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석 (184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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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
柳麟錫
出生 1842年 1月 25日 ( 1842-01-25 )
江原道 春川
死亡 1915年 1月 29日 ( 1915-01-29 ) (73歲)
滿洲 奉天
性別 男性
國籍 대한제국 大韓帝國
職業 義兵將 , 性理學者
賞勳 ( 建國訓長 大統領章,1962)
웹사이트 유인석(獨立有功者 功勳錄)

유인석 (柳麟錫, 1842年 1月 25日 ~ 1915年 1月 29日 )은 朝鮮 後期와 大韓帝國 의 性理學者, 哲學者이며 義兵將 이다. 本貫은 高興 (高興). 字는 女性(汝聖), 號는 義菴(毅庵)이다. 江原道 春川 出身. 화서 李杭魯 (華西 李恒老), 중암 김평묵 (重菴 金平默), 성재 류중교 (省齋 柳重敎)의 文人이다. 1864年 義兵活動에 投身하고, 1895年부터는 全國的인 義兵活動을 展開해 나갔으며 1897年 以後로는 海外를 오가며 國內 眞空作戰을 推進했다. 黨色으로는 老論 黨員이었다.

槪要 [ 編輯 ]

李杭魯 의 門下에서 性理學 을 師事하다가 그가 죽자, 李杭魯 의 高弟(高弟)인 류중교 , 김평묵 에게 受學하고 화서學派의 縱走로 認定되었다. 1864年 (高宗 2) 흥선大院君 書院 撤廢 를 큰 危機이자 變故로 規定하고, 爲政 斥邪 運動 에 投身하였다. 1876年 丙子修好條約 (丙子修好條約)이 締結되자, 門下生 및 儒生들과 함께 延命 反對 上疏를 올렸다. 以後 學問 硏究와 後學 養成을 하다가 1894年 甲午更張 1895年 乙未事變 , 乙未改革 斷行을 契機로 江原道 春川 에서 안승우, 이필희, 서상렬, 이춘영 等 文人 社友들과 함께 複數보형(復讐保形, 명성황후 의 怨讐 報復 및 元來 義理를 지킨다)의 旗幟를 들고 1895年 12月 24日 全國的인 義兵活動을 推進했다.

斷髮令 以後 義兵活動을 展開, 忠州 , 堤川 等地에서 官軍을 擊破하고 腐敗官僚들을 射殺하였으나, 宣諭使 長期렴(張基簾)의 官軍에 크게 敗하고 丹陽으로 물러났다. 以後 滿洲와 랴오둥을 오가며 義兵活動을 推進하고, 全國에 義兵活動 參與와 督勵, 그는 義兵 參與 外에도 義兵에 參與할 수 없다면 글과 말로라도 日本 을 糾彈할 것을 全國에 呼訴하였다.

高宗 의 名으로 一時 歸國했다가 1898年 다시 滿洲 로 亡命하였다. 1900年 7月 義和團의 亂 을 避하여 一時 歸國, 西北 地域 各地를 돌며 靑年들을 모아 尊華攘夷論에 立脚한 抗日 意識과 國權回復論을 力說하며 이진룡, 백삼규 等의 義兵將을 輩出하였다. 1908年 (隆熙 2年) 沿海州 로 다시 亡命, 이상설 , 崔在亨 等과 連絡하며 國內 眞空作戰을 推進하였으나 失敗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에서 十三道의군통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推戴되어 豆滿江 으로 쳐들어오려다가 러시아 軍士에게 逮捕되었다. 1910年 10月 2日 韓日 倂合 條約 以後로도 繼續 國權 收復運動을 推進하다 滿洲 奉天 에서 病死하였다. 또한 그는 西洋 平等 自由 를 反對하였는데, 西洋式 平等과 自由를 無秩序로 規定하고, 混亂과 葛藤을 惹起할 것이라 力說했다.

出生과 初期 生涯 [ 編輯 ]

1842年 (憲宗 8年) 1月 25日 江原道 춘성군 南面 가정리(柯亭里)에서 류중곤(柳重坤)과 高齡 申氏 (高靈 申氏)의 3男 2女中 次男으로 태어났다. 一說에는 그의 生日이 1月 27日 生이라는 說도 있다.

14살 되던 해 親戚 아저씨인 유중선(柳重善)의 養子로 入養되었다. 以後 그는 背景이 比較的 健實한 兩家(養家)의 門閥을 背景으로 靑少年期를 보냈다. 兩家의 曾祖父였던 유영오 (柳榮五)가 잠强(潛江)에 隱居하고 있던 朝鮮 高宗 때의 老論 性理學 거유(巨儒)인 화서 李杭魯 (華西 李恒老)와 일찍부터 親分關係가 있어서, 그는 유중선의 養子로 入養되던 그해에 李杭魯 門下에 들어가 性理學 을 受學하게 되었다. 黨色으로는 老論 의 黨員이 되었다.

當代의 大儒學者로 名聲이 있던 李杭魯 는 尤庵 송시열 (尤庵 宋時烈) 學派의 學統으로, 송시열 - 권상하 권상하 의 文人인 한원진 離間 의 學統을 모두 繼承한 老論 의 正統, 思想的 縱走로 認定되었다. 또한 李恒老를 中心으로 한 화서學派가 形成되었다. 여기서 그는 勉庵 최익현 을 만나 交流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의 平生 親舊이자 思想的 同志가 되었다.

