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전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김인전 (金仁銓, 1876年 10月 7日 ~ 1923年 5月 12日 )은 大韓民國 獨立運動家 利子 牧師 이다. 大韓民國 忠南 舒川郡 에서 出生했다.

1876年 10月 7日 忠淸南道 舒川郡 한산면 지촌리(芝村里)에서 韓末 水原 (水原)郡守를 歷任한 父親 김규배 (金奎培)와 母親 金氏 사이의 두 兄弟 中 長男으로 태어났다. 先生의 本貫은 金海 , 號는 경재(鏡齋, 經齋), 耳鳴(異名)으로는 隣屋(仁玉)이 있다. 先生은 6歲 때부터 鄕里의 司稤(私塾)에서 漢學 을 배우기 始作하였는데, 남다르게 총명하여 儒敎 經典에 精通하였을 뿐만 아니라 諸子百家 · 佛敎 · 道敎 등에도 學問的 造詣가 깊었다.

先生의 父親은 韓末 開化思想 을 信奉하여 基督敎 에 入敎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상재 (李商在) 先生과 황성基督靑年會 를 組織하여 啓蒙運動 을 펼친 開化 知識人이었다. 이러한 父親의 影響으로 김인전 先生은 일찍부터 開化思想 을 受容하여 近代的 思考를 갖고 있었고, 또한 27歲 때인 1903年에 基督敎 에 入敎하였다.

이즈음 韓半島 에서의 主導權 掌握을 위해 血眼이 되어 있던 一齊 는 1904年 2月 러일戰爭 을 挑發하였고, 같은 해 2月 23日 大韓帝國 政府를 强薄하여 “大韓帝國 內에서 軍事的으로 必要한 緊急措置와 軍事上 必要한 地點을 任意로 受容”할 수 있도록 하는 韓日議定書 (韓日議定書)를 締結하면서 本格的인 韓國 植民地化 政策을 敢行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月 22日에는 大韓帝國 政府를 威脅하여 “大韓帝國 政府는 日本 政府가 推薦하는 財政顧問과 外交顧問 各 1名을 두고, 財政과 外交에 關한 事項은 一切 그들의 意見을 물어 施行”하도록 하는 第1次 韓日協約 (韓日協約)을 强制하여 韓國의 外交權 財政權 을 掌握하였다.

또한 國際的으로는 러일戰爭 을 遂行하면서 1905年 7月 美國 과의 카스라·태프트 密約 , 같은 해 8月 英國 과의 第2次 영일同盟 (英日同盟), 그리고 9月 러시아 와의 講和條約 포츠머스條約 帝國主義 國家 들 間의 去來를 통해 韓國 에 對한 獨占的 支配權을 確保하였다. 그 뒤 日帝는 곧바로 大韓帝國 政府의 閣僚들을 銃칼로 脅迫하여 1905年 11月 乙巳條約 (乙巳條約)을 締結하면서 大韓帝國 의 自主的 外交權을 强奪함은 勿論 統監府 를 設置하여 內政까지 干涉을 통해 事實上 韓國을 植民地化하였다.

이 時期 김인전 先生은 國權回復의 길이 民族의 實力을 養成하는데 있다고 認識하고, 1906年 11月 家産을 出演하여 故鄕인 忠南 舒川郡 화양면 에 中等課程의 韓英學校 (韓英學校)를 設立하고, 本格的으로 敎育啓蒙運動 에 뛰어 들었다.

1910年 韓日强制倂合 이 現實化되자 先生은 韓英學校의 運營을 작은아버지에게 引繼하고, 平壤神學校 에 入學하였다. 이 學校는 3·1運動 民族代表 로 活躍하였던 이승훈 (李昇薰) 先生과 길선주 (吉善宙) 양전백 (梁甸伯) 牧師 그리고 臨時의정원 議長을 歷任하였던 송병조 (宋秉祚) 先生 等 많은 民族 指導者들을 輩出한 西北地域 獨立運動의 搖籃으로, 先生은 이 學校에서 工夫하면서 그들과 民族獨立의 意志를 더욱 굳건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交分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先生은 平壤神學校 在學 中 放學 期間 等을 利用하여 全北 群山 의 영명(永明)學校에서 臨時 敎員으로 民族敎育을 實施하고, 또한 山中에 있는 여러 敎會를 巡廻하면서 講論을 통해 愛國心을 鼓吹하였다. 그리고 1914年 平壤神學校 를 卒業함과 同時에 先生은 全州 序文外(西門外) 敎會 의 牧師로 赴任하여 牧會活動, 예수교 長老會 聖經學校 敎授·全北老會腸(全北老會長) 等의 敎職을 利用한 傳道活動을 통하여 民族意識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全州 序文外 敎會 에는 新興學校 基前女學校 等의 敎師와 學生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先生의 影響 아래 暗暗裏에 民族敎育을 實施하여 抗日意識을 鼓吹하고, 祕密裏에 獨立運動團體를 組織하였다. 그것이 機轉女學校의 敎師와 學生들이 組織한 獨立運動 祕密結社인 松竹兄弟會 (松竹兄弟會)였다.

