鮮于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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鮮于 휘
鮮于 輝
大韓民國 國土統一院 拷問
任期 1975年 2月 8日 ~ 1978年 4月 30日
大統領 朴正熙
總理 金鍾泌 國務總理
최규하 國務總理 署理
최규하 國務總理
長官 신도성 國土統一院 長官
유상근 國土統一院 長官
李龍熙 國土統一院 長官
次官 유상근 國土統一院 次官
동홍욱 國土統一院 次官
동훈 國土統一院 次官

이름
別名 號(號)는 目算(牧山)
兒名(兒名) 鮮于 煇
身上情報
出生日 1922年 1月 3日 ( 1922-01-03 )
出生地 日帝强占期 平安北道 定州郡 정주읍 남산리
死亡日 1986年 6月 12日 ( 1986-06-12 ) (64歲)
死亡地 大韓民國 釜山 東區 초량동 49-6 歲戶長 旅館에서 高血壓으로 인한 腦溢血로 兵士
學歷 1956年 國防大學校 行政學社 1期
經歷 小說家 , 作家 , 軍人 , 是認
言論人 , 文學評論家 , 時事評論家
韓獨黨 文化藝術行政特報委員(1962年)
新民黨 特任囑託委員(1969年)
國民黨 最高委員 兼 顧問(1981年)
放送審議委員會 委員長
正當 無所屬
本館 太原 (太原)
父母 선우億(簿)
兄弟姊妹 누나 4名
男동생 2名
누이同生 2名
鮮于 年 (둘째 男동생)
子女 膝下 1男 3女
(첫째딸 선우숙희
둘째딸 선우숙英
셋째딸 선우숙임
외아들 선우정)
親姻戚 이세화(첫째사위)
이민환(둘째사위)
선우영(親조카딸)
선우재덕 (堂姪)
軍事 經歷
服務 大韓民國 陸軍
服務期間 1948年 ~ 1959年
勤務 陸軍本部
最終階級 大韓民國 陸軍 大領
指揮 陸軍本部 政訓差減
陸軍本部 政訓參謀部 政訓과 誇張
主要 參戰 韓國 戰爭
賞勳 東人文學賞

鮮于 휘 ( 鮮于輝 , 兒名(兒名) 鮮于煇 , 1922年 1月 3日 ~ 1986年 6月 12日 )는 大韓民國 言論人 利子 小說家 ·作家· 反共主義 運動家였고 軍人 ( 豫備役 大韓民國 陸軍 大領 )이었다. 平安北道 井州 出身이며, 本貫은 太原 (太原)이다.

박관수 等과 함께 1960~1970年代 反共 右翼 市民社會團體 活動을 이끌었다. 1986年 6月 12日 KBS 한국방송공사 의 6.25 特輯 프로그램 〈살아있는 戰場手帖〉 錄畫 撮影 中, 過勞 高血壓 으로 인한 腦溢血 부산직할시 에서 他界했다.

一生 [ 編輯 ]

경성사범학교를 卒業하고 敎育者로 있다가 1946年 朝鮮日報 社會部 記者로 入社하면서 言論 活動을 始作하였다. 仁川中學校 敎師를 거쳐 1949年 旅順事件 以後 大韓民國 陸軍 에 政訓將校로 入隊하여, 1959年 陸軍 大領 으로 豫編하였다. 韓國 戰爭 當時에는 特殊部隊員을 自願, 前震群團 遊擊隊長으로 活動하였다. 1958年 서울新聞 論說委員으로 言論에 復歸, 1959年 韓國日報 論說委員, 1961年 朝鮮日報 에 入社하여 1986年 에 停年 退任하기까지 朝鮮日報 論說委員, 編輯局長, 主筆, 論說顧問, 主筆 等으로 活動했다. 1962年 1965年 朝鮮日報 論說委員, 1964年 1967年 朝鮮日報 의 編輯局長을 歷任했다. 1970年 朝鮮日報 企劃審議室長을 거쳐 71年 朝鮮日報 社의 理事가 되어 1986年 까지 朝鮮日報 社의 理事로 經營에 參與했고, 1971年부터 1980年까지 朝鮮日報 의 主筆로 活動했다. 現職 新聞 論說委員, 主筆로 拘束되거나 여러 番 中央情報部, 檢察 等에 召喚되기도 하였다.