儒生 時節 [ 編輯 ]

1865年 (高宗 2年) 흥선大院君 에 依해 華陽洞 萬東廟 가 撤廢되자 그는 이를 큰 變故로 規定하였다. 1866年 丙寅洋擾 直後, 흥선大院君 이 各界 各層의 代表者들을 召喚할 때 老論 界 儒林의 代表者로 그의 스승 李杭魯 指定, 召喚하자 漢城 으로 가는 스승 李杭魯 를 따라 同門 文人들 몇因果 함께 상경, 1個月假量 漢城府 에 머무르면서 時國喪과 民心을 接하였다. 그는 丙寅洋擾 亦是 國難으로 規定했다. 1876年 (高宗 13年)에 日本 의 壓力兒로 外國에 門戶를 開放하는 江華島 條約 (丙子修好條約(丙子修好條約))李 締結되었다. 바로 그는 홍재구 京畿道 , 江原道 儒生 46人과 함께 共同延命으로 複合儒生斥洋소(伏閤儒生斥洋疏, 略稱 斥洋소(斥洋疏)를 올렸으나, 朝廷에서 默殺當했다. 그는 門下의 儒生을 이끌고 上疏하여 反對 運動을 展開하였다.

朝鮮時代 後期 화서學派 의 大儒學者人 화서 李杭魯 (華西 李恒老)의 秀才者이자 그의 學統을 繼承한 學者로 門下에 많은 弟子를 輩出했다. 화서 李杭魯 가 죽자 다시 그의 門下生인 중암 김평묵 , 또한 入養된 兩家의 7寸 再堂叔 이기도 한 성재 류중교 (省齋 柳重敎, 1821-1893)의 門下에서 學問을 受學하며 春秋大義(春秋大義)에 立脚한 尊王攘夷 思想을 徹底히 익혔다.

後學 養成 및 基盤 形成 [ 編輯 ]

7寸 再堂叔 人 성재 류중교 1888年 (高宗 25年) 性理學 을 講學(講學)을 하며 弟子를 養成하던 中 1893年 (高宗 30年)에 作故하자, 그는 鄕吏(故鄕)인 춘성군 가정리(柯亭里)을 떠나 文人 및 追從者들과 함께 堤川 壯談(長潭: 忠北 堤原郡 봉양면 공전리)으로 류중교의 遺業을 잇기위해 里居하였다. 以後 後學 養成과 義兵 活動에 專念하였다. 1891年 金平默과 1893年 유중교의 死亡으로 그는 李恒老와 김평묵, 유중교를 모두 繼承, 화서學派의 正統 道脈(道脈)으로 認定받고 學派를 代表할 수 있는 人物로 浮上하게 되었다.

兩家의 再堂叔인 유중교가 1888年 春川으로부터 堤川 壯談으로 移徙와 弟子와 文人들을 養成하던 中 1893年 死亡하자, 그는 再從叔이자 스승인 유중교가 닦아 놓은 基盤을 吸收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의 訪問 以後로도 遊學들이 찾아왔고, 그는 이곳 堤川 壯談을 根據地로 義兵抗爭을 展開하게 된다.

義兵 活動 [ 編輯 ]

義兵 活動 宣言 [ 編輯 ]

當時 화서 李恒老의 門下에는 衿川 임규직 (錦川 任圭直), 段丘 이인구 (丹邱 李寅龜), 槐院 李儁 (槐園 李埈; 李恒老의 長子), 중암 김평묵 (重菴 金平默), 성재 류중교(省齋 柳重敎) 等 傑出한 人物들이 雲集해 있었다. 柳麟錫은 화서 李恒老에게 배우다가 그가 죽자 김평묵, 柳麟錫을 스승으로 하여 學問 硏究를 繼續하였다. 後日 柳麟錫의 門下에는 雲岡 이강년 等이 찾아와 修學하였다. 義菴은 이때에 바로 祭天을 據點으로 抗日義兵抗戰을 展開하였다.

1894年 (高宗 31年)에 金弘集 內閣 이 構成되고 甲午更張 (甲午更張)李 斷行되자, 그는 義兵을 일으켜 忠州 陰性 ㆍ堤川ㆍ 丹陽 等地에서 活潑한 抗日 義兵活動을 展開하였다. 1895年 (高宗 32年) 11月 17日 字로 金弘集 內閣 에서는 陰曆 에서 陽曆 으로 달曆 曆法(曆法)을 바꾸는 것을 宣言하고, 同時에 成人 男子의 머리 상투를 자르라는 斷髮令 을 내렸다.

義兵抗戰은 乙未邊茯苓 ( 斷髮令 )이 내려진 直後 이 '變故(變故)'에 對處하기 위한 方案을 論議하기 위해 高宗 32年 (1895) 尹 5月 2日과 3日 兩日間에 遠近의 文人社友(門人士友) 數百名을 모아놓고 壯談에서 大規模의 講習例(講習禮)와 鄕飮禮 (鄕飮禮 [1] )를 擧行한 것에서부터 由來한다. 規模의 差異는 있으나, 이 行事는 以後 11月 거의(擧義) 直前까지 大槪 10日의 間隔을 두고 定期的으로 열렸다. 이는 곧 義兵抗戰의 準備段階였으며 後日의 거의(擧義)에서도 여기에 參席한 人物들이 核心的 役割을 擔當하였다. 이때 열린 鄕飮禮, 講習例에서 柳麟錫은 當時와 같은 '萬告訴無知代辯(萬古所無之大變)'에 正當하게 處身할 수 있는 다음의 세 가지 行動方案, 곧 處辨삼사 (處變三事)를 提示하였다.

