(字)는 열경(悅卿), 號는 梅月堂(梅月堂)·同封(東峰)·碧山廳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佛敎 法名은 설잠 (雪岑)이다. 忠順衛(忠順衛)를 지낸 金日成(金日省)의 아들이다.

首陽大君 이 恣行한 斷種 에 對한 王位 簒奪 에 不滿을 품고 隱遁生活을 하다 僧侶 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一說에는 그가 死六臣 의 屍身을 몰래 收拾하여 京畿道 鷺梁津 (現在의 서울 鷺梁津 死六臣 公園 )에 暗葬했다고도 한다. 1493年 朝鮮 忠淸道 홍산군 無量寺에서 病死하였다. 이계전 (李季甸), 金泮 (金泮), 윤상(尹祥)의 文人이다.

別稱 [ 編輯 ]

는 열경(悅卿), 는 梅月堂(梅月堂), 同封(東峰), 碧山廳은(碧山淸隱), 萃세옹(贅世翁), 佛敎 법명 설잠 (雪岑).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武班 出身으로 忠順衛 를 歷任했다. 이름인 시습(時習)도 〈論語 論語〉 학이편(學而篇) 中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句節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生後 8個月에 글뜻을 알았다 하며, 3歲에 乳母가 맷돌로써 穀食을 빻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글을 지을 程度로 天才的인 才質을 타고 났다 한다.

5歲 때 이미 《 重用 》 《 大學 》에 통하여 神童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集賢殿 學士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驚歎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世宗大王 이 그의 天才性을 듣고 5歲의 金時習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었다. 그 內容에 感動한 世宗大王 文學 에 才能이 있는 그에게 稱讚하며 緋緞 을 膳物하자, 그 緋緞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少年期에 그는 當時의 碩學인 이계전 , 金泮 , 윤상 等을 찾아가 修學하였다.

隱遁과 放浪 生活 [ 編輯 ]

金鰲新話
( 朝鮮 中期 文身 윤춘년 이 筆寫한 筆寫本)

15歲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外家에 몸을 依託했으나, 3年이 채 못 되어 外叔母도 別世하여 다시 上京했을 때는 아버지도 重病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家庭的 逆境 속에서 訓鍊院 道政(都正) 남孝例(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順坦하지 못하였다.

三角山 중흥사에서 讀書를 하다 世祖의 王位 簒奪 消息을 듣고 3日 동안 門을 듣고 煩悶한 끝에 痛哭을 하고 冊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歲에 放浪의 길에 들어서, 京畿道 洋酒(楊州)의 受諾(水落), 壽春(壽春)의 사탄(史呑), 海上(海上)의 雪嶽(雪岳), 月城(月城)의 금오(金鰲) 等地를 두루 放浪하면서 글을 지어 世上의 虛無함을 읊었다. 그는 關西·關東·三南地方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百姓들의 삶을 直接 體驗했는데, 〈梅月堂示唆柳綠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詩篇들이 收錄되어 있다. 31歲에 慶州 金烏山 에 到着하였다.

47歲인 1481年(成宗 12)에 還屬(還俗), 安氏(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儒學者를 만났을 때는 佛道를 말하지 않았다. 世祖 때에 變節하여 6神(六臣)을 告한 領議政 정창손 을 길에서 面駁을 준 일이 있었다. 世祖 政變 以後부터 世上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꺼리며 두려워하였으나 宗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유응부 · 남효온 ·안應世(安應世)· 홍유손 4名만은 始終 變하지 않았다.

신숙주 정인지 , 정창손 의 行次를 길에서 보게 되면, 나타나 서슴없이 辱說을 날리며 嘲笑하였다. 한便 그가 만나 交遊하던 人物로는 서거정 , 김담 , 김종직 等이었다.

生涯 後半 [ 編輯 ]

性理學 思想에 厭症을 느낀 그는 僧侶 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어느 時點에 僧侶가 되었는가는 不分明하다.

1466年 (世祖 12)에 김시습, 유응부은 忠淸南道 公州郡 의 地域有志들과 함께 東鶴寺 叔母展 을 增築하고, 叔母展 옆에 壇을 쌓고 死六臣 斷種 에 關聯되어 殉節한 臣下들을 追慕하였다. 그러나 金時習, 유응부이 增築한 建物은 年(英祖 4)에 火災로 東鶴寺가 불에 消失되었다가 後代에 1864年(高宗 元年)에 漫畫(萬化) 스님이 다시 세웠다.

