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융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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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융준
李隆俊
朝鮮 哲宗의 王子
이름
隆準(隆俊)
爵號 原子(元子)
身上情報
出生日 1858年 10月 17日 ( 1858-10-17 ) (陰曆)
出生地 朝鮮 漢城府 昌德宮 大造殿
死亡日 1859年 4月 23日 ( 1859-04-23 ) (0歲) (陰曆)
父親 哲宗
母親 철인왕후 金氏

原子 이융준 (元子 李隆俊, 1858年 11月 22日 ( 陰曆 10月 17日 ) ~ 1859年 5月 25日 ( 陰曆 4月 23日 ))은 朝鮮 後期의 王子로, 哲宗 (哲宗)의 唯一한 嫡長子이자 寧殷府院君 김문근 의 딸 철인왕후 金氏 所生이다. 哲宗實錄에는 原子(元子)라고 登載되었으나 이름이 傳하지 않다가 承政院日記 1859年 1月 27日 에 아버지 哲宗 의 王命으로 그의 疏明(小名)을 지은 記錄이 傳한다. 그의 이름은 朝鮮王朝實錄 에는 없었지만 承政院日記에 지은 記錄이 나타나 알려지게 되었다.

태어난지 6個月만에 알 수 없는 理由로 死亡했다. 그는 孝宗 系統의 마지막 實際 男子 血肉이자, 英祖 의 마지막 實際 男子血肉이었다. 그의 (喪)李 哲宗의 名으로 國相으로 擧行된 記錄까지만 나타나고, 埋葬地와 시호 與否는 未詳이다.

生涯 [ 編輯 ]

1858年 (哲宗 9) 陰曆 10月 17日 新詩(午後 4時) 昌德宮 (昌德宮)의 大造殿(大造殿)에서 哲宗 과 寧殷府院君 김문근 의 딸 철인왕후 金氏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前 아버지 哲宗의 後宮인 庶母 貴人 朴氏 (貴人 朴氏)에게서 1854年 8月 3日 ( 陰曆 7月 10日 ) 이福 庶兄이 태어났지만 어떤 理由인지 알 수 없는 理由로 바로 死亡했다. 아버지 哲宗은 臣下들이 지어 올린 疏明(어린 아이일때 쓸 이름) 中 홍복 , 장록 , 윤중 , 隆準 隆準 을 擇하였다.

原子 隆準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原子의 정호를 받고, 誕生 當日 元子宮이 세워졌다. 哲宗은 11月 2日 元子宮 處所의 門에 直接 이극문(貳極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해 11月 22日 觀象監 은 그의 江原道 願主婦 주천면 (江原道原州府酒泉面, 現 寧越郡 주천면 )의 複決算 (伏結山) 下向壬坐丙向(下壬坐丙向)에 묻었다고 哲宗에게 報告하였다.

1859年 (哲宗 10) 1月 27日 誕生 百日이 되는 날, 父王 哲宗은 臣下들에게 命을 내려 그의 疏明을 짓게 하였다. 정원용 은 卽席에서 홍복(洪福), 장록(長祿)이라 지었으나 哲宗은 웃으면서 다른 이름을 짓자 했고, 官僚들은 윤중(胤重), 隆準(隆俊)을 지어 올렸다. 哲宗은 그 中 隆準이라는 이름을 擇定하였다.

