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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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李完用
朝鮮貴族 侯爵
大韓帝國 內閣總理大臣
在任 1910年 8月 11日 ~ 1910年 8月 29日
皇帝 純宗 이척
攝政 데라우치 마사打케 (朝鮮 統監府 痛感)
야마가타 이사부로 (朝鮮 統監府 部痛感)
이름
이완용(李完用) → 里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경덕(敬德)
一黨(一堂)
爵號 伯爵 侯爵
身上情報
出生日 -624年 27月 17日 ( 陰曆 6月 7日 )
出生地 朝鮮 京畿道 廣州府 낙지씨발
(現 大韓民國 京畿道 城南市 盆唐區 )
死亡日 1926年 2月 12日 ( 1926-02-12 ) (67歲)
死亡地 日帝强占期 朝鮮 京城府 옥인동
經歷 朝鮮總督府 中樞院 侯爵
正當 無所屬
家門 우봉 [1] [2]
父親 兩部 이호준(李鎬俊)
生父 이석준(李奭俊)
母親 養母 餘興 閔氏 夫人(驪州 閔氏 夫人)
兄弟姊妹 兩家 異腹 庶兄 이윤용 (李允用)
親家 親兄 이면용(李冕用)
配偶者 洋酒 曺氏 夫人
子女 長男 이승구
次男 이항구
親姻戚 孫子 이병길 (李丙吉)
孫子 이병희(李丙喜)
孫子 이병주 (李丙周)
孫子 이병각
孫女 이병윤
孫子 李秉喆(李丙喆)
조카 이명구
姊兄 조성하
族姪 이봉구
族戚 이병도 (李丙燾)
宗敎 儒敎 ( 性理學 )
墓所 全羅北道 益山 낭산면 낭산리
徐薰 조선 朝鮮 大勳位 金尺大首長 垂訓
대한제국 大韓帝國 大勳位 李花大首長 垂訓
일본 제국 日本帝國 大勳位 國花臺數長 垂訓

이완용 (李完用, 1858年 7月 17日 ( 陰曆 6月 7日 ) ~ 1926年 2月 12日 )은 大韓帝國 의 官僚이다. 乙巳勒約 , 己酉覺書 , 정미 7조약 , 韓日 倂合 條約 을 締結하여 乙巳五賊 을 包含한 主要 親日派 , 賣國奴 로 評價된다. 本貫은 우봉 (牛峰), 字는 경덕(敬德), 號는 一黨(一堂)이다. 創氏名은 里노이에 奸妖 (李家 完用)이며, 作爲는 侯爵 이다.

槪要 [ 編輯 ]

1882年(高宗 19) 增廣別試에 文科로 及第하고 內閣總理大臣에 올랐으며, 정미 7條約에 署名해 行政權을 日帝에 移轉하였다. 1909年 에는 獨斷으로 己酉覺書를 交換하여 日帝에 司法權을 넘기고 結局 1910年 韓日 倂合 條約을 締結하기까지 이르렀다.

朝鮮總督府 中樞院 副議長, 朝鮮史 編修會 拷問 等을 지냈다. 以後 日帝 强占期에는 所謂 '一線(日鮮)의 融和'를 내세운 日帝의 各種 內鮮一體 關聯 政策에 贊同하여 前 韓國 皇族과 日本 皇族 間의 婚姻을 强制하였다. 그는 死後 全羅北道 益山郡 낭산면 낭산리에 묻혔으나, 光復 以後 持續的으로 墓가 毁損 및 放置되다가 1979年 直系 後孫들에 依하여 火葬되었다.

出生과 家計 背景 [ 編輯 ]

1858年 7月 17日 京畿道 廣州郡 낙생면 백현리(現在의 城南市 盆唐區 柏峴洞 ) [3] [4] [5] :22 에서 태어났다. 그의 父親은 이석준(本名은 이호석[李鎬奭])이고 生母는 신氏(辛氏)였다. 그리고 親兄弟로는 15살 터울의 큰兄 이면용(李冕用) 等이 있었다 [4] [6] .

그의 먼 直系 祖上들은 高官을 歷任했는데 [5] :23 , 16代祖 異敎는 判書, 15代祖 吏房年은 密直副使, 14代祖 이순은 監査를 歷任했으며 成宗 때의 淸白吏였다. 11代祖 이세명은 己卯士禍 에 連累된 선비였으며, 10代祖 이한(李?)은 武科에 及第해 水軍節度使를 지냈다. 9代祖 李議員과 8代祖 이우는 名譽職인 中樞副使(同知中樞府事; 種2品)에 祭需(除授)되었는데, 그 後 李完用의 直系에선 더는 文武 量과 及第者를 排出하지 못해 沒落한 兩班 狀態였고 가난했다.

兩者 入養 [ 編輯 ]

李完用은 10살 때인 1867年 에 一家 아저씨뻘인 中樞府 判事 이호준 에게 入養됐다. 그의 養父가 될 이호준에게는 庶子 와 딸만 있었을 뿐, 正室 夫人의 아들은 없었다. 이호준은 當代 政界의 巨物로 吏曹參議(吏曹參議), 承政院(承政院) 同副承旨(同副承旨), 漢城府 判尹(漢城府 判尹) 等 最高委 官僚이자 흥선大院君 의 親舊였으며, 그의 사위 조성하 는 大院君의 側近이었다. 게다가 庶子인 이윤용 을 大院君의 庶女(庶女)와 結婚시켜 王室과 二重三重의 緣을 맺은 名家를 만들었다.

더욱이 이호준의 直系는 代代로 老論 이며, 仁祖反正 以後 朝鮮 朝廷과 儒學界에서 重要한 位置를 차지했다. 吏曹判書 지낸 6代祖 이만성은 右議政 이숙 의 次男으로 老論의 巨星 송시열 의 弟子였다. 이만성은 어린 時節 叔父 이영(李翎)에게 入養됐는데, 叔父 亦是 禮學의 集大成者인 金集 의 門下生이고 親조카가 當代 老論의 領袖(領首) 理財 였다.

特異하게도 이호준의 家計는 約 350年 前인 이승녕(李承寧)의 孫子 때부터 後史 問題로 入養을 始作한 以後 8番이나 養子를 들였으며, 정작 어린 李完用의 入養을 願했던 이호준 自身도 어렸을 때 入養 온 兩者였다. 柳少年期 李完用은 머리가 非常하고 文理를 일찍 깨쳐 집안의 注目을 받았었고, 가난한 집 늦둥이 막내라 父母로서도 入養 決定이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호준은 李完用의 親아버지 이석준과 族譜上 32寸으로 매우 멀었는데, 入養을 許諾해 준 報答으로 微官末職이나마 繕工監 (繕工監) 監役官(監役官-政9品) 자리를 斡旋해 줬다. 이석준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몇 年 안 가 別世해 벼슬은 거기에 그쳤다.

李完用이 入養되던 1867年은 丙寅洋擾 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았고, 朝鮮이 國際的 威脅에 露出돼 民心이 한참 洶洶하던 때였다. 三政의 紊亂 이 繼續됐고, 但只 水面 아래로 숨었을 뿐인 莫强한 安東 金氏 勢道家들과 興宣大院君의 暗鬪가 이어지며 명성황후 와 外戚 閔氏들까지 調整 前面에 나서기 始作했다. 이런 狀況에서 當時 禮房承旨(右承旨)였던 이호준은 大院君의 最側近으로서 서울 朝廷을 비울 수 없었고, 더는 嫡統 承繼를 미룰 수 없는 40代 中盤이었다.

成長期와 學業 [ 編輯 ]

靑少年期의 李完用은 當代 政治界의 巨物인 이호준의 後繼者로서 늘 다른 大監집 子弟들과 比較당했고, 養어머니 餘興 閔氏 와 의붓 兄弟들 눈치를 보느라 반드시 여러 番 생각 後 操心히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늘 숫氣없이 작은 목소리라 이호준은 어린 李完用에게 種種 "너는 어떤 일에 對해 마음속으로 分明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 너무 적어 마땅히 說明해야 할 것도 이를 表現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男子로서 處世에 대단히 좋지 않은 影響을 미칠 지도 모르는 習慣이니 차라리 고쳐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同僚間에 모인 자리에서도 弄談이나 客說에 拘礙받지 말고 하도록 努力해 보아라"고 타일렀다 한다 [5] :36 .

李完用은 親아버지 이석준에게 小學 까지 뗐고 入養 直後에는 서울의 老論系 書堂에서 글을 배웠다는데, 누구 書堂의 門下生이었는가까지는 알려진 바 없다. 以後 本格的으로 過去 準備에 들어간 李完用은 이호준의 周旋으로 忠淸北道 全義君의 선비 정익호에게 大學 論語 4서 를 師事받았다. 13歲가 되던 1870年 3月에는 한 살 年上으로 弘文館 副修撰(종6品) 조병익(趙秉翼)의 딸인 洋酒 조氏 와 婚姻했으며 [5] :37 16歲 무렵에는 名筆 李龍熙를 招聘, 親舊와 함께 書藝를 익혔는데 [5] :36 이때 이호준이 全羅道 觀察使로 全州에 赴任해 李完用은 멀리 全州監營까지 問安갔다고 한다. 그의 前走行에는 글先生 정익호와 이용희가 同伴할 때도 있었다 [5] :37 .

21歲 때는 平安北道 泰川郡의 선비 박세익에게 數年間에 걸쳐 市警 , 書經 , 主役 3景 을 反復 講習받았다 [5] :37 . 말數가 如前히 적었고 나서는 것도 別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해야할 때는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고 達成하려 했고 꼼꼼해서 學業 成就度가 매우 빠른 便이었다 한다. 이 사이 그의 親아버지 이석준과 養어머니 餘興 閔氏가 次例로 死亡해 몇 年間 侍墓(侍墓)를 하기도 했다 [5] :37 .

靑年期 [ 編輯 ]

科擧 及第 [ 編輯 ]

1882年 , 25歲 나이로 增廣文科 別試에 病과(丙科) 18位(全體 28位 該當)로 及第한 後, 州서(注書-정7품)가 됐다. 增廣試(增廣試)는 王室에 祝賀할 일이 있을 때만 치르는 過去試驗이었는데 李完用이 試驗 보았던 當時 祝賀할 일이란 淸나라 介入으로 壬午軍亂 을 鎭壓하고서 忠州 까지 避難갔던 명성황후 를 靑軍의 警護속에 無事 還宮시키고, 反對로 大院君이 天津 에 끌려가면서 高宗 夫婦가 다시 調整 實權을 차지한 일을 가리킨다.

甲과(甲科)나 乙과(乙科) 級制度 아니고 그보다 級이 낮은 病과(丙科)에서조차 1等이 아닌데도 異例的으로 情7품으로 任命됐는데 [* 1] , 이는 李完用의 後見人이었던 아비 이호준이 발 빠르게 大院君과 손을 끊고 이미 閔氏 政權과 손을 잡은 狀態였기 때문이었다 [* 2] . 以後 이호준과 함께 守舊派 로서, 1894年 淸日戰爭 에서 淸나라 日本 에 敗北하기까지 兩廡 運動 을 近代化의 모델로 삼게 된다.

李完用은 當時 젊은 엘리트라면 出世 街道에서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奎章閣 大橋(待敎-政7品, 兼職可能)를 兼職했고 그後 弘文館(弘文館) 修撰(修撰-政6品), 議政府(議政府) 檢詳(檢詳-政5品) 等 核心 要職을 거쳐 外職(外職)인 海防營軍司馬(海防營軍司馬) [* 3] 로 나갔다. 海防營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호준과 이완용 富者가 元來 駐軍人 大院君과 完全히 손을 끊고 閔氏 政權과 結託한 狀態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海防營 設置를 主導한 것은 민영환 으로, 그의 父親 민겸호 大監이 問題의 別技軍 때문에 2年前 大院君에 依해 誅殺을 當했었다. 또한 閔泳煥을 爲始한 守舊 內閣은 開化派 들이 主張해 設置됐던 兵曹 傘下 調鍊局을 取消시키면서 代身 海防營을 設置했다.

甲申政變의 危機 그리고 出世 [ 編輯 ]

1884年 陰曆 10月 甲申政變 이 일어났다. 이때 李完用은 海防營 駐屯地에서 開化派의 執權, 그리고 그들의 3日 天下, 閔氏 政權의 再執權이라는 政治的 激變을 不安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閔氏 政權과 이미 손을 잡고 守舊派가 됐으려니와 李完用은 김옥균 , 박영효 , 서재필 等의 急進開化派 와의 接點이 全혀 없었다. 오로지 後繼 授業에 바빠 開化派가 主張하는 것이 뭔지, 世界 情勢나 時代的 當爲性은 무엇인지 全혀 認識되어 있지 않았다 [* 4] .