小說 作品으로는 1955年 短篇小說 '鬼神'을 發表하면서 文壇에 登壇하였고, 1957年에 發表한 '불꽃'은 '文學藝術' 新人特選에 當選되어 第2回 東人文學賞을 受賞하였다. 1975年 國土統一院 拷問, 1983年 2月 韓國 藝術院 小說部門 會員, 1985年 3月 30日 韓國放送審議委員會 委員長이 되었다. 1986年 6月 12日 한국방송공사(KBS) 6·25 特輯劇 〈살아있는 戰場手帖〉 錄畫撮影 中 過勞와 高血壓의 合倂症으로 死亡하였다. 浪漫主義, 感性主義的 作品이 流行하던 思潮와는 달리 現實的인 文體와 素材를 主로 活用했다. 感性, 浪漫主義的인 作家, 言論人으로 活動하다가 漸次 超現實主義的인 思想家로 變貌해갔다.

生涯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數學科 靑年期 [ 編輯 ]

鮮于煇는 1922年 1月 3日 平安北道 定州郡 정주읍 남산동 325番地에서 아버지 선우億의 아들로 出生하였다. 慰勞 4名의 누이가 있었으나 누나 둘은 어려서 죽었고, 그가 태어난 뒤 그의 아래로 2名의 男동생과 2名의 女同生이 더 태어났다.

아버지 선우億은 自作農으로 自手成家 했는데, 인색할 程度로 儉素했으며 自己中心的이고 保身主義的 態度를 가졌으며, 家族에 對한 사랑과 個人의 自由를 最優先으로 하는 價値觀을 가졌다. 鮮于煇는 아버지 선우億의 影響을 받았다. 後日 그는 自身의 長篇 小說 「노다지」에서 自身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登場人物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敎師 生活과 解放 政局 [ 編輯 ]

1944年 9月 경성사범학교 本科를 卒業했고, 歸鄕하여 暫時 井州 조일소학교의 敎師로 있다가 構成國民學校 敎師로 赴任하였다. 1945年 8月 15日 構成國民學校 敎師로 解放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光復 以後 蘇聯軍 眞珠에 幻滅을 느껴 [1] 1946年 2月 敎師職을 辭退하고 越南했다. 1946年 故鄕 어른 啓礎 방응모를 찾아가 朝鮮日報 에 入社했다. 그는 民族指導者들을 가까이 取材하면서도 어떤 政黨·團體에도 加入하지 않았다. [1] 1946年 朝鮮日報 에 入社, 朝鮮日報 社會部 記者로 活動하다가 入社 1年이 안 돼 美國 留學을 꿈꿨으나 實現하지 못하고 조병화 詩人의 紹介로 1947年 다시 仁川中學校 敎師가 되었다. [1]

軍 服務와 6.25 戰爭 [ 編輯 ]

仁川中學校 敎師로 在職 中 旅順事件 을 契機로 1948年 陸軍 에 政訓將校로 入隊했고 1949年 4月 陸軍少尉로 任官하였다. 入隊 2個月 만에 中尉로 特進, 1950年 陸軍 大尉 가 되어 政訓局에 補職, 國防新聞의 編輯을 맡았다. 그해 6月 6·25 戰爭 이 터지자 陸軍本部 政訓局 平壤紛失에 補職되었다. 51年 特殊部隊員 選拔에 自願, 前方軍團 遊擊隊長으로 參戰했다. 6.25 戰爭 이 끝난 뒤 줄곧 政訓將校로 活動하다가 1953年 中領 으로 進級하였다. 1955年에는 任期制 大領으로 進級, 陸軍本部 敎育摠監部 政訓參謀를 거쳐 陸軍本部 政訓監室 政訓差減에 이르렀고, 1959年 陸軍 大領 으로 豫編하였다. 軍에서 除隊하기 前 文學에도 關心을 보여 1955年 雜誌인 《新世界 (新世界)》誌에 「鬼神」을 發表하여 作家로 登壇하고, 1957年 《文學藝術 (文學藝術)》誌에 「불꽃」李 新人特輯에 當選, 作家로 耳目을 끌기도 했다. 그해 그는 제2회 東人文學賞 을 受賞하였다.

