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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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
朝鮮日報
創立 1920年
서비스 新聞發行業
本社 所在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中區 世宗大路21길 30 (태평로1街)
核心 人物
방상훈 (會長)
방준오 (代表理事 社長)
홍준호(代表理事 副社長)
賣出額 299,130,897,253원(2019年 基準)
營業利益
30,120,594,938원(2019年 基準)
25,444,188,359원(2019年 基準)
資産總額 597,324,041,776원(2019年 12月 基準)
主要 株主 방상훈 30.03%
방성훈 16.88%
방일영文化財團 15%
방우영 12.08%
그 外 株主 26.01% [1]
從業員 數
479名(2016年 12月 基準)
某企業 朝鮮미디어그룹
子會社 디지틀조선일보
朝鮮放送
朝鮮뉴스프레스
朝鮮미디어렙
資本金 18,020,000,000원(2019年 12月 基準)
웹사이트 www .chosun .com/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朝鮮日報
國家 大韓民國
言語 韓國語
刊行週期 日刊
種類 全國版 綜合日刊新聞
板形 타블로이드倍版
創刊日 1920年 3月 5日
價格 1部 1,000원, 月 20,000원
發行人 홍준호
웹사이트 chosun.com
2000年에 새로 改正된 朝鮮日報 메인타이틀

朝鮮日報 》(朝鮮日報)는 1920年 3月 5日 創刊한 大韓民國 의 朝刊 日刊紙이다. 韓國語 新聞 中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朝鮮미디어그룹의 조선일보社에서 發行한다. 2020年 基準, 大韓民國 內에서 有料 附隨 100萬部가 넘는 唯一한 新聞이자, [2] 大韓民國 에서 影響力 있는 미디어로 손꼽힌다. [3]

歷史 [ 編輯 ]

朝鮮日報 復刊을 祝賀, 金九의 親筆揮毫

조선일보는 1919年 3.1運動 이 發生한 지 1年이 지난 1920年 3月 5日 대정실업친목회 에 依해 創刊되었다. 그 해 4月 28日子 에 실린 英親王 科 日本 王族인 마사코( 이방자 )와의 强制結婚을 批判하는 記事로 인해 押收 當했고 같은 해 8月 15日에 대정실업친목회가 約束했던 資本金 拂入을 하지 못해서 대정실업친목회 副會長이었던 初代 社長 조진태가 물러나고 辯護士 出身 2代 社長 유문환 이 就任했다. 같은 해 8月 27日에는 訪韓한 美國 議員團을 歡迎하는 朝鮮人들을 日本 警察이 不當하게 彈壓했다고 批判한 論說을 실어서 1週間 停刊을 當했다. 같은 해 9月 5日子에 실린 "當局의 所謂 文化 統治 는 奇怪(奇怪)치 아니한가"라는 論說로 인해 武器 停刊을 當했다. 以後 조선일보의 抗日 論調를 負擔스러워하던 總督府는 1921年 4月 8日 朝鮮日報 版權을 송병준에게 引受하였고, 獨立 精神이 剛했던 조선일보 編輯局 雰圍氣를 알고 있었던 宋秉畯은 스스로 社長에 就任하지 않고, 熱烈한 獨立鬪士로 有名했던 남궁훈을 社長으로 迎入하였다. [4]

그리고 1924年 9月 13日에 申錫雨가 조선일보를 引受하면서 獨立運動家들을 支援하는 抗日 獨立 新聞으로서의 正體性을 뚜렷히 했고, 4代 社長인 이상재 가 就任한 後에는 新幹會 結成을 主導하고 文字普及運動 의 一環으로 한글 敎材를 無償 配布하는 等 우리나라의 文化保全에 힘썼다. 以後 5代 社長은 朝鮮 獨立民族主義 性向의 申錫雨가 맡았다. 以後 1931年에 재만同胞 資金 橫領 事件에 6代 社長 安在鴻이 連累되어 拘束되고, 7代 社長 유진태 8代 社長 조만식 을 거쳐 9代 社長 방응모 가 就任한 後 韓日 學生의 敎育差別을 批判하는 論說 '敎育筆禍'로 因해 總督府에게 記事가 押收되는 事件이 發生했으며, 1933年부터 1936年까지 副社長이던 이광수 의 影響으로 民族改良主義까지 合勢하여 더욱 抗日的인 新聞이 되었다. 그러나 1936年부터 總督府의 介入으로 인해 抗日 性向이 줄어들었으나, 以後 中日戰爭에서 日本을 評論하는 社說과 新聞內容을 여러次例 보내면서 間接的으로 帝國主義를 批判하였다. 그 後 1940年 朝鮮總督府 의 民族 抹殺政策의 標的이 되어 發刊을 中斷하였고, 이에 當時 社長이었던 방응모는 月刊 趙匡 을 創刊하면서까지 訊問을 이어나갔다.

