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秉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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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秉喆
李秉喆
出生 1910年 2月 12日 ( 1910-02-12 )
慶尙南道 宜寧郡 정곡면
중교리 腸內마을
死亡 1987年 11月 19日 ( 1987-11-19 ) (77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龍山區 梨泰院洞
性別 男性
本館 慶州
別稱 號(號) 湖巖(湖巖)
學歷 와세다大學校 政治經濟學 [1] [2]
經歷 三星그룹 創業主
韓日經濟協會 顧問
正當 親日系列 [3]
父母 아버지: 이찬우, 어머니: 권재림
兄弟 이병각, 이명점, 이병윤
配偶者 박두을 (遠配), 구로다(再娶)
子女 4男 6女
賞勳 金塔産業勳章
美國 世界最高 經營人
國民勳章 無窮花章
日本 勳一等서보장
웹사이트 三星財團

李秉喆 (李秉喆, 1910年 2月 12日 ~ 1987年 11月 19日 )은 三星그룹 CJ그룹 , 扞率그룹 , 中央日報 를 創業한 大韓民國 企業人 이다.

1938年에 三星上廻 를 세웠으며 以後 貿易業에도 從事하였다. 1951年에는 三星物産 을, 1953年에는 第一製糖 제일모직 을 設立했고, 輸出을 통해 製造業을 擴張하여 三星重工業 , 三星物産 , 삼성석유화학 三星그룹 의 基盤을 닦았다.

1964年 5月에 TBC 를, 다음해 9月 中央日報 를 創設하여 放送과 言論에도 進出하였다. 그러나 中央日報는 査頓인 홍진기 一家에게 넘겼다. 그 뒤 企業 活動에 專念하여 1969年 三星電子 三星電機 를 設立하여 電子製品의 輸出에 成功을 거두었다.

李秉喆의 競爭者 [ 編輯 ]

鄭周永 · 辛格浩 · 金宇中 · 具仁會 (4트리오) [ 編輯 ]

鄭周永 은 5살 年下로 活動 時期가 비슷하기도 하고 三星과 함께 韓國 財界의 兩大山脈을 이루는 現代그룹 의 首長으로서, 半導體, 重工業, 流通業(百貨店), 建設業 等地의 分野에서 팽팽한 競爭을 벌여왔다. 그 外 辛格浩 , 金宇中 , 具仁會 도 競爭者였다. 以後 三星 이병철과 LG 九人會 創業株價 決定的으로 怨讐 關係가 되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1910年 2月 12日에 慶尙南道 宜寧 에서 이찬우 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男 2女 中 막내로 태어났다. 本貫은 慶州로 16代祖 界番(桂蕃)李 입향조로써 慶南 宜寧에 定着하여 居住地로 삼으면서 宜寧, 晋州 에 居住한 집안이라고 主張한다. [4] 李秉喆은 慶州李氏 宗親會 總裁를 오랜 期間 맡기도 했다.

어려서 할아버지 이홍석 勳章이 세운 書堂인 門算定(文山亭)에서 千字文, 四書三經, 論語(論語) 等을 배웠다고 主張한다. 李秉喆의 할아버지 이홍석(號는 문산, 1838~1897)은 星湖學派로 性理學과 實事求是 學風을 追求한 士大夫였으며 書藝와 詩文에 能했다. 아버지 이찬우(1874~1957)는 獨立協會와 基督敎靑年會에 關與한 人物로 李承晩과 因緣을 얻기도 했다. 李秉喆은 兄과 함께 이곳 門山堂에 가서 家門의 學問을 배우기 始作하였으나 才能은 생각보다 없었던 模樣으로 湖巖自轉에 依하면 進度는 늦었지만 꾸준하고 誠實히 工夫했다고 한다. 意外로 스스로 가장 많은 感動을 받고 必要로 한 冊은 論語라 主張하였다. 1919年 3月 漢學 數學을 認定받아 進駐軍 지수면 에 있는 指數公立普通學校 3學年에 編入했다.