첫 小說인 「불꽃」에서 그는 日帝强占期 부터 光復과 6·25를 거쳐 50年代 後半까지의 30年間을 고현 이라는 한 靑年 知識人의 삶을 통하여 眺望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日本 軍國主義 파시즘과 左翼 社會主義 思想을 모두 非理性的이고 非人間的인 理念이며, 이런 理念들이 狂氣(狂氣)의 歷史를 만들어낸 가장 큰 原因이라고 把握하였다. 그의 作品은 軍部隊의 정훈 作品과 各級 學校에 敎養 書籍으로 配布되기도 했다. 「불꽃」은 1975年 6月 KBS1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放映되었다.

陸軍本部는 "軍人이라면 無識한 줄 아는 一般人의 通念을 깨고 軍의 位相을 높였다"며 그에게 表彰狀을 주었다. [1] 陸軍 大領 으로 豫編 後, 1958年 서울 로 上京, 서울新聞社 論說委員이 되었다. 그해 《韓國日報》에 入社하여 論說委員이 되었다.

鮮于煇는 李承晩 政權이 共産主義 를 排擊하고 民主主義 體制를 樹立한 點을 높이 評價했지만 이범석 , 이기붕 自由黨員 들의 不正과 專橫에는 相當히 否定的인 態度를 나타냈다.

言論 活動 [ 編輯 ]

言論活動 初期와 5.16 軍事 政變 [ 編輯 ]

《韓國日報》에 入社하여 다시 言論에 復歸하고, 1959年 다시 《韓國日報》 論說委員이 되었다. 1960年 6月 김팔봉 , 김광주 等과 함께 한국소설가협회 (韓國小說家協會)의 創立 멤버로 參與하였다. 1961年 4月 에는 京鄕新聞 의 어린이 作品 審査委員으로 委囑되었다. 또한 各種 安保 講演과 反共 大會의 講師, 演士로도 招聘되었다.

1961年 5月 15日 조선일보 論說委員으로 再入社한다. [1] 以後 1986年 朝鮮日報 를 停年 退社하기까지 『朝鮮日報』 論說委員, 編輯局長, 主筆, 論說顧問, 主筆 等으로 꾸준히 活動하였다. 그해 5月 16日 그는 出勤길에 쿠데타 消息을 듣고 陸本으로 가서 “어떤 精神 나간 놈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나”라고 一喝했고, 그 일로 逮捕令이 떨어져 보름쯤 숨어 지내다 新聞社에 復歸해 1年間 無記名으로만 글을 쓸 수 있었다. [1] 이때 그는 술에 醉한 狀態에서 陸軍 本部 로 뛰어들어갔지만 朴正熙 의 配慮로 逮捕는 謀免하였다.

그는 歷史的 激動期에 參與와 傍觀 사이에서 葛藤하는 人間型, 知識人의 苦惱와 責任을 描寫한 行動主義 文學家로 꼽힌다. [2] 한便 그는 言論人과 作家 生活을 竝行하면서 「 오리와 階級章 」(1958年), 「旗발없는 旗手」(1959年), 「十字架 없는 골고다」(1965年) 外에도 수많은 短篇, 中篇, 長篇 等 다양한 장르의 小說을 發表하였다.