  1. 거의訴請(擧義掃淸) : 義兵을 일으켜 倭敵을 掃蕩하는 안(案)
  2. 거지守舊(去之守舊) : 國外로 亡命해서 大義(大義)를 지키자는 안(案)
  3. 自淨致命(自靖致命) : 義理(義理)를 간직한 채 致命(致命)하는 안(案)

이때 醫민공이 積極的인 行動方案人 거의나 子正을 擇하지 않고 擧手(去守)를 決心한 理由는 當時 그가 養母(養母)인 덕수 李氏 (德水 李氏)의 喪中에 있어 處身에 일정한 制約이 加해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湖左義兵陣 (湖左義兵陳))

湖左義兵 創意 [ 編輯 ]

1896年 1月 12日 그의 門下生 楊平郡 의 怪은 이춘영(槐隱 李春永)과 안승우 等은 김백선의 포군에 參與, 京畿道 지평현 김백선의 포군을 主軸으로 지평현 에서 擧兵을 宣言, 湖左創意라 하고 忠淸北道 堤川 으로 進擊하여 官衙를 陷落시키고 郡守 김익진을 逐出하였다. 이들은 곧이어 堤川에서 서상렬, 이필희, 이범직, 新指數 等이 이끄는 小規模 義兵이 參與하였으며, 忠武公 李舜臣 의 後孫인 이필희를 義兵大將으로 삼고, 서상렬을 軍事(參謀)로 임명하여 戰列을 가다듬었다.

그해 1月 22日 丹陽 으로 간 湖左義兵陣은 公州兵站 所屬의 朝鮮軍 官軍과 日本軍 聯合部隊와 交戰,그러나 官軍-日本軍 聯合軍이 支援軍을 增援받아 오자, 서상렬部隊와 이춘영部隊는 竹嶺 을 넘어 風紀 로 들어갔고, 안승우는 永同으로 退却하였다. 이 消息을 듣고 柳麟錫은 解散危機에 處한 湖左義兵陣에 祕密裏에 傳令을 보내 이들을 모두 江原道 寧越 에 모이게 했다. 寧越에 모인 이춘영, 이필희, 서상렬, 안승우 等은 會議 끝에 유인석에게 義兵將이 되어 줄 것을 懇請하였다. 그는 몇番의 苦心 끝에 湖左義兵大將職을 受諾한다.

湖左義兵將 就任과 開港 反對 活動 [ 編輯 ]

義兵大將職에 就任한 그는 江原道 춘천부 에서 안승우, 이필희, 서상렬 等 文人 社友들과 함께 複數보형(復讐保形, 明成皇后의 怨讐 報復 및 元來의 義理를 지킨다)의 旗幟로, 1895年 12月 24日 全國的인 義兵活動을 宣言하고 檄文 '擊鼓八道列邑(檄告八道列邑)'을 宣言하였다. 이어 聞慶郡 가은의 雲岡 이강년 等도 合流하였다. 湖左 義兵陣은 初期에 안승우, 이필희, 이춘영 等이 募集한 地平 義兵 400餘名을 主軸으로 하고 화서 李杭魯 의 學脈을 淵源을 中心으로 한, 各 地域單位의 小規模 義兵津들이 連結되어 있었다. 그의 湖左義兵陣 參與로 各地의 獨自的 義兵 및 화서 學派 人脈이 義兵에 參與하게 되었다.

義兵將으로 就任한 醫민공은 卽時 抗日義兵戰鬪를 展開하였고, 檄文發表 直後 堤川 으로 回軍해 곧바로 忠州性 攻掠을 準備하였다. 斷髮令 以後 親日開化派 官吏로 이름높던 丹陽郡守 권숙 (權潚)과 청풍郡守 徐相箕 (徐相耆) 等 官僚들을 所謂 토왜 (土倭)들로 規定, 이들을 逮捕하여 斬首하고, 親日改化政策을 펼치던 官吏들에게 警鐘을 울렸다. 柳麟錫의 軍陣은 3000餘 名의 兵力으로, 堤川 , 忠州 , 原州 , 丹陽 一帶에서 官軍을 擊破하고 一帶의 勢力을 形成하였다. 當時 忠州의 觀察府에 朝鮮官軍 400名, 日本軍이 數百 名, 地方軍이 400名이나 集結해 있다는 消息을 接하고, 忠州性 攻掠을 推進 1896年 2月 16日 意外로 쉽게 忠州性을 掌握하였다.

忠州 觀察府 攻略 失敗와 堤川性 陷落 [ 編輯 ]

다음으로 觀察使 가 있는 忠州 觀察府를 攻擊하려 했는데, 忠州는 官軍이 400名, 日本軍이 數百名, 지방군이 400名이나 集結해 있는 軍事的 要衝地였기 때문에 매우 意味가 큰 地域이었다. 高宗 33年 (1896) 陰曆 2月 16日 湖左義兵陣 (湖左義兵陳)은 忠州 觀察府를 攻擊하였는데 意外로 쉽게 占領되었다. 이는 承政院 承旨(承旨) 우기정 (禹冀正)李 3千名을 支援하고, 이호승 (李鎬承)李 5百名을 이끌고 義兵陣을 援助하여 軍事數로는 官軍ㆍ日本軍側에 비해 優勢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實際로는 銃을 가진 義兵은 4百 餘名에 不過해, 新式兵器로 武裝한 官軍ㆍ日本軍에 비해 義兵陣이 戰力面에서는 絶對 劣勢였기 때문에 義兵陣 모두 죽음을 覺悟한 奇襲攻擊을 敢行하여 忠州性 을 占領하였다.

이때에 親日派 觀察使 김규식 (金奎軾)을 逮捕하고 충주성에 入城한 그는 觀察使 김규식 을 삭罪ㆍ處刑하는 한便,〈擊鼓內外百官 (檄告內外百官)〉을 發表하여 親日 開化政策에 同調하는 官吏들의 反省을 促求하였다. 바로 그는 義兵 兵力을 追加募集하기 爲해 서상렬, 원용정, 홍선표 等을 慶尙道 로, 이범직을 忠淸道 로 派遣하여 各地의 民兵을 모으게 하였다. 서상렬은 安東, 醴泉, 烽火, 순흥, 風紀, 永川 等地에 散在해 있던 義兵陣을 糾合, 尙州郡 에 駐屯中이던 日本軍 兵站基地를 攻擊 하였고, 이범직은 忠淸道 巡廻 直前 削髮을 甚하게 强要하여 百姓의 怨聲을 크게 산 天安郡守 김병숙을 찾아가 射殺하였다.

