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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身이 經濟大統領이야” 大韓民國 未來指導 그린 김재익|新東亞

“當身이 經濟大統領이야” 大韓民國 未來指導 그린 김재익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5共和國 通信革命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1-2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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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全斗煥에게 眼目 傳授한 經濟 課外敎師

    • 經濟學徒와 工學徒의 意氣投合

    • 電子式 電話機 開發 意味 꿰뚫다

    • 3大 戰略 産業 : TDX·半導體·컴퓨터

    1981년 당시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왼쪽)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 현안을 설명하며 결재를 받고 있다. [동아DB]

    1981年 當時 김재익 大統領經濟首席祕書官(왼쪽)李 전두환 大統領에게 經濟 懸案을 說明하며 決裁를 받고 있다. [東亞DB]

    1980年代 三星이 始作한 半導體 事業은 以前까진 國內에 없던 分野이다 보니 部品 하나 들여오는 日부터 쉽지 않았다. 유귀훈 氏의 冊 ‘湖巖의 마지막 꿈’(2018)에는 半導體 事業 進出을 決定했던 當時 이병철 會長이 處한 狀況이 잘 整理돼 있다. 여기에는 當時 政府가 가진 半導體에 對한 認識이 잘 나타나 있다.
    “半導體를 하겠다고 해서 맘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政府를 說得하는 것도 問題. 그때까지 半導體 核心裝備와 機資材 大部分이 아예 關稅 分類表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項目에 包含시켜 엄청난 關稅를 물리는 일이 있었다. 例를 들어 마스크의 微細 패턴을 웨이퍼 表面에 戰死할 때 쓰는 마스크 얼라이너(mask aligner)라는 部品이 있는데 이걸 그냥 ‘一般 寫眞機’로 分類해 40% 輸入 關稅가 賦課되는 式이었다.

    細管으로 달려가 半導體 事業을 說明하고 事情도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結局 商工部 電子電氣工業國 職員들을 찾아가 說得했지만 關稅는 재무부 所管이라고 難處해했다. 財務部도 힘이 없었다. 關稅率 改正은 立法 事由로 國會 議決까지 거쳐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國會를 거치지 않고 關稅를 내릴 수 있는 唯一한 方法은 (中略) 限時的으로 關稅를 내리는 ‘割當 關稅’ 制度였는데 迂餘曲折 끝에 國務會議의 議決을 거쳐 마스크 얼라이너 等 核心 半導體 資料에 對해 割當 關稅率이 適用된다. 이를 始作으로 半導體 品目에 對한 關稅率이 낮아지고 複雜한 行政節次들도 簡素化되기 始作한다. 1次 設備資金으로 1500萬 달러의 借款 導入申請度 通過됐다.”

    官僚들이 保守的일 수밖에 없던 까닭

    이렇게 超스피드로 일이 進行된 것은 앞서도 紹介했지만 전두환 前 大統領의 强力한 意志 德分이었다.

    5共 政權은 半導體 事業에 對해 企業들의 컨소시엄을 만들 程度로 밀어 붙였지만, 官僚 사이에서는 意見이 紛紛했다. 實物 經濟를 責任지는 經濟企劃院과 재무부 見解는 保守的일 수밖에 없었다. 豫算은 制限돼 있는데 當時 經濟 規模나 能力에 비해 設備 投資家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産業을 志願했다가 亡해버리면 危險負擔이 너무 클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國內에서 半導體라고 하면 ‘허리띠를 말하는 것이냐’라는 말이 나올 程度였다. 卽 專門家는커녕 제대로 槪念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開發하려 해도 開發에 나설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렵게 開發에 成功한다 해도 製品 사이클이 너무 짧아 리스크가 큰 데다 施設 投資는 莫大하고 인프라는 不足했다. 事業을 해야 하는 理由보다 해서는 안 되는 理由가 더 많았다. 섣불리 事業을 承認했다가 企業들이 무너지면 國家 經濟가 휘청거릴 일이었다. 官僚들은 否定的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時代가 變하고 있었다. 마침 컬러 TV 許容으로 1980年代 初 半導體칩 輸入 物量이 急增했다. 半導體칩 國産化가 電子産業의 安定的인 成長을 위한 決定的 要素라는 點에 對해 알 만한 사람들은 首肯하고 있었다.

