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化門

光化門
光化門
光化門 正面
基本 情報
位置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辭職로 161
座標 北緯 37° 34′ 33.68″ 東經 126° 58′ 36.84″  /  北緯 37.5760222° 東京 126.9769000°  / 37.5760222; 126.9769000
狀態 使用 中
完工 1395年
1864年 (復元)
2010年 (復元)
破壞 1592年 ( 壬辰倭亂 )
1950年 ( 韓國 戰爭 )
撤去 1927年 (以前)
用度 景福宮 正門
Map

光化門 (光化門)은 서울特別市 鍾路區 의 朝鮮王朝 法宮人 景福宮 의 南쪽에 있는 正門으로, "임금의 큰 德(德)이 온 나라 를 비춘다"는 意味이다. [1] 1395年 에 세워졌으며, 2層 樓閣 構造로 되어 있다. 景福宮의 停電인 勤政殿 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門 3個 中에서 첫째로 마주하는 門이며, 둘째는 흥례문 , 셋째는 근정문 이다.

光化門 앞에는 只今은 道路 建設로 사라진 月臺 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兩쪽에는 한 雙의 해태 彫刻像이 자리잡고 있다. 光化門의 石築部에는 세 個의 虹霓門(虹霓門, 아치문)이 있다. 가운데 門은 賃金이 다니던 門이고, 나머지 左右의 門은 臣下들이 다니던 門이었는데, 왼쪽 門은 武臣이, 오른쪽 門은 文身이 出入했다. 光化門의 가운데 文 天障에는 朱雀 이 그려져 있고, 왼쪽 門에는 거북이가, 오른쪽 門에는 천마가 그려져 있다. [2]

1392年 太祖 時期에 景福宮과 함께 지어진 光化門은 朝鮮 의 主要 官廳이 密集한 六曹거리 의 基準點으로 자리잡았다. 1592年 宣祖 臺에 이르러 壬辰倭亂 으로 景福宮 全體의 消失과 함께 破壞되어 한동안 廢墟로 남아 있었다가, 1865年 흥선大院君 의 景福宮 重建으로 復元되었다.

日帝强占期 에는 1926年 完工된 朝鮮總督府 廳舍 造成 過程에서 總督府에 依해 撤去가 計劃되었으나, 各界의 反撥에 부딪혀 景福宮 東쪽 建春門 쪽으로 移轉하였다. 解放 後 韓國 戰爭 으로 木造 部分이 消失되어 石築만 남아 있었다가, 1968年 中央廳 앞 元來 자리에 鐵筋 콘크리트 로 再建하였다. 以後 2006年부터 木造 復元을 통한 高宗 臺 모습으로의 回歸를 위해 旣存 建物을 解體하였으며, 月臺와 해태 等을 除外한 一部 復元工事가 完了되어 2010年 8月 15日에 公開되었다. 2023年 10月 16日에는 門앞 月臺와 獬豸像, 그리고 懸板의 復元이 完了되었다.

光化門은 오늘날 서울 를 넘어 大韓民國 을 象徵하는 代表 建築物로 남아 있다. 光化門 앞의 六曹거리 는 日帝强占期와 解放 後 經濟成長을 거치며 世宗路 라는 最大 規模의 道路가 建設되어 重大한 交通路로 기능하였으며, 以後 光化門廣場 이 造成되어 서울 都心 속 代表 集會·休息 空間으로 자리잡았다.