忠州性을 빼앗기고 逃走한 官軍ㆍ日本軍은 城郭外部를 包圍하고 孔性作戰을 펼쳤고, 補給路를 把握하여 義兵陣의 補給路를 遮斷하였다. 補給路를 遮斷당하고 電力이 消耗된 湖左義兵陣은 物資調達에 어려움이 커 더 以上 忠州性을 支撐하지 못하고 20 餘日뒤인 陰曆 3月 4日 에 堤川으로 撤軍하였다고 한다. 以後 宣諭使 臟器렴(張基簾)李 이끄는 官軍에 敗하여 兵力을 잃고에 져서 丹陽(丹陽)으로 退却하였다.

그가 이끄는 湖左 義兵陣이 堤川에 集結해 있다는 消息이 傳해지자, 各處에서 活動하고 있던 義兵들이 堤川으로 모여들었다. 聞慶 이강년 , 迎春의 권호선, 原州 의 한동직, 橫城 이명로 等의 義兵將들이 各自 小規模 義兵部隊를 거느리고 그가 이끄는 湖左義兵陣에 合流하였다. 그는 이강년 을 遊擊場에 임명하였다. 그는 湖左의진을 이끌고 堤川性 을 據點으로 하여 約 3個月 동안 수안보 , 嘉興, 丹陽, 陰性 等을 攻略, 日本軍 및 官軍과 交戰하여 勝利하였다.

內閣은 斷髮令 을 撤回하는 한便, 各 地方으로 線柳委員(宣諭委員)을 派遣해 義兵을 解散시켰다. 內閣의 官軍은 南漢山城 에 있던 義兵陣을 擊破한 뒤, 그 餘勢를 몰아 그의 湖左 義兵陣에 壓迫을 加해 왔다. 斷髮令 이 撤回되었으며, 金弘集 等을 乙未事變 의 責任者로 몰았으며, 親日派들이 逐出된 只今에는 거의 名分이 없어졌으니 義兵을 解散시킬 것을 勸告했다. 그러나 그는 朝廷에서 亡國的인 開化政策을 中斷하겠다고 하지 않는한 義兵抗戰을 繼續할 것이라 答했고, 交戰이 繼續되었다. 5月 26日 까지 官軍은 湖左義兵陣에 對해 大規模 攻勢를 加했다. 宣諭使 臟器렴이 指揮하는 官軍의 攻擊에 거듭 敗北하다가 5月 26日 堤川性 을 喪失, 勢力이 急激히 弱化되자 그는 一部 兵力을 귀가시키고, 끝까지 뜻을 함께하기로 한 一部 兵力을 이끌고 淸나라 軍과 年代를 決定한다.

亡命과 召喚, 재亡命 [ 編輯 ]

그는 火繩銃 等으로 武裝한 義兵으로는 新式 小銃 과 手榴彈 等으로 武裝한 日本 郡이나 朝鮮 官軍과 對敵이 不可能하다 여기고 새로운 戰略을 構想하였다. 堤川에서 大規模 兵力을 잃고 그는 丹陽郡 으로 軍士를 이끌고 退却, 戰列을 가다듬었다. 곧 淸나라 의 軍事的 援助를 期待하고 西北行을 決心, 다시 兵力을 추슬러 平安北道 로 引率, 移動했다. 忠北 丹陽을 떠난 湖左義兵陣은 風紀, 迎春, 忠州, 音聲, 槐山, 原州 等地를 轉轉하며 간간히 官軍 및 日本軍과 小規模 戰鬪를 벌였고, 6月 10日 에는 原州 江天(康川)에서 西北行을 最終 決定한다. 月, 旌善, 平昌, 江陵, 對話를 거쳐 楊口, 淮陽, 平康, 소금강, 安邊, 永興으로 移動하였으며 行軍 途中 소토長이었던 서상렬이 戰死하였다.

義兵陣을 이끌고 平安南道 로 가 陽德郡, 孟山郡, 덕천군 一帶에 駐屯하였다. 그러나 地域의 觀察使, 郡守가 義兵陣을 壓迫하였고, 軍士를 더 以上 駐屯시킬 수가 없어 當初의 計劃대로 再起抗爭을 圖謀하는 것이 不可能하게 되었다. 淸나라 의 軍事的 援助를 期待하고, 안된다면 日本이 모르는 未知의 場所에서 兵力 結集을 推進했다. 그는 義兵을 引率하여 北上을 繼續하여 寧邊, 運算을 거쳐 8月 23日 鴨綠江 便 醋酸에 到着하였다. 官僚와 知識人들의 覺醒을 促求하는 才格백관문(再檄百官文)을 宣言하고, 以後 다시 鴨綠江 을 건너 서 肝도 회인현(懷仁縣)으로 갔다가 그곳에서는 회인현(懷仁縣) 태수 鉏本禹 에게 武裝 解除를 當하게 되어, 같은 해 9月 28日 魂江에서 義兵을 解散시키게 되었다.