    이런 時代 變化를 읽어낸 湖巖은 果敢하게 會社의 命運을 걸고 事業 進出을 宣言했다. 한便 保守的이고 警戒心이 가득했던 官僚社會에서 變化의 흐름을 읽고 大韓民國의 未來指導를 그린 公職者들이 있었으니 代表的인 사람이 ‘김재익’이다.

    인터넷 强國 코리아 出發點

    이 대목에서 우리는 大韓民國 産業과 經濟史에서 꼭 記憶해야 할 이름 김재익을 만나게 된다. 專 前 大統領은 生前에 自身을 ‘經濟 大統領’이라고 여겼는데, 김재익이야말로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眞짜 經濟 大統領이었다. 김재익은 北韓의 蠻行인 아웅산 事態로 안타깝게 夭折했지만 그가 專 前 大統領에게 傳授한 經濟的 眼目이나 知識은 大統領의 머리에 繼續 살아 움직였다. 김재익은 5共 時代 經濟 政策 全般을 調整해나갔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김재익의 業績은 租稅政策에서부터 經濟政策에 이르기까지 뻗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그中 무엇보다 只今의 우리가 記憶하고 고마워할 部分은 通信革命이다. 世界 最高 인터넷 强國 코리아의 位相은 5共 政府가 했던 通信革命이 바탕이 됐다.

    흔히 指導者는 “머리는 빌리면 된다”고 한다. 問題는 그 머리를 알아볼 눈이 있어야 한다는 點이다. 大統領이라고 해서 모든 事案에 對해 알 수도 없고 專門的 知識을 가질 수도 없으며 一一이 代案을 提示할 수도 없다. 該當 分野를 가장 잘 알고 改革을 實踐할 사람을 제대로 쓰면 된다.

    獨裁를 했던 專 前 大統領이 經濟 分野에서 큰 業績을 남길 것은 김재익이라는 뛰어난 人材를 알아본 鑑識眼 德分이다. 5共 經濟 政策의 祕史 담은 力作 ‘經濟는 當身이 大統領이야’(이장규)에 나오는 대목이다.

    “80年代 通信 政策의 基本構想은 한 經濟學徒와 工學徒의 만남에서 始作된다. 1980年 9月 어느 날 김재익 靑瓦臺 經濟首席은 國保委 商工資源 分課위에서 顔面이 있던 汚名을 불러 저녁을 함께 했다. 京畿高等學校 先後輩 사이인 두 사람은 技術開發 分野에 關해 虛心坦懷한 論議를 始作, 電子·半導體·通信 等이 未來 産業을 主導할 것이며. 우리도 서둘러 始作해야 한다는 點에 곧장 意氣가 投合했다.

    汚名은 陸士 敎授 出身의 工學博士. 김재익 또한 이코노미스트이지만 元來는 工學徒를 志望했던 사람일 뿐 아니라 平素에도 웬만한 家電製品이나 自動車 故障은 스스로 修理할 程度로 이 分野에 關心이 깊었다.

    여기에 軍隊 時節부터 전두환 大統領의 補佐官 生活을 해왔던 또 한 사람의 工學博士 홍성원이 加勢한다. 이 세 사람이 靑瓦臺 祕書室에 모이면서 旣存 政府 部處 안의 어느 누구도 엄두를 못 내던 通信革命 作業을 벌여나가기 始作한다.”

    이장규에 따르면 全 前 大統領은 本來부터 通信 分野에 對한 關心이 많았다고 한다. 冊에 引用된 홍성원 氏 이야기를 들어 보자.