解放 以後, 1945年 11月 23日 조선일보는 美國의 支援을 받아 다시 續刊되었다. 當時 大韓民國 臨時政府 를 이어가던 白凡 金九 는 조선일보의 復刊에 對해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者 成就할 수 있다'는 親筆 揮毫를 보내며 크게 祝賀해주었다. [5] 그리고 9代 社長인 방응모 韓國獨立黨 入黨과 反託運動 加擔을 契機로 政治的으로 保守 性向의 金九 韓國獨立黨 을 支持하였으며, 1947年 以後 民族 指導者 中에 한 名이었던 李承晩 大韓民國 政府 樹立 路線을 支持하게 된다. 마침내 1948年 大韓民國 의 初代 大統領인 李承晩 大統領이 就任하자 李承晩 政府의 出帆을 支持하였고, 同時에 6.25 戰爭 이 勃發한 1950年까지 反民族 行爲者 强力處罰과 處斷을 主張했다. 한便, 國家保安法 이 制定되었을 때 濫用素地에 對해 批判을 함으로써 國家保安法의 使用 規範을 提示하기도 하였다.

1950年 6.25 戰爭 當時에는 北韓 에게 朝鮮日報가 넘어가면서 한때 조선일보는 人民軍 機關誌로 轉落했지만, 1950年 10月 1日 東部戰線에서 陸軍 第3師團이 38線을 突破하며 傳貰가 逆轉되면서 다시 大韓民國 의 機關紙로 回復됨과 同時에 北韓 의 南侵에 對한 批判을 包含하여 韓國戰爭 이슈들을 많이 다뤘고, 1951年 以後에는 李承晩 政府와 大韓民國 國軍 을 完全히 支持하게 되었다. 그러나 國民防衛軍 事件 報道聯盟 事件 , 居昌 良民 虐殺事件 等 韓國戰爭 當時 大韓民國 國軍 에 不利한 內容은 다루지 않았으며, 韓國戰爭 이 끝난 1954年부터는 保守主義 色이 强해져서 大韓民國 과 韓國戰爭 當時 國軍을 도와줬던 UN 等 國際的인 自由 陣營을 支持하게 되었다.

以後 조선일보는 1955年부터 1959年까지 李承晩 政府의 釜山 政治波動을 다루지 않았고, 李承晩 政府와 執權 與黨이었던 自由黨이 推進했던 反共政策을 積極的으로 支持했다. 또한 進步黨 事件 , 眞空管 購入 密輸出 事件 , 李承晩 暗殺 陰謀 事件 , 뉴델리 密會 造作 事件 , 금정산 共匪 事件 , 大邱 每日新聞 테러 事件 , 박정호 間諜 事件 , 김정제 間諜 事件 等 李承晩 政權의 公安政局에는 反共主義 基準과 李承晩 政府를 擁護하는 記事를 報道하기도 하였다. 또한 當時 금성사 設立 記事와 三星 關聯 記事를 많이 報道함으로써 經濟的으로 大企業 育成의 必要性을 力說하였다. 以外에도 陵議線 起工式과 한글學會 의 << 우리말 큰辭典 >> 完刊을 報道했고, 假짜 이강석 事件 도 大大的으로 報道하면서 當時 反共主義를 基盤으로 한 國民 統合에 앞장섰다.

하지만 1960年 3.15 不正選擧 4.19 革命 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國民의 便에서 李承晩 政權을 批判하여 李承晩 初代 大統領의 下野를 이뤄내었다. 그리고 第2共和國 張勉 政府가 들어서기 前에는 敎員勞組 運動을 支持하기도 했으나, 1960年 當時 張勉 政府 가 들어서면서 敎員勞組 運動 彈壓과 勞動運動 彈壓에 조선일보는 沈默으로 一貫했다. 그러다 1961年에 5.16 軍事政變 이 일어나고 나서 조선일보는 朴正熙 國家再建最高會議 出帆을 支持함과 同時에 1961年부터 1962年까지 5.16 軍事政變 을 支持하는 新聞을 여러次例 내보냈다. 그리고 그 當時 公安事件들이던 민족일보 事件 , 事大黨 事件 , 敎員勞組 事件 , 遺族會 事件 等에 對해 反共主義的 基準과 朴正熙 軍政을 擁護하는 쪽으로 記事를 내보냈다. 또 이 當時 三星物産 設立 記事를 大大的으로 報道하기도 했다. 또 文化放送 , 한국방송 設立 記事도 여러次例 내보냈다. 그리고 軍事원호청 發足 記事와 全國經濟人聯合會 設立 記事, 韓國新聞倫理委員會 發足 記事, 韓國勞動組合總聯盟 發足 記事 等을 大大的으로 報道했다.