회인현 태수 서본우는 義兵들이 武器를 所持하고 入國하는 것은 不法이라며, 武器를 버릴 것을 要求했다. 淸나라 의 支援을 要請하러 베이징 에 이범직 等을 다시 先發隊로 보냈다가 淸나라 軍士에게 武器를 빼앗기고 部下 20名과 함께 살해당하자, 9月 28日 勳江 (魂江, 琿江) 邊에서 그때까지 그를 따라온 219名의 義兵을 于先 解散, 故鄕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歸家를 許容했으나 一部 兵力은 끝까지 그를 따라 以後 랴오둥 으로 옮겨갔다. 柳麟錫은 朝鮮人 出身이 많이 居住하던 퉁화 縣 으로 건너가 誤道具에 定着, 武器와 사람을 糾合, 再起를 計劃하였다. 이때 화서學派 系列 中 그의 文人, 祠宇 中 相當數 適當한 義兵 養成 및 軍事訓鍊地域인 一名 囚衣處(守義處)를 物色, 大擧 西間島로 亡命하였다. 西間島로 亡命한 이들을 만난 柳麟錫은 "怨恨을 품고 苦痛을 참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忍痛含寃 迫不得已)"라 하며 義兵의 재거病을 計劃했다.

1898年 (光武 2年) 3月 高宗 이 召喚, 高宗의 召喚令을 받고 바로 歸國했다가 1899年 다시 랴오둥 으로 건너가 性理學 學問 講義와 著述, 硏究 活動에 專念하였다. 1900年 初 그가 中國에서 活動하고 있을 때 日本軍은 祕密裏에 兵力을 보내 그가 滯留하던 집에 放火, 暗殺을 試圖한다. 曾孫의 證言에 依하면 "日本軍이 義菴의 草家집에 불을 질러 불을 避해 뛰쳐나오는 男子들을 銃으로 쏴 沒殺하는 蠻行을 저질렀다"면서 "當時 상투를 풀고 있었던 할아버지(유해동)는 머리가 길어 日本軍이 女子로 錯覺하고 살려줬다 [2] " 한다. 이때 그는 奇跡的으로 生存하였다.

1900年 7月 義和團의 亂 을 避하여 다시 歸國하였다. 以後 黃海道 평산 平安道 泰川 , 개川 , 湧泉 等 西北 地域 各地를 오가며 靑年 壯丁들에게 글과 性理學 學問을 가르치고, 文人을 養成하였다. 그는 尊華攘夷論에 立脚한 抗日 意識과 자주 國權 回復을 力說하였고, 이때 그의 門下에서 輩出된 백삼규, 이진룡 等은 義兵將으로 活動했다. 이때 그는 黃海道 平山郡 의 汕頭再(山斗齋), 价川郡 의 숭火災(崇華齋), 殷栗郡 의 興到敍事(興道書社), 平安南道 龍川郡 의 玉産災(玉山齋) 等地에서 講義를 하며 글과 學問을 가르치는 한便 그는 이 곳들을 據點으로 鐵山, 按酒, 先天, 平壤, 龍岡, 黃海道 海州 等地를 여러番 不斷히 往來하면서 弟子들을 기르고, 또 큰 邑內에 直接 가서 鄕飮禮와 江習禮를 隨時로 열고 方法을 알려주어, 春秋大義와 尊王攘夷 意識을 鼓吹시켰다.

1902年 (光武 6年) 國內에 있던 그의 門下生들이 그의 글을 모아 《昭義新編(昭義新編)》을 刊行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亡命과 義兵 活動 [ 編輯 ]

1904年 8月 漆室分擔을 著述하였다. 같은 달 배성일戰을 宣言하고, 깊고 넓은 外國으러 떠나 擧國壽衣를 함이 마땅하다고 宣言하였다. 또한 그는 一進會 에 抵抗하거나 啓蒙할 目的으로 黃海道 , 平安道 , 忠淸道 等地를 돌아다니며 邑內에 靑年들을 모아 鄕約 을 組織하고, 自己 마을로 돌아가 鄕約 을 施行할 것을 積極 奬勵하였다.

1905年 (光武 9年) 11月 乙巳 保護 條約 이 締結되자, 義兵活動 參與를 全國에 呼訴하는 한便, 全國의 識者들에게 말과 글로라도 抵抗할 것을 呼訴하였다. 그는 비록 義兵에 參與할 수 없더라도 各自 位置에서 宜土, 언吐라도 하며 日本을 糾彈瑕疵 하였다.

그 뒤 滿洲 로 亡命했으며, 對한 光武 11年 (1907)에 헤이그 特使 事件 · 高宗 强制退位 事件 · 大韓帝國 軍隊解散 造作事件 後, 全國의 義兵·解散 軍人들이 原州等에 모여 13道 倡義軍 (倡義軍)을 組織하여 抗日義兵運動을 展開해 나갈 때, 醫민공은 平安 ( )도 順川郡 에서 김여석 과 함께 義兵을 일으켰다. [3]

정미 7조약 이 締結되자 그는 國內 活動을 더 以上 持續할 수 없다고 判斷하고 沿海州 亡命을 決心, 1908年 (隆熙 2年) 7月 釜山港 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沿海州 블라디보스토크 로 건너갔다.

병든 한 몸 작은데 휘달리는 배는 萬里도 가벼워라

나라의 壽命은 只今 어떠한지 天心(天心)이 이 길을 재촉하네
風雲은 隨時로 變하고 해와 달만이 홀로 밝게 떴어라
周圍의 한가로운 소리 나의 心情만 아득해지네

以後 그는 崔在亨 (崔在亨), 이상설 (李相卨), 安重根 (安重根), 이범윤(李範允) 等과 隨時로 交流하거나, 連絡을 주고 받으며 義兵陣 構築을 計劃하였으나 活動地域의 距離가 있었고, 資金難, 人力難 等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이상설, 李範允 等과 함께 꾸준히 交流하며 滿洲 內에 分散된 抗日 朝鮮人 勢力을 하나로 統合하고자 꾸준히 努力하고, 新規 義兵 參與 募集 亦是 督勵하였다. 1910年 (隆熙 4年) 6月 沿海州에서 國內外 義兵을 單一 指揮系統으로 統合할 目的으로 하는 13道義軍 (十三道義軍)을 組織하였다.