言論, 文學 活動 [ 編輯 ]

1961年 朝鮮日報 論說委員으로 入社했다. 1962年 《朝鮮日報》 論說委員, 編輯部長을 거쳐 1964年 朝鮮日報 編輯局長이 되었다. 1963年 發行人이 된 방우영 常務가 編輯局長 職을 提議했을 때 “房 常務가 程度를 벗어나면 언제든지 그만두겠다”고 條件을 달았다. [1] 1964年 8月 共和黨 이 言論 統制를 노린 言論倫理委員會法을 國會 通過시킨 後 各 言論社에 倫理委 召集에 對한 立場表明을 要求했을 때 “新聞社는 門을 열고 죽는 수가 있고, 門을 닫고 사는 수가 있다”며 방일영 當時 代表에게 呼訴해 反對 意思를 밝히도록 했다. [1]

1964年 朝鮮日報 編輯局長이 되었다. 그해 4月 한국신문편집인협회 運營委員會 委員으로 選出되었다.

1964年 11月 言論委員會法을 둘러싸고 빚어진 言論波動이 일어나자, 政府의 言論法 制定에 反撥했다가 反共法 및 臨時特例法 違反嫌疑로 逮捕되었다가 한달 만에 풀려났다. 그는 當時 現職 言論社 編輯局長으로는 처음으로 拘束되었다 한다. 12月 中旬 不起訴로 풀려났다. 前後 登壇했던 作家들이 大部分 短命한 것과는 달리 꾸준히 作品活動을 展開했다. 그해 말 베트남 戰爭 의 從軍 記者로 參戰한 뒤 1965年 1月 에 歸國하였다.

다시 1965年 朝鮮日報 論說委員을 거쳐 그해 8月 에는 김수영 (金洙暎), 이어령 等과 함께 同人季刊誌 韓國文學 지 發刊에 參與했다. 그해 4月 日本 으로 留學, 日本 도쿄 大學 行政大學院 行政政策過程에 入敎했으며, 그해 12月 에는 姜在求 少領 의 一代記인 '少領 姜在求'를 執筆하였다. 1966年 日本 도쿄 大學校 行政大學院 行政政策過程을 修了하고 歸國하였고, 1967年 다시 조선일보 編輯局長을 歷任하였다. 1967年 9月 韓日新聞세미나 協會에 韓國 側 代表의 한사람으로 參席하였다. 1968年 4月 한국신문편집인협회 諮問委員, 1969年 2月 偏狹 運營委員이 되었다.

그는 朴正熙 政權을 軍事 獨裁라고 非難했다가 召喚調査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鮮于煇는 自身의 固執을 絶對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學生運動系列의 鮮于煇에 對한 評價는 泊했는데, 學生運動에 相當히 否定的이었으며 그는 學生運動이 共産主義 와 北韓을 對案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點에서 學生運動에 批判, 悲觀的이었다. 또한 學生運動家들의 運動이 野黨 政治人들의 執權 手段, 道具로 利用된다는 點과 運動圈 內의 暴力性과 組織性, 全體主義的 性向에도 甚한 反感과 不快感을 드러냈다. 1970年 美國 國務省의 招請으로 美國을 視察하였다. 그해 朝鮮日報 企劃審議室長을 거쳐 71年 朝鮮日報 社의 理事가 되어 1986年 까지 朝鮮日報 社의 理事로 經營에 參與했다. 같은 해 洞新聞 主筆이 되었고, IPI 會員으로도 委囑되었다.

김대중 拉致 事件 [ 編輯 ]

1973年 8月 8日 日本에 滯留 中이던 金大中 當時 野黨 指導者가 失踪됐고, 그로부터 닷새 뒤 서울 동교동 自宅에 모습을 나타내 世人들을 놀라게 한 '김대중 拉致陰謀 事件'이 發生했다.

