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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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趙甲濟
出生 1945年 10月 24日 ( 1945-10-24 ) (78歲)
日本 사이타마 縣 사이타마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學歷 釜山水産大 中退
職業 言論人
作家
政治人
社會運動家
文人
經營人
子女 2女
宗敎 改新敎 ( 藝場孤辰 )
正當 無所屬
웹사이트 조갑제닷컴
트위터
조갑제TV
公式 유튜브 페이지

조갑제 (趙甲濟, 1945年 10月 24日 ~)는 大韓民國의 言論人이다. 그는 日本 사이타마 縣 사이타마 에서 出生하였고 지난날 한때 美 軍政 朝鮮 慶尙北道 靑松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後 美 軍政 朝鮮 慶尙南道 釜山 에서 成長하였다.

履歷 [ 編輯 ]

大韓民國 空軍管制甁으로 服務한 그는 朝鮮日報 월간조선 編輯長 , 월간조선 社長 等을 지냈다. 그는 解放을 맞이한지 두 달 지난 1945年 10月 24日, 日本 사이타마縣 에서 出生하였으며 父母의 故鄕인 慶尙北道 靑松郡 으로 곧 돌아와서 初等學校 까지 成長하였다. 그토록 지난날 한때 慶尙北道 靑松郡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以後 家庭 形便 때문에 慶尙南道 釜山市 로 移住하였고, 釜山高等學校 를 卒業했다. 그 後 釜山水産大學 을 中退했다. [1]

1971年 釜山 국제신보 ( 國際新聞 의 前身)에 入社하여 記者 生活을 始作했고, 1981年 上京하여 月刊 마당 에 創刊 멤버로 入社했고 마당의 2代 編輯長을 지낸 後 1983年 부터 월간조선 記者가 된 以來 월간조선 , 朝鮮日報 의 記者로 活動하였다. 過去 軍事獨裁 政權 時節에 體制批判的 言論人으로 名聲을 떨쳤으나 1988年 서울 올림픽 을 起點으로 心境에 變化를 일으켜 1990年代 以後로는 保守主義 性向의 論客으로 活動하고 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1945年 10月 24日 日本 사이타마縣 에서 2男 4女의 長男으로 태어났으나 1946年 父母를 따라 故鄕 慶尙北道 靑松郡 安德面으로 돌아와 初等學校까지 成長하였다. 그 後 釜山으로 移住하여 釜山高等學校 에 卒業한 그는 高校 在學 時節 美國과 日本의 프로野球 中繼放送에 耽溺했다. 市場에서 救한 短波라디오 로 하루 4~6時間씩 美國과 日本의 프로野球 中繼를 들으며 英語와 日語를 익혔다. 그의 外國語 能力은 記者 生活 當時 取材 領域을 넓히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 釜山水産大學 에 入學하였지만 軍 服務 後 復學을 抛棄하게 된다.

言論人 活動 [ 編輯 ]

記者 生活 初盤 [ 編輯 ]

1971年 釜山 국제신보 ( 國際新聞 의 前身)의 入社(入社) 試驗에 1位로 合格하며 記者生活을 始作하였다. [1] 1974年 重金屬 汚染 實態를 取材해 記事를 連載했는데, 이 記事로 入社 4年次인 滿 29歲에 韓國祈子床 (7回)을 受賞하기도 했다. 조갑제는 當時 朴正熙 를 批判한 글을 自身 만큼 많이 쓴 사람이 없다며, 社會部 記者로서 權力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拷問 받는 사람들, 抑鬱한 사람들을 中心으로 쫓아다니면서 記事를 썼다. [2] 이 過程에서 朴正熙 政府 를 批判하다 두 次例 强制解職 當했다. [3] 또한, 1980年 光州民主化運動 取材를 自請했던 것이 主要 動機로 新軍部 에 依해 解職됐다. [1] 特히 이 光州民主化運動 取材는 1985年 兩大 月刊誌에 報道를 내놓기 始作하면서 이 報道는 큰 反響을 불러일으켜 노태우 政府 가 들어선 다음인 1988年 , 國會 에서 光州特委와 5共特委가 열리게 한 基礎資料가 되었다. [4]

1981年 上京하여 月刊 마당 에 創刊 멤버로 入社했고 르포 技士 分野에서 일했다. 當時 그의 代表的인 記事가 ‘釜山 김근하(金根夏)君 誘拐 殺人 事件의 內幕-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는 記事였다. 마당 의 2代 編輯長을 지낸 後 1983年 부터 월간조선 에서 일했다.

