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新聞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서울新聞》
The Seoul Shinmun
서울新聞社 光化門 社屋(프레스센터)
種類 株式會社
創刊者 어니스트 베델 (排泄), 양기탁
創刊 1904年 7月 18日
言語 韓國語
本社 서울特別市 中區 世宗大路 124
웹사이트 서울新聞

서울新聞 》은 大韓民國의 朝刊 綜合 日刊 新聞이다. 1904年 7月 18日에 創刊된 舊韓末의 代表的 民族紙 《 大韓每日申報 》의 指令과 創刊精神을 繼承했다. 大韓每日申報는 日帝가 大韓帝國을 强占하던 暗黑時代 겨레의 獨立自存을 일깨운 民族의 횃불이었다. 國債補償運動을 主導하며 빼앗긴 國權을 다시 찾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 歷史를 이어받은 서울新聞은 激變하던 時代相을 記錄한 우리民族 近?現代史 그 自體이자 榮辱이 함께 담긴 自畫像이다. 韓國 新聞社에서 '最初'라는 修飾語를 연이어 쏟아내던 革新의 아이콘이기도 했으며 韓國에서 現在 發行되고 있는 新聞 中에서는 가장 오랜 歷史를 자랑한다.

過去에는 오랫동안 企劃財政部가 大株主로 있던 '公營' 性格의 言論社였으나, 2021年 下半期에 호반건설로 大擧 持分이 賣却돼, 湖畔그룹의 系列社로 編入됐다. 2022年 賣出額 832億원, 營業利益 80億원을 記錄해 賣出額 基準 5代 日刊紙로 자리잡았다.

서울신문사는 最優秀 矯正公務員을 뽑는 矯正對象과 優秀 靑年農民을 뽑는 農漁村靑少年對象을 1981年부터 施賞해오고 있다. 가을밤 音樂會, 新春文藝 , 서울新聞 마라톤大會 等 다양한 社會 事業도 施行하고 있다.

歷史 [ 編輯 ]

'大韓每日申報'의 登場(第1期) [ 編輯 ]

大韓每日申報 》( 大韓每日申報 )는 舊韓末 抗日民族言論으로 1904年 7月 18日 英國人이었던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韓國名 排設)과 梁起鐸이 創刊했다. 1904年 러日 戰爭이 臨迫해지자 大韓帝國은 日本의 侵略에 對應해야 할 必要性을 크게 느꼈다.

政府는 日帝의 干涉을 받지 않고 英文(英文)으로 된 新聞을 發行하는 것이 時急했다고 한다. 日帝는 1904年 2月 强制로 大韓帝國 政府와 韓日議定書(韓日議定書)를 締結하고, 檢閱을 통해 民族新聞을 統制하는 等 支配權을 强化하려 했다. [1]

베델은 英國의 데일리 크로니클의 特派員으로 韓國에 왔다. 그는 韓國에 오기 前 日本의 AP 通信에서 通信員으로 活動할 程度로 文章力을 갖춘 人物이었다. 그는 電信技術者로 1880年代 前身 設備에 크게 寄與한 덴마크人 헨리 第센 뮐렌스테트의 紹介를 받아 1904年 梁起鐸과 歷史的인 만남을 갖게 된다. 梁起鐸은 高宗의 通譯士로, 外交使節 等의 通譯을 맡고 있었다. [2]

1904年 8月 4日子 大韓每日申報. 指令은 第16號다. 앞선 15號까지는 紛失돼 現在 찾을 수 없는 狀態다. 國立中央博物館 [3]

그들은 極祕裡에 日帝의 干涉을 받지 않고 大韓帝國의 實相을 알릴 수 있는 英文 日刊紙를 創刊하기로 마음 먹었다. 1904年 6月 末에는 實驗的으로 英文 日刊紙 《코리아 타임스》를 創刊해 讀者들의 反應도 確認했다. 하지만 한글이 아니어서 정작 國民들에겐 正確한 情報를 傳達하기 어려운 問題가 있었다. 結局 그들은 그 해 7月 18日 한글과 영문을 함께 쓴 《大韓每日申報》를 創刊했다. 英文 題號는 《코리아데일리뉴스》(The Korea Daily News)로 定했다.