1920年 11살에 指數公立普通學校 4學年 當時 어머니의 親庭이 있는 京城 輸送公立普通學校 로 轉學을 갔다. 學校를 다니는 동안 甚한 慶尙道 사투리 때문에 京城 地域 學生들과 意思疏通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學校 生活에 適應, 中東中學校 에 進學한 後에는 學習進度가 올라 優秀한 成跡을 거두게 된다. 以後 1926年에 박팽년 의 後孫인 박기동의 4女 박두을 과 故鄕에서 結婚하였다. 自敍傳인 《湖巖自轉》에서는 1929年에 結婚하였다고 밝혔으나 實際로는 1926年에 結婚하였다.

結婚式을 마치고 上京하여 다시 學校에 다니며 學業에 熱中하다 4學年 1學期 무렵 日本 留學을 決心한다. 李秉喆은 父母한테서 自身의 日本 留學에 對해 反對받았으나 옆 洞네에 살던 효성그룹 의 創業主인 趙洪濟 를 찾아가 事情했다. 日本 留學 警備 500원을 빌려달라고 付託하면서 趙洪濟 가 欣快히 受諾, 趙洪濟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日本 에 留學하였다.

靑年期 [ 編輯 ]

中東中學校 를 卒業한 後 1929年에 와세다大學校 政治經濟學科에 入學했다. 留學 初期 한동안 冊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工場을 訪問해서 日本 工業의 實相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大學 時節부터 李秉喆은 企業人 의 꿈을 꾸게 되었고 留學 時節 故鄕에서 每달 生活費로 200원을 送金해왔는데 이때 當時 日本 中産層 家庭의 한달 生活費가 50원이었던 것과 比較하면 豐足한 便이었다.

大學 時節 李秉喆은 工夫에 熱中하고 스스로 充實하게 生活했으나, 1學年 때 健康 惡化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冊을 읽어도 쉽게 疲勞해지는 症狀이 생겨 休學屆를 내고 溫泉을 찾아다니며 病을 治療하려 했으나 所用이 없었다. 後日 回顧에서 그는 "工夫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但只 도쿄 의 新學問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留學生活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懷疑가 들었다."며 1931年에 自退하고 歸國하였다.

故鄕으로 돌아와 療養하면서 李秉喆의 健康은 回復되었다. 故鄕에서 特別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李秉喆은 親舊들과 노름판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李秉喆 스스로 回顧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平素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3名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瞬間 李秉喆은 惡夢에서 깨어난 듯한 衝擊을 받았다.

後날 回顧에 依하면 그는 "그야말로 虛送歲月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悔恨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自身에게 맞는 事業을 構想하기 始作했다. 事業을 하겠다고 決心을 굳힌 그는 며칠 後 아버지에게 自身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別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事業資金을 내주었다.

마침 너의 몫으로 硏修 300席의 財産을 나누어 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納得이 가는 일이라면 決斷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그는 장사를 할 곳으로 京城 부터 釜山 , 大邱 等地를 直接 物色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故鄕 隣近의 포근 港口 馬山 이 떠올랐다. 을 생각한 그는 馬山 은 朝鮮 各地에서 生産한 쌀을 蒐集하여 道政해서 日本으로 보내는 搗精工場이 있는 것을 알아냈고, 搗精工場은 數 百 가마니씩 道程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는 親舊 2名과 힘을 합쳐서 同業으로 精米所를 차렸다.

企業 活動 [ 編輯 ]

事業家로서의 始作 [ 編輯 ]

그 뒤 1938年 3月 29歲에 30,000원(父母에게 물려받은 財産-한달月給 約15원꼴(166年 일해야되는 돈)의 資本金으로 大邱 手動 에서 〈三星上廻〉라는 看板을 내걸고 事業을 始作하였다. 1941年 株式會社로 改編하고 靑果類와 魚物 等을 生産者로부터 供給받아 都賣, 小賣業과 輸出 等도 하면서 中國 에도 輸出하기 始作하였다. 1942年 朝鮮兩朝를 引受하여 함께 運營하던 中 光復 後 1947年 京城 으로 上京하여 다음 해 三星物産工事 를 創設하고 貿易業에도 參與하였다.

1950年 初 日本工業視察團원의 한사람으로 選定되어 出國, 日本 內 製造業, 手工業 等 日本 의 工業界와 前後 工業施設 復舊 現場을 直接 視察하고 歸國했으나 그해 6月 25日 서울 에서 韓國 戰爭 을 맞았다. 戰爭 直後 避難을 떠났다가 1951年 무렵 釜山 에서 다시 三星物産 을 세워 다시 貿易業에 本格 뛰어들면서 1953年에는 製造業에도 投資하였다.

