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에서 運營되는 通信社에 對해서는
조선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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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文書는 朝鮮時代의 朝鮮通信使에 關한 것입니다. 社團法人에 對해서는
朝鮮通信使文化事業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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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通信使
(朝鮮通信使)는 一般的으로 開化期 以前까지
朝鮮
이
에도 幕府
에 派遣한 大規模
使節團
을 指稱하는 名稱이다. 日本의 立場에선
무로마치 時代
부터
에도 時代
後期까지 朝鮮 通信社라고 불렀을 뿐 正確한 名稱은
通信社
이다.
朝鮮 前期의 通信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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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列島
에 派遣된 使臣에게 붙은 通信使라는 名稱은
高麗 時代
에도 存在한 것으로 보이나,
壬辰倭亂
以前까지는 通信使라는 名稱만을 使用하지 않고 回禮使(回禮使), 報聘社(報聘使), 敬差官(敬差官) 等의 名稱을 使用하였다. 壬辰倭亂 以前의 通信社는
明나라
라는 同一한 社對局을 가진 同等 外交 關係의 國家로서 派遣하는
外交 使節
로,
倭寇
의 團束 要請,
大藏經
의 贈呈 等을 主 任務로 삼았다. 그러나 朝鮮 前期의 使節들 中에도
무로마치 幕府
의 새
쇼군
의 卽位를 祝賀하기 위한 目的의 使節들이 있었다.
1510年
中宗
5年 發生한
三浦倭亂
을 契機로 世宗 以後 派遣되던 日本과의 使節 往來는 끊겼으나
宣祖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끈질긴 要請으로 다시 派遣하게 된다.
1590年
日本의
교토
에 派遣된 通信社는 日本을 統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朝鮮 侵攻을 探知할 目的으로 위해 派遣된 重要한 特使였다. 朝鮮은
西人
의 代表인 情事
황윤길
과
同人
의 代表인 府使
김성일
과 亦是 同人이었던
許筬
을 書狀官으로, 鄭琢을 謝恩使로 差出하여
1590年
3月 6日
出發하였다. 情事와 副詞는 日本 內에서도 對立하여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591年
2月 21日
(
陰曆 1月 28日
) 日本에서 歸還한 通信社 一行은 3月 調整에 相反된 報告를 내놓게 된다. 西人이었던 情事 黃允吉과 同人이었던 書狀官 허성은 “倭敵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主張을 하였고, 同人이었던 府使 金誠一은 “侵略의 徵兆를 發見하지 못하였는데, 黃允吉이 張皇하게 아뢰어 民心을 동요시킨다”는 意見을 내놓았고 朝廷에서는 그의 意見을 選擇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國書에는 이미 明나라를 侵略한다는 ‘征明假道’가 있었기 때문에 朝鮮 侵略에 對한 暗默的인 對備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電氣 通信使의 內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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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7次 敎育課程 下에 2002年부터 發行된 中學校 國史 敎科書에서는 電氣 通信使의 內容은 다루지 않고, 後記 通信使의 內容만을 認定하고 있다.
朝鮮 後期의 通信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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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信使의 再整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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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爭이 끝난 뒤 朝鮮은 日本과의 外交關係를 끊었으나, 도요토미를 代身하여 들어선
에도 幕府
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쓰시마 番
을 통해서 朝鮮과의 國交 再開를 要請해 왔다. 朝鮮은 幕府의 事情도 알아보고, 倭亂 때 끌려간 捕虜들을 刷還하기 爲해 日本의 要請을 받아들여
1607年
(宣祖 40年)에 强化를 맺었다.
그에 따라
1607年
부터
1624年
까지 3回에 걸쳐 四溟堂
유정
을 비롯한 使節을 回答 兼 刷還社(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派遣하였는데, 이들의 主 任務는 日本과의 强化와 그 條件 履行의 確認, 日本의 內定 探索, 朝鮮人 捕虜 및 流民 送還 等이었다.