朝鮮日報 活動 [ 編輯 ]

조선일보에 入社한 以來 主로 探査報道 方面에서 活動했는데, 그 過程에서 10·26 事態와 朴正熙 前 大統領의 죽음에 關해 集中的으로 報道하게 된다. 그가 朴正熙 前 大統領 硏究에 平生 매달리게 된 것도 10·26 取材가 그의 政治的 感性을 刺戟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갑제가 朴正熙 前 大統領을 높이 評價하는 것은 그의 民族主義 敵 ‘祖國 近代化’ 論理에 깊이 穿鑿하고 이에 傾倒됐기 때문이라고 보는 視角이 있다. 조갑제에 이어 月刊 마당의 編輯長이 되었으며 後日 月刊朝鮮의 編輯委員을 지낸 정순태 氏는, 조갑제가 朴正熙에 對해 反對하다가 따뜻한 視線을 가지게 된 契機에 對해 다음과 같이 說明했다.

記者가 된 直後인 1971年 4月 第7代 大統領選擧를 해보곤 維新 내내 單 한 番도 大統領選擧를 해보지 못했다. 遺臣이 宣布됐던 1970年代의 朴正熙는 너무 剛했기에 젊은 우리들은 心情的으로도 그를 拒否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解職까지 됐으니 그를 좋아할 수 없었다. 조갑제度 朴 政權에 對해서는 매우 剛하게 抵抗했다. 그런데 1980年代 中盤 3共 祕話를 追跡하면서 朴正熙는 日本의 一流敎育, 美國의 將校敎育을 받은 實用的인 리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갑제는 ‘마당’에 있을 때 이미 朴正熙의 業績은 認定해야 한다는 意見을 보였다. 그때 우리는 讀者가 朴正熙 時代의 祕話를 밝히는 것은 좋아하지만, ‘朴正熙는 女子를 좋아했다’는 式으로 깎아내리면 싫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4]

1987年 6月 에는 民主化 運動의 先鋒에 나서기도 했다. [5] 1991年 부터 月刊朝鮮의 編輯長을 歷任하면서 北韓과 和解 政策을 폈던 金大中 · 盧武鉉 政府를 批判했고, 朴正熙 再評價에 힘써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라는 電氣를 朝鮮日報 에 連載하기도 했다. 2001年 月刊朝鮮의 獨立 法人化에 따라 編輯長 兼 代表理事로 在任했으나, 2004年에는 編輯長, 2005年에는 代表理事 자리에서 各各 물러났다.

2000年代 以後 [ 編輯 ]

1998年 부터는 더욱더 自由民主主義의 原則을 確固히 한, 保守 性向 論客으로 活動하며 金大中 , 盧武鉉 政府와 民族 解放 系列 政治人, 主體 사상파(NL) 와 民衆 民主主義派(PD) 와, 그들이 만든 反體制 市民團體를 批判하는 活動을 했다.

1999年 부터는 運營해온 個人 홈페이지와 出版社 조갑제닷컴 으로 活動 領域을 옮겨, 이 두 媒體를 통해 數舊左翼 人士 및 左派 政府, 설익은 右派 政府와 얼치기 補身機會主義 右翼 모두를 批判하고 있다. 現在는 講演을 통해 自身의 時局觀과 理念을 傳播하고 있으며, 政治 評論 사이트 조갑제닷컴 에 自身과 理性的이고 合理的인 世界觀을 지닌 人士, 讀者들의 글을 選別해서 칼럼 形式으로 싣고 있다.