하지만 朴正熙 가 大統領에 出馬하면서 다시 反政府的인 性向으로 돌아섰는데 以後 최석채 主筆이 在職하던 1964年부터 1969年까지 조선일보는 相當히 朴正熙 政府 , 卽 第3共和國 에 批判的이었다. 그리고 이 當時 조선일보는 社會的 弱者와 勞動運動 勢力들에게 相當히 友好的인 立場이었다.

當時 韓日基本條約 의 强行과 1次 인민혁명당 事件 , 미법도 住民 間諜團 事件 , 第1次 民族主義比較硏究會 事件 , 서울대 文理大 불꽃회 事件 , 盆地 筆禍事件 , 言論界 浸透 無電 間諜團 事件 , 京鄕新聞 間諜事件 , 韓國獨立黨 內亂陰謀事件 의 司法處理 過程에 相當히 批判的이었다. 다만 이 時期에도 三陟郡 海岸가 間諜 事件 , 軍內 反政府 陰謀事件 , 진장언 下士 間諜事件 , 松楸 間諜事件 같은 公安事件에 對해서는 反共主義的 基準으로 記事를 내보냈다. 그리고 三星 사카린 密輸事件 에 對해서도 三星을 相當히 批判하는 論調로 報道를 했다. 그리고 韓國電力 , 중소기업은행 設立을 好意的으로 報道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年부터는 조금씩 다시 朴正熙 政府 에 友好的인 基準으로 記事를 내보내기 始作했는데 朴正熙 가 大統領 再選에 成功하고 이 時期 第2次 民族主義比較硏究會 事件 , 嶺湖南·西海岸 無電 固定間諜團 事件 , 동백림 事件 , 서울師範大學 讀書會 事件 이 發生하면서 조선일보는 다시 保守言論으로 다시 조금씩 돌아가게 되고 1968年에는 통일혁명당 事件 南朝鮮解放戰略黨 事件 같은 公安政局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또다시 保守言論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1969年, 朴正熙 政府 3選 改憲 以後로 조선일보는 다시 保守性向으로 完全히 돌아서는데 當時 유럽 間諜團 事件 과 李穗根 僞裝間諜 事件을 大大的으로 報道하고 3選 改憲 을 支持하는 報道 또한 여러 次例 내보냈다. 또 그 當時 大韓航空 民營化 記事, 三星電子 設立 記事, 現代自動車 設立 記事, MBC 個國, 일간스포츠 創刊, 晉州 南江댐 竣工圖 여러次例 報道했다.

1970年 當時에도 朴正熙 大統領을 讚揚하거나 支持하는 記事, 社說들을 여러次例 내보냈으며 京釜高速道路 京仁高速道路 , 湖南高速道路 의 竣工 記事와 政府中央廳舍 竣工 記事, 兵務廳 發足 記事, 南山1號터널 開通, MBC 뉴스데스크 첫 放送, 100원 주화 使用 記事 또한 여러次例 내보냈다. 1971年 大韓民國 第7代 大統領 選擧 當時에도 朴正熙 大統領의 3線을 支持하는 社說과 記事를 여러次例 내보냈다. 또한 當時 서울대生 內亂豫備陰謀 事件, 留學生 兄弟 間諜團 事件 , 日本 據點 間諜團 事件 , KAL機 拉北未遂 事件 , 南派間諜 백귀남 事件 等 公安政局을 大大的으로 報道하기도 했다. 또 실미도 事件 대연각호텔 火災 事件 을 報道하기도 했다. 그리고 光州 大團地 事件 이 發生하자 조선일보는 이를 政府의 立場에서 報道했다. 또 1972年에는 7.4 南北共同聲明 을 發表하기도 했다.