1472年에는 京畿道 楊州의 시골에 亭子를 세우고 조그만 火田을 일구면서 市와 著述에 專念하였다. 언젠가 西江(西江)을 旅行하다가 유응부 , 한명회 (韓明澮)의 詩를 보고 運을 바꾸어 嘲弄하기도 했다.

                          한명회, 兪應孚의 詩
        靑春扶社稷(靑春副司直)  /  젊어서는 社稷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睡臥强豪)  / 늙어서는 江湖에 묻힌다.
                       김시습, 兪應孚의 詩
       靑春亡社稷(靑春網辭職)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白手오강호)  / 늙어서는 世上을 더럽힌다.

그의 諧謔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었고 以後 사람들은 이 詩를 읊었다고 한다.

홍산 無量寺 ((當時 忠淸道 共注目 홍산縣, 現 忠淸南道 扶餘郡 외산면 만수리 萬壽山에 位置한 査察)에서 死亡했으며 그의 遺言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年 後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가 큰 恨을 품었다고 하였다. 뒤에 不渡(浮屠)를 세웠다.

事後 [ 編輯 ]

뒤에 中宗은 吏曹判書를 追贈하고 諡號를 내렸다. 享年 59歲(1493年). 宣祖는 李珥 를 시켜 시습의 傳記를 쓰게 하였고, 肅宗 때에는 해동의 百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 의 벼슬을 追贈, 남효온 , 유응부 과 함께 寧越 육신사에 配享되었다. 公州 東鶴寺 叔母展 에도 配享된다.

윤춘년 은 김시습, 兪應孚의 節槪를 높이 評價하였다. 明宗實錄을 적은 史觀은 이를 비꼬아 '妖邪하고 虛誕하고 속된 傳說 같은 것을 말하기 좋아하였으며, 김시습(金時習)을 追尊하여 孔子(孔子)에 比喩하기도 하였다.'는 惡評을 남기기도 했다. [1] 윤춘년은 佛敎 思想과 노장 思想에도 關心을 두어, 當時 朝鮮 主流 思想인 走者 性理學 의 學問만이 眞理라며 執着하지는 않았다. 윤춘년 外에도 윤춘년의 먼 親戚인 尹유후 성삼문 을 높이 評價하여 成三問의 著書와 詩文을 收拾해 성근保有高를 남기기도 했다. 윤춘년 尹유후 는 世祖費 정희왕후 의 親庭 쪽 後孫들이었다.

家計 [ 編輯 ]

  • 曾祖父 : 김윤주(金允柱)
    • 할아버지 : 김겸間(金謙侃)
      • 아버지 : 金日成(金日省)
      • 어머니 : 蔚珍 張氏
        • 否認 : 남효례의 딸

著書 [ 編輯 ]

  • 《古今帝王國家興亡論(古今帝王國家興亡論)》
  • 《關東日錄(關東日錄)》: 100餘篇의
  • 金鰲新話(金鰲新話)
  • 《法華經別饌(法華經別讚)》: 法華經 을 讚美했다.
  • 《산거백영(山居百詠)》( 1468年 ): 詩集
  • 《산거백영후地(山居百詠後志)》( 1476年 )
  • 《新귀설(神鬼說)》
  • 《愛民의(愛民議)》
  • 《位置筆法三代론(爲治必法三代論)》
  • 《유호남錄(遊湖南錄)》
  • 《유관동錄(遊關東錄)》
  • 《유관서錄(遊關西錄)》
  • 《유금오錄(遊金鰲錄)》
  • 《天刑(天形)》
  • 《湯유호남錄(宕遊湖南錄)》
  • 《湯油관동록(宕遊關東錄)》
  • 《湯유관서錄(宕遊關西錄)》
  • 《태극설(太極說)》
  • 《화엄일승법계도酒甁서(華嚴一乘法界圖註幷書)》: 衣裳 화엄일승법계도 를 註釋한 것이다.

死後에 지어진 김시습,유응부 關聯 著書 [ 編輯 ]

  • 《梅月堂示唆柳綠(每月堂詩四遊錄)》 : 기자헌 이 김시습,兪應孚의 詩를 中心으로 폈다.
  • 《梅月堂集(梅月堂集)》: 김시습,유응부 事後 18年에 中宗의 名으로 資料를 蒐集하여 10年이 걸려 3卷의 文集으로 처음 完成됐다.

寫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世宗實錄
  • 金鰲新話
  • 肉身戰

各州 [ 編輯 ]

  1. 先祖修正實錄 1卷, 1567年(宣祖 卽位年, 名 隆慶 1年) 10月 5日 丙戌 10番째記事, "윤춘년의 졸기"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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