9月 7日子 조선일보는 中央情報部 의 壓力에도 不拘하고 김대중 拉致事件을 大書特筆로 報道했다. 9月 7日 새벽, 編輯局에 鮮于煇 主筆이 나타났다. [1]

"主筆로서의 判斷에 따라 責任지고 行動하겠다. 어떤 威脅에도 누구의 干涉에도 굽히지 않겠다. [1] "

悲壯한 語調로 夜勤者들에 擧事(擧事) 計劃을 알린 主筆은 輪轉機를 세우고 自身이 써내려간 社說을 끼워 놓을 것을 指示했다. [1] 社說의 題目은'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衷情― 決斷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는 題目이었다.

“요즘 우리의 心情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는 狀態에서 몹시 憂鬱하고 답답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김대중 事件이라고 하겠는데… 그러나 무엇보다 더 留意해야 할 것은 設或 友邦과 얽힌 問題가 決定的인 不幸을 招來하지 않는다손 치더라고 이番 事件이 不透明하게 處理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點이다…. [1]

9月 7日 當日 中央情報部가 總動員돼 回收作業을 벌였지만, 大部分 市內版이 讀者들 손에 쥐어진 뒤였다. 主筆은 辭職書와 謝過의 글을 방우영 當時 朝鮮一步 社長 冊床 위에 올려 놓은 채 安養 支局長 집으로 避身했다. [1]

監査院長 落點과 拒否 [ 編輯 ]

1968年 11月 의 文學人 大會에서 社會를 主管하면서 朴正熙 大統領 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꼿꼿한 姿勢로 朴大統領을 對했다. 1973年 9月 17日 中庭(中情)과 新聞社의 열흘 間 실랑이 끝에 事態는 마무리됐다. 朴 大統領은 호된 經驗을 안긴 鮮于 主筆을 오히려 높이 사게 됐고, 重用 意思를 밝히게 된 것이다. 朴正熙 는 그에게 監査院長 職을 提議했다.

"政治가 安定되면 (大統領 職을) 물러날 겁니다. 들어와서 좀 도와 주십시오. (朴正熙)"

"들에 핀 꽃이 아름답다 해서 집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다울 理 있겠습니까? (鮮于煇)"

朴正熙 大統領 이 그에게 監査院長 職을 勸하자, 鮮于煇 朝鮮日報 主筆은 日本의 詩(詩)를 引用하며 辭讓했다고 한다. [1] 以後에도 朴正熙 國會議員 과 內閣 長官職을 提議하였으나 그는 新兵과 能力 不足을 理由로 모두 辭讓하였다.

維新 時節 [ 編輯 ]

1971年 조선일보 理事가 되고 86年까지 조선일보 理事로 在職했다. 1971年부터 80年까지 主筆을 겸하였고, 1971年 IPI(國際新聞編輯人協會) 會員이 되었다. 1975年 國土統一院 拷問으로 委囑되었다.

한림대 敎授를 지낸 지명관 은 1970~80年代 日本에 머물 當時 雜誌 《세카이(世界)》에 「韓國으로부터의 通信」이란 칼럼을 통해 韓國의 人權彈壓·民主化運動 消息을 ‘T.K生’이란 筆名으로 連載했다. [1] 鮮于 主筆은 1980年代 初 安企部에 불려가 “T.K生이 누구냐”고 追窮을 받았지만, 끝까지 故鄕 後輩를 保護했다. 지명관 敎授는 “鮮于 主筆이 日本 雜誌에 나를 筆者로 紹介해 주었다”고 後날 털어 놓았다. [1] 한便 그를 迎入하려는 新民黨 의 迎入 提議는 모두 拒絶하였다.

現職 新聞 論說委員, 主筆로 拘束되거나 여러 番 中央情報部 , 檢察 等에 召喚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學生運動系列이 民族解放, 民衆解放 系列로 나뉘리라고 豫想했다. 그러나 두 陣營 모두에 悲觀的이었다. 民族解放 系列은 6.25 戰爭의 元兇이며 김일성 獨裁政權人 北韓을 對案으로 생각했다는 點에서 그르다고 생각했고, 民衆民主 系列은 지나친 階級鬪爭論에 沒入되어 있어서 社會的 融和가 어려운 對象으로 봤다. 1979年 第2回 고재욱 亞細亞言論賞을 受賞하였다.