1972年에 10月 維新 으로 第4共和國 이 들어서자 조선일보는 朴正熙 大統領을 積極 讚揚하고 支持하는 記事를 여러次例 내보냈다. 維新 體制 當時 조선일보는 經濟 面에서는 포항제철 設立, 首都圈 電鐵 1號線 開通, 南海高速道路 開通, 湖南高速道路 開通, 三星重工業 設立, 江南-汝矣島 開發, 各種 高層建物 建設, 대우중공업 設立 等을 相當히 報道했고 政治 面에서는 民主공화당을 讚揚하는 記事를 여러 番 썼고 10月 維新 을 讚揚하는 記事를 여러 番 썼다. 또한 1973年 當時 發生한 최종길 敎授 疑問詞 事件 때도 中央情報部 를 擁護하는 쪽으로 記事를 썼으며 當時 북제주度 右島 武裝 浸透 間諜團 事件 , 日本 據點 歸化 間諜 事件 等을 詳細히 報道했다. 以後 全南大 不穩 삐라 撒布事件 , 南山 復活節 禮拜事件 , 高麗大 NH회 事件 , 서울大 工大 助敎授 間諜事件 , 나쓰야 間諜事件 , 김장현 間諜事件 , 김철우 朝總聯系 間諜事件 等을 大大的으로 報道했고 서울 어린이大公園 開場과 現代重工業 設立도 大大的으로 報道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維新體制 當時 1974年부터 1975年까지 連이어 發生한 女間諜 채수정 事件 , 大戰·全州 固定間諜團 事件 , 文人間諜團 事件 , 鬱陵島 據點 間諜團 事件 , 民靑學聯 事件 , 緊急措置 1,2號 違反 事件 , 金榮作 間諜事件 , 김승효 間諜事件 , 釜山·慶南 據點 固定間諜團 事件 , 在日同胞 진두현 間諜團 事件 , 인민혁명당 再建위 事件 , 在日同胞 김달남 間諜事件 , 在日同胞 유정식 間諜事件 , 學院浸透 留學生 間諜團 事件 , 歸化 日本人 間諜團 事件, 박복순 南派 間諜團 事件, 겨울共和國 事件을 大大的으로 報道하여 維新體制 當時의 公安政局 擴聲器 노릇을 했다. 그리고 1975年 當時에는 汝矣島 國會議事堂 竣工 記事와 學徒 護國團 創設 記事를 여러次例 내보냈다. 또 民防衛隊 創設과 부처님 오신 날, 어린이날 公休日 制定, 嶺東高速道路 竣工 等을 記事로 내보냈다. 그 뒤 1976年에는 板門店 도끼 蠻行 事件 을 集中的으로 報道했고 한민통 間諜事件 또한 集中的으로 報道해서 公安政局의 擴聲器 노릇을 繼續했다. 그리고 연이어 朴正熙 大統領의 維新體制 를 讚揚하는 記事를 여러次例 보냈다. 그리고 이 當時 조선일보는 經濟 面과 文化 面에서 信用保證基金 設立 記事와 龍仁自然農園 開場, 半月 新都市 建設, KBS 汝矣島 社屋 設立, 跆拳V 開封, 아이미 開發 等에 對한 記事도 여러次例 보냈다.

그리고 1978年에는 최은희 拉北 事件 을 報道하기도 했으며 대한항공 902篇 擊墜 事件 , 自然保護憲章 宣布 等의 記事도 내보냈다. 또한 1979年에는 三陟 固定間諜團 事件 , 統一革命黨 再建 陰謀 事件 , 釜山·三千浦 固定 間諜團 事件 等을 여러次例 記事로 내보냈다. 그리고 10.26 事件 이 일어났을 當時에도 特種 報道를 많이 했다. 10.26 事件 以後에는 12.12 쿠데타 를 많이 報道했다.

1972年 3月 5日 52周年 記念號를 통해 讀者가 50萬 名을 넘어섰다고 公式 宣言하고, 1974年에는 美國 ASI 의 調査 結果 定期購讀者 比率에서 1位를 차지했다. [6] 1979年 2月에 發行部數 100萬部를 突破하여, 1991年에 史上 最初로 發行部數 200萬部를 突破하였다. 조선일보社는 1968年에 《 주간조선 》을, 1980年에 《 월간조선 》을 各各 發刊하였고 1991年 《 소년조선일보 》를 創刊하였다. 1999年 3月 2日에는 全面 가로쓰기 體制를 導入했다. 1995 年 (週)디지틀조선일보를 設立해 인터넷 서비스를 强化하여 2008年 3月 5日부터는 조선일보 紙面을 PC上에서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 ‘ 아이리더 ’ 서비스를 始作하였다. [7]