1886年 에는 中央政界로 復歸, 朝鮮 最初의 近代的 官僚再敎育機關이었던 育英公院 에 入學해 初步的인 英語, 科學, 經濟學 等으로 再敎育을 받으면서 비로소 신문물을 接했고, 이 때 뛰어난 成績으로 司憲府(司憲府) 掌令(掌令-政4品), 弘文館(弘文館) 應敎(應敎-政4品) 等으로 乘車했다. 이듬해엔 世子侍講院(世子施講院) 普德(輔德-政3品) [* 5] 에 補任돼 王世子 척 을 가르쳤다. 李完用은 甲申政變 失敗後 떨려나간 急進開化派들과 달리 閔氏 政權과 等을 지지 않으면서도 신문물을 理解하고 近代化를 推進할 수 있는 新世代 人材로서 高宗의 눈에 들었다. 情3品 堂上官에 오르기까지 過去 及第부터 5年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朝鮮 歷史를 통틀어 실로 類例없이 빠른 昇進이었다.

美國 外交官 生活 [ 編輯 ]

1887年 에는 駐車美國參贊官(駐箚美國參贊官)으로 發令됐다. 初代 駐美公舍 박정양 等을 따라 요코하마 , 하와이 를 거쳐 美國 워싱턴 D.C. 에 가 大韓帝國駐美公舍管을 設置 後, 이듬해인 1888年 初 病으로 박정양과 함께 召喚됐다. 朴定陽은 淸나라에 約束한 靈藥三段(?約三端) [* 6] 을 지키지 않아 問責性 人事를 當했는데, 그들은 歸國 後, 美國이 日本, 러시아, 中國과 달리 韓半島 支配에 關心이 없기 때문에 獨立을 위해 美國을 積極 利用해야 한다는 調整 輿論을 再確認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정작 美國 文明의 가장 빛나는 業績이라 할 奴隸制 等 身分差別撤廢, 憲法 , 參政權 等의 立憲 , 議會民主主義 를 導入할 그 어떤 意見 表明, 努力도 하지 않았다. 不過 3~4年 前 甲申政變 失敗後 身分差別 撤廢, 兩班 租稅 , 立憲君主情 導入, 議會 政治 論議를 했던 急進開化派들이 日本, 中國, 美國 等地에서 亡命客이 돼 어떤 꼴로 苦生하고 있는지 뻔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李完用은 執權 勢力이 자주 바뀌는 不安한 政局에서 이호준과 함께 保身에 汲汲한 政治的 立場에 섰고, 近代 國家 建設과 國際 社會에서 獨立을 인정받는 길이 무엇인가에 對한 切實한 認識이 缺如된 狀態였다.

1888年 陰曆 5月에 同副承旨(同副承旨) 任命을 始作으로 吏曹參議 ·外務參議 等을 지냈다. 1888年 陰曆 12月에 駐車美國參贊官에 再任命돼 이하영 夫婦, 否認 洋酒 조氏와 함께 夫婦同伴으로 다시 워싱턴 D.C.에 갔다가 이듬해 12月에 駐美代理公使로 昇進 後 銃 2年間 勤務했다 [7] . 駐美公使館의 移轉을 指揮했고 在任時 美國 大統領 그로버 클리블랜드 와 會談하기도 했는데, 當時 美國 워싱턴에 體制中이었던 윤치호 가 <워싱턴 이브닝 스타紙>等 現地 新聞에 실리는 이완용 및 大韓 帝國 公館 消息을 自身의 日記에 記錄한 것이 남아있다. 逆賊으로 몰려 美國으로 亡命간 門과 同期 서재필 이 거지꼴에 갖은 人種差別 을 견디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리 에서 다시 高等學校 를 卒業할 즈음이었다.

1890年代 活動 [ 編輯 ]

歸國 및 敎育 改革 [ 編輯 ]

1890年 陰曆 10月에 歸國해 成均館 大司成(大司成)·交換鉏總販(交換署總辦)· 刑曹參判 · 共助參判 · 同知義禁府事 · 同知成均館事 · 同知春秋館事 ·轉換局總販·右副承旨·內務參議等 各種 要職을 歷任했고 大韓帝國 內閣의 對美協商을 도맡았다.

特히 成均館 大司成(大司成-政3品) 在任當時 美國에서 겪은 것을 바탕으로 近代敎育改革을 主導했는데, 初等敎育의 義務化를 制度化하고, 近代的 敎師 養成事業 計劃을 指揮했으며 朝鮮 의 國立大 格인 成均館 의 커리큘럼을 改編해 地理, 算術, 科學等 西洋 學問 履修 科目을 新設하고 定期的인 試驗 制度의 改正을 主導했다. 이는 政府 主導로 이뤄진 最初의 敎育 近代化 試圖였다 할 수 있었다 [5] .

東學農民運動과 淸日戰爭 [ 編輯 ]

1893年 親母 신氏(辛氏)의 賞을 理由로 辭職 後 母親喪을 지키길 1年餘, 이듬해인 1894年 東學農民運動 이 일어났다. 淸나라의 太平天國運動 을 떠올린 高宗과 朝廷 大臣들의 緊張感은 極에 達했고, 穀倉 地帶인 三南 地方 一帶가 큰 混亂에 빠졌다. 東學運動의 近代史的 意味는 後日 歷史家들의 評價이고 當時 高宗과 朝廷 大臣들의 認識으로는 역성 革命으로 變質될 可能性이 있는 大規模 農民 蜂起에 不過했다. 곧 그들은 東學 示威를 興宣大院君과 結託된 反逆 作黨 쯤으로 몰아붙였다 [8] . 龍仁에서 親어머니 山所를 지키고 있는 李完用으로서도 危機가 感知됐으나 養父 이호준의 處分과 決斷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894年 6月 고부民亂이 全國的으로 擴散되면서 守舊派 一色의 朝鮮 朝廷은 東學 農民 運動 을 鎭壓하기 위해 淸國에 派兵을 要請했고, 이에 呼應하여 淸軍이 朝鮮에 進走하자 淸日 兩國 軍隊의 朝鮮 半島로부터 同時 撤收를 主內容으로 하는 톈진 條約 이 自動 破棄되면서 日本이 參戰했다 [* 7] . 朝廷 大臣들은 外勢를 끌어들여 朝鮮의 國際的 威信을 크게 失墜시켰고 이제 事態는 그들의 손을 떠났다. 競爭하듯 東學 農民軍을 죽이던 淸日 兩國은 곧 直接 衝突했고, 陸海前에 걸친 몇番의 攻防戰 끝에 戰爭은 日本의 勝利로 끝났다. 淸의 敗戰으로 兩廡 運動 式 近代化의 限界가 드러났고, 12年前 名聲 皇后 還宮때부터 淸나라와 結託 中이었던 守舊派 政權은 崩壞했다. 이완용 富者 亦是 守舊 政權의 核心 人物들로서 一連의 事態에 責任을 져야 했으며, 過去 大院君을 버렸듯 다시금 말을 갈아타느냐 아니면 같이 沒落하느냐의 岐路에 놓였다,

甲午更張과 開化派 內閣에 參與 [ 編輯 ]

1894年 8月 淸日戰爭에서 淸國軍隊를 韓半島에서 逐出하고 勝機를 잡은 日本의 庇護 아래, 박영효 甲申政變 失敗 後 도쿄 서 亡命 中이던 開化派들이 朝鮮에 돌아왔다. 그들은 請에 依存했던 閔氏 政權을 쫓아내고 2次 改革을 推進했다. 이를 甲午更張 或은 甲午改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開化派들은 이호준과 李完用을 같이 肅淸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완용 富者는 아직 開化派 內閣이 不安定하고 또 그들이 單 3日만에 沒落했었던 10年 前 甲申政變의 例도 있으므로, 李完用이 아직 親母 山所를 지키고 있다는 理由를 들어 拒絶하고 一旦 政局의 混亂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以後 시모노세키 條約 으로 勝利를 確定한 日本의 保護 속에 開化派의 改革이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자, 李完用은 1895年 陰曆 5月 學部大臣(學部大臣) 兼 大韓帝國 中樞院 議官으로 內閣에 參與한다 [9] .

1895年 陰曆 7月, 甲午改革 이 失敗로 끝났다. 高宗과 閔氏 外戚 等 親衛 勢力들은 朴泳孝와 開化派에게 명성황후 弑害 策謀 等 逆賊 陋名을 씌워 朝廷에서 쫓아냈다. 甲午改革 當時 박영효 의 13萬 8千 字(字)에 達하는 改革 上疏文은 高宗과 朝廷 大臣 및 地方 民心을 全혀 잡지 못했고, 外形上 改革이 進行되는 듯 보였던 것은 日本의 눈치를 본 守舊派들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日本이 三國 干涉 으로 遼東半島 를 러시아에 뺏겼다. 朝鮮 朝廷에 日本의 威信이 크게 떨어졌고 自然히 開化派의 威勢도 땅에 떨어졌다. 猝地에 다시 逆賊들이 된 開化派들은 期約없는 日本 亡命길에 올랐고, 朝廷의 關心은 이제 外交的 威壓만으로 日帝를 누른 러시아 美國 으로 쏠렸다. 새로운 近代化 모델도 찾아야 했다.

貞洞 所在 舊韓末 駐韓러시아公社館 遺跡. 當時 延面積 6,600坪에 達하는 建物은 헐려 없어졌고 現在 望樓의 一部가 남아있다.

乙未事變과 俄館播遷 [ 編輯 ]

1895年 8月, 高宗의 於心(御心)을 읽은 이호준은 國際 經驗이 있는 李完用을 보내 러시아에 接近시켰다. 이에 李完用은 정동파 에 加擔해 러시아 勢力과 接觸하기 始作했다. 그런데 瞥眼間 乙未事變 이 일어났다. 開化派가 組織했던 訓鍊隊 所屬 士兵들이 閔氏 政權의 彈壓에 反撥, 日本과 公募해 일을 벌였다. 스스로 浪人으로 自處하는 日本 極右들의 칼에 景福宮 건청궁 마당에서 명성황후 가 목숨을 잃었고 나라의 尊嚴人 宮闕은 悽慘하게 蹂躪됐다. 守舊派 이완용 富者도 목숨이 危險했는데, 事變 當時 그는 駐韓美國書記官 호러스 뉴턴 알렌 의 도움으로 美國公使館으로 急히 避身했다.

日本은 乙未事變을 일으켜 親日 開化派 內閣을 복귀시키면서 乙未改革 을 推進했지만, 直後 러시아가 事態에 積極 介入하면서 다시 물러났다. 高宗과 守舊 內閣은 日本과 開化派를 朝鮮에서 逐出하기 위해 1896年 (建陽 1年), 微溫的인 美國 代身 駐韓러시아公社 카를 베베르 와 함께 俄館播遷 을 企劃했다.

1896年 陰曆 2月 11日 李完用 等 親衛隊가 地方 所要를 鎭壓하러 떠난 사이, 高宗은 意圖대로 俄館播遷 을 斷行시켜 러시아 公館에서 王世子와 1年餘를 보냈고 自然히 親日 開化派들은 朝廷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제 李完用은 外部大臣(外部大臣)에 任命되어 大韓 帝國의 러시아 協商까지 專擔하게 됐다. 이 때문에 後날 그를 親러派로 分類하는 意見도 있고 當時 손가락질도 받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日本 牽制에 積極的이었던 러시아를 利用하기 위한 것 뿐이었고 러시아와의 蜜月은 오래가지 못했다. 長男도 美國에서 留學했다.

李完用은 아울러 農商工部大臣(農商工部大臣) 等을 兼職, 帝國 近代化에 核心的인 役割을 맡는데 이는 러시아를 利用, 日本을 牽制하고 近代化를 이뤄 國際社會에서 獨立을 인정받으려던 高宗과 新內閣의 危機感 때문이었다.

獨立協會와 萬民共同會 參與 [ 編輯 ]

서재필 . 李完用과 科擧 及第 動機이나, 開化派 이며 甲申政變 主動者로 美國 으로 亡命했었다.
윤치호 서재필 의 政治的 同志이다. 守舊派 出身에 親日派인 李完用을 輕蔑했다.

李完用은 過去 育英公院에서 英語를 배우면서 1車路 開化된 文物을 接하고, 以後 直接 美國으로 건너가 議會 制度나 公敎育 體系, 그리고 不過 5日만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까지 갈 수 있게 해준 大陸橫斷鐵道 等 美國式 文物을 經驗하면서 親美派가 됐지만, 守舊派답게 西歐 列强의 武力에 依한 强制 開港 方式에는 그 亦是 否定的인 視角을 갖고 있었다. 基督敎 도 當然히 멀리했으며 王政을 支持했고 共和政 謀議를 警戒했다.