製造業과 企業 活動 [ 編輯 ]

1953年에 第一製糖 , 1954年에 제일모직 을 設立, 製造業에서 크게 成功을 거두었다. 製造業에서 크게 成功을 거두면서 事業 領域을 擴張해나갔다.

동방生命 , 新世界百貨店 , 安國火災保險 , 全州製紙 等을 引受, 經營하였고, 성균관대학교 의 財團 理事로도 敎育事業에 投資하기도 했다. 以後 事業 領域을 크게 擴大해갔으며 中央開發, 高麗病院 等을 引受하여 運營하기도 했다. 1961年부터 1987年까지 韓國經濟人聯合會 의 會長을 歷任했다.

1964年初 韓國肥料를 引受 運營하였으며, 1964年 5月 東洋라디오, 텔레비전 東洋放送 을 設立하여 放送에도 進出했고, 그 해 대구대학 의 財團 理事長이 되었다. 1965年 9月 中央日報 를 創設하여 言論社에도 進出하였다. 그러나 中央日報 等은 査頓인 홍진기 에게 넘겼다. 東洋放送 은 1980年 言論統廢合이 될 때까지 運營하였다.

사카린 密輸 事件 前後 [ 編輯 ]

1964年 8月 13日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聯合會 韓國委員會 移徙에 委囑되고, 1964年 東洋라디오 및 텔레비전 放送과 1965年, 中央日報 를 創設하여 言論社 經營에 參與하였다.

1966年 5月 24日 三星에서 慶南 蔚山市 에 工場을 짓고 있던 韓國肥料가 사카린 2259 砲隊(藥 55t)를 建設資材로 꾸며 들여와 販賣하려다 들통이 났다. 이것이 누구의 指示에 依한 것인지는 確實하지 않다.

뒤늦게 이를 摘發한 釜山稅關은 같은해 6月 1059 包袋를 押收하고 罰金 2千餘萬 원을 賦課하였다. 三星은 韓國肥料 工場을 짓기 위해 日本 미쓰이 社로부터 政府 의 支給保證 아래 商業借款 4千餘萬달러까지 들여왔다. 사카린 密輸를 現場指揮했다고 밝힌 이맹희 가 1993年 發刊한 《回想錄 - 묻어둔 이야기》에서 韓國肥料 사카린 密輸事件은 朴正熙 大統領과 이병철 會長의 共謀 아래 政府機關들이 積極 감싸고 돈 엄청난 規模의 組織的인 密輸였다고 다음과 같이 告白하였다.

1965年 末에 始作된 韓國肥料 建設過程에서 日本 미쓰이는 工場建設에 必要한 次官 4200萬 달러를 機械類로 代身 供給하며 三星에 리베이트로 100萬 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事實을 朴 大統領에게 알렸고 朴 大統領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方向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現札 100萬달러를 日本 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三星은 工場 建設用 裝備를, 靑瓦臺는 政治資金이 必要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密輸를 하자는 쪽으로 合意했다. 密輸現場은 내가 指揮했으며 朴 政權은 隱密히 도와주기로 했다. 密輸를 하기로 決定하자 政府도 모르게 몇가지 欲心을 實行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平素 들여오기 힘든 工作機械나 建設用 機械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密輸한 主要 品目은 便器, 冷藏庫 , 에어컨 , 電話機 , 스테인레스 板과 사카린 原料 等이었다. [5]

生涯 後半 [ 編輯 ]

復歸와 企業 活動 [ 編輯 ]

그러나 1966年에 사카린 密輸 가 摘發되면서 物議를 빚게 된다. 1966年 11月 韓國肥料의 常務로 있던 次男 唱戱 서울矯導所 에 收監되었다. 그後 1968年 2月 李秉喆은 다시 經營에 復歸하였다. [6]

