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우리歷史넷
  • 韓國史 年代記
  • 近代
  • 甲申政變

甲申政變

政變을 통해 近代 國家 樹立을 試圖하였으나 3日 天下로 끝나다

1884年(高宗 21)

갑신정변 대표 이미지

甲申政變을 主導한 朴泳孝, 徐光範, 서재필, 김옥균

韓國史데이터베이스(國史編纂委員會)

1 槪要

開港 以後 開化派勢力은 새로운 國際秩序에 適應하여 西歐의 文物을 받아들여 近代化를 이루어야 한다고 主張하면서 꾸준히 成長하고 있었다. 이러한 時期에 일어난 1882年(高宗 19) 壬午軍亂은 請에 依한 內政干涉이 深化되는 契機가 되었다. 이에 김옥균(金玉均)을 中心으로 한 開化黨은 淸國軍을 몰아내고 朝鮮의 眞正한 獨立을 이루기 위해 于先 政權을 掌握하기로 하였다. 1884年(高宗 21) 청불戰爭(淸佛戰爭)이 일어나자 淸國은 朝鮮에 駐屯하고 있던 廳國軍의 一部를 撤收시켰다. 이를 契機로 開化黨은 政變을 斷行할 것을 決定했고, 日本公使의 協助를 얻어 1884年(高宗 21) 12月 4日(陰曆 10月 17日) 郵政局 落成式 祝賀宴을 契機로 政變을 일으켰다. 甲申政變이 일어난 것이다. 開化勢力은 閔氏 守舊勢力을 處斷하고 新政府를 樹立하였으며 革新 政綱을 發表하는 等 改革을 進行시켜 나갔다. 하지만 곧이어 廳國軍의 武力攻擊에 敗北하면서 開化黨의 執權은 3日 만에 끝나게 되었다.

2 開港 以後 朝鮮 政界의 變化와 開化黨의 形成

1876年(高宗 13) 開港 以後 朝鮮은 資本主義 世界體制에 編入되었다. 朝鮮社會는 이제 中國 中心의 朝貢冊封體制에서 벗어나 새로운 國際秩序에 適應해야 했다. 國際 環境의 變化는 朝鮮 社會에 큰 危機意識을 불러 일으켰으며, 危機에 어떻게 對應하고 克服해 나갈 것인가에 對한 論議 中 하나가 바로 開化思想이었다.

開港을 전후한 時期 朝鮮 社會는 開港 自體를 反對하는 輿論이 斷然 높았다. 代表的인 衛正斥邪論者로 꼽히는 최익현(崔益鉉)은 倭洋一體論(倭洋一體論)을 主張하며 開港을 反對하는 이른바 ‘支部上疏(持斧上疏)’를 올리기도 했다. 江華島 條約 締結 以後에도 衛正斥邪論的 見解들이 支配的이었으나, 支配層을 中心으로 한 知識人들 가운데 西歐의 技術文明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意見 亦是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

開港 以後 朝鮮政府의 對內外政策 變化를 가져왔던 重要한 電氣는 1880年(高宗 17) 第2次 修信使 派遣에서 마련되었다. 김홍집(金弘集)을 비롯한 修信使 一行이 日本에서 가져온 『朝鮮策略』에서는 ‘親中國(親中國)·缺日本(結日本)·聯美國(聯美國)’을 主張하고 있었고, 이는 結果的으로 朝鮮의 對日·對美 開放政策을 推動시켰다.

修信使의 報告와 開化에 對한 高宗의 積極的인 意志로, 朝鮮政府는 漸次 開花·自强政策을 效率的으로 推進하기 위한 改革에 着手했다. 1880年 12月에는 西洋 國家들과의 外交·通商에 對備하여 對外政策을 擔當하는 同時에 國家의 財政·軍事 業務를 맡아 볼 機構로서 統理機務衙門(統理機務衙門)을 새롭게 設置했다. 統理機務衙門의 實質的 運營을 主導한 것은 各 社(司)의 堂上들이었는데, 1881年(高宗 18) 11月 以後 調査視察團(朝士視察團)의 調査(朝士)였던 홍영식(洪英植), 심상학(沈相學), 박정양(朴定陽)等이 大擧 登用되어 開化政策을 推進했다.