13道義軍 組織과 亡命 義兵活動 [ 編輯 ]

1909年 (隆熙 3年) 6月 沿海州 義兵 勢力의 統合체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에서 對한13도의군 이 結成되고, 그는 이상설 , 이범윤, 이남기 等에 依해 對한13도의군 도총재 (大韓十三道義軍都總裁)에 推戴되었다. 바로 그는 布告文 '通告13度帶蘇同胞(通告十三道大小同胞)'을 盤浦, 萬百姓이 一致 團結하여 最後의 한사람까지 日本을 相對로 한 救國戰을 벌일 것을 宣言하였다. 이어 擧兵을 宣言, 兵力을 이끌고 豆滿江 으로 쳐들어오려다가 失敗, 朝鮮 - 러시아 國境地帶에서 러시아 官憲에게 逮捕되었다가 풀려났다.

1910年 (隆熙 4年) 10月 2日 韓日 合邦 條約 締結 消息이 傳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 地域과 隣近 沿海州 地域에 居住한 一部 韓人 知識人들은 신한촌 ( 英語版 ) (新韓村)의 閑民學校에 모여 韓人大會를 開催하고 聲明會를 組織하였다. 聲明會 라는 團體이름의 뜻은 '敵의 罪를 聲討하고 우리의 抑鬱함을 밝힌다(聲彼之罪 明我之寃)'는 뜻이며, 聲明會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滯留中이던 柳麟錫을 招聘하여 聲明會의 銃대(代表)로 推戴되하였다. 當日로 聲明會 趣旨文을 發表하여, 祖國 光復의 그날까지 日帝와 鬪爭할 것을 決意하였다. 그리하여 10月 聲明會 代表로 就任한 卽時 韓日 合倂反對 署名運動을 展開하여 朝鮮人 同胞와 良心的 中國, 러시아 知識人들의 署名을 付託하고, 이를 國際社會에 알릴 計劃을 세웠다. 이어 中國, 러시아 隣近에 散在한 主要 獨立運動家와 一部 外國 知識人들의 呼應으로 8,624名의 署名을 받았다. 그는 서명록은, 列强에게 韓民族의 獨立 決意를 闡明하고 그 支持와 後援을 要請하는 [聲明會 宣言書]의 副本으로 8624名의 延命 署名을 添附되어 美國 , 러시아 , 中華民國 等 各國 政府 및 入手한 新聞社로 發送되었다.

大韓帝國 의 國權피탈 以後에도 그는 朝鮮 땅으로 進軍하는 獨立運動 을 繼續하였고 이상설 等과 豆滿江 沿岸으로 進擊하려 했으나 挫折되었다. 日本 外務省 은 러시아에 强力하게 抗議하는 한便 러시아 에 使節을 보내 外交的 交涉을 推進, 沿海州 一帶의 朝鮮人 抗日 運動 解散 및 追放을 여러次例 要求하였다. 日本의 거듭 要請으로 이상설 , 이범윤, 이규풍, 김좌두 等의 抗日 運動家들과 柳麟錫의 門下生들은 一時 逮捕 投獄하고 러시아 의 13道義軍의 解散通告를 받고 瓦解되고 말았다.

柳麟錫은 後日을 圖謀하고 이들의 釋放을 條件으로 13道義軍 을 解散했으며 手話終身(守華終身)할 것을 主張하고, 이에 따라 그 自身도 沿海州를 떠나 滿洲 로 갔다. 1913年 2月 그는 西間島로 가는 길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목化村(木花村, 현지어로 프시에트)에 暫時 滯留하며 中華論的 華夷觀에 立脚해 東西洋의 文物制度 等을 問答體의 形式으로 論述한 《宇宙問答(宇宙問答)》을 著述, 刊行하였다. 1914年 3月 奉天性 (奉天省) 서풍현(西豊縣)으로 옮겨서 生活하고 西間島 亡命 生活에 들어갔다. 그해 5月 興京縣(興京縣) 難天子(暖泉子)로 옮겼다가 다시 奉天性 觀戰縣(寬甸縣) 房吹口(芳翠溝) 部落에 到着하였다.

著書로는 文集 《義菴집 (毅菴集)》과 《昭義新編 (昭義新編)》, 《화동속강목 (華東續綱目)》, 《宇宙問答(宇宙問答)》, 亡命 前 著述한 共著 《創意見聞錄 (倡義見聞錄)》 等이 있는데, 유인석이 지은 檄文人 擊鼓八道列邑(檄告八道列邑), 擊鼓內外百官(檄告內外百官), 還國地初産鎭靜待罪소(還國至楚山陳情待罪疏) 等과 그 外에도 곽종석의 布告天下門(布告天下文), 윤석봉(尹錫鳳)의 相互座義兵將서(上湖左義兵將書), 그밖에 朝鮮 高宗高宗 의 哀痛兆 等이 收錄되어 있다. 1915年 1月 29日 滿洲 펑톈性 (奉天省) 觀戰縣(寬甸縣) 房吹口(芳翠溝)에서 病死했다.

事後 [ 編輯 ]

그를 따르던 아들 류해동(柳海東)은 義兵將 박장호(朴長浩) 麾下에 들어가 그를 補佐하여 義兵活動에 參與하다가, 1919年 南滿洲에서 結成된 大韓獨立團 組織에 參與하고 總裁祕書에 選任되기도 했다.

解放 後 屍身은 國內로 운구되어 江原道 춘성군 南面 가정리 산91번지(현, 春川市 南面 가정리 산91번지)로 移葬되었다. 그의 墓所와 祠堂 周邊은 後日 江原道 記念物 第74號로 指定되었다.