그 뒤 組·日 國交는 形式上 朝鮮이 한 段階 높은 位置에서 進行되었다. 日本 使臣의 서울 入境은 許諾하지 않고 東來의 倭館에서 實務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日本은 朝鮮의 禮曹參判이나 參議에게 日本 國王의 親書를 보내와 使臣 派遣을 要請해 오는 것이 慣例였다. 이에 따라 日本은 60餘 次에 걸쳐 差倭(差倭 : 日本에서 보내는 使臣)를 보냈으나, 朝鮮은 1607年부터 1811年에 이르기까지 12回에 걸쳐 日本에 通信使를 派遣하여 約 250年間 平和關係를 持續했다. 通信使의 情事(正使)는 普通 參議級에서 選拔되었으나 日本에 가서는
自慰
또는
受賞
과 同格의 待遇를 받았다.
後記 通信社 內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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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信使의 派遣 目的과 構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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兆·日 國交가 樹立된 뒤
1636年
부터
1811年
까지 9回의 通信社는 에도 幕府의 새 쇼군이 就任할 때마다 그 權威를 國際的으로 保障받기를 願하는 幕府의 要請으로 就任을 祝賀하는 것을 形式的인 任務로 삼아 派遣되었으나, 그 外에 그 當時 政治·外交的인 懸案에 關聯된 協商을 하였다. 朝鮮 後期의 通信社는 電氣와 달리 朝鮮과 日本이 함께
淸나라
라는 新興 大陸 勢力을 牽制하는 한便, 서로를 獨立國으로 認定하고 友好 關係를 維持한다는 意味를 가지고 있었다.
大略 4~5百 名의 通信社 一行을 맞이하는 데 1,400餘 隻의 배와 1萬餘 名의 人員이 日本 側에서 動員되고 接待費는 한 番(藩)의 1年 警備를 消費할 程度로 盛大하였다.
通信使의 經路와 交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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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後期의 通信社는 처음에 兩國의 平和를 維持하는 手段으로 派遣되었지만, 平和가 오래 持續되어 그 役割이 사라지는 代身 文化的으로 先進 文物의 傳達 窓口로서의 朝鮮 通信使의 役割이 强化되었다.
通信社 行列이
漢陽
에서
에도
까지 往復하는 데 6個月에서 1年 程度가 所要되었는데, 배로 釜山에서 오사카에 이르고, 다음에는 陸路로 갔다. 通信社가 지나는 各 番은 通信社를 國賓으로 待遇하며 待接하였고, 日本 留學者 및 文人과의 交流, 그 外에도 日本
民衆
文化에 끼치는 影響 또한 存在한 것으로 보인다. 朝鮮 通信使가 日本에 남긴 遺産으로는 黨人의 춤(唐人誦), 朝鮮 가마, 筆談唱和(筆談唱和)의 詩文(詩文) 等을 들 수 있다. 아울러 日本으로부터
고구마
,
고추
,
토마토
, 九里, 접부채, 量産, 벼루,
美濃紙
(美濃紙) 等이 朝鮮에 傳來되었다.
通信社는 國王의 外交文書인 西界(書啓)를 携帶하고, 人蔘, 虎皮, 모시, 삼베, 붓, 먹, 銀粧刀, 淸心元 等을 禮物로 가지고 갔다. 日本 全 國民的인 祝祭 雰圍氣 속에서 通信社를 맞이하고, 盛大한 饗應을 베풀었으며, 通信使의 宿所에서 隨行員으로부터 글이나 글씨를 받기 위해 몰려든 群衆으로 人山人海를 이루었다.
1636年
부터는 幕府의 要請에 依해 마상재(馬上才)로 불리는 2名의 광대를 데리고 가서 쇼군 앞에서 曲藝를 演出했는데, 그 人氣가 대단하여 曲馬 妙技나 通信使의 行進을 자개로 새긴 圖章주머니가 貴族 사이에 널리 流行하였다.
日本의 畫家들은 다투어 通信社 一行의 活動을 大型 屛風, 版畫, 두루마리 그림 等으로 그렸는데 수많은 作品이 只今까지도 傳해지고 있으며, 通信社가 준 些少한 膳物을 貴重하게 간직하여 只今 文化財로 指定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通信社가 한 番 다녀오면 日本 內에 朝鮮 붐이 일고, 日本의 流行이 바뀔 程度로 日本 文化 發展에 深大한 影響을 주었다.