그 뒤 毛織會社가 成長하면서 1972年 7月 제일모직 慶山工場을 分離하면서 合成纖維를 製造하는 施設을 갖추어 제일합섬 을 設立했고, 1969年 三星電子 三星電機 를 設立하여 三星그룹 育成의 跳躍臺를 만들었다. 1974年 삼성석유화학 , 三星重工業 을 設立하여 重化學 工業에 進出하였고, 第3共和國 第4共和國 當時 輸出爲主 經濟 成長 政策에 맞추어 電子製品, 化學製品과 重工業 等의 大量 海外 輸出을 통해 莫大한 富를 創出하여 大企業으로 성장시키는 발板을 마련했다. 以後 삼성정밀 · 龍仁自然農園 等을 設立하였다. [7]

1975年 5月 特別히 제일합섬의 工場 시스템을 公開하기도 했다. 제일합섬은 1982年부터 새한그룹 을 차려 分家한 次男 唱戱 에게 徐徐히 넘겨주었다. 1977年 5月 삼성전자와 三星電機를 合倂하여 삼성전자로 單一化하고, 1984年 8月 相互를 三星電子 株式會社로 바꾸었다. 三星電子 는 그의 死後에도 三星그룹 成長의 基盤이 되었다.

末年과 死亡 [ 編輯 ]

1976年에 胃癌 判定을 받았으나 手術을 받고 健康을 回復하였고, 以後 삼성정밀 等을 設立하고 1982年 三星半導體通信을 設立하였다. 이 밖에도 文化財團·奬學會 等을 設立하였고, 百貨店·호텔 等의 經營에도 參加해서 事業의 多角化를 통하여 國家經濟 發展에도 크게 貢獻하였다. 1981年 2月 韓日經濟協會 顧問에 委囑되었고 이듬해 다시 再委囑되었다.

美術에 心醉했던 李秉喆은 많은 所藏品을 蒐集하거나 所藏해 오다가 호암미술관 을 建立하였고, 國樂 書藝 에도 큰 關心을 가졌다. 1977年 三星美術文化財團 理事長이 되었으며, 現代그룹 會長이었던 鄭周永 等과 함께 蔚山 工團 을 造成하는 데에도 一定部分 投資하거나 寄附를 하여 設立에 一翼을 擔當하기도 하였다. 이는 後에 蔚山工團 으로 크게 發展하였다.

1985年에 肺癌 判定을 받았고, 以後 金塔産業勳章을 비롯하여 世界最高經營引上을 받았다. 1987年 11月 初 李秉喆은 韓日經濟協會 顧問職을 辭退하고 같은 달 19日에 78歲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墓所는 現在 龍仁에버랜드 에 位置하고 있다. [8]

事後 [ 編輯 ]

1987年 國民勳章 無窮花章 이 特別 追敍되었다. 三星電子 는 3男 건희 에게 相續되었고 長女 인희 扞率그룹 을 創業하였으며 나머지 네 딸 中 막내인 新世界그룹 의 會長 名姬를 除外한 3名은 出家 後, 企業 經營에 關與하지 않았다. [9] 中央日報 는 査頓인 홍진기 系列에게 相續되었고, 第一製糖 等 제일제당그룹은 長男 맹희 에게 相續되었다. 次男 唱戱 새한그룹 을 創立하였다. 1995年 第2回 한국경영사학회 創業對象이 追敍되었다. 日本 으로부터 日暈一等서보장이 追敍되었고, [10] 1999年 12月에는 每日經濟 全經聯 이 主管한 20世紀 韓國을 빛낸 30大 企業人의 한사람으로도 選定되었다.

學歷 [ 編輯 ]

經歷 [ 編輯 ]

他經歷 [ 編輯 ]

三星 [ 編輯 ]

賞勳 [ 編輯 ]

  • 金塔産業勳章
  • 世界最高經營引上
  • 1987年 國民勳章 無窮花章 (追敍)
  • 1995年 第2回 한국경영사학회 創業大賞
  • 日本 日暈一等서보장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著書 [ 編輯 ]

  • 《우리가 잘사는 길》
  • 《湖巖自轉》

名稱 [ 編輯 ]

일화 [ 編輯 ]

肺癌 診斷 [ 編輯 ]

李秉喆은 1985年에 肺癌 診斷을 받았다. 診斷을 받은 直後 어느 日本人 저널리스트를 만나 李秉喆은 이런 말을 했다. '人間인 以上 生老病死를 避할 수는 없다. 不治病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차분히 떠난다는 건 아무래도 以上(理想)에 지나지 않는 것 같고, 적어도 살아서 아등바등하는 凶한 꼴만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11] '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姿勢에 對해 淡淡하게 答하였다.

