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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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영 (方一榮, 1923年 11月 26日 ~ 2003年 8月 8日 )은 大韓民國 의 言論人·經濟人·企業人이며 朝鮮日報 (朝鮮日報)의 2代 會長이다. 1943年 조선일보社에 入社하여 1999年까지 勤務했다.

그 밖에 일신紡織의 社外理事로 招聘되기도 하였고, 各種 奬學 事業을 後援하였으며 1994年 에는 방일영國樂賞 을 制定하여 每年 韓國 의 優秀 國樂人들을 施賞하였고, 1995年 5月 에는 방일영文化財團을 設立하여 文化藝術人 支援事業을 推進했다. 1945年 暫時 楊州郡 淸의 面書記로 勤務하였다.

朝鮮日報 9代 社長 방응모 의 孫子이자, 以後 朝鮮一步 會長을 지낸 방우영 의 兄이다. 첫째 아들 방상훈 은 2006年 基準으로 朝鮮日報 社長이며, 둘째 아들 방용훈 은 前 코리아나 호텔 代表理事이다. [1] 밤의 大統領 [2] , 밤의 皇帝 이라는 別稱이 있다. 平安北道 博川出身으로 本貫은 溫陽 이며, 雅號는 愚草(愚礎)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1923年 11月 26日 平安北道 博川郡 加算便 동문동에서 태어났다. [3] 號는 愚草(愚礎)이다. [4] 本貫은 溫陽(溫陽)이고, 本籍은 京畿道 議政府(議政府市)이며, 出身地는 平安北道 博川郡(博川郡) 가산면(嘉山面: 現 남신리)이다. [5] 아버지 방재윤은 放鷹곤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三寸 방응모 의 養子로 入養되었다. 그가 태어나기 前에 방재윤 방응모 의 養子가 됐고, 그는 방응모의 孫子로 出生했다. 그 뒤 할아버지 방응모 를 따라 京畿道 楊州郡 議政府 (1963年 議政府市로 昇格)로 移住하였다.

京城第一高普(景氣中學校 前身)를 거쳐 日本으로 留學 中央大學 豫科를 卒業한 뒤 1943年 조선일보社에 入社하여, 1999年 理事 顧問職을 辭任할 때까지 55餘 年 동안 조선일보에 몸담아 왔다.

太平洋 戰爭 戰後 [ 編輯 ]

1943年 入社, 그해 社長祕書가 되었다. 日帝强占期 에 經營難에 逢着한 조선일보를 차지한 방응모 의 養子로 入籍한 방재윤 의 長男으로, 1943年 祖父인 방응모의 祕書로 조선일보에 入社했다. 이 때가 조선일보 廢刊 時點이어서 '新聞 없는 조선일보사' 職員이 된 셈이다. 그러나 돈이 아까운 줄 모른다는 理由로 祖父에 依해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방일영은 1944年 11月 세 살 아래 박현숙과 結婚했다. 박현숙은 漢學者인 父親 박순흠과 고영선의 넷째 딸로 숙명여고를 卒業했다. 한 해 前 동생 방우영의 英語敎師였던 이용덕이 박현숙의 黑白 寫眞 한 張을 들고 방응모를 찾아온 것이 結婚으로 이어졌다. [6]

太平洋 戰爭 當時 그도 學徒兵 徵集 對象者가 되었다. 할아버지 방응모 는 孫子 방일영이 學兵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백병원 設立者인 故鄕 後輩 백인제 를 불러 相議했다. 이때 백인제 는 방일영의 왼쪽 뺨 귀 밑에서부터 턱까지 生살을 째는 手術을 執刀했다. 그런 뒤 방일영은 一旦 徵集이 免除되는 面書記를 했다. [7] 1945年 봄부터 여름까지 양주군청 所屬 面書記를 지냈다.

記者 活動 [ 編輯 ]

1945年 11月 23日 朝鮮日報 의 復刊에 參與하였다. 朝鮮日報 가 復刊된 뒤인 1950年 7月 社長 방응모가 拉北되자 같은 해 10月 17日 取締役(移徙)에 選任됐고 韓國 戰爭 以後 避難했다가 休戰 後 歸還, 1954年 31살의 젊은 나이로 朝鮮日報 의 代表 取締役에 就任해 經營權을 잡았다. 그러나 방응모 의 拉北 9年 뒤까지는 形式的으로 방응모가 代表였고, 朝鮮日報 1979年 發行分까지도 發行人은 방응모의 名義로 되어 있었다.

방응모 事後 沒落한 朝鮮日報 를 다시 일으켰다. 韓獨黨 원에 金九 의 路線을 追從한 방응모 는 野黨 人士로 分類되었고, 韓國戰爭 으로 拉北되어 死亡하면서 조선일보는 沒落했으나 內紛을 收拾하고 다시 會社를 일으켜 세웠다. 1974年 방일영奬學會를 組織 [8] , 苦學生들의 奬學金을 支給하였다.