1882年(高宗 19) 壬午軍亂이 發生했지만 그 後에도 開化勢力은 萎縮되지 않았다. 오히려 開化派들은 衛正斥邪派와 大院君 系列의 政治勢力을 一掃하고, 自身들이 主導的으로 開化政策을 推進할 수 있는 契機를 마련해 나갔다. 壬午軍亂 問題를 協議하기 위해 1882年 8月 日本으로 修信使가 派遣되었는데, 情事(正使)는 박영효, 府使(副使)는 김만식(金晩植), 從事(從事)는 서광범(徐光範)이었으며, 拷問으로 김옥균·민영익 等이 參加했다. 卽 以後 甲申政變을 主導했던 김옥균·박영효·徐光範을 비롯한 政變 勢力들이 1882年 修信使에 參與했던 것이다. 이들 修信使 一行은 4個月間 도쿄에 머무르면서 外務大臣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비롯한 日本 政界의 人物들을 두루 만났다. 또한 開化의 方策으로 君主의 文明化를 통한 改革政策의 推進, 改革勢力의 政治的 基盤 擴大를 위한 政府 內의 部分的 改編, 改革政策을 支援하고 宣傳하기 위한 新聞 發刊 事業 等을 構想했다.

한便 高宗은 壬午軍亂 以後 失墜된 王權을 回復하고 權力 基盤을 强化하기 위해 여러 가지 制度的 裝置를 마련했다. 1882年 7月에는 統理機務衙門의 體制를 이어받은 機務處(機務處)를 設置하고, 以後 이를 統理衙門·改編했다가 1882年(高宗 19) 12月에 다시 統理軍國事務衙門(統理軍國事務衙門, 內衙門)과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外衙門)으로 다시 體制를 改編했다. 이로써 政府 組織은 議政府·六曹(六曹)와 內衙門·外衙門의 二元的 體制로 運營되었다. 特히 內衙門은 그 處所를 宮闕 안에 두고 富國强兵에 關한 業務와 國政 正反의 主要 事案을 議決·執行하는 開花·自强의 推進機構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議政府를 凌駕하는 最高의 權力機構로서 기능했다.

內衙門의 實權은 督辦(督辦), 協辦(協辦) 等 堂上官들이 掌握했으며, 主로 親淸派와 閔氏 戚族들에 依해 運營되었다. 따라서 內衙門에서 主導한 開化政策은 淸의 影響力 아래 進行되었으며, 親淸的인 閔氏 戚族 一派는 各種 開花 事業을 獨占的으로 運營하며 權力을 掌握했다. 西歐式 近代化를 志向하고 있었던 開化黨 勢力은 閔氏 戚族이 主管하는 淸國式 開化政策에 不滿이 많았다. 이에 따라 開化政策의 內容과 路線을 둘러싸고 自然스럽게 開花政治勢力의 分化가 나타나게 되었다.

비록 閔氏 一派는 內衙門 等의 權力機構를 掌握하고 實權을 行使하고 있었던 反面 高宗에 對한 影響力과 外交問題는 開化黨의 입김이 크게 作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開化黨은 5~6名의 少數에 不過했고, 制度的으로 開化政策을 推進할 수 있는 權力機構를 掌握하지 못하고 있었다. 當時 高宗은 各 政治勢力 間의 對立과 葛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런 葛藤構造를 王權 强化에 適切하게 利用하고자 했다. 開化黨은 高宗의 機會主義的 政治運營과 開化政策 推進에 對해 批判的이었으며, 따라서 ‘獨立’과 ‘開花’를 達成하기 위해서는 高宗만을 믿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3 甲申政變 主導勢力의 政治的 成長