名言 [ 編輯 ]

李秉喆 名言

  1. 내 생각을 말하기 前에 남의 말을 먼저 들으라.
  2. 말하는 걸 배우는 데는 2年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法을 익히는 데는 60年이 걸렸다.
  3. 힘들어도 웃어라. 最高 權力者도 웃는 사람을 좋아한다.
  4. 祈禱하고 行動하라. 祈禱와 行動은 앞바퀴와 뒷바퀴이다.
  5. 있을 때 謙遜해라. 그러나 없을 때에는 堂堂해라.
  6. 世上에 偶然은 없다. 한番 맺은 因緣을 所重히 하라.
  7. 남이 잘됨을 祝福하라. 그 祝福이 메아리처럼 나를 向해 돌아온다.
  8. 左翼은 惡이며 國益은 線이다. 左翼이 執權하면 賤한 딴따라들이 드글거리는 나라가 된다.
  9. 日本과 親해져야 富國强兵한다.

家族 關係 [ 編輯 ]

이름 出生 關係 死亡 活動事項 備考
이찬우 1879年 아버지 1957年
권재림 1881年 어머니 1959年
이병각 1906年 1971年
이병윤 1908年 누나 1991年
이명점 1899年 누나 1982年 첫째 누나, 配偶者 이계동(李啓東)
박두을 1907年 配偶者 2000年
이인희 1929年 長女 2019年 扞率그룹 拷問
조운해 1925年 사위 2019年 江北三星病院 理事長
조동혁 1950年 -外孫子 扞率그룹 名譽會長
이정남 -外孫婦
조동만 1953年 -外孫子 한솔아이글로브 會長
이미성 -外孫婦
조동길 1955年 -外孫子 扞率그룹 會長
안영주 -外孫婦
조옥형 -外孫女
권대규 -外孫婦 HS創業投資 副社長
조자형 -外孫女
빈센트 秋 -外孫婦 타이완系 美國人
이맹희 1931年 長男 2015年 CJ그룹 名譽會長
손복남 1933年 子婦 2022年 CJ그룹 拷問
李美卿 1958年 -孫女 CJ그룹 副會長
李在賢 1960年 -孫子 CJ그룹 會長
김희재 1963年 -孫婦
이경후 1985年 -曾孫女 CJ ENM 브랜드戰略擔當 常務
이선호 1987年 -曾孫子 CJ第一製糖 部長
이재환 1962年 -孫子 財産커뮤니케이션즈 代表
민재원 1967年 -孫婦
이소혜 1992年 -曾孫女
이호준 2000年 -曾孫子
이재휘 1964年 -孫子 婚外子
이창희 1933年 次男 1991年 새한그룹 會長
二嶺自 1936年 子婦 日本人
李在官 1963年 -孫子 2022年 새한그룹 副會長 東邦그룹 會長의 딸과 婚姻
金姬廷 -孫婦
이재찬 1964年 -孫子 2010年 새한미디어 社長 동아그룹 會長의 딸과 婚姻
최선희 -孫婦
이재원 1966年 -孫子 새한정보시스템 常務 서영주情 會長의 딸과 婚姻
김지연 -孫婦
이혜진 1967年 -孫女 라이프그룹 會長의 아들과 婚姻
조명희 -孫婦
이숙희 1935年 次女
구자학 1930年 사위 2022年 아워홈 會長
구본성 1957年 -外孫子 아워홈 副會長
구미연 -外孫女
구명진 -外孫女
구지은 -外孫女 아워홈 專務
이순희 1939年 3女 제일기획 拷問
김상용 -外孫子
이덕희 1940年 4女
이종기 1936年 사위 2006年 삼성화재海上保險 會長
李浟靜 -外孫女
李健熙 1942年 3男 2020年 三星電子 會長
홍라희 1945年 子婦 리움 館長
李在鎔 1968年 -孫子 三星電子 副會長 임세령과 離婚
李富眞 1970年 -孫女 호텔新羅 社長, 三星物産 上司部分 拷問
三星에버랜드 經營戰略擔當 社長
임우재와 離婚
이서현 1973年 -孫女 제일모직 , 제일기획 副社長
김재열 -孫壻 제일기획 스포츠事業總括 社長
이윤형 1979年 -孫女 2005年
李明姬 1943年 5女 新世界그룹 會長
정재은 1938年 사위 朝鮮호텔 名譽會長
鄭溶鎭 1968年 -外孫子 新世界그룹 副會長
한지희 -外孫婦 대한항공 한상범의 딸
鄭有慶 1972年 -外孫女 新世界그룹 副社長 문성욱과 結婚
문성욱 -外孫書 新世界I&C 副社長
구로다 配偶者
이태휘 1947年 4男 第一製糖 常務 日本 居住
이혜자 1952年 6女 日本 居住