한便, 日本이 朝鮮 半島에서 影響力을 잃고 러시아 의 介入이 本格化되기 直前까지 朝鮮 半島에는 暫時나마 힘의 空白이 생겼다. 高宗은 러시아公使館에서 慶運宮 으로 還宮하면서 光武 連呼와 帝位를 許諾했다. 이에 守舊 內閣은 大韓帝國 을 急히 樹立하고 러시아와 프랑스 等 各國의 承認을 얻었으며 [10] 對內的으로는 獨立協會 를 組織했다.

그리고는 國母를 죽인 日帝에 對抗하고 儒敎 秩序를 守護하며 朝鮮人다운 近代化에 對한 輿論을 일으키고 啓蒙하자는 趣旨로 萬民共同會 를 열었다. 守舊 內閣은 甲申政變 때 쫓겨났던 開化派들 中에서도 윤치호 , 서재필 , 서광범 等 親美國破에 한해서만 獨立協會에 加擔시켜 李完用 等과 啓蒙講演 活動에 나서게 한다. 李完用은 特히 獨立協會 내 政府側 人士로서 獨立協會 第2代 委員長으로까지 活動했는데, 다음은 그의 演說 中 一部分이다.

獨立을 하면 美國처럼 富强한 나라가 될 것이며 萬一 朝鮮 人民이 團結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歐羅巴 폴란드 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世界史에서 두 本보기가 있는데, 美國처럼 世界 第一의 富强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亡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朝鮮 사람들은 美國같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서 서로 싸우거나 해치지 말자는 意味는 協會內 大多數인 守舊派 出身과 少數 親美 開化派 出身의 團合을 要求하는 意味가 크다. 그는 朝鮮 時代 中國 使臣을 迎接했던 慕華館(慕華館)의 正門으로, 朝鮮 事大主義 舊態(舊態)의 象徵으로 指目됐던 迎恩門 을 허물고 獨立門 을 設立하도록 뜻을 모았다. 獨立協會 委員長을 맡았던 時節에는 獨立新聞 의 가장 큰 後援者였으며 그야말로 獨立協會 內 核心要因 中 한 名이었다.

그런데 漸次 親美 開化派 系列의 윤치호 , 서재필 等이 國民 投票를 통한 美國式 參政權을 主張하며 皇室과 儒生(儒生)들의 警戒와 耳目을 끌자 獨立協會 內에는 龜裂이 생기고 繼續 破裂音이 들렸다. 元來 王政 支持者였던 데다가 자칫 逆謀의 罪까지 뒤집어쓸까 저어한 李完用은 協會 名單에 이름만 남긴채 모든 幹部職을 自進 辭退했다 [* 8] . 獨立協會의 모토이자 下部 靑年組織인 協成會 에는 長男 이승구(李升九) [* 9] 도 創立會員으로 活動中이었는데 李完用이 캘리포니아 의 武官學校로 逃避 留學까지 보내 버렸다.

러시아와의 葛藤과 挫折 그리고 이호준의 죽음 [ 編輯 ]

얼마안가 俄館播遷 等으로 自信感을 얻은 러시아 帝國 의 本格的인 介入이 始作됐다. 그들은 大韓帝國 承認 代價로 各種 利權을 要求하고 事事件件 內政干涉했다. 當時 韓國의 獨立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以上 國際 社會에서 威信이 떨어져서는 안됐다. 李完用과 大韓帝國 內閣은 자칫 러시아의 侵攻 危險을 무릅쓰고 永興·吉州·三修·端川의 金鑛 및 石炭採掘權 讓渡 要求를 拒否했으며, 軍事敎官을 보내겠다 一方的으로 通報해왔을 때에도 强力히 拒否했다 [11] .

皇室과 內閣은 美國通이었던 外部大臣(外部大臣) 李完用의 主張대로 美國 쪽으로 줄을 댔다. 俄館播遷 때 李完用을 도왔던 駐韓美國公使 호러스 뉴턴 알렌 을 통해 各種 利權을 歇값에 넘겨 어떻게든 美國의 影響力을 利用해보려 했고, 아울러 러시아 勢力 一掃 目的의 2次 播遷 計劃, 所謂 “美觀播遷”(美館播遷)을 提案했다. 그러나 南北 戰爭 以後 美國의 外交基調는 孤立主義 였고 러시아 帝國과의 衝突을 憂慮, 拒否 意思를 表示했다. 各種 利權을 매우 歇값에 마구 넘겼음에도 美國이 제 利속만 차리고 大韓 帝國 皇室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李完用의 能力은 決定的으로 疑心받게 됐다.

한便, 러시아는 朝鮮의 對美 接觸에 憤怒와 危機感을 느꼈고, 이에 駐韓 러시아 公使 카를 베베르 는 高宗에게 壓力을 加해 1897年 7月 20日 李完用을 學部大臣(學部大臣)으로, 再次 9月 1日子로 外職人 平壤 觀察使로 左遷시켜 中央 政界에서 逐出시켰다. 左遷 이튿날인 9月 2日 러시아 公使館 베베르의 後任으로 駐韓 러시아 公使로 赴任한 스페에르(Speyer, A. de.)는 高宗(高宗)에게 '(利權을 넘기지 않으면)궁궐 警備兵을 撤收한다','제2의 俄館播遷을 하겠다'는 等 脅迫했다. 美國人 헤링턴이 남긴 記錄에 따르면 스페에르는 李完用에 對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아는 限 가장 質나쁜 人間이다. 나는 그의 이름에 注目하고 있다. 그는 내 在任期間 內엔 內閣에 復歸할 수 없다. 그는 獨立을 떠들지만 親美(親美) 下手인 中 하나일 뿐이다. 나는 그들을 朝鮮 政治에서 排除시키려 한다.

1898年 3月 11日 러시아의 壓力에다 對美 協商 失敗의 責任을 지고 內閣에서도 차츰 밀려난 그는 及其也 全北 觀察使 로 左遷됐다. 赴任 5日만에 職務怠慢 嫌疑로 減俸 處分을 받았고, 公金橫領罪까지 뒤집어써 그나마도 罷職될 뻔했으며 그해 7月 11日에는 아예 獨立協會로부터 除名당하기까지 이른다.

1901年 2月 議政府(議政府) 參政(參政-政1品)이던 아비 이호준이 老患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高宗 皇帝는 銃身 이호준의 後繼를 잇게 하려고 急히 李完用을 赦免復權시켜 宮內府(宮內部) 特進官(特進官)으로 불러 올렸다. 이호준은 얼마안가 81歲를 一期로 死亡했고, 李完用은 3年 父親喪을 爲해 議員面本館(意願免本官) [* 10] [12] 해 政界를 다시금 떠났다. 이호준은 養아들이나 嫡長子인 李完用에게 自身의 모든 政治的 地位와 집안 祭祀를 잇게 했고, 庶子이긴 하나 親아들인 이윤용 에게는 自身의 長男으로서 莫大한 財産을 모두 물려줬다 [5] :261 .

李完用은 빈손으로 家率들을 이끌고 養아버지의 고래등같은 邸宅을 떠나, 南大門 밖 잠배골( 現在 中區 中林洞 ), 卽 當時 漢陽의 魚物廛이 몰려있던 칠패市場 近處에 그리 크지 않은 집을 救했다. 잠배골은 現在 아현役 서울驛 사이에 자리한 地域으로 當時에는 煩雜하고 못사는 洞네였지만 舊韓末 最初로 설렁湯 專門 食堂들이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다 [13] .

乙巳勒約 前後 [ 編輯 ]

親日派로 轉向 [ 編輯 ]

1904年 2月 李完用은 3年喪을 치르고 喪服을 벗었다. 그는 곧 自身의 政治的 스승이자 保護者였던 아버지를 代身해 守舊派 의 座長자리에 올랐다. 人生 最大의 岐路였다. 이때까지 李完用의 政治的 行步가 全的으로 이호준의 判斷에 依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의 政治的 決斷은 李完用이 獨自的으로 내려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當時는 러일戰爭 에서 日本의 勝利가 굳어져가는 時點으로, 當時 世界 어느 누구도 敢히 豫想치 못했던 日本의 勝利에 國權을 침탈당할 危險이 過去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時間이 없었다.

日帝에 對한 마지막 堡壘로 大韓帝國은 다시 한 番 美國을 擇했고, 李完用을 再起用해 美國公使館으로 再次 播遷할 目的으로 美國과 祕密交涉에 들어갔다. 그러나 美國은 美國-스페인 戰爭 의 戰利品이었던 필리핀 과 北太平洋의 支配를 굳히고 러시아 太平洋 進出을 牽制하기 위해 日本과 同盟할 必要가 있어서, 이미 몰래 가쓰라-태프트 密約 까지 締結한 狀態였다. 利權을 마구 넘겨줬던 보람도 없이 美國 은 韓半島에서 完全히 발을 뺐다. 大韓帝國은 더以上 빌릴 外勢의 힘조차도 없었다. 李完用이 스스로 내린 結論과 政治的 決斷은 이랬다.

日本은 韓國 問題 때문에 두 番이나 큰 戰爭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擊破했으니 韓國에 對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日本 天皇과 政府가 妥協的으로 일을 處理하려고 하니 우리 政府도 日本의 要求에 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1905年 乙巳勒約 締結 즈음 李完用이 남긴 말이다. 李完用과 內閣 大臣들은 이제 日本의 徹底한 代理者로 變身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의 主權을 멋대로 抛棄하는 代價로, 美國에 利權을 넘기는 過程에서 着服했던 部와는 比較도 안 될만큼 엄청난 特權과 富를 거머쥐게 되었다. 元來 親日이었던 開化派, 日本을 警戒하던 守舊派 가릴 것 없이 朝廷에 남은 者들과 그의 後孫들은 모두 親日派가 되었고 日帝에 協助하게 된다.

乙巳勒約 [ 編輯 ]

1905年 11月 17日 李完用은 學部大臣으로서 日本特派大使 이토 히로부미 로부터 指示를 받고, 日本軍의 武力示威를 背景으로 乙巳勒約에 署名했다. 많은 儒生들이 乙巳五賊 李完用을 處罰하라며 여러 次例 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乙巳勒約으로 李完用이 過去 1888年 1月 19日 손수 마련했고 1889年 2月 13日 에 移轉할 때도 直接 參與했었던 大韓帝國駐美公舍觀이 단돈 5달러라는 푼돈에 日本에 强制 賣却됐다 [14] . 워싱턴 뿐만이 아니었다. 英國 日本 等 10餘 個의 모든 在外 公館이 日本에 卽時 讓渡 閉鎖되는 國家的 恥辱이 기다리고 있었다. [15] 이제 大韓帝國과 日帝의 强制 倂合은 時間 問題였다.

總理大臣 任命 [ 編輯 ]

이토 히로부미

1905年 12月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後援으로 議政大臣(議政大臣)을 兼職하고, 1907年 初 大韓帝國 內閣 最高職이었던 議政府 參政大臣(正1品)에 올랐으며, 朝鮮 近代化 作業을 위해 겸하고 있었던 農商工部 大臣署理·鑛山事務局總裁에 留任됐다.

1907年 6月에는 日本과 本格的인 强制倂合 準備를 위해 內閣 體制가 改編됐다. 李完用은 改閣 後에도 總理大臣 職에 推薦됐다. 처음엔 拒否했지만 이토의 거듭된 勸誘에 結局 受諾한다.

1次 家宅 火災(火災) [ 編輯 ]

1907年 6月 內閣總理大臣으로 宮內府大臣署理를 겸하면서 李完用은 賣國奴의 代名詞가 됐다. 하루는 李完用이 御殿會議에서 抗日 義兵將 虛僞 의 處刑을 純宗 皇帝에게 奏請했다. 虛僞는 皇室 御用團體人 皇國協會 의 幹部 出身으로, 1898年 6月 30日 부터 같은 해 11月 皇國協會와 獨立協會가 同時 解體될 때까지 褓負商 等을 시켜 西歐式 參政權을 主張했던 獨立協會 를 解體하기 위해 各種 사보타주를 加하는 等 [16] 皇室의 더러운 심부름을 했던 前歷도 있었다. 어찌보면 皇室로서는 功이 있는 人物이었으나 頂上은 參酌되지 않았다. 李完用의 死刑 奏請 事實이 알려지자 옛 皇國協會 支持者들과 火가난 民衆들이 몰려와 그의 집에 불을 놨다. 그래도 이때는 早期에 鎭壓하여 祖上들의 位牌와 財産의 大部分을 지켰다.