歷史 [ 編輯 ]

朝鮮 初期 [ 編輯 ]

光化門은 1395年( 太祖 4年) 景福宮과 함께 지어졌다. 創建 後 정도전 은 南쪽에 있어 '오문'(午門)이라 불리던 門의 이름을 '正門'(正門)이라 하였다. 이는 中國에서 天子의 門을 '短文'(端門)이라 할 때 單(端)李 바르다(正)는 意味를 지녔다는 點에서 着眼한 것이다. [3] 朝鮮王朝實錄 에서는 南門(南門)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登場하여 南門이라는 이름도 使用된 것으로 본다. 以後 太宗 이 正門을 包含한 景福宮 의 軸을 中心으로 六曹거리 를 造成함으로써 朝鮮의 主要 官廳이 光化門을 中心으로 配列되었다. [4]

光化門이라는 이름은 1425年( 世宗 8年)에 처음 지어졌다. 太宗이 昌德宮 을 짓고 거기에 鯉魚醢 執務를 본 까닭에 景福宮은 頹落했고, 世宗은 太宗이 世上을 뜨자 景福宮으로 正宮을 옮겼는데 옮기며 여러 殿閣의 이름을 다시 지은 것이다. 이름은 集賢殿 學士들이 지어 올린 것으로, 이 때 禁川橋와 여러 門의 이름도 함께 지었다. [5] [6]

當時 光化門은 重層 門樓로 지어졌으며, 樓閣 안에는 鐘과 북을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려 時間을 알렸다. [7] 1474年( 成宗 5年)에는 근정문, 홍례문( 흥례문 ), 光化門에 靑기와를 덮으려 하였으나 儉素한 德이 아니라는 정괄 의 反對로 霧散되었다. [8]

謙齋 旌善 이 18世紀에 그린 景福宮도. 아래 光化門의 石築 4個가 남아있다.

太祖때 지은 光化門은 1592年( 宣祖 25年) 일어난 壬辰倭亂 으로 景福宮 全體가 消失될 때 함께 破壞되었다. 以後 광해군 이 正宮을 景福宮에서 昌德宮 으로 옮김에 따라 景福宮은 復元되지 않고 廢墟로 남아있게 된다. [4] 다만 1747年( 英祖 23年)에 興天寺名 同種 을 옮겨 光化門에 걸고, [9] 正祖 痛治期에는 鐘을 쳐 百姓의 抑鬱함을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景福宮 重建 [ 編輯 ]

오가와 카즈마사 가 撮影한 1880年代의 光化門.

1865年( 高宗 2年) 흥선大院君 의 主導로 景福宮이 重建 된다. 公社는 3年 後인 1868年 完了되었다. 光化門의 境遇 다른 殿閣들보다 于先 지어져, 1865年 10月에 上樑이 이루어졌다. 上樑文 製述官은 이유원 이 맡았다. [10] 上樑에 앞서 9月 17日에는 光化門의 懸板 書寫官을 定했는데, 임태영 이 맡았다. [11]

光化門의 三門 中 中央의 것을 正門(正門), 署側의 것을 서협(西挾), 東側의 것을 東峽(東挾)이라 하는데, 西協議 譙樓(?樓)에는 興天寺 同種 을 옮겨와 1865年 11月 9日에 걸어 更點(更點)을 알렸다. [12] 또한 이 時期에 各 門에 문배(門排)를 걸어두었다.

日帝强占期와 解放 以後 [ 編輯 ]

1910年 韓日 倂合 以後 朝鮮總督府 가 景福宮 一帶에 朝鮮總督府 廳舍 를 造成하는 過程에서, 그 位置上 廳舍 앞을 가린다는 理由를 들어 光化門을 撤去하겠다는 計劃을 發表했다. 그러나 朝鮮은 勿論 日本의 知識人들까지 撤去 決定에 反撥하였다. 特히 야나기 무네요시 는 1922年 9月 日本 雜誌 《 改造 》(改造)에 '사라져가려고 하는 어느 朝鮮 建築에 對하여'라는 題目으로 光化門의 運命을 기리는 글을 揭載하였고, 日本에서 發表된 以後 《 東亞日報 》에 韓國語 飜譯本이 5回에 걸쳐 실리면서 朝鮮總督府의 政策에 對한 反對 輿論이 들끓게 되었다. 이에 朝鮮總督府는 光化門 撤去 計劃을 撤回하고 總督府 廳舍가 完工된 이듬해인 1927年 光化門을 建春門 (景福宮의 同門, 現在 國立 民俗 博物館 의 南東쪽) 쪽으로 以前 設置하였다. [5]