創立 歷史 [ 編輯 ]

3.1運動에 對한 日帝의 彈壓을 非難하는 "骨髓에 맺힌 朝鮮人의 한" 1920年 6月 조선일보 論說
韓國語는, 한글로 表記되고 있다.
1927年 2月 14日子 조선일보에 報道된 新幹會 創立 모습. [8]

조선일보는 3.1運動 이듬해인 1920年에 創立하였으며 日本 의 所謂 文化政治 가 實施되면서 東亞日報 와 함께 朝鮮總督府 로부터 許可되었다. 創刊 當時에는 대정親睦會 를 母體로 조진태 社長으로 始作하였으나, 資金力不足으로 송병준 에게 넘어갔다. 송병준 은 自身이 新聞經營 前面에 나서지 않고 元老 言論人 남궁훈을 社長으로 迎入한다. 1924年 남궁훈은 民族主義 者였던 신석우 가 引受해 民族의 辭表(師表)로 推仰 받던 이상재 를 推戴할 때까지 社長으로 在任한다 1924年 이 때는 一齊 와 妥協的이던 東亞日報 와는 달리 非妥協的인 民族主義 性向을 띠었다. 左派 右派 가 聯合한 最大 獨立運動組織 新幹會 結成을 主導하기도 했으며, 홍명희 박헌영 , 김단야 社會主義者 들이 大擧 조선일보에 入社하면서 社會主義的인 傾向을 보였다. 以後 繼續的인 經營 惡化로 조만식 을 거쳐 방응모 에게 所有權이 넘어갔다. [9] 그 後 保守的인 言論人들이 조선일보社를 主導하면서, 保守主義 觀點에서 新聞을 發行하고 있다.

人物 [ 編輯 ]

日帝時代 初期 조선일보에는 다양한 經歷과 能力의 所有者들이 集結했다. 獨立運動家, 民族主義者, 保守主義者를 비롯해 各 分野의 最高 엘리트들과 活動家들이 어울려 民族의 '精神的 政府'를 自任했다. 朝鮮日報 社長을 지낸 남궁훈 , 이상재 , 신석우 , 安在烘 , 조만식 等은 民族 指導者들이었다. 조선일보 創刊 社會部 記者로서 日帝를 糾彈하고 總督 暗殺을 計劃했던 獨立運動家 방한민 (方漢旻), 日帝의 朝鮮人 虐殺 現場에 달려가 목숨걸고 取材한 李錫 , 한홍정 等은 펜으로 日帝의 銃칼에 直接 맞선 行動派였다. 獨逸 留學 後 革命의 모스크바로 派遣된 김준연, 英國·프랑스·獨逸·스위스에서 華麗한 學歷을 쌓은 이관용 , 美國에서 農學博士 學位를 받은 이훈구 , 그리고 中國 內戰 現場을 누빈 이상철 , 홍양명 , 홍종인 等은 世界 情勢와 先進 文物을 알리는 傳令使들이었다. [10]


方正梧 前 TV造船 代表, '高 장자연 步道' 한겨레·미디어오늘 相對 訂正報道 訴訟 勝訴에서 方正梧 前 TV造船 代表가 自身과 고 장자연氏가 자주 通話하고 만났다는 內容의 報道를 한 言論社들을 相對로 하는 訂正報道 請求 訴訟에서 最終 勝訴했다. 2022年 12月 16日 大法院 民事1部(主審 박정화 大法官)는 房 前 代表가 한겨레新聞과 미디어오늘에게 "訂正 報道文을 揭載하라"며 낸 訴訟에서 原告 一部 勝訴 判決한 2審을 그대로 確定했다. [2]


지면

  • 週6日制 新聞을 發行한다.
  • 每週 日曜日 新聞은 發行하지 않고 [11] , 온라인 서비스를 繼續한다.
    • A: 綜合뉴스 섹션은 平日 土曜日 에 싣는다.
    • B: 經濟 섹션은 朝鮮經濟 에서 平日 에 싣는다.
    • C 以上: 別途에 기타 · 生活 情報 또는 不動産, 醫療 섹션을 싣는다.