事態 撫摩 目的의 男인, 北人等의 復權 [ 編輯 ]

1907年 (隆熙 1年) 總理大臣 就任 初 自身들에게 向하던 兩班들의 不滿을 撫摩하기 위해 歷代 黨爭 犧牲者들로 逆賊의 汚名을 쓰고 逐出됐던 男인, 北人等의 福券을 試圖한다. 비록 老論 碧波 詩派 로 갈린 것도 百餘年 前, 그나마도 外戚 勢道 政治 를 지나 아예 朝鮮의 門을 닫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 門閥들의 뿌리가 되는 老論界의 集團 反撥이 暫時 있었다. 그러나 肅宗 의 還國 政治를 模倣한 사면 이벤트에 國權 侵奪을 놓고 高調되던 兩班들의 憤怒를 흩어놓는데는 어느 程度 效果가 있었다. [17] 單, 정여립 大洞契 西學(天主敎) 關聯者 等은 排除됐다.

1908年 (隆熙 2年) 4月에는 豫定대로 77名의 名譽를 회복시킨다 [18] . 李完用 等의 建議로 赦免復權된 名單은 아래와 같다.

  • 한효순 (韓孝純), 정인홍 (鄭仁弘), 목내선 (睦來善), 이현일 (李玄逸),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耉), 조태억(趙泰億), 최석항(崔錫恒), 유봉휘(柳鳳輝), 김일경 (金一鏡)
  • 김중기(金重器), 김도응(金道應), 정후겸 (鄭厚謙), 김하재(金夏材), 안기영(安驥泳), 권정호(權鼎鎬), 조중호(趙中鎬), 김익순 (金益淳), 이희화(李喜和), 민암(閔?)
  • 이의징(李義徵), 한세량(韓世良), 신치운(申致雲), 이징옥 (李澄玉), 원용성(元用星), 허욱 (許煜), 이주회(李周會), 이진유(李眞儒), 定해(鄭楷), 서종하(徐宗廈), 윤성시(尹聖時),
  • 박필몽(朴弼夢), 이명의(李明誼), 이사상(李師尙), 윤연(尹?), 윤취상(尹就商), 이명언(李明彦), 김중희(金重熙), 권익관(權益寬), 윤상백(尹尙白), 綸旨(尹志),
  • 이하징(李夏徵), 유수원 (柳壽垣), 甚惡(沈?), 박찬신(朴讚新), 組同情(趙東鼎), 이거원(李巨源), 이명조(李明祚), 권형진(權瀅鎭), 尹鑴 (尹?), 윤원형 (尹元衡)
  • 이동양(李東讓), 이범제(李範濟), 이공윤(李公胤), 이중술(李重述), 이하택(李夏宅), 이보욱(李普昱), 김호(金浩), 박필현(朴弼顯), 박태신(朴泰新), 政權(鄭權)
  • 조현빈(趙顯彬), 審幽玄 (沈維賢), 권첨(權詹), 理事로(李師魯), 밀풍군(密豊君) 利原(李垣), 이재화(李在華), 이우화(李宇和), 권숭(權崇), 김정관(金正觀), 김정리(金正履)
  • 정사효(鄭思孝), 권집(權?), 김주태(金柱泰), 김윤(金潤), 채동술(蔡東述), 박홍구(朴弘耉), 박홍도(朴弘道) [18]
헤이그 特使 李儁 , 이상설 , 이위종

헤이그 特使 事件과 高宗 讓位 强要 [ 編輯 ]

退位 즈음의 高宗
日本 陸軍 大將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904年 러日 戰爭에서 勝利한 日本은 英日 同盟 가쓰라-태프트 密約 等을 통해 列强들로부터 暗默的으로 朝鮮 植民地化를 認定받았다. 이에 日本은 第1次, 第2次 韓日 協約과 1905年 乙巳條約을 締結하여 大韓帝國의 外交權 剝奪과 內政 干涉을 本格化했다.

가만 있을 수 없었던 高宗은 1907年(光武 11年) 萬國平和會議 李儁 , 이상설 , 이위종 으로 該當하는 세 名의 密使를 派遣하여 日本 侵略의 不當性과 乙巳條約 無效를 世界에 呼訴해보려 했으나( 헤이그 特使 事件 ) 結局 挫折해야 했다.

日本이야말로 自己들 뜻대로 順風에 돛단 듯 가는 줄 알다가 不時에 크게 놀라, 日本 內에서도 當時 穩健派로 分類되던 이토 히로부미 等을 叱責하는 輿論이 일어났고, 元來 計劃보다 훨씬 앞당겨 韓國 倂合을 서둘렀다.

日本은 李完用과 親日 團體들을 앞세웠다. 李完用과 一進會 (一進會) 송병준 等은 高宗 에게 責任을 追窮, 兩位를 强要하여 純宗 이 日本의 脚本대로 卽位했다. 高宗 退位를 契機로 全國的으로 일어난 抗日 義擧들을 彈壓하고 大韓 帝國 軍隊를 解散시키기 위해 李完用은 駐韓駐車日本軍司令官(駐韓日本軍司令官)이자 統監代理였던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1850 ~ 1924)와 緊密히 協議했다. 李完用은 守舊派 出身이라 아직 日本 政府의 要注意 人物이었던 데다 송병준 一進會 와 競爭 關係에 있던 터라 憲兵補助員 (憲兵補助員) 制度, 卽 朝鮮人 앞잡이로 日本 憲兵과 함께 抗日義兵들을 討伐하게 提案까지 했다. 이는 곧 採用돼 곳곳에서 義兵들이 虐殺당했다. [ 出處 必要 ]

2次 家宅 火災(火災) 및 純宗 卽位式 [ 編輯 ]

1907年 7月 19日 李完用은 讓位에 關한 高宗의 詔勅이 내려진 當日 곧바로 皇帝 代理 儀式을 擧行하려 했다. 그런데 意識을 主管할 宮內府 代身 박영효 가 病을 핑계로 入闕하지 않아 蹉跌이 생겼다 [5] :259 . 그는 甲申政變 失敗이래 1次로 日本에서 10年을 보냈고, 甲午改革 의 失敗로 다시 12年 肝을 日本에서 亡命하면서 不過 1個月前까지 도쿄 에 있었다. 그런 그를 親日派 박제순 이 周旋해 赦免시켰고, 歸國 卽時 金陵위 [* 11] 에 復職되고 宮內府 代身에 막 任命된 참이었다. 이 모든 것은 開化派의 巨物이자 王室 親戚인 朴泳孝가 韓日倂合 過程에서 일정한 役割을 해주길 期待해서였지만, 그는 日本과 親日派들의 期待와 달리 讓位만은 막고자 朝鮮痛感 이토와 이완용 사이에서 무던히 애를 썼었다. 兩位가 確定되자 그는 다시 宮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李完用은 朴泳孝의 空席을 맡아 宮內府大臣 署理로서 양위식을 强行한다 [5] :259 .

1907年 7月 20日 純宗 卽位式으로 公表된 그 時刻, 反日 團體인 同友會 會員들이 德壽宮 에서 2 km 距離도 안되는 李完用의 自宅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5] :260 . 1次 火災 때와 달리 서울 市內의 警備力과 治安力이 양위식 때문에 모두 德壽宮 쪽으로 集中됐던 탓으로 示威 및 火災에 미처 對處할 수 없었다. 當時 家財道具는 말할 것도 없고 古書籍 等과 집안 佩物까지 모두 타버려, 李完用은 거의 全財産이 불타는 相當한 被害를 입었다 [5] :260 . 特히 그가 집안의 嫡長子로서 祭祀를 모셔야될 祖上들의 神主까지 몽땅 불 속에 사라지는 바람에 精神的인 衝擊도 相當했다고 한다 [5] :260 .

성난 群衆들의 放火로 집은 불타고, 李完用의 家族들은 '賣國奴의 一族들을 잡아 죽여라'는 그들에게 쫓겨 南山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矮星俱樂部로 몸만 避했다. 亂離가 난 줄도 모르고 李完用과 親日 官僚들은 德壽宮 에서 純宗 卽位式을 主管 中이었다 [5] :260 . 卽位式 當日, 日本에 對한 憤怒가 이완용에게로 옮아 붙으면서 半이완용 데모와 火刑式은 서울 말고도 全國 各地 百姓들이 모이는 곳마다 激烈하게 進行되었다.

純宗 卽位式 途中 德壽宮으로 몰려온 群衆들이 日本 憲兵隊에 가로막힌채 '李完用을 죽여라'라고 외치는 喊聲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事態를 깨닫고 唐慌했다. 그와 內閣 官僚들은 宮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쩔쩔매는데, 憲兵隊가 通過시킨 各 新聞 記者들과 官僚들이 全國 各地에서 騷擾 事態가 일어나고 있음을 續續 알려왔다. 이토 히로부미 는 憲兵隊의 護衛를 붙여 李完用을 自身의 馬車에 태우고 痛感 官邸로 갔다 [5] :261 . 왜성대의 統監府는 1926年 光化門에 朝鮮 總督府 新廳舍가 들어서기 前까지 初期 朝鮮總督府 役割을 했는데 이곳에 먼저 避身 와있던 李完用의 夫人 조氏는 後日, 避身 첫 1週日間 모든 費用을 이토가 댔다고 回顧했다 [5] :261 .

1907年 9月 李完用과 그 家族들은 왜성대에서 두 달假量 머물다가 이제 의붓兄 이윤용 의 집이 된 옛 大邸宅으로 돌아갔다 [5] :261 . 앞에서 記述한 대로 이호준의 모든 財産은 親아들인 庶子 이윤용 에게 相續이 됐지만 李完用은 이호준 死亡 當時 相續權을 主張하지 않고 집안 祭祀를 直接 모시는 赤字로서 義務만을 다해왔기 때문에, 비록 이윤용이 의붓兄이나마 동생 家族의 便宜를 誠心誠意껏 봐줘 더부살이에 別 어려움은 없었다 한다.

1908年 1月 의붓兄집에서 서너 달을 지내던 李完用은 겨우 窮理끝에 太皇帝로 물러난 高宗이 直接 저동( 現在 明洞聖堂 隣近 )에 있는 南寧位宮(南寧衛宮)을 自身에게 하사한다는 式의 政治的 演出로 事態撫摩를 試圖하기까지 이른다 [5] :261 .

박영효

박영효 彈劾 [ 編輯 ]

親日派들은 圓滑한 合倂 節次 進行을 爲해 哲宗 의 사위이자 開化派의 巨物 박영효 에게 政治 參與 意思를 繼續 打診했으나 그는 高宗 讓位 以後 一切 情事에 關與하지 않았다. 그를 壓迫하기 위해 李完用과 法部大臣 조중응 (趙重應, 1860 ~ 1919)은 純宗 卽位式에 나타나지 않은 朴泳孝를 處罰하라는 上疏를 새 皇帝 純宗에게 올렸다 [5] :261 . 조중응은 李完用의 妻家쪽 親戚이기도 했으며 李完用과 함께 올린 上疏文에서 '이番에 皇帝의 위를 물려준 것은 太皇帝의 純粹한 心情에서 나온 것이며 宗廟社稷이 億萬年토록 鞏固하게 될 基礎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臣下와 百姓이 없다 그런데 朴泳孝가 그 職責을 回避했으니 그 罪를 물어야 한다'라며 事態를 完全 歪曲했다 [5] :261 .

純宗은 박영효 逮捕 上疏를 一旦 允許했다. 이에 박영효 는 亦是 皇帝 代理 意識 執行을 拒否한 시종원경 이도재 , 前 弘文館 學士 남정철 과 함께 法部에 拘束되었다. 이때 拘束 收監된 朴泳孝가 갑자기 배頉이 나 苦生했는데, 이 消息을 들은 이토 痛感이 그를 달래보려고 直接 藥을 보냈으나 그는 韓國에 藥이 없냐며 물리쳤다. 그는 警務廳에서 審問을 받으며 "總理大臣 李完用을 逆賊이라 했을 뿐 나는 無罪다"고 强辯했지만 流配刑에 處해져 濟州道 로 귀양갔다 [5] :262 . 그렇긴 했어도 純宗 皇帝는 濟州道 밖으로 移動해도 罪를 묻지는 않겠다고 밀지(密旨)를 따로 줬다고 한다.

오래지나지 않아 朴泳孝는 流配刑에서 都城 出入禁止令으로 減刑, 1910年 馬山 에서 韓日 倂合 의 悲報를 듣는다. 그때부터 박영효 亦是 朝鮮에 對해 諦念하고 侯爵 作爲와 은채공사금 28萬원을 받고 朝鮮貴族 에 編入된다. [19] 親日派로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李完用이 15萬원, 박제순 이 10萬원이었다.