年表 [ 編輯 ]

政治·社會에 關한 見解 [ 編輯 ]

民主化 運動에 對한 立場 [ 編輯 ]

言論 에서 조갑제는 民主化 運動 自體를 左翼 이라고 批判하면 안 된다고 主張했다. 그는 4·19 革命 , 6·3 事態 , 釜馬抗爭 , 光州民主化運動 , 1987年 6月 抗爭 을 根本的으로 反共 性向의 反獨裁民主化運動이라고 規定하며, 이 運動 속에 少數의 左翼 이 끼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大勢를 이루지 못했고 主導權도 잡지 못했다고 主張한다. [6]

여기서 조갑제가 말하는 反共民主化運動은 滅共北進統一을 希望하는 軍事獨裁 極右 勢力과 正反對로, 大韓民國 南北分斷 의 長期化로 인해 마치 섬나라 처럼 된 것을 認定하고 「"大韓民國과 北韓"이라는 線을 긋자」는 主張을 하는 것을 말한다.

北韓 5.18 介入 論難 反駁 [ 編輯 ]

2013年 一部 綜編이 脫北者의 發言을 引用해 光州民主化運動에 北韓이 介入했다고 報道하자 이를 反駁하는 글을 個人 홈페이지에 싣기도 했다. [7]

對北(對北) 性向에 對한 立場 [ 編輯 ]

조갑제는 對北(對北)面에서 原則的인 態度를 보이며 金正日 에는 '民族反逆者', '苦難의 行軍 時期300萬 同胞들을 굶겨죽인 國籍(國賊)'이라는 表現을 主로 使用해 評價한다. 그는 또 2000年 시드니 夏季 올림픽 南北韓 選手團 同時立場에 對해서도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은 各各 太極旗와 人共旗를 들고 따로 入場했어야 한다며 否定的인 視角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最近엔 北韓 核 開發을 '自主國防' 次元에서 解釋하기도 했다. [8]

狂牛病 論難에서의 立場 [ 編輯 ]

뉴라이트 가 主催한 狂牛病煽動센터 KBS, MBC 糾彈 記者會見 參與하고, 狂牛病 쇠고기 波紋에 對해서 “ MBC KBS 의 煽動報道에 넘어가면 안 된다. 美國産 쇠고기는 絶對的으로 安全하다” 라고 立場을 밝혔다. 또 “李明博 大統領이 國民에게 直接 ´MBC와 KBS의 煽動報道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美國産 쇠고기가 安全하다'는 것을 確實히 얘기해줬어야 했다”며 李 大統領의 記者會見을 批判했다. [9] 한便, 조갑제닷컴 에서는 “狂牛病이 美國에서 發生해도 繼續 輸入해야 한다는 問題에 對해 對策, 說明 없이 無條件 安全하다 하니 걱정할 수밖에 없다”며 “國民이 걱정하면 바로잡는 게 마땅한 政府의 姿勢다. 國民이 納得하고 安心할 수 있는 對策을 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主張했다. [10]

단박인터뷰에서의 批評 [ 編輯 ]

한국방송 金映宣 PD의 단박 인터뷰 2008年 6月 18日 에 出演해 自身을 進步 論客이라고 主張함과 同時에 촛불示威는 靑少年이 밤에 參與해서는 안 된다고 主張하면서 美國産 쇠고기는 世界에서 가장 最高의 安全한 品質이라고 말했다. 李明博 大統領의 美國産소고기 對國民謝過에 對해 조갑제는 “眞實을 밝히지 못하고 거짓말과 暴力에 降伏했기 때문에 이런 事態가 빚어졌다고 했다”라고 말했고, 支持率이 떨어진 理由는 “理念이 없는 實用主義 路線을 發表하면서 所信을 밝히지 못해 保守層의 支持가 떨어진 것이다. 또한 初期內閣이 失敗한 理由는 韓半島는 理念 戰爭이 있는 곳인데도 不拘하고 이 理念 戰爭터에서 理念을 버리고 그 路線에 맞는 고분고분하고 經驗없는 敎授 中心의 內閣으로 싸울 줄 모르는 사람들을 모았기 때문”이라고 指摘했다. [5]

歷史 評論 [ 編輯 ]

新羅에 對한 見解 [ 編輯 ]

문무왕 이 自身의 祖上을 김일제 라 稱하여 事大慕華的이라는 批判을 받자 조갑제는 異議를 提起하여 文武王이 慕華思想에 젖어서 族譜를 造作하려고 했다면 왜 何必 中國 한족이 싫어하는, 더구나 漢나라에 反逆했다가 屠戮된 흉노족 김일제의 後孫을 自處했겠느냐며 批判에 對한 反論을 提起하기도 했다. [11]