姊妹 言論機關 [ 編輯 ]

조선일보社는 日刊紙 外에도 週刊誌 ' 주간조선 ', 스포츠紙인 ' 스포츠조선 ', 觀光 宿泊施設에 對한 雜誌 '月刊 山', 趣味 文化에 關한 雜誌 '月刊 낚시' 等의 時事誌와 雜誌를 發行한다. 子會社로는 '디지틀朝鮮', ' 월간조선 ', '朝鮮에듀케이션', '헬스조선' 等이 있으며 이 中 '디지틀朝鮮'은 코스닥에 上場하였고, 2004年부터 年間 80億 程度의 黑字를 記錄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 1936年부터 朝鮮日報 日曜日版에 한 面 씩 실었으며, 1937年부터는 別途로 ' 어린이朝鮮日報 '를 發行하고 있으며, 一般單行本과 百科事典 들을 編輯하는 出版事業度 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出版한 單行本으로는 《우리에게 感動을 주는 따뜻한 이야기》(1998年)나 映畫 말아톤 으로 有名해진 障礙人 배형진 氏의 이야기를 담은 《달려라 荊榛아》등이 있다.

또한 온라인버전 조선닷컴以外에 英語版, 日本語版, 中國語版 온라인新聞을 運營하고 있다. 二重 朝鮮日報 日本語版은 子會社 '朝鮮日報 日本語版'(舊 朝鮮日報JNS)에서 運營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007年에 비즈니스앤 을 開局하고, 2008年 11月에는 放送記者와 피디를 募集, 2008年 2月에는 大邱放送 , KNN 과 함께 "아워 아시아"를 製作, 配給하였다. 以外에도 조선일보는 綜合編成放送 審査에서 2位로 通過한 ' TV조선 '乙 所有하고 있으며, TV造船과 조선일보는 保守的 論調를 公開的으로 드러내고 있다.

2010年 조선일보는 創刊 90周年을 맞아 조선일보와 그 關係史를 아우르는 미디어그룹인 朝鮮미디어를 出帆시켰다. 以外에도 '주간조선' '월간조선' 等을 製作하는 朝鮮뉴스프레스 라는 子會社가 있다.

發行 部數 [ 編輯 ]

大韓民國 新聞 購讀率 36.8% 가운데 조선일보는 11.9%를 차지하였으며, 購讀占有率은 24% ~ 30% 로 나타나고 있다. [12] [13] [14] 特定 新聞 購讀 與否에 關係없이 지난 一週日間 어떤 新聞의 記事를 봤는지를 알아보는 週間熱讀率 調査에서 조선일보의 熱讀率은 16.2%였다. 2009年 韓國ABC協會 가 實施한 集計에서 發行部數 1,844,783部로 集計되었다. 2011年 基準으로 有料 發行 部數는 1,353,159部였다. [15] 2011年 7月부터 街販 價格이 引上되어 現在 不當 1,000원이나 月 購讀料는 15,000원으로 變함없다.

韓國ABC協會 가 2020年 發行·有料 附隨 現況을 公開한 資料에서 조선일보는 121萬部의 公式 發行 部數를 가진 國內 最大 新聞이자, 國內에서 唯一하게 有料部數 100萬部가 넘는 新聞으로 確認되었다. '조선일보'는 發行 部數 1,212,208部로 壓倒的인 1位를 차지했다. 이어 東亞日報 (925,919部)· 中央日報 (861,984部)· 每日經濟 (706,760部)· 韓國經濟新聞 (526,908部) 等의 巡이었다. 實際 販賣量을 集計하는 有料 附隨에서도 '朝鮮日報'가 1位(1,162,953部)였다. 2·3位인 ' 東亞日報 ', ' 中央日報 '와는 各各 29萬, 35萬部 隔差였다.

評價 [ 編輯 ]

肯定的 指標 [ 編輯 ]

2014年 시사저널 ‘누가 韓國을 움직이는가’ 專門家 設問調査의 言論 媒體 影響力 및 信賴度·熱讀率 調査 結果 ‘가장 影響力 있는 言論 媒體’ 順位 調査에서 KBS 와 조선일보의 兩强 體制가 굳건하였다. KBS 59.6%와 朝鮮日報 51.2%로 네이버 32.1%, MBC 22.0%, 中央日報 15.9% 等 다른 媒體들을 壓倒했다. ‘가장 熱讀하는 言論 媒體’ 調査에서는 朝鮮日報(21.8%)가 2位를 차지했고, KBS(20.0%)가 그 뒤를 이었다. [16]