破壞 및 石造 復元 [ 編輯 ]

東側에 놓여 있던 時節 韓國 戰爭 氣의 爆擊으로 石築만 남은 光化門 (1952年)

光化門은 1945年 解放 以後에도 景福宮 東側 담牆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50年 韓國 戰爭 이 勃發하면서 爆擊을 맞아 光化門의 上部에 位置한 木造 部分이 불에 타 없어지고 石築만 남게 되었다. [13]

朝鮮總督府 建物 앞에 놓인 石造 光化門의 모습(1990年代)

以後 1966年부터 光化門의 復元 論議가 始作되었는데, 當時에는 第2한강교 앞에 짓자는 金元龍 서울대학교 敎授의 意見과 反對로 元來 있던 位置에 다시 移轉해야 한다는 意見 等 여러 意見이 있었다. 또한 石築위의 破壞된 木造建築物을 再建築 할때, 콘크리트와 木材 中 무엇으로 지을지에 對한 論議도 이루어졌고, 結局 永久性과 목災難이라는 理由로 콘크리트로 製作하기로 意見이 모아졌다. 1968年에 光化門의 자리를 本來의 자리로 移轉한다는 뜻으로 石築은 總督府 廳舍建物 앞으로 移轉하였으나, 石築위의 建築物은 鐵筋 콘크리트 로 再建築 하여 1968年 12月 11日에 重建하였다. [14]

그러나 이렇게 再建된 光化門의 모습은 元來의 모습과 달랐다. 元來 光化門이 놓여있던 位置와 살짝 비틀어져 지어졌을 뿐 아니라, 再建築上部의 높이도 元來 높이보다 좀 더 높게 지어졌다. 이 때문에 建築 前부터 겉模樣만 復元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輿論이 일었다. [15] 甚至於 當時 새로 製作한 懸板 亦是 漢字 懸板이 아닌 當代 한글 專用에 對한 關心을 反映하여 朴正熙 大統領이 直接 한글로 쓴 懸板을 使用하였다. [5]

木造 復元 [ 編輯 ]

1990年 始作된 景福宮 復元에 이어 1995年부터 1996年까지 朝鮮總督府 廳舍建物이 撤去되면서 文民政府 에서는 2003年부터 光化門을 部分 撤去하고 2009年까지 元來의 제자리로 完全히 移轉하여, 石築 위의 木造 建物로 復元할 것을 發表하였다. [16] 2006年부터는 文化財廳 主導의 景福宮 復元事業 의 一環으로 旣存의 光化門을 高宗 中乾期 모습으로 復元하기 위해 撤去 · 解體하였다. [17] 光化門 復元 事業은 2010年 10月에 完了될 豫定이었으나 [18] G20 서울 頂上會議 의 開催로 인해 앞당겨져 8月 15日 光復節 에 一般人에게 公開되었다.

2010年에는 撤去된 光化門에 걸린 懸板 을 代替한 새로운 懸板이 復元된 光化門에 걸려 公開됐다. 懸板에 적힌 이름은 朝鮮時代에 使用된 漢字를 바탕으로 作成됐다. 그러나 8月 初까지 나무 板에 龜裂이 생겨 漢字 "光"의 왼쪽과 中間의 "門" 아래에 긴 垂直 龜裂이 보이자, 文化財廳은 乾燥한 가을 날씨를 木材 收縮의 原因으로 指目했지만, 專門家들은 未成熟 소나무 板子를 使用하여 完工 期限을 맞추었고 木材가 제대로 乾燥되지 않았다는 點에 對해서는 意見이 紛紛하였다. 結局 많은 論爭 끝에 龜裂을 修理했고 結局 2011年에 文化財廳 側은 懸板을 다시 交替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으며, 새 懸板은 江原道에서 自然 乾燥 過程을 거쳐 다시 만들어졌다. 文化財廳이 7,41名을 對象으로 實施한 設問調査에서는 3.1%가 한글로 表記해야 한다고 答했으나, 11%는 漢字를 選擇했고, 以後 새로운 懸板은 漢字로 作成되었다.