1919年 3·1運動 期間 中 群山 에서는 3月 5日부터 英明學校 敎師와 學生들이 主軸이 되어 萬歲示威를 벌였고, 全州에서도 3月 13日 新興學校 基前女學校 의 學生 및 敎師, 그리고 基督敎信者들이 天道敎 側과 合勢하여 群衆들을 이끌고 萬歲 示威運動을 展開하였다. 때문에 先生은 全羅道 脂肪 萬歲 示威運動의 背後 指導者로 指目되어 日警의 標的이 되었다.

이에 先生은 國內의 3·1運動 眞相을 世界 萬邦에 알리는 한便, 獨立運動을 持續的으로 展開하기 위하여 中國 傷害 로 亡命을 決心하였고, 大韓民國 臨時政府 의 獨立運動에 參與하게 되었다.

以後 先生은 臨時政府의 財務部 祕書局長 兼 臨時公採管理局長으로 任命되어 獨立運動 資金의 調達을 擔當하였다. 그리고 1920年 臨時의정원 議員으로 被選되어 財務常任委員會와 豫算決算常任委員會, 그리고 政務調査特別委員會 軍士分課 委員으로 活動했으며, 나아가 이듬해 4月 6日 第8回 臨時의정원 會議에서는 副議長에 選出되었고, 같은 해 5月에는 臨時政府 學務部 次長으로 任命되었다.

1921年 11月에는 美國 · 英國 · 프랑스 · 이탈리아 · 日本 太平洋地域 에 利害關係를 가진 列强 들이 軍備 縮小 問題와 極東政策을 論議하기 위해 워싱턴 會議 를 열기로 했다는 消息이 알려지자 臨時政府에서는 이 會議에 韓國 問題를 上程시켜 파리平和會議 에서 이루지 못한 祖國獨立을 貫徹시키고자 臨時大統領으로 美國에 常住하고 있던 李承晩 (李承晩)을 全權大使, 서재필 (徐載弼)을 全權府使로 하는 韓國代表團을 構成하여 積極的인 外交活動을 벌이게 하였다. 臨時의정원 또한 政府側의 外交를 통한 獨立運動을 支援하기 위해 1921年 8月 17日 議長인 紅塵(洪震)과 先生을 비롯한 前 議員이 太平洋會議 外交後援會를 組織하였다.

그리고 11月 11日 太平洋會議가 열리자 先生은 臨時의정원 議長 紅塵·申翼熙 等 同僚 議員 25名 全員과 함께 “世界의 平和, 東亞의 幸福과 正義 印度를 위하여 韓國 獨立 및 自主의 完全한 解決”을 要求하는 韓國獨立請願書를 各國 代表들에게 發送하여 外交 獨立運動에도 힘썼다. 다른 한便으로 先生은 송병조 · 孫貞道 (孫貞道)· 金炳朝 (金秉祚)· 이원익 (李元益) 等 平壤神學校 出身 牧師들을 中心으로 組織한 大韓耶蘇敎(예수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통하여 各國 政府와 敎會團體에 韓國의 實情과 獨立을 呼訴하는 陳情書를 發送하여 臨時政府의 外交 獨立運動을 側面에서 支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上海 臨時政府는 勿論 國內의 同胞들까지 關心을 集中하였던 太平洋會議는 韓國 問題에 對한 公式的인 討議도 없이 日帝의 國際的 位相만 높여 준 채 1922年 2月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先生은 祖國 獨立의 꿈과 意志를 조금도 喪失하지 않고, 臨時政府와 臨時議政院의 强化를 통한 獨立運動의 活性化에 渾身의 努力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先生은 1922年 2月 열린 第10回 臨時의정원 會議에서 電源 委員會 委員長으로, 그리고 內外務常任委員會·財務常任委員會·敎育實業常任委員會 委員 等을 兼任하여 活動하였다. 또한 1922年 3月 上海에서 韓國人과 中國人의 友好를 敦篤히 하기 위해 中韓好調사(中韓互助社)를 設立하고, 韓國人의 獨立運動과 經濟 文化運動에 相互協力하는데 委員으로 活動하기도 하였다.

1922年 4月 3日 第4代 臨時의정원 議長으로 選出된 先生은 以後 臨時의정원 議長으로 民意를 收斂한 立法活動, 臨時政府의 維持 强化, 獨立運動의 活性化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 時期 上海에서는 國民代表會議의 開催 問題와 臨政의 改編 方向을 둘러싸고 獨立運動家들 間의 葛藤과 對立이 繼續되고 있었다.