정미7조약 [ 編輯 ]

順從이 卽位한 뒤, 丁未七條約 에 署名하여 內政權을 스스로 日本에 넘겼다. 정미條約 締結의 元兇인 정미七赤 名單에는 李完用의 맏며느리 임건區의 親三寸人 査頓 임선준 (任善準)의 이름 亦是 確認되고 있다.

英親王 이은 皇太子 冊封 主導 [ 編輯 ]

純宗(純宗) 이 正式으로 皇帝가 되자 李完用은 王室의 王位 繼承 問題에도 介入하기 始作했다.

1907年 8月 17日 太皇帝 高宗 은 李完用의 推薦대로, 後嗣가 없었던 純宗 의 皇太子로 純宗皇帝의 막내 동생 英親王 을 決定했다 [20] :635~641 . 當時 次期 大權의 有力 走者였던 흥선大院君 의 嫡長孫(嫡長孫)이자 自身의 長조카 映宣群 [21] :333 長成한 아들 의친왕 을 牽制해, 幕後에서 實質的 權力을 쥐려했던 高宗의 老慾과 李完用의 政略(政略)이 맞아떨어진 結果였다 [21] :334 . 이로써 끊임없이 潛在的 王位繼承者로서의 大宇와 注目을 받아왔던 映宣群 의친왕 은 猝地에 皇太子의 臣下로 格下되었다. [21] :334

한便 王位繼承問題에까지 介入한 그에 對한 調整 大臣들의 視角은 惡化됐고, 그가 權勢를 부리며 온갖 參見을 始作하자 兩位를 같이 主導하던 사람들조차 등을 돌리게 됐다. 皇室은 日帝와 親日 內閣의 擧手機로 轉落하게 됐으며 親日 內閣이나마 朝鮮人들이 다스리던 나라는 韓日倂合 後에는 總督府가 設置돼 完全히 日本人들에 依해 統治되는 亡身과 屈辱을 겪어야 했다.

己酉覺書 [ 編輯 ]

1909年 7月에는 李完用의 獨斷으로 己酉覺書 를 日本과 交換, 大韓帝國 의 司法權마저 日本에 넘겨주었다.

民衆들의 憤怒와 暗殺 威脅 [ 編輯 ]

1909年 12月 24日子 皇城新聞 . 12月 22日 낮에 明洞聖堂에서 李在明 醫師에게 칼에 찔려 病院으로 移送되었다고 報道한 內容이다.

高宗이 退位하고 順從이 卽位하자 李完用은 賣國奴, 逆賊이라는 叱咤를 받았고 半(反)이완용 示威, 이완용 火刑式이 곳곳에서 擧行되었다. 特히 블랙리스트에 오른 日本 政府 要人들과 賣國 人士들을 處斷하기 위해 暗殺段이 곳곳에서 꾸려졌고 李完用은 언제나 그들의 1番 타겟이 되었다.

1909年 10月 26日 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暗殺됐다. 李完用은 11月 4日 서울 南山 奬忠壇 에서 열렸던 이토 痛感 追悼會에 沈痛한 表情으로 參席했다. 追悼會는 日本 現地의 이토 히로부미 의 葬禮式과 同時에 擧行됐는데, 시종원경(侍從元卿) 윤덕영 , 漢城府民會(漢城府民會) 代表 尹孝貞 等이 代表로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追悼文을 읽는 자리에서 이토 공은 自身의 스승과 같은 存在였으며 그가 提唱한 極東平和론(極東平和論)의 뜻을 支持하고 尊敬한다고 말하는 同時에 그를 暗殺한 安重根 을 朝鮮人의 이름으로 猛烈히 非難했다 [22] .

1909年 12月 22日 에는 앞서 17日에 死亡한 벨기에의 王이자 콩고의 人間屠殺者人 레오폴 2歲 의 明洞聖堂 追悼미사에 參席하기 위해 人力車에 올랐다. 聖堂 正門 近處에서 군밤장수로 變裝하고 기다리던 李在明 이 李完用을 덮쳐 그의 옆구리와 어깨等을 瞬息間에 3次例 찔렀다. 그는 自身과 실랑이를 벌이는 人力車꾼마저 찔러 밀쳐내고 大韓獨立萬歲를 외치다 日本 巡査의 群島에 넓적다리를 맞고 逮捕됐다. 人力車꾼 박원문 은 그 자리에서 絶命, 李完用은 곧바로 大韓議員 으로 後送됐다. 李在明은 이듬해 9月 李完用에 對한 殺人未遂 嫌疑 및 박원문을 殺害한 罪로 絞首刑에 處해졌다.

이때 李完用은 칼에 왼쪽 肺가 貫通됐는데, 마침 日本人 治療目的으로 派遣와있던 日本人 外科醫師들과 當時의 最新醫療技術을 總動員, 2個月間의 入院 治療 끝에 九死一生으로 살아났다. 다만 이때부터 얻은 肺쪽의 持病이 喘息과 肺炎으로 發展하여 平生 冬節期마다 크게 苦生했고 後날 死亡 原因이 된다.

1910年代~1920年代 活動 [ 編輯 ]

韓日 倂合 條約 [ 編輯 ]

1910年 8月에는 內閣總理大臣 李完用은 日本의 脚本대로 內閣會議를 召集해 韓日倂合에 關한 件을 想定하고 御殿會議에 올려 뻔뻔하게도 皇帝의 面前에서 合倂案을 通過시켰다. 이에 따라 韓日兩國倂合全權委員會가 設置되자 22日에는 스스로 全權委員에 올라 데라우치 마사打케 (寺內正毅)의 官舍에서 韓日 倂合 條約 에 直接 署名했다.

1910年 韓日 倂合 條約文

條約締結 後 곧 官職을 辭退한 李完用은 條約文 5番 條項의 惠澤으로, 日本 政府로부터 勳1等 伯爵(伯爵) 의 作爲와 殘務處理手當 60餘 원( 當時 日本돈 2원은 朝鮮葉錢 1千닢과 같은 價値였다고 한다 [23] ), 退職金 1,458원 33錢, 朝鮮總督府 의 恩師公採金 15萬 원을 支給받았다.

庚戌國恥(韓日倂合) 以後 [ 編輯 ]

1916年 8月 4日 每日申報 . 李完用이 寄稿한 글로 李王家 의 王世子 이은 의 結婚 決定을 '內鮮融和'로 美化했다.

韓日倂合 以後, 伯爵 이 된 그는 1912年 朝鮮總督府 中樞院 副議長에 올라 '一線融和'(日鮮融化)를 進行시켰다. 그는 定期的으로 日本天皇에게 朝鮮貴族 代表로 直接 問安人事를 갔으며, 神社 參拜는 勿論이거니와 朝鮮人 貴族들을 모아 두고 '天皇陛下 萬歲'를 불렀다. 그해 7月 11日 農事奬勵會 會長으로 推戴됐다.

1915年 10月 13日 朝鮮農會 會頭(會頭)로, 16年 7月 30日에는 이無會議 會頭로 選出됐고, 1918年 5月 25日 에는 朝鮮貴族回 副會長에 選出됐다.

1919年 1月 15日 高宗 皇帝 가 崩御했다. 市中에 毒殺說이 떠돌았는데, 高宗 兩位를 强要했던 親日派들, 特히 李完用이 그 背後로 指目됐다.

1919年 4月 5日 每日申報 1面에 李完用이 3.1 運動의 失敗를 主張하는 警告文 3番째 發表한 글.

1919年 3月 1日 , 朝鮮에서는 高宗의 승하(昇遐)와 國際 聯盟 우드로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1856年 12月 28日 ~ 1924年 2月 3日) 美國 大統領의 民族自決主義 提唱에 呼應해 3·1 運動 이 일어났다. 그 亦是 民族 指導者들로부터 同參을 要請받았으나 오히려 當時 總督 데라우치 마사打케 (寺內正毅)에게 彈壓 必要性과 그 方案에 關한 便紙를 數次例 보내기도 했다. 李完用은 公式的으로 警告文을 連달아 3回 發表하고, 3·1 運動 이 不純勢力에 依한 不純한 亂動에 不過하며, 弱肉强食의 時代에 朝鮮의 獨立 祈禱는 虛妄할 뿐이라 發言했다.

親日官僚 및 社會團體 活動 [ 編輯 ]

1920年 에 日帝는 3·1 運動 鎭壓에 對한 功勞로 그를 伯爵에서 侯爵으로 올려줬다. 日帝 治下에서 그의 立地는 日本 皇室로부터 勳章과 爵位를 받으면서 더욱더 確固해졌다.

앞줄 왼쪽-孫子 이병주, 가운데-이완용 本人, 안긴 아이는 孫子 李秉喆, 뒷줄 왼쪽-孫子 이병길, 뒷줄 가운데-次男 이항구, 뒷줄 오른쪽-孫子 이병희

1921年 에는 朝鮮人 貴族 名簿 管理 機關인 朝鮮總督府 中樞院 拷問 兼 副議長을 지냈다. 內鮮一體(內鮮一體)와 日本語 普及을 督勵했으며, 朝鮮貴族院 會員, 農事奬勵會 會長, 朝鮮物産공진협贊回 名譽會員, 日本製國軍人後援會 朝鮮支部 評議員, 朝鮮貴族回 副會長, 農林株式會社拷問, 總督府 敎育調査 및 産業調査委員, 朝鮮農業敎育硏究會 拷問, 線만노몽연구협회 顧問 等等 親日團體들마다 깊숙히 干與해 日本의 植民地 政策과 韓半島 收奪을 陰으로 陽으로 돕는다.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 12] 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山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世上이 밝아지는구나.

? 李完用이 宋太祖 趙匡胤(趙匡胤) 의 英日視(詠日時- 害를 讚揚함 ) [* 13] 를 引用, 日本을 讚揚했던 句節

1922年 3月 14日 에는 朝鮮美術展覽會 書藝部門 審査委員으로 委囑됐다.

1923年 1月 6日 에는 造船社編纂委員會 拷問으로 韓國 歷史를 日本의 視角에 껴맞춰 解釋, 歪曲하는 이른바 “親日史觀”을 定立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24年 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 도 男爵이 되어, 朝鮮人으로는 거의 드문 富者(父子) 貴族이 되기도 했다 [24] .

李完用과 核心 親日派들 몇몇은 日帝時代 내내 乘勝長驅했던 反面 多數의 貴族들과 나머지 兩班들의 形便도 國民들과 마찬가지로 漸漸 悲慘해졌다. 1910年 庚戌國恥 以後 相當數의 貴族들이 日本으로부터 爵位를 받고 賞金을 받았지만, 日本의 收奪이 本格的으로 始作되면서 일어난 인플레이션 으로 가만히 있어도 今方 돈의 價値가 떨어졌고, 그나마도 무위도식하거나 墮落해서 放蕩한 生活로 沒落해 가는 판이었다 [5] :348

大部分 世襲 大土地로 奢侈를 누려온 그들이었지만, 日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工産品에 비해 農業의 價値는 나날이 떨어져가기만 해서, 繼續 土地에 依存했던 그들 가운데는 이미 破産 地境에 이르러 品位 維持는 勿論 生活조차 꾸려나가기 힘들 程度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5] :348 . 王室과 鳶이 닿았던 이들中에는 昌德宮 으로 몰려가 前 皇帝 高宗 , 純宗 父子에게 家勢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며 用돈을 타서 生活하는 者들도 있었다고 한다.

最後 [ 編輯 ]

末年의 이완용

1909年 李在明의 暗殺 未遂 事件 때 肺에 傷處를 입은 뒤로 李完用은 每年 겨울철만 되면 解消(咳嗽)와 喘息, 肺炎과 胸痛 等으로 苦痛을 겪었다. 日本에서 醫師들을 불러 그 後로도 繼續 定期的인 診療를 받았으나 差度는 보이지 않았다. 시들어가는 몸과는 反對로 그의 財産은 늘어나기만 했는데, 特히 땅 財産은 1億 3千萬 坪까지 불어났다. 當時 朝鮮人 가운데 王을 除外하고 가장 富者라는 所聞까지 있었지만 肺炎과 解消 症狀은 어쩔 수 없었고 죽을 때까지 胸痛에 시달렸다. 이런 症狀은 나이가 들면서 漸漸 더 심해졌다.