조선일보 會長 推戴 以後 [ 編輯 ]

1964年 11月 15日 會長에 就任하는 同時에 동생인 방우영 조선일보 名譽會長을 朝鮮日報 代表理事 兼 社長으로 임명해 一線 經營을 맡겼으며, 1970年까지도 實質的인 經營權을 行使했다. 방우영은 1970年부터 實質的인 經營權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成長期를 主導하게 된다. 1993年 3月에는 持病인 糖尿로 인해 조선일보 理事 顧問職까지 辭退하며 經營一線에서 完全히 물러났다.

朝鮮日報 在職期間 中이던 1980年 對 조선일보를 急膨脹시켜 發行有價部數 1位의 新聞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같은 成長過程은 1980年 光州民主化運動 以後 전두환 軍事政權과의 癒着이 큰 밑바탕이 됐고, 코리아나 호텔 特惠 疑惑 等 적잖은 是非를 낳기도 했다. [9] 또한 大統領選擧 等 主要한 政治轉換期마다 强한 政派性을 드러내 ' 안티朝鮮 ' 運動을 自招하기도 했으며 只今도 '族閥言論' 論難에 휘말려있는 狀態다. [10]

1975年 방일영의 私財(私財) 出捐金으로 '방일영奬學會'를 法人으로 發足했다. 방일영은 방우영과 兄弟가 保有한 15%를 財團의 基金으로 새로 出演하고, 20年間 運營되어 왔던 '방일영奬學會'의 奬學基金 15億 餘원을 合해 그 해 11月 非營利 公益法人으로 방일영奬學會(財團)을 設立했다.

방일영奬學會는 1974年부터 서울大·連帶·고대 學生들을 每年 10餘名 選拔해 授業料 全額과 生活費를 支給해 왔다. 只今까지 3百30餘名이 奬學金을 받았고, 最近에는 大學院生에까지 受惠 幅을 넓혔다. 이들은 卒業 後에도 書中會라는 이름으로 活潑히 交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1]

1993年 조선일보 會長職을 辭退, 會長職을 동생 방우영 에게 넘기고 조선일보 名譽會長이 되었다. 社會問題에도 關心을 갖고 1994年 방일영國樂賞 等을 制定하여 優秀 國樂人을 發掘하여 直接 褒賞하기도 했다. 그 밖에 溫陽方氏 中央宗親會 第3代 會長을 지내기도 했다.

末年 [ 編輯 ]

1995年 5月 에는 방일영文化財團 을 設立하여 文化藝術人에 對한 後援事業을 主管했다.

1999年 일신紡織 社外理事에 選任되었고, 同年 大韓民國 金冠文化勳章을 授與받았다. 그해에 할아버지 방응모 의 家廟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3年 朝鮮日報 社 顧問으로 推戴되었고, 2003年 8月 8日 새벽 2時 5分頃 서울대 病院에서 宿患으로 死亡했다. 死亡 當時 그의 나이 滿81歲였다.

事後 [ 編輯 ]

8月 8日 午前 10時 서울대병원 葬禮式場 1號室에 殯所가 마련됐다. [3] 그 날 午後, 이福 叔父 방재선 이 家族을 데리고 殯所에 弔問하러 왔다가 尙州들로부터 弔問拒否를 當하고 强制로 追放되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3] 2004年 6月 忠南 牙山市 용화동 '溫陽方氏(溫陽方氏) 中始祖神壇墓園'에 방일영 頌德碑가 세워졌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言論文化의 暢達에 寄與했다는 評價가 있다. 批判으로는 第3共和國, 4共和國 當時 밤의 皇帝으로 君臨하며 勸言癒着에 加擔한 張本人의 한사람이라는 批判이 있다. 그 밖에 안티朝鮮 運動을 自招했다는 批判도 있다.

기타 [ 編輯 ]

2001年 9月 叔父 방재선 으로부터 濠洲相續權 訴訟을 當했다. 그러나 法院은 庶子와 養孫子가 있을 境遇 養孫子에게 濠洲相續權이 適用된다며 방일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私生活 [ 編輯 ]

방일영은 性的으로 紊亂한 삶을 살았다. 死後의 遺産다툼에서 長男 방상훈 의 辯護士는 '잘 아시겠지만, 選對 會長님은 大韓民國 妓生들 머리를 가장 많이 올리신 분'이라고 말했다. [1] 事後 一部 婚外子들이 朝鮮日報 와 방일영의 혼내자들을 相對로 訴訟을 提起하기도 했다.

家計 [ 編輯 ]

그의 長男 방상훈 은 獨立運動家 兼 啓蒙運動家 윤치호 의 曾孫女이자 鐵道廳 副理事官 윤영구 의 딸 윤순명과 結婚했다.

魂내자 3名(1女 2男), 婚外子 6名(첫 番째 肝通商奸女 3男, 두 番째 肝通商奸女 2女 1男)이 있다. [12]

기타 [ 編輯 ]

受賞 經歷 [ 編輯 ]

參照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방일영文化財團, 《激浪60年 방일영과 朝鮮日報》 (방일영文化財團, 1999)
  •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