取材陣은 白巖(白巖) 朴殷植(朴殷植) 先生이 主筆로 이름을 올렸고 記者는 널리 알려진 人物로 丹齋(丹齋) 申采浩(申采浩)와 최익(崔益), 獄官嬪(玉觀彬), 변일(卞一), 장도빈(張道斌) 等 抗日鬪士들로 채워졌다. 以後 안창호(安昌浩), 李甲(李甲) 等 西北學會 人士들도 合流해 힘을 보탰다. [4]

베델은 日帝의 彈壓에 百尺竿頭에 선 大韓帝國의 實相을 그대로 넘길 수 없다고 判斷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特히 英國人으로, 日帝의 干涉에서 자유로운 部分도 있었다. 그래서 大韓每日申報는 大韓帝國의 숨筒을 죄는 日帝의 威脅에 맞서 各種 政策 批判을 이어나갔다. 結局 이것이 抗日民族運動으로 이어지게 된다. 가장 먼저 試圖됐던 것이 1905年 11月 17日 締結된 乙巳條約 反對運動이었다. 大韓每日申報는 11月 初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온 理由에 對해 日帝가 大韓帝國을 保護國으로 歸屬시키려 하기 때문이라고 먼저 報道하기도 했다. [5]

皇城新聞 社長 張志淵은 11月 20日子 皇城新聞 論說 '是日也放聲大哭(是日也放聲大哭)'을 쓴 理由로 拘束되고 新聞은 停刊됐다. 이에 對해 大韓每日申報는 張志淵의 論說을 그대로 싣고 日帝의 蠻行을 暴露하기에 이른다. 11月 21日子 論說에선 '乙巳條約은 大臣들을 脅迫해 强壓的으로 締結했고 是日也放聲大哭을 쓴 理由만으로 張志淵을 拘束한 것은 言語道斷'이라고 剛하게 批判했다.

'皇城新聞의 記者는 自身의 義務를 다했을 뿐'이라며 '大韓帝國 全 社會 臣民의 代表가 되어 光明停職(光明正直)韓 義理를 世界에 發現했다'고 張志淵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또 민영환, 조병세, 이한응, 이상철 等 支社들의 自決을 두고 忠節을 기리는 한便 條約에 署名한 代身 5名, 이른바 '乙巳五賊'에 對해선 閔泳煥과 比較되는 '賣國대신'(賣國大臣), '逆黨'(逆黨)이라며 嘲弄과 批判을 이어갔다. 大韓每日申報의 이런 鬪爭을 接한 高宗은 倍델에게 親筆 特許狀을 내리고 每月 1000원씩 經費를 補助해주는 等 抗日 鬪爭을 이어가도록 支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高宗이 1906年 1月 ‘乙巳條約에 同意하지 않았다’는 內容이 담긴 붉은 玉璽가 찍힌 密書를 作成하자 英國 트리뷴紙가 이를 入手해 報道한 일도 있었다. 大韓每日申報 1月 16日 高宗이 트리뷴紙 스토리 特派員에게 이 密書를 傳達해 報道하게 됐다는 內容을 大書特筆하게 된다. 日帝는 統監府를 통해 密書가 假짜라고 主張했지만, 大韓每日申報는 眞짜라는 主張을 굽히지 않았고 國民들의 抵抗 運動에 불을 당겼다. [7]

大韓每日申報는 國債補償運動으로 抗日鬪爭을 이어갔다. 國債補償運動은 日帝가 道路와 各種 基幹施設, 金融機關 等을 改善한다는 名目으로 멋대로 써서 생긴 빚 1300萬원을 國民誠金으로 갚기 위해 일어난 運動이다. 이 中 1000萬원은 年 利率이 無慮 6.5%에 이르렀다고 한다.

1906年이 되자 이 빚은 1650萬원이라는 莫大한 金額으로 불어났다. 大韓每日申報는 1907年 2月 21日부터 大邱民意소의 意見을 收斂해 ‘國債 1300萬원補償趣旨書’ 全文을 싣는 等 大大的인 運動을 이끌었다. 國民들은 全國 各地에서 담배를 끊거나 月給, 쌈짓돈을 아껴 運動에 同參했다. 1907年 봄이 되자 誠金을 낸 사람이 4萬名에 이르렀다. 大韓每日申報는 每月 特別廣告로 誠金 募金 額數를 公開했다. 特別誠金 內譯을 보려는 國民이 殺到하면서 對한매일신보 부수는 1908年 5月 1萬 3000部를 넘겼다. [8]

大韓每日申報는 統監府의 報道指針을 어겨 15回나 押守당하면서도 全國的으로 일어난 義兵 活動을 具體的으로 報道하고, 1907年 7月에는 高宗密使가 헤이그 萬國平和會議에 參席하게 된 背景을 說明하는 等 抗日 報道를 이어갔다.