    “前 大統領은 工高 出身이었던 탓인지 科學技術 이야기만 나오면 더욱 말이 길어졌어요. 81年 新正 連休에 經濟 祕書官들을 처음으로 불러 모았는데 이때도 一般的인 經濟 政策 問題들은 제쳐 놓고 主로 軍隊 時節에 겪었던 不便한 通信網에 關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山에 올라가면 電話線과 電信柱로 온통 뒤덮여 보기 싫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改善할 수는 없을까, 冊床 위에 갖가지 電話機가 수두룩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簡單하게 한 臺로 解決하는 方案이 있을 텐데… 하는 式이었어요. 아무튼 專門 知識은 없지만 通信에 對한 一般的인 關心은 컸던 것으로 記憶됩니다.”

    2003년 10월 6일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20주기 추모 기념집’ 출판기념회에서 오명 당시 아주대 총장(전 부총리)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강영훈 전 국무총리 부부, 이순자 전 숙명여대 교수(김재익 전 수석의 부인),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 남덕우 전 국무총리(왼쪽부터) 등이 참석했다. [동아DB]

    2003年 10月 6日 서울 中區 장충동 新羅호텔 迎賓館에서 열린 ‘80年代 經濟改革과 김재익 首席-20周忌 追慕 記念집’ 出版記念會에서 汚名 當時 아주대 總長(前 副總理)李 記念辭를 하고 있다. 이날 行事에는 강영훈 前 國務總理 夫婦, 이순자 前 숙명여대 敎授(김재익 前 首席의 夫人), 전두환 前 大統領 夫婦, 남덕우 前 國務總理(왼쪽부터) 等이 參席했다. [東亞DB]

    電話機 한 臺 값이 집 한 채 값 하던 때

    5共 政府가 推進한 通信 革命에서 國民의 日常에 가장 劃期的이었던 變化는 電話機의 大衆化였다. 40餘 年 前 韓國에는 電話機가 없는 집이 수두룩했다. ‘1인 1電話’를 손에 들고 다니는 只今의 눈으로는 그런 時節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生硬한 風景이다. 이런 便利한 世上을 만든 뒤에는 숱한 사람의 勞苦와 獻身이 있었음을 되새길 必要가 있다. 汚名 前 副總理의 回顧다.

    “只今은 想像조차 못할 일이지만 80年 初까지만 해도 電話는 매우 貴한 物件이었습니다. 幼稚園이나 初等學校에서 先生님이 잘 사는 學生을 알아내는 方法은 ‘집에 電話機가 있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면 됐을 程度였으니까요.

    當時에는 靑色電話, 白色電話 制度란 게 있었는데 靑色電話는 電話局에 申請해서 받는 電話였고 白色電話는 個人이 사고팔 수 있는 電話機였습니다. 白色電話 權利는 臺當 無慮 250萬원이 넘었는데 웬만한 집 한 채 값이었습니다.

    電話 놓는 것도 優先順位가 있어서 1, 2等級은 主要機關, 敎授는 4等級, 一般 國民은 5等級이었습니다. 事情이 이렇다보니 國民들이 電話 한 臺 놓으려면 普通 1年씩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1980年 末 基準으로 電話 開通을 申請해놓고도 番號를 받지 못한 申請者가 60萬4000餘 名에 이를 程度였다는 記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電話 놓기가 어려웠을까. 가파른 經濟成長으로 通信需要가 暴增하고 있었는데 當時 電話機는 다이얼을 돌려 連結하는 機械式이다 보니 急增하는 通信 回線을 堪當할 수가 없었다. 機械式 電話機를 繼續 使用하는 한 通信亂은 永遠히 解決되기 힘들었다. 이를 미리 생각한 사람이 김재익이었다. 고승철·이완배가 쓴 ‘김재익 評傳’에 나오는 대목이다.

    “김재익은 1970年代 末 經濟企劃院 企劃局長이었다. (…) 한때 理工系 進學 꿈을 가졌고 美國에서 工夫하면서 科學技術 發展이 近代化의 捷徑이라는 確信을 품었던 그는 大部分 先進國들이 機械式 電話機를 抛棄하고 音聲 信號를 디지털로 바꿔 傳達하는 電子式 電話機를 使用하면서 通信積滯를 解消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機械式 電話機는 信號 傳達이 느리다는 點 外에 無線呼出이나 컴퓨터 通信 等과의 連結이 아예 不可能하다는 致命的인 短點이 있었다. 따라서 電子式 電話機를 開發하는 일이야말로 但只 通信 積滯를 解消하는 次元에 그치지 않고 通信 技術의 革新的인 發達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김재익은 電子式 電話機 開發이야말로 向後 다가올 韓國의 情報通信 時代를 위한 基本 인프라라는 點을 내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當時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젊은 經濟 官僚의 革新的 思考가 大韓民國의 運命을 결정지은 셈이다.