甲申政變 主導勢力은 壬午軍亂 以前에 過去를 거쳐 關係(官界)에 入門했는데, 朴泳孝를 除外한 모두가 文科에 及第한 文人들이었다. 김옥균·洪英植은 1872年(高宗 9)에 文科에 及第했고, 徐光範과 서재필(徐載弼)은 1880年(高宗 17) 以後 過去를 거쳐 官職을 附與받았다. 朴泳孝는 같은 해에 駙馬가 되어 王室과 因緣을 맺었다. 그들은 主로 弘文館과 司憲府의 職任에 從事했으며, 그 外에 成均館·奎章閣의 職任을 歷任했다. 그들 가운데 洪英植은 調査視察團의 調査로서 日本을 訪問했고, 金玉均은 個人的으로 6個月 餘 동안 日本의 近代 文物을 視察했다. 그만큼 그들은 近代化에 對한 높은 關心과 積極性을 보이고 있었다.

壬午軍亂 以後 甲申政變에 이르기까지 2年餘 동안에 開化黨 勢力은 外交와 政治 分野에서 매우 活潑한 活動을 보였다. 壬午軍亂 後 日本에 派遣된 3次 受信使行에 박영효·서광범·金玉均이 參與했으며, 그들은 3~7個月에 걸쳐 外交活動은 勿論 日本의 近代 文物을 視察했다. 洪英植과 徐光範은 報聘社의 一員으로 美國을 訪問해 各各 5個月과 1年餘 동안 西歐의 近代 文物을 經驗했다. 金玉均은 또한 高宗의 委任狀을 갖고 借款 導入을 위해 日本에 건너가 10餘 個月 동안 借款 導入을 위한 外交活動을 展開하기도 했다. 그들은 日本과 美國 等 近代 資本主義 國家의 文物을 視察하고, 朝鮮을 代表하여 活潑한 外交活動을 펼쳤다.

壬午軍亂 以後 甲申政變 主導勢力은 主로 外衙門과 內衙門, 承政院·六曹 等에서 活動하였다. 當時 開化政策을 總括했던 內衙門에는 洪英植이 參議·協辦을, 徐光範은 內衙門 參議를 歷任했다. 外交를 總括했던 外衙門에는 金玉均과 洪英植이 參議·協辦을 지냈고, 王命을 傳達하는 承政院에는 김옥균·서광범·박영교가 承旨를 歷任했다. 六曹에는 吏曹參議(金玉均·홍영식)·好調參判(金玉均)·兵曹參判(洪英植) 等을 맡았다, 그밖에 郵政局 總販·漢城府判尹·광주부留守·東南開拓史 等의 職任을 맡아 活動했다. 朴泳孝는 1883年(高宗 20) 10月 광주부留守를 그만둔 以後 官職에 오르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王室의 駙馬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 甲申政變 主導勢力의 半晴開化思想

壬午軍亂 以後 淸은 軍事力을 背景으로 朝鮮의 政治·外交에 關與함은 勿論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締結 後에는 特權을 앞세워 經濟的 侵奪을 恣行했다. 淸의 壓力이 더욱 加重되고 朝鮮 內部의 政治勢力과 連繫하여 支配構造를 完結시켜 나가자, 開花黨員들은 淸의 壓力을 排除하고 獨立을 이루는 것을 제1차 課題로 삼았다. 金玉均은 甲申政變 以前에 쓴 「朝鮮改革意見書」에서, “以前부터 淸國이 屬國으로 여겨온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나라가 떨쳐 일어날 希望이 없는 것은 亦是 여기에 原因이 없지 않다. 이에 첫째로 해야 할 일은 束縛을 벗어나고 獨立하여 完全 自主國을 樹立하는 일이다. 獨立하고자 하면 政治와 外交는 不可不 自首自强(自修自强)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을 섬기는 只今의 政府·人物로서는 不可能하다.”고 밝혔다. 開化黨 勢力은 廳에서 獨立하는 것이 近代化의 가장 重要한 課題라고 認識하고 있었고, 이러한 認識은 동도서기論者를 비롯한 다른 政治勢力과 다른 것이었다.