어둠의 時代 '每日申報'(第2期) [ 編輯 ]

1910年 8月 30日子 朝鮮總督府 機關紙 每日申報 創刊號.

每日申報 》( 每日申報 )는 1904年 創刊된 大韓每日申報를 친 朝鮮總督府 性向 言論 京城日報 가 買入해 '大寒'(大韓)이라는 두 字를 떼고 이름을 바꾼 것이다. 每日申報는 日本 帝國의 朝鮮 統治를 合理化하고 侵略戰爭을 美化한 朝鮮總督府 宣傳紙化 되었다. 이름이 잘려나간 每日申報는 韓日合邦 바로 다음날인 1910年 8月 30日 登場했다.

日帝는 大韓每日申報를 創刊한 베델을 韓國에서 쫓아내기 위해 血眼이 돼 있었다. 國債補償運動을 主導하는 等 抗日運動을 벌인 點은 韓日强點을 앞두고 큰 걸림돌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新聞 論說 等을 트집잡아 1907年 10月과 1908年 6月 두 次例나 베델을 裁判에 回附했다. 梁起鐸은 1908年 7月 國債補償 誠金을 橫領했다는 陋名을 씌워 拘束시키기까지 했다. 大韓每日申報는 治外法權으로 認定받는 保護地域이었지만, 日帝는 警視廳을 動員해 梁起鐸을 會社 內에서 逮捕하는 蠻行을 저질렀다. [9]

梁起鐸은 以後 5次例의 公判 끝에 無罪를 認定받아 풀려나게 된다. 日帝의 온갖 謀略에도 굳건히 버티던 大韓每日申報는 1909年 5月 베델이 死亡하면서 社勢가 기울기 始作했다. 日帝 統監府는 1年 뒤인 1910年 5月 當時 社長이었던 알프레드 만함에게 700파운드를 주고 祕密裏에 大韓每日申報를 사들이게 된다.

統監府는 梁起鐸에게 新聞 發行을 맡기려 意思를 打診했으나, 그는 拒絶했다. 1910年 6月 14日엔 發行人 및 編輯人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다. 그 날 梁起鐸은 스스로 新聞에 辭職 廣告를 내고 會社를 떠났다. 신채호, 장도빈, 임치정 等 抗日運動에 앞장섰던 人士들도 물러났다. 1910年 8月 29日 日帝는 强制로 韓日合邦 條約을 맺고, 다음날부터 朝鮮總督府 機關紙 《 京城日報》 에 흡수시킨 每日申報를 통해 韓日合邦을 正當化시키는 作業을 했다. [10]

京城日報의 한 部署였던 每日申報는 1920年 編輯局으로 分離·昇格됐다. 1938年엔 題號에 漢字 新(申) 代身 神(新)을 넣은 《 每日申報 》( 每日新報 )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바뀐 이름과 달리 朝鮮總督府와 京城日報가 株式 大部分을 保有해 論調는 以前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出帆 以後 줄곧 植民統治를 讚揚하고 曲筆로 一貫했다.

다만 每日申報는 言論私的 側面에선 注目할 만한 部分이 있었다. 1918年 알음알음 知人을 採用하던 記者 採用 方式을 最初로 '公開採用'으로 轉換한 것이 그것이다. 이 때 높은 競爭率을 뚫고 홍난파(洪蘭坡)와 유지영(柳志永)李 記者로 採用됐다. 1920年에는 歷史上 처음으로 女記者를 採用했다. 이때 뽑힌 女記者가 離角頃(李珏璟)으로, 敎育, 家庭, 女性, 兒童 問題에 對한 수많은 記事를 남겼다. [11]

每日申報는 唯一하게 國文을 지켜낸 媒體이기도 했다. 日帝는 1940年代 들어 日常生活에서도 우리말을 使用하지 못하게 하는 等 韓國語 抹殺政策을 펼쳤지만, 每日申報의 한글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部數가 最大 45萬 部에 이르기도 했다. 每日申報는 폐간당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言論人들을 받아들여 隱身處 役割을 한 媒體이기도 했다. 이들은 光復 以後 言論界와 文化界를 이끌게 된다.