    旣得權 抵抗에 挫折한 김재익

    이렇게 해서 5共 政府 大統領經濟首席祕書官을 맡자마자 김재익이 뛰어든 일이 바로 前電子式(全電子式) 交換機 TDX 開發이었다. 事實 이 事業은 朴正熙 政權 末期에도 그의 손에 依해 推進됐지만 이내 坐礁하고 만다. 機械式 電話機 製造業體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交換機 壽命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무엇 때문에 새로운 施設을 導入해 豫算과 外貨를 浪費하느냐고 맞섰다. 甚至於 ‘김재익이 美國 CIA 要員’이라느니 ‘新規 通信事業에 參與할 外國 企業으로부터 賂物을 받았다’느니 하는 陰害를 加하기 始作했고 結局 김재익은 中央情報部(現 國家情報院) 調査까지 받지만 無嫌疑로 풀려나온다.

    김재익은 이에 屈하지 않고 遞信部 傘下에 한국통신硏究所를 新設(1977年)하는 等 通信革命을 이어가려 하지만 朴正熙 大統領이 갑자기 世上을 떠나면서 그의 꿈도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의 苦悶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美國 스탠퍼드 大學에서 經濟學 博士學位를 取得하고 歸國해 5年 가까이 別定職인 經濟企劃院 企劃局長 자리에 있으면서 甚한 挫折을 겪어온 김재익은 차라리 官僚 生活을 淸算하기로 決心했다. 自身의 斬新한 構想과 哲學을 現實經濟에 실현시키기는커녕, 官僚 社會의 두꺼운 壁에 부딪혀 숱한 試鍊과 挫折을 견디다 못해 硏究 生活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던 次였다.

    經濟企劃院 안에서도 누구하나 그의 處地를 理解하고 積極的으로 감싸주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論理力과 純粹한 人品을 높게 評價하면서도 政策 決定 過程에서는 恒常 따돌렸다. 特有의 破格的인 發想이나 改革性向은 그를 돈키호테 같은 人物로 몰고 갔다.

    한마디로 그는 職業 官僚 社會에서는 어디까지나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김재익은 大學 同期同窓이기도 한 서석준 次官에게 付託해 KDI(한국개발연구원)行을 決心하기에 이른다. 事實 서석준조차 김재익에 對해 經濟 官僚로서의 能力을 그다지 肯定的으로 評價하지 않았다. 그저 ‘失政모르는 白面書生’ 程度였다.”(책 ‘經濟는 當身이 大統領이야’ 中)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世上을 보는 눈을 가졌기에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던 외로운 天才의 運命은 全斗煥 政權이 登場하면서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當身이 經濟大統領이야”

    전두환은 1980年 5月 末 國保委 常任委員長이 되자마자 김재익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自宅으로 불러 每日 아침 2時間씩 經濟 課外 工夫를 始作했다. 大統領에 就任하자 그를 靑瓦臺 經濟首席에 임명한다.

    經濟首席을 提議받은 김재익이 專 前 大統領에게 “제가 드리는 助言대로 政策을 推進하시면 엄청난 抵抗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大統領이 “여러 말 할 것 없어. 經濟는 當身이 大統領이야”라고 答했다는 이야기는 有名하다.

    TDX 開發은 1982年부터 1986年까지 5個年 計劃으로 240億 원이라는 巨額의 硏究開發費가 投入된, 그때까지는 없던 檀君 以來 最大 國策事業이었다. 計劃이 樹立될 當時만 해도 不可能하고 無謀한 挑戰이라는 게 關聯 엔지니어들의 一般的인 見解였다. 하기야 컬러TV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時節이었다. TDX는 컬러TV와는 完全히 格이 다른, 當時만 해도 先進 6個國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던 高難度 尖端 電子裝備였다.