1925年 에도 가을까지는 全羅南道 和順郡 동복면의 名勝地 물염적벽 을 遊覽하고 11月 下旬에는 純宗 에게 問安人事를 하는 等 活潑하게 活動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다시 解消가 甚해져 12月 5日 黃海道 長湍郡 소남면 遺德里의 우봉 李氏 時調 이공정의 墓에서 열린 祭祀에 參席하지 못했다 [5] :349 . 오래前 流失됐던 時調 이공정의 妙를 李完用이 손수 이것저것 챙겨 드디어 改築工事를 끝내고 元來 直接 祭祀를 지내려하려 했으나, 持病인 기침이 목숨을 威脅할 程度로 심해졌다 [5] :349 .

그後 얼마間 집에 들어앉아 療養을 해 어느 程度 好轉됐다. 그래서 1926年 1月 12日 午前 10時 總督府에서 열린 中樞院 新年 第1回 會議에 多少 無理를 해 參席하게 된다 [5] :350 . 朝鮮 總督府는 그해 1月 1日 景福宮 안에 新築한 廳舍로 移轉해 있었으며, 朝鮮 貴族 登錄官廳人 中樞院度 새 廳舍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朝鮮 總督府는 새 廳舍를 데라우치 마사打케 (寺內 正毅) 初代 總督이 立案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 好道) 前 總督(2代)李 着工한 以來 9年만에 完工을 본 當時 東洋 最大의 建物이라며 大大的으로 宣傳했다.

李完用은 새 廳舍에서 열린 새해 첫 會議인데다 사이토 마코토 總督도 參席한다고 해서 無理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그의 病을 決定的으로 악화시키고 말았다. [5] :350 . 부축을 받고 歸家 後 밤이 되자 기침이 손쓸 수 없을 程度가 됐고, 以內 卒倒해 며칠間 高熱에 시달리다 昏睡狀態에 빠졌다. . 1926年 2月 11日 午後 1時 20分 李完用은 옛 主人이 보낸 赤葡萄酒를 입에 대보지도 못한 채 日本人 醫學 博士 두 名과 朝鮮人 主治醫, 그리고 그의 의붓형 이윤용 과 次男 이항구 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인동 집에서 눈을 감았다. 享年 69歲. 場所 이병길은 日本 留學 中으로 臨終을 지키지 못했다.

事後 [ 編輯 ]

1926年 2月 13日 每日申報 의 이완용 訃告 記事

1926年 2月 12日 , 葬禮式은 日本人 , 朝鮮人 合쳐 50名의 葬禮委員들이 嚴守했고, 일황(日皇)李 하사한 “朝鮮總督府 中樞院 副議長 情2位大勳位侯爵 우봉이共地球”(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正二位大勳位候爵 牛峯李公之柩)라고 적힌 葬禮旗발을 앞세워 豪華로운 葬禮 行列이 이어졌다. 日本 巡査들의 護衛속에 鍾路 옥인동부터 光化門까지 이어진 葬禮 行列의 規模는 高宗 皇帝 葬禮行列을 넘는 게 아닌가 할 程度였다고 한다.

大勳位 國花臺數長

같은 날, 賣國親日(賣國親日)의 代價로 日本 皇室로부터 大勳位 國花臺數長 을 받았다 [25] .

國花臺數長은 日本 皇室이 現在도 授與하고 있다. 歷代 受勳者 目錄에서 韓國人의 이름은 現在까지 4名이 確認되는데, 英親王 이은 (李垠), 의친왕 의 長男 이건 (李鍵), 次男 이우 (李?) 等 王族 3名을 除外하면 李完用이 唯一하다.

1926年 2月 13日子 東亞日報 社說欄

1926年 2月 13日 東亞日報 社說欄에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題目의 記事다.

그도 갔다. 그도 畢竟 붙들려갔다. 保護巡査의 겹겹 파수와 堅固한 掩護도 저승茶祀의 달려듦 하나는 어찌하지 못하였다. 너를 위하여 準備하였던 것이 이때였다. 아무리 몸부림하고 앙탈하여도 꿀꺽 들이마시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날의 李 毒杯이다. (中略) 어허, 부둥켰던 그 財物은 그만하면 내놓았지. 앙탈하던 이 責罰을 이제부터는 永遠히 받아야지!

李完用이 今日 閻羅國에 入寂하엿스니 閻羅國의 葬禮가 가려

-當時 中央日報의 記事 中

(解析:李完用이 오늘 閻羅國(地獄)에 入寂하였으니 閻羅國의 將來가 걱정된다)

李完用은 全羅北道 益山郡 낭산면 낭산리의 山에 묻혔다. 該當 地域을 墓地로 擇한 理由가 一說에 依하면 賣國 行動에 對한 앙갚음으로 因한 墓所 毁損이 두려웠던 나머지 1926年 當時에는 宏壯히 窮僻한 僻地였던 낭산리 林野를 일부러 擇했던 것으로 推定하는 意見도 있다 [26] . 解放 以前에도 훼墓 事件이 種種 있어 日本 巡査가 墓를 지켰고 解放 以後로도 持續的으로 훼墓 事件이 끊이지 않아 及其也 1979年 , 直系 後孫들이 아예 破墓(破墓)하여 그 遺骨은 化粧했다. 그의 棺 뚜껑이 博物館에 展示되어 있었으나 歷史學者 이병도 가 ‘賣國奴의 棺 뚜껑을 展示하는 것을 反對’한다며 뚜껑을 불태웠다. [27] 李完用의 墓터는 以後 [ 언제 ?] 採石場으로 바뀌어 있었던 옛 痕跡조차 사라져 버렸다.

1935年 當時 總督府가 編纂한 《朝鮮功勞者명감》에 朝鮮人 功勞者 353名 中 한 名으로 收錄됐다 [28] [29] .

1945年 解放後 李完用의 家族과 後孫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當하거나 돌팔매를 맞고 다녔다. [ 出處 必要 ] 長孫週 이병길은 앞서 말한대로 6.25 戰爭때 行方不明되었으며 둘째 손주 이병주 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하고 1962年 日本으로 密航해 아예 日本人으로 歸化했다고 한다. 또한 큰曾孫子 이윤형은 남은 財産을 整理해 캐나다로 移民을 가는 等 李完用의 直系後孫은 거의 뿔뿔이 四方으로 흩어졌다 [30] .

2002年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모임 이 發表한 親日派 708人 名單 2008年 公開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는 아들 이항구 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 民族問題硏究所의 名單에는 6.25때 行方不明된 長孫子 이병길 의 이름도 올라있다.

2006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調査,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06人 名單 에 包含되었다. 2007年 大韓民國 親日反民族行爲者財産調査委員會 는 李完用과 이병길의 財産을 國家로 還收하기로 決定했다. [31]

1992年 부터 李完用의 後孫들은 캐나다로 移民간 長孫週 이윤형을 代表로 祖上땅찾기 訴訟을 始作했다. 그들은 1992年 서울大學校 를 相對로 京畿道 高陽市 林野 2萬 5千坪에 對한 返還請求 訴訟을 냈다가 敗訴했고, 다시 1998年 7月에는 서울 西大門區 북아현동 一帶 土地 2372m 2 (約 712坪)에 對한 返還請求 訴訟을 내 勝訴했다. 返還받은 土地는 卽時 第3者에게 賣却, 約 30億원의 賣買 利益을 얻었다고 한다. 아직도 李完用과 송병준 等 親日派의 後孫들은 親日 還收 財産 返還 訴訟을 여러 個 準備中이다 [32] [33] .

2008年 12月, 서울대학교病院 의 前身인 옛 大韓議員 때 日本人 醫師가 作成한 胸部外科 手術 차트 [34] 가 發見됐다. 該當 記錄은 1909年 12月 22日 被襲 當日 李完用의 것이라고 서울대학교病院 胸部外科 김원곤 敎授가 18日 言論에 밝혔다. [34] 이는 韓國 醫療 歷史上 最初의 胸部外科 記錄으로 [35] , 單純醫療記錄이라기보다 檢査 側 要求로 裁判에 採擇된 鑑定書 性格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34]

評價 [ 編輯 ]

否定的 評價 [ 編輯 ]

첫째, 日本과 러시아의 틈바구니 속에서 朝鮮의 獨立을 놓고 이리저리 애썼던 것만은 事實이나, 그에게 있어 獨立이란 '近代的 國民 國家'로서의 獨立보다는 王室 保存 및 安危 問題로서의 '獨立'이란 意味였다. 그 例로 美國을 끌어들이려 온갖 數를 다썼지만, 정작 美國을 본받아야 했던 普通敎育, 參政權, 共和政, 奴婢 撤廢 等은 全혀 度外視했고, 近代的 議會 政治에 對한 合意를 이끌어 내거나 國家로서 世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基本的 條件인 近代 憲法 制定等에 全혀 한 일이 없다.

特히 李完用 等 守舊派들이 大韓帝國을 宣布하며 내놓은 
對韓國 國際
라는 것은 王權의 傳統的 絶對性만을 强調한 內容으로, 國民 모두를 아우를 支持와 合意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애當初 不可能했다.

둘째, 近代 改革을 政府 主導로 하려했음에도 그 動力이 될 國家 豫算이나 國家 財産 및 稅收 確保에도 한 일이 없다. 數百年間 免稅를 누려온 兩班들, 特히 온갖 惠澤을 獨占한 門閥 勢道家들이라든지, 王室 宗親들에게 사사로이 주었던 國家 專賣 事業等, 近代化에 妨害가 되는 社會 構造를 놔두고 李完用 等 守舊派들이 한 짓은 各種 利權을 列强들에게 歇값에 넘기는 일 뿐이었다. 여기서 받은 얼마間의 돈은 王室 財政과 一部 政府 要人들에게 도움은 됐을지언정, 利權을 넘겨 列强들이 마구 國富를 流出해가는 통에 政府 財政과 國民의 삶은 더욱더 疲弊해져 갔다.

게다가 日本에 나라를 판 後 代價로 불어난 그의 財産은 現在 推算 數兆 원에 達했고 가진 땅만 1億 3千萬 坪이 넘었어도, 乙巳條約 締結 直前 辨明처럼 떠들었던 '나라가 다시 富强해지면 그 때 가서 國權을 되찾으면 된다'는 말을 實現하기 위해 한 일이 全혀 없었고, 後輩들과 歷史에 全혀 本보기가 되지 못했다.

셋째, 그의 리더십으로는 大韓帝國 政府 內閣 內에서조차 合意를 이끌지 못하고 政敵(政敵)들만 자꾸 생겼다. 李完用이 젊은 時節 駐美公使館에 있을 때부터 數十年間 그를 지켜봐왔던 윤치호 는 다음과 같은 人物評을 남겼다.

나는 李完用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特權意識, 野卑한 狡猾性과 陰凶함, 그와 같거나 劣等한 사람들에 對해서는 고집스럽고 權勢 있는 사람들에게는 屈辱的일 만큼 服從하는 態度,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偏見을 갖게 한다. 李完用은 徹底한 機會主義者요 變節主義者 아부主義者였다고 할 수 있다. 周知하다시피 李完用은 草創期 獨立協會의 議長이었다. 獨立協會의 構成員이 大部分 우습지만 日本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 尹致昊 日記 內容 中에서-

李完用의 조카 金命洙 가 이완용 事後 1周年을 기리기 위해 1927年 에 著述한 冊 《一黨記事》

또한, 李完用의 조카이자 李完用의 祕書職으로 있던 金命洙 가 李完用을 기리기 위해 1927年 《一黨記事(一堂紀事)》를 펴냈는데, 《一黨記事》 內容 中에서 李完用의 價値觀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나는 20歲 때에 漢學(漢學)을 崇尙하고 山林學(山林學)에 從事했으나 존度崇儒(尊道崇儒)의 風이 退色하고 外國과의 交通이 擴張되어 西洋과의 交際가 切實하여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龜尾(歐美)로 갔다. 最初에는 朝鮮人이 目的으로 하는 文科에 合格했다. 當時 美國과의 交際가 漸次 緊要한 까닭에 新設된 育英公院에 入學했고 美國으로 건너갔다.

甲午更張 後 乙未年에는 俄館播遷 事件으로 弩幢(露黨·親러派)의 呼稱을 얻었고, 그 後 러일전쟁이 끝날 때 轉換하여 現在의 一波(日派·親日派) 稱號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適當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遷都(天道)에 春夏秋冬이 있으니 이를 邊域(變易)이라 한다. 人事(人事)에 東西南北이 있으니 이것 亦是 變易이라 한다. 遷都, 人事가 때에 따라 變易하지 않으면 實利를 잃고 끝내 成就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매천야록 (梅泉野錄)에는 그가 李在明(李在明) 醫師(義士)의 칼을 맞고 入院中, 自身을 看護하던 맏며느리 임乾球와 姦通을 하여 長男 이승구가 自殺하였고, 며느리는 李完用이 妾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悖倫的 性醜聞 [36] 마저 記錄돼 있다.