每日申報는 1919年 8月 '小說作品 懸賞募集'을 最初로 實施했다. 이것은 以後 民間新聞들이 採擇한 新春文藝의 嚆矢가 됐다. 當時 小說作品 懸賞金은 1等 150원, 2等 100원, 3等 50원이었다. 每日申報는 1913年 新聞에 最初로 스냅寫眞을 揭載, 新聞에 生動感을 높이는 一大 革新을 하기도 했다. 1937年 서울 鍾路 화신百貨店 屋上에 未來에 電光板으로 發展하게 되는 '電光續報臺'를 設置해 市民들에게 빠르게 뉴스를 傳達하는 新技術度 導入했다. [12]

'서울新聞'으로 再誕生(第3期) [ 編輯 ]

1945年 감격스러운 光復을 맞아 總督府 機關紙였던 《每日申報》는 歷史 속으로 사라지고, 新聞은 《 서울新聞 》이라는 題號로 새出發하게 된다. 또 1919年 3月 1日 己未年 獨立萬歲運動 當時 獨立宣言書를 作成한 民族代表 33人 中 1名인 元老指導者 葦滄 吳世昌(吳世昌) 先生을 社長으로 세워 歷史的 轉換을 했다.

서울新聞은 '創刊'이라는 用語 代身 '革新 屬間'이라는 表現을 쓰며 1945年 11月 23日 첫 新聞 指令을 第1號가 아닌 第13738號로 始作했다. 아픈 歷史를 잊지 말자는 意味로, 大韓每日申報 때부터 每日申報까지의 指令을 그대로 繼承한 것이었다. 다만 現在의 서울新聞은 大韓每日申報의 指令만 繼承하고 있다.

當時 오세창 社長은 就任辭에서 每日申報를 '日本 帝國主義의 傀儡'로 定義하고, 서울新聞으로서의 새出發을 宣言했다. 主筆 이관구(李寬求)는 社說을 통해 "大衆의 敵陣이었던 每日申報는 8月 15日의 歷史的 大轉換을 契機로 淸算돼 마땅하다"고 力說했다. 오세창 社長은 韓國 近代新聞의 嚆矢인 漢城旬報 記者로 出發해 萬歲報, 大韓民報 等 抗日民族誌를 創刊한 言論界 先驅者로 꼽힌다. 서울新聞은 當時 進步的인 論調를 志向하되 左派의 宣傳은 따르지 않아 '中立紙'로서의 기틀을 세웠다. 權威紙 '워싱턴 포스트'처럼 首都 서울의 名稱을 그대로 따와 國家를 代表하는 言論社로서의 位相을 세우려 했다. [13]

서울新聞은 夕刊으로 發行됐다. 11月 22日 發行된 23日子 夕刊 新聞은 1面 社說 '革新에 즈음하여'를 통해 '一黨一派에 기울어지지 않는 공정하고 的確한 報道'를 製作 理念으로 내세웠다. 또 '民族總力의 集結統一과 獨立完成', '民主主義的 秩序樹立'이 必要하다고 强調했다. 그러면서 獨立運動家 愛黨 권동진과 文壇의 巨木 벽초 洪命憙를 顧問으로 迎入했다. 권동진 顧問도 오세창 社長과 마찬가지로 民族代表 33人 中 1名이다. 獨立萬歲運動 當時 日本 警察에 逮捕돼 3年 刑을 宣告받고 西大門 刑務所에서 獄苦를 치렀고 新幹會를 組織하는 等 抗日運動을 持續한 人物이다. [14] 서울新聞은 1946年 月刊誌 《新天地》(新天地)를 創刊한데 이어 1948年 10月엔 最初의 時事週刊誌 《週間 서울》을 創刊하기도 했다.

서울新聞은 日帝 强占期 '小說作品 懸賞募集'을 가장 먼저 施行한 歷史를 이어받아 1949年 10月 言論社 中 처음으로 短篇小說을 包含시킨 新春文藝를 導入했다. 市, 童謠, 童話 等 3個 分野 外에 小說을 包含시켜 現代의 新春文藝 骨格을 만든 것이었다. 이런 서울新聞 新春文藝의 歷史는 只今껏 이어져 小說家 韓江·편혜영·하성란, 是認 나태주 等 스타 作家의 登龍門이 됐다.