韓國갤럽 이 2013年 9月 30日부터 2週間 서울 · 仁川 · 京畿 首都圈 成人 1000名을 對象으로 '집에서 有料로 定期購讀하는 新聞'을 基準으로 調査한 家口 購讀率에서 조선일보는 11.9%로 壓倒的 1位였다. [17]

否定的 指標 [ 編輯 ]

2009年 "시사IN"李 電話 輿論調査를 한 結果, 어느 媒體를 가장 不信하느냐는 質問에는 重複應答을 基準으로 할 때 조선일보의 응답률이 20%에서 크게 늘어 34.2%를 차지하여 [18] 中央日報, 동아일보를 제치고 1位로 나타났다. 한便 韓國記者協會가 輿論調査機關에 依賴하여 調査한 現職 記者들이 가장 信賴하는 言論社로는 한겨레가 15.4%, MBC 14.3%, KBS 11.2%, 京鄕新聞 8.7%, 韓國日報 4.0%에 이어서 조선일보는 2.4%를 차지하였다. [19]

'시사IN'李 行한 '가장 不信하는 媒體' 調査에서 2017年 2位, 2018, 2019年에는 2年 連續 1位를 차지하였다. 2017年 調査에서 조선일보는 '가장 不信하는 媒體' 順位 2位, TV造船은 4位에 位置하였다. 2018年 調査에서는 朝鮮日報(25%)와 TV朝鮮(12%)이 各各 1, 2位를 차지하여 朝鮮日報 系列이 '가장 不信하는 媒體' 部門에서 約 40% 假量을 獨食하였다. 2019年 調査에서도 朝鮮日報가 1位(24%), TV朝鮮이 3位(7%)를 차지하여 朝鮮日報 系列은 2019年에도 '가장 不信하는 媒體' 部門에서 30% 假量을 獨食하였다. 이는 該當 部門 2位인 KBS (10.7%)의 約 3倍에 達하는 數値이다. [20]

英國 로이터저널리즘硏究所가 公開한 2018年 媒體信賴度 順位에서 조선일보와 TV朝鮮이 15個 媒體 中 各各 14位, 15位에 올라 朝鮮日報 系列이 最下位圈에 머무른 가운데 2019年 媒體信賴度 順位에서 조선일보와 TV朝鮮이 14個 媒體 中 各各 14位, 13位를 차지하여 事實上 2年 連續으로 朝鮮日報 系列의 媒體는 가장 信賴度가 낮은 媒體로 꼽혔다. [21]

기타 [ 編輯 ]

來日은 늦으리 [ 編輯 ]

1992年부터 1996年까지 大韓民國에서 開催된 環境保全 슈퍼 콘서트의 副題이다. 말 그대로 環境保護를 위해 톱스타群團이 總出動한 大型 콘서트이다.

春川마라톤 [ 編輯 ]

韓國 最大規模의 春川마라톤을 開催하고 있다. 春川마라톤은 '가을의 傳說'이라는 別名을 가지고 있을 程度로 全國 마라토너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春川마라톤은 2013年 世界陸上聯盟으로부터 골드레벨을 받은 있으며, 2004年 完走者規模 世界 8代 마라톤에 登錄되기도 했다.

韓國신문상 受賞 [ 編輯 ]

한국신문협회는 조선일보의 ' 蔡東旭 檢察總長 婚外 아들' 報道를 2014年 韓國신문상 뉴스取材報道部門 受賞作으로 選定했다. 審査委員들은 "言論이 權力自意 脫線된 私生活을 報道하려 할 때 必要한 德目인 勇氣를 잘 보여주었다"고 하며 言論의 役割에 忠實한 조선일보를 높이 評價했다. [22]

外部 寄稿者 [ 編輯 ]

갤러리 [ 編輯 ]

朝鮮뉴스라이브러리 [ 編輯 ]