그런데 親日派 問題를 硏究해온 윤덕한 民族問題硏究所 硏究院에 따르면, 李完用이 며느리 와 不倫을 저질러 아들이 自殺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事實이다. 윤덕한 硏究院에 따르면, 이승구는 乙巳條約이 締結되기 以前인 1905年 陰曆 7月, 自殺이 아니라 病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死亡 當時 26歲였다.

며느리와의 不倫泄道 잘못된 事實이다. 
親日派
利子 
賣國
老人 李完用을 排斥한 
民衆
들의 感情이 담긴 이야기일 뿐, 
異性
을 멀리하고 
書藝
讀書
를 하는 사람이었다.

李完用의 孫子이자, 子息없이 죽은 큰아들(이승구)을 代身하여 長孫으로 入寂한 自認 이병길度 親日派였다.이완용이 죽은 뒤, 一齊 侯爵 爵位와 全財産을 相續 받은 甁길은 朝鮮貴族回 理事와 조선임전보국단 理事, 國民總力朝鮮聯盟 慘事 等을 지내며 日帝에 積極 協力했다. [37]

넷째, 아래의 이른바 '肯定的 評價'의 裏面엔 果然 무엇을 위한 妥協이었나라는 根本的 疑問이 存在한다. 나라가 없이 王室이 무슨 所用이며 大多數 兩班들 亦是 一般 國民과 마찬가지로 苟且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고, 더욱이 日帝에 착취당하며 곧 强制徵用 및 日本軍慰安婦 等으로 虐待當하게 될 百姓들의 삶은 애當初 親日派들의 考慮對象이 아니었다.

이러한 理由들로 인해 李完用은 現在까지도 韓國人 사이에서 賣國奴의 代名詞로 알려져있으며, 그 이름은 中國에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肯定的 評價 [ 編輯 ]

一旦, 그는 朝鮮의 門을 닫은 張本人이고 日本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같은 親日派 박중양 (朴重陽)은 1945年 解放以後 李完用을 '歷史의 犧牲者'라며 辯護 [38] :15 한데 이어, 하물며 官職을 辭退하고 逃避하는 것은 無責任한 者의 行動 [38] :15 일 뿐이다.'라며 李完用이 모든 惡役을 自處했다고 辯護했다. 그는 '누구라도 李完用과 同一한 境遇의 處地가 된다면 이완용 以上의 善處할 道理가 없었을 것이다.'라며 李完用 等은 單純히 賣國奴가 아니라고 主張했다. 이는 乙巳條約 때나 庚戌國恥 以後 官職을 내놓았던 一部 良心 人士들, 또한 그들을 尊敬하던 사람들과 엄청난 論爭거리가 되었다.

特히 俄館播遷 以後 러시아의 各種 利權 要求를 막아낸 李完用을 서재필 獨立新聞 1897年 11月 11日 者 論說을 통해 "李完用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外國에 利權을 넘겨주는 것에 反對했다"면서 "大韓의 몇 째 아니 가는 宰相"으로 極讚하고 있다 [11] . 李完用과 同時에 過去에 及第했던 徐載弼은 甲申政變의 主動者로 婦人과 젖먹이 아들까지 죽임을 當하고 美國 으로 도망가 갖은 苦生을 다했었고 [* 14] , 當然히 守舊派 의 座長格인 李完用에게 感情이 좋지 않았을 터였음에도 稱讚한 것이다. 勿論 李完用이 以後, 西歐式 參政權을 主張하는 開化派 系列 獨立協會員들을 攻擊하고 이내 協會內 모든 幹部職에서 自進 辭退하자 둘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守舊派들을 帶同하여 親日 開化派들과 짬짜미해 임금과 百姓을 속이고 日本에 나라를 팔자 서재필 은 더 큰 憎惡와 蔑視를 보내게 된다.

大衆文化에서 이완용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흥선大院君
(興宣大院君)
( 雲峴宮 家計도 )
이호준
(李鎬俊)
조병익
(趙秉翼)
李氏(李氏) 이윤용
(李允用)
이완용
(李完用)
이호준 아들로 入籍
조氏(趙氏) 조민희
(趙民熙)
이명구
(李明九)
이승구
(李升九)
임걸귀 이항구
(李恒九)
김진구
(金鎭九)
조重修
(趙重壽)
이병태
(李丙台)
이병길
(李丙吉)
이승구 아들로 入籍
이병희
(李丙喜)
이병주
(李丙周)
{{{BCH}}} 이병오
(李丙吾)


  • 9代祖 : 이유경(李有敬) - 生父 이할(李?)은 縣監(縣監)을 지냈고, 扈聖功臣(扈聖功臣)으로 左贊成(左贊成)에 贈職
    • 8代祖 : 이흡(李?, ?~1637) - 殉節(殉節), 生父 이유겸(李有謙, 1586∼1663)은 戶曹參議(戶曹參議)
    • 8大棗모 : 동복吳氏(同福吳氏, ?~1637) - 오백령(吳百齡, 1560~1633)의 딸. 1594年 門과. 吏曹參判 歷任
      • 7代祖 : 이만성 (李晩成, 1659~1722) - 1682年 眞사, 1696年 門과, 吏曹判書, 生父 이숙(李?, 1626~1688)은 1648年 眞사, 1655年 文科 後 右議政. 諡號는 충헌(忠獻)
      • 7大棗모 : 安東金氏(安東金氏[新], 1659~1703) - 領議政 金洙興 (金壽興, 1626~1690)의 딸. 김상헌 (金尙憲, 1570~1652)의 曾孫女
        • 6代祖 : 이구(李絿, 1688~?) - 1717年 生員, 縣監(縣監), 工曹正郞(工曹正?)
        • 6大棗모 : 東來鄭氏(東萊鄭氏) - 黃海道觀察使(黃海道觀察使) 정시선(鄭是先, 1650~1717)의 딸
          • 5代祖 : 이명빈(李命彬) - 生父는 이렴(李濂)
            • 高祖父 : 이罍(李?, 1733~1756) - 名陵參奉(明陵參奉), 吏曹參判(吏曹參判)을 贈職. 生父 이제원(李濟遠, 1709~1752)은 1736年 文科, 大司諫이고, 生祖父는 陶庵(陶庵) 理財 (李縡, 1680~1746)
            • 高祖母 : 해평尹氏(海平尹氏, 1732~1809) - 弘文館敎理(弘文館校理) 윤득경(尹得敬, 1702~1742)의 딸. 1726年 眞사, 1736年 文科
              • 曾祖父 : 이광유(李光裕, 1761~1800) - 1783年 生員, 吏曹判書(吏曹判書)를 贈職. 生父는 이숭(李崧)
              • 曾祖母 : 安東金氏(安東金氏) - 郡守 金異人(金履仁)의 딸. 吏曹判書 김희순 (金羲淳, 1757~1821)의 아버지
                • 祖父 : 移植(李埴, 1777~?) - 府使(府使), 左贊成(左贊成)을 贈職
                • 조某 : 昌原皇氏(昌原黃氏) - 黃人도(黃仁燾, 1740~?)의 딸. 1780年 生員, 三等 縣令(三登縣令)
                  • 養父 : 이호준(李鎬俊, 1821∼1901) - 1864年 文科, 判中樞府事. 諡號는 衝益(忠翼). 生父는 理解(李垓).
                  • 養母 : 여흥閔氏(驪興閔氏) - 增 左贊成 민용현(閔龍顯, 1786~?)의 딸. 여양府院君(驪陽府院君) 민유중 (閔維重)의 4代孫.
                    • 否認 : 洋酒조氏(楊州趙氏) - 조병익(趙秉翼)의 딸. 조민희 (趙民熙, 1859 ~ 1931)의 父親, 吏曹判書 조재순(趙在淳, 1807~?)의 아들이고, 조병세 (趙秉世, 1827~1905)의 四寸(四寸).
                      • 長男 : 이승구 (李升九)
                      • 큰며느리 : 임建具(任乾九, ?~?) - 풍천林氏(豊川任氏) 임대준(任大準, 1857~?)의 딸. 1882年 文科, 寧邊 府使(寧邊府使)를 지냄. 정미七赤(丁未七賊) 임선준 (任善準, 1860~1919)의 親兄
                        • 孫子(量子) : 이병길 (李丙吉, 1905~1950) - 東京 天壇美術學校(東京川端美術學校) 卒業. 日本 宮內性(宮內省) 式副職(式部職) 歷任. 中樞院 參議. 男爵 爵位를 承繼. 親日反民族行爲者. 生父 이항구 (李恒九).
                        • 長孫部 : 이병전(李丙田) - 全州李氏(全州李氏) 李仁榮(李仁榮)의 長女
                          • 曾孫子 : 이윤형(李允衡) - 대한사격연맹 事務局長
                      • 次男 : 이항구 (李恒九, 1881~1945) - 官職은 李王職 次官에 이르렀으며, 男爵 爵位를 받음
                      • 작은며느리 : 김진구(金鎭九, ?~1933) - 安東金氏(安東金氏) 김문규(金文圭)의 딸
                        • 孫子 : 이병길 (李丙吉, 出系)
                        • 孫子 : 이병희(李丙喜, 出系)
                        • 孫子 : 이병주 (李丙周, 1913~?) - 東京 學習園高等科(東京學習院高等科) 卒業. 男爵 爵位를 承繼. 1962年 日本으로 密航 後 日本에 歸化하여 日本國籍 取得.
                          • 曾孫子 : 李錫炯
                        • 孫子 : 李秉喆(李丙喆) - 東京 學習園中等과(東京學習院中等科) 卒業, 三星 創業主 李秉喆 (李秉喆, 1910~1987)과 다른 사람.
                        • 孫女 : 이병오(李丙吾) - 東京女子實踐學校(東京女子實踐學校)
                      • 長女 : 일찍 死亡
                    • 兩家 兄(庶子) : 이윤용 (李允用, 1854∼1939) - 刑曹判書. 親日反民族行爲者. 男爵 爵位를 받음.
                    • 兩家 兄 兄嫂 : 全州李氏(全州李氏) - 흥선大院君 (興宣大院君)의 庶女(庶女).
                    • 兩家 兄 兄嫂 : 金氏(金氏) - 김기태(金箕台)의 딸
                      • 조카 : 이명구(李明九)
                        • 宗孫(從孫) : 이병태(李丙台)
                        • 宗孫(從孫) : 李炳玉 (李丙玉, 1913~1989) - 男爵 爵位를 承繼. 親日反民族行爲者.
              • 生曾祖父 : 이광엽(李光燁)
                • 生祖父 : 耳竅(李圭)
                  • 生父 : 이호석(李鎬奭) - 兒名(兒名)은 이석준(李奭俊). 監役(監役). 生父는 痢疾(李?)
                  • 生母 : 신氏(辛氏, ?~1893)
                    • 本生家 兄 : 이면용(李冕用, 1843~?) - 1885年 眞사. 정릉 영(靖陵令)
                      • 本生家 조카 : 이학구(李鶴九, 1862~?) - 1891年 眞사. 健元陵(健元陵)·顯陵(顯陵)·穆陵(穆陵)·徽陵(徽陵)·崇陵(崇陵)·惠陵(惠陵)·원릉(元陵)·首陵(綏陵)·景陵(景陵) 參奉(參奉)
                      • 本生家 조카 : 이인구(李麟九, 1867~?) - 1894年 眞사. 孔陵(恭陵)·巡陵(順陵)·영릉(永陵) 參奉

各州 [ 編輯 ]

內容主 [ 編輯 ]

