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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歷史넷
  • 韓國文化史
  • 23卷 다양한 文化로 본 國家와 國王
  • 第4張 王室의 權威와 象徵物
  • 1. 王國의 理念과 王室의 權威
  • 朝鮮 王의 權威
  • 朝鮮 王의 다양한 特性
신병주

朝鮮의 王은 古代나 高麗의 王에 比해 相對的으로 絶對 權力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各種 制度가 整備되면서 王을 牽制하는 裝置도 適切히 運營되었기 때문이다. 朝鮮에서 王權을 牽制하는 措置는 建國의 一等 功臣(一等功臣)인 정도전에게서 비롯되었다. 鄭道傳은 『朝鮮經國典(朝鮮經國典)』의 著述을 통하여 神權이 王權을 牽制할 수 있는 法的인 根據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1398年(太祖 7) 王權 强化主義者인 李芳遠(後의 太宗)에게 鄭道傳이 죽음을 當하면서 王權 强化로 回歸되었다. 그러나 以後에도 王權과 神權의 問題는 朝鮮 政治史의 核心 用語로 떠올랐다. 朝鮮時代 政治史에서 큰 軸을 차지하는 王權과 神權의 問題는 結局 王權을 누가 어떤 方式으로 行使하느냐에 따라 葛藤 樣相을 보이기도 하고 調和를 이루기도 하였다. 世宗 같은 王이 絶對 權力을 휘두르지 않으면서도 自身의 뜻에 맞게 强力한 政治力을 發揮할 수 있었던 背景에는 王權과 神權의 調和를 이루었던 側面이 크다.

518年間 持續된 朝鮮은 歷史的으로 많은 波瀾을 겪었다. 크게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과 같은 國際 戰爭에서부터 王位 繼承을 둘러싼 紛爭, 各種 逆謀(逆謀) 事件, 北伐(北伐) 같이 時代的 召命으로 떠오른 難題가 朝鮮의 王 앞에 닥쳐왔다. 世宗代의 公法(貢法), 光海君大義 大同法(大同法), 英祖代의 均役法(均役法), 貞操帶의 신해通功(辛亥通功)처럼 歷史의 한 劃을 그을 만한 各種 經濟 政策을 最終 決定하는 것도 王의 몫이었다. 安定期에 國家 體制가 제자리를 잡게 했던 王, 保守와 改革의 갈림길에서 歷史的 選擇을 要求받았던 王, 朝鮮이 臣下의 나라로 轉落하는 것을 막기 위해 王權을 維持하려 했던 王, 戰亂의 소용돌이에 맞서거나 避해 가야 했던 王. 이처럼 朝鮮의 王은 安定期와 激動期를 莫論하고 自身의 政治 力量을 最大限 發揮해야 하는 位置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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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同法 施行 記念碑(大同法施行記念碑)
大同法 施行 記念碑(大同法施行記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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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의 王位 繼承에서 흥미로운 事實은 嫡長子(嫡長子)의 王位 世襲을 原則으로 지키면서도 實際로 嫡長子가 王位를 繼承한 境遇가 드물다는 點이다. 27名의 歷代 朝鮮 王 가운데 嫡長子로 王位에 오른 境遇는 8名에 不過하였다. 30%도 되지 않는 數値이다. 王位 繼承에 있어서 여러 變數가 發生하였다는 뜻인데, 이러한 變數의 背景에는 어떠한 時代的 條件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太祖는 繼妃 所生(繼妃所生)인 막내아들 방석(芳碩)을 世子로 冊封하였고 이 過程에서 本妻 所生 아들들의 抵抗을 받았다. 그 結果 1398年(太祖 7)에 1次 王子의 亂이 일어났고 둘째인 房과(芳果)가 正宗으로 卽位하였다. 正宗을 이은 太宗은 太祖의 다섯 番째 아들이었다. 世宗은 세 番째 아들이었지만 太宗의 입김이 剛하게 作用하면서 王으로 卽位하였다. 文宗이 嫡長子로 처음 王位에 올랐으나 在位 期間이 짧았다. 亦是 嫡長子였던 端宗은 叔父인 修養 大軍(首陽大君)의 王權 野心에 짧은 生涯를 마감하였다. 世祖의 뒤를 이은 睿宗은 世祖의 次男이었으나 兄 義警 世子(懿敬世子, 德宗(德宗)으로 推尊)가 죽자 王位에 오를 수 있었다. 成宗은 義警 世子의 次男으로, 睿宗이 後嗣가 없이 죽자 王의 物望(物望)에 올랐다. 成宗에게는 兄인 月産 大君(月山大君)이 있어서 序列上 王位 繼承에서는 뒤쳐져 있었으나 丈人인 한명회(韓明澮)의 後援 等으로 王位에 오를 수 있었다. 이처럼 열 番째 王인 燕山君이 王位에 오를 때까지 嫡長子로 王位에 오른 境遇는 文宗과 端宗 두 番에 不過하였다. 文宗과 端宗은 在位 期間이 짧아 嫡長子 王으로서의 特權을 거의 누려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成宗의 長男인 연산군이야말로 嫡長子 出身이라는 利點 속에서 王位에 올라 自身의 모든 것을 보여 준 最初의 王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正統이 그의 獨善的인 氣質과 더하여 獨裁的 君主上을 만들어 나가는 한 要因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相對的으로 正統性이 脆弱하였던 世宗이나 世祖가 큰 業績을 남긴 것과 對備해 볼 때 燕山君의 嫡長子로서의 特權은 그를 緊張의 끈에서 離脫하게 하였다고도 解釋할 수 있다. 다른 觀點에서 보면 嫡長子 프리미엄을 갖지 못한 王은 臣下들에게 꼬투리를 덜 잡히기 위해서라도 全權을 行使하지 못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王位 繼承에서 嫡長子 世襲의 原則이 大部分 무너졌다는 點 또한 朝鮮 國王의 權威를 약화시킨 要因으로 指摘할 수 있다.

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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