1970年 臺 中盤에는 雜誌 自由 를 編輯하며 사서 환단고기 硏究家인 이유립 , 박창암 等을 만나 이들을 直接 取材, 인터뷰하였다. 以後 이유립 , 박창암 等과 만나 韓國史에 對한 對談과 討論을 하였다.

1978年 10月 22日 朝鮮日報 에는 ‘잘못된 局社 原狀대로 찾아야 한다’는 題目으로 조선일보 主筆인 鮮于煇氏와 이유립氏가 大膽하는 記事가 실렸다. [3] 1979年 2月 東人文學賞 審査委員에 委囑되었다.

生涯 後半 [ 編輯 ]

第5共和國 時節 [ 編輯 ]

1979年 10月 朴正熙 大統領 이 暗殺되자 그는 混亂을 틈타 北韓 의 挑發을 憂慮하였다. 新民黨 에서 支持를 要請했지만 그는 이 要請을 拒絶한다. 그 뒤 최규하 政府 와 5共에서도 繼續 國土統一院 顧問職을 維持했다.

1980年 1月 30日 日本 산케이新聞 과의 會見에서 12.12 事態로 政權을 掌握한 新軍部를 支持하면서 言論統制를 正當化하는데 參與하는 等, 新軍部의 執權을 위해 自發的으로 애쓴 言論人이라는 疑惑이 있다. 그 뒤 전두환 政權에서 特別히 國政諮問會議 委員職을 그에게 提議하였으나 그는 病을 理由로 辭讓하였다. 1980年 부터 6年間 조선일보 論說顧問으로 있었고, 1983年 2月 韓國 藝術院 小說部門 會員을 거쳐 1985年 3月 30日 韓國放送審議委員會 委員長이 되었다. 學生運動界 中에서는 韓國을 美帝國主義의 植民地로 規定하고 美軍撤收를 主張하는 部類가 나타나자 그는 윤치영 , 박용만 等과 함께 大韓民國 政府 樹立의 正當性과 解放 當時 남로당 빨치산 等의 虐殺을 言及하며 學生 運動圈들과 論爭을 벌였다.

小說 「불꽃」을 비롯한 40餘 篇의 作品을 남겼다. 동생( 선우연 )은 서울新聞 記者와 政治部 次長 等을 지냈고, 아들( 선우정 ) 亦是 朝鮮日報 記者로 勤務하였다. 作品을 통해 휴머니즘的인 行動主義를 바탕으로 한 人間이 現實惡에 對한 對決意志와, 知識人의 苦悶과 責任 等을 描寫했으나, 이와 같은 作家로서의 行動的 參與意識은 65年을 前後로 하여, 漸次 旣成體制에 對한 保守主義 的 立場으로 變貌하기 始作했다. 1983年 大韓民國 藝術院 會員에 選任되었다.

死亡 [ 編輯 ]

1980年 以後 反美主義的人 價値觀이 擴散되면서 學生運動圈 사이에서 民族解放 論이 擡頭되었다. 그에 依하면 大韓民國 政府는 南北協商을 통해 태어날 政府를 좌절시키고 美國 이 樹立한 꼭두각시라는 主張이었다. 또한 6.25 戰爭 美國 이 故意로 南侵을 誘導했다는 主張도 提起되었다. 鮮于煇는 大韓民國 政府 樹立은 必須不可缺한 일이었고, 6.25 戰爭 北韓 의 侵略임이라며 反論을 提起했다. 그는 强力한 反共主義 自由主義 이데올로기를 維持하였고 이로 인하여 늘 贊反의 激烈한 論爭과 極端的인 讚辭와 極端的인 批判이 共存하는 要因이 되었다.