淵蓋蘇文에 對한 立場 [ 編輯 ]

2008年 2月 조갑제는 연개소문 北韓 金正日 과 비슷하다고 評價하였다. 그 根據로 두 人物 모두 暴惡하다, 外交 에 失敗해 敵國(淵蓋蘇文은 唐나라 , 金正日은 美國 )의 怨讐가 됐다, 아들들을 잘못 키웠다고 指摘하였다. [12] 또한 조갑제는 高句麗 滅亡의 決定的 原因을 提供했다고 보았다. [13] 그를 失敗한 歷史 人物이라 評價하였으며 그를 드라마의 主人公으로 만든 것은 삐뚤어진 歷史觀의 發露라고 批判하였다. [12] 조갑제는 高句麗 推仰 雰圍氣 속에서 大體로 過大評價되고 美化되었지 貶下된 적은 거의 없다고 하였으며, 연개소문 肯定論에 對해 淵蓋蘇文을 通해서 新羅의 三國統一 을 貶下하려는 意圖를 지닌다며 批判하였다. [13] 조갑제는 또한 自身의 主張의 根據로 서강대학교 敎授 이종욱(李鍾旭)의 글을 引用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淵蓋蘇文의 暴惡함은 高句麗 百姓들의 마음이 王國을 떠나도록 했다, 執權過程에서 100餘名의 大臣들을 죽였다. 이들은 王政을 擔當하던 勢力이었다, 쿠데타 에 反對한 地方勢力을 掌握하지 못했다. 따라서 羅唐 聯合軍이 쳐들어왔을 때 國力을 總動員할 수가 없었다. 黨과 싸우려면 國內의 團合을 圖謀해야 했는데 分裂을 助長했다, 安市城에서 싸워 이긴 星州는 淵蓋蘇文에 反對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淵蓋蘇文의 도움 없이 唐나라軍을 무찔렀다, 淵蓋蘇文은 唐나라에 對한 두려움을 몰랐다며 批判的으로 評價하였다. [13]

歷代 大統領에 對한 評價 [ 編輯 ]

그는 朴正熙를 歷代 最高의 大統領, 김영삼을 最惡의 大統領으로 各各 꼽는다. 김영삼은 只今의 左派를 키워준 左派의 宿主(宿主)라고 看做했다. 右派이면서 左派가 活躍할 수 있도록 한 失敗한 大統領이라고 評價했다. [1] 민주당系 政權을 親北左派勢力이라고 評價했다. “朴正熙는 毛澤東 軍隊와 싸웠고 비록 滿洲國 軍人이었지만 恒常 祖國의 獨立을 생각했고 民族精神이 剛했다는 證言이 많다”라며 朴正熙가 親日派가 아님을 主張하기도 했다. 하지만 血書, 左翼前歷, 女子關係 等 朴正熙의 否定的인 部分은 大部分은 自身이 發掘했다며 朴正熙를 美化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썼다고 主張했다. ‘南北頂上會談’이라 하지 않고 ‘盧武鉉-김정일 會談’이라 하기도 했다. [14] [15] 金大中 에 對해서는 民主化를 위해 鬪爭한 것은 認定하나, 6.15 宣言 以後에 憲法과 背馳되는 方向으로 가버렸다며 6.15 宣言은 萬惡의 根源이라고 主張였다. [2]

親日 淸算 問題 關聯 論難에 對한 立場 [ 編輯 ]

2009年 民族問題硏究所 에서 發刊한 《 친일인명사전 》과 關聯해 ‘親日派보다 親北派가 더 나쁘다’라는 論旨의 글을 올리며, ‘當時에 親日은 生存의 手段이었고 親日派들은 日帝가 이길 것이란 잘못된 情報 때문에 親日을 한 것이다’라는 主張을 했다. [16]

조갑제는 조갑제닷컴에 '親日派와 親北派 比較'라는 글을 올리고, "日帝强占期에 韓國人의 選擇은 抗日 獨立 運動하여 죽거나 監獄에 갈 것인가 아니면 順應하여 살면서 實力을 길러 獨立準備를 할 것인가의 兩者擇一이었다. 祖國이 없는 狀態에서 獨立運動에 積極的이지 못했다고 모두를 親日派로 모는 것은 不合理하며, 大部分 人事의 自發的이거나 他意에 依해서 이거나 日帝에 協力한 때가 40年 以後 林道 勘案해야 함을 말했다."