6·25 戰爭 當時 戰鬪 모습. 韓國國家記錄원

그러나 光復의 기쁨도 暫時, 韓半島는 1950年 6月 25日 日曜日 새벽 4時 北韓軍의 全面的인 奇襲 攻擊으로 戰爭의 慘禍에 빠지게 된다. 이 때 서울新聞은 박종화 社長과 主筆 兼 專務 오종식, 編輯局長 禹昇圭 等 幹部陣을 비롯해 編輯局 記者 全員이 出勤해 非常製作 體制로 轉換했다. 急迫한 戰時 狀況에 26日 午後 2時까지 無慮 6次例의 號外를 찍었고, 27日엔 5次例의 號外를 더 찍어냈다.

다른 中央紙들이 會社 門을 닫거나 避難한 時間帶인 27日 午後 9時까지도 社長과 主筆, 編輯局長을 비롯한 記者, 工務局 要員 20餘名은 會社에 남았다. 이 때 國防部 政訓國葬 이선근이 서울新聞으로 와 유엔軍 參戰 事實을 알리는 號外 10萬張을 要請했다. 이렇게 해서 12番째 號外를 찍은 뒤 職員들이 會社를 나간 時點은 28日 새벽 2時 30分. 이 때는 이미 漢江다리가 爆破돼 끊긴 時點으로, 그들은 結局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들 中 8名은 목숨을 잃거나 拉北되는 等 큰 犧牲을 치렀다.

지프로 避身하던 박종화 社長의 祕書 이승로가 北韓軍 銃彈에 목숨을 잃고 理事 金京鎭, 出版局長 김진섭, 編輯部局長 박종수, 社會部長 이종석 等이 拉北됐다. 社會部 記者 한규호는 取材 中 殉職했다. 한규호는 軍部隊와 함께 活動하며 北韓軍이 我軍으로 僞裝한 事實과 臨津江 戰線의 敵軍이 2個 師團 以上의 大規模 兵力이라는 點 等 생생한 戰場 消息을 27日子 號外에 실었다. 그러나 國軍의 後退로 28日 서울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退路가 막혔다. 號外 發行으로 北韓軍의 標的이 된 그는 北韓 內務署 要員에 逮捕됐고 以後 被殺됐다. [15]

1950年 9月 유엔軍의 仁川上陸作戰으로 서울을 收復한 뒤 '收復新聞'을 냈고, 中共軍의 參戰으로 이듬해 1·4 後退 뒤 釜山에서 新聞을 發行하기도 했다. 1951年 4月엔 砲聲이 울리는 서울에 돌아와 19日間 '陣中新聞'을 發行한 歷史도 있다. 政府도 8月에야 서울로 復歸할 程度로 嚴重한 狀況이었지만, 最大 3萬部까지 賣盡시키는 等 戰時 狀況에서 國民들의 民心을 안정시키는데 큰 役割을 했다는 評價를 받았다. [16]

1956年 10月 18日엔 '한글版 서울新聞'이 나왔다. 漢文을 爲主로 했던 新聞 歷史에서 一大 事件으로 記錄된다. 외솔 崔鉉培 等 한글學者들의 支持와 聲援이 이어졌다. 이 때 括弧 안에 漢字를 넣는 新聞 表記法이 처음 만들어졌다. [17]

光化門 李舜臣 將軍 銅像. 서울市 消防災難本部

서울新聞은 國家 랜드마크가 된 '李舜臣 將軍 銅像 建立事業'과 '普信閣鐘 主潮事業' 等 各種 文化事業도 벌였다. 1960年代만 해도 서울 光化門 廣場이 들어선 世宗路엔 아무런 造形物이 없었다. 1966年엔 美術大 學生들이 만든 石膏像이 놓여져 있었지만, 毁損될 可能性이 높아 國家 位相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造形物이 必要하다는 意見이 擡頭됐다.

이에 서울新聞은 '愛國先烈 祖上建立委員會'를 發足하고 募金活動을 벌여 1968年 4月 27日 忠武公 李舜臣 銅像을 建立하기 이른다. 各界 人士 設問調査와 製作에 無慮 2年이 所要됐다. 마찬가지로 國民誠金 募金活動을 통해 몸통에 금이 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移轉된 普信閣鐘 代身 새 種을 주조, 1985年 普信閣에 걸게 됐다. 이 것이 每年 '除夜의 鐘'으로 利用되는 鐘이다. [18]

夕刊이었던 서울新聞은 1980年 朝刊으로 바뀌었다. 1981年 國內 最初의 演藝 週刊誌 《TV 가이드》를 發刊했다. 現在 수많은 媒體로 擴大된 演藝專門誌의 始初다. 1984年엔 不毛地로 통했던 藝術 分野의 專門 批評을 活性化하기 위해 《藝術과 批評》을 創刊했다.