己未正月二十七日辰時, 上御大造殿。 時原任大臣·閣臣承候入侍, 在院承史, 益豊府院君, 耆社老人·宗親·儀賓·産室廳三提調同爲入侍時, 都承旨李裕元, 左承旨金益文, 右承旨朴麟夏, 左副承旨洪奭鍾, 右副承旨李晩運, 同副承旨徐相鼎, 記事官宋熙正·李寅命, 記注官金瑛默, 別兼春秋趙埰·沈履澤·金鶴根, 領議政鄭元容, 領府事金道喜, 判府事朴晦壽·金左根·趙斗淳, 檢校提學金炳國, 提學南秉哲·金輔根, 原任直提學金大根, 檢校直提學金炳德, 原任直提學申錫禧·趙然興, 直提學金炳?, 原任直閣鄭最朝·金始淵, 檢校直閣金德根, 檢校待敎金輔鉉·李容殷·趙秉協·金炳弼, 待敎徐相翊·益豊府院君洪在龍, 耆社老人李若愚·姜時永, 上護軍洪耆燮·永明尉洪顯周·東寧尉金賢根·南寧尉尹宜善, 産室廳提調金炳喬·李?以次進伏訖。 上曰, 史官分左右。 元容等進前奏曰, 數日來, 陽暉溫和, 聖體, 若何? 各殿問候訖。 元容等曰, 元子宮百日載屆, 睿質日就岐?, 大小群情歡悅慶?之?, 益切萬億磐泰之祝矣。 上曰, 祖宗積累之德, 長發其祥, 有此篤生之慶, 百日屆辰, 睿質益長, 予心之喜悅, 當何如, 而卿等與群情之?祝, 尤當何如哉? 今日召見, 出於同慶之意矣。 元容等曰, 皇天眷顧, 祖宗默佑, 殿下誠孝孚格, 元良誕降, 宗社萬億之基, 肇自今日, 伏願益懋進德修業之工, 上答天心, 下副民望, 以爲?景命鞏丕基之道焉。 上曰, 爲卿等之願瞻元子, 當令抱出軒中矣。 仍命開東方門戶, 令承候官, 抱元子出坐, 承候官金炳弼, 敬抱出坐, 永恩府院君金汶根隨後, 諸臣俱環立仰瞻。 上曰, 領相先爲親抱詳瞻也。 元容敬抱, 左根又敬抱。 元容曰, 仰瞻睿質, 天日之表, 金玉其相, 天縱之姿, 自異常人, 而岐?覃?, 如經初度之時, 尤不勝萬萬慶祝矣。 仍?元子前曰, 臣合今日登筵諸臣之年壽, 祝獻於元子宮矣。 上曰, 相人先觀眉目, 須更詳瞻也。 元容又爲仰瞻後奏曰, 眉目淸秀而眼彩尤炯然, 眞是神聖之姿也。 天所佑之, 宗社臣民之福也。 上笑曰, 卿言好矣。 今日慶會也。 元子小名, 當與卿等議定, 卿等思好字爲奏也。 元容等曰, 如洪字福字長字祿字, 俱好矣。 上笑曰, 俱好矣, 而猶未爲重矣。 予有所思之字, 果何如? 一則胤字重字, 一則隆字俊字也, 何字爲勝? 元容對曰, 俱果爲重, 而隆字俊字益重矣。 上曰, 予意亦然矣。 當以此爲定矣。 汶根請元子宮還次, 上可之。 炳弼敬抱元子, 還詣東房以下缺。

? 承政院日記 2611冊 (脫抄本 125冊) 1859年(哲宗 10年, 靑 咸豐 9年) 1月 27日 武術 13番째 記事

그의 疏明, 뒷날 成人이 된 뒤에 이름을 改名하기 前에 臨時로 지은 이름은 그가 태어나고 3個月만에 定해졌다.

1859年 3月 30日 에는 哲宗은 原子 隆準을 直接 안고 와서 臣僚들을 接見하였다.

1859年(哲宗 10) 4月 23日 몸에 熱病 이 생겨 藥房 官員들이 入診하였으나, 갑자기 死亡하였다. 그가 어떤 疾病으로 死亡했는가 與否는 不分明하다. 4月 24日 哲宗은 原子上(元子喪)을 宣言하고 兵曹判書 訓鍊大將 等을 特別히 불렀다.

事後 [ 編輯 ]

原子上의 脫喪 日子는 未詳이나 1859年 以後의 承政院日記 記錄에는 登場하지 않는다. 屍身의 賣場日子는 未詳이며 京畿道 高陽郡 연희면 에 埋葬되었다.

朝鮮王朝實錄 이나 承政院日記 에는 그의 諡號에 對한 記錄이 없는데, 諡號를 내렸는지 내리지 않았는지 與否는 不確實하다. 그가 죽은 뒤에도 庶母 貴人 조氏 (貴人 趙氏)에게서 1859年 11月 7日(陰曆 10月 13日) 아들 1名과 1861年 1月 15日 아들 1名이 태어났지만 태어나자마자 바로 死亡했다. 그의 異腹 동생들이 어떤 理由로 死亡했는지 死亡原因은 알 수 없다. 以後 哲宗에게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孝宗 英祖 의 實際 直系는 4年 後 그의 아버지 哲宗이 죽음으로써 斷絶되었다.

大韓帝國 樹立 以後 父王 哲宗과 母后 철인왕후는 皇帝, 皇后로 追尊되었지만 그는 太子로 追贈되지 못하였다. 日帝强占期 때에 京畿道 高陽郡 원당面 원당리 西三陵 內 王子, 王女 墓域에 移葬되었다. 後에 日帝 强占期 때의 年號를 碑石에서 긁어서 11月 1日 外에 이장한 年도는 알 수 없다. [1]

家族 關係 [ 編輯 ]

기타 [ 編輯 ]

그는 孝宗의 마지막 男子 後孫이자 英祖의 마지막 男子 後孫이다. 또한 은언군 의 마지막 男子 後孫이기도 하다. 英祖의 後孫들 中 마지막 情實 所生 嫡長子이기도 했다.

은언군 의 後孫中 마지막 情實 後孫이기도 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江華도령 哲宗의 睿陵 오마이뉴스 2005.01.22.
  2. 네이버 百科事典 〈熟議汎氏墓〉項目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