이를 모든 親日派를 赦免해야한다는 어떤 宣言으로 듣는다면 그는 理解力이 많이 不足한 것이다. 解放 後 70年, 光復 後 67年이 흘렀다. 살아남은 親日派(不日派)는 거의 없으나 4~586運動圈이 旣成世代가 된 以後로 親日打倒 몰이는 6~70年代의 빨갱이 몰이 만큼이나 强力하다. 敵對하고 살아가는 것이 不可能한 日本이라면 日本을 더 잘 理解하고 日本을 더 잘 利用하자는 龍일론(用日論)까지 親日로 罵倒하는 全體主義가 橫行한다. 그것을 꼬집은 것이다.

金九는 歸國 後 말했다. "살아남은 사람 모두가 罪人이다"라고. 張俊河는 그의 글에서 金九가 歸國 後 머물렀던 京橋莊(京橋莊)李 親日派 이창학이 寄附한 곳이었음을 말했다. 프랑스는 占領期間이 짧았지만 우리는 한 世代 以上을 當했다.

우리民族끼리 에 對한 批判 [ 編輯 ]

2019年에 對南宣傳媒體인 우리民族끼리에서 全光焄 牧師와 金文洙 前知事에 對한 批判을 紹介하는 글을 조갑제닷컴 에 실으며 北韓이 南韓의 一擧手一投足을 訓手한다고 批判하였다. [1]

기타 發言 [ 編輯 ]

  • 2009年 12月 日本 右翼 言論 <산케이 新聞>의 구로다 가쓰히로 記者가 大韓民國의 비빔밥을 '羊頭狗肉'이라고 卑下한 發言에 對해 批判이 거세지던 가운데 구로다와 個人的으로 親分이 있던 조갑제가 "飮食店 主人이 손님으로부터 指摘을 當하면 '앞으로 더 잘 만들겠습니다'라는 모습을 보여야지 '싫으면 먹지 마!'라고 火를 낸다면 누가 그 飮食店을 다시 찾겠는가?"라며 구로다의 發言을 감싸는 主張을 하였다. [17]

기타 [ 編輯 ]

韓國 의 社會學者이자 民族解放系列 運動家인 강정구 (姜禎求)와 釜山高等學校 同門인 것이 알려져 話題가 되기도 했다. [18] [19]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1970年代 , 1980年代 朝鮮日報 記者 在職時節에 조갑제는 理念을 떠나서 記者의 模範을 보여주었던 代表的인 有能한 記者로 높은 評價를 받았다. [20] 初期에는 1970年代 當時 아무도 關心없던 環境問題를 深層取材하여 有名해졌다. 1980年 光州 民主化 抗爭 때 休暇를 내고 現地에 潛入取材를 했다가 强制로 解職당하는 受侮를 겪기도 했다. [21] 이러한 點에서 조갑제는 軍事政府 時節大 記者로서의 評價는 높은 評價를 받았으며, 特히 그의 探問取材나 深層取材 方法은 只今까지도 言論人으로서의 龜鑑을 받고있다.

노무현 政府의 이병완 前 大統領 祕書室長은 2007年 大選의 主役으로 조갑제와 서정갑 을 꼽았다. 그는 "2007年 勝利에 滿足하지 않고 如前히 在野에 머물며 100年 大計의 꿈을 삭이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眞正한 勝負師"라며 "世界觀, 人生觀, 價値觀을 떠나 그들을 경외롭게 볼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22]

否定的 評價 [ 編輯 ]

  • 1990年代 中盤 以後 所謂 極左 論客들에게 많은 批判의 對象이 되었다. 例를 들어, 陳重權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題目을 패러디한 冊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를 통해 그를 ‘極右 파시스트 ’라고 批判하기도 했다.
  • 1993年 金大中 과의 인터뷰 當時 執拗하게 政界隱退를 强調하는 質問을 퍼부었는데, 《김대중 죽이기》를 쓴 康俊晩 은 “보기 憫惘하다”고 批判하였다. [23]

受賞 經歷 [ 編輯 ]