大韓民國 政府 는 그의 貢獻을 기리기 위해 1962年 建國功勞勳章 服裝(現 建國訓長 大統領章)을 追敍하였다.

著書 [ 編輯 ]

  • 《義菴집(毅菴集)》
  • 《昭義新編 (昭義新編)》 (1902)
  • 《漆室分擔》
  • 《화동속강목 (華東續綱目)》
  • 《宇宙問答(宇宙問答)》
  • 《創意見聞錄(倡義見聞錄), 共著
  • 圖謀便, 未完成作

思想과 信念 [ 編輯 ]

그의 스승 화서 李杭魯 는 學問的, 思想的 衛正斥邪 論을 펼쳤던 것에 對하여, 柳麟錫은 積極的으로 開花, 個項에 抵抗하는 實踐的 衛正斥邪論을 實踐, 展開하며 全國的인 義兵 運動을 推進해나갔다. 그는 義兵活動에 參與를 拒否하는 이들을 批判, 射殺하기보다는 말과 글로라도 日本과 個項에 抵抗할 것을 勸告했으며, 直接 西北地域의 큰 邑內를 다니며 靑年壯丁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한便 春秋大義와 尊王攘夷 思想을 傳授하였다.

身分秩序 維持論 [ 編輯 ]

義兵 內部의 身分 葛藤은 活動의 가장 强力한 障礙 要素였다. [4] 麾下 義兵將 中 兩班 안승우에게 無禮하게 對했다는 理由로 김백선을 處刑하였다.

그는 義兵活動 過程에서 身分秩序의 維持를 重要視 하였다. 柳麟錫은 兩班인 안승우에게 無禮하게 굴었다는 理由로 忠州性 戰鬪에서 큰 功을 세운 平民 指揮官 김백선을 處刑한 것이 代表的 事例다. 김백선은 日本軍 陣地를 攻擊하던 中 援軍이 오지 않아 敗北하자 援軍을 보내지 않은 中軍將 안승우에게 거세게 抗議했는데, 柳麟錫은 軍紀를 紊亂하게 했다는 罪目으로 오히려 김백선과 그의 아들까지 處刑했다. [4]

平等思想 反對論 및 自由 反對論 [ 編輯 ]

柳麟錫은 모든 人間이 平等할 수가 없다고 力說했다. 오히려 人間은 平等 을 말하면서도, 뒤로는 어떻게든 貴賤을 나누고 區別할 것이라고 力說하였다. 天地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萬物에는 크고 작음이 있다. 人間에게도 賃金과 臣下, 아비와 子息, 男便과 아내, 어른과 젊은이, 윗사람과 아랫사람, 貴한 사람과 賤한 사람의 區分이 있으며, 成人과 普通 사람이나 지혜로운 者와 어리석은 者 같은 差異가 있는데, 어찌 서로 平等하겠는가? [5]

平等 이란 곧 無秩序이며, 無秩序란 곧 混亂이다. [5] 自由 란 곧 辭讓하지 않음이며, 辭讓함이 없다면 곧 싸움이다. [5] 只今 世上이 混亂하고 싸움이 잦은 理由는 다름이 아니라 平等과 自由라는 思想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平等과 自由를 主張하면 어지러운 다툼의 마음이 일어나 行動으로 어지러운 다툼을 일으키게 된다. 天下가 平等과 自由로 歸依하면 어지러운 다툼의 마음이 일어나 行動으로 어지러운 다툼을 일으키게 된다. 萬若 이런 思潮가 그치지 않는다면 人類는 張差 衰殘해 없어질 것이요, 天地도 반드시 崩壞됨에 이를 것이다. [5]

그는 男女平等에 對해서도 反對하였다. 男女平等 論이 나타나기 始作하자 짐승처럼 變할 수 있다고 指摘했다. 그는 '只今 사람들은 男女를 모두 同等하게 許容하니, 어찌 天地의 道理를 본받는다 말할 수 있겠는가? 크게 본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禽獸만도 못하다 할 수 있다. 女子들이 平等과 自由를 말하며 배우는데, 그 學習이 늘어나서 男便과 平等한 데에 그치면 그나마 多幸이겠지만, 반드시 自己를 높여 男便을 눌러 追越하기 쉽다. 자유로워짐에 그치면 多幸이겠지만, 반드시 男便을 오히려 自由롭지 못하게 하기 쉽다. [5] '고 指摘했다. 이어 '男便에게 이미 그렇게 하고 父母와 媤父母에게도 그렇게 해서, 結局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다. 또 子息은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敎育을 받는데 어머니의 處身이 이와 같으니, 아들도 곧 망치게 되고 그것이 孫子에게까지 미쳐 망가질 것이다. [5] '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平等 自由 秩序 를 어지럽히는 根幹으로 規定했다. 또한 平等과 自由를 理由로 분별없는 小人輩들이 蕃盛할 機會가 된다고 보았다. 平等과 自由는 萬古天下에 견줄 데 없는 가장 나쁜 설이니,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거리낌 없게 하고 사람들을 모두 小人輩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5] 이런 것을 中國 朝鮮 에서 施行할 수 있겠는가? [5] 그는 自由와 平等이 오히려 사람들을 小人輩로 만들 것이라 내다봤다. 그는 "平等과 自由는 無秩序와 讓步를 모르는 自由를 낳게 된다 [6] '고 보았다.

自由의 裏面에 숨겨진 問題點 指摘 [ 編輯 ]

그는 自由 , 自由主義 에 對해서 물러섬이 없다, 辭讓함이 없다고 하여 自由의 裏面에 他人에 對한 尊重과 相衝하지는 않는지 指摘했다. 그는 '自由란 곧 辭讓하지 않음이며, 辭讓함이 없다면 곧 싸움이다 [5] '라고 내다보았다.

