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토머스 베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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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語이름
| 裵說
Ernest Thomas Bet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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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
| 1872年 11月 3日
(
1872-11-03
)
잉글랜드
브리스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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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
| 1909年 5月 1日
(
1909-05-01
)
(36歲)
大韓帝國
漢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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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派
| 改新敎
(
잉글랜드 聖公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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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職
| 大韓帝國 外務衙門 諮問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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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
英語
:
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머스 베설
[
*
]
,
1872年
11月 3日
~
1909年
5月 1日
)은
1904年
에서부터
1909年
까지
大韓帝國
에서 活動한
英國
出身의
言論人
, 新聞記者이다. 韓國名人 "排泄(裵說)"이라는 이름 또한 使用하였다.
大韓每日申報
를 創刊하여 朝鮮의 抗日 運動 發生에도 꽤 至大한 影響을 주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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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英國
의
브리스틀
에서 出生한 베델은 16살에서 32살까지 16年間
日本
에서 살면서 貿易商을 하다가,
1904年
3月 10日
에
러일戰爭
이 勃發하자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의
特派員
資格으로서
大韓帝國
에 왔다.
高宗皇帝
는 베델에게 聲明 "排泄(裵說)"을 附與하고 여러가지의 便宜를 提供했다.
大韓每日申報 創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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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帝國
의 侵略을 報道하던 베델은
데일리 크로니클
에서 辭職하고
1904年
7月 18日
부터 大韓帝國人
양기탁
과
大韓每日申報
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
를 創刊하였다.
1905年
에는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國漢文版 또한 發行하였다. 이때 日本帝國人
檢閱
官의 事前 檢閱을 避하고자 英國人 베델의 名義로 發行하였다.
양기탁
,
신채호
,
박은식
等 民族主義 運動家들은
治外法權
으로 保護받던 大韓每日申報에 모여 日本帝國에 對한 批判을 展開했다.
1907年
大韓每日申報
의 發行 部數는 1萬部를 넘어 最大 新聞社가 되었고 大韓帝國이 日本帝國에 合倂된
1910年
까지 여섯 해 동안 日本帝國에 침략당하는
朝鮮
의 實相을 알리고
乙巳 條約
이 無效라고 主張하는 等 抗日 思想을 鼓吹하였으며
高宗
李兄(이희)의 親書를 <對한 每日 信保>를 비롯한 여러 新聞에 실어 日帝 侵略을 海外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끔 努力하였다.
彈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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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盟國李禔1次 追放 運動에 失敗한 日本帝國
統監府
는 던
英國
에 壓力을 加하여 베델은
1907年
10月
과 이듬해 6月 두 次例나 裁判廷에 서야했다.
1908年
鏡城의 英國 總司令官에 設置된 法廷에서 열린 두 番째 裁判에서
英國
人
判事
F. S. A. 본(F. S. A. Bourne)은 베델에게 3週間
禁錮
에, 滿期 後 6個月間 先行
保證金
으로 被告人 1,000달러, 保證人 1,000달러를 卽時 納付하라고 判決했다. 베델은
상하이
에 護送되어 3週間 禁錮 生活을 마치고
1908年
7月 鏡城으로 돌아왔다. 베델은 大韓每日申報社 社長職을 自身의 祕書였던 앨프리드 W. 마넘(萬咸(만함), Alfred W. Marnham)에게 맡기고서 活躍하였다. 日本帝國은 세 番째 彈壓 手段으로 大韓每日申報社
總務
梁起鐸을 國債 補償金을
橫領
하였다는 罪名을 씌워 彈壓하려 하였으나 梁起鐸의 無罪가 宣言되어 失敗하나 無慈悲하고 强壓하는 壓力을 加하여 두 사람을 大韓每日申報社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死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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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은
1909年
5月 1日
心臟肥大症
(
en
)으로 인해 死亡하였다. 그는 죽으면서
양기탁
의 손을 잡고서 "나는 죽을지라도 新譜는 永生케 하여 韓國 同胞를 具하라"고 遺言하였다. 逝去 後,
楊花津 外人 墓地
에 安葬되었다.
또한, 海外 獨立有功者로는 처음으로 國家有功者 名牌를 孫女인 수잔 先生의 自宅에 달게되었다.
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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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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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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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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