月臺 復元 [ 編輯 ]

月臺는 2018年에 復元이 始作되어 2023年에 完了되었다. [19] 朝鮮 前期의 모습은 充分히 考證할 수 없어서 高宗 年間의 모습을 基準으로 復元하였다. [20] 이 때 獬豸像의 位置도 月臺 앞으로 移轉하였고, 光化門의 懸板도 검은 바탕에 金箔 글字로 復元하였다. 復元 以前에는 光化門과 흥례문 사이에서 열리던 守門將 交代式을 비롯해 여러 傳統 文化行事를 復元된 月臺에서 開催할 豫定이다. [21]

救助 [ 編輯 ]

光化門은 石築 위에 重層의 木造 門樓가 올라간 構造를 가지고 있다. 石築은 虹霓型으로 門 세 個가 나있는데, 가운데 것이 가장 크고 西側과 東側의 것은 서로 같은 模樣과 크기이다. 虹霓 通路는 內外型 虹霓로 問議 全面과 後面에만 虹霓로 되어있으며 通路의 天障은 平平하다. 門樓는 全面 3칸 側面 2칸 構造이나, 正面 5칸 規模인 崇禮門 興仁之門 과 規模面에서 비슷하여 다른 3칸 規模의 門들과 差異가 있다. 門樓의 下層은 壁體를 開放하였으나, 上層은 板門을 달아두었다. 體感方式은 半칸물림이다. 恐怖는 多包式 恐怖로, 上下層 모두 外2內3出目이다. 外部提供은 良書와 水西를 함께하였고, 內部提供은 初刻으로 하였으며 檐遮는 敎頭型이다. 지붕은 隅진閣지붕에 처마는 겹처마로 하였다. [4]

圈域 [ 編輯 ]

光化門 圈域 (北闕圖型 基盤 圖面)

鍾路에서 六朝대로를 걸어 光化門으로 接近하면 처음에는 兩옆에 해치 石像이 있고, 곧이어 月臺가 있었으며 門의 左右로는 守門將이 勤務하는 哨所가 있었다.

光化門으로 들어가면 北側으로는 흥례문 , 西側으로는 龍城門, 東側으로는 協生聞으로 둘러쌓인 마당이 나온다. 景福宮 重建 後에는 光化門으로 들어간 直後 左側과 右側에 守門將廳이 있었는데, 右側에는 軍事方道 있었다. 거기서 右側으로 더 들어가면 哨官處所와 領軍直訴가 나왔다. 行廊은 두지 않았다.

日帝强占期에는 光化門과 근정문 사이에 흥례문 等 많은 建物을 허물고 朝鮮總督府 廳舍 를 지어두었었다. 廳舍는 1995年에 撤去했다.

해치 石像 [ 編輯 ]

해태 라고도 하는 害치는 傳說속의 神靈한 動物로, 風水地理上 火山(火山)인 冠岳山 의 기운을 억누르며 火魔와 災殃으로부터 景福宮을 保護하고자 重建 途中 火災를 겪은 흥선大院君 이 이세욱(李世旭)이라는 石工을 시켜 1870年(高宗 7年)에 月臺 앞 兩쪽에 石像을 세웠다. [22] 해치 石像은 下馬碑의 役割도 했는데, 官員들이 景福宮에 入闕하기 前에 是非와 正義를 가리는 動物인 해태의 마주케 하는 意圖도 담겼다. [23] 또한 1923年 朝鮮副業품공진회 開幕에 맞춰 電車가 景福宮 앞까지 敷設되는데 妨害된다는 理由와 朝鮮總督府 廳舍를 짓기 위해 整備한다는 理由로 撤去되어 [24] 근정문 처마 밑에서 거적대기를 덮은 채 5年間 保管되다가 1928年에 다시 光化門 앞에 세워졌다. [25]

月臺 [ 編輯 ]

헤르만 산더 가 1905年頃 月臺에서 撮影한 光化門 守門將 交代式. 魚道와 東側 欄干石이 보인다. 國立民俗博物館 所長.