平素 持病인 高血壓 等을 앓았으나 晩年에도 끊임없는 칼럼, 寄稿 活動과 論說, 講演 活動 等에 나섰다. 1986年 2月 28日 조선일보사를 停年退任하고, 그해 6月 自身의 小說을 드라마로 만드는 製作 過程에 參與하여 부산직할시 초량동으로 내려갔다. 6月 12日 한국방송공사(KBS) 6·25特輯劇 〈살아있는 戰場手帖〉 錄畫撮影 中 [4] 그날 午前 9時頃 過勞와 高血壓에 依한 腦溢血로 釜山廣域市 東區 초량동의 한 宿所에서 死亡하였다. 그의 나이 享年 64歲였다.

事後 [ 編輯 ]

바로 서울大學校 大學病院 靈安室에 安置되었으며 86年 6月 全斗煥 大統領 은 永訣式場에 이원홍 문교부 長官과 閣僚들을 보내고, 다시 허문도 政務第1首席祕書官과 靑瓦臺 祕書官들을 特別히 派遣하여 조문하였다. 京畿道 龍仁郡 의 龍仁公園墓園에 安葬되었다가 天安 平安 公園墓地 로 移葬되었다.

1986年 6月 13日 國民勳章 無窮花腸이 追敍되었다. 1987年 조선일보사에서 『鮮于煇 文學全集』 5卷을 펴냈다.

年譜 [ 編輯 ]

學歷 [ 編輯 ]

非學位 修了 [ 編輯 ]

評價 [ 編輯 ]

일화 [ 編輯 ]

6·25 戰爭 當時 政訓將校로 參戰했던 그는 指揮官이 不當한 命令을 내리자, 燒酒를 마시고 醉한 척 假裝해 쓰러졌다. 火가 난 指揮官이 辱說과 毆打를 加했으나 그는 反應하지 않았고, 指揮官이 나가버린 뒤 일어났다고 한다.

著書 및 作品 [ 編輯 ]

  • 『아버지의 눈물』(1986)
  • 『鮮于煇 文學全集』(前5卷) (1987)
  • 『姜在求 少領 電氣』

短篇 小說 [ 編輯 ]

  • 「鬼神」(『新世界(新世界)』, 1955)
  • 「火災」
  • 「望鄕」
  • 「싸릿골 神話」
  • 「불꽃」(『文學藝術(文學藝術)』, 1957)(第2回 東人文學賞 受賞作)
  • 「單獨講和」
  • 「오리와 階級章」(1958)
  • 「거울」
  • 「13歲 少年」

中篇 小說 [ 編輯 ]

  • 「旗발 없는 期數(旗手)」(1959)
  • 「十字架 없는 골고다」(1965)
  • 「追跡의 피날레」

長篇 小說 [ 編輯 ]

  • 「아아 山하여」
  • 「城砦(城砦)」
  • 「使徒行傳」
  • 「노다지」(1986)

評論集 [ 編輯 ]

  • 《現實과 知識人》 等

賞勳 [ 編輯 ]

  • 東人文學賞
  • 陸軍參謀總長 表彰
  • 第1回 고재욱上(高在旭賞)
  • 平北 文化相(文學部門)을
  • 國民勳章 無窮花章

思想과 信念 [ 編輯 ]

反共主義 信念 [ 編輯 ]

그는 共産主義 社會主義 가 人間의 個性을 抑壓하는 非人間的인 思想이라고 생각했다. 平等이라는 이름으로 個人의 私有財産 所有에서부터 人間의 자유로운 行動과 思考를 抑壓한다는 것이다. 蘇聯 軍政 治下의 北韓 에서 越南한 그는 이러한 信念을 더욱 確信하였다.