女學校 反對論 [ 編輯 ]

柳麟錫은 獨立協會 에서 女性 敎育論을 主張한 서재필 , 女性 學校를 漸進的으로 推進하자는 윤치호 等의 見解를 正面 反駁, 女學校는 오히려 人間을 짐승처럼 만드는 곳이며, 無禮하게 만들수 있다며 反駁하였다. 그는 '所謂 女學校 라는 것은 天地를 본받지 않아 禽獸와 같은 사람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아! 수많은 聖賢이 다스리고 가르친 中國과 天下에서 特別한 禮儀의 나라인 朝鮮이 어찌 이렇게 형편없고 罔極한 일을 한단 말인가 [5] '라며 反駁하였다.

그는 '오늘날 男女는 마땅히 平等하고 各其 自由라 하면서, 男子도 學校가 있고 女子도 學校가 있어 男女가 함께 움직이니, 이는 天地에 높고 낮음이 없는 셈이다. 땅이 스스로 이루는 게 있어 보이지만 정작 하늘을 代身해서 스스로 이루는 것은 없으며, 땅이 하늘에 順從함이 없이 하늘과 同行하면 하늘보다 剛해진다. 땅이 하늘에 順從해야 調和가 이루어지는데도 오늘날에는 하늘과 땅이 同等하게 움직여서 調和가 없어졌다 [5] '고 指摘했다.

그는 女學校 가 나라를 망칠 것이라 主張했다. 그에 依하면 '똑똑한 男便이 城을 쌓으면 똑똑한 아내는 城을 기울게 한다. 예로부터 나라와 집이 있는 사람이 어찌 똑똑한 女子로 말미암지 않고도 다른 理由로 敗亡한 적이 있는가? 只今 女子들은 學校에 다녀, 純全한 姿勢를 버리고 奇異하고 淫蕩한 버릇을 즐긴다. 안으로는 貞操를 무너뜨리고, 밖으로는 바깥일을 懇切히 바란다. 한갓 약삭빠른 態度를 기르고, 臨機應變의 技巧만 익힌다. 그 放恣함에 거리낌이 없어서 똑똑한 女子 되려는 努力에 끝이 없게 된다. [5] '고 하였다.

그는 自身의 著書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亡하니, 한 나라에서 암탉이 운다면 어찌 幸運이 있겠는가? 天下에서 암탉이 울면 天下에 어찌 좋은 일이 있겠는가? 슬프다 [5] '며 '어디서 聖雄과 英雄이 일어나 只今의 저 西洋式 男女學校를 撤去하고 옛날의 度를 回復해 사람들로 하여금 三代 ( 賃金 時節)의 蕃盛한 때를 다시 보게 할 것인가 [5] '라며 歎息했다.

家族 關係 [ 編輯 ]

  • 父親 : 류중곤(柳重坤)
  • 母親 : 高齡 申氏
    • 兄弟 姊妹 : 3男 2女
  • 養아버지 : 류중선(柳重善)
  • 養어머니 : ?
    • 本人
    • 첫째夫人 : 餘興 閔氏(?~1867)
    • 둘째夫人 : 慶州 鄭氏
      • 아들 : 류해동 (柳海東, 1891.11.12 ~ 1981.2.25)
      • 아들 : 類題函 (柳濟咸, 1884.10.26 ~ 1964.5.13)
    • 再從兄 : 류홍석 (柳弘錫, 1841 ~ 1913)
  • 量 7村숙 : 류중교

기타 [ 編輯 ]

  • 安重根 이토 히로부미 狙擊 直前 유인석에게 計劃을 報告했다. 柳麟錫은 이를 外部에 알리지 않고, 成功하면 日本의 잘못을 世界에 알릴 수 있다며 安重根 을 激勵하였다. 그는 이 計劃을 外部에 알리지 않고 메모해두었고, 아들 류해동이 쓴 義菴藥師에 收錄되었다.
  • 그의 晩年 居住地이자 임종한 滿洲 房吹口(現, 觀戰縣 步달元香 小高嶺地 第1小組 여우골)에 있던 집은 解體되고 집터 附近에 1994年 5月 觀戰 滿足自治玄 民族事務委員會 사지판공실에서 義菴肌痹(記念碑)를 세웠다. 碑文에는 "李朝 末期 朝鮮儒林 終章 著名義兵將 유인석 號 義菴, 晩年에 이곳에서 隱居하였다. 1915年 3月 14日 兵士. 享年 73歲. 功은 世上에서 ‘手話終身’을 實踐하였다. 觀戰 滿足自治玄 民族事務委員會 四肢辦公室 1994年 5月 日 세움"이라 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鄕飮禮, 經書(經書)를 中心으로 옛글을 講論하는 것을 目的으로 하는 儒生들의 一種의 不定期的인 集會를 말한다. 講誦(講訟)의 有無에 따라 講習禮와 鄕飮禮가 區別되었던 듯하다. 壯談(長潭)의 講習例 때에는 强壯(講長), 嬪嬙(賓長), 중빈(衆賓), 諸生(諸生), 事例(司禮), 毒홀(讀笏), 사강(司講), 事情(司正)의 順序로 강송이 進行되었다.
  2. 光復 65돌…抗日義兵將 유인석 先生 曾孫 유연창 翁 每日經濟 2010.08.13.
  3. 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 第1卷 : 義兵抗爭社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1970年
  4. 김태웅, 金大鎬, 《韓國 近代史를 꿰뚫는 質問 29》 (아르떼, 2019) pp.379
  5. 유인석 義菴집 51 宇宙問答
  6. 정재식, 《意識과歷史: 韓國의文化傳統과社會變動》(一潮閣, 1991) 267 페이지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