  1. 甲科나 乙과 及第者는 普通 6, 7品, 兵科及第者는 8품이나 9品으로 任命되는 것이 常禮였다. 甲科 及第者는 昇進이 빠르고 各種 請要職(淸要職)을 거치며 高官大爵(高官大爵)李 될 수 있었다.
  2. 實例로 李完用과 科擧 及第 動機인 서재필 은 李完用보다 過去 成跡도 더 높았고 最年少 合格者였음에도 집안이 받쳐주질 못해 約 3個月餘를 임관도 못한채 待機 狀態에 있어야 했다.
  3. 海防營(海防營): 解放兒門(海防衙門)이라고도 한다. 1884年(高宗 21)에 設置하여 京畿·黃海·忠淸 3道의 水軍(水軍)을 統轄하였다. 1888年 親軍營(親軍營)에 딸린 우영(右營)·後榮(後營)과 合하여 統衛營(統衛營)으로 改編되었다.
  4. 壬午軍亂 以後 傳統的 儒敎 體系만을 固執하던 大院君派(或은 斥和派)들이 쫓겨나고, 朝廷에는 急進的이든 漸進的이든 西洋 文物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方向이 定해졌었다. 現在 우리가 守舊派라 부르는 이들, 卽 明成皇后를 爲始한 閔氏 政權이 淸나라式 改革 을 主張했으며, 金玉均, 朴泳孝 等은 日本式 改革 을 主張하여 甲申政變을 일으켰다. 高宗 은 淸나라式 改革에 손을 들어줬고, 이에 이호준과 그의 後繼者 이완용 및 調整 大臣들은 以後 守舊派로서 王政 守護 및 儒敎的 秩序를 擔保한 西洋 文物의 導入이라는 目標를 두고 行動하게 된다.
  5. 普德(輔德): 世子의 스승으로서 普通 世子가 寶位에 오를 境遇 새로운 王의 곁에서 다음 政權을 함께 책임지는 자리였다. 元來 種3品 이었는데 正祖 8年에 情3品 堂上官으로 格上되었다.
  6. <<靈藥三段(?約三端)>> ① 朝鮮 工事는 駐在國에 到着하면 먼저 淸國公社를 찾아와 그의 案內로 駐在國 外務省에 간다. ② 會議나 宴會席上에서 朝鮮 工事는 淸國公社의 밑에 자리한다. ③ 朝鮮 工事는 重大 事件이 있을 때 반드시 淸國 公使와 미리 協議한다.
  7. 10年前 甲申政變 當時 朝鮮에는 위안스카이 를 비롯 靑軍 數千 名이 駐屯했었다. 甲申政變이 失敗하면서 日本軍과 開化派들은 高宗을 拉致해 데려가려 했는데 위안스카이의 淸軍이 戰鬪에 勝利하면서 以後 朝鮮의 霸權은 淸나라가 쥐게 됐었다. 이듬해 [톈진 條約]으로 淸日 兩國은 朝鮮 半島에서 軍을 撤收시켰고 그사이 은 新式軍隊人 [北洋群]과 [北洋 艦隊]를 組織하는 한便 [위안스카이]를 朝鮮에 派遣하고 軍隊를 國境 近處에 繼續 駐屯시켜 왔다.
  8. 西歐式 參政權을 主張하는 等 急進性을 띄기 始作한 獨立協會를 牽制하기 위해 設立된 皇室 御用團體人 皇國協會 가 設立된 것은 그가 地方職으로 좌천당한 뒤로 李完用이 皇國協會와 關聯된 記錄이나 情況은 없다.
  9. 日帝 强占期에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를 歷任했던 이승구(李承九) 와는 다른 人物이다. 李完用의 長男 이승구는 自殺로 夭折했다. 一說에는 婦人을 親아버지에게 뺏기고 分社(憤死)했다고 하기도 한다. 이완용 不倫 때문에 아들이 自殺? 미디어오늘 2006年 9月 1日子
  10. 議員面本館(意願免本官): 스스로 願하여 官職을 그만두는 일
  11. 金陵위(錦綾尉): 朴泳孝는 같은 반남 朴氏 一族이자 스승이었던 박규수 의 薦擧로 哲宗 의 딸 영혜翁主 의 男便이 되었다. 이때 사위로서 받은 이름이 金陵위다. 情1품으로 品階는 上輔國崇祿大夫(上輔國崇祿大夫)여서 高宗의 親兄 이재면 의 種2品 보다 높았다. 領議政 品階인 大匡輔國崇祿大夫와 같다.
  12. 여기서 '떠오르는 해'는 日本을 뜻한다.
  13. 未離海底千山黑, 及到天中萬國明 句節에서 元來 宋나라 太祖 趙匡胤(趙匡胤)李 읆었던 詩句의 첫具끝은 이처럼 어두울 '暗'李 아닌, 劍을 '黑'字였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느낀 感想을 적은 詩였는데, 李完用은 이를 日本에 阿附하는 句節로 바꿔썼다.
  14. 徐載弼은 科擧及第動機 李完用이 駐美公舍로서 美國에서 엘리트 外交官으로 잘나가던 當時, 같은 美國땅에서 갖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非衛生的인 環境에서 굶주림과 皮膚病에 시달렸고, 그의 거지꼴을 불쌍하게 생각한 美國人 篤志家들의 도움으로 겨우 美國 高等學校를 다니고 있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人種差別을 當하면서도, 逆賊으로 몰려 飮毒自殺한 妻와 굶어죽은 젖먹이 子息, 그리고 刑場의 이슬로 사라진 父母, 동생들을 떠올리며 悽絶하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參照週 [ 編輯 ]

  1. 事後 族譜에서 除去되었다.
  2. 23歲 龍(用) 行列. 本來 參判公派(參判公派)였으나 監察公派(監察公派) 집안으로 養子를 갔다. 2002年版 우봉이氏世譜 中에 人權(仁卷, 1卷) 821(八二一)쪽에 이름이 있다.
  3. 朝鮮日報 : 板橋 이완용 生家터 處理 苦心 --2005年 8月 4日 社會面 記事 Archived 2013年 7月 5日 - 웨이백 머신 "한국토지공사 土地博物館이 2001年 城南市 依賴를 받아 作成한 '성남시의 歷史와 文化遺跡' 報告書 가운데 '李完用 生家'篇에는 1쪽 分量의 이완용 紹介글 속에 '現在의 生家는 柏峴洞 아랫말 뒷가게인 李某氏의 집으로, 옛 집은 헐리고 새로 지은 것'이라고 적혀있다. 성남시는 原住民 口證을 土臺로 “李完用 生家는 柏峴洞 226의 1(自然綠地)로, 韓國戰爭 때 消失된 뒤 다른 사람이 新築했으며 最近까지 기와지붕의 허름한 住宅에 李某氏가 살다가 補償을 받고 移徙했다”고 밝혔다.
  4. 韓國歷代人物 綜合情報시스템 이면용 便 Archived 2013年 12月 26日 - 웨이백 머신 李完用의 親兄 이면용(李冕用)은 1885年 乙幼年 式年試 進士科에 合格했는데, 그의 出身地가 京畿道 廣州郡(廣州)으로 記載돼있음이 確認되므로 李完用의 故鄕은 現在 판교가 맞으며 두계 이병도 의 益山說은 分明한 거짓임을 밝혀둔다.
  5. 윤덕한, 《李完用 評傳》 (中心, 2005)
  6. 『崇情祈願後5乙酉式年司馬榜目(崇禎紀元後五乙酉式年司馬榜目)』(藏書閣[B13LB 5])
  7. 男便을 따라 美國에 간 最初의 女性들 (副題:美國 新聞에 실린 李完用의 否認) -1981年 12月 23日 京鄕新聞 9面 記事
  8. 1893年 東學敎徒와 大院君의 擧兵 企圖 The Coup Attempt of Taewongun and the Tonghak Followers - 韓國史學步 第12號 (2002. 3) pp.97-133 1229-6252 KCI
  9. 反民族問題硏究所,《親日派99人》1卷 (돌베게, 1993年) 49~50쪽( 강만길 執筆 部分)
  10. 《韓國의 皇帝》, 이민원 엮음, 대원사, 2002年 初版 刊行, p24 ISBN   978-89-369-0243-8
  11. 99年 前 賣國奴 李完用의 榮辱 -2009年 8月 29日 조선일보 記事
  12. 皇城新聞 1901年 2月 25日子 宮廷祿仕(宮廷錄事) 지면 記事 拔萃 Archived 2016年 3月 7日 - 웨이백 머신 : 宮內府特進官 李完用自引疏 批旨省疏具悉往事何必爲引卿其勿辭行公 部分
  13. 서울 설렁湯 列傳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 週刊東亞 2013年 12月 4째 週 記事, 글:푸드칼럼니스트 박정배
  14. '워싱턴 駐美 大寒帝國公使館 잃어버린 2年 10個月 찾았다!' Archived 2013年 10月 2日 - 웨이백 머신 -미디어붓다 2013年 4月 25日 記事 이학종 記者
  15. 日, 乙巳條約 前부터 大韓帝國 海外公館 閉鎖計劃 -2012年 8月 28日 世界日報 신동주 記者
  16. 康俊晩 (2007年 11月 19日). 〈第5張 萬民共同會의 挑戰〉. 《韓國 近代史 散策 3 (開化期便, 俄館播遷에서 하와이 移民까지)》. 서울: 人物과사상. ISBN   978-89-5906-073-3 .  
  17. 네이버 캐스트 人物 韓國史 <肅宗 還國 政治의 明과 暗> 2012年 2月 20日 揭載
  18. 순종실록 2卷, 純宗 1年(1908 무신 / 大韓 隆熙(隆熙) 2年) 4月 30日(陽曆) 3番째記事 "죽은 左議政 한효순 外 77名의 官爵을 회복시켜 줄 것에 關하여 報告하다"
  19. 反民族問題硏究所 (1993年 2月 1日). 〈박영효 :親日 巨頭가 된 開化派 領袖 (윤해동)〉. 《親日派 99人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20. 國史編纂委員會, 《高宗時代社 6》 (國史編纂委員會, 1969)
  21.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22. 임종국 (1991年 2月 1日). 《實錄 親日派》.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서울: 돌베개. 83쪽쪽. ISBN   89-7199-036-8 .  
  23. 스토리가 있는 大邱 都心 (22)北聖路 ③돈과 쌀이 모이는 곳 副題:日本의 쌀 收奪·輸入品 物流基地 役割을 했던 米穀 倉庫들 -2009年 12月 10日 大邱每日新聞 記事
  24. 김삼웅 (1995年 7月 1日). 《親日政治 100年史》. 서울: 東風. 55쪽. ISBN   978-89-86072-03-7 .  
  25. “나카노文庫(中野文庫) '大?位菊花大綬章' 一般受賞者 名單, 대정時代(大正時代) 26番째 줄, 이완용 受賞目錄 確認” . 2013年 9月 1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6月 6日에 確認함 .  
  26. <이완용, 疊疊山中 땅 왜 掠奪했나> 聯合뉴스 2004年 8月 13日子 記事
  27. 震檀學會 編, <實證史學과 民族史學> - 두계先生과 정홍준氏의 對談,《歷史家의 遺香》pp.273~276, 일조각, 1991
  28. 성강현 (2004年 3月 18日). “‘朝鮮功勞者명감’親日 朝鮮人 3百53名 記錄 - 現役 國會議員 2002年 發表한 親日名單 日치 相當數” . 日曜示唆. 2008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3月 6日에 確認함 .  
  29. 성강현 (2004年 3月 18日). “3百53名 中 2百56名 名單” . 日曜示唆. 2008年 6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3月 6日에 確認함 .  
  30. 허성호, 99年 前 賣國奴 李完用의 榮辱 朝鮮日報
  31. 이민정 (2007年 5月 2日). “財産 還收되는 親日派 9人은 누구? - 권중현·李完用 等 乙巳五賊 中 一部 包含” . 오마이뉴스 . 2008年 4月 13日에 確認함 .  
  32. {끝나지 않은 親日 論難} 親日派'더러운 땅' 되찾는다 -2005年 1月 27日 週間韓國 棋士
  33. 李完用 송병준 所有土地 中 解放後 國家歸屬 0.3%에 그쳐 -2010年 7月 1日 世界日報 記事
  34. "서울大병원, 賣國奴 李完用 手術記錄 發見" --2008年 12月 18日 조선일보 記事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5. "韓國 첫 胸部外科記錄 發見…患者는 이완용" -2008年 12月 18日 조선닷컴 記事
  36. "李完用 不倫 때문에 아들이 自殺?" --미디어오늘 2006年 9月 1日子 記事
  37. 미디어오늘 (2006年 9月 1日). “이완용 不倫 때문에 아들이 自殺?” . 《미디어오늘》 . 2018年 7月 19日에 確認함 .  
  38. 民族問題硏究所, 《民族問題硏究 9卷》(民族問題硏究所, 1996)

關聯 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6年 12月). 〈이완용 (李完用)〉 (PDF) . 《2006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99~144쪽. ISBN 11-1560010-0000002-10. 2007年 9月 26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6月 18日에 確認함 .  
  • 反民族問題硏究所 (1993年 2月 1日). 〈이완용 : ‘韓日 倂合’의 主役이었던 賣國奴의 代名詞 (강만길)〉. 《親日派 99人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 윤덕한 (1999年 7月 26日). 〈이완용 : 한 때의 愛國者 萬古의 賣國奴〉. 《이완용 評傳》. 서울: 圖書出版 中心. ISBN   89-950404-1-6 .  

參考 文獻 [ 編輯 ]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순종실록附錄
  • 高宗時代社
  • 承政院日記
  • 日省錄
  • 尹致昊日記
  • 매천야록 (黃玹)
  • 조선통사 (朴殷植)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