關聯 書籍 [ 編輯 ]

  • 李秉喆, 《湖巖自轉》(중앙일보사, 1986)
  • 삼성그룹 祕書室, 《三星 50年史》(三星그룹 祕書室, 1989)
  • 김병하, 《財閥의 形成과 企業家活動》 (韓國能率協會, 1991)
  • 김병하, 〈湖巖 李秉喆의 生涯와 經營理念〉, 한국경영사학회, 《經營私學 3》 (한국경영사학회, 1988)
  • 황명수, 《韓國의 代表的 企業家 湖巖 李秉喆 硏究》 (韓國經常學會, 1988)
  • 황명수, 〈韓國企業經營의 歷史的 性格〉, 湖巖이병철의 企業活動(한국경영사학회, 1993)
  • 황명수, 《三星의 企業文化 硏究》 (황명수 編著, 신양사, 1993)
  • 홍하상, 《카리스마 VS 카리스마 李秉喆 VS 鄭周永》 (한국경제신문, 2001)
  • 김용철, 《三星을 생각한다》 (사회평론, 2010)
  • 야지마 긴지, 《李秉喆의 企業家 精神》 (李廷煥 驛, W미디어, 2010)
  • 선데이 저널, 1987年 9月 13日子, 196號
  • 이맹희, 《하고싶은 이야기》 (淸算, 1993)
  • 李明姬, 《묻어둔 이여기》 (淸算, 1993)
  • 차동엽,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質問》(명진출판社, 2012)

大衆 媒體 [ 編輯 ]

脚註 및 參考 文獻 [ 編輯 ]

  1. 慶州李氏대종보 權知 38 판專攻破片 前 122쪽 (慶州李氏中央花樹會 1987年 印刷), 日本와세다대학을 修了하고 經濟學博士
  2. 宜寧 三星 이병철 會長 生家, 完璧한 '富者의 터' 2017-12-27
  3. 三星의 親日 根據
  4. http://www.hoamfoundation.org/kor/hoam/hoam_history01.asp
  5. “(言論權力) 中央日報 '三星' 감싸기” . 한겨레 . 2001年 4月 2日. 2009年 12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8月 7日에 確認함 .  
  6. 指揮棒 다시 잡은 李秉喆, 三星電子 設立해 突破口 2010-03-28
  7. 三星에버랜드의 前身
  8. 財閥 ‘祖上墓 지키기’ 非常 스포츠傾向(2010.01.31) 記事 參照
  9. “汎三星家 家計도…고 이병철 會長의 아들과 딸, 面面 살펴보니 2012-02-28” . 2016年 4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3月 30日에 確認함 .  
  10. 激動 50年 MBC
  11. “李秉喆 會長 "信仰人은 때때로 狂人, 共産黨員과… " . 中央日報. 2011年 12月 17日 . 2020年 8月 30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招待
招待 三星그룹 會長
1938年 3月 ~ 1966年 9月 23日
後任
이맹희
前任
이맹희
第3代 三星그룹 會長
1968年 2月 14日 ~ 1987年 11月 19日
後任
李健熙
前任
招待
招待 三星그룹 名譽會長
1966年 8月 ~ 1968年 2月
後任
-
前任
招待
招待 第一製糖 ( CJ그룹 ) 會長
1955年 3月 ~ 1987年 11月
後任
이맹희
前任
招待
招待 中央미디어네트워크 會長
1965年 9月 ~ 1980年 7月
後任
홍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