蘇聯軍 眞珠에 幻滅을 느껴 越南했고,고향 어른 啓礎 방응모 를 찾아가 조선일보에 入社했다. 그는 “社會主義나 共産主義에 幻想을 가져선 안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新聞記者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1] 左翼이 勢를 넓혀가는 南韓 社會에 失望하면서도, ‘北韓 實情을 體驗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左翼이 되었겠구나’ 생각하며 平生 反共을 堅持했다고 한다. [1] 그는 이를 根據로 學生運動圈과 論爭을 여러 次例 벌였다.

좋은 글에 對한 생각 [ 編輯 ]

鮮于 主筆은 쉬운 글이 좋은 글이며, 記者의 生命은 文章에 있다는 信念을 지녔다. ‘文章은 쓰는 사람 固有의 것’이라고 믿어 남의 글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도 한다. [1] 일부러 어려운 文體를 쓰면서 自身의 有識함을 자랑하는 知識人들을 輕蔑하였다.

編輯 自律權 保障 [ 編輯 ]

進步的인 論說委員들은, 透徹한 反公論者이면서도 “내가 뭘 아나? 그건 當身이 專門家 아니야”라며 自律權을 保障해 준 鮮于 主筆이 있었기에 自己 목소리를 내고 紙面을 豐盛하게 만들 수 있었다. [1] 社會主義 思想에 好感과 興味를 느끼는 言論人들을 內心 못마땅해 하고 不快해 하면서도, 言論은 價値中立性을 維持해야 된다고 判斷하여 社會主義的인 言論人들에게도 發言權을 주었다. 그러나 親北(親北) 思想은 反逆으로 看做하여 許容하지 않았다.

鮮于 主筆은 함석헌·안병욱·지명관 等 越南한 以北 出身 人士들을 紙面에 등장시키는 役割도 했다. [1]

家族 關係 [ 編輯 ]

  • 아버지 선우億
    • 동생 선우연 (鮮于煉, 1929年 ~ 1997年 , 言論人)
    • 첫째딸 선우숙희(鮮于淑姬)
    • 둘째딸 선우숙英(鮮于淑英)
    • 셋째딸 선우숙임(鮮于淑姙)
    • 아들 선우정(鮮于鉦), 言論人
    • 첫째사위 이세화(李世和)
    • 둘째사위 이민환 - 釜山大 音樂學科 敎授
  • 親族 선우旣成

기타 [ 編輯 ]

술과 노래를 좋아하였다. 主力(酒力)도 대단했다고 한다. “한달에 한番쯤은 通音해야 머릿속 찌꺼기를 씻어내고 새出發을 할 수 있다”는 데 言行이 一致했다고 傳해지기도 한다. 술에 醉하고도 姿勢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西北靑年團 의 短珠였던 선우旣成 과는 同鄕 出身의 먼 一族이었다. 계훈제 , 문봉제 等과 가깝게 지냈다.

演技者 선우재덕 의 아버지와는 四寸으로 알려져 있다.

各州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조선일보사 飼料硏究室 저 (2004年 12月 22日). 《朝鮮日報 사람들 光復以後 便》. 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ISBN   978-89-5757-923-7 .  

參考 書籍 [ 編輯 ]

  • 朝鮮日報, 《朝鮮日報 사람들》 (랜덤하우스中央, 2005)
  • 利益性, 《近代史의 力動性과 文學的 變容 鮮于煇》 (건국대학교出版部, 2004)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80年代篇 1,2 (人物과 思想史, 2006)
  • 金鎭基,《鮮于煇 - 個人主義와 휴머니즘》 (보고사, 1999)
  • 김상선, 《新世代作家론》 (일신사, 1982)
  • 鮮于煇, 《아버지의 눈물》 (동서문화사, 1986)
  • 鮮于煇, 少領 姜在求 (黑調査, 1965)
  • 김윤식,《鮮于煇, 최상규》 (동아출판사, 1995)
  • 韓國文學硏究會, 1950年代 南北韓文學硏究(平民史, 1991)
  • 신경득, 韓國戰後小說硏究(일지사, 1983)
  • 鮮于煇, ‘불꽃’硏究, 이동하 《文藝中央 1986年 봄號》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