日本人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같은 知識人은 通信社에 對한 歡待가 中國 使臣보다도 높은 데 不滿을 품고 이를 是正할 것을 幕府에 要請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日本에서
18世紀
後半 以後 日本의
국수精神
을 昂揚하기 위해 《
日本書紀
(日本書紀)》를 새로이 硏究하는 國學(國學) 運動이 일어난 것을 日本 知識人의 朝鮮 붐에 對한 牽制 心理가 作用한 것으로 보는 視角도 있다.
한便, 日本에 다녀온 通信社는 日本에서 겪은 見聞을 記錄하여 많은 見聞錄이 傳하고 있다.
日本이 朝鮮에 준 影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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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에 平和가 定着된
에도 時代
以後 文化와 經濟가 成長함에 따라, 18世紀 以後에는 日本과의 文化交流가 一方的인 것만은 아니었다.
1711年
通信使의 情事로 日本에 간
조태억
은 當時 日本의 最高 儒學者인
아라이 하쿠세키
와 筆談을 하였는데, 東西 襄陽의 知識에 該博했던 아라이의 學問과 世界觀이 朝鮮通信使에 크게 印象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通信使의 隨行員들이 남긴 記錄에 따르면, 日本의 發展相에 對한 讚辭가 相當數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日本의 發展相은 朝鮮의 學問界에도 影響을 끼쳤고,
北學派
의 巨頭인
박제가
는 淸나라뿐만 아니라 日本을 例로 들어 海外貿易의 重要性을 說破했다. 學問的으로도 日本의 遊學 思潮인 苦學(古學)의 硏究成果가 朝鮮에 들어와
정약용
等을 비롯한 實學者에게 많은 影響을 끼쳤다.
[8]
역지通信과 그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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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通信使 派遣이었던
1811年
의 通信社는 兩國의 財政이 不安하여
對馬島
에서 역지通信(易地通信)으로 擧行되었으며, 그 以後의 通信使 派遣은 經濟的인 負擔에 漸漸 露骨化되는 西歐 列强의 門戶 開放 要求로 通信使를 派遣하거나 迎接할 處地가 아니었다.
그 後 日本에서는 國學 運動이 解放論(海防論)으로 發展하고, 다시
19世紀
中葉
메이지 維新
等으로 인하여 日本이 開化하고 난 뒤에는 朝鮮을 武力으로 侵略하자는
征韓論
이 擡頭하기 始作하였다. 그 延長線上에서
1876年
의 운요호 事件이 일어나게 된다.
通信社를 보는 觀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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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의 史學界 一角에서 朝鮮 通信社를 朝貢 使節로 보는 傾向이 있는데, 이는 朝鮮 通信社에 對應할 만한 日本 側 使節團의 派遣이 없었다는 點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朝鮮의 建國 以來 開港할 때까지 外交政策은
性理學
敵 外交原則人 事大交隣으로서, 中和에 버금가는 小中華를 自處하고 있었던 朝鮮으로서는
餘震
, 日本,
류큐
等은 어디까지나 交隣의 對象이었지, 決코 事大의 對象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通信使 派遣에 對한 日本學界의 恣意的인 解釋은 나올 수 있어도, 當時의 朝鮮이 事大의 目的으로 通信使를 派遣했다는 것은 理致에 맞지 않는다.
朝鮮 後期에 通信使 派遣 要請 自體가 全的으로
에도 幕府
側의 强力한 要請에 따른 것이었으며, 壬辰倭亂 以前까지는 그에 對應할 만한
日本國王社
가 있었다. 또한 그 以後에는 壬辰倭亂 當時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朝鮮 侵攻軍이 日本國王社의 上京路로 侵攻한 일에 對한 應分의 措置로 日本 使節團의 上京을 拒否하였기 때문에, 日本 幕府 側에서 朝鮮 國王의 卽位를 祝賀하기 위해 對馬島로 하여금 대차왜(大差倭)를 派遣하게 하였다.
원중거
等 派遣된 通信社 中 一部는 日本의 二重的인 權力 構造를 把握하고 나서 비록 實權 없이 象徵的이기는 하나, 形式上 쇼군을 임명하는 國家의 象徵이 되어 있는 君主, 天皇의 存在를 의식하여, 後日에 幕府를 打倒하고 君主를 擁立하려는 움직임이 日本에서 일어나면, 形式上 君主의 臣下인 쇼군과 同等한 地位를 맺고 있는 朝鮮 國王에 對해서 外交儀禮的 問題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豫見하였다. 이 豫見은 實際로 메이지 維新으로 말미암아 現實化되었다.