臨時政府는 1921年 1月 26日 國務總理 이동휘 (李東輝)의 辭任, 이어 5月 12日 勞動局 總販 안창호 (安昌浩) 等 主要 國務委員 의 辭退, 그리고 政府 組織 後 처음으로 上海에 到着하여 政務에 臨했던 臨時大統領 李承晩 이 같은 해 5月 하와이 로 돌아감에 따라 그 機能이 弱化되어 가고 있었다. 때문에 臨時政府를 名實相符한 國民의 代表機關이자 獨立運動의 最高 統率機關으로 改編하기 위한 國民代表會議 召集 問題가 獨立運動系의 焦眉의 關心거리로 登場하였다. 그리하여 안창호 가 勞動局 總販을 辭退한 날인 1921年 5月 12日 傷害 3·1黨에서 열린 유호(相互)同胞演說會에서 國民代表會議의 召集을 公式的으로 提起하고, 그 促成機關으로 國民代表會 期成會를 勃起하였다. 나아가 그 해 6月 6日 正式으로 國民代表會 期成會를 出帆시켜 本格的으로 國民代表會議 召集 準備 作業에 들어갔다.

이 때 太平洋會議 開催 消息이 알려짐에 따라 上海는 勿論 滿洲·老齡·美洲 等의 民族主義 系列의 人士들은 여기에 集中하였고, 또 이에 對抗하여 모스크바에서 1922年 1月부터 極東 被壓迫 民族大會(極東 人民 代表大會)가 開催됨에 따라 社會主義 系列의 人士들은 여기에 大擧 參與하여 國民代表會議 召集 問題는 遲延되고 있었다. 그러나 韓國 獨立 問題에 對한 可視的 成果도 없이 그 해 2月 初 두 會議가 끝나자 다시 國民代表會議의 召集 問題가 懸案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를 둘러싼 臨時의정원과 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 사이의 對立과 反目이 深化되고 있었다. 이를 打開하기 위해 先生은 1922年 7月 안창호 (安昌浩)· 신익희 (申翼熙)· 金九 (金九)· 趙素昻 (趙素昻)· 이시영 (李始榮) 等 50餘 名과 함께 時事책진회를 組織하였다. 그리하여 先生은 臨時의정원과 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 사이의 反目과 葛藤을 解消시켜 國民代表會議가 圓滿히 開催될 수 있도록 諸般 與件을 造成하는데 힘썼다.

이와 함께 先生은 太平洋會議에서의 外交 獨立運動이 成果 없이 끝난 後, 武裝 獨立鬪爭의 必要性을 새삼 認識하기 始作하였다. 그리하여 先生은 1922年 10月 1日 傷害 에서 金九 · 孫貞道 等과 함께 ‘모두가 勞動하며 軍人이 되는’ 老兵一致의 獨立軍 養成 및 支援團體로 韓國노병회 (韓國勞兵會)의 組織을 推進하였다. 그 結果 ‘祖國 光復에 貢獻하기 위하여 向後 10年 以內에 1萬 名 以上의 老兵을 養成하고 100萬원 以上의 戰費(戰費)를 造成’할 目的으로 10月 28日 韓國노병회가 發足하였고, 先生은 理事 兼 經理部원으로 選任되었다.

나아가 1923年 1月 傷害 에서 獨立運動系의 焦眉의 關心 속에 國民代表會議 가 開催되자 先生은 3月 3日부터 全羅北道 代表로 參席하였다. 連日 繼續된 會議에서 先生은 各 地域 및 團體의 代表들과 祖國 光復의 새로운 方略을 摸索하고, 獨立運動勢力을 統合하여 臨政을 名實相符한 獨立運動의 統一的 最高 機關으로 改編하기 위해 열띤 討論을 벌여갔다. 그러던 中 先生은 心身의 疲勞가 겹쳐 5月 3日 쓰러지고 말았고, 傷害 同人(同仁)病院에서 入院治療를 받다가 5月 12日 48歲의 나이로 殉國하였다.

先生의 葬禮式은 5月 14日 臨時政府 主管으로 擧行되었고, 遺骸는 上海 프랑스 阼階內 外人墓地에 安葬되었다. 그 後 先生의 遺骸는 中國 政府 에서 移葬하여 傷害 宋慶齡 陵園 內에 安置되어 있다가 1993年 8月 박은식 · 신규식 · 노백린 · 안태국 先生 等과 함께 故國으로 奉還되어 國立墓地 에 安葬되었다.

1980年에 大韓民國 政府 로부터 建國訓長 國民葬 을 追敍받았다.

家族 [ 編輯 ]

석운(石雲) 김가전 牧師가 그의 親同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