光化門 月臺는 길게 다듬은 長臺石을 利用한 基壇石과 戒壇石, 그리고 欄干石을 두르고 內部를 흙으로 채워 만든 建築構造物이다. [26] 2023年 發掘調査 結果 全體 規模는 南北길이 48.7m, 東西너비 29.7m로 確認되었으며 光化門 中央門과 이어지는 어도지 基礎施設은 너비 約 7m로 造成되었음이 드러났다. [27]

光化門 月臺는 洞·西 外郭에 잘 다듬어진 長臺石(길이 120~270cm, 너비 30~50cm, 두께 20~40cm)을 利用하여 2段의 基壇을 쌓고, 그 內部는 서로 다른 性質의 흙을 交叉路 쌓아 周邊보다 높게 臺를 만들었다. 月臺의 南쪽에는 長臺石을 利用하여 階段을 造成하였는데, 그 中 魚道와 連結되는 中央部는 小맷돌을 利用하여 東·西 階段과 分離하였다. 特히, 魚道階段址의 境遇 日帝强占期 서울電車 線路에 依해 一部 毁損되었으나 小맷돌을 받쳤던 址臺石이 確認되었다. [27]

月臺는 高宗年間 築造 以後 크게 4段階의 變化過程이 있었다. 1段階에서는 月臺 築造 當時로 南쪽에 境界가 나누어진 3個의 階段이 存在했으며, 當時 月臺의 平面形態는 逆鐵字形이었다. 2段階에서는 中央의 魚道階段址가 傾斜路로 變化되고, 3段階에서는 傾斜路의 範圍가 擴張되고 階段이 洞·西 外郭으로 縮小 變形되었으며, 이 時期에 처음으로 單線(외줄) 形態의 電車線路가 設置됐다. 4段階에서는 電車線路의 伏線(겹줄)火爐 月臺가 破壞되면서 欄干席 等이 撤去되고 光化門의 이件과 함께 道路로 使用되었다. [27]

基壇石 下部는 여러 매의 址臺石을 놓고 赤色粘土로 補强한 基礎施設, 鐵片과 粘土, 石灰를 利用한 長臺石 사이의 水平맞춤, 長臺石의 密林 防止를 위해 粘土와 깬 돌을 섞어 補强한 뒷채움方式 建築技法으로 造成되었다. [27]

龍城門 [ 編輯 ]

龍城門(用成門)은 光化門으로 들어가면 左側에 位置한 門이다. 〈宮闕志〉에서는 2(3)칸, 기둥길이 16隻 5寸, 양통 15隻, 道理桶 御間 18尺으로 記錄되어있고 北闕圖型 에서는 正面 3칸 側面 2칸으로 記錄되어있다. 왕이 景福宮 後援이나 宮 밖으로 나갈 때 種種 使用되었으며, 신정왕후 의 喪輿가 지나가는 聞으로 使用되었고 그 神輦을 宗廟 에 奉安하기 위해 옮길 때 王과 王世子가 祗迎한 곳도 龍城門 밖이었다.

協生門 [ 編輯 ]

協生門(協生門)은 景福宮과 흥례문 사이 내부담장의 東側에 있는 門이다. 世子가 光化門과 東宮 사이를 移動할 때 使用하던 聞으로, 正面 1칸, 側面 2칸으로 確認되었다. [28]

守門將廳 [ 編輯 ]

守門將廳은 西側과 東側에 있었다. 署側의 것은 正面 6칸, 側面 1.5칸의 動向 建物이다. 南쪽에서부터 靑(廳) 3칸, 房 2칸, 週(廚) 1칸으로 構成되어있으며 東側에 마루가 0.5칸 있었다.

군사방 [ 編輯 ]

군사방(軍士房)은 光化門과 守門將廳 사이에 있던 2칸짜리 建物이다. 衛兵所의 機能을 했다. 西側과 東側에 2個가 設置되어 있었는데, 後에 1個만 남아있다가 日帝强占期에 모두 毁撤되었다.