1882年(高宗 19) 後半에 이미 淸에 對한 立場과 開化政策 推進을 둘러싸고 開花政治勢力의 分化가 나타나고 있었다. 1882年 11月 金玉均은 西洋과의 條約締結 問題를 論議하는 中에 “우리 朝廷에 發議한 바 있으나 여러 지나當(支那黨)의 저희(沮?)를 입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傷心하는 바다.”라고 하며 親淸派의 妨害를 받고 있음을 밝혔다. 이는 執權層 內 開花政治勢力이 親淸的인 ‘지나當’과 開化黨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또한 對外政策을 둘러싸고 ‘지나當’과 金玉均 一波 사이에 政治的 軋轢이 있었음을 나타난다. 以後 靑果의 關係를 둘러싸고 親淸派인 閔氏 戚族과 開化黨 間의 政治的 對立 關係가 深化되어 갔다.

이와 같이 甲申政變 主導勢力은 半晴意識은 뚜렷했던 反面, 日本과 西歐의 侵略的 意圖에 對해서는 그만큼 徹底하지 못했다. 實際로 윤치호와 洪英植은 美國을 侵略的 野心이 없는 나라로 認識하고 있었다. 西歐와 日本의 侵略的 意圖를 읽어내고 막아내기보다, 西歐의 文物과 制度를 積極的으로 受容하여 富國强兵을 達成하고, 當場의 外壓인 淸의 干涉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急先務라고 여겼던 것이다. 實際로 開化派는 淸의 勢力을 除去하기 위해 日本과 西歐勢力을 最大限 利用하려 했으며 그들과의 結託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政變 當時 日本과 西歐 列强은 侵略者로서보다는 協助와 利用의 對象으로 浮刻되었다.

5 政變의 進行과 結果

開化派가 政變을 計劃한 時點에 對해서는 여러 가지 見解가 있다. 政變 發生 1年 6個月 前이라는 見解와 1年 前이라는 見解, 1884年(高宗 21) 5月經이라는 見解, 1884年 7~8月經이라는 見解 等이 있다. 武裝 政變을 具體化한 決定的인 契機는 1884年 6月頃으로 推定된다. 1884年 4月에 勃發한 청불戰爭으로 因해 淸의 軍隊가 朝鮮에서 一部 前線으로 移動하고, 戰爭 狀況이 淸國에게 不利하게 進行되고 있다는 消息이 6月부터 國內에 具體的으로 傳해지기 始作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時期 甲申政變의 主導勢力이 모두 外國에서 돌아와 함께 政變을 謀議할 수 있는 機會가 생겼으며, 閔泳翊과 連帶 可能性에 對한 期待가 霧散된 것도 이 時期이다.

1884年 8月에는 政變에 必要한 武力으로 日本人을 雇用하기 위해 日本에 사람을 派遣한 일이 있었다. 以後 9月이 되면 다시 朝鮮에 들어온 日本 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協議하여 日本 公使館 守備隊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計劃을 變更했다. 9月 27日에는 美國 公使 푸트에게 政變의 計劃을 알렸다. 이때 美國 公使는 이미 이들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조용히 때를 기다릴 것을 付託했다. 이어 10月 7日에는 英國 領事 애스턴과 美國 公使를 찾아가 政變의 計劃을 이야기했으며, 이들로부터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忠告를 들었다.

9月 29日에는 이인종(李寅鍾)의 집에서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等 主導勢力과 李昌圭(李昌奎)·이규정(李奎禎) 等 行動隊員들이 모여 政變에 對한 論議를 벌였다. 政變 열흘 前인 10月 8日에 金玉均은 日本公使 다케조에를 찾아가 그동안 準備해왔던 具體的인 細部 計劃을 最終的으로 協議·確定했다. 金玉均은 擧事 後 改革에 必要한 財政資金을 借款 形態로 빌리고자 했으며, 이에 對해 日本公使는 ‘수 三 百萬 원’ 規模의 借款을 마련할 수 있다고 壯談했다.