서울新聞 콘텐츠本部

1985年 1月 1日 韓國 新聞 歷史上 가장 革新的인 事件이 일어난다. 서울신문이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로 新聞을 찍어낸 것이다. 當時까지 新聞은 活字를 利用해 一一이 文字를 만들어 製作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컴퓨터를 活用한 製作시스템으로 改編하자 製作時間이 1時間이나 短縮됐다. 記事와 廣告의 製作이 簡便해졌고 高速 印刷가 可能해졌다. 100年 韓國 新聞社에서 처음 바뀐 製作시스템이었다. [19] 서울新聞은 1985年 4月 現在의 光化門 社屋인 世宗大路의 서울新聞·프레스센터 社屋으로 移轉한다.

1985年 6月 첫 스포츠新聞人 《스포츠서울》이 創刊됐다. CTS와 마찬가지로 100年 歷史上 처음으로 革新的인 '가로쓰기'가 導入됐다. 1面 컬러 印刷와 프로野球 스코어 亂刀 過去엔 보지 못 했던 새로운 方式의 接近이었다. 各種 新聞과 放送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印刷된 스포츠서울 創刊號는 70萬部가 30分 만에 賣盡되는 眞記錄을 남겼다. [20]

民主化 以後의 서울新聞(第4期) [ 編輯 ]

서울新聞은 5世代 CTS로 製作시스템을 强化하고 1995年 11月 ‘서울新聞?스포츠서울뉴스넷’을 出帆시켰다. 이는 言論界에서 劃期的인 變化로 注目받았는데, 처음으로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供給하는 시스템을 갖췄다는데서 意味가 있다. 24時間 뉴스 供給을 위해 無停電 시스템도 갖췄다. 이 시스템은 出帆 直後부터 하루 20萬 건 以上의 照會數를 記錄하며 큰 人氣를 끌었다. 1993年엔 記者 1人 1PC를 普及하며 言論 無限競爭 時代에 對應했다.

서울 瑞草區 湖畔그룹 湖畔파크

1998年 서울신문사는 名稱을 大韓每日申報社로, 題號를 《서울新聞》에서 《대한매일》로 바꾸는 變革을 試圖한다. 대한매일은 總督府 機關紙였던 《每日申報》의 指令을 빼고 《大韓每日申報》와 《서울新聞》의 指令만 繼承했다. 그 根據로 日帝의 大韓每日申報 强奪이 源泉 無效라는 點, 大韓每日申報의 精神을 繼承한다는 點 等을 들었다. [21] 그러나 2004年 讀者에게 친숙한 名稱, 韓半島의 權威있는 新聞으로의 復歸를 宣言하며 《서울新聞》 題號를 復元했다. 2018年 7月부터는 土曜日子 新聞을 發行하지 않는다. 週 5日 發行은 綜合日刊紙 中 첫 試圖였다.

2018年 호반건설은 포스코그룹 持分을 引受하며 우리社株組合, 企劃財政部에 이어 3大 株主로 올라섰다. 2021年에는 우리社株組合의 持分을 引受하며, 湖畔그룹이 서울新聞 持分의 折半 假量, 議決權의 折半 以上을 單獨으로 保有하게 됐다. 湖畔그룹은 持株社 서울미디어홀딩스를 통해 서울신문과 EBN 等의 媒體를 子會社로 둔 미디어그룹이 됐다.

서울신문사는 每年 最優秀 矯正公務員을 뽑는 矯正對象과 優秀 靑年農民을 뽑는 農漁村靑少年對象을 進行하고 있다. 그 밖에 가을밤 音樂會, 新春文藝 , 서울新聞 마라톤大會 等 다양한 社會 事業도 施行하고 있다. [22]

姊妹 言論 歷史 [ 編輯 ]