    大型 國策事業이라고 해봐야 軍(軍) 裝備開發을 위한 프로젝트를 除外하면 10億 원 規模 안팎 프로젝트도 구경하기 힘들 때였다. 初有의 大型 國策事業을 두고 世上은 非難 一色이었다. 印度도, 브라질도 失敗한 事業에 왜 뛰어드느냐는 거였다. 開發을 主導했던 汚名 前 副總理 回顧다.

    “事實 硏究開發費로 들어간 240億 원은 先進國에 비하면 10分의 1에 不過한 水準이었습니다. 設使 成功하지 못한다 해도 技術蓄積에 따른 波及效果를 생각하면 損害 볼 것이 없다는 計算이었지요. 開發過程에서 얻은 노하우로 交換機 輸入하는 값을 깎으면 投資한 것만큼은 건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經濟企劃院을 비롯해 모든 部署가 反對했지만 唯一하게 支援한 곳이 靑瓦臺였습니다. 김재익 首席은 그 모든 反對를 물리치며 ‘運을 걸고 挑戰해보자’며 全幅的인 應援과 支持를 보내주었습니다.”

    韓國은 結局 4年 만에 TDX 國産化에 成功해 世界를 놀라게 한다. 1986年 國産 TDX-1을 商用化하는 데 成功하고 5年 뒤인 1991年에는 大都市龍仁 10萬回線 TDX-10을 連續 開發한다. 마침내 1997年 11月 TDX 數가 1000萬 回線을 넘어서면서 申請하면 1年씩 걸리던 電話 積滯는 午前에 申請하면 午後에 바로 놓이는 時代로 바뀌게 된다.

    TDX 國産化가 낳은 遺産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1990년 3월 국산전전자교환기(TDX)-1의 200만 회선 돌파 기념식을 열고 있다. KT는 5공화국 시절인 1986년 TDX-1를 국내 최초로 개통했다. [KT 제공]

    한국전기통신공사(現 KT)가 1990年 3月 國産全電子交換機(TDX)-1의 200萬 回線 突破 記念式을 열고 있다. KT는 5共和國 時節인 1986年 TDX-1를 國內 最初로 開通했다. [KT 提供]

    韓國은 이 TDX 國産化 德澤에 CDMA 交換機 및 携帶 電話機를 開發할 수 있었다. 이는 以後 携帶 인터넷(wibro), 디지털 멀티미디어 放送(DMA), 인터넷 TV(IPTV) 成功의 발板이 됐다.

    5共 政府는 TDX 開發과 함께 半導體, 컴퓨터를 3大 戰略 産業으로 定해 育成했다. 1981年에는 電氣通信事業法을 고쳐 모든 通信事業者는 輸入의 3% 以上을 義務的으로 硏究開發費에 쓰도록 해 每年 700億~800億 원 以上이 投資될 수 있도록 했다. 5年 뒤인 1986年 國內 電子 部門 生産 및 輸出은 2.5倍 늘고 電子産業 生産이 機械를 앞질러 最大 主力産業으로 자리 잡게 된다.

    通信 規制도 大幅 없애 政府 主導 事業에 民間의 競爭 論理를 導入했다. 有線 回線조차 積滯를 빚는 때에 ‘데이터 通信專用 回線도 重要하다’며 ‘데이터 通信 育成 政策’도 펼쳤다. 이렇게 해서 誕生한 곳이 한국전기통신공사(現 KT)와 한국데이터통신이다.

    모든 製造業 分野에서 우리와는 比較할 수 없을 程度로 앞섰던 日本은 NTT를 中心으로 한 政府 主導 通信事業 體制를 維持했다가 競爭에서 뒤쳐졌다. 이를 考慮하면 5共和國의 通信 革命은 韓國이 通信 先進國으로 跳躍하는 발板인 인터넷 環境을 마련해줬다는 點에서 아무리 稱讚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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