10月 13日에는 政變의 擧事 날짜를 10月 17日로 決定했다. 이는 日本 側의 態度가 變化하기 前에 政變을 成功的으로 遂行하여 끝낸다는 判斷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擧事 일을 決定한 後 政變 主導勢力은 朴泳孝의 집에서 行動隊員들을 불러 모아 具體的인 行動 指針을 傳達했다. 첫째, 郵政局 옆 別宮에 放火하고 火藥을 폭발시켜 混亂의 雰圍氣를 造成한다. 둘째, 郵政局 宴會를 期해 擧沙하며, 洪英植은 4領事(營使)의 參席 與否를 確認한다. 셋째, 別宮 火災 鎭壓의 틈타 4領事를 除去한다. 넷째, 민태호·민영목·조영하 세 사람이 大闕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려 손을 쓴다는 것이다.

政變 計劃이 具體的으로 進行되어 가면서, 開化黨 內部에서 離脫하는 勢力도 생겼다. 特히 尹致昊는 9月에 접어들면서 아버지 윤웅렬(尹雄烈)과 더불어 流動的인 立場을 보였는데, 政變 다음 날인 10月 18日 午後에 윤치호와 尹雄烈은 政變을 “無識하여 理致를 모르고, 無知하여 時勢에 어두운 것”이라고 論하기도 했다.

政變은 1884年(高宗 21) 10月 17日 郵政局 個國 祝賀 宴會를 契機로 저녁 9時頃에 始作되어, 10月 19日 午後 7時頃에 幕을 내렸다. 政變이 進行된 時間은 46時間 程度로 滿 이틀이 채 되지 않았다. 이 짧은 時間에 開化派는 빠른 速度로 政權을 掌握하고 人事를 斷行했으며, 自身들의 改革構想이 담긴 精靈을 頒布하기까지 했다.

政變 첫날인 10月 17日, 郵政局의 開業을 祝賀하기 위한 郵政局 晩餐은 10月 17日 견평방(堅平坊)에서 豫定대로 저녁 7時에 열렸다. 이 자리에는 郵政局 總販 洪英植을 비롯해 박영효·김옥균·서광범 等 政變 主導勢力이 參席했고, 左領事 이조연과 우영사 민영익, 前領事 한규직 等 權力의 實勢와 外衙門 督辦 金弘集 等이 參席했으며, 美國 公使와 英國 領事·淸國 總販 等 各國의 外交官들이 參席했다.

元來 計劃에는 宴會 途中 別宮에 放火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失敗하고, 9時 頃 別宮 옆 草家에 防火했다. 宴會場은 소란스러워졌고, 宴會 途中 金玉均의 頻繁한 出入을 殊常하게 여긴 閔泳翊이 第一 먼저 나갔는데,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宴會場은 阿修羅場이 되었다. 參席했던 사람들은 놀라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으며, 이에 元來 計劃했던 4領事 處斷은 失敗했다. 처음에 세웠던 第1段階 計劃이 蹉跌을 빚자 金玉均은 박영효·徐光範과 함께 日本 公使館으로 가서 日本 公使의 態度를 確認한 後, 高宗이 있는 昌德宮으로 向했다.

金玉均 等은 昌德宮에 있던 高宗의 寢室로 들어가 郵政局의 變亂을 알리고, 暫時 正殿(正殿)을 避해 이어(移御)할 것을 請했다. 高宗은 別 異議 없이 金玉均 等을 따라 昌德宮 西쪽에 자리한 景祐宮으로 몸을 옮겼다. 金玉均이 高宗에게 日本病을 要請해서 護衛하도록 하라고 하자, 高宗은 親筆 勅書를 내려주었다. 高宗의 勅書를 받은 日本 公使가 軍隊를 이끌고 景祐宮에 到着하여, 景祐宮의 各 大門 안팎을 警護했다.

10月 18日 子正이 지나 前領事 한규직과 左領事 이조연이 景祐宮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高宗에 對한 謁見을 請했으나 거절당했고, 政變 勢力은 이들이 景祐宮 後門으로 나갈 때 殺害했다. 이어서 景祐宮으로 들어오는 민영목·조영하·민태호를 次例로 處斷했다. 이로써 權力의 核心 實勢들을 모두 處斷한 것이다.