서울신문사는 1946年 1月 15日 綜合雜誌 《新天地(新天地)》를 創刊했고,이후 演藝娛樂週刊誌 《선데이 서울》(1968.9.22), 《少年서울》(1970.4.22), 《서울評論》(1973.11.4) ,《主幹스포츠》(1975.3.30), 等의 雜誌들을 發行하다가 모두 廢刊했다. 演藝 週刊誌 《TV가이드》(1981.7.18), 女性月刊誌 《퀸(Queen)》(1990.7.22), 時事週刊誌 《뉴스피플(NewsPeople)》(1992.1.12), 스포츠演藝專門誌《스포츠서울》(1985.6.22)을 創刊했다. 2008年에는 온라인 專門 뉴스컨텐츠 《나우뉴스》, 演藝 專門媒體 《서울新聞NTN》을 創設했고, 2009年 10月에는 서울新聞STV 個國으로 放送事業에 進出했다. 以後 스포츠서울, 서울新聞 STV는 噴射했고 서울新聞 NTN은 廢刊 뒤 《서울En》으로 情報가 移轉됐다.

지면 [ 編輯 ]

  • 週 5日 平日 新聞을 發行한다.
  • 2018年 7月부터는 土曜日子 新聞을 發行하지 않는다. 週52時間 勞動時間 短縮에 對應하기 위해 國內 綜合日刊紙 中 最初로 週 5日 發行을 하게 됐다.

參考 出處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서울新聞 100年史 174쪽 參照. 서울新聞社
  2. 梁起鐸은 漢城 外國語 學校에서 英語를 배웠고, 日本으로 留學해 英語, 日語, 漢文 等 다양한 言語에 能通했다. 서울新聞 100年史 176쪽 參照. 서울新聞社
  3. 서울新聞 100年史 173쪽 參照. 서울新聞社
  4. 서울新聞 100年史 177쪽 參照. 서울新聞社
  5. 서울新聞 100年史 185쪽 參照. 서울新聞社
  6. 出處서울新聞 100年史 188~191쪽 參照. 서울新聞社
  7. 高宗의 密書는 日本의 執拗한 妨害에도 英國 베이징 駐在 英國 公使 섀토우에게 傳達됐으나, 以後 政府까지 傳達되진 못 했다. 다만 이 內容이 海外 여러 新聞에 실리면서 日帝의 侵略 政策은 큰 損傷을 입게 됐다. 서울新聞 100年史 192~196쪽 參照. 서울新聞社
  8. 서울新聞 100年史 196~206쪽 參照. 서울新聞社
  9. 서울新聞 100年史 265쪽 參照. 서울新聞社
  10. 1910年 8月 30日子 每日申報 첫 號는 韓日合邦 事由를 國民에게 알리는 純宗 皇帝 詔勅과 勅諭를 1面으로 報道했다. 서울新聞 100年史 267쪽 參照. 서울新聞社
  11. 이脚硬은 過去 最初 女記者로 알려진 최은희(崔恩喜·1924年 조선일보 入社)보다 4年 앞서 採用된 最初의 女記者다. 서울新聞 100年史 273쪽 參照. 서울新聞社
  12. 서울新聞 100年史 280~281쪽 參照. 서울新聞社
  13. 서울新聞 100年史 292~298쪽 參照. 서울新聞社
  14. 서울新聞 100年史 305쪽 參照. 서울新聞社
  15. 서울新聞 100年史 354~358쪽 參照. 서울新聞社
  16. 그 무렵 서울에는 市場과 警察 300餘名만 있었을 뿐 13萬名의 市民들은 大部分 漢江 以南에 있었을 程度로 人跡이 드문 時期였다고 한다. 진중신問議 民心安定 功勞로 1951年 6月 25日엔 정일권 陸軍參謀總長이 서울신문사에 感謝狀을 보내기도 했다. 서울新聞 100年史 364쪽 參照. 서울新聞社
  17. 當時 한글新聞 發行은 큰 革新이기도 했지만 한便으로는 어려움도 많았다. 只今과 달리 當時엔 한글新聞을 生疏하게 여기거나 外面하는 讀者가 많았고, 結局 發行 3年 만에 學生들을 위한 別途의 新聞으로 바뀌었다. 서울新聞은 1968年에 들어 다시 한글新聞 開拓에 나선다. 서울新聞 100年史 379~381쪽. 서울新聞社
  18. 서울新聞 100年史 413쪽 參照. 서울新聞社
  19. 서울新聞 100年史 444~446쪽 參照. 서울新聞社
  20. 서울新聞 100年史 449쪽 參照. 서울新聞社
  21. 서울新聞 100年史 480~535쪽 參照. 서울新聞社
  22. 서울新聞 홈페이지 參照

外部 링크 [ 編輯 ]