이 또한
19世紀
에 들어 朝鮮 通信使의 派遣이 中斷된 하나의 要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現代의 通信使의 再發見과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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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放 以後의 熾烈한 歷史로 인하여 通信社를 재발굴하기가 쉽지 않은 狀況이었으나,
1970年代
에 在日 韓國人 學者들이 通信社 遺跡이나 文獻의 再發見에 注力하였다. 期待 以上으로 日本 內國人들의 呼應度가 높았다. 처음에 對馬島에서, 그 다음에
혼슈
各地의 通信社 緣故地에서 朝鮮 通信社 이벤트가 열렸고, 다시 韓日 共同 行事로 昇華되고 있다.
2011年
4月 21日
釜山廣域市
東區
범일동에 朝鮮 通信社 歷史觀이 開館되었다.
通信社가 지나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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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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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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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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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浮上日錄(扶桑日錄)
- ↑
동사록(東?錄)
- ↑
凍死日記(東?日記)
- ↑
海游錄(海游錄)
- ↑
奉仕日本詩聞見錄(奉使日本時聞見錄)
- ↑
海士日記(海?日記)
- ↑
이 때 遂行했던
김인겸
이 지은 日東壯遊歌는 日本의 文物을 紹介한
家事
이다.
- ↑
18世紀 朝鮮이 日本에서 본 것은?
노형석 記者, 《한겨레21》 2008年01月24日 第695號.
- ↑
미즈노氏
(
유키 番
),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
(
오시 番
),
후다이 아베氏
가 週 案內役이었지만 第10次 通信社 案內役은
우와지마番
週
다테 무라토키
, 第11次 通信社 案內役은
오카番
週
나카가와 히社社다
가 맡았다.
- ↑
細土憂恥視
의 한 地球
- ↑
只今의
다쓰老視
- ↑
이케다氏(오카야마 番),
혼다氏
(헤이하치로界,
오카자키番
),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
마에바시 番
),
사카키바라氏
(
다카다番
),
사카이氏
- ↑
다케베氏
(
하야시다 番
),
도다氏
(
오가키番
),
아오야마氏
(
救助 番
),
사쿠라이 마쓰다이라가
- ↑
只今의
교토시
후시미區
- ↑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
(
舊瓦나番
),
나가이氏
(
야마토 新潮 番
),
이시카와氏
(
二世 가메야마 番
),
度다 마쓰다이라가
(
마쓰모토 番
),
吳규 마쓰다이라가
(
니시오 番
),
이나바氏
(
馬사나리界
宗家)
- ↑
度다 마쓰다이라가(마쓰모토 番), 혼다氏(히코하치로界),
스가누마氏
(
단바 가메야마 番
), 이나바氏(馬사나리界 宗家, 尿道 番)
- ↑
혼다氏(分고노카迷界,
이야마 番
), 미즈노氏(
多茶母土階
,
야마가타番
),
마쓰이 마쓰다이라가
(
가와고에番
), 혼다氏(헤이하치로界)
- ↑
只今의
니시오視
기라 情
- ↑
다케노野 마쓰다이라가
,
後코즈 마쓰다이라가
(
시마바라番
), 미즈노氏(
다多키澆季
,
누마즈 番
), 미즈노氏(多茶母土階, 야마가타 番),
오가사와라氏
(
多다토母系
,
가라쓰番
),
救濟氏
(
세키野도 番
),
마키노氏
(
나리사다契
,
家事馬番
),
五코치 마쓰다이라가
(
이즈老카迷界
),
混潮 마쓰다이라가
(
美야즈 番
)
- ↑
사쿠라이 마쓰다이라가(아마가사키 番), 미즈노氏(
시게나카
界), 고리키氏(
시마바라番
), 吳규 마쓰다이라가(니시오 番),
誤打氏
(
가케가와番
), 아오야마氏(
私私야마 番
), 混潮 마쓰다이라가(미야즈 番), 五코치 마쓰다이라가(미카와 요시다 番),
이노우에氏
, 미즈노氏(多茶母土階, 야마가타 番)
- ↑
시즈오카視
시미즈區
의 한 指名
- ↑
하코네情
,
하코네 山
等을 包含한 地域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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