날이 밝은 뒤 政變 勢力들은 곧바로 大大的인 人事를 斷行하여, 朝報(朝報)를 통해 傳達했다. 이때 斷行된 人事를 통해 政變 主導層은 擬定權(議定權)과 軍事·治安權, 財政權을 掌握하고자 했다. 또한 大院君 系列의 宗親科 王室 外戚과의 連帶를 圖謀했으며, 議政府 勢力과 汎開花勢力을 同伴勢力으로 設定했다. 이런 人事는 當時 閔氏 戚族 中心의 權力構造에서 疏外된 者들을 糾合한 性格을 띠고 있었다.

昌德宮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要求하는 閔妃의 끈질긴 要求로, 10月 18日 午前 10時頃 高宗은 景祐宮 南쪽 季冬에 있던 이재원(李載元)의 집으로 이어했다가 午後 5時頃 昌德宮 觀物軒(觀物軒)으로 다시 옮겼다. 昌德宮 經費는 政變 主導層이 動員한 行動隊員들과 日本軍, 그리고 政變 主導層이 掌握한 4領의 軍士들이 맡았다.

10月 19日 午前 10時頃 김옥균·박영효 等은 開化黨의 具體的인 改革 構想을 담은 精靈을 頒布하였다. 이를 通해 政變의 意圖와 目的을 提示하고, 疑懼心을 가진 國民들과 다른 政治勢力들을 撫摩하고자 한 것이다. 이때 公布된 精靈은 元來 80餘 個 條項에 이르렀다고 하나, 現在 14個 조항만이 『갑신일록(甲申日錄)』에 傳하고 있다.

『갑신일록』에 傳해지는 14個 條項의 精靈은 다음과 같다.

1. 大院君을 不日內(不日內) 모셔올 것(朝貢 虛禮는 議論하여 廢止함).
1. 門閥을 廢止하여 人民平等의 權利를 制定하고, 사람으로써 棺(官)을 擇하고, 關으로써 사람을 擇하지 말 것.
1. 全國的으로 地租法(地租法)을 改革하여 管理의 不正을 막고 百姓의 困難을 救濟하며 더불어 國用(國用)을 넉넉하게 할 것.
1. 內侍府를 革罷하고, 그 가운데 優秀한 才能이 있는 者는 登用할 것.
1. 前後(前後)에 慳貪(奸貪)하여 나라를 병들게 함이 甚한 者는 定罪(定罪)할 것.
1. 各 道의 幻想(還上)은 永永 臥還(臥還)할 것.
1. 奎章閣을 革罷할 것.
1. 急히 巡査를 두어 節度를 防止할 것.
1. 惠商公局을 革罷할 것.
1. 前後에 流配·禁錮된 사람은 酌量(酌量)하여 釋放할 것.
1. 4領을 合하여 1營으로 하고, 1營 中에서 壯丁을 뽑아 急히 近位를 設置할 것(陸軍大將은 世子宮을 첫 番째로 擬望(擬望)艦).
1. 무릇 國內 財政에 屬한 것은 모두 好調가 管轄하고, 그 나머지 一切의 財富衙門(財簿衙門)은 革罷할 것.
1. 大臣과 參贊(參贊)?새로 借賃(差任)韓 6人은 只今 반드시 그 이름을 다시 쓸 必要는 없다?은 每日 闔門 안 議政所에서 懷疑하여 품정(稟定)하고, 精靈을 頒布 施行할 것.
1. 政府 六曹 外에 무릇 不必要한 官職에 屬하는 것은 모두 革罷하고, 代身·參贊으로 하여금 作의(酌議)하여 界(啓)하도록 할 것.

政綱은 政治體制와 國家權力의 運營 方案에 對한 比重이 높았으며, 國家 財政의 確保와 軍事的 基盤 造成에 重點을 두었고, 靑으로부터의 獨立 構想 等이 담겨 있었다.