領軍직소 [ 編輯 ]

領軍직소(營軍直所)는 景福宮의 軍士가 머무르던 施設 中 하나이다.

寫眞 [ 編輯 ]

映像 [ 編輯 ]

交通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參照週
  1. 윤희철 (2016年 11月 19日). “[윤희철의 建築스케치]景福宮의 가을” . 《京鄕新聞》. 2016年 11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2. Song, Yong-jin, 1972-; 송 勇進, 1972- (2009). 《Ssong naegwan ?i chaemi inn?n kunggw?l kihaeng》 Kaej?ng ch?ngbop'an版. S?ul-si: Chisik P'?reim. ISBN   978-89-960655-5-5 .  
  3. 太祖實錄 8卷, 太祖 4年 10月 7日 精油 2番째記事
  4. 文化財廳 (2011). 《光化門圈域 重建報告書》.  
  5. 全國歷史指導士모임 (2016年 12月). 《標石을 따라 鏡城을 거닐다》. 劉氏북스. 220-223쪽.  
  6. 世宗實錄 34卷, 世宗 8年 10月 26日 丙戌 3番째記事
  7. 世宗實錄 地理誌 京都 漢城府
  8. 成宗實錄 40卷, 成宗 5年 3月 3日 巫子 1番째記事
  9. 최응천 (2017). “朝鮮前期 王室 發願 梵鐘과 興天寺鐘의 重要性” . 《講座美術史》 (49): 123?144. ISSN   1226-6604 .  
  10. 용호한록 》 卷3 第16冊
  11. 고종실록 2卷, 高宗 2年 9月 17日 己卯 2番째記事
  12. 《景福宮地》 全校, 上樑일, 高5120-32
  13. 光化門 復元(光化門 復元), 《 東亞日報 》, 1966. 2.17.
  14. 光化門(光化門) 復元, 《경향신문》, 1968. 12.11.
  15. 光化門 復元(光化門 復元)에 理論(異論), 《경향신문》, 1968. 3.20.
  16. 光化門(光化門)도 제모습 찾는다, 《 京鄕新聞 》, 1995. 2.28.
  17. 景福宮 創建 當時 光化門 터 保存한다 , 世界日報, 2007年 12月 24日
  18. 景福宮 光化門 復元 上樑式…來年 10月 復元 完了 , 뉴시스, 2009年 11月 26日
  19. “[歷史의 香氣/標識石] <50>光化門 月臺(光化門 月臺)터” . 서울經濟. 2019年 9月 1日.  
  20. “文化財廳” . 2023年 10月 31日에 確認함 .  
  21. “日帝가 毁損한 光化門 月臺 復元된다…해태상은 原位置로” . 聯合뉴스. 2018年 4月 10日.  
  22. “過歲安寧히하섯습니까”. 朝鮮日報. 1934年 1月 1日.  
  23. 記者, 김원진 (2021年 7月 5日). “[友情이야기]해치가 光化門을 노닌 까닭은” . 2023年 1月 6日에 確認함 .  
  24. “春風秋雨 五百年을 宮門壓헤 마調眼底”. 東亞日報. 1923年 10月 4日.  
  25. “집어넛다가끌어냇다가 ??生涯도辛酸”. 東亞日報. 1929年 11月 23日.  
  26. "1866年 3月 3日: 光化門 앞에 月臺를 쌓았다. 募軍이 宮 안에 쌓아둔 雜土를 지고 왔는데, 실로 4萬 여 짐에 이르렀다(光化門前築月臺以募軍負宮內所積雜土而實之至四萬餘負)." 「景福宮 營建日記」
  27. 文化財廳 (2023年 4月 25日). “光化門 月臺의 規模와 變化過程 確認되다” . 2023年 5月 6日에 確認함 .  
  28. 朝鮮日報 (2020年 8月 4日). “王子 專用 出入門, 景福宮 協生門 찾았다” . 2023年 10月 31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