조선일보 創刊 100周年 記念으로 뉴스라이브러리 서비스의 1920年 創刊부터 1999年 12月 31日까지 無料 閱覽 할 수 있으며, 別途 無料 有料 서비스이다. 그리고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에 過去 新聞을 提供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조선일보에는 2名의 房 社長이 있다 미디어스 2012年 5月 23日
  2. 2020年度 綜編-케이블 放送事業 兼營媒體 發行·有料部數 韓國ABC協會 2020年 6月 12日
  3. 가장 影響力 있는 미디어 JTBC·中央日報>朝鮮日報·TV朝鮮>KBS 順 이데일리 2019年 12月 11日
  4. 3代 社長 남궁훈 "사이토 總督 辭職하라" 4臺 社長 이상재 就任 後 民族誌로 '우뚝' [조선일보] [2009年] [12月 31日]
  5. '조선일보 歷史 읽기' 冊은… Archived 2015年 9月 23日 - 웨이백 머신 《朝鮮日報》2004.06.03
  6. 방우영, 編輯革新 통해 '正常 朝鮮日報' 奪還 Archived 2014年 5月 22日 - 웨이백 머신 《朝鮮日報》2010.03.04
  7. 新槪念 디지털 페이퍼 '아이리더' 《朝鮮日報》2008.03.05
  8. 新幹會 는 日帝强占期 當時 合法的인 團體로 座-우 聯合 獨立運動 團體였다. 이 團體는 安在烘 , 이상재 , 홍명희 等 非妥協的 民族主義 性向의 朝鮮日報 人物들이 中心으로 推進했다.
  9. 朝鮮日報 側에 따르면, 1932年 2月에 朝鮮日報 社長 安在烘 이 日帝 警察에 依해 구속당했고 조선일보는 當時 財政惡化로 高利貸金業者 임경래 가 조선일보 發行權을 引受했다 한다. 그리고 賃耕래는 6月부터 副社長을 맡아 發行人과 編輯人을 겸했는데, 여기서 조선일보 社員들의 反撥이 極甚해졌고 조선일보 社員들은 協議를 통해 1932年 7月에 出所한 여운형 을 朝鮮日報 社長職으로 推戴할 計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中外日報(當時 中央日報) 記者로 活動했던 홍증식 이 먼저 呂運亨을 찾아가 中央日報 社長으로 推戴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조선일보는 1933年 3月, 방응모 를 社長으로 推戴하기까지 財政的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그 時期에 曺晩植이 自身의 平壤財産을 털어 조선일보를 引受하였고 방응모가 引受하기까지 混亂을 잠재우는데 最善을 다할 수 있었다. <朝鮮日報 사람들 日帝時代 篇> 參考.
  10. 朝鮮日報 사람들 日帝時代 篇 , 朝鮮日報 飼料硏究室, 2004年 12月 22日
  11. 설날 · 秋夕 에 限定
  12. 최영진 記者 (2009年 7月 30日). “朝中東 ‘放送進入 障壁’ 사라지다” . 위클리頃 . 2009年 11月 1日에 確認함 .  
  13. 신동흔 記者 (2009年 10月 22日). " 가장 좋아하는 新聞" 朝鮮日報 1位” . 朝鮮日報 . 2009年 10月 22日에 確認함 .  
  14. 신봉석 記者 (2008年 6月 30日). “兆·中·桐 新聞市場 占有率 50%臺로 떨어져” . 京鄕新聞 . 2009年 11月 1日에 確認함 .  
  15. 종이 新聞, 발등에 불 떨어졌다 -시사저널
  16. “[누가 韓國을 움직이는가 ] 言論媒體 / JTBC의 進擊, KBS·MBC의 墜落 影響力 朝鮮 2位, 中央 5位, 東亞 8位…한겨레, 信賴度·熱讀率 ‘2冠王’” . 시사저널. 2014年 9月 3日.  
  17. “朝鮮日報 177萬部(發行 附隨)로 壓倒的 1位” . 朝鮮日報. 2013年 11月 14日.  
  18. ““媒體 信賴도 1位 MBC, 不信 1位 朝鮮日報”” . 2009年 8月 10日 . 2009年 11月 1日에 確認함 .  
  19. 박창섭 記者 (2009年 8月 19日). “記者들 ‘한겨레’ 가장 信賴” . 한겨레新聞 . 2009年 11月 1日에 確認함 .  
  20. [1]
  21. 조선일보를 비롯한 中央日報, 동아일보 支局의 98%가 新聞告示를 違反한 것으로 調査되었다. ““朝中東 支局 98% 新聞告示 違反”” . PD저널. 2009年 6月 18日 . 2009年 11月 1日에 確認함 .   2002年과 2003年 ABC協會의 調査에서 發行部數中 5萬 6,000餘部가 부풀려져 175萬 6,193部로 數値를 造作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문영 記者 (2008年 7月 11日). “文化部 懲戒 안해 隱蔽 論難” . 서울新聞 . 2008年 12月 17日에 確認함 .  
  22. ' 蔡東旭 檢察總長 婚外아들' 報道, 韓國신문상 受賞” . 머니투데이. 2014年 3月 25日 . 2014年 5月 21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