  • 1974年 第7回 韓國祈子床(韓國記者協會)-重金屬 汚染의 追跡
  • 1990年 한국잡지협회 制定 雜誌記者賞
  • 1991年 第4回 아시아-太平洋上 特別賞( 마이니치 新聞 主管)
  • 1994年 寬勳클럽言論賞-北韓人權問題 報道

主要 著書 [ 編輯 ]

  • 《拷問과 造作의 技術者들》. 한길사. 1987年. ISBN 2007898000400
  • 《거짓의 MBC를 끄자》, 조갑제닷컴 , 2008, ISBN   9788992421393
  • 《空輸部隊의 光州事態》, 조갑제닷컴, 2007, ISBN   9788992421300 (再出刊)
  • 《李明博 革命》, 조갑제닷컴, 2007, ISBN   9788992421287
  • 《朴正熙 前期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전 13卷), 조갑제닷컴, 2006, ISBN   8995772166 (再出刊 合本)
  • 《김대중의 正體》, 조갑제닷컴, 2006, ISBN   8995772107 (再出刊)
  • 《김현희의 하나님》, 考試繫辭, 1990, ISBN 2000383000299
  • 《유고》(有故), 한길사 , 1987, ISBN 2007898004248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人物硏究]前 月刊朝鮮 代表 조갑제 《뉴스메이커》2008-06-26 11:40
  2. TvN, 백지연의 피플INSIDE 조갑제便, 2009年 12月 11日
  3. 反骨記者에서 極右論客으로 ‘批判의 펜’ 조갑제 2008-04-10
  4. ‘救國의 論客’vs‘安保商業主義子’ 조갑제의 祕密 新東亞, 2006.08.01 通卷 563 號
  5. “단박인터뷰 조갑제 發言” . 2010年 5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7月 30日에 確認함 .  
  6. 조갑제 "極盛右派, 民主化運動을 左翼으로 몰면 안돼" 東亞日報, 2007-03-16
  7. “조갑제닷컴, "大隊規模 北韓軍의 光州介入" 主張은 믿을 수 없다!” . 2015年 9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5月 20日에 確認함 .  
  8. 조갑제 "外國軍 駐屯은 事大主義... 奴隸根性 벗어나야" 오마이뉴스 2013年 6月 10日 記事
  9. "촛불 利用한 무시무시한 政府 顚覆... 文件 있다"
  10. 조갑제發言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오마이뉴스 2013年 6月 10日 記事
  11. 韓國 7大 不可思議(이종호 지음, 위즈덤하우스, 2007) 109페이지
  12. 民族史 2代 快擧, 新羅統一·大韓民國 建國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프리존뉴스 2008年 2月 24日子
  13. 資料集: 亡國的 歷史觀-新羅죽이기에 答한다 Archived 2015年 10月 25日 - 웨이백 머신 - 조갑제
  14. 조갑제 “朴正熙가 親日派면 나는 賣國奴”
  15. "大統領 軍事分界線 넘을 때 矯導所 담牆 넘는다 느껴"
  16. 조갑제, “親日은 基本的으로 生存의 手段” Archived 2012年 1月 26日 - 웨이백 머신 , 《傾向닷컴》, 2009.11.9.
  17. 김혜영 記者 (2009年 12月 30日). “조갑제, '비빔밥 妄言' 구로다 積極 擁護” . 뷰스앤뉴스. 2010年 1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2月 30日에 確認함 .  
  18. 강정구-조갑제, 알고보니 釜山高 同期同窓 Archived 2005年 12月 17日 - 웨이백 머신 東亞日報 2005年 10月 14日子 記事
  19. 極과 極은 통한다? 조갑제-강정구 알고보니 高校 同窓 中央日報 2005年 10月 24日子 記事
  20. ““大韓民國에 庶民은 없어, 國家 위하는 國民만 있어요”” . 2012年 1月 2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5月 2日에 確認함 .  
  21. 서울의 鄕土인들-(16)언론계
  22. 2007年 大選 勝利의 主役은 量甲(兩甲)이다. Archived 2011年 10月 25日 - 웨이백 머신 朝鮮日報
  23. 주현, 朴 (09.08.23). “조갑제, 이제 그만 '詛呪의 굿판'을 거두어라” . 오마이뉴스 . 2009年 8月 25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