地方에 駐屯하고 있던 淸軍이 漸次 서울로 들어와 合流하고 있다는 消息이 들리자 日本 公使는 宮闕을 警備하던 日本軍을 撤收하기로 決定했다. 淸軍이 政變에 介入할 兆朕이 보이자 靑·日刊 戰爭으로 飛火할 可能性을 憂慮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金玉均과 日本 公使가 撤軍 以後 淸軍을 防禦할 對策을 論議하고 있을 때 淸軍이 昌德宮으로 攻擊해 들어왔다. 靑軍과 政變群·日本軍과의 交戰이 始作되고, 戰勢가 不利해지자 金玉均은 高宗을 仁川으로 모실 것을 主張했다. 이날 戰鬪에서 朝鮮軍과 靑軍 相當數가 死亡 또는 부상당했고, 日本軍은 2名이 戰死, 8名이 負傷을 當했다.

政變 主導層과 日本 公使는 모두 撤收하기로 했다. 다만 洪英植과 박영교는 士官生徒들과 함께 高宗을 護衛하여 北廟로 行했다. 高宗을 護衛했던 이들은 靑軍과 朝鮮 軍人에게 모두 殺害되었다. 그리고 金玉均 等은 다케조에를 따라 日本 公使館으로 後退했다. 이때가 10月 19日 저녁 7時 30分頃이었으며, 이로써 開化黨의 政變은 3日만에 失敗로 끝났다.

10月 20日이 되자 民衆은 日本 公使館을 向해 돌을 던지기 始作했으며, 12時 頃에는 日本 公使館을 放火하기 始作했다. 民衆의 攻擊이 繼續되자 日本 公使는 서울을 떠나기로 決定하고, 午後 2時 30分에 金玉均 等과 함께 仁川으로 向했다. 退却하는 이들 一行은 朝鮮 軍人과 民衆의 激烈한 抵抗을 받았다. 金玉均 等 開化派 9名과 日本 公使 一行은 10月 21日 새벽 仁川의 日本 領事館에 到着했으며, 10月 23日 日本으로 떠났다. 이때 日本으로 亡命한 사람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유혁로(柳赫魯)·變數(邊燧) 等 9名이었다. 남은 行動隊員들은 大逆罪로 處斷되고 關聯者들도 여러 次例에 걸쳐 政界에서 肅淸을 當하면서 開化派 勢力들은 萎縮되었으며, 開化政策度 中斷될 수밖에 없었다.

6 政變의 失敗 原因

甲申政變에 對한 評價는 다양하지만, 政變의 失敗와 그로 인한 逆效果에 對한 評價는 매서운 便이다. 이미 當代에 尹雄烈은 甲申政變이 賃金을 威脅한 것, 外勢에 依存한 것, 人心이 不服한 것, 靑軍의 介入 可能性, 政治勢力의 열세 等을 原因으로 失敗할 것임을 豫測하고 있었는데, 그 內容은 相當히 正確한 것이었다.

政變 主導勢力은 豫想되는 靑軍의 介入에 對備하여 日本軍을 政變에 投入했는데, 이로 因해 甲申政變은 “外國의 軍士를 불러들여 軍部(君父)를 威脅하였다.”고 批判을 받게 되었다. 民衆들 또한 政變을 日本人과 難當들이 일으킨 事件으로 보고 있었다. 日本軍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日本에 對해 敵對感을 품은 民心에 反하는 行爲였으며, 結局 民心의 이반과 抵抗을 招來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開化黨 勢力은 少數에 不過했으며, 政權을 掌握한 後 權力을 繼續 維持해나갈 수 있는 基盤이 매우 脆弱했다. 이런 狀況을 認識한 金玉均 等은 于先 高宗의 權威를 利用하여 權力基盤을 造成하려 했지만, 高宗은 政變이 自身의 期待와 다르게 展開되자 등을 돌렸다. 高宗의 變心은 開化黨을 政治的으로 孤立시키고 請을 불러들이는 契機가 되었다.

開化黨이 政變의 目標로 삼았던 靑으로부터의 ‘獨立’와 自首自强을 위한 ‘開花’ 亦是 社會的 情緖와는 距離가 있었다. 頒布된 精靈 또한 政治權力의 掌握과 부국강병책 推進에 重點을 두고 있었으며, 當代의 國民的 情緖와 社會的 要求를 反映하는 目標 提示에 疏忽했다. 이는 가뜩이나 脆弱한 開化黨의 政治·社會的 基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으며, 政變이 失敗하는 重要한 原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